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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4년 정축(1877) 1월 30일(병술) 맑음
14-01-30[29] 만경전에서 안무사를 소견할 때 동부승지 조병필 등이 입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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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시(申時).
상이 만경전(萬慶殿)에 나아갔다. 안무사가 입시할 때, 동부승지 조병필, 가주서 이희봉, 기주관 허륜(許綸)ㆍ윤선주(尹善柱), 안무사 김유연(金有淵)이 차례로 나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이어 안무사를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니, 김유연이 앞으로 나아왔다. 상이 이르기를,
“먼 길에 잘 갔다 왔는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보살펴 주신 덕택으로 무사히 갔다 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달을 멀리 떠나 객지에서 해를 넘겼으니, 필시 견디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일에 바빠 달이 지나가는지도 몰랐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허다한 폐단을 다 바로잡고 구제하느라 노고가 많았다.”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신은 성상의 덕의(德意)를 선포했을 뿐이며 만분의 일도 대양(對揚)을 하지를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수백 명의 나머지 백성들이 다시 돌아와 매우 다행스럽다. 만약 경이 제대로 조처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겠는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국경을 넘었던 백성들이 크나큰 은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성시(成市)를 이룬 것처럼 많이 돌아왔으니, 모두 성상의 교화가 미친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기사년과 경오년에 큰 흉년을 당하여 목숨을 부지하려고 국경을 넘었다가 나라의 금령이 두려워 즉시 돌아오지를 못했던 것이니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과연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산(茂山)의 녹용을 이처럼 변통하였으니, 민폐가 견감(蠲減)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막중한 어공(御供)을 비록 부득이하여 마음대로 하였다고는 하나 지금까지도 송구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려갈 때 내 이미 면전에서 신칙을 했는데 어찌 마음대로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그다지 긴요하지 않은 변장(邊將)은 혁파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조용하고 궁벽한 곳에 나누어 설치하기 보다는 중요한 진(鎭)에 합하여 설치하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중요한 진보(鎭堡)가 몇 곳이나 되는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조산(造山), 아오지(阿吾地), 황척파(黃拓坡) 등의 보(堡)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산에 파수(把守)할 곳이 있다고 하던데, 어느 곳인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통허항(通虛項)이 요해처입니다. 산두동(山頭洞)의 국경을 넘은 무리들이 대부분 이 길을 통해 넘어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러시아[俄羅斯]가 단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고 하던데, 탐지(探知)하는 자가 있던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별로 탐지하지는 않는데 자연히 소문이 들려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들의 풍속은 어떠한가? 전쟁을 일으킬 마음은 없던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조금도 깊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통상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있는데, 그 계획이 큽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들의 모습을 혹 보았는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비록 보지는 못하였으나 눈이 깊고 콧마루가 높다고 들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라몽고(烏喇蒙古), 영길리선우(英吉利單于)가 모두 그 접경이라고 하던데, 선우라는 명칭은 지금도 있는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중국에 비해 조금 크다고 하던데 그런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길이가 4만 리나 된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사막 밖에 있는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막과 통하던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통상(通商)이 잡다한 곳이라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러시아[俄羅斯]가 전에는 어찌하여 소문이 나지 않았는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한번 혼춘(琿春) 연해(沿海)의 땅을 획급(劃給)한 뒤부터 우리의 경계와 접하게 되었는데, 도적의 무리들에게 관대하기 때문에 국경을 넘는 폐단이 많은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국(大國)의 힘으로 어찌 제재하지 못하는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신이 연전에 사신으로 갔을 때 조사(朝士)의 말을 들어보니,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그들의 강대함을 꺼린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나라에도 재상직(宰相職)이 있다고 하던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본래 재상직은 없고 이른바 관장(官長)을 통칭 거비단(居非丹)이라고 한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러시아[俄羅斯] 오랑캐들은 저렇게 강성한데 우리나라는 변방의 대비가 소홀하니 매우 개탄스럽다.”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은덕(恩德)으로 민심을 결속시키는 것이 군비(軍備)보다 낫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연강(沿江)의 깊이는 어떠한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경흥(慶興)의 경계는 비록 깊고 넓으나 경원(慶源)에서 무산(茂山)까지의 상류에는 왕왕 치마를 걷고 건널 만한 곳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떤 아뢸 만한 일이 있는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삼가 별단에 갖추어 적어 보시도록 하였으므로 별도로 아뢸 만한 일이 없습니다.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이 백두산 아래에 위치해 있는데, 녹용과 사향을 구하는 즈음에 궁하여 제대로 바치지 못하기는 무산과 같습니다. 그러나 남병영(南兵營)이 봉진(封進)하는 녹용과 사향은 전례대로 작공(作貢)하여 특별히 똑같은 혜택을 입기를 민정(民情)이 두터이 바라고 있기에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뢰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편리한 대로 하는 것이 좋으니, 전례대로 공물로 정하도록 하라.”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연교(筵敎)로 반포할까요, 거조(擧條)로 반포할까요?”
하자, 상이 이르기를,
“반포하는 것은 한가지이니, 물러간 뒤에 연설(筵說)로 반포하도록 하라.”
하고, 상이 이르기를,
“백성을 위하여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 좋으며, 또 공물로 정하는 것은 나라 재용(財用)에 손해가 없다.”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삼수와 갑산은 무산과 경계를 접하고 있으나 남북관(南北關)의 구별이 있으니, 신이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이런 크나큰 혜택을 받는다면 삼수와 갑산의 백성들도 반드시 춤추며 기뻐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별단을 보니 온성(穩城)의 차수곡(差需穀)을 구획(區劃)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 만약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거두는 지경에 이른다면 마침내는 형세상 반드시 백성들이 이산(離散)하게 될 것이다.”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만약 구획하지 않는다면 형세상 장차 금년 겨울부터 백성들에게 거두게 될 것이니, 폐단을 구제한 것이 장차 허사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수령을 가려 뽑을 때에 우직(右職)으로 천전(遷轉)하는 논의는 과연 좋다.”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지금 유민(流民)을 다시 모으고 폐단을 구제하고 있으나, 그 백성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방도는 전적으로 제대로 된 사람을 얻는 데 달려 있으니, 수령을 구임(久任)으로 가려 뽑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종성(鍾城)은 문신 당상으로 뽑아 보내고 경성(鏡城)은 당하 문신으로 차출하라. 그리고 개시(開市)와 도회(都會)를 감독하는 것은 평사(評事)가 대행하는 것이 편리하고 좋겠다.”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두 읍의 수령을 문신으로 차출한 뒤에야 이번과 같은 북청 부사(北靑府使)가 먼 길을 가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식년과(式年科)의 경우에도 꼭 도사(都事)를 뽑아 보낼 필요가 있는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대과(大科)는 다른 과거와는 다르기에 이렇게 우러러 아뢰는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도사를 보내는 것까지 아울러 폐지한다면 신중히 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 이처럼 주달한 것인 듯하나, 이 또한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대행한다면 공억(供億)의 폐단이 제거될 뿐만 아니라 백성의 힘도 펴질 것이다. 그리고 삼남(三南)에서도 도신(道臣)이 시취(試取)한 전례가 있으니, 안 될 것은 없다.”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상이 재결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령은 전에는 문신과 무신을 돌아가며 가려 뽑았는데 무슨 이유로 폐지되었는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문신은 궁벽하고 멀다는 이유로 회피하지만 무신은 그 이력을 위하여 부임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관직을 어떻게 궁벽하고 먼 곳이라 하여 회피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예목(禮木) 등의 일은 혁파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육진(六鎭)의 수령과 변장의 늠료가 지극히 박한데도 분정(分定)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구례(舊例)를 회복하여 매번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이니 폐단이 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이도(古珥島)는 크기가 얼마인가? 백성들이 개간하기를 원하는데 넓이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수백여 결이 되며 땅도 기름지고 비옥하니, 지금 경작을 허용한다면 다시 모이는 백성들이 많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최신(崔愼)과 남대임(南大任)을 기려 증직한 일도 잘하였다. 북쪽은 다른 곳과 다르니, 이런 때에 이렇게 장려하는 일은 더욱 그만둘 수 없다.”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민생의 가난이야 어느 때고 그렇지 않은 적이 있었겠는가마는, 지금 물정(物情)은 어떠하던가? 이제부터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는 방법은 노력하기에 달려 있을 뿐이다.”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두산은 올라가 보았는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험한 길이 수백여 리나 되고 산 아래에서 산 정상까지 또 백여 리나 되어 올라가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강희(康熙) 때 경계를 정한 목책(木栅)은 보았는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아직도 있는데 저쪽 무뢰배들이 정해 놓은 경계의 밖을 널리 점거하고 있어 사슴 사냥도 이로 인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혹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여 온 것이 있는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이미 별단 안에 대략 진술하였고 별도로 기록해 온 것은 없습니다. 다만 삼국의 경계를 그린 도본(圖本)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길이 매우 멀어 필시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사신 길에 비해 보면 과연 어려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째서 사신 길보다 어려운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사신 길은 도로가 평탄한 데다 믿을 수가 있는데, 이 땅은 도중에 다섯 개의 큰 준령이 있어 서울이 까마득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남북관의 큰 준령이 몇 곳이나 되는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철령(鐵嶺), 함관령(咸關嶺), 마운령(摩雲嶺), 마천령(摩天嶺)이 있는데, 이것이 나라 안에서 가장 큰 준령들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영(嶺) 위에 인가(人家)가 있는가?”
하니, 김유연이 아뢰기를,
“영 위에는 없고 영 밑에는 거주하는 백성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자리로 돌아가라.”
하고, 이어 안무사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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