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9. 09:49ㆍ북경 추정
> 조선왕조실록 > 정조실록 > 정조 4년 경자 > 4월 22일 > 최종정보
정조 4년 경자(1780) 4월 22일(경오)
04-04-22[01] 동지 겸 사은사 서장관 홍명호가 바친 문견 사건의 내용
[DCI]ITKC_JT_V0_A04_04A_22A_00010_2005_005_XML DCI복사 URL복사
동지 겸 사은사 서장관(冬至兼謝恩使書狀官) 홍명호(洪明浩)가 바친 문견 사건(聞見事件)에,
“1. 압록강(鴨綠江)을 건넌 이후부터 석문령(石門嶺)에 이르는 3백여 리 사이는 토지가 기름지고 산천이 명려(明麗)하여 변방다운 맛이 아주 없고 겹친 봉우리와 높은 고개가 거듭거듭 에워싸고 있습니다. 석문령이 서쪽은 요양(遼陽)인데, 산세가 점점 평탄해지며 동쪽에서 남쪽으로 싸고 있습니다. 큰 들은 하늘에 맞닿아서 끝없이 보이고 들을 4백여 리 가서야 곧바로 북쪽 하늘 가에 먼 산이 병풍처럼 구불구불 끊이지 않은 것이 보일 뿐입니다. 대개 산은 태행(太行)에서 일어나 벽립(壁立)하여 동쪽으로 내리뻗어 곧바로 우리 나라 북쪽에 닿는데 산이 성을 쌓은 것처럼 사막(沙漠)을 가로질러 끊어서 하늘이 이 때문에 남북으로 갈리고 화이(華夷)를 나눕니다.
심양(瀋陽)부터 비로소 성곽(城廓)이 있는데 평지의 방성(方城)입니다. 한 면(面)이 5리이므로 둘레가 20리이며 벽돌로 쌓고 사이에는 흰 회(灰)를 썼으며 높이는 수십 장(丈)에 가깝고 너비는 수기(數騎)를 벌일 만하여 문에는 반드시 옹첩(甕堞)을 설치하고 성을 둘러서 해자(垓子)를 깊이 파서 그 견고하기가 쇠와 같아 갑자기 공파(攻破)하기 어려우니, 우리 나라의 성에 견주면 같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황성(皇城)으로 말하면 높고 넓기가 갑절이나 더한데 통주(通州)의 강을 끌어들이고 백하(白河)의 물을 이어대어 둘러서 호수를 만들고 옥천(玉泉)의 물줄기를 파서 돌려대어 호수를 만든 것이 셋이고 또 끌어대어 성안으로 들여 대궐 안을 관통하고 갑문(閘門)으로 물을 담아 두어 큰 배를 운행하여 그대로 바다에 통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자성(子城)에 아홉 문을 설치하였는데, 두 문 사이는 성에 붙여서 벽돌을 쌓아 길을 만들고 성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고 가에 여장(女墻)을 설치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고서 끝머리에 문을 만들고 자물쇠를 설치하고 성을 지키는 군사가 양식을 가지고 가거나 물을 길어가려고 오르는 것을 점검하여 들여보내고 밖에서 그 문을 잠가 오르내리지 못하게 하는데 열흘마다 돌려가며 번을 선다고 합니다
> 고전번역서 > 연행록선집 > 경자연행잡지 > 경자연행잡지 > [잡지(雜識)] > 최종정보
경자연행잡지 / [잡지(雜識)]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상
[DCI]ITKC_BT_1419A_0010_010_0010_2004_005_XML DCI복사 URL복사
통주강(通州江)은 일명 노하(潞河)라고 하고, 속칭 외하(外河)라고도 한다. 수원(水源)이 멀고 흐름이 빠른데 모래 웅덩이가 많다. 여름이나 가을만 되면 폭우가 내려 터지기가 가장 쉽고 또 조금만 가물어도 얕아져서 배 다니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얕은 여울 50여 곳을 파냈다. 이것이 곧 천하의 항로(航路)이다. 통주라는 이름도 이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한다. 언덕 위의 민가(民家)들은 모두 물에 임해서 살기 때문에 바라다보면 마치 그림과 같다. 이따금 백회(白灰)로 그 집 위를 바른 것도 있다. 냇물이 얼면 백여 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위아래에 정박해 있고, 강남(江南) 상선(商船)도 머물러 있는 것이 있다. 만일 이것을 우리나라 삼강(三江)의 선박에 비교한다면 곱절만 될 뿐이 아니다. 일찍이 듣기로는 통주의 배 돛대가 마치 만 그루의 나무가 빽빽이 서 있는 것과 같아서, 천하의 장관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렇지는 않다.
동쪽 성을 거쳐서 들어가니 거리 위에 왕래하는 행인과 장사하는 오랑캐로서 수레를 몰고 말을 탄 자가 시가를 메우고 거리에 가득 차서 어깨가 서로 부딪치고 수레바퀴가 서로 닿을 정도다. 시장은 풍성하고 사치스러우며, 모든 물건이 구름처럼 쌓였고, 곳곳에 깃대를 꽂았다. 좌우에 벌여 있는 양털 갖옷, 가죽옷, 붉은 모자, 그림 그린 자기(磁器), 미곡(米穀), 양이나 돼지, 생강, 후추, 배추, 무 등이 어떤 것은 상점 위에 모여 있고, 어떤 것은 길가에 쌓여 있다. 이 물건들은 수레로 운반하기도 하고 등으로 져 나르기도 하는데 그 수를 다 셀 수가 없다. 더구나 깊고 넓은 호참(壕塹)과 견고하고 치밀한 성벽, 웅장하고 화려한 누각과 대관(臺觀), 굉장히 큰 집들과 창고 등은 심양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어서, 참으로 국도(國都)의 요해처요, 물과 육지의 중요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팔리보(八里堡)에서 아침밥을 먹고 북경에 들어갔다. 해뜰 무렵에 떠나서 서문(西門)을 나섰다. 문은 두 겹으로 되어 있고 성 밖에 또 성이 있다. 두 성 사이는 3, 4리 되는데 인가와 시가가 또 몹시 번화하다. 성 밖에는 또 두 겹의 문이 있고, 해자도 상당히 깊었다. 팔리교(八里橋)를 지났다. 다리는 보제갑(普濟閘) 동쪽에 있는데, 길이는 40여 보나 되고 넓이는 4, 5궤(軌)나 되고, 높이는 배가 다닐 만하다. 이곳은 바로 백하(白河)로부터 북경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정통(正統) 연간에 황명(皇命)으로 세운 것으로 육지로 운반하는 통로를 삼은 것이다. 본명은 영통교(永通橋)인 것을 속칭 팔리교라고 한다. 사당을 세워 하신(河神)을 제사 지내는데, 좨주(祭酒) 이시면(李時勉)의 기(記)가 있다. 이는 만력 연간에 중수(重修)한 것이다.
> 고전번역서 > 연행록선집 > 경자연행잡지 > 경자연행잡지 > [잡지(雜識)] > 최종정보
경자연행잡지 / [잡지(雜識)]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하
[DCI]ITKC_BT_1419A_0010_010_0020_2004_005_XML DCI복사 URL복사
출발 후 서울로부터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 23일이 걸렸다. 머문 날까지 모두 계산한 것이다. 아래도 같다. 압록강에서 북경에 이르기까지 32일이 걸렸고, 북경에 42일 동안 머물렀다.
돌아올 때에는 북경에서 압록강까지 28일이 걸리고, 의주에서 서울까지 13일이 걸렸다. 왕복한 것이 도합 138일이요, 이역(異域)에 있었던 것이 101일이다. 이수(里數)로는 왕복을 모두 계산하여 대략 6000여 리가 되고 지은 시가 392수이다.
압록강을 건넌 후에 이틀을 노숙하고, 책문(柵門)에 들어간 뒤에야 비로소 참(站)에서 잤다. 그 참은 모두 30개인데 각 참마다 각각 찰원(察院) 하나씩을 설치하였으니 우리나라 사신을 거처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朝鮮), 유원(柔遠) 등의 관명(館名)을 붙였던 것이다. 그 30참이란 봉황성(鳳凰城), 송참(松站), 통원보(通遠堡), 연산관(連山關), 첨수참(甛水站), 낭자산(狼子山), 요동(遼東), 십리보(十里堡), 심양(瀋陽), 변성(邊城), 주류하(周流河), 백기보(白旗堡), 이도정(二道井), 소흑산(小黑山), 광녕(廣寧), 십삼산(十三山), 소릉하(小凌河), 고교보(高橋堡), 영원위(寧遠衛), 동관역(東關驛), 양수하(兩水河), 산해관(山海關), 무령현(撫寧縣), 영평부(永平府), 사하역(沙河驛), 풍윤현(豐潤縣), 옥전현(玉田縣), 계주(薊州), 삼하현(三河縣), 통주(通州)이다.
찰원은 거의 모두가 퇴폐했기 때문에 전부터도 늘 사가(私家)를 빌려서 자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낮이나 저녁이나 한 곳에서 머물면 그 집에 반드시 세를 내야 하는데 그것을 방전(房錢)이라고 한다. 이것을 종이나 부채 등 각종 물건으로 주었는데, 심술꾼들이 물건을 더 요구해서 혹은 다투는 일이 있는 것도 괴로웠다. 만일 한 참(站)을 지나가려면 반드시 수행하는 여러 호인(胡人)들에게 주선을 청한 뒤에라야 갈 수가 있기 때문에 비용이 꽤 든다.
사람과 말을 대기에 어려울 염려가 있어서 한결같이 본참(本站)을 찾아서 투숙하는 것이 순탄한데 이번에 가는 길은 우리나라의 졸곡(卒哭)을 지내고 떠나느라 날짜가 촉박하여 부득이 변성(邊城)을 지나쳐서 고가자(孤家子)에서 자고, 주류하(周流河)를 지나쳐서 백기보(白旗堡)에서 자고, 이도정(二道井)을 지나쳐서 소흑산(小黑山)에서 자니, 참을 지나친 것이 이틀이나 된다.
무녕(撫寧)에는 찰원이 있기는 하지만 산해관과의 거리가 몹시 멀기 때문에 유관(楡關)에서 자는 것이 이미 근래의 예가 되어 왔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러했다. 돌아올 때는 집에 돌아갈 생각이 바빠서, 갈 때 건너뛰었던 두 참 이외에 또 첨수참(甛水站)을 건너뛰어서 연산관(連山關)에서 잤으니, 모두 세 참을 건너뛴 셈이다.
구련성(九連城)에서 봉황성(鳳凰城)까지는 산수가 아름답고 이따금 들이 펼쳐 있다. 봉황성에서 낭산(狼山)에 이르기까지는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은데 여러 번 큰 내를 건넜고, 냉정(冷井) 10여 리를 지나서야 요동 평야가 나왔고, 여기서 400여 리를 더 가서야 언덕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북경에 가기까지는 비록 나지막한 언덕이 있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이것은 모두 평야이므로 다시 높은 고갯길을 넘지 않았다. 연도(沿道)에서 가까운 산으로는 구련성의 송골산(松鶻山), 봉황성의 봉황산(鳳凰山), 광녕(廣寧)의 의무려산(醫巫閭山), 십삼산(十三山), 산해관의 각산(角山), 계주(薊州)의 공동산(崆峒山), 반룡산(盤龍山)이다. 이 일곱 산은 모두 돌산이며, 연도에서 먼 산으로는 창려현(昌黎縣)의 문필봉(文筆峯)과 요동의 천산(千山)이 가장 기이하게 빼어났다. 그리고 서북쪽의 만리장성 일대에도 역시 기이한 봉우리가 많다.
물은 요동의 태자하(太子河)와 심양(瀋陽)의 혼하(混河), 요하(遼河)와 금주위(錦州衛)의 대릉하(大凌河)ㆍ소릉하(小凌河)와 무령현(撫寧縣)의 양하(羊河)와 영평부(永平府)의 청룡하(靑龍河), 난하(灤河)와 풍윤현(豐潤縣)의 환향하(還香河)와 계주(薊州)의 어양하(漁陽河)와 삼하현(三河縣)의 호타하(滹沱河)와 통주(通州)의 백하(白河)인데, 모두 배가 있다. 조그만 개천으로서 하(河)라는 이름을 가진 것도 역시 곳곳에 있는데, 옛날에 이른바 북쪽 지방에 흐르는 물의 총칭이라 한 것이 사실이다. 백하와 요하가 가장 커서 거의 우리나라 임진강과 같고, 그 나머지 10개 물은 저탄(猪灘)만 하였다.
압록강을 건너서 북경에 이르기까지는 땅이 모두 모래이고, 요동 들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왕래하는 거마가 더욱 많고 모래는 더욱 미세해서 바람만 불면 휘날려서 마치 연기나 안개가 낀 것과 같다. 관내(關內)로 들어가면서 더욱 심해서 비록 바람이 없는 날이라도 수레바퀴, 말발굽이 지나간 뒤에 일어나는 것이 마치 횟가루가 날듯 해서 사람의 옷과 모자에 붙는다. 교자(轎子) 안에서는 사(紗)를 내려서 막지만 워낙 미세하기 때문에 새어 들어오기가 더욱 쉬워서 잠깐 사이에도 언덕처럼 쌓인다.
북경성(北京城)의 둘레는 40리이고, 남쪽 가의 겹성[重城]은 둘레가 28리이다. 통주성(通州城)의 둘레는 8, 9리가 되고, 서쪽에 겹성이 있다. 계주성(薊州城)과 영평부성(永平府城)은 모두 둘레가 8, 9리나 되고, 나성(羅城 성의 외곽(外廓))이 없다. 금주위성(錦州衛城)은 둘레가 8리인데 동쪽에 나성이 있고, 영원위(寧遠衛)에는 내성(內城), 외성(外城)이 있는데 둘레가 8리이다. 산해관성(山海關城)은 둘레가 7리쯤 되고 동서에 나성이 있다. 심양(瀋陽)에는 내외성(內外城)이 있는데 외성은 토성이고 내성은 둘레가 8리이다. 중우소(中右所), 중후소(中後所), 전둔위(前屯衛), 중전소(中前所) 등에 있는 성 둘레는 금주위성과 서로 비슷하다. 모든 성들은 벽돌로 쌓았는데 높이는 3장 이상이며, 산해관이 가장 웅장하다. 무령현(撫寧縣), 옥전현(玉田縣), 풍윤현(豐潤縣), 삼하현(三河縣) 및 여러 역보(驛堡)에도 모두 성이 있는데, 3장 이하인 것은 없다. 현(縣) 이상의 성에는 모두 십자가루(十字街樓)가 있어 2층 처마 혹은 3층 처마로 되었으며 푸른빛과 금빛이 공중에서 번쩍거렸다.
まだ作成途中なので問題が多いです
http://shuiren.org/kodaichimei/?s=%E7%99%BD%E6%B2%B3
白河
本文
在直隸。卽古沽水。源出獨石口外察哈爾沽源縣之土山。南流入長城。
至赤城縣。折東流復出長城。經察哈爾、熱河兩區域南境。復入長城。
南流至密雲縣。與潮河合。亦稱潮白河。南至通縣爲北運河。下流逕香
河、武清諸縣。南至天津會大清河、子牙河、衞河。由直沽歸海。自天
津三义口以下。俗稱海河。此河之水量。約毎杪五千六百立方尺。河幅
在天津租界附近。一百七十尺乃至三百三十尺。北塘口至鹹水沽間。平
均約二百五十尺。下流漸次増大。至大沽河口則六百六十尺。水深在天
津附近。十二尺乃至三十尺。塘沽十二尺乃至二十二尺。北礮台附近十
三尺乃至十八尺。然近來河身淤淺。水深大減。在乾潮之時。甚至有淺
瀨不滿三尺者。高潮時雖吃水十尺之輪船。可以自由航行。及至低潮。
則吃水三四尺之輪船。亦尙不能出入。毎年冬季。十一月下旬冰結。解
冰則在翌年二月下旬。或三月上旬。故冰結以後。由上海北來之汽船。
皆取道於秦皇島。河身灣曲甚多。後因西人之請爲截灣取直之計畫。自
清光緖二十七年。至宣統三年。四次施工。縮短白河水道七十三里。節
減一小時之船程。大沽口外。沙灘積淤。日甚一日。因又於舊水道之北
。開闢新水道。幅二百十尺。水深較舊水道尙深三尺。凡吃水淺而可航
行於白河之輪船。皆能經此水道以通過大沽沙灘。行者便之。⦿卽古淯
· 1. 강 이름
· 2. 기르다
· 3. 산동성 장구현(章丘縣)에서 발원하여 소청강(小淸江)으로 흘러듦
水。源出河南嵩縣西南攻離山。東南流至南召縣。折南流經南陽、新野
至湖北襄陽縣會唐河。名唐白河。注於漢
。⦿在甘肅。古呼蠶水。亦曰
洮賚河。發源青海之祁連山。流經酒泉與黑河合。入蒙古額濟納之居延
海。
本文
隋於酒泉郡置。尋廢。唐復置。改曰酒泉郡。尋復曰肅州。治酒泉。後陷吐蕃。宋屬西夏。元置肅州路。明爲肅州衞。清直隸甘肅省。民國改爲酒泉縣。⦿遼置肅州信陵軍。金廢。故治在今奉天開原縣東北。
주취안
JiuquanChiuch-uan , 酒泉·
위치 | 중국 북서부 간쑤 성 서부 |
인구 | 1,119,400명 (2016 추계) |
면적 | 168,080㎢ |
대륙 | 아시아 |
국가 | 중국 |
요약 중국 간쑤 성[甘肅省] 서부에 있는 도시.
(병). Jiuquan. (웨). Chiu-ch’üan.
주취안(Chiuch-uan)
주취안 시의 위치
ⓒ Croquant / wikipedia | CC BY 3.0
Kiuchüan이라고도 쓴다. 중앙 아시아로 가는 고대 실크로드의 중간 기착지로서 BC 111년 군사적 전초기지로 세워졌다. 581년 이후 쑤저우 지구[肅州地區]의 중심지였으며, 당대(618~907)에 지금의 이름이 주어졌다.
5세기 이후로는 남서쪽으로 14㎞쯤 떨어진 원수 산[文殊山]에 동굴 사원이 세워져 불교도의 순례지가 되었다. 그러나 뒤이어 고대 실크로드가 쇠퇴함에 따라 중요성도 줄어들었다.
1950년대 후반 남쪽에 있는 징톄산[鏡鐵山]에 철광석이 대규모 매장되어 있음이 발견되고, 남동쪽에 있는 산단[山丹]에서 탄광이 개발되면서 근대적인 발전이 시작되었다. 새로 놓여진 란신[蘭新] 철도가 이 두 지역을 지난다. 대규모 종합철강단지도 이곳에 세워졌다.
[Daum백과] 주취안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고전번역서 > 연행록선집 > 계산기정 > 계산기정 제5권 > 부록 > 최종정보
백하(白河)는 수원이 변새(邊塞) 밖에서 나와, 선화부에서 순천부 경내로 들어오고, 천진(天津)에 와서 위하(衛河)와 합류한다. 그리고 밀운현(密雲縣)에서 우란산에 이르러 조하(潮河)와 합류하고, 통주(通州)에 이르러 직고(直沽)로 들어간다. 일명 백수하(白遂河)이다. 조선(漕船)이 모이는 곳이므로 또한 북운하(北運河)라고 한다. 또 통주강(通州江)이라고도 하며 일명 노하(潞河)라고도 한다. 대개 유(楡)ㆍ하(河)ㆍ혼(渾) 3개 물이 여기 와서 합류한다. 또 이름을 운하(運河)라 하니, 원(元) 나라 곽수경(郭守敬)이 파서 동남의 조로(漕路)를 개통하였던 것이다
> 고전번역서 > 연행록선집 > 연행록 > 일기 > 임진년 > 최종정보
일기(日記) / 임진년(1712, 숙종 38) 12월
26일
[DCI]ITKC_BT_1417A_0040_020_0260_2004_003_XML DCI복사 URL복사
맑음. 일찍 출발하여 30리를 가서 하점(夏店)에 이르러 조반을 먹었다.
또 40리를 가서 통주(通州)에 이르러 찰원에 들어가 유숙하였다. 삼하현에서 남문으로 나와서 돌다리 하나를 건너고 서쪽을 향해 6리쯤 가니 조림장(棗林庄)이 있었다. 조림장에서 6리쯤 거리에 백부도(白浮屠)가 있고, 백부도에서 6, 7리 거리에 신점(新店)이 있었다. 신점에서 6, 7리 거리에 황돈점(皇頓店)이 있고, 황돈점에서 6, 7리 거리에 하점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아침 참을 먹는 곳이다. 여기에서 6리 거리에 유하둔(柳河屯)이 있고, 유하둔에서 6, 7리 거리에 마망핍(馬亡乏)이 있다. 여기에서 8리 거리에 연교포(煙郊鋪)가 있고, 연교포에서 5리 거리에 삼가장(三家庄)이 있다. 삼가장에서 3리 거리에 등가장(鄧家庄)이 있고, 등가장에서 4리 거리에 호가장(胡家庄)이 있다. 호가장에서 3리 거리에 습가장(習家庄)이 있으니 옛적의 습가지(習家池)가 아니었던가?
여기에서 3리 거리에 백하(白河)가 있다. 이 물은 천수산(天壽山) 동북쪽 원산(遠山)에서 발원하여 북경(北京) 대내(大內)를 지나, 여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다. 조수(潮水)가 서로 연해서 배들이 나루에 가득한데, 배 모양은 우리나라 배와 달라, 바닥 판자가 매우 넓고 머리쪽은 낮으며 꼬리쪽은 높아서 그다지 가볍고 편리하지 않았다.
정조 4년 경자(1780) 4월 22일(경오)
04-04-22[01] 동지 겸 사은사 서장관 홍명호가 바친 문견 사건의 내용
[DCI]ITKC_JT_V0_A04_04A_22A_00010_2005_005_XML DCI복사 URL복사
동지 겸 사은사 서장관(冬至兼謝恩使書狀官) 홍명호(洪明浩)가 바친 문견 사건(聞見事件)에,
“1. 압록강(鴨綠江)을 건넌 이후부터 석문령(石門嶺)에 이르는 3백여 리 사이는 토지가 기름지고 산천이 명려(明麗)하여 변방다운 맛이 아주 없고 겹친 봉우리와 높은 고개가 거듭거듭 에워싸고 있습니다. 석문령이 서쪽은 요양(遼陽)인데, 산세가 점점 평탄해지며 동쪽에서 남쪽으로 싸고 있습니다. 큰 들은 하늘에 맞닿아서 끝없이 보이고 들을 4백여 리 가서야 곧바로 북쪽 하늘 가에 먼 산이 병풍처럼 구불구불 끊이지 않은 것이 보일 뿐입니다. 대개 산은 태행(太行)에서 일어나 벽립(壁立)하여 동쪽으로 내리뻗어 곧바로 우리 나라 북쪽에 닿는데 산이 성을 쌓은 것처럼 사막(沙漠)을 가로질러 끊어서 하늘이 이 때문에 남북으로 갈리고 화이(華夷)를 나눕니다.
심양(瀋陽)부터 비로소 성곽(城廓)이 있는데 평지의 방성(方城)입니다. 한 면(面)이 5리이므로 둘레가 20리이며 벽돌로 쌓고 사이에는 흰 회(灰)를 썼으며 높이는 수십 장(丈)에 가깝고 너비는 수기(數騎)를 벌일 만하여 문에는 반드시 옹첩(甕堞)을 설치하고 성을 둘러서 해자(垓子)를 깊이 파서 그 견고하기가 쇠와 같아 갑자기 공파(攻破)하기 어려우니, 우리 나라의 성에 견주면 같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황성(皇城)으로 말하면 높고 넓기가 갑절이나 더한데 통주(通州)의 강을 끌어들이고 백하(白河)의 물을 이어대어 둘러서 호수를 만들고 옥천(玉泉)의 물줄기를 파서 돌려대어 호수를 만든 것이 셋이고 또 끌어대어 성안으로 들여 대궐 안을 관통하고 갑문(閘門)으로 물을 담아 두어 큰 배를 운행하여 그대로 바다에 통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자성(子城)에 아홉 문을 설치하였는데, 두 문 사이는 성에 붙여서 벽돌을 쌓아 길을 만들고 성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고 가에 여장(女墻)을 설치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고서 끝머리에 문을 만들고 자물쇠를 설치하고 성을 지키는 군사가 양식을 가지고 가거나 물을 길어가려고 오르는 것을 점검하여 들여보내고 밖에서 그 문을 잠가 오르내리지 못하게 하는데 열흘마다 돌려가며 번을 선다고 합니다
> 고전번역서 > 연행록선집 > 경자연행잡지 > 경자연행잡지 > [잡지(雜識)] > 최종정보
경자연행잡지 / [잡지(雜識)]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상
[DCI]ITKC_BT_1419A_0010_010_0010_2004_005_XML DCI복사 URL복사
통주강(通州江)은 일명 노하(潞河)라고 하고, 속칭 외하(外河)라고도 한다. 수원(水源)이 멀고 흐름이 빠른데 모래 웅덩이가 많다. 여름이나 가을만 되면 폭우가 내려 터지기가 가장 쉽고 또 조금만 가물어도 얕아져서 배 다니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얕은 여울 50여 곳을 파냈다. 이것이 곧 천하의 항로(航路)이다. 통주라는 이름도 이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한다. 언덕 위의 민가(民家)들은 모두 물에 임해서 살기 때문에 바라다보면 마치 그림과 같다. 이따금 백회(白灰)로 그 집 위를 바른 것도 있다. 냇물이 얼면 백여 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위아래에 정박해 있고, 강남(江南) 상선(商船)도 머물러 있는 것이 있다. 만일 이것을 우리나라 삼강(三江)의 선박에 비교한다면 곱절만 될 뿐이 아니다. 일찍이 듣기로는 통주의 배 돛대가 마치 만 그루의 나무가 빽빽이 서 있는 것과 같아서, 천하의 장관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렇지는 않다.
동쪽 성을 거쳐서 들어가니 거리 위에 왕래하는 행인과 장사하는 오랑캐로서 수레를 몰고 말을 탄 자가 시가를 메우고 거리에 가득 차서 어깨가 서로 부딪치고 수레바퀴가 서로 닿을 정도다. 시장은 풍성하고 사치스러우며, 모든 물건이 구름처럼 쌓였고, 곳곳에 깃대를 꽂았다. 좌우에 벌여 있는 양털 갖옷, 가죽옷, 붉은 모자, 그림 그린 자기(磁器), 미곡(米穀), 양이나 돼지, 생강, 후추, 배추, 무 등이 어떤 것은 상점 위에 모여 있고, 어떤 것은 길가에 쌓여 있다. 이 물건들은 수레로 운반하기도 하고 등으로 져 나르기도 하는데 그 수를 다 셀 수가 없다. 더구나 깊고 넓은 호참(壕塹)과 견고하고 치밀한 성벽, 웅장하고 화려한 누각과 대관(臺觀), 굉장히 큰 집들과 창고 등은 심양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어서, 참으로 국도(國都)의 요해처요, 물과 육지의 중요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팔리보(八里堡)에서 아침밥을 먹고 북경에 들어갔다. 해뜰 무렵에 떠나서 서문(西門)을 나섰다. 문은 두 겹으로 되어 있고 성 밖에 또 성이 있다. 두 성 사이는 3, 4리 되는데 인가와 시가가 또 몹시 번화하다. 성 밖에는 또 두 겹의 문이 있고, 해자도 상당히 깊었다. 팔리교(八里橋)를 지났다. 다리는 보제갑(普濟閘) 동쪽에 있는데, 길이는 40여 보나 되고 넓이는 4, 5궤(軌)나 되고, 높이는 배가 다닐 만하다. 이곳은 바로 백하(白河)로부터 북경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정통(正統) 연간에 황명(皇命)으로 세운 것으로 육지로 운반하는 통로를 삼은 것이다. 본명은 영통교(永通橋)인 것을 속칭 팔리교라고 한다. 사당을 세워 하신(河神)을 제사 지내는데, 좨주(祭酒) 이시면(李時勉)의 기(記)가 있다. 이는 만력 연간에 중수(重修)한 것이다.
'북경 추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경풍수(北京風水),북경연혁(北京沿革) (2) | 2022.09.19 |
---|---|
역수를 지나다〔過易水〕 지금의 이름은 백하(白河)인데, (0) | 2022.09.19 |
연경가는길-늪.사막.추위 (0) | 2022.09.18 |
대원달자(大元㺚子)이다 (0) | 2022.09.18 |
공조판서 성공임 부경서(送工曹判書成公任赴京序) | (0) | 2022.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