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6. 10:57ㆍ대륙조선 일반
동문선 제94권 / 서(序)
동자습 서문[童子習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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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成三問)
우리나라가 바다 건너에 있어 중국과는 말이 달라 역관이 있어야 서로 통하므로, 우리 선대 임금께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겨 승문원(承文院)을 두어 이문(吏文)을 맡게 하고, 사역원(司譯院)에서는 통역을 맡아 그 일만 전념하게 하여 그 자리를 오래 두었으니, 생각이 주밀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한음(漢音)을 배우는 사람이 몇 다리를 건너서 전수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지가 이미 오래이기에 잘못된 것이 퍽 많아, 종(從)으로는 사성(四聲)의 빠르고 느림을 어지럽게 하고, 횡으로는 칠음(七音)의 맑고 흐림을 상실하였다. 게다가 중국의 학자가 옆에 있어 정정해 주는 일도 없기 때문에, 노숙한 선비나 역관으로 평생을 몸바쳐도 고루한 데 빠지고 말았다. 세종과 문종께서 이를 염려하시어 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지어내셨으니, 세상의 어떠한 소리라도 옮겨 쓰지 못할 것이 없다. 곧 《홍무정운(洪武正韻)》을 번역하여 중국의 원음으로 바로잡아 놓고 또 옳게 추리한 《동자습(童子習)》으로 역어(譯語)를 가르치게 하였으니, 실로 중국말을 배우는 문호가 되었다. 그래서 우부승지 신(臣) 신숙주ㆍ겸 승문원 교리(兼承文院校理) 신 조변안(曹變安), 예조 좌랑 김증(金曾), 사정(司正) 손수산(孫壽山)에게 명하여, 정음(正音)으로서 한어(漢語)를 번역하여 글자 밑에 작은 글씨로 쓰고 또 우리말로 그 뜻을 풀이하라 하시고, 화의군(和義君) 신 영(瓔)과 계양군(桂陽君) 신 증(璔)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시고, 동지중추원사 신 김하(金何)와, 경창부윤(慶昌府尹) 신 이변(李邊)으로 의심난 곳을 고증해서 쌍서(雙書)하게 했으니, 음과 뜻이 분명하여 마치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듯하였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책이 겨우 완성될 즈음에 세종께서 승하하시고 문종께서도 뒤따라 돌아가셨다. 우리 임금께서 자리에 오르시자마자 선대(先代)의 뜻을 좇아서 빨리 간행하도록 하라고 하셨다. 또 신 성산문 등 여러 신들은 삼가 생각하건대, 사방의 말씨가 비록 남북의 다름이 있으나, 소리가 어금니ㆍ혀ㆍ입술ㆍ가ㆍ목구멍을 통해서 나오기는 남과 북이 다를 것이 없으니, 이를 명백히 안다면 성(聲)ㆍ운(韻)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우리나라가 생긴 지 몇천 년이 지났으나, 사람들이 날마다 쓰는 말에 칠음(七音)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칠음도 모르니 청탁(淸濁)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조차 없지 않겠느냐. 중국말을 배우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책이 한 번 번역되면 칠음과 사성(四聲)이 나오는 데 따라 절로 분별이 되어, 경위가 서로 분명하여 털끌만큼의 차질도 없을 것이니, 곁에서 밝혀 줄 사람이 없다고 근심할 것이 어디 있겠느냐. 배우는 자가 먼저 정음(正音) 몇 자만 배우고서 다음으로 이 책을 보면, 열흘 쯤으로 중국말도 통할 수 있고 운학(韻學)도 밝힐 수 있어, 중국을 섬기는 일이 이로써 다 될 것이니, 두 임금의 정묘하신 제작이 백 대에 뛰어났음을 볼 수 있다. 이 책의 번역이 외천보국(畏天保國)
의 지극한 계획인 동시에 우리 임금님께서 선왕의 뜻을 잘 계승하신 미덕이 또한 지극하시다 하겠다.
[주-D001] 외천보국(畏天保國) :
하늘을 두려워하고 나라를 보전한다는 뜻으로, 원래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즉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을 말함
동문선 제95권 / 서(序)
홍무정운 서문[洪武正韻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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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申叔舟)
성운학(聲韻學)은 가장 정밀하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사방의 풍토가 동일하지 않음에 따라 기(氣)도 역시 다르며 소리는 기(氣)에서 나기 때문에 이른바 사성(四聲)ㆍ칠운(七韻)이란 당연히 지방에 따라 다르다. 그런데 심약(沈約)이 보(譜)를 저술함으로부터 남방의 음(音)이 섞이게 되어 식자들이 병통으로 여겼으나 역대에 아무도 정리하여 바르게 해놓은 이가 없었다. 명(明) 나라 태조 황제가 그것이 틀려서 차례를 잃은 것을 민망히 여기고,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한결같이 중국의 정음으로써 정하여 《홍무정운(洪武正韻)》을 만들었으니, 실로 천하 만국이 높이는 바이다.
우리 세종 장헌대왕께서 운학(韻學)에 유의하시어 끝까지 궁구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 몇 십 글자를 만들어 놓으시니, 사방에 있는 만물의 소리를 전하지 못할 것이 없으며, 우리 동방 선비가 비로소 사성(四聲)ㆍ칠음(七音)을 알게 되어 저절로 갖추지 못할 것이 없으며, 특히 자운(字韻)에만 한정될 뿐이 아니다. 이에 우리나라가 대대로 중국을 섬겼으나 언어가 통하지 아니하여 반드시 통역을 의뢰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홍무정운》을 번역할 것을 명하여 현 예조 참의 신 성삼문ㆍ전농 소윤(典農少尹) 신 조변안(曹變安)ㆍ지금산군사(知金山郡事) 신 김증(金曾)ㆍ전 행통례문 봉례랑(行通禮門奉禮郞) 신 손수산(孫壽山) 및 신 숙주(叔舟)로 하여금 옛것을 교정하게 하고, 수양대군 신 휘(諱)와 계양군(桂陽君) 신 증(璔)이 출납을 맡게 하고, 모두 직접 자리에 참석하여 과별로 정하여 칠음으로 맞추고 사성으로 고르고 청탁으로 조화를 시키니, 가로 세로ㆍ씨와 날이 비로소 바르게 되어 결함이 없었다. 그러나 발음이 다른 이상 잘못 전한 것이 또한 많아서 신 등에게 명하여 중국의 선생이나 학사에게 가서 바로잡게 하므로 7, 8차를 내왕하여 더불어 질문하는 자가 여러 명에 달하였다. 연경은 만국의 도회지로서 그 머나먼 길을 가고 오는 동안에 일찍이 더불어 주선하고 강명한 경우도 또한 작지 아니하고, 다른 지역의 사신을 비롯하여 노승(老僧)이나 병졸의 하찮은 존재까지도 서로 접촉하니, 정(正)과 속(俗)의 다르고 같은 변(變)을 다하였고, 또 천자의 사신으로 본국에 온 자가 선비일 경우에는 또 물어서 바른 것을 취했다. 무릇 십여 벌의 원고를 등사하여 어렵게 되풀이해서 8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나고서야 예전에 바름으로써 결함이 없게 한 것이 더욱 의심이 없는 것 같았다.
문종(文宗) 공순대왕(恭順大王)께서 동궁에 계실 적부터 성인으로 성인을 보좌하여 성운(聲韻)을 참정(參定)하셨고, 대위를 계승하게 되자 신 등 및 전 판관 신 노삼(魯參)ㆍ현 감찰 신 권인(權引)ㆍ부사직 신 임원준(任元濬)에게 명하여 거듭 교정을 가하게 하였다. 무릇 《홍무정운》에 사용한 운이 병탁(倂拆)된 것은 모두 바로잡아 놓았는데 유독 7음의 선후가 그 순서를 따르지 아니하지만, 그렇다고 감히 경솔히 변경할 수가 없어서 다만 이전 것을 그대로 두고 자모(字母)를 여러 운과 각 글자의 머리에 나누어 편입시켰다. 훈민정음을 이용하여 반절(反切)을 대신하고, 그 속음(俗音)과 두 가지로 사용하는 음을 몰라서는 아니되므로 나눠서 본 글자 아래 주를 달고, 그래도 통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면 대강 주석을 가해서 그 예를 보여주고, 또 세종께서 정해 놓으신 사성통고(四聲通攷)를 따로 머리에 붙이고, 다시 범례(凡例)를 나눠서 표준을 만들었다. 성상께서 즉위하시자 빨리 인출해서 반포하도록 명하여 널리 전하게 하시었다. 신이 일찍이 선왕에게 명을 받았다고 명하여 서문을 지어 전말을 기록하게 하셨다.
삼가 생각하건대, 음운(音韻)은 횡으로 칠운(七韻)이었고 종으로 사성(四聲)이 있는데, 사성은 강좌(江左)에서 시작되고 칠운은 서역에서 기원하였다. 그런데 송(宋) 나라 선비에 이르러 보(譜)를 만들어 내자 경(經)ㆍ위(緯)가 비로소 합하여 하나가 되었으며, 칠운이 36자모(字母)가 되어 혀 위에 사모(四母)는 입술이 가볍고 차청(次淸)인 일모(一母)는 세상에서 사용하지 않은 것이 이미 오래고 또 선배가 이미 변경해 놓은 것이 있으니, 이는 억지로 두어서 옛것에 얽매여서는 안 되며, 사성은 평성ㆍ상성ㆍ거성ㆍ입성이 되는데 전탁(全濁)의 글자는 평성이 차청과 근사하고 상성ㆍ거성ㆍ입성은 전청(全淸)과 근사한데, 세상에서 쓰고 있는 것이 이와 같다. 그러나 또한 그것이 이렇게 된 이유를 알 수 없으며 또 시성(始聲)이 있고 종성(終聲)이 있어 한 글자의 음을 이루는 것은 이치의 필연인데, 유독 입성에만 세상이 대개 종성을 쓰지 아니하니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몽고운(蒙古韻)과 황공소(黃公紹)의 《운회(韻會)》도 입성에는 역시 종성을 쓰지 아니하였으니 어찌된 일인가? 이와 같은 것이 한 가지가 아니니, 또한 의심되는 것이다. 왕복하여 바로잡은 것이 많았으나 마침내 한 번도 운학(韻學)에 정통한 자를 만나서 그 골라 놓고 얽어 놓은 묘리를 변론해 보지 못하고, 특히 말하고 읽고 외고 하는 나머지에 의해서 청탁과 개합(開闔)의 근원을 연구하여 이른바 가장 어려운 것을 정밀히 해명하고자 하니, 이것이 오래도록 죽을 애를 써서 겨우 얻게 된 것이다.
신 등은 학식이 천박하여 일찍이 지극히 은미한 이치를 더듬어서 성인의 가르침을 현양하지 못하고 우리 세종대왕께서 타고나신 성인으로 고명하고 통달하여 지극하지 아니한 바 없으시어 성운(聲韻)의 처음과 끝을 모조리 연구하여 짐작하고 제정해서 칠운ㆍ사성과 일경(一經)ㆍ일위(一緯)로 하여금 마침내 바른 데로 돌아오게 하였으니, 우리 동방 천년에 알지 못하던 것을 열흘이 못 가서 배울 수 있으며, 진실로 깊이 생각하고 되풀이하여 이를 해득하면 성운학이 어찌 정밀하기 어렵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범어가 중국에 행해지고 있지만, 공자의 경전이 인도로 가지 못한 것은 문자 때문이지, 소리 때문이 아니다.’ 하였다. 대개 소리가 있으면 글자가 있는 법이니 어찌 소리 없는 글자가 있겠는가. 지금 훈민정음으로써 번역하여 소리가 운(韻)과 더불어 고르게 되면 음화(音和)ㆍ유격(類隔)ㆍ정절(正切)ㆍ회절(回切) 따위의 번거롭고 또 수고로울 필요가 없이 입만 열면 음을 얻어 조금도 틀리지 아니하니, 어찌 풍토가 똑같지 아니함을 걱정하겠는가. 우리 여러 성스러운 임금께서 제작하신 묘법이 다 아름답고 다 선하여 고금을 넘나드는 동시에 전하께서 선대의 사업을 계승하는 아름다움이 또한 전열(前烈)에 빛나는 바이다.
있어 끝내 그 요령을 얻지 못했지만 그러나 이를 통하여 그 줄거리만이라도 알게 되면 거의 그 정세를 더듬고 그 예를 짐작해서 환심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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