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로 五百里 南北으로 二百五十里되는 고비戈壁

2022. 11. 2. 18:03백두산

태극학보 제10호   >   支那地理 續

잡지명 태극학보 제10호  
발행일 1907년 05월 24일  
기사제목 支那地理 續  
필자 韓明洙  
기사형태 학술  

支那地理 續
韓明洙

長江下流域에 江蘇, 淅江安徽 三省이 有니 淅江, 安徽의 一部는 南北嶺의 餘脈이連亘얏스 其 外는 平坦 廣野요 長江이 其 中央 東西로 流고 大運河는 其 南北으로 貫야 運便이 多고 物産은 米, 棉花, 蠶絲가 出며 江蘇沿岸은 出入이 少 淅江沿岸은 杭州灣으로붓터 良港과 舟山列島가 多니라. 上海는 楊子江 支流 吳松江左岸에 在니 長江流域과 及 北支那地方 貿易의 中心地가<37>되야 蠶絲, 棉花, 麥稈眞田, 鷄卵 等을 輸出고 人口는 六十二萬이요. 蘇州는 上海西北의 有니 蠶業이 繁盛야 楊子江으로 絹織을 輸運야 各處로 出며 杭州는 錢塘을 臨 故로 水利가 最好고 七十萬人口가 住居야 絹織物를 爲業는 바 手巧가 精細며 其 東에 寧波가 有니 海産物의 市場이요 絹布, 棉花, 蠶絲도 亦多니라. 江寧은 楊子江右岸에 在(昔稱 南京)고鎭江은 江寧 東便의 有니 此西地方에 産品 中 陶器, 緞, 綢, 紋織이 世界에 有名고 水陸의 交通과 風景의 秀麗와 魚鹽의 豊富이 全國에 第一이요. 蕪湖는 楊子江南岸에 在니(卽 江寧西南이라)製絲, 製茶, 飼養의 業이 豊盛고 四川地方으로붓터 筏乘이 流下 故로 木材도 不少니라.

長江 中流域에 三省이 有니 湖北은 漢水의 流域이요. 湖南은 洞庭湖를 回圍고 江西는 번陽湖가 中央을 占얏스니 水上交通이 皆 好며 湖北에는 棉花, 阿片, 銅, 鐵, 湖南과 江西에는 茶와 石炭 等 鑛産이 産出고 漢水, 長水가 會合는 漢口는 支那 內地 商業의 中心地니 水陸의 通路가 四通八達야 物貨의 貿易과 集散에 盛大이 上海의 支次니 輸出品에 主要는 茶, 豆類, 豆糟, 藥材, 木油 等이요 人口는 八十五萬이라. 自此로 長江을 上면 沙市, 宜昌, 이니 宜昌西에 南北 兩嶺의 山勢가 能層고 高險니 自古로 有名 三峽이라. 武昌, 漢陽은 漢口와 鼎足의 勢를 成니 武昌에 住民은 半이 船居고 水上에셔 市街交易고 紡績과 及 絹織物을 製出며 漢陽에는 槍砲局과 鐵政局을 設고 兵器를 製作니라. 岳州는 洞庭湖와 長江의 會合處인 故로 湖南船路가 當地를 經야<38>洞庭湖, 湘水를 溯야 湘潭지 達며 九江은 鄱陽湖畔에 有니 茶, 陶磁器, 가 産니라.

長江 上流域은 南에 貴州, 北에 四川이 有니 四川은 古蜀地라. 山脈이 四圍야 特別히 一區를 成야 交通은 不便 他地方에 比면 物産이 豊富니 農産은 茶, 蠶絲, 阿片이요 鑛産은 石炭, 銅, 鐵, 石油니라. 貴州는 地味가 薄瘠고 水銀이 特産이며 昔日에 蠻夷의 地方인 故로 三苗 等 蠻人이 多니라. 重慶은 上流域에 物貨가 集散는 大市場이요 其 西北에 成都는 古蜀漢의 都邑인 故로 市街가 壯麗고 織物, 染物, 刺繡 等 工業이 發達니라. 珠江은 南支那 山地間을 東西로 貫流얏고 福建은 閩江流域에 屬야스니 其 沿海 一帶에 出入交通이 多고 良港과 島嶼가 羅列야스며 福州, 厦門에 貿易港이 有고 其 對岸에 臺灣이 有니라. 福州는 古來로 外國 貿易市場인 故로 外國人 居留地와 通信局 等이 有고 人口 百萬이니라. 馬尾는 閩江을 臨 小邑이니 有名 船政局이 有고 厦門은 福州西南에 在 小島ㅣ니 外人의 居留地가 有니라.

珠江流域에 廣東, 廣西, 雲南 三省이 有니 雲南, 廣西는 山地가 多 故로 鑛産이 特多고 廣東은 南方一帶가 海濱이니 南淸貿易의 中心市場이라. 人口가 二百萬이요 市街가 狹隘야 人民이 河上에 船居는 者 多고 絹, 茶가 輸出의 主가 되 香港에 貿易이 盛大 故로 此 地에 貿易키 不振니라. 珠江 上流는 急湍이니 梧州가 開港場이요 下流域은 平野가 廣開고 物産이 多出며 氣候가 溫和니 廣東, 四川이라 稱는 地니라. 山頭는 廣東의 東海를 臨얏스니 漁利가 多니라.<39>英領地 香港島는 珠江口에 在 一小島니 九龍半島와 相對야 其 間이 自然히 良港이 되니라. 其 市街는 빅토리아라 稱니 上海와 갓치 東洋貿易의 中心이라. 本港은 自由貿易港이니 阿片, 砂糖, 麵紛, 食鹽 等의 貿易의 主品이요茶, 絹이 其 次이며 九龍半島 附近도 英領이 되니라. 澳門은 葡萄牙領에 開港場으로 昔日은 繁盛더니 香港이 開港된 後로 商況이 不振니라. 廣州灣은 雷州半島側에 在니 光武 二年에 其 沿海지 佛國租借地가 되니라.

滿州는 東部平原에 一部를 占고 蒙古 高原의 東部에 在니 盛京, 吉林, 黑龍江 三省으로 分 故로 東三省이라고도 稱니라. 其 西部는 興安嶺이요 東部 一帶는 長白山脈이니 此 山脈이 更히 南走야 遼東半島가 成얏스니 其 兩山脈 間을 滿洲平野라 稱야 松花江, 遼河, 鴨綠江의 三水域으로 分니라. 遼東은 光武 二年에 露國셔 其 南端 旅順口와 及 大連灣을 租借야 大連灣 內 南部에 大連를 開고 東淸鐵道敷設權을 圖得야 滿洲中央에 하러市를 中心야 南은 滿洲를 貫通야 旅順, 大連지 至고 北으로 시베리아 東으로 우라지오스특에 達는 大鐵道를 設고 山海關으로 牛莊에 至는 北淸鐵道도 設니라. 地味는 肥沃고 氣候는 冬寒夏熱에 高度니 平地는 高粱, 大豆가 産고  牧場이 多며 山地는 大森林과 金, 鐵, 石炭이 産니라. 牛莊은 遼下下流 左岸에 在니 滿洲産物을 輸出며 外國居留地가 有니라.

蒙古는 蒙古高原 東에 在니 其 中央에 東西로 五百里 南北으로 二百五十里되는 고비戈壁이라 稱는 砂漠이 有니 漢北을 外蒙古라<40>稱고 漢南을 內蒙古라 稱니 氣候는 無論 大陸性이요 人口도 稀疎며 外蒙古에 賣買城은 露國境이 接近야 庫倫과 갓치 露淸의 陸路貿易市場이니라.

新疆은 蒙古高原 西部니 天山山脈이 中央을 橫斷야 天山 北路 天山 南路를 分얏스니 氣候寒暑의 差가 甚며 農産物이 伊犁타림 兩河 沿岸에 多며 카시가가 域內에 大都會니라.

西藏은 亞細亞 中央에 一區를 成얏스니 牧畜을 爲業고 럇샤가 首府니 喇嘛敎主가 實로 此地에 政治를 行니라.

住民 滿洲에는 쑹구스族, 新疆은 돌도族, 西藏은 西藏族,蒙古,靑海는 蒙古族이 住고 支那本部에는 漢族이 最多數요.  有權力니 北方은 文化가 低야 質朴 簡素 性이 有고 中部 及 廣東은 習俗이 華美고 民智가 發達니라. 言語는 東西가 相異고 南北이 不同고 宗敎는 上流社會는 儒敎요. 其他는 佛敎, 道敎를 信奉고 喇嘛敎는 西藏, 滿洲, 蒙古, 耶穌敎는 支那 本部에 一部, 回回敎는 新疆, 유다야敎는 河南一部셔 信行니라. 政治는 自古로 王朝의 興亡이 頻繁야 現今 淸朝는 三百年 前에 滿洲셔 起야 支那 現領土를 統一 君主專制니 北京에 中央政府가 有고 軍機處, 內閣總理衙門, 六部(吏, 戶, 禮, 兵, 刑, 工)等이 有고 十八省에 八總督, 十六巡撫를 置고 漢人과 滿人 二派가 內外行政을 保守며 兵備는 陸軍에 八旗 綠旗, 練軍의 名稱으로 分얏스니 八旗兵은 漢, 滿, 蒙古의 三種으로 組織고 綠旗兵은 漢人으로 編制얏고 練軍은 八旗, 綠旗 中에셔 撰拔야 新式에 訓練을 經 것이요. 海軍은 北洋, 南洋, 福建廣東 四艦隊가 有니라.<41>國民敎育은 國子監, 書院, 府學, 州學, 縣學 等과 家塾이 有야 經史, 詩文을 敎고 新學問은 學校를 設立고 敎授 應用 能力이 姑劣니라.(未完)<42>

<37-42>

 

삼천리 제10권 제10호   >   日蘇 決戰場은 外蒙

잡지명 삼천리 제10권 제10호  
발행일 1938년 10월 01일  
기사제목 日蘇 決戰場은 外蒙  
기사형태 논설  

日蘇 決戰場은 外蒙

日滿蘇 국경인 張鼓峰 부근에서 방금 我軍은 횡포한 소련군과 휴전하고 있다. 이에 잇서 國勢 정보에 나타난 東京 某 일류 군사 평론가의 一言을 抄載한다.

一. 日蘇戰의 最後 戰場은

만약 日露 전쟁이 起하여 日蘇 양군이 자웅을 決하는 최후의 결전장은 어데이냐고 한다면 그것은 소련의 자 바이칼 지방이라고 금일 세계 군사 전문가의 의견이 일치한다.

赤軍의 군사 전문가도 일본군이 75만의 兵을 여기에 보내여 최후의 결전을 試하리라 보고 일본군의 자 바이칼 작전을 자세히 검토했을 뿐 아니라 여기를 막기 위해서 온갓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소련이 본래 支那의 영토인 外蒙古를 어느새 자기의 세력 권내에 너코 外蒙 공화국을 맨든 것은 外蒙을 통해서 支那의 콤민테룬 루터를 건설하려고 한 것은 둘재 다. 보다도 더 중대한 것은 일본군의 外蒙 迂回를 阻止하고 자 바이칼 작전을 실패키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면 日支 사변에 의한 황군의 內蒙 山西 작전의 결과 外蒙 콘민테룬 루터가 무가치한 오늘날 자 바이칼 지방과 外蒙과의 연락은 요히려 우란, 우데 (본래 자 바이칼 지방의 主都 우엘푸네, 우-진스쿠 이제부터 述하고저하는 부리야-드 蒙古 自治 共和國의 현재의 수도)外蒙 共和國의 수도 우란, 바토-루(元庫倫)간의 항공로 설치는 본래부터 양 수도간에 철도 건설을 서들느는 것도 말하자면 역시 소련의 對日 방비에서 지지 안는다.

이 지방은 外蒙을 굿건히 하면 바이칼 호의 天險을<112> 가진 탓으로 치기는 어렵고 막기는 쉽게 되여 있다. 大正 때 우리 軍이 시베리아 출병했을 제도 편성된 지 얼마 안 되는 당시의 赤軍 파루치잔은 盛히 우리 軍의 야망한 것을 선전 유포하고 아메리카 등의 꾀임에 빠저서 당시의 陸相 田中義一男이 회의에서의 답변을 棒大해서 일본은 바이칼 以東 점령의 의도를 가젓다고 취측하고 「田中 플란」이란 것은 전혀 무섭게만 생각했든 것이다.

이 공포는 금일에 와서도 소련 당국의 머리에서 떠나지 안는다.

大言壯言의 赤軍도 日蘇 개전이 되면 결국 일본군에게 눌니고 눌니워서 바이칼 湖岸까지는 퇴각할 것을 짐작하고 있다. 바이칼 湖의 一線으로 끝을 막으려는 것이 赤軍의 방어 작전이다. 여기서 그들은 일전을 試해서 혹 자기네들께 유리하기만 하면 작전을 더 유리하게 끄으러 갈 모양이다.

엇잿든 그것은 그렇고 聯職 당국이 이 지방에 대한 前般 준비는 대단하다. 그런데 소련으로서는 여기에 귀찬은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이 지방에 56만의 부리야-트인이 거주하는 것이다. 인종상으로 말하면 그들은 몽고족이다. 일본 민족과 같은 계통이라고 보고 종교도 라마교를 믿고, 신앙상으로도 일본 민족과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은 일본인에게 매우 친밀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필자도 체험한 바이다.

소련은 부리야-트인 생활 양식을 쏘베-트식으로 하려고 심히 고심을 한다. 구실로는 뒤떠러진 민족을 향상식히려는 것이 소련 민족 정책이라고 하나 그 배 속은 쏘베-트 체제하에 부리야-트인을 집어너여서 부슨 變이 생기는 때에 문제없이 하자는 것이다. 그 목적은 193년 이 지방에 건설된 것을 이제부터 述하고저 하는 부리야-트 몽고 자치 공화국이다.

건설이래 약 15년을 지내온 오늘의 부리야트 몽고 공화국은 소련 당국의 意에 따라서 動하는 존재로 되여있는가.

엇잿든 장차 「日蘇戰의 決戰場」에 피로 한 뭉치가 될 친일 민족이 50만 이상이 있다는 것은 정말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二. 蘇聯 對부리야-트 政策

소련 당국은 획일적 민족 정책의 원칙으로 부리야-트인에게도<113> 대하고 있다. 그것은 회교도인 중앙 亞細亞의 諸民族에 대한 원칙과 조곰도 다르지 않으나 부리야-트 몽고의 특수 정세는 소련 민족 정책의 강행을 더욱 더욱 강하게 하고 있다. 소련 당국은 각 민족에 自活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 지도권은 소련이 갖이지 안으면 안 된다고 한다.

부리야-트 몽고인 중에는 라마승도 있고 富農도 있다. 일반 부리야-트인은 낡은 전통으로 그들을 존경하고 소련 지도자보다 그들에게 신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을 중심으로 해서 민족 독립 운동이 자조 이러나는 일이 있었다. 소련 지도자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이것이다. 이러한 민족 운동은 뿌르죠아적 민족 운동으로서 소련측에서 철저적으로 탄압을 받고 있다. 작년에도 이러한 운동으로 해서 트로츠키스트의 낙인을 맞은 희생자가 수없이 많었다.

소련 지도자는 라마승과 부리야-트 부농의 形響에서 부리야-트 일반 대중을 빼내여 이것은 소련 영향 아래 집어 너흐려고 온갓 수단을 써 온다. 對부리야-트 정책이란 것은 이러한 수단을 강제적으로 강구하는 것밖에 안 된다.

먼저 이것 때문에 어떠한 수단을 쓰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第一은 부리야-트인의 문맹을 퇴치한다는 구실 아래서 그들에게 로시아 글과 로시아 말을 철저적으로 배워주고 舊來의 몽고 문자를 排격해서 라텐식 철자법을 채용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라마승의 영향을 驅逐하는 데는 확실히 유효한 방법임에 틀님없다.

사실 부리야-트인의 교양은 무척 저열해서 공화국 건설 당시에는 문자를 해득하는 자가 전인구의 겨우 80%밖에 안 되였다는 것이다. 소련 지도자는 이 약점을 틈타서 그들에게 쏘베트식의 초등 교육을 식힌다, 문맹 퇴치를 한다 야단법석이다. 엇잿든 1931년으로부터 초등 의무 교육을 실시해서 최근에 와서는 취학 아동의 98%까지가 쏘베-트 교육 영향 아래에 있다. 아동 중에서 우수한 자는 官費로서 모스코바·우라지호스토크·이루쿠-쿠 등에 遊學을 보내여 공부한 자는 공화국 정부의 관리로 씨워서 일반 부리야-트인의 감시의 역할을 하게 한다. 이 방법도 어느 정도까지 성공한 모양 같다.

소련측이 부리야-트인을 획득하기 위해서 힘을 디리는 또 한 가지는 뭔고 하면 문헌의 보급으로 맑쓰주의를 주입식혀 그들은 라마교로부터 脫脚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 이것은 부리야-트인 사이에 대단한 반대를 하는 자가 있다. 그래서 애써 보급한 맑쓰주의가 좀체로 발전성이었었든 까닭에 작년엔 그 책임자로 있든 자가 게으른 탓이라고 당국의 벌까지 바덧다 하나 공산주의 선전 보급을 위해서는 실로 힘을 애끼지 않고 각 행정구의<114> 중심지에 부리야-트어의 신문까지 발행하는 것이다.

소련 당국이 이상과 같이 정략적 행동의 施設 중에 그들이 多少래도 감사하는 것은 그들에게 대한 보건 위생 시설일 것이다. 임이 알고 있는 바지만 부리야-트인은 대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사회병(특히 黴毒)에 감염해 있다. 여기에는 그들도 오- 래 고통받어 왔으나 치료를 늘 라마승 안태서 加持祈禱라고 하는 지베트식 療法으로만 치료를 받어 왔기 때문에 全快者가 적었다. 소련 당국은 이것을 중대사라 해서 진료소를 各所에 설치하고 대대적으로 서구식 驅黴法을 쓴 결과 환자가 최근 매우 감소해젔다고 한다.

三. 蘇聯治下의 부리야-트 蒙古

소련 당국의 부리야-트인에 대한 관심은 소련 치하에 다른 어떠한 민족에게 대한 것보다 깊은 관계가 있는데 이것은 결국 부리야-트 몽고 공화국을 중심으로 소련이 항상 對日 戰備를 하고 있는 때문이다. 최후의 전장」으로서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식히려고 하는 것이 소련의 이 나라에 대한 불변의 통치 방침이다.

그런 까닭에 여기에 큰 공업 중심지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노력은 제 1차 제 2차 5개년 계획을 통해서 임이 해온 것으로 현저한 성공은 못했다 할지라도 어느 정도까지의 성공은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설립한 공장은 제분, 목재, 硝子, 冷肉 등의 경공업에 속하는 것이 주가 되여 있지만 造船, 車輛, 修繕 등의 중공업 방면에도 착수해서 어지간히 투자해 왔다.

철, 석탄을 비롯해서 광물의 매장도 무진장이라는 것을 최근의 조사로 판명되였기 때문에 소련 당국은 이 地에 독립 운수 공업을 起할 의도인 모양으로 大小 諸河의 水運을 이용해서 대 發電 사업의 계획도 고려하고 있고 전장으로서 水運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까닭에 현재 水運의 정밀한 조사도 하고 있다.

부리야-트인의 산업은 依然 목축과 농업이 대부분을 점하고 근년까지 유목민이 다수였으나 소련 당국은 그들의 오-랜 습관을 무시하여 토착을 장려하고 농업 목축의 콜포-즈化를 권하고 있다. 이것도 어떻게 본다면 前衛 훈련의 필요로 해서라고 말할 수 있겠다.

부리야-트인의 赤軍化로 최근 더욱 더욱 강화되고 있다. 승마술이 놀나운 까닭에 부리야-트 기병은 극동 赤軍 내에도 그 우수성을 보이여 赤軍의 유력한 一部隊로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바이칼 湖의 兩岸 40만 평방 粁의 地에 밀도는 적다고 하나 56만 5천의 同種이 항일 전선에 장래 참가하려고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운명의 惡戱라고 하겠다.<115>

<112-115>

 

제목
171) 臨時政府의 對俄 외교와 國民代表會議의 전말  

171) 臨時政府의 對俄 외교와 國民代表會議의 전말

韓馨權

 [編轉P生] 이 글은 상해법조계서 해외임시정부의 일원으로서 對俄(쏘비엘) 외교에 많은 활동을 하던 韓馨權씨의 手記이다. 동씨는 해방 후도 해외에 있다가 최근에 귀국하신 분으로 이하 수기를 직접 본사에 제공하였는데 대하여 동씨에 감사를 드리는 바이며 생생한 역사의 일단면으로 독자 앞에 보내는 바이다.

 기미 3 · 1운동 결과로 韓國臨時政府는 상해법조계 내에 居하였다. 나는 당년 9월 경에 상해에 도착한 바, 그때의 내외 정세에 비추어 보면 巴里平和會義에서 우리의 민족자결문제를 해결하여 줄 것은 너무도 막연한 공상에 불과함이었다.(임시정부 성립 직전에 金奎植씨는 상해로부터 尹海, 高昌一 양씨는 海參威로부터 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각기 단체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것이 아직도 라오지 못한 그때이였다) 당시에 레닌씨는 모스크와를 점령하고 공산주의 기초에 대한 일절 시설에 착착 진행 중이었다. 나는 임시정부 각료인 數3 동지를 향하여 나의 본 바와 생각한 바를 들어 권고하여 본 바 즉, 우리는 열강에 대하여 다소간 동정을 얻을 만한 선전공작은 필요하지만 실제의 원조는 추호도 희망 못할 것이다. 오직 우리는 새로 출현된 勞農 ‘로시아’로 더부러 악수하여야 할 것이니, 그들은 제국주의자 일본을 타도한 전선이 우리와 동일할 뿐아니라 세계혁명의 선봉으로 자부하니만치 물심 양방면으로 우리에게 실제의 援助力 줄 것이니, 이러한 良機를 勿失하고 우리 혁명정부는 밀사를 모스크와에 파견할 필요가 있다고 재삼 제의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동정의 말 뿐이고 실행은 없었다. 때는 마침 露西亞사람 뽀다뽀프 장군은 帝政시대의 중장으로 혁명 전부터 공산당에 가입하여 비밀리에서 內應工作을 많이하던 자로 혁명 촉발시에 선전 책임을 가지고 일본에 와서 있었는데, 마침내 日政府의 혐의로서, 그 자는 境外로 송출한 바 되여, 상해법조계 法國여관에 있었던 것이다. 그때에 뽀다뽀프 장군을 방문한 이는 安島山, 呂運亨, 李光洙 제씨이었으며 나도 수차 방문한 일이 있엇다. 나는 쁘다쁘브 장군으로 더부러 露西亞의 혁명성공에 관함과 한국독립운동 전도에 대한 소견을 서로 교환하여 본 결과 마침내 氣味相合케 되었다. 하루는 나는 뽀다뽀브 장군에게 요구한 일이 있었는데 즉, 한국 임시정부는 勞農 露西亞와 연락하여 유기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구체적 조건을 들어 우리 임시정부에게 長書를 제출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慨然히 應諾하고 곧 韓俄연락의 필요조건을 열거하여 成文한 후에 나는 그것을 번역하여써 국무총리 李東輝씨에게 전달한 바, 그 익일 정부회의에서 그 제의에 대하여 토의가 있은 결과 全數로 가결되어 마침내 밀사 3인을 모스크바로 파견하게 되었는데 파견자는 韓馨權, 呂運亨, 安恭根 3인이었다. 그리하여 右 3인을 파견하는 수단은 국무원에서 책임을 가진 고로 나는 국무원 비서장 金立의 통지를 보고 곧 국무원에 갔었다. 그때에 안공근씨는 海參威에 있었으므로 다만 나와 呂運亨씨가 출석하게 되었다. 우리 2인은 發程手續에 관한 토의가 있었으나 필경엔 의견이 불일치하였다. 呂씨의 이유는 ‘自今 구주 각국측으로 로시아를 봉쇄하고 있으며 동으로서는 日軍이 치따까지 진출하고 있으므로 로시아로 갈만한 노선이 없으니 동 서간에 어느 편으로든지 개통된 시기를 기달려 출발하는 수밖에 他道가 無하다’고 하며 나의 이유는 ‘만리장성을 넘어 戈壁大沙漠을 模斷하여 庫倫과 買賣城을 經하여 로시아 국경 뜨로이츠꼬십스크 市에 도달할 수 있으니 어찌 막연한 동서의 봉쇄가 열리기를 坐待하리오. 그뿐 아니라 국경교섭도 적절한 시기를 違失하면 성공할 수 없으니 아무리 險路라 할지라도 모험이라도 하여야 하겠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呂씨는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李東輝, 金立 양씨의 동의를 얻은 후 국서와 路費를 받아가지고 익일 夜車로 북경으로 향하게 되었으며 때는 3 · 1운동 翌年 1월 초순이었다. 북경으로부터 張家口에 도착하여 탐문한 결과 張家口 至 庫倫의 통행 자동차는 沙漠의 積雪이 지장됨으로 3개월 가량 기대리어 개통된다고 한다. 나는 별도리가 없이 부득이 그때를 고대하고 있다가 4월 중순에야 비로소 자동차를 타고 7盡夜만에 外蒙 首府 庫倫市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또 마차를 타고 5일만에 뜨로이츠꼬삽스크 시에 도달하였다. 그날로부터 나는 국빈의 대우를 받아서 특별차와 赤衛軍 수명의 호위를 입으면서 일굳스크 등 市를 經하여 모스크봐로 향하는데 한인으로 편성된 군대가 수처에 있었는데 그들은 태극기를 들고 역전에서 환영한 일도 있었다. 일굳스크 시에서 떠난 17일 만에 모스크와에 도착하니 때는 1920년 5월 말이었다. 당시 노농정부의 외무인민위원장 치체린씨와 그 차석 까라한씨와 리트비노브씨는 구주외교 까라한씨는 亞洲외교 책임을 각기 분담한 고로, 나는 까라한씨와 직접교섭이 있게 되었으며 간혹 치체린씨와 레닌씨를 대하여 동서정세에 관한 소견을 교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한국혁명의 현상과 전도에 대한 것과 일본의 실정 及 중국의 현황을 들어 문자로 상세한 보고를 하여준 후에 정식으로 要求件을 제출하였으니 그 조건은 如下하다.

一. 貴 로시아 노농정부(현금은 소련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一. 貴國과 한국은 제국침략주의자 일본을 타도하는 동일전선을 協進하여 있는 고로 귀정부는 貴 赤衛軍이 가지는 무기 기타 군수품의 一例로써 한국독립군에게 공급하여 줄 것.

一. 蘇革命政府에는 전문가가 아직 缺如한 현상임으로 西比里亞의 緊適한 地帶에 사관양성소를 개설할터이[니] 此에 대한 일체 경비를 擔責하여 줄 것.

一. 蘇革命政府에는 운동비가 충족치 못하므로 상당한 계획을 실행치 못하는 우려가 있으니 貴정부는 계속적으로 차관을 승낙하되 제1기 금액 200만 留를 지출하여 줄 것.

 右 요구에 대하여 노농정부는 약 2개월 후에 此를 전폭적으로 응낙하였다. 원래 나는 상해로부터 출발할 때에 隨員 1명도 대동치 못하고 따라 교통관계로 통신연락처도 배치치 못하였으므로 우리의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할 수 없었다. 세력 부득이 성립된 차관 200만 留를 휴대하고 상해로 들어가서 정부에게 일체 경과를 보고한 후 무장 接受의 실행과 多數靑[年]을 대동하고 시베리아에 가서 사관양성소 개설을 완전히 시행한 후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가기를 예산하게 되었다. 그럼으로 나는 노농정부를 행하여 나의 의사를 설명한 결과 까라한씨는 此에 동의하였다. 이제는 다만 차관 200만 留를 휴대할 手續뿐이었다. 까라한씨와 此를 협의한 결과 오던 길인 外蒙沙漠으로 다수 금전을 帶夫하기는 너무나 모험적이니 우선 약20뿌드(40俄斤爲 1뿌드) 금전을 가지고 시험하야 보는 것이 可하며 또는 그때에 로시아 帝政시대 지폐는 무용인 동시에 외국지폐는 더욱 얻을 수 없었고 다만 국고에 있는 것은 純金錢뿐이었다. 이와 같은 20뿌드 중량으로 된 것이 즉 40만 留이었다. 나는 이 돈을 특별차에 싣고 호위병 4명을 다리고 모스크봐를 떠나는 때에 까라한씨 외 수3인으로 더부러 車間에서 작별하면서 후기를 서로 말하였다. 中路에 ‘옴스크 등 市에 수일 체류하면서 동포의 정황을 시찰 후에 緩衝政府 소재지인 웰호우진스크’ 市에 도착하는 즉시로 상해로부터 온 국무원 비서장 金立씨를 만나게 되었다. 김씨의 말에 의하면 임시정부에는 內訌이 생기어(내홍이 생긴 원인은 畧함) 중요인물 45명이 탈퇴하여서 현상 유지도 불능이며 내가 모스크봐로 떠나온 후 금일까지 아모런 연락도 취할 수 없음으로 너무도 궁금하여 모스크봐로 갈 예정으로 이곳에 도착하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料外에 그러한 駭報를 듣고 낙심됨을 不禁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소견을 김씨에게 말한 바 ‘나의 모스크봐 당국과 교섭한 것은 성공이다. 계속적으로 무장 금전 등 원조를 받을 터인데 이제 우리 정부 자체의 결렬이 이와 같이 되었으니 이를 장차 어찌할까. 지금에라도 무슨 방법으로든지 임시정부의 原狀을 회복하는 것이 최선 급무이니, 君은 나의 정부에 대한 보고서와 제1기 차관의 일부인 40만 留를 가지고 곧 길을 돌리여 상해로 가서 원상회복의 공작에 주력하여 우리의 뜻대로 그것을 완성하면서 내가 다시 모스크와에 가서 160만 留’인 잔액을 휴대하고 상해로 돌아갈 시기를 고대하야 달라고 하면서 말로 부탁하는 외에 문자로 一切計劃을 축조 설명한 것을 김씨에게 記付하였다. 그리하여 金立씨는 상해로 나는 모스크봐로 향하게 되였다. 그때에 또 한가지 우리 독립운동에 장애된 형세가 나타났다. 그것은 즉 국내 국외를 막론하고 청년층으로부터 시작된 일시적 풍조에 휩쓸려 호기심과 허영심으로 각기 공산당 그루파를 형성하여 가지고 제3 국제공산당의 조선당 승인을 爭先 이후로 투쟁하던 초기이었다. 그들은 혁혁한 공산주의자로 자처하면서 임시정부를 배격한다는 것과 따라 정부의 내홍을 기회로 삼아 코민케른에 향하여 임시정부에 관한 악평과 심지어 소위 모스크봐 한국대사 韓馨權은 군국주의자라고 악선전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서 꼬민테른의 野慾은 이러한 사태를 이용하여 조선혁명 지도권 획득에 급급하였다. 그러나 노농정부의 간부인물은 此를 반대하는 바며 레씨는 일직이 나를 대하여 이러케 언명하였다. ‘우리는 한국인 소위 공산당은 환영치 않으며 한인에게는 공산당이란 것이 시기가 상조이며 오직 민족해방 운동이 귀중하니 무엇보다도 3 · 1운동을 본다면 다른 思潮로 된 것이 아니고 다만 독립정신에 기인한 그 熱이 극도로 긴장한데 불구하고 차제에 만일 다른 사상운동으로 추진시킨다면 해방운동에 막대한 지장을 줄뿐 아니라, 필경엔 이것도 아니오 저것도 아닌 非虎非革犬의 추태를 現出하고 말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코인테른의 반대적 간섭이 빈번함을 인하야 노농정부 당국은 兩難의 고충을 갖게 되었으며 또 사실상 임시정부의 내홍을 엄폐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무엇보다도 잔액 160留 문제까지도 보류하게 됨으로 나는 이미 타당된 차관에 대하여 어찌 食言하느냐고 항의한 결과, 나중엔 외무인민위원장 치체린씨의 의사대로 즉 내가 상해에 돌아가서 임시정부 내부를 정리하여 내가 상해를 떠나던 그때의 현상을 회복한 후 다시 모스코바로 와서 일절을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다른 도리가 없이 결렬된 내부를 정리할 운동비 20만 留만을 가지고 歐洲 경유로 상해에 돌아오게 되었다.(마침 각국의 로시아에 대한 봉쇄가 열리게 된 때었다) 나는 상해에 도착 즉시로 먼저 金立씨을 찾아 경과의 보고를 듣게 되었다. 김씨의 보고에 의하면 너무도 모순적이며 황당한 말 뿐이었다. ‘자기는 상해에 돌아와서 탈퇴한 요인들을 도루 들어오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잔류된 그들과 간접 혹 직접에로 적극 노력하였지만 반년이 되도록 그 효과를 볼 수 없어 낙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돈을 空然히 두어둘 수 없어서 공산당을 조직하고 그 운동을 暗裏에서 전개하고 있는 중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말하기를 君이 가지고 온 그 돈은 어찌하여 정부에 맡기고 整理운동을 못하였느냐 또는 그 돈은 공산당을 위한 돈이 아니고 한국독립운동에 쓰기로 한 외국에서 차관한 것인데 불구하고 그와 같이 역행하였는가. 금일엔 과거의 잘못한 것은 두었다. 他日에 말할 것이고 우선 君이 허비하고 남은 돈이 얼마나 되는지 곧 나에게 돌리라고 하였다. 金立씨는 40만 留에서 조선과 일본에 대한 공산당 운동비로 없어진 것을 제하고 남은 금액이 15만 留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나는 너무도 어이없어 다시 말할 여지도 없었지만 하는 수 없이 그러면 현금 15만 留를 곧 내달라고 하였으나 간부회의에 제출하여 결정한다느니 또 무엇 무엇이니 延施策을 쓰는 그 꼴을 계속하여 볼 수 없어서 곧 金立씨와는 손을 떼고 말았다. 그 다음 나는 그와 같은 辛酸한 속에 있는 임시정부에 남어있는 제씨를 방문하고 회합된 석상에 전후 경과된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정부가 원상회복이 되어야 자체의 악영향을 면할 뿐더러 성적이 양호한 외교도 前途 收拾이 유망이란 것을 간절히 말하였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각방면 인사를 향하여 의견 교환도 하여보았으나 일치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정부에서 탈퇴한 인물 중 당지에 체재하는 安昌浩, 서측에 隱居하는 李東寧 · 盧伯麟(당시 국무총리) · 申翼熙 · 金九 · 南亨祐 · 李裕弼 등 제씨로 더부러 각기 사석에서 여러번 토의하여 보았지만 별반 효력이 없었다. 그러한 환경 裏에서 나의 입장은 더욱 곤란하였다. 整理費 20만 留는 있지만 어떠한 방책으로 착수하느냐가 문제이었다. 究竟엔 국민의 최고권위자인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여써 임시정부에 대한 難問題를 해결하기로 단정한 후 국민대표회의 籌備會을 설치하고 대표소집에 노력하였다. 어찌 그렇게 말성많은 우리 사회인지 주비회 초두부터 만1년 만에 비로소 내외지의 도별과 단체별로 모둔 대표 125명으로써 정식으로 국가대표회의를 상해법조계 내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그 회의의 대표들의 씨명은 일일히 기억할 수 없지만 의장 金東三씨와 부의장 安昌浩 · 尹海 西[兩]씨가 피선되었던 것이다.

 원래 그 회의를 크게 기대하였던 바, 정작 실현하고 보니 대표들 자신이 각기 자립성이 결핍된 연고로 各私黨의 誘引術에 떨어저 신성한 대표자격을 상실하고 분파적 행동을 취하게 되어 7분5열로 분산적 상태이었다. 그리하여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는 회의인 동시에 또한 欲罷不能의 두통꺼리에 불과하였다. 외국 租界를 빌려하는 회의를 7개월 만에 비로소 결말을 보게 되었는데, 나중엔 회의 내에서 창조파와 개조파가 대립되어서 투쟁이 심하다가 다수라는 창조파의 뜻대로 結着되어서 임시정부에 해산명령을 나리고, 한국 국무위원회를 조직하여 발표한 바 그 위원은 金奎植 · 申肅 · 尹海 · 李靑天 · 元世勳 · 鄭寅權 · 權俊衡 등 제씨 외 약 20명이었다. 이 위원회를 운영하는데 소재지를 何處에 두느냐가 문제되어서 혹은 상해 혹은 북경 혹은 海參威가 좋다하여 의견 불일하다가 마침내 다수의 의사대로 海參威로 가게 된 것이다. 그때에 나의 발표한 의견은 (한국 국무위원회가 자체의 신성한 체면을 유지하고 독립운동을 좋은 길로 추진하겠거던 海參威에 가서는 안된다) 한인 공산 각파가 분쟁하는 판에 어느 파를 취하며 또 어느 파를 捨할지. 그뿐 아니라 우리의 외교는 露西亞에만 국한한 것이 아닌 고로 대외교섭 及 선전 상에 큰 지장을 초래할 것이니, 다만 우리의 갈 곳은 실지로 독립운동을 잘할 지대인 北滿 중동선 일대이다. 그곳에는 다수 동포가 부락을 이루고 농사하는 대며 중국당국도 많은 동정을 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더욱 절실할 것이며 파당투쟁도 자연 없어질 것이다 라는 이유로 역설하였지만 하등 효력을 못본 것이었다. 나는 국제 신의상 다시 모스코봐로 아니 갈 수 없어서 海參威 경유로 모스코봐에서 경과한 실사정을 세세히 보고한 후 결론은 당국으로 더부러 서로 탄식할 것 뿐이어었다.(꼬민테른에서는 한국 혁명지도권을 정부로부터 쟁취하고 있는 그때이었다) 한국 국무위원회가 海參威로 간지 반년이 못되어서 꼬민테른은 ‘원래 한인 공산당 각파가 분쟁하는 것도 성가신 문제인데 국무위원회까지 온 이후로는 더욱 두통꺼리가 된다’고 하여 각 위원에게 路費를 내어주면서부터 出境하여 달라는 요청이었다. 此를 거절할 수 없서 위원 전부는 사방으로 散去하고 말았다.

 이것은 연극 중의 한 희극이 아니면 비극일 것이다. 하여간 외국차관도 하여보고 국민대표회의도 하여 본 것만은 일종 경험력을 얻었다고 할런지.

· 『카톨릭청년』, 1948년 8월 · 9월 합병호, 636~6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