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2. 15:57ㆍ북경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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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2년 병오(1726) 9월 21일(경술) 맑음
02-09-21[23] 진수당(進修堂)에서 소대를 행하는 자리에 참찬관 조명신 등이 입시하여 《송감(宋鑑)》을 진강하고, 《절작통편(節酌通編)》을 진강하는 문제, 신하들의 시호(諡號)를 의정(議定)하는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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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酉時)에 상이 진수당(進修堂)에 나아갔다. 소대를 행하러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이다. 참찬관 조명신(趙命臣), 시강관 권적(權𥛚), 검토관 김용경(金龍慶), 가주서 이봉명(李鳳鳴), 기사관 이흡(李潝)ㆍ민형수(閔亨洙)가 입시하였다. 권적이 《송감(宋鑑)》을 읽었는데 ‘효종황제융흥원년(孝宗皇帝隆興元年)’에서 ‘폄장준위추밀사(貶張浚爲樞密使)’까지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번(下番)이 읽으라.”
하니, 김용경이 ‘안치초토사이현충우균주(安置招討使李顯忠于筠州)’에서 ‘주자왈 남도이래 사대부창위화의(朱子曰南渡以來士大夫倡爲和議)’까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읽으라.”
하니, 조명신이 ‘갑인삭 일유식지(甲寅朔日有食之)’부터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주서가 읽으라.”
하니, 이봉명이 ‘병술이년(丙戌二年)’에서 ‘하사월 이증적위안덕군(夏四月以曾覿爲安德軍)’까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한림이 읽으라.”
하니, 이흡이 ‘오월 기복유공차자(五月起復劉珙箚子)’에서 ‘위침전조(爲寢前詔)’까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하번이 읽으라.”
하니, 민형수가 ‘추칠월 가사천선무사(秋七月加泗川宣撫使)’에서 ‘위지책론진사(謂之策論進士)’까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하교를 기다리지 말고 경연관은 먼저 문의(文義)를 아뢰라.”
하니, 한원진(韓元震)이 나아와 아뢰기를,
“사호(史浩)가 섬서(陝西)를 포기하자고 논의하였는데, 이 일은 범범하게 본다면 그다지 해로울 것이 없는 듯하지만, 효종(孝宗)이 중원(中原)을 회복하지 못한 것은 실로 여기에서 연유합니다. 대체로 천하의 지형이 서북쪽은 높고 동남쪽은 낮기 때문에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석권(席卷)하기는 쉬워도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올려다보며 공격하기는 어렵습니다. 예로부터 제왕들은 모두 서북쪽에서 흥성하여 동남쪽에서 멸망하였습니다. 이것이 천하의 대세이니 이 점을 몰라서는 안 됩니다. 고종(高宗) 초기에는 섬서와 형초(荊楚) 지역이 아직 보전된 상태였고 하북(河北)의 군현들이 아직 다 함락되지는 않은 상태였으니, 이때가 바로 중원을 회복하기 쉬운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고종은 이 기회를 놓쳤습니다. 효종 초기에는 하북과 형초는 잃었지만 섬서 지역은 아직 보전하고 있었습니다. 섬서 지방이 북쪽으로는 중원과 통하고 남쪽으로는 오(吳)ㆍ월(越)과 연결되며 또 상류(上流)에 위치하였으니, 이곳이야말로 기필코 지켜 내야 할 지역이었습니다. 중원을 회복하는 일은 오직 이 한 지역이 의지할 만하였는데, 사호의 간사한 논의에 미혹되어 끝내 그 지역을 포기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양자강(揚子江)을 가운데 놓고 그 남쪽 지역이나 지킬 뿐 더 이상 중원을 제압할 형세가 없었으니, 또한 어떻게 출병하여 승패를 다투어 중원 회복을 꾀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러한 사기(事機)에 관련된 점에 대해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孝宗之初, 河北·荊楚雖失, 而陝西之地尙保, 陝西一方, 北通中原, 南連吳·越, 又居上流, 則此是必守之地, 恢復中原, 惟此一方可倚, 而惑於史浩之邪議, 遂棄其地。自此劃江以守, 無復控制, 中原之勢, 又安可出兵爭衡, 以圖恢復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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