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둘레100리 천지.빙산.5일 등정코스 산

2022. 9. 5. 20:06백두산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7 신해 > 6월 5 > 최종정보

영조 7년 신해(1731) 6 5(병신) 흐림

 

이종성이 아뢰기를,

“백두산을 영상은 본 적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언제 보았는가? 그 산이 금강산(金剛山)보다 큰가?

하자, 홍치중이 아뢰기를,

“어찌 금강산뿐이겠습니까. 신이 계사년(1713, 숙종39)에 북평사였는데, 그때 목극등(穆克登)이 와서 지계(地界)를 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실제 가서 보니, 산 정상에 큰 못이 있었습니다. 지지(地誌)에는 둘레가 800리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는 100리 가까이 되었습니다. 정상에 둘레가 100리나 되는 물을 담고 있으니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5일 동안 줄곧 올라가서 목극등이 비를 세운 곳에 이르러 산꼭대기를 우러러보니 회현동(會賢洞)에서 남산(南山) 잠두(蠶頭)를 바라보는 듯하였고, 앞산을 굽어보니 장백산(長白山)이 발 아래 있었으며, 서쪽으로 바라보니 숲이 무성하여 자세히 알 수 없었고, 동쪽으로 바라보니 눈앞에 산봉우리가 구릉처럼 연이어져 있었습니다. 정상은 매우 추워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흰 차일막(遮日幕)을 펼쳐 놓은 듯하였습니다. 애초에는 흙색이 그러한 듯 여겼는데, 실제는 사시사철 녹지 않고 남아 있는 눈이었습니다. 신이 9월에 산에 올랐으니, 그때는 눈이 없어야 하는데도 오히려 신이 빠질 정도였습니다. 이는 바로 전에 쌓인 눈에다 새로 내린 눈이 더해진 것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송진명이 아뢰기를,

북경(北京)과 영고탑 사이에 몽고(蒙古)가 있는데, 만일 저쪽에 사변(事變)이 생겨 영고탑으로 달아나면 우리 국경에서 길을 빌리는 일이 생기기도 할 것입니다. 목극등이 왔던 것은 경계를 정하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분명 깊은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이는 깊이 염려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서북을 나누어 맡는다는 논의는 참으로 좋지만 한 사람의 당상만으로는 구관(句管)하기 어렵습니다. 한기와 부필도 재상의 지위로 나누어 맡았으니, 지금도 재상들에게 담당하게 하여 주()나라가 섬() 땅을 기준으로 동서로 나누어 다스린 것과 같이 하고, 그곳의 호걸스러운 인사(人士)를 때때로 불러 묻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