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27. 15:03ㆍ백두산
上都
本文
卽今陝西長安縣治。〔唐書地理志〕京城。代宗元年曰上都。⦿元置。卽開平府。元帝時往駐之。在今察哈爾之多倫縣東南。
瀋陽縣
本文
秦以前肅愼氏地。漢晉迄唐屬挹婁國。後爲渤海瀋州地。遼金仍之。元屬瀋陽路。明置瀋陽衞。清自遼陽遷都於此。稱曰盛京。入關後。疊置奉天府尹盛京將軍守之。康熙三年設承德縣。附郭。光緖三十一年裁府尹。設奉天府知府。宣統二年。裁承德縣。以府直轄。民國初裁府。仍置承德縣。尋改今名。爲奉天省治。遼瀋道亦駐之。十八年。國民政府廢道。改奉天省爲遼寧省。仍以瀋陽爲省治。地在瀋河之陽。北寧遼海南滿安遼諸鐵道交會於此。商務甚盛。清光緖二十九年。中美通商條約。中日通商航海條約。均訂定開作商埠
한국고전번역원 해석
003] 임금님……왕래한다오 :
난경(灤京)은 지금의 내몽고(內蒙古) 지역에 해당하는 난하(灤河) 북안(北岸)의 개평부(開平府)에 위치하였는데, 상도(上都) 혹은 난도(灤都)라고도 한다. 원 세조(元世祖) 때에 도읍으로 삼아 대도(大都)인 연경(燕京)과 함께 양도(兩都)로 일컬어졌으며, 1년에 한 번씩 천자가 순행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지금의 내몽고(內蒙古) 지역에 해당하는 난하(灤河) 북안(北岸)의 개평부(開平府)를 말한다. 원(元)나라 때 대도(大都)인 연경(燕京)과 병칭하여 양도(兩都)로 일컬어졌다. 대본에는 ‘上覩’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東文選)》 권106 〈상도호천관(上都昊天觀)〉에 의거하여 ‘覩’를 ‘都’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D002] 천자(天子)가 …… 오니 :
여기의 천자는 바로 원 순제(元順帝)를 가리킨다. 원 순제 28년(1368)에 순제가 명병(明兵)에게 쫓기어 처음에는 상도(上都)인 개평부(開平府)로 행행하여 지냈고, 29년에는 다시 그곳까지 명병의 공격을 받게 되어 마침내 만주(滿洲) 열하성(熱河省) 응창부(應昌府)로 옮겨 행행해 있다가 그다음 해인 30년에 순제가 끝내 그곳에서 생을 마쳤던 데서 온 말이다. 그 후로는 순제의 장자(長子) 소종(昭宗)이 순제의 뒤를 이어 그곳에서 다시 즉위했으나, 또 명병에게 쫓기어 다시 원(元)의 구도(舊都)인 화림(和林)으로 옮겼고, 그 후 또 쫓기어 금산(金山)으로 옮겨 지내다가 마침내 즉위한 지 8년 만에 금산에서 생을 마쳤다.
나무위키
Karakorum / ᠬᠠᠷᠠᠬᠣᠷᠣᠮ(Qaraqorum) / Хархорин[1]
중세 몽골 제국의 두 번째 수도. 우브르항가이(Өвөрхангай)주 하르허링(Хархорин)군에 위치하는데 한 때는 번영했지만 지금은 폐허가 되어 유적만이 남았다.
카라는 튀르크, 몽골계 언어로 '검다', 코룸은 '큰 성'[2]이라는 뜻이라 직역하면 '검은 성'이다.본래 칭기즈 칸의 경쟁상대였던 나이만족의 영역이었으나 초창기 몽골의 중심지였던 오논 강 지역이 몽골에서도 동쪽에 치우쳐서 오고타이 칸이 대신 이 곳을 몽골제국 전체의 수도로 삼았다.[6] 이후 쿠빌라이 칸이 지금의 중국 베이징 인근인 대도로 천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서쪽으로 약 400 km 떨어진 곳에 있다.
위키백과
카라코룸(몽골어: ᠬᠠᠷᠠᠬᠣᠷᠣᠮ, Хархорум)은 13세기에 약 30년간 몽골 제국의 수도였다. 그 유적이 몽골의 으브르항가이 주에 남아있으며, 근처에 카호린이라는 마을이 있다. 세계 유산 중의 하나인 오르혼 계곡 문화 지구의 위쪽을 차지하고 있다.
참고로 카라코룸을 중국에선 화림(和林)이라 불렀고 화림 지역은 몽골이 중국을 지배하며 둔 화령로총관부(和寧路摠管府)의 하위구역이다
우만위키
열하성
1955년 공산당 정권에 의해 폐지되어 성도인 승덕현 일대는 허베이성에, 동부는 랴오닝성, 북서부는 내몽골 자치구에 편입되었다
원의 대도 북경(현 베이징),원의 열하성 즉 상도 승덕부 청더시,청의 수도 성경(심양) 선양시
현 거용관
원의 초기 수도라는 화림 카라코룸
원의 실제 알타이산 서쪽의 북경 대도 캄발리크 알타이산은 중국쪽에서는 부얼진현 한자명 포이진현, 조선의 의주는 포주
알타이산 부근의 원의 초창기 수도 화림 카라코룸
유병충이 “환주(桓州)의 동쪽이자 난수(灤水)의 북쪽에 위치한 용강(龍岡)이 길지(吉地)이다.”라고 하니, 헌종이 유병충으로 하여금 경영하도록 하고, 개평부(開平府)로 이름을 지었는데, 3년이 되어 공역을 다 마쳤다.
그 후에 화림에서 개평부(開平府)로 도읍을 옮기고는 상도(上都)라 일컬었으니, 바로 지금의 거용관(居庸關)이다.
대도(大都)를 고쳐 중도(中都)라 하고 부(部), 성(省)을 나누어 세웠다
열하(熱河)는 원(元)에서는 중통(中統) 연간에 고쳐 상도로(上都路)에 예속하게 하였으며, 명(明)에서는 타안위(朶顔衛)의 땅으로 하였다. 청 나라에서는 처음엔 열하(熱河)라고 일컬었는데, 강희 연간에 처음으로 피서산장(避暑山莊)을 설치하였으며, 옹정(雍正) 연간에는 승덕주(承德州)를 두었고 건륭 병신년(1776, 영조 52)에는 승격시켜 승덕부라 하였다.
원의 상도는 환주 즉 발해의 압록부에 있다. 용강은 옛 황룡국이었다. 황룡부는 발해의 부여부이다.원의 상도는 청나라 첫 수도 심양이다.역사와 달리 우리는 왜 상도를 열하로 알고 있는가? 심지어 내몽골 화림 카라코룸을 상도로 알고 있다.원의 실제 상도 심양을 어디에서 찾을까?
옥오재집
조선 후기 문신 송상기(宋相琦: 1657~1723)의 시문집. | 18권 9책. 운각활자본. 아들 필환이 편집, 손자인 재희가 1760년(영조 36)에 간행했다
옥오재집 제2권 / 시(詩)
심양〔瀋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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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요동에서 이곳이 제일 웅장하니 / 全遼第一此雄藩
화려한 성가퀴와 망루가 구름에 싸였네 / 粉堞華譙入塞雲
다른 시절 중국의 방어선이 되었고 / 中國異時堪保障
원나라 때 수도로 부질없이 고초 불렀지 / 上都元代漫辛勤
깊숙한 방 비밀스러운 궁궐은 천 겹이요 / 陰房秘殿千重合
화려한 가게 향기로운 거리 이곳저곳에 / 寶肆香街百隊分
성 옆에 흐느끼는 샘물만이 / 獨有城邊嗚咽水
지금까지 하장군을 원망하는 듯 / 至今如怨賀將軍
심양을 방비하지 못하였을 때, 대장 하세현은 도망가다 죽었다.
잠곡유고 제2권 / 시(詩)○칠언 절구(七言絶句) 111수
효묘(孝廟)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적에 지은 어제시(御製詩)를 받들어 화답하다. 2수
심양에서 묵은 지가 십 년 거의 다 돼 감에 / 燕戶寒砧近十霜
돌아가고 싶은 생각 하루에도 아홉 번 / 思歸一日九回腸
동풍 불어 또다시 왕손초가 푸르름에 / 東風又綠王孫草
가슴속에 쌓여 있는 시구를 쏟아내네 / 寫出胸中錦繡章
봄이 깊은 황룡부에 꽃과 같이 눈 내려서 / 春半黃龍雪作花
광풍 불어 땅 휩쓸자 먼지들과 뒤섞이네 / 狂風刮地雜塵沙
옷 적시며 원안 눈물 그치기가 어려운 건 / 霑衣難禁袁安淚
천애에서 집 생각이 나서만은 아니라오 / 不是天涯每憶家
[주-D002] 황룡부(黃龍府) :
거란(契丹)에서 설치한 부의 이름으로, 치소(治所)가 길림성(吉林省) 농안현(農安縣)에 있는데, 여기서는 효종이 볼모로 잡혀 가 있던 심양(瀋陽)을 가리킨다.
목은시고 제14권 / 시(詩)
청산음(靑山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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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은 기약 있어 길이 문에 당했는지라 / 靑山有約長當戶
앉아서 거용 등지고 여부를 어루만지네 / 坐背居庸撫廬阜
세 가닥이 종횡하여 산세가 불일치하니 / 三條縱橫勢莫一
어느 곳이 참다운 천부인지 알 수 없고 / 未知何處眞天府
동쪽 바다 서쪽 언덕에 자리한 장백산은 / 東溟西岸長白山
마치 태백이 도망갔던 형만과 똑같은데 / 有如泰伯逃荊蠻
오악은 중국에서 가장 높게 내버려 두고 / 從敎五岳尊中州
홀로 요해에 걸터앉아 청구와 연하였네 / 獨跨遼海聯靑丘
삼한에 흩어져선 뛰어난 지세를 차지하여 / 散在三韓占形勝
봉우리마다 신선 누각을 솟구쳐 일으키고 / 峰峰聳起神仙樓
누각 아래 흐르는 물은 동해로 달려가 / 樓下流川走東海
봉래산의 운기는 하늘이 내리덮은 듯하네 / 蓬萊雲氣如天蓋
눈이 있어도 티끌 하나를 볼 수 없거니 / 有眼不見纖塵生
학 타고 돌아간들 또한 무엇이 해로우랴 / 駕鶴歸來亦何害
머리 숙이고 앉아서 청산음을 짓다 보니 / 低頭且作靑山吟
마른 버들에 말 부스럼 비벼댐과 흡사하네 / 恰似枯楊便馬疥
[주-D002] 거용(居庸) …… 어루만지네 :
거용은 연경(燕京)에 있는 산명(山名)인데, 험준하기로 이름이 높고, 여부는 바로 동진(東晉)의 고승(高僧) 혜원 법사(慧遠法師)가 거주했던 여산(廬山)을 가리킨다.
율곡선생전서습유 제4권 / 잡저(雜著)
공로책(貢路策)
신은 듣건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길 때는 평탄하거나 험난하다고 하여 그 마음을 바꾸지 않고, 성하고 쇠한 것으로 인하여 그 예의를 폐하지 않는다.” 하오니, 이를 능히 행하고 있는 경우는 오직 우리 왕조가 중조(中朝)를 섬기는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험난한 거용산(居庸山)이 가로막혀 있고, 남쪽으로는 깊은 창해가 경계하고 있습니다.
[《원사(元史)》 47권 〈순제본기(順帝本紀)〉]
원컨대 폐하께서는 경성을 굳게 지키시옵소서.”라고 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한밤중에 건덕문(建德門)을 열고 거용관(居庸關) 북쪽으로 나가 도주하여 상도(上都)로 갔다.
미산집에 .연도(燕都)는 천하의 북쪽에 자리한 옛날 변방의 요새로 큰 사막의 접경에 있는 고을이라 일컬어지던 곳인데, 사람들은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풍속이 드물고, 그 지역엔 숭산(嵩山)과 낙양(洛陽)의 승경도 없어 다만 궁실과 성시로 그 부유하고 화려함을 과시한다. 우리나라와 땅이 가장 가까워서 다만 작은 강 하나를 떨어졌을 뿐으로, 사신의 수레가 조석(朝夕)으로 왕복하니 유람의 장엄함과 이별의 괴로움이야 어찌 말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년 을사 > 6월 25일 > 최종정보
영조 1년 을사(1725) 6월 25일(신묘) 맑음
01-06-25[39] 평안 감사 윤헌주에게 내린 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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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 감사 윤헌주(尹憲柱)에게 내린 교서에,
“왕은 이르노라. 압록강 동쪽부터 대동강 서쪽까지는 심하게 황폐해져 관찰사와 순찰사의 임무를 맡기기가 참으로 어렵다. 이제 누구에게 맡겨야 하겠는가. 경에게 중임을 맡기노라. 나라의 관문인 평안도를 바라보니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번(藩)이로다. 국경은 노룡현(盧龍縣)의 옛터와 접하고 한 줄기 긴 강을 한계로 삼는다.
동광 제15호 > 民族과 民族語
箕子는 王族이며 더욱 學者임으로 그의 결속된 徒黨은 다 熱烈한 志士이었을 것임니다. 말이 곁길로 되니 雅諒을 구하나이다. 그들은 黃河를<11> 渡하여 東方을 향하게 되니 응당 山海關을 넘어 遼西를 지나 遼東에 당하였을 것임니다.
........................
箕子를 酋長으로 한 漢族의 文化는 참으로 檀族에게 막대한 欽羡을 받았으며 더욱 互相傳告하여 箕子의 領域을 觀光하며 그 政治를 시찰함이 盛하였음니다. 그리하여 漢族文化에 특히 農具와 醫藥에 心醉한 檀族은 그만 箕子를 王으로 추대하자는 운동이 勃發하여 檀朝가 顚覆함에 至하였음니다.
註 (그런데 現今 平壤을 箕子의 都城이라는 傳說은 참 새밝한 거짓말이다. 大洞江 一名을 浿江이라 하니 浿江은 즉 배를(船으로 渡하는 水)이란 의의다. 그러면 淸川江도 배물이라 하였고 鴨綠江도 배물이며 遼江도 배물이라고 魏文志에 말하였다. 箕子가 배물 東에 居하였다 하였으니 現今 平壤은 배물 西에 位하였으니 그 誤謬됨이 明白하고 險澶(검터) 즉 錦州는 遼江 東 즉 배물 東에 있으니 錦州가 箕都됨이 近理하며 더욱 5,000 流民이 男負女戴하고 어찌 7,000里 旅行을 감행하였으리오. 海路 외 便도 없고 宿泊의 便도 難한 그때 遼江 東까지 당함도 극히 疲勞하였을 것이다. 箕都가 遼江 東임이 타당함.)
>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29년 정묘 > 7월 27일 > 최종정보세종 29년 정묘(1447) 7월 27일(정사)29-07-27[01]
사졸 훈련과 징병에 대하여 대신들과 의논하다 옛적에 요(遼)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여진(女眞)의 군사가 만 명이 차면 천하에 적대할 이가 없다.’ 하더니, 요(遼)나라가 과연 만 명이 차고 남은 것에 패하였삽고, 고려 때에는 사적(沙賊)이 망한 원(元) 나라의 남은 졸병들로써 갑자기 서쪽 지방을 침범할 제, 변방이 막아내지 못하매, 드디어 거침없이 사뭇 밀어 무인지경을 들어오듯 하였으니, 이런 것이 곧 은감(殷鑑)이 되옵니다. 其在前朝, 沙賊以亡元之餘燼, 卒犯西鄙, 邊方失馭, 遂長驅不止, 如入無人之境, 是謂殷鑑。 |
조선왕조실록 > 숙종실록 > 숙종 10년 갑자 > 1월 19일 > 최종정보
숙종 10년 갑자(1684) 1월 19일(을유)
10-01-19[01]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여 재이에 대하여 묻다
또 예전에 동방의 땅을 다스린 자는 거의 다 다른 땅에서 왔는데 기자(箕子)ㆍ위만(衛滿)이 이것이며, 유복통(劉福通)은 중국에서 크게 일어나 곧바로 송경(松京)을 쳤고, 납합출(納哈出)은 북방에서 반란하여 자주 변방의 우환이 되었으니, 이것으로 보면 왜서(倭書)가 참된 것이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劉福通大創於中原, 而直擣松京;
해동역사 제15권 / 세기(世紀) 15
고려(高麗) 4
○ 이에 앞서 기해년(1359, 공민왕8)에 요양(遼陽)과 심양(瀋陽) 지방에서 군사들이 일어났을 적에 백성들이 난을 피하여 고려로 흘러 들어갔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중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7월 19일 병신 1번째기사 1413년 명 영락(永樂) 11년
최이ㆍ연사종ㆍ김승주ㆍ이종무ㆍ조비형ㆍ윤곤ㆍ마천목 등을 외방의 군 책임자로 보내다
내가 들으니 옛날 거란(契丹)의 홍군(紅軍)이 있었을 때 본래 우리 나라를 지목하지는 않았으나, 마침내 그 화를 입었다. 만약 이것을 도모한다면 옳은 일이며, 반드시 곡해(曲解)하여 의심할 것도 없다.
홍군(紅軍) : 홍건적(紅巾賊).
> 고전번역서 > 양촌집 > 양촌선생문집 제35권 > 동현사략 > 최종정보
공은 지순(至順 원 문종(元文宗)의 연호) 경오년(1330, 충숙왕17) 송천봉(宋天鳳)의 방(榜)에 세 번째로 급제하였으며, 공민왕(恭愍王) 계사년에 동지공거로 이색(李穡) 등을 뽑았다. ......... 조금 뒤에 서병(西兵 홍건적(紅巾賊)을 가리킨다.)이 패하자 드디어 종사(宗社)를 받들어 남쪽 복주(福州)로 옮기고, 제장(諸將)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게 하였다. 다음해 정월에 서울을 수복하였는데, 승리로 이끈 방략은 거개 공이 지시한 것이었다.
중종 25년 경인(1530) 1월 19일(경술)
25-01-19[01] 석강에서 유보ㆍ신공제 등과 금년 봄의 구황 대책에 대해서 논의하다
고려(高麗) 때 거란[契丹]이 침구하자 공민왕(恭愍王)이 끝내 남쪽으로 피란(避亂)한 일이 있었고, 【거란의 침구는 현종(顯宗) 때의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뢴 것은 틀림없이 잘못 기억한 탓일 것이다.】
영조실록 113권, 영조 45년 9월 25일 甲辰 2번째기사 1769년 청 건륭(乾隆) 34년
구선행이 대답하기를,
"일찍이 국초(國初)에 서변(西邊)을 모두 흙으로 성을 쌓았던 것은 거란[契丹]이 아침에 쳐들어왔다가 저녁에 물러가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 쌓기가 쉽고 또한 허물기 어려웠기 때문에 흙으로 쌓고 돌로 쌓지 않았던 것입니다.
중종실록 15권, 중종 7년 1월 15일 辛酉 8번째기사 1512년 명 정덕(正德) 7년
고려 말엽에 거란[契丹]과 홍군(紅軍)028) 의 변 때도 먼저 소식을 통하고 미리 온다는 소문을 놓지 않았으므로 편안하게 여겨 경계하지 않은 것이 마치 오늘과 같았습니다.
중종실록 103권, 중종 39년 5월 27일 甲子 1번째기사 1544년 명 가정(嘉靖) 23년
전조 말년에 거란[契丹]이 한없이 밀려와 양근(楊根)·충주(忠州)·원주(原州)에까지 들어왔으므로, 문반(文班)과 종친까지 모두 군액에 충당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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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43권, 고종 40년 7월 22일 양력 1번째기사 1903년 대한 광무(光武) 7년
청(淸) 나라의 세조(世祖)가 성경(盛京)에서 일어난 후부터는 국경을 정해놓고 각기 서로 지켰으므로 변방이 편안하고 진과 보들이 조용하여 200여 년 동안이나 변방이 무사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삼엄하던 변방의 방비가 조금씩 해이해져 진과 보를 버려두었으니, 실로 변방의 방어가 극도로 허술하게 된 것입니다.
동광 제36호 1932년 08월 01일 地下에 秘藏된 金銀寶貨, 千古秘密 蒙古의 寶山, 朝鮮 先民의 남긴 遺物, 그 秘鍵은 누구의 손으로 열릴까
高麗族의 유적 그런데 이 寶山의 전설로써 于今에 傳하는 바에 의하면 이 지방은 북으로 산을 끼고 남으로 열리어 小河가 흐르고 잇어 實로 沃野千里이나 이 땅이 金遼시대에 벌서 高麗族의 손으로 개척되어 당시에는 극히 융성한 바 잇엇다 한다. 지금에도 高麗 城跡이 3개소 鼎足의 형으로 존재하엿든 터전이 남어잇다. 듣는 말에는 元朝가 일어나매 高麗族은 맛츰내 戰敗되어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이 되어 그곳에 잇든 3城主는 자기들의 소유물인 金銀財寶가 그대로 敵手에 들
어우집 제1권 / 시(詩)○서수록(西繡錄)
벽단으로 가는 도중에〔碧團途中〕
관산의 제일 봉우리에 말을 세우니 / 立馬關山第一峯
아래로 오랑캐 땅에 접하여 황룡까지 이어졌네 / 平臨胡地接黃龍
광활한 사막은 삼천 리에 펼쳐졌고 / 茫茫沙磧三千里
높고 높은 산맥은 백이관이라네 / 嵲嵲岡巒百二重
삭북의 살벌한 바람에 큰 깃발 나부끼는데 / 朔北陰風隨大旆
남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 찬 봉화에 보내네 / 終南歸思送寒烽
어느 때에 큰 칼로 청해를 평정하고 / 何時尺劍澄靑海
오랑캐 땅 만호후 되어 베개 높이 베려나 / 高枕戎荒萬戶封
> 고전번역서 > 청장관전서 > 청장관전서 제23권 > 편서잡고 3 > 최종정보
철목진(鐵木眞)은 사막 동북 알난하(斡難河)에서 처음 일어나고 와활태(窩闊台)는 사막 서쪽 화림(和林)에서 즉위하니, 본디 당(唐) 나라 때 회골(回鶻)의 비가사한(毗伽司汗)의 옛 성을 회동의 장소로 삼아서, 처음에는 원창로(元昌路)를 세웠고, 나중에 화림사(和林司)로 고쳐 운영하다가,홀필렬이 연경(燕京)으로 천도하여 대도(大都)라고 부르면서부터는 화림 선위사(和林宣慰司)로 개설하여 늘 훈구 왕공으로 통할하게 하였다. 여기서 북으로 3천 리를 가면 아지리해자(阿只里海子)이고, 또 5백 리를 가면 겸주(謙州)ㆍ익란주(益蘭州)이며, 다시 1천 리를 가면 대택(大澤)에 이른다.
상도(上都)는 환주(桓州) 동쪽에 있는데, 온 지역이 모두 소나무여서 천리송림(千里松林)으로도 불린다. 흘필렬이 개평부(開平府)로 일컫다가 이윽고 상도(上都)로 올려 일찍이 그곳에서 피서하였고, 궁궐과 시사(市肆)의 웅장함은 대도와 대등하다. 그리고 동경(東京)은 곧 요양(遼陽)인데, 홀필렬이 요양 등 각 곳에 행성(行省)을 개설하여 통솔한 노(路)가 일곱이었다.
한대(漢代) 이래로 판도(版圖)에 소속된 것이 혼동강(混同江) 이동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는데, 요(遼)와 금(金)이 창흥하면서 비로소 널리 땅을 개척하였고, 원(元)에 와서는 더 멀리 북으로 음산(陰山)을 넘고, 서로 유사(流沙)까지 닿고, 동으로 요좌(遼左)를 다 차지하고, 남으로 해표(海表)를 넘어가서 그 도리(道里)는 숫자로 셀 수가 없다.
고전번역서 > 청장관전서 > 청장관전서 제23권 > 편서잡고 3 > 최종정보
4년(1256, 헌종 6), 유병충(劉秉忠)을 시켜, 환주(桓州) 동쪽 난수(灤水) 북쪽 용강(龍岡)에 성시(城市)와 궁실(宮室)을 영건하고 ‘개평(開平)’이라 하였다.
> 고전번역서 > 치평요람 > 치평요람 제139권 > 송 > 최종정보
이때에 이르러 헌종(憲宗)이 성시(城市)를 건설하고 궁실(宮室)을 수축하여 도회지(都會地)를 조성하려고 하자, 황제 홀필렬이 말하기를, “유병충은 천문(天文)ㆍ지리(地理)의 법에 정밀합니다.”라고 하니, 헌종이 유병충으로 하여금 터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유병충이 “환주(桓州)의 동쪽이자 난수(灤水)의 북쪽에 위치한 용강(龍岡)이 길지(吉地)이다.”라고 하니, 헌종이 유병충으로 하여금 경영하도록 하고, 개평부(開平府)로 이름을 지었는데, 3년이 되어 공역을 다 마쳤다.【21】
기언 제34권 외편 / 동사(東事) 3
말갈(靺鞨)
고구려의 옛 지역이 서경(西京)이니, 또한 압록부(鴨綠府)라고 하고, 신주(神州), 환주(桓州), 풍주(豐州), 정주(正州) 4주를 통할하였다.
동사강목 부록 하권
환도고(丸都考)
《고구려기》의 주(注)에서 《괄지지》를 인용하여,
“환도(丸都)와 국내성은 서로 접하였다.”
하고, 《당서》 지리지에도,
“압록강 어귀에서 배를 타고 1백여 리를 간 다음 작은 배를 타고 동북쪽으로 30리를 거슬러 올라가 박작구(泊汋口)곧 옛날의 안평현(安平縣)이다. 에 이르면 발해(渤海)의 지경이고, 또 5백 리를 거슬러올라가면 환도에 이른다.”
하였으니, 그 땅을 대략 알 수 있다. 김부식이 안시(安市)를 환도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위(魏) 정시(正始) 7년(244)에 관구검(毌丘儉)이 현도로부터 군사를 출동하여 비류수(沸流水)를 건너 환도산에 올라 그 도읍을 도륙했다 한다. 비류는 지금의 파저강인 듯하니, 그것이 국내성과 서로 접했음을 믿겠으며, 지금의 강계(江界)ㆍ이산(理山) 등 강북의 땅에 있었던 것이다. 《요사》지리지에,
“녹주(淥州)는 본래 고구려의 고국(故國)인데, 발해가 서경(西京) 압록부(鴨綠府)라 불렀으며, 신주(神州)ㆍ환주(桓州)ㆍ풍주(豊州)ㆍ정주(正州)를 관할 감독하게 하였다.”
하였으니, 환주가 곧 환도이기 때문에 고국이라 한 것이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영변부(寧邊府)의 검산(劒山)이 곧 옛날의 환도이다.”
하였는데, 대개 방언에 칼을 환도(環刀)라 칭하므로 또한 억측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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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부록 하권
고구려강역고(高句麗疆域考).
또 환도성(丸都城)이 있어 국내성과 서로 접하였다. 발해(渤海)가 고구려의 옛땅에 서경(西京) 압록부(鴨綠府)를 두어 신주(神州)ㆍ환주(桓州)ㆍ풍주(豊州)ㆍ정주(正州)를 거느리게 하였으니, 환주는 바로 환도의 옛땅이다.
동사강목 부록 하권
황룡국고(黃龍國考)
황룡국(黃龍國)은 요지(遼地) 동북쪽 지경에 있었는데,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다. 졸본은 지금 흥경 등지이고 황룡국과 졸본은 이웃 나라라고 칭하였으니, 멀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고려사》 지리지에,
“용강(龍崗)은 옛날의 황룡국이다.”
하였는데, 《여지승람》에도 그대로 따랐다. 무릇 지명이 서로 같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데, 억지로 이렇게까지 부회(傅會)하여 실지로 있었던 것처럼 꾸민 것은 무엇 때문인가?
《통전》에,
“수 양제(隋煬帝)가 고구려를 칠 때 군사들이 많이 병에 걸렸으므로 황룡으로부터 동쪽에 해골이 연달았다.”
하였으니, 요계(遼界)에도 이미 황룡이란 이름이 있었다. 지금 봉천부(奉天府)의 개원현(開原縣)을 또한 황룡부(黃龍府)라 칭하니, 요(遼)가 발해를 칠 때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금사(金史)》에,
“태조(太祖)가 요를 칠 때 황룡성(黃龍城)을 정복하였다.”
하고, 악비(岳飛)가 이른바,
“황룡주(黃龍酒)를 잔뜩 마셨다.”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니, 황룡국과는 다른 것이다.
이익의 《성호사설》 권2 〈옥저읍루〉에 “《일통지(一統志)》에 ‘개원성은 삼만위(三萬衛) 서문(西門) 밖에 있다.’라고 하였고, 《원지(元志)》에는 ‘개원 서남쪽을 영원현(寧遠縣)이라 하고, 또 서남쪽을 남경(南京)이라 하며, 또 남쪽을 합란부(哈蘭府)라 하고, 또 남쪽을 쌍성(雙城)이라 한다.’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개원로(開元路) : 요양성(遼陽城)에 소속된 지명으로, 원나라에서 처음 설치하였다. 《원사》 〈지리지(地理志)〉에 “을미년(1235)에 개원 만호부(開元萬戶府)와 남경 만호부(南京萬戶府)를 설치하고 치소(治所)를 황룡부(黃龍府)에 두었다.”라고 하였다. 지금의 길림성 농안(農安)이라고 한다.
순암선생문집 제10권 / 동사문답(東史問答)
성호 선생에게 올린 편지. 병자년
전일에 여쭌 황룡국(黃龍國)은 하교에서 악비(岳飛)가 일컬은 것으로 해당시키셨습니다. 지금 《성경통지(盛京通志)》를 보니 “요(遼)가 발해(渤海)를 정벌하여 지금의 개원현(開原縣)에 이르니, 황룡이 나타났다. 그래서 황룡부(黃龍府)로 개명하였다.” 하였는데, 악비가 일컬은 것은 이것을 가리킨 것이고, 우리 나라 역사책에서 일컬은 것은 양한(兩漢)의 즈음에 있으니, 옳지 않은 듯싶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2권 / 평안도(平安道)
용강현(龍岡縣)
동쪽은 강서현(江西縣) 경계까지 20리, 남쪽은 삼화현(三和縣) 경계까지 12리, 서쪽은 해안까지 34리, 북쪽은 함종현(咸從縣) 경계까지 17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5리다.
【건치연혁】 옛날 황룡국(黃龍國)이었는데 고구려가 합병하였으며, 고려에서는 황룡성(黃龍城)이라 하였다. 일명 군악(軍岳)이라고도 한다. 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縣)으로 하였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관원】 현령ㆍ훈도 각 1인.
【군명】 오산(烏山)ㆍ군악(軍岳)ㆍ황룡성(黃龍城).
숙종 2년 병진(1676) 8월 21일(신미)
02-08-21[01] 평안도 관찰사 민종도가 용강 황룡 산성을 수축하기를 청하다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민종도(閔宗道)가 용강(龍岡) 땅의 황룡 산성(黃龍山城)을 수축(修築)하여 해변(海邊)의 여섯 고을 인민(人民)의 피병(避兵)할 곳으로 만들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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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재집 제9권 / 서독(書牘)
윤사연에게 보내는 편지 1 기유년(1849, 철종 즉위년)〔與尹士淵 己酉〕
......................................
저는 다섯 달 동안 오랜 이질(痢疾)에 시달렸으니, 평생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겨우 편안해졌지만 원기(元氣)의 손상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공적인 사무와 사적인 일이 어지러이 얽히고설켰으니, 이는 당연한 형세이므로 다시 어찌 하겠습니까.
이곳은 춥고 더움이 특이한 기후라서, 여름에 해당하는 달이라도 서풍(西風)이 불면 곧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아마 ‘북극(北極)에 가깝기 때문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겨울에도 남풍(南風)이 조금 불기만 하면 곧 찌는 듯한 더위를 견딜 수 없는 것이 영외(嶺外 영남(嶺南))에 있을 때보다 심합니다. 형께서는 이것이 무슨 이유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대만(臺灣)과 유구(琉球)로부터 곧장 이 지역에 도달하기까지 만 리의 푸른 바다에 막힌 것이 없어서, 남풍이 한 번 불면 적도(赤道)의 열대(熱帶)가 높은 산이나 거대한 고개 밖으로 흩어지거나 머물지 않고 순식간에 곧장 이곳까지 도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형은 이런 저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주-D001] 윤사연에게 보내는 편지 1 :
1849년(철종 즉위년) 연말에 쓴 편지로, 이때 환재는 그의 첫 벼슬인 용강 현령(龍岡縣令)을 맡고 있었다.
심전고 제2권 / 유관잡록(留館雜錄)
악왕묘기(岳王廟記)
악왕묘(岳王廟)는 송 나라 무목왕(武穆王) 악비(岳飛)의 신을 모신 곳이다. 신위(神衛)를 상설(象設 소상을 안치함)함과 붉은 벽의 궁전이 또한 자못 넓고 크다. 전각 안에는 무목왕의 소상을 안치하였는데, 그 영특한 모습이 씩씩하고 시원스러워 사람으로 하여금 숙연히 공경하게 한다. 뜰에는 돌사람이 하나 있어, 쇠사슬로 꽁꽁 묶이어 문초를 받는데 돌사람이 머리를 조아리어 사죄하는 모습이다. 물어보니 이가 진회(秦檜)이다. 무목왕은 큰 정충 대절(精忠大節)로 장차 신주(神州)를 극복하려고 황룡부(黃龍府)에서 통음(痛飮)하였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9권 / 역대전고(歷代典故)
동국(東國)의 지방을 논하다.
《여지승람》에서는 증거를 대어 분별하지 않고 바로 동명이 낙랑에서 일어났다 하고, 드디어 성천(成川)을 송양국(松讓國)이라 하고, 용강(龍岡)을 황룡국(黃龍國)이라 하며, 우발수(優渤水)가 지금의 영변(寧邊) 묘향산(妙香山)에 있었다 하며, 행인국(荇人國)도 영변 고적(古跡)의 끝에 덧붙이려 하니, 이런 곳이 심히 많은데 모두 틀린 것 같다. 《동사회강》
《고려사지지》에, .......
유리왕이 이미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니, 후에 태자 해명(解明)이 옛 수도에 남아 있으면서 그 이웃나라 황룡국(黃龍國)의 왕과 힘을 겨루다가 그의 아비에게 죽었다고 하였으니, 황룡국은 곧 지금의 황강현(黃岡縣)이다. 이에 의거하여 보건대, 주몽이 도읍한 졸본천은 응당 요동 땅에 있는 것이 아니니, 그렇다면 지금의 성천이 됨은 더욱 의심할 바가 없다.
북여요선 상
백두산 옛 강역에 대한 고찰〔白頭舊疆攷〕
《길림통지(吉林通誌)》에 “고려 북쪽 지역은 ‘별십팔(別十八)’이라고 부르는데 중국어로는 오국성(五國城)이다.” 하였다. 또 “오국성은 옛날에 오국두성(五國頭城)이라고 불렀다. 그 지역이 오국을 총괄하는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얻은 이름인데 후세에 잘못 전해져 단지 오국성이라고만 하였다. 오국은 《요사(遼史)》 〈영위지(營衛志)〉에 부아리국(剖阿里國), 분노리국(盆奴里國), 오리미국(奧里米國), 월리독국(越里篤國), 월리길국(越里吉國)이라고 하였는데, 절도사를 설치하여 통솔하게 하고 황룡부(黃龍府)에 소속시켰다. - 건륭(乾隆) 연간에 부도통(副都統) 작극탁(綽克托)이 백도눌성(伯都訥城)을 쌓던 중에 자단목(紫檀木) 상자에 담겨 1000여 년 동안 묻혀 있던 송나라 휘종(徽宗)이 그린 매 그림 족자를 발굴하였는데, 먹 빛깔이 새것 같았다. 또 옛날 자기 수십 건을 획득하고 아울러 비갈(碑碣)을 얻었는데 휘종 만년(晩年)의 일기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그 대강을 해독할 수 있었는데 ‘천회(天會) 13년(1135, 인종13) 이곳에 거처를 정하였다.’라고 하였다. 몇 해가 지나고서야 비로소 오국성이 이곳인 줄 알게 되었다. - ”라고 하였다. - 이상은 오국성 고적이다. -
성호사설 제2권 / 천지문(天地門)
발해황룡(渤海黃龍)
백두산의 근원이 서북쪽으로부터 뻗은 것을 장령(長嶺)이라 하고, 백두산의 물이 북쪽으로 흘러 흑룡강으로 들어가는 것을 혼동강(混同江)이라 하며, 백두산의 남쪽 물이 동북쪽으로 흐르는 것을 두만강이라 하고, 서북쪽으로 흐르는 것을 압록강이라 한다.
..........................
요즘 사람들이 성천을 졸본으로 삼는 것은 잘못이며, 발해의 졸빈(卒賓)이 그 땅이 아닌가 한다.
뒤에, “고구려가 국내성으로부터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으나 처음에는 압록강 서쪽에 있었으며 황룡국(黃龍國)을 멸망시켰다.” 했으니, 악비(岳飛)가, “곧바로 황룡부(黃龍府)에 다다랐다.”고 일컬은 것이 그것이며 용강현(龍岡縣)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요즘 요서에 아직 황룡성(黃龍城)이라는 것이 있으니, 고구려라는 것은 의주 바깥 말갈 서쪽이 바로 그 땅이 아니었나 싶다.
성호전집 제26권 / 서(書)
안백순에게 답하는 편지 병자년(1756, 영조32) 〔答安百順 丙子〕
맹자(孟子)가 “주나라 이래로 700여 년이 되었다.〔由周以來七百有餘歲〕”라고 하였는데, 실제는 809년입니다. 《집주(集註)》에는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사이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문왕으로부터 계산한다면 여기에 다시 약간의 연수(年數)를 더해야 합니다. 이것조차도 이러한데 중국에서 외국의 연대를 계산한 것을 어찌 일일이 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우리나라의 역사책을 따라야 합니다.
황룡국(黃龍國)은 악비(岳飛)가 일컬은 황룡부(黃龍府)가 이것입니다. 지금 요서(遼西)에 아직도 황룡성(黃龍城)이 있습니다.
국내성(國內城)이 분명히 압록강의 서쪽 바닷가 근처에 있었으니, 비류수(沸流水)는 필시 그 근처에 있었을 것입니다.
해동역사 속집 제9권 / 지리고(地理考) 9
발해(渤海)
《신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열전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옛 지역을 서경(西京)으로 삼고 부의 이름을 압록부(鴨綠府)라고 하였는데, 신주(神州), 풍주(豐州), 환주(桓州), 정주(正州)를 관할하였다.” 하였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녹주(綠州) 압록군(鴨綠軍)은 절도(節度)를 둔다. 본디 고구려의 옛 나라이다. 발해 때에는 서경 압록부(西京鴨綠府)라고 하였다. 신주, 풍주, 환주, 정주의 일을 도독(都督)한다. 옛 현은 셋으로 신록(神鹿), 신화(神化), 검문(劍門)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 환주는 고구려 환도성(丸都城)이다. 옛 현은 셋으로 환도(桓都), 신향(神鄕), 기수(淇水)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고구려 왕이 이곳에 궁궐을 창건하자 나랏사람들이 신국(新國)이라고 하였다. 5대손인 고쇠(高釗) 때에 이르러 진(晉)나라 강제(康帝) 건원(建元) 초에 모용황(慕容皝)에게 패하여 궁실이 분탕질당하였다. 녹주에 예속되었다. 서남쪽으로 200리 되는 곳에 있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 용주 황룡부(黃龍府)는 본디 발해의 부여부이다.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서 돌아오다가 이곳에 이르러 붕어(崩御)하자 황룡이 나타난 일이 있으므로 이름을 고쳤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황룡고성(黃龍古城)이 개원현의 경내에 있는데, 본디 발해의 부여부였다. 지금 개원현이 길림(吉林), 오라(烏喇)의 서북쪽에 있으며, 옛 개원성(開元城)의 치소는 현의 경내에 있지 않은바, 이곳이 황룡부의 옛 성임을 알 수가 있다.
《원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원로(開元路)는 옛 숙신 지역이다. 수당(隋唐) 시대에는 흑수말갈이라 하였으며, 그 뒤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이 모두 역속하였다. 또 그 뒤에는 여진(女眞)이 요나라를 멸망시키고는 즉시 상경(上京)에 도읍을 세우고 회령부(會寧府)로 삼았다. 금나라 말기에 금나라의 장수 포선만노(蒲鮮萬奴)가 요동 지역에 웅거하였다. 원나라 초기인 계사년(1233)에 군사를 출동시켜 정벌하여 포선만노를 사로잡았다. 군사가 개원(開元), 휼품(恤品)에 이르기까지 동쪽 지역을 모두 평정하였다. 개원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처음 나온다. 을미년(1235)에 개원 만호부(開元萬戶府)와 남경 만호부(南京萬戶府)를 설치하였는데, 치소는 황룡부(黃龍府)였다. 지원(至元) 23년(1286)에 이르러서 개원로로 고쳤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삼만위(三萬衛)는 개원현의 성안에 있으며, 명나라 홍무(洪武) 22년(1389)에 설치하였다. 살펴보건대, 《대명일통지》에, “삼만위는 본디 옛 숙신씨 지역이며, 뒤에 읍루(挹婁)라 하였고, 원위(元魏) 때에는 물길(勿吉)이라 하였고, 수나라 때에는 흑수말갈이라 하였다. 당나라 때에는 개원 연간에 흑수부(黑水府)를 설치하였고, 원화(元和) 연간 이후에는 발해에 복속되어 상경 용천부가 되었다. 거란이 발해를 공격하자 흑수말갈이 그 틈을 타서 그 지역을 다시 수복하고는 숙여직(熟女直)이라고 하였다. 그 뒤에 요나라를 멸망시키고는 드디어 여기에 도읍을 세우고서 국호를 금(金)이라고 하였다. 그 뒤에 연(燕) 지역으로 도읍을 옮기고는 이곳을 고쳐서 회령부(會寧府)로 삼고는 상경(上京)이라고 불렀다. 원나라 때에는 개원로(開元路)로 고쳤다. 홍무 21년(1388)에 올자야인걸례미여진군민부(兀者野人乞例迷女眞軍民府)를 설치하였다가 22년에 부를 혁파하고 삼만위를 설치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삼만위는 발해 때에는 부여부(扶餘府)라 하였고, 요나라 때에는 황룡부(黃龍府)라 하였고, 금나라 때에는 회령부라 하였고, 원나라 때에는 개원로라 하였는데, 사실은 같은 곳이다.
. 《요사》에는 이르기를, ‘태조가 황룡부를 두었다가 보령(保寧) 연간에 폐지하였으며, 개태(開泰) 9년(1020)에 다시 용주를 설치하였다.’ 하였다. 그런즉 금나라의 회령부가 바로 요나라의 황룡부임을 알 수가 있다.” 하였다. 《성경통지》에 또 이르기를, “황룡부는 본디 발해의 부여부이다. 요나라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다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황룡이 성 위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1리에 걸쳐 뻗었으며, 광채가 휘황찬란하였으므로, 이를 인하여 황룡부라고 이름하였다. 그런즉 요나라의 황룡부가 바로 발해의 부여부임을 알 수가 있다.” 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나라의 요동군에는 요양현이 있는데, 대량수(大梁水)와 요수(遼水)가 만나는 곳이다. 거란이 이곳에 요양부를 두었다. 구양수(歐陽脩)의 《신당서》를 보면, 황룡부에서 서북쪽으로 1300리를 가면 요양부에 이른다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요양부는 거란의 동경(東京)인바, 옛 발해 지역은 연경(燕京)에서 2510리 거리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봉천부 승덕현은 진(秦)나라 이전에는 숙신씨 지역이었고, 한나라, 진(晉)나라, 당나라 때에는 읍루국에 속하였다. 당나라 예종(睿宗) 때 발해 대씨에게 속하여 심주를 설치하였는데, 정리부에서 관할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흥료군을 설치하였고, 뒤에 소덕군(昭德軍)으로 개칭하였다. 금나라 때에는 심주(瀋州)의 치소가 되었다. 원나라 초기에는 심주에 안무고려군민총관부(按撫高麗軍民摠管府)를 설치하였다가 얼마 뒤에 심양로(瀋陽路)로 고쳤다. 명나라 홍무(洪武) 연간에 심양중위(瀋陽中衛)를 두어 요동도지휘사(遼東都指揮司)에 예속시켰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성경(盛京)이 되었으며, 강희(康煕) 13년(1674)에 승덕현을 설치하여 수읍(首邑)으로 삼았다
청장관전서 제23권 / 편서잡고 3(編書雜稿三)
송사전 몽고열전(蒙古列傳)
개회(開禧 송 영종(宋寧宗)의 연호) 2년(1206, 몽고 태조(蒙古太祖) 1), 알난하(斡難河)에서 모든 부장을 모아놓고 구유백기(九游白旗)를 세우고 황제에 즉위하니, 여러 신하들이 성길사가한(成吉思可汗)이란 존호를 올렸다.
……………………….
4년(1256, 헌종 6), 유병충(劉秉忠)을 시켜, 환주(桓州) 동쪽 난수(灤水) 북쪽 용강(龍岡)에 성시(城市)와 궁실(宮室)을 영건하고 ‘개평(開平)’이라 하였다.
……………………………..
홀필렬은 그 말을 옳게 여겨 전(倎)을 호위하여 보내고 경내에 중서성(中書省)을 세우라 명하여 왕문통(王文統)을 평장정사(平章政事)로, 장문겸(張文謙)을 좌승(左丞)으로 삼았다. 장문겸은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으로 주무를 삼았다. 학경(郝經)을 국신사(國信使)로 삼아 화친을 제의하였다. 처음으로 관제(官制)를 제정하였다. 아리불가(阿里不哥)가 아람답아(阿藍答兒)를 시켜 막북(漠北) 제부의 군대를 동원하고 화림(和林)에서 제라 칭하였다.
………….
유병충(劉秉忠)이 연경(燕京) 천도를 청하니, 그것을 받아들이고 중도(中都)로 개칭하였다. 아합마(阿合馬)가 주철(鑄鐵)의 이익을 일으키자고 청하여 평장정사(平章政事)에 초배(超拜)되었다.
…………………………..
홀필렬(忽必烈)이 통일 이전의 연호를 중통(中統)으로 개원하니 무릇 4년이다. 지원(至元) 16년 2월에 비로소 천하를 통일하였다.
철목진(鐵木眞)은 사막 동북 알난하(斡難河)에서 처음 일어나고 와활태(窩闊台)는 사막 서쪽 화림(和林)에서 즉위하니, 본디 당(唐) 나라 때 회골(回鶻)의 비가사한(毗伽司汗)의 옛 성을 회동의 장소로 삼아서, 처음에는 원창로(元昌路)를 세웠고, 나중에 화림사(和林司)로 고쳐 운영하다가, 홀필렬이 연경(燕京)으로 천도하여 대도(大都)라고 부르면서부터는 화림 선위사(和林宣慰司)로 개설하여 늘 훈구 왕공으로 통할하게 하였다. 여기서 북으로 3천 리를 가면 아지리해자(阿只里海子)이고, 또 5백 리를 가면 겸주(謙州)ㆍ익란주(益蘭州)이며, 다시 1천 리를 가면 대택(大澤)에 이른다.
상도(上都)는 환주(桓州) 동쪽에 있는데, 온 지역이 모두 소나무여서 천리송림(千里松林)으로도 불린다. 흘필렬이 개평부(開平府)로 일컫다가 이윽고 상도(上都)로 올려 일찍이 그곳에서 피서하였고, 궁궐과 시사(市肆)의 웅장함은 대도와 대등하다. 그리고 동경(東京)은 곧 요양(遼陽)인데, 홀필렬이 요양 등 각 곳에 행성(行省)을 개설하여 통솔한 노(路)가 일곱이었다.
한대(漢代) 이래로 판도(版圖)에 소속된 것이 혼동강(混同江) 이동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는데, 요(遼)와 금(金)이 창흥하면서 비로소 널리 땅을 개척하였고, 원(元)에 와서는 더 멀리 북으로 음산(陰山)을 넘고, 서로 유사(流沙)까지 닿고, 동으로 요좌(遼左)를 다 차지하고, 남으로 해표(海表)를 넘어가서 그 도리(道里)는 숫자로 셀 수가 없다.
. 북경연혁(北京沿革)
원(元)은 대도(大都)라 하였는데, 그 궁궐의 유허(遺墟)는 지금의 안정문(安定門) 밖에 있다. 성의 둘레는 60리요, 11문이 있었다. 동쪽은 제화문(齊化門)ㆍ숭인문(崇仁門)ㆍ광희문(光煕門), 남쪽은 여정문(麗正門)ㆍ문명문(文明門)ㆍ순승문(順承門), 서쪽은 화의문(和義門)ㆍ평칙문(平則門)ㆍ숙청문(肅淸門), 북쪽은 건덕문(建德門)ㆍ안정문(安定門)이라 한다. 그 후에 개평부(開平府)로 도읍을 옮기고는 상도(上都)라 일컬었으니, 바로 지금의 거용관(居庸關)이다. 대도(大都)를 고쳐 중도(中都)라 하고 부(部), 성(省)을 나누어 세웠다
[《통감속편(通鑑續編)》 23권 〈이종황제(理宗皇帝)〉]
몽고(蒙古)의 유병충(劉秉忠)이 연(燕)에 도읍을 정할 것을 청하니, 세조(世祖)가 이를 따르고 조서를 내려 궁실과 성지(城池)를 수축하라고 하였다. 이에 중서성(中書省)에서 아뢰기를, “개평부(開平府)는 궐정(闕廷 조정(朝廷))이 있는 곳이라 하여 상도(上都)라는 호칭을 더하였습니다. 연경(燕京)은 지금 궁실을 짓고 성부(省部)를 분립(分立)하여 사방의 사람들이 모였으니, 청컨대 이름도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조서를 내려서 중도로대흥부(中都路大興府)라 하였다.【72】
성호사설 제24권 / 경사문(經史門)
공사 항해(貢使航海)
명(明) 나라 초기에 요새(遼塞)의 길이 끊이자, 그쪽 조사(詔使)와 우리나라 공사(貢使)가 모두 항해(航海)로 왕래하였다. 경신제(庚申帝)는 비록 사막(沙漠)지대 응창부(應昌府)에서 죽었어도 그가 처음 나올 때는 상경(上京)으로 도망쳐갔으니 상경이란 데는 발해(渤海) 지대로서 글안(契丹) 동쪽에 있었다. 대개 산해관(山海關)을 거쳐 나오는데 우리나라와는 상거가 아주 가깝다.
이때 우리나라는 그에게 달려가 문안하기를 자주하였는데, 우리의 역사에는 이 사실을 숨겼으니 우스운 일이다. 공양왕(恭讓王) 3년(1391) 겨울에 이첨(李詹)이 왕에게 여쭈기를, “원 나라 말기에 순제가 북쪽 상도(上都)로 파천(播遷)했을 때 달려가 문안하기를 오직 부지런히 했습니다. 이는 신등(臣等)이 친히 목도한 것인데, 이렇게 신절(臣節)을 굳이 지킨 것은 딴 나라가 따르지 못했습니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헛말이겠는가?
홍무(洪武) 2년(1369)에는 우리 군사가 이미 동녕부(東寧府)를 쳐부수고 국교를 끊는다는 뜻을 보였고, 이듬해에는 오랑캐 이원경(李原景) 등과 원 나라 평장사(平章事) 기새인(奇賽因)ㆍ첩목아(帖木兒) 등이 와서 동녕부를 점거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비 기철(奇轍)을 죽였다 하여 북쪽 변방을 침략하면서 원수를 갚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므로 또 우리 태조(太祖)에게 명하여 가서 치도록 했는데, 과연 그들이 성을 함락시키고 나아가 요성(遼城)까지 습격하여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그때 요ㆍ심(遼瀋) 지대는 모두 원 나라 소유로 되었을 것이다. 이때 명조(明祖)는 아직 남경(南京)에 있어서 위엄과 호령이 여기까지는 미치지 못했었다.
홍무(洪武) 9년(1376)에 이르러 북원(北元)이 신우(辛禑)를 책봉(冊封)하여 고려왕(高麗王)으로 삼고 다시 원 나라의 선광(宣光) 연호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또 11년(1378)에 이르러서는 다시 홍무 연호를 사용하였으니, 그 엎치락뒤치락함이 이와 같았다.
[《사전삼편(史傳三編)》 명신전(名臣傳) 33권 〈유병충전(劉秉忠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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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이르러 헌종(憲宗)이 성시(城市)를 건설하고 궁실(宮室)을 수축하여 도회지(都會地)를 조성하려고 하자, 황제 홀필렬이 말하기를, “유병충은 천문(天文)ㆍ지리(地理)의 법에 정밀합니다.”라고 하니, 헌종이 유병충으로 하여금 터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유병충이 “환주(桓州)의 동쪽이자 난수(灤水)의 북쪽에 위치한 용강(龍岡)이 길지(吉地)이다.”라고 하니, 헌종이 유병충으로 하여금 경영하도록 하고, 개평부(開平府)로 이름을 지었는데, 3년이 되어 공역을 다 마쳤다
추강집 제1권 / 시(詩)○오언고시(五言古詩)
8월 20일, 선친의 공문우(空門友) 일암(一庵) 스님을 구월산(九月山) 패엽사(貝葉寺)에서 찾아뵈었다. 이날은 바로 선친의 기일(忌日)이라, 대사께 청하여 열반당(涅槃堂)에서 제사를 올리고 이어 옛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사의 연세는 여든셋이다.
현도는 한사군의 하나라오 / 玄菟漢四郡
홍건적이 극성에서 죽었고 / 紅巾死棘城
칠불이 고구려 국운 부지했소 / 七佛扶麗運
박천은 어별교 놓았던 강 / 博川魚鱉橋
흘골산은 송양을 봉한 곳 / 紇骨松讓封
수양산은 지금의 해주 땅 / 首陽今海州
용강은 옛날의 황룡국이라 / 龍岡古黃龍
아득하고 아득한 천고의 일들 / 茫茫千古事
역력히 눈앞에서 헤아려보았소 / 歷歷目前數
근심을 펼칠수록 마음 더욱 어지럽고 / 舒憂心愈亂
억지로 노래할수록 소리 더욱 괴롭소 / 强歌聲愈苦
잠곡유고 제2권 / 시(詩)○오언 율시(五言律詩) 68수
한식날에 느낌이 있어서. 석실(石室)에게 바치다.
황룡부라 오랑캐 땅 나그네 되어 / 爲客黃龍府
지체되어 있는 사이 중춘 되었네 / 淹留已仲春
어떻게 한식날을 견디어 내리 / 那堪逢熟食
나 홀로서 외로이 명절 보내네 / 獨自過佳辰
석실이라 높은 산 아래이고요 / 石室高山下
금촌이라 큰 강물 물가라오 / 金村大水濱
선산에는 향불 피어 오를 것임에 / 松楸杳香火
남쪽 보며 각자 눈물 수건 적시네 / 南望各霑巾
오음유고 제1권
또
이곳의 흥망이 몇 번이나 되었던고 / 此地興亡問幾秋
고인이 가버렸으니 아는 이 많지 않네 / 古人逝矣識何優
우뚝한 황룡성은 하늘이 낸 요새이고 / 黃龍城峙天爲險
황량한 학사대는 자취가 이미 사라졌네 / 學士臺荒跡已浮
서울 떠나 꿈속에서 옛 친구를 그리고 / 去國夢魂懷舊友
옷을 받고 호기롭던 옛사람을 떠올렸네 / 拜衣豪氣想前修
고금을 생각하매 생각이 무궁하여 / 感今思古無窮意
종일토록 깊이 읊조리나 누가 함께 창수할꼬 / 竟日沈吟誰與酬
당 태종이 안시성(安市城) 아래에 이르러 성주가 견고하게 수비하는 것을 가상히 여겨 옷을 하사하였다. 성주가 성 위에서 절하고 받았다. ○ 박선(朴善)이 처음에 옥당(玉堂)의 학사(學士)로서 이 고을에서 수령 노릇을 하였는데, 후인들이 그를 그리워하여 그가 노닐던 곳을 ‘학사대(學士臺)’라고 이름하였다.
오산집 제4권 / 오언배율(五言排律)
재차 앞의 운자로 시를 짓다
그림 같은 누각은 땅바닥이 안 보이나 / 畫閣臨無地
첩첩의 성 위에는 하늘이 또 있었지 / 層城上有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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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옛날의 일로서 전해졌지 / 兵爭舊事傳
삼한에 도움이 필요할 경우에는 / 三韓如有助
칠불과 인연이 없을 수 있겠는가 / 七佛豈無緣
오늘 저녁부터 흥취가 생기니 / 發興從今夕
위난에 임하면 고현이 생각나지 / 臨危憶古賢
황룡의 도로는 자새로 통하였고 / 黃龍通紫塞
현도의 지역은 변방에서 끝났지 / 玄菟盡荒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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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자루 두들기다 가을 연잎 털어 봤지 / 彈劍拂秋蓮
[주-D004] 황룡(黃龍) :
부(府)의 이름이다. 거란(契丹) 천현(天顯) 원년에 설치하였는데, 소재지는 지금 길림성(吉林省) 농안현(農安縣)에 있다.
양(梁)나라 원제(元帝)의 시
황룡수 북쪽에는 꽃이 비단 같은데 / 黃龍戍北花如錦
현도성 앞에는 달이 눈썹 같구나 / 玄菟城前月似蛾
《고시기(古詩紀)》
진(陳)나라 후주(後主)의 시
황룡성 바깥으로 곧바로 치달리고 / 直去黃龍外
현도성 끝으로 비스듬히 내달리네 / 斜趨玄菟端
《상동》
택당선생집 제1권 / 시(詩)
경성(鏡城) 절구 10수
두만강 남쪽 마천령(磨天嶺) 북쪽 / 豆滿江南磨嶺北
하늘이 연 이역 중국과의 경계로세 / 天開異域限神京
그 당시 얼마나 병탄하고 할거했나 / 並呑割據當時事
전투 정벌 그 명성 후세에 드날리네 / 戰伐飛騰後世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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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마산 앞 가을 풀 하얗게 세고 / 介馬山前秋草白
황룡성 저 밖엔 누런 저녁 구름 / 黃龍城外暮雲黃
서풍에 실린 피리 소리 애가 끊이는 듯 / 西風一笛傷心事
차마 산에 올라 고향 하늘 못 보겠네 / 不爲登高望故鄕
정벌하고 다스릴 법 물어볼 사람 없이 / 征謀治法無人問
단검에 긴 옷소매 이 길이 잘못되었도다 / 短劍長裾此道非
우습다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지려 하다니 / 萬戶封侯堪一笑
종군시(從軍詩)나 한 백 편 지어 갖고 돌아가리 / 從軍貯得百篇歸
속동문선 제8권 / 칠언율시(七言律詩)
요양 도중 기의목 황언평 동년(遼陽途中寄義牧黃彦平同年)
신종호(申從濩
강 머리에 멀리 전송하노라고 가는 깃발을 멈췄더니 / 江頭遠送駐行旌
이별한 뒤에 아직 길고 긴 슬픈 심정이누나 / 別後悠悠尙慘情
천리의 관하에는 해가 저물었는데 / 千里關河年律暮
오경의 바람과 눈에 꿈속의 혼이 놀랬도다 / 五更風雪夢魂驚
산은 막북의 황룡새에 잇달았고 / 山連漠北黃龍塞
길은 요동의 철봉성으로 향한다 / 路向遼東銕鳳城
돌아올 기약 손꼽아 보면 내년 중춘에 있거니 / 屈指歸期在春半
술 한 잔 들면서 그대와 함께 마실 때를 생각한다 / 一杯恩與共君傾
미산집 제2권 / 시(詩)
오산에서 봄 구경을 하다〔鰲山賞春〕
붉은 살구꽃 숲에 몇 번이나 봄바람 불었나만 / 幾度風吹紅杏林
장부 처리에 겨를 없어 늦게서야 찾아왔네 / 簿書無暇晩來尋
누대 높고 바위 서 있으니 선생의 형상이요 / 臺高石立先生像
산 고요하고 새 우니 태고의 마음일세 / 山靜禽啼太古心
무우대(舞雩臺)에 올랐는데, 김모재(金慕齋)가 노닐었던 곳이다. 황룡산성(黃龍山城)에 들어가니, 선우(鮮于)의 옛 도성인데 기자전(箕子殿)의 옛터가 있다.
꽃 아래로 자리 옮기니 수놓은 장막 같고 / 花底移筵當繡幕
담쟁이 그늘로 지팡이 날려 거문고소리 기다리네 / 蘿陰飛策候鳴琴
봄을 만나니 문득 고향 생각 일어나는데 / 逢春忽起鄕園想
금년에도 한강 가의 회포를 또 저버리네 / 又負今年漢上襟
[주-D001] 오산(鰲山) :
평안도 용강군(龍岡郡)에 있는 산이다. 현종 때 건립한 오산서원(鰲山書院)이 있는데, 김안국(金安國)과 김정국(金正國)을 모신 서원이다.
[주-D003] 황룡산성(黃龍山城) :
지금의 평안남도 용강군 남포시 옥도리에 소재한 고구려 산성이다. 1675년 조선 숙종 때 다시 수리하여 쌓았다.
무명자집 시고 제6책 / 시(詩)
영동사 15〔其十五〕
평양의 토산에 무덤 하나 있으니 / 平壤兔山有塚原
면면한 세 성씨 후손임이 분명하네 / 綿綿三姓驗雲孫
지금까지 숭인전에 제사를 지내니 / 至今血食崇仁殿
만대토록 기자 은택 잊기 어렵다오 / 萬世難忘箕子恩
평양부(平壤府) 북쪽 토산(兔山)에 기자묘(箕子墓)가 있다. 이정귀(李廷龜)의 숭인전(崇仁殿) 비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마한(馬韓) 말에 잔손(孱孫) 세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친(親)’으로 뒤에 한씨(韓氏)가 되었다. 또 한 사람은 ‘평(平)’으로 기씨(奇氏)가 되었다. 또 한 사람은 ‘양(諒)’으로 용강(龍岡) 오석산(烏石山)에 들어갔는데 뒤에 선우씨(鮮于氏)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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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상도로(上都路) 현 승덕부에 열하성이 있었다는 내용이다.
막북행정록 서(漠北行程錄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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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는 황제의 행재소(行在所 군주가 임시 머무는 곳)가 있는 곳이다. 옹정 황제 때에 승덕주(承德州)를 두었는데, 이제 건륭 황제가 주(州)를 승격시켜 부(府)로 삼았으니 곧 연경의 동북 4백 20리에 있고, 만리장성(萬里長城)에서는 2백여 리이다. 《열하지(熱河志)》를 상고해 보면,
“한(漢) 시대에 요양(要陽)ㆍ백단(白檀)의 두 현(縣)으로 어양군(漁陽郡)에 속하였고, 원위(元魏) 때에는 밀운(密雲)ㆍ안락(安樂) 두 군(郡)의 변계로 되었고, 당대(唐代)에는 해족(奚族)의 땅이 되었으며, 요(遼)는 흥화군(興化軍)이라고 하여 중경에 소속시켰고, 금(金)은 영삭군(寧朔軍)으로 고쳐서 북경에 소속시켰으며, 원(元)에서는 고쳐서 상도로(上都路)에 속하였다가 명(明)에 이르러서는 타안위(朶顔衛)의 땅이 되었다.”
하니, 이는 곧 이때까지 열하의 연혁(沿革)이다. 이제 청(淸)이 천하를 통일하고는 비로소 열하라 이름하였으니 실로 장성 밖의 요해의 땅이었다. 강희 황제 때로부터 늘 여름이면 이곳에 거둥하여 더위를 피하였다. 그의 궁전들은 채색이나 아로새김도 없이 하여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 이름하고, 여기에서 서적을 읽고 때로는 임천(林泉)을 거닐며 천하의 일을 다 잊어버리고는 짐짓 평민이 되어 보겠다는 뜻이 있는 듯하다.
고전번역서 > 연행록선집 > 연행기 > 연행기 제1권 > 진강성에서 열하까지[起鎭江城至熱河] ○ 경술년 > 최종정보
승덕부(承德府)는 한(漢) 나라 때에는 요양(要陽), 백단(白檀) 두 현(縣)을 만들어 어양군(漁陽郡)에 예속시켰고, 후위(後魏)에서는 안락(安樂), 밀운(密雲) 두 군(郡)의 변방 경계로 삼았으며, 당(唐) 나라 때에는 해(奚) 종족의 땅이 되었고, 요(遼)에서는 북안주 흥화군(北安州興化軍)을 두어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에 예속시켰다. 금(金)에서는 흥주 영삭군(興州寧朔軍)으로 고쳐서 북경로(北京路)에 예속시켰고, 원(元)에서는 중통(中統) 연간에 고쳐 상도로(上都路)에 예속하게 하였으며, 명(明)에서는 타안위(朶顔衛)의 땅으로 하였다. 청 나라에서는 처음엔 열하(熱河)라고 일컬었는데, 강희 연간에 처음으로 피서산장(避暑山莊)을 설치하였으며, 옹정(雍正) 연간에는 승덕주(承德州)를 두었고 건륭 병신년(1776, 영조 52)에는 승격시켜 승덕부라 하였다.
> 고전번역서 > 연행록선집 > 연행기 > 연행기 제2권 > 열하에서 원명원까지[起熱河至圓明園] ○ 경술년 > 최종정보
난평현은, 당 나라 때에는 해왕부 서성(奚王府西省)의 땅이었는데, 요(遼)에서는 북안주 흥화군(北安州興化軍)을 두어 중경(中京)에 예속시켰고, 금(金)에서는 흥주 영삭군(興州寧朔軍)으로 하였으며, 원(元)에서도 그대로 흥주(興州)로 하여 상도로(上都路)에 예속시켰는데, 속칭(俗稱) 대흥주(大興州)라고 하였다. 명 나라 홍무(洪武) 연간에는 상우춘(常遇春)이 야속(也速)을 전녕(全寧)에서 깨뜨리고 대흥주로 진격하여, 그 지키는 군사를 무너뜨린 뒤, 신개령(新開嶺)을 넘어 개평(開平)을 이기고, 드디어 흥주를 북평부(北平府)에 예속시켰다. 뒤에 흥주(興州) 좌(左), 우(右), 중(中), 전(前), 후(後)의 5위(衛)로 고쳤다. 영락(永樂) 초에 내지로 위(衛)를 옮기고, 흥주는 타안(朶顔)의 경계가 되었다. 청 나라 초기에 객라하둔(喀喇河屯)이 되었다가, 건륭(乾隆) 병신년(1776, 정조 즉위년)에 난평현(灤平縣)으로 승격시켜 승덕부(承德府)에 예속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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