솥귀 모양의 백두산 천지

2022. 9. 5. 20:14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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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여요선 상

 

〈백두산도〉에 대한 고찰〔白頭圖本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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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지으신 〈백두산도에 제하다〉에,

 

그림만 보아도 오히려 장대하니 / 繪畫觀猶壯
산에 올라 보면 기운이 어떠하겠는가 / 登山氣若何
하늘을 누가 멀다 하였나 / 雲霄誰謂遠
별들도 손으로 만질 수 있겠네 / 星斗定應摩
산 정상에 깊고 깊은 물이 있으니 / 巓有深深水
흘러내려 성대한 강물이 되는구나 / 流爲浩浩河
전날 국경을 다투던 염려가 / 向時爭界慮
이로부터 절로 사라지겠네 / 從此自消磨

 

하였다.

 

정계할 당시 군관 이의복(李義復)의 기사에,

 

“강희(康熙) 51년 임진(1712, 숙종38) 5월에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관찰사 이선부(李善溥)가 허항령(虛項嶺)에 모여서 의논하기를 ‘두 나라가 국계(國界)를 정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런데 모두 노병(老病)이 날로 침범하여 간신히 이곳에 이르렀으나 실로 걸어가기 어려우므로 몹시 죄송스럽게도 천평(天坪)에 머물고 있습니다. 함경도 남관(南關)과 북관(北關)의 수령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보낼 만한 사람은 만호(萬戶) 이의복(李義復)과 조태상(趙台相)입니다. 늙은 신하는 비록 가지는 못하지만 이 두 관원을 보내 오라 총관 목극등을 접반하여 가서 정계를 살피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청나라 사신을 곁에서 호종하며 백산(白山) 유게소(留憩所)에 이르러 머물렀다. 해가 뜬 뒤에 바라보니 백산 앞에 금성(金星) 모양의 작은 산이 하나 있는데 속인들이 가차봉(可次峯)이라고 한다. 유게소는 낮고 습한 지역으로 나무만 있고 꽃은 없는데 길이는 겨우 몇 자이다. 간혹 샘이 있는데 마치 작은 못과 같다. 이곳을 지나자 오래된 잎갈나무와 자작나무가 빽빽하였는데 이른바 박달나무로, 사람들의 얼굴을 이리저리 쳤다. 간신히 5, 6리를 가니 중천(中川)이 있는데 이 지역 사람들은 옥류동천(玉流洞川)이라고 한다. 비로소 주토봉(朱土峯)을 보고 산을 내려와 6, 7리를 가서 목책을 설치한 곳에 도착하였다. 백산을 바라보니 서쪽 산언덕에는 눈이 녹아 산등성이가 드러나 있고, 동쪽의 골짜기는 얼룩덜룩하게 눈더미가 쌓여 있다. 숲을 뚫고 벼랑을 기어올라가 산 정상에 다다라 자세히 바라보니 백두산은 해임(亥壬 북북서) 방향을 뒤로하고 사병(巳丙 남남동) 방향을 향하여 있다. 대택(大澤)을 굽어보니 신룡이 꿈틀거리는 듯 푸른 물결이 허공을 치고 있다. 보다회산(甫多會山), 장백산(長白山) 등은 나지막하고 작아 마치 한 조각 눈썹 같다. 감계(坎癸 북북동) 방향에 있는 청나라의 산과 인갑(寅甲 동북) 방향에 있는 육진(六鎭)의 산이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토문강의 물줄기는 축인(丑寅 북동) 방향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보이는 곳은 멀리 80리까지이다. 혼동강(混同江)은 대택에서 나와 감계 방향으로 흐른다. 두 산이 벽처럼 마주하고 서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문과 같다.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을 자세히 살펴보면 앞쪽으로 네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또한 풀 한 포기 없고 하얀 모래와 검은 자갈이 뒤섞여 있다. 내명당은 길이와 너비가 거의 10리이고, 외명당은 내명당보다 100여 길 정도 조금 낮다. 사방으로 우리나라와 청나라의 지역을 둘러보니 모두 평평한 산비탈로 수백 리를 길게 이어져 있어 시야가 확 트였으며 펼쳐진 형세는 짜임새가 있다. 바위와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내려오니, 백산의 한 맥()이 평지로 나아가다가 떨어져 경태(庚兌 서남서) 방향으로 골짜기를 지나고, 다시 축(), (), () 방향으로 구불구불 나아가다 자취가 드러나 소백두산(小白頭山)이 되었다. 노전(蘆田)에 돌아와 숙박하고 20여 리를 가서 토문강 변에 도착하였다. 강물의 너비는 30여 보()는 될 만하고 흰모래가 평평하게 펼쳐져 있으며 물이 흘러간 흔적이 낭자하다. 물길을 따라 5, 6리를 가니 골짜기가 점점 깊어지고 바위도 많아졌으며 또한 흐르는 물이 있다. 다시 왼쪽 언덕 위로 올라가 4, 5리를 가니 지세가 점점 높아졌다. 북쪽으로 산을 내려오니 바로 토문강의 원류가 용출하는 곳이다. 하지만 2, 3리를 흐르다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서 30여 리를 숨어서 흐르다가 다시 솟아나 비로소 큰 내가 된다. 그 위쪽의 물이 없는 곳은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며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어 경계가 분명하다. 이곳이 바로 하늘이 내린 남쪽과 북쪽의 경계 지역이다. 분수령 골짜기는 너비가 30보쯤인데, 오른쪽은 미곤(未坤 남서) 방향으로 왼쪽은 인갑(寅甲 동북동) 방향으로 모두 경계를 이루는 골짜기가 있다. 왼쪽으로 산 아래 평지가 조금 돌출하였는데 위에 암석이 있기에 이것을 그대로 농대()로 삼았다. 청나라 사신이 이곳에서 며칠을 머무르면서 물길이 나뉜 형세를 두루 살펴본 뒤에 돌에 새겨 기록하고 농대에 의지하여 암석을 파서 세웠다. 그리고 우리들을 돌아보며 ‘너희 나라가 얻은 땅이 매우 넓구나.’ 하였다.

 

하였다.

 

안설 백두산 지도는 예전에 반드시 원본이 있었을 것이고 어제시는 실로 정계할 당시 도본(圖本)에 쓰셨을 것이다. 지금 그 온전한 지도를 비록 볼 수 없으나 오직 이의복의 기사가 당시에 직접 다니며 눈으로 본 데서 나온 것이니 또한 지도를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백두산은 우뚝 솟아 우리나라의 교악(喬嶽)이 되었다. 정북쪽에는 백암상각(白巖上角)이 있고 그 남쪽 5리쯤에 병사암(兵使巖)이 있으며, 그 남쪽 10여 리에 있는 봉우리를 도범이측지(桃凡伊側只)라고 하며, 그 서쪽으로 수십 리를 돌아가면 마천우(摩天隅)라고 하며 북쪽으로 수십 리를 돌아가면 소항(小項)이 된다. 또 동북쪽으로 수십 리를 돌아 층층이 쌓인 암석이 높이 솟아 있어 백암봉(白巖峯)과 마주하고 섰으니 둘레가 100여 리이고 가운데에는 솥귀 모양의 대택(大澤)이 있다. 又東北回數十里, 層巖高起, 與白巖對立, 周可百餘里, 中有大澤如鐺耳樣

 

북쪽으로 넘쳐흐르는 물을 천상수(天上水)라고 하는데 어제시에서 “성대한 강물이 된다.”라고 한 것이다. 병사암 앞으로 한 줄기 산기슭이 정동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지는데, 그 처음 떨어지는 곳의 1리쯤에서 은맥(隱脈)이 남쪽으로 향한 곳이 분수령으로 바로 정계비를 세운 곳이다. 계미년(1883, 고종20) 경략사의 탐계도본(探界圖本), 을유년(1885) 감계사(勘界使)의 도본, 정유년(1897, 광무1) 관찰사의 도본, 기해년(1899) 사계 파원(査界派員)의 도본 등 모두 네 건은 그때마다 모사하여 전한 것으로 각각 본 바에 근거하여 그린 것이다. 만약 변경 북쪽의 옛 강역을 새로 그린다면 토문강의 물줄기를 따라 송화강과 흑룡강이 바다로 들어가 끝나는 지역까지 우리나라와 청나라, 러시아 세 나라를 모두 담고, 사람이 살고 있는 부곡(部曲) 중에서 남쪽에 있는 곳은 따로 한 본을 만든 뒤에야 북쪽 지역의 천만 겹으로 둘러싸인 강산을 모두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감히 안설을 덧붙여서 삼가 뒷날의 고찰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