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6. 10:11ㆍ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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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강록(渡江錄) / 도강록(渡江錄) 6월 24일 신미(辛未)에 시작하여 7월 9일 을유(乙酉)에 그쳤다.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요양(遼陽)에 이르기까지 15일이 걸렸다.
28일 을해(乙亥)
때마침 봉황성을 새로 쌓는데 어떤 사람이,
“이 성이 곧 안시성(安市城)이다.”
라고 한다. 고구려의 옛 방언에 큰 새를 ‘안시(安市)’라 하니, 지금도 우리 시골말에 봉황(鳳凰)을 ‘황새’라 하고 사(蛇)를 ‘배암(白巖)’이라 함을 보아서,
“수(隋)ㆍ당(唐) 때에 이 나라 말을 좇아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사성(蛇城)을 백암성(白巖城)으로 고쳤다.”
는 전설이 자못 그럴싸하기도 하다. 또 옛날부터 전하는 말에,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이 당 태종(唐太宗)의 눈을 쏘아 맞히매, 태종이 성 아래서 군사를 집합시켜 시위(示威)하고, 양만춘에게 비단 백 필을 하사하여, 그가 제 임금을 위하여 성을 굳게 지킴을 가상(嘉賞)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연경에 가는 그 아우 노가재(老稼齋) 창업(昌業)에게 보낸 시(詩)에,
천추에 크신 담략 우리의 양만춘님 / 千秋大膽楊萬春
용 수염 범 눈동자 한 살에 떨어졌네 / 箭射虬髯落眸子
라 하였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에는,
주머니 속 미물이라 하잘것이 없다더니 / 爲是囊中一物爾
검은 꽃이 흰 날개에 떨어질 줄 어이 알랴 / 那知玄花落白羽
라 하였으니, ‘검은 꽃’은 눈을 말함이요, ‘흰 날개’는 화살을 말함이다. 이 두 노인이 읊은 시는 반드시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리라. 대개 당 태종이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여 이 하찮은 탄알만 한 작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창황히 군사를 돌이켰다 함은 그 사실에 의심되는 바 없지 않거늘, 김부식(金富軾)은 다만 옛 글에 그의 성명이 전하지 않음을 애석히 여겼을 뿐이다. 대개 부식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을 때에 다만 중국의 사서에서 한번 골라 베껴 내어 모든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였고, 또 유공권(柳公權 당의 학자요 서예가)의 소설(小說)을 끌어 와서 당 태종이 포위되었던 사실을 입증까지 했다. 그러나 《당서(唐書)》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도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이는 아마 그들이 중국의 수치를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우리 본토에서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실을 단 한 마디도 감히 쓰지 못했으니, 그 사실이 미더운 것이건 아니건 간에 모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었는지 않았는지는 상고할 길이 없으나, 대체로 이 성을 ‘안시’라 함은 잘못이라고 한다. 《당서》에 보면, 안시성은 평양서 거리가 5백 리요,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王儉城)이라 한다 하였으므로, 《지지(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 하기도 한다 하였으니, 이는 무엇을 이름인지 모르겠다. 또 《지지》에,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蓋平縣 봉천부(奉天府)에 있다)의 동북 70리에 있다 하였으니, 대개 개평현에서 동으로 수암하(秀巖河)까지가 3백 리, 수암하에서 다시 동으로 2백 리를 가면 봉황성이다. 만일 이 성을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5백 리란 말과 서로 부합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 평양만 알므로 기자(箕子)가 평양에 도읍했다 하면 이를 믿고,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 하면 이를 믿으며, 평양에 기자묘(箕子墓)가 있다 하면 이를 믿어서, 만일 봉황성이 곧 평양이다 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구나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 하면, 이는 해괴한 말이라 하고 나무랄 것이다. 그들은 아직 요동이 본시 조선의 땅이며, 숙신(肅愼)ㆍ예(穢)ㆍ맥(貊) 등 동이(東彝)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衛滿)의 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또 오라(烏剌)ㆍ영고탑(寧古塔)ㆍ후춘(後春) 등지가 본시 고구려의 옛 땅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아, 후세 선비들이 이러한 경계를 밝히지 않고 함부로 한 사군(漢四郡)을 죄다 압록강 이쪽에다 몰아 넣어서, 억지로 사실을 이끌어다 구구히 분배(分排)하고 다시 패수(浿水)를 그 속에서 찾되,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淸川江)을 ‘패수’라 하며, 혹은 대동강(大同江)을 ‘패수’라 한다. 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 이는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 곳에 정해 놓고 패수 위치의 앞으로 나감과 뒤로 물리는 것은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르는 까닭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의 땅은 요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여진(女眞)에까지 들어간 것이라고 했다. 무엇으로 그런 줄 아느냐 하면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현도(玄菟)나 낙랑(樂浪)은 있으나, 진번(眞蕃)과 임둔(臨芚)은 보이지 않는다.
대체 한 소제(漢昭帝)의 시원(始元) 5년(B.C. 82)에 사군을 합하여 2부(府)로 하고, 원봉(元鳳) 원년(B.C. 76)에 다시 2부를 2군(郡)으로 고쳤다. 현도 세 고을 중에 고구려현(高句麗縣)이 있고, 낙랑스물다섯 고을 중에 조선현(朝鮮縣)이 있으며, 요동 열여덟 고을 중에 안시현(安市縣)이 있다. 다만 진번은 장안(長安)에서 7천 리, 임둔은 장안에서 6천 1백 리에 있다. 이는 김윤(金崙 조선 세조(世祖) 때의 학자)의 이른바,
“우리나라 지경 안에서 이 고을들은 찾을 수 없으니, 틀림없이 지금 영고탑(寧古塔) 등지에 있었을 것이다.”
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이로 본다면 진번ㆍ임둔은 한말(漢末)에 바로 부여(扶餘)ㆍ읍루(挹婁)ㆍ옥저(沃沮)에 들어간 것이니, 부여는 다섯이고 옥저는 넷이던 것이 혹 변하여 물길(勿吉)이 되고, 혹 변하여 말갈(靺鞨)이 되며, 혹 변하여 발해(渤海)가 되고, 혹 변하여 여진(女眞)으로 된 것이다. 발해의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가 일본(日本)의 성무왕(聖武王)에게 보낸 글월 중에,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옛풍속을 물려받았다.”
하였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한사군의 절반은 요동에, 절반은 여진에 걸쳐 있어서, 서로 포괄되어 있었으니, 이것이 본디 우리 강토 안에 있었음은 더욱 명확하다.
그런데 한대(漢代) 이후로, 중국에서 말하는 패수가 어딘지 일정하지 못하고, 또 우리나라 선비들은 반드시 지금의 평양으로 표준을 삼아서 이러쿵저러쿵 패수의 자리를 찾는다. 이는 다름 아니라 옛날 중국 사람들은 무릇 요동 이쪽의 강을 죄다 ‘패수’라 하였으므로, 그 이수가 서로 맞지 않아 사실이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조선과 고구려의 지경을 알려면, 먼저 여진을 우리 국경 안으로 치고, 다음에는 패수를 요동에 가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패수가 일정해져야만 강역이 밝혀지고, 강역이 밝혀져야만 고금의 사실이 부합될 것이다. 그렇다면 봉황성을 틀림없는 평양이라 할 수 있을까. 이곳이 만일 기씨(箕氏)ㆍ위씨(衛氏)ㆍ고씨(高氏) 등이 도읍한 곳이라면, 이 역시 하나의 평양이리라 하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당서》 배구전(裴矩傳)에,
“고려는 본시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가 여기에 기자를 봉하였더니, 한(漢)에 이르러서 사군으로 나누었다.”
하였으니, 그 이른바 고죽국이란 지금 영평부(永平府)에 있으며, 또 광녕현(廣寧縣)에는 전에 기자묘(箕子墓)가 있어서 우관(冔冠 은(殷)의 갓 이름)을 쓴 소상(塑像)을 앉혔더니, 명(明)의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때 병화(兵火)에 불탔다 하며, 광녕현을 어떤 이들은 ‘평양’이라 부르며, 《금사(金史)》와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광녕ㆍ함평(咸平)은 모두 기자의 봉지(封地)이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영평(永平)ㆍ광녕의 사이가 하나의 평양일 것이요, 《요사(遼史 원(元)의 탁극탁이 씀)》에,
“발해(渤海)의 현덕부(顯德府)는 본시 조선 땅으로 기자를 봉한 평양성(平壤城)이던 것을, 요(遼)가 발해를 쳐부수고 ‘동경(東京)’이라 고쳤으니 이는 곧 지금의 요양현(遼陽縣)이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요양현도 또한 하나의 평양일 것이다. 나는,
“기씨(箕氏)가 애초에 영평ㆍ광녕의 사이에 있다가 나중에 연(燕)의 장군 진개(秦開)에게 쫓기어 땅 2천 리를 잃고 차츰 동쪽으로 옮아가니, 이는 마치 중국의 진(晉)ㆍ송(宋)이 남으로 옮겨감과 같았다. 그리하여 머무는 곳마다 평양이라 하였으니, 지금 우리 대동강 기슭에 있는 평양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 패수도 역시 이와 같다. 고구려의 지경이 때로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였을 터인즉, ‘패수’란 이름도 따라 옮김이 마치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때에 주(州)ㆍ군(郡)의 이름이 서로 바뀜과 같다. 그런데 지금 평양을 평양이라 하는 이는 대동강을 가리켜, “이 물은 ‘패수’다.” 하며, 평양과 함경(咸鏡)의 사이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이다.” 하며, 요양으로 평양을 삼는 이는 헌우낙수(蓒芋濼水)를 가리켜, “이 물은 ‘패수’다.” 하고, 개평현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이다.” 한다. 그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지금 대동강을 ‘패수’라 하는 이는 자기네 강토를 스스로 줄여서 말함이다.
당(唐)의 의봉(儀鳳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 2년(677)에 고구려의 항복한 임금 고장(高藏)고구려 보장왕(寶藏王) 을 요동주(遼東州)도독(都督)으로 삼고, 조선왕(朝鮮王)을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며, 곧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에 옮겨서 이를 통할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고씨(高氏)의 강토가 요동에 있던 것을 당이 비록 정복하기는 했으나 이를 지니지 못하고 고씨에게 도로 돌려주었은즉, 평양은 본시 요동에 있었거나 혹은 이곳에다 잠시 빌려 씀으로 말미암아 패수와 함께 수시로 들쭉날쭉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의 낙랑군 관아(官衙)가 평양에 있었다 하나 이는 지금의 평양이 아니요, 곧 요동의 평양을 말함이다. 그 뒤 승국(勝國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는, 요동과 발해의 일경(一境)이 모두 거란(契丹)에 들어갔으나, 겨우 자비령(慈悲嶺)과 철령(鐵嶺)의 경계를 삼가 지켜 선춘령(先春嶺)과 압록강마저 버리고도 돌보지 않으니, 하물며 그 밖에야 한 발자국인들 돌아보았겠는가. 고려는 비록 안으로 삼국(三國)을 합병하였으나, 그의 강토와 무력이 고씨의 강성함에 결코 미치지 못하였는데, 후세의 옹졸한 선비들이 부질없이 평양의 옛 이름을 그리워하여 다만 중국의 사전(史傳)만을 믿고 흥미진진하게 수ㆍ당의 구적(舊蹟)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패수요, 이것은 평양이오.”
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벌써 말할 수 없이 사실과 어긋났으니, 이 성이 안시성인지 또는 봉황성인지를 어떻게 분간할 수 있겠는가.
성의 둘레는 3리에 지나지 않으나 벽돌로 수십 겹을 쌓았다. 그 제도가 웅장하고 화려하며, 네 모서리가 반듯하여 네모 말[斗]을 놓아둔 것처럼 보인다. 지금 겨우 반쯤밖에 쌓지 않아서 그 높낮이는 비록 예측할 수 없으나, 성문 위 다락 세울 곳에 구름다리를 놓아 허공에 높이 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 공사는 비록 거창스러운 듯하나 여러 가지 기계가 편리하여 벽돌을 나르고 흙을 실어 오고 하는 것이 모두 기계가 움직이고 수레바퀴가 굴러 혹은 위로부터 끌어올리기도 하며 혹은 저절로 가기도 하여 그 법이 일정하지 않으나, 모두 일은 간단하되 공로는 배나 되는 기술이다. 그 어느 하나 본받지 않을 것이 없으나, 다만 길이 바빠서 골고루 구경할 겨를이 없었을 뿐더러, 설사 진종일 두고 자세히 본다 하더라도 갑자기 배울 수 없으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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