2022. 9. 13. 21:28ㆍ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포저집 제30권 / 제문(祭文) 28수(二十八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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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화순(趙和順) 시중(時中) 에 대한 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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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우리 숙부는 나를 버리고 떠나셨나요. 조카인 나는 호우(湖右)에 있다가 숙부의 서거 소식을 듣고는 경악하며 비통한 나머지 북쪽 하늘을 향해 부르짖으며 호곡(號哭)하노라니 간담이 찢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번거로운 관청의 업무에 매인 몸이라서 즉시 달려와 곡(哭)을 하지도 못하다가 지금 달포가 지나서야 비로소 급히 찾아와서 감히 한마디 말로 영결을 고하려고 합니다.
아, 우리 집안은 평시에 낙양(洛陽)의 동중(洞中)에 모여 살았는데, 여러 종부(從父)와 종숙부(從叔父)들이 매우 많았으므로 동중의 사람들이 성족(盛族)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엄군(嚴君 부친 )이 가장 맏이이셨고 숙부가 가장 어렸던 까닭에, 숙부가 나보다 단지 4년 연상이었으므로 어린아이 때부터 함께 거하고 한집안에서 자라면서 마치 형제처럼 지냈으며, 점차 성장하는 동안에도 서로 따르며 서로 아껴 준 것이 친척 중에 특히 더하였습니다.
대개 우리 숙부는 자애롭고 선량하고 올곧고 정결하였으며 욕심이 적고 담박한 위에 의논이 정대하였으며 고금(古今)의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으니, 실로 선인(善人)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숙부를 아는 자로 조카인 나만 한 이가 없었고, 숙부 역시 우둔한 나에게도 취할 만한 점이 있다고 인정해 주었으니, 가령 붕우로 지냈다 하더라도 마음을 알아주는 붕우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데다가 성장해서도 서로 알아주고 아껴 주면서 함께 백발이 되었다가 지금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으니, 나의 비통한 심정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아, 슬플 따름입니다.
숙부는 단량(端良)하고 염담(恬淡)하였으니, 실로 높은 경지를 지닌 선사(善士)였습니다. 그런데 만년에 이르러서는 생활이 너무도 곤궁해서 그야말로 사람 중에서 가장 참혹했다고 할 만하였습니다. 하늘이 명(命)을 내려 주면서 어쩌면 한결같이 이토록 치우치게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플 따름입니다.
조카인 나와 숙부의 나이가 모두 육십을 넘겼는데, 다른 숙부들과 종숙부들은 모두 이미 세상을 떠나고 유독 숙부만이 남아 계셨으니, 나의 마음에 어찌 하루라도 떨어져 있고 싶었겠습니까. 단지 어지러운 세상이 아직 안정되지 않아 입에 풀칠하기도 참으로 어려운 상황이라서 호우(湖右)에 그대로 머무른 채 벌써 5년이 되도록 고향 산천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비록 떨어져 있어도 끝내는 북쪽으로 돌아갈 것이요, 그리하여 죽음을 맞게 될 때쯤에는 반드시 숙부와 함께 지내면서 어울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항상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숙부의 골상(骨相)으로 보더라도 응당 오래 사실 것이라고 항상 여겨 왔는데, 이와 같이 크게 잘못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내가 뒷날 돌아간다 하더라도 외톨이 신세가 된 무료(無聊)한 심정이 또 어떻겠습니까. 숙부에 대한 가슴 아픈 느낌만 더욱 한없이 들 것입니다. 아, 쓰라린 이 심정을 어떻게 말로 다하겠습니까.
나는 요즈음 정신과 근력이 쇠하는 정도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달마다 다르고 계절마다 같지 않은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머무는 기간이 앞으로 얼마나 되겠습니까. 내가 죽고 나면 조상의 선영(先塋)으로 응당 가게 될 것이니, 이승과 저승으로 헤어져 있는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끝이 나고 숙부의 혼백을 따라 천추토록 서로 어울려 노닐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슬퍼하는 것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요, 슬퍼하지 않는 시간이 앞으로 길이 이어질 것입니다. 아, 말은 다함이 있어도 이 심정은 다할 수가 없습니다. 숙부도 나의 이 말을 듣고서 내가 슬퍼하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아니면 알지 못하십니까. 한마디 말로 영결을 고하려니 고금의 일이 망연하기만 합니다. 아, 슬플 따름입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6
祭趙和順 時中 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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嗚呼。吾叔其捨我而去耶。姪在湖右。聞叔之逝。驚愕痛苦。北向呼號。肝膽如裂。而牽於宂故。不能卽奔走來哭。今至月餘。始克馳來。敢一言以訣耳。嗚呼。吾家平時在洛陽洞中。諸從父,諸從叔父頗衆。洞人謂之盛族。而吾嚴君爲最長。叔爲最少。以是。叔長吾四歲。兒時同處。相長於一家。有若同生。而長來相從相愛。於親戚中尤然。蓋叔慈良介潔。寡欲恬靜。議論平正。又能知古今。實是善人也。知叔者莫如姪也。而叔亦知鈍愚有可取者。雖在朋友。亦可謂知心之友也。幼而相長。長而相知相愛。以俱至白首。今而失之。其傷
痛爲如何哉。嗚呼。叔之端良恬淡。實是高人之善士。而晩年窮困之甚。乃最酷於人。天之賦命。一何奇偏之至此哉。痛哉痛哉。姪與叔俱過六十矣。諸叔父,從叔父皆已零落。唯獨叔在矣。其心豈欲一日相離也。惟以世亂未定。糊口良艱。滯在湖右。而不得歸故山。今五歲矣。常謂今雖離闊。終當北歸。至於垂死之年。必得合處而相從也。又常謂叔骨法宜久壽。豈知其大謬如是哉。異日得歸。其踽踽無聊爲如何。而傷感益無窮矣。苦哉苦哉。姪近覺精神筋力衰落日甚。似月異而時不同矣。在世能復幾何。死當從先祖之兆。
計幽明之隔。亦不幾時。而魂魄當相從於千秋矣。其悲者亦不久。而不悲者長也。嗚呼。言有盡而情不可盡也。叔其亦聞此而知其悲也耶。抑不知也耶。一言告訣。茫然今古。嗚呼哀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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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서 > 매산집 > 매산집 제14권 > 서 > 최종정보
매산집 제14권 / 서(書)
조원칠 두순 에게 보냄 기해년(1839, 헌종5) 4월〔與趙元七 斗淳○己亥四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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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들어 아뢸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소련(少連)과 대련(大連)은 해주(海州) 사람으로 이분들이 이른바 ‘동이족(東夷族)의 자식’입니다. 예에 통달했다고 하여 공자(孔子)와 주자(朱子) 두 부자에게 칭찬을 받아 이 내용이 《논어(論語)》와 《예기(禮記)》에 등재되었고, 또 《소학(小學)》에 올라서 찬란히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빛이 되었으나, 아직도 표창하지 못하고 매몰되도록 내버려 두고 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습니까.
해주(海州) 동문 밖에 세상에서 전해 오는 유허가 있는데, 북쪽에는 두 돈대가 있고 남쪽에는 두 섬이 있어서 난형난제(難兄難弟)의 아름다움과 짝을 이루고 있다고 하니 이것만으로도 이미 기이합니다. 게다가 그 위치가 청성묘(淸聖廟)와 인접해 있어서 장차 두 그루 소나무와 함께 아름다운 이름을 떨칠 만하니 이 일이 또한 우연치 않습니다. 시급히 그 실제의 자취를 조사하여 은미한 것을 드러내고 숨겨진 것을 밝혀서 영원히 후세에 전하기를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크게는 사당을 세우고 작게는 비석을 세우는 일도 모두 불가할 것이 없으니, 마땅한 형편을 살펴서 조처하시기를 바랍니다.
회옹(晦翁 주희(朱熹))이 남강(南康)의 자사가 되었을 적에 도율리(陶栗里 도연명(陶淵明))가 살던 곳과 유서간(劉西澗 유한(劉漢))의 묘소와 웅효자(熊孝子 웅인첨(熊仁瞻))의 문려(門閭)를 찾아서 정표(旌表)하였던 것은 바로 세교를 장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더구나 소련과 대련이 성취한 바가 우뚝하여 세 분이 비견할 수 있는 바가 아님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주-D001] 소련(少連)과 대련(大連) :
부모상을 잘 치러 명성이 높은 형제로, 《예기》 〈잡기 하(雜記下)〉에 “소련과 대련이 거상(居喪)을 잘하여 3일을 태만하지 않았으며 3개월 동안 게으르지 않았으며 1년을 슬퍼하였으며 3년을 근심하였으니, 동이족(東夷族)의 자식이다.[少連大連善居喪, 三日不怠, 三月不解, 期悲哀, 三年憂, 東夷之子也.]”라고 보인다.
[주-D002] 청성묘(淸聖廟) :
은(殷)나라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한 사당으로 해주(海州)에 있다. 사당 뒤에 소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고 한다.
기언 제47권 속집 / 사방(四方) 1
위정(爲政)의 고증(考證)을 관동(關東)으로 부임하는 조 관찰사(趙觀察使)에게 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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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찍이 좌천되어 척주(陟州 삼척(三陟))를 맡았는데, 본주는 대령(大嶺) 동쪽의 바닷가 궁벽한 곳에 위치하여 동성(東省)으로부터 400리 떨어져 있다. 재차 동성에 이르러 약속(約束)을 들었는데, 한 번은 남교(嵐嶠)와 미수(彌首)를 경유하였고, 한 번은 살내(薩奈), 건의(巾衣), 영월(寧越)을 경유하였다. 영월의 노릉(魯陵 단종(端宗)의 능)을 물었는데, 산협(山峽)이 막히고 깊었으니, 옛날 예맥(獩貊)의 땅이다.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에 이르는데 동서의 길이가 500리이고 남북의 길이가 1000리이다. 옛날의 풍속이 효제(孝悌)와 화목, 우애를 숭상하고 혼인에 예의가 있었다. 강릉(江陵), 수춘(壽春 춘천(春川)), 태원(太原 원주(原州))이 가장 큰 도회지인데 물화(物貨)를 유통하고 저축을 잘하여 사는 백성들이 부유하였다. 그 외에 영(嶺) 아래의 여러 읍은 산이 높고 일찍 추워져서 오곡이 자라지 않아 메밀과 보리를 먹는다. 그 밖의 지역은 동해 가에 있는데 모두 사해(沙海)로서 실로 해가 뜨는 곳이다. 바닷가에는 소나무가 울창한 큰 숲이 많고, 그 풍속은 고기 잡고 소금 굽는 이끗을 좇아서 경작(耕作)에 힘쓰지 않아 생계가 지극히 빈궁하다. 산골짜기 안의 취락(聚落)은 매우 먼데 기달(怾怛), 오대(五臺), 설악(雪岳), 두타(頭陀), 태백(太白)은 800리에 걸쳐 안개가 끼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것은 옥(玉), 목재, 감목(甘木), 삼(蔘), 복령(茯苓) 등 여러 가지 약물(藥物)이다. 관부의 다스림은 기교와 음란, 사치를 금하지 않고 시속을 따라서 다스려서 순후하고 질박하여 장수하는 자가 많으며, 부중(府中)에는 일이 없다.
금상(今上) 원년(1675, 숙종1)에 대부 조공(趙公 조성(趙䃏))이 밀직(密直)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관동 관찰사가 되었다. 그가 떠날 때에 산천, 풍속, 민물(民物), 고사(古事)를 서술해서 선사하여 위정의 고증으로 삼게 하니, 도합 200여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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