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9. 09:57ㆍ북경 추정
운양집 제3권 / 시(詩)○석진우역집(析津于役集)
역수를 지나다〔過易水〕 지금의 이름은 백하(白河)인데, 겨울날에는 물이 말라버리고 흰모래만 남아 얇게 흐른다. 고금의 산천의 변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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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게 펼쳐진 흰 모래밭 / 白沙浩漫漫
슬픈 바람이 석양에 이는구나 / 悲風日暮起
묻노니, 여기가 어디오 / 借問此何地
여기가 바로 그 옛날 역수라오 / 云是古易水
지난날 연나라 태자가 / 昔日燕儲君
진나라로 가는 용사를 송별했던 곳 / 送別入秦士
진나라로 들어감은 무엇 때문인가 / 入秦夫如何
한 번 죽음으로써 지기에게 보답하고자 함이었지 / 一死酬知己
애석해라 공을 이루지 못하여 / 惜哉功未成
소백의 제사가 끊기고 말았어라 / 召伯忽不祀
지우는 사람을 가장 감동시키는 법 / 知遇最感人
천고적 역사에 눈물 떨구네 / 淚落千古史
[주-D001] 역수(易水) :
하북성 서부를 흐르는 강이다. 역현(易縣) 경내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거마하(拒馬河)로 흘러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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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양속집 제1권 / 시(詩) 보유(補遺)를 붙이다.
역수를 지나다〔過易水〕 보유(補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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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모래 벌 넓고 아득한데 / 白沙浩漫漫
슬픈 바람이 석양에 일어나네 / 悲風日暮起
이곳이 어딘지 물어보니 / 借問此何地
옛날 역수라고 하네 / 云是古易水
지난날 연나라 태자가 / 昔日燕儲君
진나라로 가는 용사를 송별했던 곳 / 送別入秦士
진나라로 들어간 거 무엇 때문인가 / 入秦夫如何
한 번 죽음으로 지기에게 보답코자 함이라 / 一死酬知己
애석하게도 공을 이루지 못하여 / 惜哉功未成
소백의 제사 끊기고 말았네 / 召伯忽不祀
제대로 알아줌이 사람을 가장 감격케 하니 / 知遇最感人
천고의 역사 앞에 눈물을 흘리네 / 淚落千古史
[주-D001] 역수(易水)를 지나다 :
이 시는 동일한 제목으로 《운양집》 본집 권3에도 실려 있다. 권3에는 시 제목에 다음과 같이 원주가 있다. “지금 이름은 백하인데, 겨울날에는 물이 말라 다만 흰모래에 얕은 물이 흐를 뿐이다. 대개 고금의 산천의 변화이다.〔今名白河 冬日水涸 惟有白沙淺流 盖古今山川之變也〕”
[주-D002] 지난날 …… 곳 :
전국 시대 연(燕)나라 태자 단(丹)이 진(秦)나라에 인질로 있다가, 진왕(秦王) 정(政)이 푸대접을 하므로, 원한을 품
> 고전번역서 > 동명집 > 동명집 제2권 > 육언절구 > 최종정보
동명집 제2권 / 육언절구(六言絶句) 4수
목달부 겸선이 연경에 가는 것을 전송하다〔送睦達夫 兼善 之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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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성 동쪽으로 발해 바다 닿았으며 / 秦城東入渤海
연 지역은 북쪽으로 오환 땅과 접하였네 / 燕地北隣烏桓
그대 멀리 중국 감을 인해 옛일 묻거니와 / 爲因君行問古
역수의 물 아직 옛날같이 찬지 모르겠네 / 未知易水猶寒
[주-D001] 목겸선(睦兼善) :
1609~?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달부, 호는 용재(容齋)이다. 1644년(인조22)의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효종 때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현종조에 수찬, 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주-D002] 오환(烏桓) :
본래 동호(東胡)의 별종으로, 한나라 때 흉노에게 멸망당하였는데, 나머지 종족들이 오환산(烏桓山)으로 도망쳐 들어가 살면서 산의 이름을 종족명으로 삼았다.
[주-D003] 역수(易水)의 …… 모르겠네 :
전국 시대 연(燕)나라의 자객(刺客) 형가(荊軻)가 진왕(秦王)을 죽이려고 떠날 때 역수 가에서 “차가운 역수 가에 바람결 쓸쓸한데, 장사 한 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라는 노래를 부른 고사가 있다. 《戰國策 燕策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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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선생문집 제6권 / 시(詩) 봉사록(奉使錄)
이날 통주(通州) 통진역(通津驛)에 당도하여 배로 떠나다. 옛날의 상간도(桑乾渡)인데 지금은 백하(白河)라 이르며 노하(潞河)라 이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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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지막에 성동으로 길을 떠나서 / 晩出城東路
밤중에야 물 위에 뜬 배에 올랐네 / 宵登水上舟
천 리를 따라 몸은 이르러 오고 / 身從千里至
백하와 함께 맘은 흘러가누나 / 心共一河流
아득아득 하늘빛은 멀기도 한데 / 浩渺天光遠
해맑은 밤 기운은 가볍게 떴네 / 澄明夜氣浮
내 인생 저 범경과 서로 같아서 / 吾生同泛梗
종적이 저절로 유유하구려 / 蹤跡自悠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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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람제처(歷覽諸處) / 역람제처(歷覽諸處)
통주강(通州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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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백하(白河)이다. 강이 통주의 동성(東城)을 싸고돌아 북으로 흘러 연도(燕都)와 통구(通溝)가 되고, 이어 서산(西山)에 이른다. 이 강은 배가 통하는데, 동남쪽 포구(浦口)로부터 돛대가 묶어 세운 듯 전후로 30여 리를 숲처럼 빽빽이 뻗어 있어 몇 천 몇 만 척인지 모른다.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며, 매어 있기도 물에 떠 있기도 하여, 온 강이 모두 배이니 진실로 수시(水市)의 대도회지다.
> 고전번역서 > 성호사설 > 성호사설 제1권 > 천지문 > 최종정보
성호사설 제1권 / 천지문(天地門)
동국지맥(東國地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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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幽州)와 병주(幷州)에 있는 물이 옥하(玉河)인데, 옥천산(玉泉山)에서 발원하여 북경(北京)으로 흘러들어 나와서는 대통하(大通河)와 노구하(蘆溝河)와 합류된다. 노구하는 대동부(大同府) 상건산(桑乾山)에서 출발하여 태항산(太行山)을 경유하여 순천(順天) 경내로 들어왔다가 노구교(蘆溝橋)로 나와 통주(通州)까지 이르러 백하(白河)를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지금의 백두산은 중국의 국경 밖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왔다. 그 큰 줄기의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모두 발해(渤海)로 들어간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서해이다. 유주(幽州)ㆍ정주(井州)는 북경의 동북방에 위치한다. 《서경》 주에 “기주(冀州) 동쪽에 항산(恒山)이 있는 지역이 정주요 그 동북방인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있는 지역이 유주다.” 하였고, 또 “청주(靑州)의 동북 지방인 요동(遼東) 지역을 따로 떼어서 영주(營州)를 만들었다.” 고 했는데 그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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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원직지 제5권 / 회정록(回程錄) ○ 계사년(1833, 순조 33) 2월[7일-30일]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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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다가 신시 뒤에 갰다.
옥하관(玉河館)에서 출발, 40리를 가다가 통주(通州)에 이르러서 잤다.
……….
통주기(通州記)
통주는, 진(秦) 나라 때에는 어양(漁陽)에 소속되고, 한(漢) 나라 때에는 노주(潞州)를 두고, 수(隋), 당(唐) 나라 때에는 탁현(涿縣)에 붙였다가 다시 노현(潞縣)으로 삼았다. 오대(五代) 및 요(遼)는 그대로 따랐으며, 금(金) 나라 때에는 승격시켜 통주(通州)로 만들었으니, 조운(漕運)이 통제한다는 뜻을 취한 것으로, 명(明) 나라 때에도 그대로 따랐다.
성(城) 둘레는 20리인데, 풍부 화려함이 성경(盛京), 산해관(山海關)보다 나았다. 처마가 둘로 된 높은 누각이 큰 거리를 가로질러서 세워져 있고, 또한 백탑(白塔)이 있어, 구름에 닿을 듯 높이 솟았다.
성 밖에서 들어와 바라보면, 성을 감싸고 흐르는 물이 있다. 이를 ‘백하(白河)’, 일명 ‘노하(潞河)’라 하는데, 원(元) 나라 곽수경(郭守敬)이 파서 동남쪽의 조운하는 길을 통한 것이다.
근원이 새외(塞外)에서 나와 곧장 밀운(密雲) 남쪽을 거쳐, 우란산(牛欄山)에 이르러서 조하(潮河)와 합친다. 그리하여 통주에 이르러서는 직고(直沽)로 들어 성을 안고 흐른다.
하수 가까이 세 곳에 창고가 있는데, 제도는 성루(城樓)와 같다. 위에는 창문을 설치, 쌓인 기운을 빼내고 담장 벽에는 곁구멍을 뚫어 습기를 소통시키며, 물을 끌어 창고를 빙 둘러서 화재를 방비했다.
하수 언덕에 매여 있는 채 미처 밧줄이 풀리지 않은 크고 작은 배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상하 10여 리에 돛대가 총총 박혔으니, 아마 온 천하의 배로 운반된 물건이 모두 여기에 모이는가 보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이른바, ‘백하의 배들을 보지 않으면 제도(帝都)의 웅장함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성 밖 인가(人家) 또한 모두 물에 임했으니, 다방(茶房), 주루(酒樓)들이 물빛에 반사되어 그림 같고, 성안 화포(花鋪)에는 아름다운 국화를 많이 재배하는데, 그중 흰 것은, ‘통주백(通州白)’, 붉은 것은 ‘통주홍(通州紅)’이라 하며, 그 나머지 황색과 흑색 역시 다 그러하다. 또 들으니, 여기에서 생산된 웅황(雄黃)의 품질이 좋다고 한다. 명(明) 나라 사조제(謝肇淛)는,
“연도(燕都)는 ‘백이산하 천부지국(百二山河天府之國)’이라 일컬어지나, 다만 불편한 것은 곡식을 운반하여 동남쪽으로 올려 주는 일이다. 운하(運河)는 양자강(揚子江)에서 회수(淮水)로, 회수에서 황하(黃河)로, 황하에서 문수(汶水)로, 문수에서 위수(衛水)로 해서 수심이 얕고 수폭이 실처럼 가늘므로 하류(河流)가 한번 마르면 서북쪽은 모두 굶주리게 된다. 원(元) 나라 때는 곡식을 운수하여 상도(上都)에 공급하였고 그 뒤에는 해운(海運)을 겸하였다. 그러나 군웅(群雄)들이 왕위를 다툴 때를 당하자 봉화가 사방에서 일어나 운수하는 길이 갑자기 끊어지니, 속수 무책으로 곤란을 겪어야만 했었다. 이는 경사(京師)의 제일 걱정거리인 것이다.”
하였다.
[주-D001] 웅황(雄黃) :
안료(顔料)의 한 가지이다. 염료(染料), 화약(火藥), 채료(彩料) 등으로 쓰인다. 석황(石黃), 석웅황(石雄黃)이라고도 한다.
[주-D002] 백이산하 천부지국(百二山河天府之國) :
백이산하는 아군(我軍) 두 명이 100명의 적군을 당해 낼 수 있는 군사상 험요지이고, 천부지국은 토지가 비옥하여 산물(産物)이 풍부한 고장이다.
> 고전번역서 > 연행록선집 > 연행기 > 연행기 제2권 > 열하에서 원명원까지[起熱河至圓明園] ○ 경술년 > 최종정보
연행기 제2권 / 열하에서 원명원까지[起熱河至圓明園] ○ 경술년(1790, 정조 14) 7월[16일-26일]
23일(신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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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화석령(火石嶺)을 넘고 조하(潮河)를 건너 석갑성(石匣城)에서 밥을 지어 먹고 밀운현(密雲縣) 성안에서 잤다.
이날은 100리를 갔다. 조하천영(潮河川營)에서 남으로 2리를 가면 화석령이 있고, 그 남쪽으로 들이 펼쳐지며 하수가 지나간다. 화석령에서 남으로 3리를 가면 고북구(古北口)의 남천문(南天門)이다. 성은 고개 등성마루에 있고 양쪽 벼랑이 벽처럼 섰는데, 입을 벌린 것 같은 모양이 험준하여 겨우 한 가닥 길이 통할 뿐이다.
남천문 밖에는 대비암(大悲菴)이 있는데, 지계가 높고 시원하며 종과 목탁이 정결하다. 앞으로 흑송(黑松), 오봉(五峯)의 여러 산들과 마주 대하였는데 기이한 봉우리와 빼어난 묏부리가 손모아 읍(揖)하며 둘러선 듯하여 마치 우리나라 송경(宋京)의 천마관(天摩關)과 같다. 암자 밖 화표(華表)에 ‘낙가선경(洛迦仙境)’이라는 편액이 있는데, 청 나라 성조(聖祖)의 어필이다.
암자 동쪽에 남승헌(攬勝軒)이 있는데, 안에는 지금 황상(皇上)의 어제(御製)와 어필(御筆)인 시 현판과 시 족자가 있다. 그리고 암자 서쪽에는 신무진(神武鎭)이 있다.
남천문루(南天門樓)에서 조금 쉬는데 암자 안에서 주지승이 차를 내왔기에 답례로 청심원(淸心元) 2개를 주었다.
무릇 모든 관구(關口)에는 세(稅)가 있는 것이 상례인데, 오직 고북구만은 상인의 출입에 세를 받지 않는다. 이것은 성조(聖祖)가 정한 것이다. 관구 밖은 2, 30리마다에 연대(煙臺)와 발신(撥汛)을 두고, 관구 안에는 5리, 혹은 7, 8리마다에 연대와 발신을 두었다. 조하천영(潮河川營)에서 남으로 5리를 가면 고북구 남천문(古北口南天門) 발신이고, 또 5리를 가면 도황점(稻黃店) 발신이다.
또 5리를 가면 신개령(新開嶺) 발신이며, 또 5리를 가면 북백하간(北白河澗) 발신이다. 또 5리를 가면 남백하간 발신이고, 또 7리를 가면 요정포(腰亭鋪) 발신인데, 여기에 행궁(行宮)이 있다.
또 8리를 가면 석갑성(石匣城) 발신이다. 성 서쪽 평지에 마치 빙 둘러놓은 것 같은 돌이 있는데, 안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성의 이름을 ‘석갑(石匣)’이라고 한 것이다. 북쪽에 신연대(新煙臺), 구연대가 있는데, 성안에는 관부(官府)와 민가 및 시전(市廛)이 있다.
또 4리를 가면 산안구(山安口) 발신이 있고, 또 4리를 가면 화가점(化家店) 발신이 있으며, 또 7리를 가면 망도령(望都嶺) 발신이 있다. 또 5리를 가면 조도장(朝都莊) 발신이 있고, 또 5리를 가면 대석교(大石橋) 발신이 있으며 행궁이 있다. 또 7리를 가면 구송산(九松山) 발신이 있고, 또 8리를 가면 목가욕(穆家峪) 발신이 있으며, 또 8리를 가면 석령자(石嶺子) 발신이 있다.
또 4리를 가면 사욕구(沙峪溝) 발신이 있고, 또 8리를 가면 밀운현(密雲縣) 발신이 있으며 행궁이 있다. 현치(縣治)는 백하(白河) 동쪽 1리에 있고, 백단산(白檀山) 북쪽 20리에 있다. 관부(官府)와 시전(市廛)의 웅장하고 번화함이 요양(遼陽)과 비등하다.
대체로 조하천영(潮河川營)에서 석갑성에 이르는 거리가 40리, 석갑성에서 밀운현성(密雲縣城)까지가 60리이다.
고북구 이내는 남으로 갈수록 지세가 더욱더 낮아진다. 고개 목을 넘으면 반드시 들이 있고, 들을 지나면 또 고개가 있다. 무릇 5, 6회나 그러한 뒤에야 밀운현(密雲縣)이다. 현치는 꼭 우리나라 한양의 양철평(楊鐵坪)과 같다.
새외(塞外)의 여러 산봉우리들이 연경(燕京)을 향하여 달려가는 듯한 형세가 마치 우리나라의 삼각산과 같다. 하늘이 지세(地勢)를 만들고 땅이 터전을 마련하여 장차 제왕(帝王)의 억만 년의 큰 도읍터를 정하게 한 것을 비로소 알겠으니, 문명이 특히 빼어난 형국이 서로 비슷한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고북구는 명 나라 홍무(洪武) 연간에 고북구 수어천호소(古北口守禦千戶所)를 두었다가, 뒤에 밀운후위(密雲後衛)로 고쳐 좌(左), 우(右), 중(中), 전(前), 후(後)의 다섯 천호소(千戶所)를 거느리게 하였다. 그 후 가정(嘉靖) 때에 고쳐 참장(參將)을 두고, 주둔하며 수비하게 하였다. 청 나라 순치(順治) 초에는 도사(都司)로 고쳤고, 강희(康煕) 연간에는 제독(提督)을 설치, 중요한 진(鎭)으로 삼아 조하천 영성(潮河川營城) 안에 주재하게 했다. 산 위에 고북구의 옛 성이 있는데 둘레가 4리 310보(步)이다. 문이 셋 있었으나 지금은 다 무너졌다. 다만 남천문(南天門) 하나와 문 좌우편에 치첩(雉堞)이 남아 있을 뿐이다.
석갑성은 밀운신성(密雲新城)의 동북 60리에 있는데 또한 이름을 석갑영성(石匣營城)이라고도 한다. 둘레가 4리 264보(步) 3척(尺)이고 문이 4개 있다. 홍치(弘治) 17년(1504, 연산군 10)에 벽돌로 쌓았으며, 융경(隆慶) 연간에 총병(總兵), 유격(游擊) 등 관(官)을 설치하여 주둔하며 수비하게 하였다. 이제는 고북구(古北口) 제독(提督)의 전영(前營)이 주재한다. 성안에는 유격 1인, 중군수비(中軍守備) 1인, 천총(千摠) 2인, 파총(把摠) 3인, 군사 473명이 있다.
밀운현(密雲縣)은, 한(漢) 나라에서는 백단현(白檀縣)이라 하였으니 《삼국지(三國志)》에,
“조공(曹公)이 백단(白檀)을 지나서 오환(烏丸)을 유성(柳城)에서 깨뜨렸다.”
라고 한 것이 이곳이다. 후위황(後魏皇)이 비로소 개척하여 밀운군치(密雲郡治)에 제휴성(提携城)을 두고, 밀운, 요양(要陽), 백단(白檀) 3현을 거느렸다. 북제(北齊)에서는 밀운군(密雲郡)을 폐지하고, 요양, 백단 2현을 밀운현에 넣었다.
수 나라 개황(開皇) 연간에는 밀운, 연락(燕樂) 2현으로 단주(檀州)를 설치하였고, 당 나라에서는 천보(天寶) 연간에 밀운군으로 고쳤으며 건원(乾元) 연간에는 다시 단주(檀州)로 하였다.
요(遼)에서는 단주 무위군(檀州武威軍)으로 하여 밀운, 행당(行唐) 2현을 거느리게 하였다. 송 나라에서는 선화(宣和) 연간에 이름을 횡산군(橫山郡)이라 내리고 진원군 절도(鎭遠軍節度)로 승격시켰다. 금 나라에서는 밀운현으로 하여 순주(順州)에 예속시켰는데, 원 나라에서는 다시 단주로 하여 대도로(大都路)에 예속시켰다. 명 나라에서는 홍무(洪武) 연간에 밀운현으로 고쳐 순천부(順天府)에 예속시켰다가 정덕(正德) 초에 평주(平州)에 예속시켰다. 청 나라 초에는 다시 순천부(順天府)에 예속시켰다.
밀운성지(密雲城池)는 신성(新城)과 구성(舊城) 둘이 있다. 구성은 명 나라 홍무(洪武) 때에 벽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리 238보이고 문이 3개 있었다. 신성은 만력(萬曆) 때에 벽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리 198보이고 문이 3개 있었다. 신성과 구성의 거리는 50보(步)로서 두 끝이 이어졌고, 밖에는 다 해자[濠]가 있다. 청 나라 강희(康煕) 연간에 무령산(霧靈山)의 물이 성 밑을 들이받아 무너뜨렸으므로, 성 서쪽에 운하(運河) 460여 장(丈)을 파 물을 끌어다가 백하(白河)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성을 보호하는 돌 제방[石堤] 800여 장(丈)을 쌓았다. 성에는 수영도사(守營都司) 1인, 파총 1인, 군병 258명이 있다.
무령산은 밀운 동북 180리에 있는데, 일명 만화대(萬花臺)라 한다. 높고 험준하기가 여러 산들의 으뜸이 된다. 산 위에는 항상 구름과 안개가 덮여 있으며 그 정상에 오르면 만리장성 안쪽을 다 굽어볼 수 있다.
사릉산(四稜山)은 밀운 동북 100리에 있다. 봉우리들이 빼어난데 다 방정(方正)하여 모가 있다. 흑송산(黑松山)은 밀운 북쪽의 약간 동편 70리에 있다. 전해 오는 말에, 원(元) 나라 때에는 여기에 흑송(黑松)의 숲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오봉산(五峯山)은 밀운의 동북 80리에 있다.
다섯 봉우리가 솟아 손가락처럼 벌여 있으므로, 오지산(五指山)이라고도 한다.
밀운산(密雲山)은 현(縣)의 남쪽 20리에 있는데 일명 횡산(橫山)이라고도 한다.
“석호(石虎)가 요(遼)를 쳐서 함락시키자 요가 영지(令支)를 버리고 밀운산으로 달아났다.”
라고 한 것이 바로 이곳이다. 백단산(白檀山)은 현(縣)의 남쪽 20리에 있는데, 회유현(懷柔縣)과 경계가 연접되어 있다. 현명(縣名)을 ‘밀운’이니 ‘백단’이니 한 것은 이 밀운, 백단의 두 산이 있기 때문이다. 서곡산(黍谷山)은 현의 서남쪽 15리에 있다. 《유향별록(劉向別錄)》에,
“연(燕) 나라에 서곡(黍谷)이 있는데 땅이 아름다우나 기후가 차서 오곡이 생산되지 않더니, 추자(鄒子)가 여기에 살면서 율(律)을 불자 온기(溫氣)가 이르렀다.”
라고 한 것이 있는데, 추자의 이름은 연(衍)이니 연 소왕(燕昭王)이 스승으로 섬겼으며, 담천연(談天衍)이라고 부르던 자이다. 은야산(銀冶山)은 현의 남쪽 15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은광(銀鑛)을 산출하였다. 송(宋) 나라 왕증(王曾)의 ‘상거란사(上契丹事)’에,
“순주(順州)의 동북에서 백서하(白嶼河)를 지나 은야산(銀冶山)을 바라본다.”
라고 한 것이 곧 이곳이다. 백하(白河)는 현 서쪽에 있는데, 근원이 선화부(宣化府) 적성현(赤城縣)에서 나온다. 고북구(古北口)에서 서쪽으로 흘러 들어가 현성(縣城)의 서쪽에 이르고, 또 남으로 회유현(懷柔縣)의 동쪽에 이른다. 또 남으로 순의현(順義縣)의 동쪽을 거쳐 통주(通州)의 북쪽에 이르고, 또 동남으로 흘러서 주(州)의 동쪽에 이르며, 또 남으로 고곽현(故漷縣)의 동쪽에 이른다. 거기서 또 향하현(香河縣)의 서남을 지나 동남으로 무청현(武淸縣)의 동쪽에 이르고, 또 동남으로 천진현계(天津縣界)에 들어가서 직고(直沽)를 거쳐 바다로 들어간다. 옛 이름은 고수(沽水)이고 또 일명 노수(潞水)니, 지금은 북운하(北運河)라고 일컫는다. 대체로 백하(白河)는 조고(潮沽), 유사(楡沙), 통혜(通惠) 등 여러 하수(河水)와 만나 형세가 암키와를 세워 놓은 것 같다. 그리고 서북쪽에 여러 산의 천류(泉流)들이 모여들어서 육칠월 장마 때는 터지기 쉽다.
강희(康煕) 연간에 무청현 광아항(筐兒港)을 터서 열었는데, 성조(聖祖)가 가서 보고 명령하여 터서 연 곳에 물의 흐름을 조절하는 돌 제방 20발을 세우게 하였다. 그리고 하수를 끌어 긴 제방을 끼고 탑하정(塌河淀)으로 내쏟아, 가가고(賈家沽)를 거쳐 바다에 들어가게 하였다. 옹정(雍正) 연간에 이현친왕(怡賢親王)이 주청(奏請)하기를,
“북운하(北運河)를 통영도(通永道)의 관할로 돌리고, 하서무(河西務)에 동지(同知)를 설치하며 양촌(楊村)에 통판(通判)을 설치하여 방축(防築)과 수리에 전력하게 하소서.”
하여, 드디어 광아항의 구파(舊壩)를 60발로 넓혀서 고쳐 쌓고, 거듭 준설(浚渫)하여 하수(河水)를 텄으며 긴 둑을 고쳐 쌓았다. 또 하서무 상류인 청룡만(靑龍灣)에 40발의 제방을 쌓고 하수를 터서 끌어 칠리해(七里海)에 쏟고, 또 칠리해를 끌어 북당구(北塘口)로 빠지게 하니, 운하의 길이 드디어 편안하게 되었다.
안양하(安陽河)는 현의 서북쪽 70리에 있는데, 근원이 사마대(司馬臺)의 관구천(關口泉)에서 나온다. 남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꺾여서 고북영(古北營)의 성안을 꿰뚫어 흐르고, 서쪽으로 나가다 또 남으로 흘러 조하(潮河)에 들어간다.
정림(亭林) 고염무(顧炎武)가 말하기를,
“석갑(石匣)의 동북에서 10리를 가면 요정포(腰亭鋪)인데 비로소 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또 10리를 가면 신문령(新聞嶺)이 되고, 또 10리를 가면 노왕점(老王店)이 된다. 《금사(金史)》에 정우(貞祐) 2년(1214, 고려 고종 1)에 조하(潮河)가 넘쳐서 고북구(古北口)의 쇠로 된 문과 문 빗장이 떠내려가서 노왕곡(老王谷)에 이르렀다고 한 것이 이곳이다. 또 12리를 가면 고북구에 이른다. 물이 얕을 때에는 조하를 가로지를 수 있고, 물이 많을 때에는 우회하여 산마루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므로 석갑에서 고북구에 이르는 거리를 계산하면 60리가 된다.
고북구는 당(唐) 나라 때 처음 붙인 이름이다. 《당서(唐書)》에, ‘단주(檀州) 연락현(燕樂縣)에 동군(東軍), 북구(北口)의 두 수비(守備)가 있어 북구를 지키고 있으니, 장성(長城)의 어귀이다.’라 하였고, 《금사(金史)》에는 ‘고북구는 나라말[國言]로는 유알령(劉斡嶺)이라고 한다.’ 하였으며, 《원사(元史)》에는 ‘고북구 천호소(古北口千戶所)는 단주 북면 동구(檀州北面東口)에 관사(官司)를 두었다.’고 하였다.
당 나라 장종(莊宗)이 유주(幽州)를 쳐서 취할 때에는 유광준(劉光濬)을 보내어 고북구를 쳐서 이겼으며 요 태조(遼太祖)가 산남(山南)을 쳐서 취할 때에는 먼저 고북구로부터 항복받았고, 금 나라가 요(遼)를 멸망시킬 때에는 희윤(希尹)의 요병(遼兵)을 고북구에서 크게 깨뜨렸다. 그가 연경(燕京)을 탈취할 때에도 포현(蒲莧)이 송 나라 군사를 고북구에서 깨뜨렸다. 원 나라 문종(文宗)이 설 때에는 당 기세(唐其勢)가 고북구에 주둔하자, 살돈(撒敦)이 상도(上都)의 군사를 고북구로 진격시켰다. 독견첩목아(禿堅帖木兒)가 들어오니 태자(太子)는 광희문(光煕門)으로 나가 동쪽의 고북구로 달아났으며, 본조(本朝) 가정(嘉靖) 연간에는 엄답(俺答)이 경사(京師)를 범하였을 때에 고북구로 들어왔다.
그러므로 거용관(居庸關)과 산해관(山海關) 중간에 위치하여 그 액구(阨口)와 요새(要塞)를 제압(制壓)하는 곳은 고북(古北), 희봉(喜峯)의 두 관구(關口)이다.”
라고 하였다.
상고하여 보니, 정림(亭林)이,
“석갑(石匣)의 동북 42리가 고북구이고, 또 3리를 가면 조하천영성(潮河川營城)이 된다.”
고 한 것은 ‘조하영(潮河營)이 고북구의 밖에 있다.’고 한 것으로 내가 본 것과 합치한다. 그리고 그가 석갑성으로부터 이정(里程)을 계산한 것은 지금과 5리 차이가 날 뿐이다. 《청일통지(淸一統志)》에 고북구는 밀운(密雲)의 동북쪽 120리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조하영은 실로 밀운 동북쪽 100리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정림(亭林)이 물이 많을 때 우회하는 이수(里數) 계산한 것을 잘못 본 것으로서, 조하영이 도리어 고북구의 안쪽에 있는 것이 되어 지금의 관방(關防) 형세와는 판이하니, 작은 실수가 아닌 듯하다.
[주-C001] 원명원(圓明園) :
북경의 서직문(西直門)의 동산으로 청 나라 세조(世祖)가 번저(藩邸)에 있을 때에 하사된 것이다. 옹정(雍正) 이래로 매년 초봄에 여기에서 청정(聽政)하는 것을 상례로 하였다. 함풍(咸豐) 때에 영불연합군(英佛聯合軍)에 의하여 불에 탔다.
[주-D001] 치첩(雉堞) :
성(城) 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몸을 숨기고 적을 치는 곳이다. 여장(女墻), 성가퀴, 타구(垜口)라고도 한다.
[주-D002] 연(燕) 나라에 …… 이르렀다 :
추자는 추연(鄒衍)으로, 전국 시대 제(齊) 나라 임치(臨淄) 사람이다. 소왕(昭王)이 죽은 뒤 혜왕(惠王)이 참소를 믿고 그를 옥에 가두자 추연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여 5월에 서리가 내리게 했다. 북방(北方)에 비옥한 땅이 있었으나 기후가 차서 오곡이 익지 않을 때 추연이 율(律)을 불어서 기후를 따뜻하게 만들자 벼와 기장이 잘되었다고 하는 고사가 있다.역수를 지나다〔過易水〕 지금의 이름은 백하(白河)인데, 겨울날에는 물이 말라버리고 흰모래만 남아 얇게 흐른다. 고금의 산천의 변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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