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6. 10:35ㆍ대륙조선 일반
동문선 제14권 / 기(記)
무이정기(撫夷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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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崔溥)
산이 바다 동쪽 가에 높이 솟은 것은 곧 조성(鳥聲)이고, 바다가 그 산의 서쪽 기슭에 널리 흐르는 것은 곧 발해(渤海)이고, 산과 바다 사이에 시내가 둘리고 숲이 얽혀서 성첩과 울타리가 종횡(縱橫)으로 보이는 것은 곧 보령성(保寧城)이다. 성 동남 모퉁이에 커다란 언덕이 높이 솟아 마치 망적대(望敵臺)처럼 생긴 것이 있으니, 선덕(宣德) 임자년에 고을 원 정대(鄭帶)가 새로 관사를 세웠는데, 그 언덕 마루턱을 평평히 깎고 작은 정자 하나를 지었으니, 대개 상개(爽塏)함을 취함이요, 또 가히 관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흘러 관사가 흔들리고 정자가 폐하여 손님과 나그네들이 추위와 더위를 겪어도 묵을 곳이 없었다. 홍치(弘治) 임자년에, 박후(朴侯) 적손(迪孫)이 원으로 와서 정사가 통하고 물건이 충분하여 재원이 넉넉하매 드디어 아전과 백성을 모아서 새로 공사할 것을 꾀하여 공장이와 힘을 헤아려 재목을 싣고 돌을 다듬어, 톱질하는 자, 도끼질하는 자가 자와 대패와 확(彠)으로 그 지휘를 좇아서 일을 했다. 그 다음해에 공아(公衙)가 이룩되고, 또 다음해에 관청(官廳)이 이룩되고, 또 그 다음해에 객관(客館)과 동헌(東軒)이 이룩되며, 또 다음해에 정자의 옛터 몇 칸을 세우되, 그 서편을 넓혀서 바다 기운을 받아들이고, 그 동편에는 온돌을 내어 추위를 방비하기로 하였다. 이제 들창과 문이 영롱하고, 섬돌과 주초를 준설하여 솟은 듯이 나는 듯이 단청빛이 서로 쏘는 듯하여, 산은 더욱 높고 이 바다는 더욱 넓어, 내와 구름은 날로 그 경개를 더하는 듯하니, 참으로 이 고을이 한 번 거듭 새로워졌다. 임자년에 새로 세워 또 임자년에 중수되었으니, 어찌 하늘이 때를 기다렸던 것이 아닌가. 정자가 이룩되던 가을에, 내가 역마를 달려 바다를 끼고 남으로 내려갈 제 용곡(龍谷)으로부터 아침에 이 고을에 이르렀다. 지금 관찰사(觀察使) 정미수(鄭眉壽)공이 먼저 정자 위에 이르러서 바람을 싫어하여 장막을 쳤었다. 나에게 의자를 주고는 웃으면서 고금의 일을 이야기할 제, 술도 마시고 시도 읊다가 해가 낮이 되매 장막을 걷고 사방을 바라보니 엷은 구름이 약간 가리고, 바람이 자매 물과 하늘빛이 같고 물새들이 날아드는데, 내 속에 해오라기는 흰 빛을 비추고 고개의 소나무는 푸른 빛을 보내어 천태만상이 별안간 드날리곤 하였다. 나는 이를 보고 머뭇거리다가 감탄의 소리를 내었다. “아, 정자의 괴관(瑰觀)이여, 내 일찍이 북해에 표박하여 구월(甌越)에 닿고 강회(江淮)를 건너 북으로 갔을 제, 아름다운 산과 기이한 물을 많이 보았는데, 생각하기를, 우리 동방처럼 좁은 지역에 어찌 그런 것이 있겠는가.” 하였더니, 이제 조성(鳥聖)의 모든 산을 보매 회계(會稽)와 사명(四明)과 더불어 형제같고, 안면의 형승은 태주(台州)의 해문(海門)과 더불어 자웅을 다툴 수 있었고, 해포(蠏浦)의 닻은 경구(京口)의 모임과 같으며, 고래 조수가 하늘을 차는 광경은 절강(浙江)의 구경보다 크게 낮고, 높은 멧부리가 바다에 솟은 것은 포산(苞山)의 점대호(點大湖)보다 나으니, 옛날 천만 리를 다니면서 배와 수레에서 얻은 바가 이 한 정자 밑에 일목요연하여, 홍몽(鴻蒙)의 세계를 헤치고 괴소(塊蘇)와 운몽(雲夢)을 굽어보매 이 흉회가 그 팔구분(八九分)을 점유하고 말 것인가 하니 관찰공(觀察公)이 이 말을 듣고 쾌하게 여겨 이내 나에게 말하기를, “박후(朴侯)는 내 이미 그 사람됨을 알았었소. 그 몸에 육도(六韜)삼략(三略)을 품었으나 크게 쓰이고자 하지 않고, 여러 차례 어버이가 늙었다 하여 돌아갈 것을 빌매 조정에서도 역시 이 고을을 빌려서 영예롭게 하였으니, 그 뜻을 취할 만하더니, 고을 원이 되자 공금도 허비하지 않고 백성도 괴롭히지 않고서 크게 정관(亭館)을 새롭게 하여 마치 하늘이 이룩하는 듯하니, 그 재간이 어질고 능하지 않으면 그럴 수 있겠는가. 다만 정자가 왜적을 막는 땅인 만큼 옛날에는 어풍(禦風)으로서 이름하였으니, 대개 이찬황(李贊皇)의 주변(籌邊)의 편액의 뜻과 서로 합하지 않으므로 이에 무이(撫夷)로서 그 편액을 바꾸었으니, 어찌 그 전말을 기록하여 빛을 내어 주지 않겠는가.” 하기에 나는 대답하기를, “그렇게 하겠소.” 하였으나 그 이튿날 일에 촉망하여 영주(寧州)로 고삐를 돌릴 제, 붓을 잡지도 못한 채 달이 넘어가려는지라, 공(公)이 또 글월을 보내어 재촉하므로, 부득이 이를 써서 회답하였다. 한 정자의 흥폐는 비록 작은 일인 듯싶으나 실은 국운(國運)의 성쇠를 이어서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의 국운이 쇠퇴함을 당하여 변새의 모든 땅이 바다 도둑의 주둔한 바 되어 병화(兵火)를 겪은 뒤에 인연(人煙)이 탕진되었으니, 어찌 모든 오랑캐를 어루만지겠는가. 비록 누정(樓亭)을 세워 그 우울한 정을 펴게 하고자 하더라도 할 수가 없었더니, 우리 국가에서 험함을 시설하고 진(鎭)을 두어 그 요해지를 얻었으니, 이 성으로서 본다면 서쪽 20리 사이에 수군영(水軍營)이 있고, 서북 백 리 쯤에는 병마상(兵馬廂)이 있으며, 남으로 남포(藍浦)와 닿고, 또 그 남에는 마량(馬梁)과 비인(庇仁) 등 진(鎭)이 있어 순치(脣齒)의 형세가 이룩되었으며, 초루(譙樓)에 병기[刀斗]가 한가하고 갑졸(甲卒)이 농업에 편안한 지가 장차 백 년이나 되었고, 이 정자가 돌올(突兀)하게 그 사이에 솟아서 오늘 태평의 다스림을 드러냈으니, 무이(撫夷)로서 그 편액을 삼음이 어찌 마땅하지 않겠는가. 도둑과 오랑캐와 적자(赤子)를 의당 어루만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루만지지 못한다면, 성과 보루를 수선했다 해서 어루만져지지도 않을 것이요, 곡식이 많고 군대가 정하다 해서 어루만져 지기도 어려울 것이요, 문덕(文德)의 퍼짐과 회유의 술법은 묘당 위에서 이미 성산(成算)이 있을 것이니, 이 생산을 받들어 밖에 정치를 하는 자 능히 어루만지는 방법을 다하면 이 한 정자에서 얻는 것이 역시 족할 것이요, 이 정자에 올라서도 풍경에만 유혹을 받지 말고, 시주(詩酒)도 음탕하지 말며, 전야(田野)를 바라보며 그 개간할 것을 생각하고, 지황(池隍)을 바라보고는 그 완전할 것을 생각하고, 학교를 바라보며 그 흥기시킬 것을 생각하고, 장수와 나그네를 보고는 품어 줄 것을 생각하고, 늙은이나 어린이를 보고는 구휼할 것을 생각하며, 심지어는 금어(禽魚)와 초수(草樹)에 이르기까지도 그 생리를 이루게 하여 바라면 반드시 생각이 있고, 생각하면 반드시 직분을 다 한다면 덕화가 날로 펴고, 바다물결이 더욱 일지 않고 일기(一岐) 구주의 오랑캐들이 더욱 돌아올 것이니, 이 정자를 세움이 곧 산과 바다와 더불어 그 종시(終始)를 다할 것인 바, 이는 공과 박후의 책임일 것이니, 다시금 힘을 쓰고, 또 뒷날에 이 고을의 방백(方伯)된 자에게 권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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