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몽고 수도 고륜(庫倫)땅의 냉산(冷山)은 백두산

2022. 11. 2. 12:32백두산

백두산을 냉산(冷山)이라 부르고 솥귀(북여요선)또는 주전자귀(당주집)모양의 천지 둘레가 40여리,중국지명 부얼진현 한자 포이진현 (布尔津县), 조선의 의주의 고지명 포주(抱州)라고 하죠. 외몽고의 수도 고륜(庫倫)은 백두산에서 ‘하늘의 선녀(仙女) 불고륜(佛庫倫)이 내려와서 이 연못에서 목욕을 하는데.....황룡부 북쪽의 냉산 백두산 현재 몽골공화국은 고륜(庫倫)땅에 활불을 황제로 세웠다.

타반보그드산

 
 

 

 
반보그드 산

타반보그드 산(몽골어: Таван богд / Taban bogd Uul, 영어: Tavan Bogd)은 몽골 최서단인 바잉울기 주(영어: Bayan-Ölgii Province, 몽골어: Баян-Өлгий аймаг)에 있는 몽골의 산으로, 4,374m의 높이로 몽골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서부는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리 카자흐 자치주의 아러타이 지구에 속하는 부얼진 현과 접하고 북부는 러시아의 알타이 공화국과 접한다. 알타이산맥에 속한다.

알타이 타반 보그드 국립공원(영어: Altai Tavan Bogd National Park/ 몽골어: Алтай Таван богд байгалийн цогцолбор газар)과 중국 국경쪽의 카나스 호(중국어: 喀纳斯湖, 병음: Kānàsī Hú)가 유명하다.

5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그 중에서 몽골과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후이텐봉(영어: Khüiten Peak, 한자: 우의봉(友誼峰), 중국어: 友谊峰, 병음: Youyi Feng 몽골어: Хүйтэн оргил)이 4,374m로 타반보그드의 최고봉으로 가장 높고 정상은 만년설로 뒤덮여 있다. 중국에서는 휘등산(輝騰山) 또는 원의위냉산(原意為冷山)이라고도 부른다.

나이람달봉(영어: Nairamdal Peak 또는 Friendship Peak 몽골어: Найрамдал оргил)은 중국, 러시아에 걸쳐 있고 최고봉은 4180m이다. 나머지 봉오리로 Malchin Peak 4095m, Bürged 4068m, Olgii 4050m 등이이다.

 

부얼진현(위구르어بۇرچىن ناھىيىسى 부르친 현중국어布尔津병음Bù'ěrjīn Xiàn) 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리 카자흐 자치주 아러타이 지구의 현급 행정구역이다. 넓이는 10369km2이고, 인구는 2007년 기준으로 70,000명이다.

 

천지  Akekule lake  둘레 40리 16km

 

中國古今地名大辭典  //shuiren.org/kodaichimei/placename/10048.html

冷山

本文

一名冷硎山。亦作冷陘。宋洪皓使金流遞於此。〔方輿紀要〕山在黄龍府北

 

성종실록 216권, 성종 19년 5월 27일 庚寅 2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무령군 유자광이 의주 방어의 중요성에 대해 상서하다

대저 의주(義州)는 본래 요(遼)나라의 포주(抱州)인데, 고려 예종조(睿宗朝)에 금(金)나라 군사가 침공(侵攻)하여 요(遼)나라의 개주(開州)를 취(取)하고 내원성(來遠城)을 습격하자, 자사(刺史) 상효손(常孝孫)이 내원(來遠)·포주(抱州) 두 성(城)을 가지고 우리 나라에 귀부(歸付)하였다가 그 무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도망하였으므로, 예종이 포주를 고쳐서 의주(義州)로 만들고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현종조(顯宗朝)에는 거란(契丹)이 교량[橋]을 만들고 그 교량을 끼고 동서(東西)로 성(城)을 만들었으며, 문종(文宗)조(朝)에는 거란이 포주성(抱州城) 동쪽 들에 궁구문(弓口門)을 설립하고 문밖에다 우정(郵亭)을 설치하였으며, 또 확장(搉場)560) 을 설치하였는데, 문종이 그것을 근심하여 혁파(革罷)하도록 청하였으나 거란의 임금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수(隋)나라·당(唐)나라의 군대와 소손녕(蕭遜寧)의 군대, 삼별초(三別抄)·유관(劉關)의 군대가 모두 의주(義州)로부터 들어왔습니다.  

북새기략

백두산고〔白頭山考〕

백두산은 무산부(茂山府) 서쪽 306리에 있다. 옛 이름은 불함산(不咸山)이다. 중국 사람은 장백(長白), 동방 사람은 백두(白頭)라고 부르니, 산이 아주 높고 사계절 항상 얼음과 눈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요지(遼志)》에 “장백산이 냉산(冷山) 동남쪽 1000여 리에 있다. 그 산 속의 금수들은 모두 하얗다. 사람이 감히 들어가지 않는데, 그곳을 더럽혀 뱀에게 물리는 해를 입을까 두려워서이다.”라고 하였다.

성호사설 제2권 / 천지문(天地門)

옛적에 불함산(不咸山)을 백두산(白頭山)ㆍ장백산(長白山) 또는 백산(白山)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일년중 언제나 춥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그러면 냉산(冷山)도 백두산을 가리킨 것일지도 모른다. .

 

해동역사 속집 제13권 / 지리고(地理考) 13

섭융례(葉隆禮)의 《요지(遼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냉산(冷山)에서 동남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백의관음(白衣觀音)이 사는 곳이다. 그 산에 사는 금수(禽獸)는 모두 흰색이며, 사람들은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 산속에서 대소변을 보았다가 뱀 따위에게 해를 당할까 두려워서이다. 흑수(黑水)가 이곳에서 발원한다

 

《성경통지(盛京通志)》를 보면, “장백산은 바로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隣)이다. 선창(船廠)에서 동남쪽으로 1300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대명일통지》

 강희() 17(1678) 황지(皇旨) 받들어서 대신(大臣) 각라오목눌(覺羅吳木訥) 등을 파견하여 장백산에 올라가 형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이들이 산에 올라가다가 산기슭  곳을 보니, 사방에 수풀이 빽빽하게 우거진 가운데 둥글고 평평한 지역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초목이 자라지 않았다. 숲을 나와서 1리쯤 가자 향나무가 줄지어 자라고 황화(黃花) 향기를 자욱하게 풍기고 있었는데,  중턱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위로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이에 여러 대신들이 꿇어앉아서 황지(皇旨) 읽자, 구름과 안개가  걷히면서 산의 형세가 환하게 드러나, 작은 산길이 있어서 올라갈 수가 있었다.  중간에 섬돌 모양으로  석대(石臺) 있었는데, 평탄하여서 사방을 둘러보기에 좋았다. 산꼭대기는 둥근 형세를 이루고 있었는데, 눈이 쌓여서 환하게 밝았다.  위에 올라가 보니 다섯 개의 봉우리가 ()처럼  둘러 솟아 있었고, 남쪽에 있는  봉우리가 조금 낮아서 () 같았다.  가운데 있는 연못은 몹시 깊었는데, 절벽에서의 거리가 50()가량 되었으며, 둘레가 40여 리 정도 되었다. 산의 사방 주위에서는 수많은 샘물이 분출하였는데, 바로 세 개의 큰 강이 발원하는 곳이었다.

 

북여요선 상

 백두산은 우뚝 솟아 우리나라의 교악(喬嶽)이 되었다. 정북쪽에는 백암상각(白巖上角)이 있고 그 남쪽 5리쯤에 병사암(兵使巖)이 있으며, 그 남쪽 10여 리에 있는 봉우리를 도범이측지(桃凡伊側只)라고 하며, 그 서쪽으로 수십 리를 돌아가면 마천우(摩天隅)라고 하며 북쪽으로 수십 리를 돌아가면 소항(小項)이 된다. 또 동북쪽으로 수십 리를 돌아 층층이 쌓인 암석이 높이 솟아 있어 백암봉(白巖峯)과 마주하고 섰으니 둘레가 100여 리이고 가운데에는 솥귀 모양의 대택(大澤)이 있다. 又東北回數十里, 層巖高起, 與白巖對立, 周可百餘里中有大澤如鐺耳。 

솥 쟁

다산시문집 제15권 / 서(敍)

대청 세계략(大淸世系略)

만주(滿洲) 개국의 유래. 《개국방략(開國方略)에,

“장백산(長白山) 동쪽에 포고리산(布庫哩山)이 있고 그 산 밑에 포륵호리(布勒瑚里)란 연못이 있는데, 전하는 말에 ‘하늘의 선녀(仙女) 불고륜(庫倫)이 내려와서 이 연못에서 목욕을 하는데, 신작(神鵲)이 붉은 과일 하나를 물고 와서 선녀의 옷 위에 놓고 갔다. 그 과일을 입에 넣고 삼킨 선녀는 드디어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성(姓)은 애신각라(愛新覺羅)이고 이름은 포고리옹순(布庫哩雍順)이다. 장백산 북쪽 아타리성(俄朶里城)에 살면서 국호(國號)를 만주라 하였다.’한다. 수세(數世) 동안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하였으므로 국민이 반란을 일으켜 애신각라의 종족을 해치자, 어린 아들 하나가 황야로 도망하여 목숨을 건졌다.”

 

별건곤 제57호   >   世界動向

잡지명 별건곤 제57호  
발행일 1932년 11월 01일  
기사제목 世界動向  
필자 李東漢  
기사형태 소식  

蒙古도 獨立!

만주가 독립이 되고 서장이 독립문제가 점점 구체화 되고 잇는 이때에 또한 몽고(蒙古)가 독립된다는 말이 유력하게 성행하고 잇다.

몽고는 오늘날 중국의 한변강(邊疆)의 지역이다. 청조(淸朝)의 선통(宣統) 삼년 10월에 몽고는 제일차 독립선언을 하엿스며 대몽고제국이라고 일홈을 일커럿다. 그리고 그러한 선언은 청조(淸朝) 타도의 중국혁명의 혼란시대를 타서 독립운동을 이르키엇든 것이다. 그리고 몽고의 독립운동을 보는데는 우리들은 로서아와 몽고를 관련식혀서 생각해 보는 것이 흥미잇는 것이다.

1917년 로서아에 혁명이 이러나면서부터 로서아는 그의세력을 동편으로 몽고에까지 펴게되엿다. 민국(民國) 10년 로서아는 몽고국민당을 지도하야 몽고림시정부를 성립식혓스며 13년에는 소위 로몽조약(露蒙條約) 이라는 것이 성립되여 몽고의 독립을 승인하며 중국의 종주권(宗主權)을 부인하게 되자 여긔서 몽고는 완전히 중국으로부터 떠나게 되엿다.

이와가티 로서아가 몽고에 세력을 폇다는 것은 민국 10년에 성립된 국민당의 예비군인 청년당이란 것이다. 1922년 청년당의 제일차 대회에서는 한가지 중요한 강령을 결의하엿다. 「본당의 목적은 몽고국민을 외국자본주의의 압박에서 버서나게 하며 외몽고의 독립을 확보하며 국내로는 노동자 농민의 참된 자유 밋 문화적 생활의 향상을 구함」 이라고 이것을 보아도 몽고에 로서아의 세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추측할 수 잇는 것이다. 이와가치 몽고에는 로서아의 세력이 차차로 커젓스며 1924년 11월에 대국민의회는 수도고른(庫倫)이라는 명칭을 「붉은 영웅의 도시」라고 일홈을 곳첫다.리고 동시에 몽고 노동국민권(勞動國民權) 선언이 발표되엿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그 선언은 봉건제도의 철페와 외국자본주의의 배척과 노동국가의 성립을 지지하며 주장하고 잇다.

그리하야 오늘날에 와서는 몽고는 형식으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중국의 통치아래서 버서나서 완전한 독립국가로 되여 잇스며 또 현재 거기에 대한 구체적 행동이 전개되고 잇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만주, 서장, 몽고 등이 제각기 중국에서 떠나 독립되는 것이다.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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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명 동아일보  
기사제목 蒙古帝國政治組織, 庫倫活佛 皇帝라 칭하고 行政各官制를 制定 
발행년월일 1921 04 08
발행구분  
면수 02 
단수 03 
표제어 정치·독립운동
신문명기사제목발행년월일
동아일보  
蒙古는 結局 赤化巷 「부럇트」政府의 庫倫移轉 
1924년 02월 13일

 

 

 

sayanshan : 만주어로 흰산 즉 백두산

북여요선 솥귀, 당주집 주전자귀 천지둘레 40~50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