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풍수(北京風水),북경연혁(北京沿革)

2022. 9. 19. 09:58북경 추정

 

고전번역서 > 연행록선집 > 연원직지 > 연원직지 제3 > 유관록 > 최종정보

연원직지 3 / 유관록(留館錄)   임진년(1832, 순조 32) 12[19-30] 

19

[DCI]ITKC_BT_1428A_0040_010_0010_2004_010_XML DCI복사 URL복사

북경풍수(北京風水)

 

예부터 제왕(帝王) 도읍을 세운 지역은 반드시 위로 천시(天時) 합하고 아래로 지리에 맞았다. 북경은 천문(天文) 있어서는 (), () 분야가 되고, 지지(地志) 있어서는 우공(禹貢)’ 기주(冀州) 지역이 된다.

오른쪽으론 태항산(太行山) 끼고서 화산(華山)으로 백호(白虎) 삼았고, 왼쪽으론 창해를 두르고서 태산(泰山)으로 청룡(靑龍) 삼았으며, 북쪽으론 의무려(醫巫閭) 뒤로 하고, 남쪽으론 구하(區夏) 닿아서 하제(河濟) 금대(襟帶) 삼고 숭산(嵩山)으로 경계를 삼았다. 회남(淮南) 모든 산들은 2중의 안산(案山) 되고, 강남(江南) 오령(五嶺) 모든 산들은 3중의 안산이 되었다.

수세(水勢) 말하백하(白河) 남쪽으로 통주(通州) 흐르니 청룡수(靑龍水) 되고, 옥천(玉泉) 남쪽으로 통혜하(通惠河) 흐르니 백호수(白虎水) 된다. 그리고 노구하(蘆溝河) 물굽이가 완평(完平) 경계로 들어가니 주작수(朱雀水) 되고, 습여(濕餘), 고량(高梁), 유하(楡河) 등의 물은 모두 도성 북쪽을 돌아서 동쪽으로 백하에 들어가니 현무수(玄武水) 된다.

바람이 없는데도 흩어지고 물이 있어서 경계를 이루며, 산을 등져 샘이 깊으니 토질은 윤택하고, 바다에 닿아서 조수가 스치니 토양(土壤) 비옥하다. 감여가(堪輿家)에서 이른바 천리대와(千里大窩)’라는 것이니, 참으로 좋은 풍수이다.

오장원(吳長元) 《신원지략(宸垣識略)》에,

태항산은 서쪽에서 내려와 길게 뻗어 북쪽으로 가서 (), (), (), () 경계에 이어져 동쪽 의무려에서 끝난다. 중첩된 봉우리가 옹호하면서 감아 도니,   리나 되는지   없다.”

하였다. 또한,

태항산이, 삼위(三危)에서는 머리를 내밀고, 하탁(河坼)에서는 기세가 약해지다가, 북쪽으로 가서는 높아져서 항산(恒山) 되고, 지엽의 멧부리와 중첩된 봉우리들은 모두 () 지방으로 내달려, 질서 정연하게 다시 이어져 동쪽으로 수십백 리를 뻗어 바다 서해자(西海子)  들어갔다. 이것을 서산(西山)’이라 일컫는데, 이는 경사(京師) 오른팔 구실을 하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의산(醫山) 서산은 바로  산에서 갈라진 줄기이다.”

하였다. 그리고,

상고컨대, 주자(朱子) 연도(燕都) 형세를 논할 적에 태산과 화산(華山) 가지고 청룡, 백호를 삼은 것은 그럴 듯하다. 그런데 태산의 산맥이 혹시 옛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함곡(函谷) 서쪽으로부터 와서 동해(東海)에서 끝났다고 한다면, 산수(山水)  순탄하니,  기운이 능히 응취(凝聚)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어제문집(御製文集속의 ‘태산 산맥은 성경(盛京) 장백산(長白山)으로부터 금주(金州) 여순구(旅順口) 이르러 바다에 들었으니, 바다 가운데 열두어 개의 섬들은 모두  산맥이 드러난 것이다산동(山東) 등주(登州) 복산(福山) 이르러선 단애산(丹厓山) 서남쪽에서 솟아 800 리를 뻗어 가다 맺혀서 태산이 되었는데,  높디높고 구불구불 구부러진 모양이 오악(五嶽) 우두머리가 된다.’ 말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제수(濟水) 순조롭게 달리고 대산(岱山) 거슬러 치솟아, 청주(靑州) 서주(徐州)  주에서 퍼져 화산 지맥과 서로 접한다. 그래서 중원의 형세가 매우 견고하게 맺히고, 연도(燕都)  오른쪽으론 , 왼쪽으론 바다,  사이에 싸여서 자연 깊숙한 구역이 된다. 이상은 주자가 알지 못한 바다.”

하였다.

도성(都城) 수세는 모두 도랑을 파서 물을 끌어  것이다. 대개 옥천(玉泉) 물이 동남으로 40리를 흐르다가 고량하(高梁河) 거쳐 도성 서북 모퉁이에 이르러선 도성의 해자[]  둘러 이룬다. 동으로  갈래를 나눠 덕승문(德勝門) 오른쪽 수문으로 들어와 모여서 십찰해(十刹海) 된다.  하류가  자금성(紫禁城) 해자를  두르니, 이를 금호(禁濠)’라고 한다.

금호가  동으로  갈래를 나눠 지안문(地安門) 왼쪽 수문을 경유, 들어가 옥하수(玉河水) 되고, 다시 자금성 동남쪽 모퉁이로 흘러나가 중어하교(中御河橋), 북어하교(北御河橋) 거쳐서 정양문(正陽門) 동쪽 수문을 경유, 내성(內城) 해자에 모인다. 북경의 성첩 제도는 남성(南城)에만 안팎의 구별이 있다.  동편문(東便門) 왼쪽 수문을 경유, 도성의 해자로 흘러 모여 동으로 운하(運河) 들어간다.

금호 서쪽  갈래는 지안문 오른쪽 수문을 경유해서 들어가 모여 태액지(太液池) 되고, 남쪽으로 흘러 금오옥동교(玉蝀橋) 이른다. 다시  갈래로 나눠진다. 그중 동쪽 갈래는 궁성(宮城) 해자가 되어 동쪽으로 옥하수에 모인다. 그중 서쪽 갈래는 남쪽으로 흘러 자금성 서남 모퉁이를 나가, 서천안문(西天安門)  태청문(太淸門) 둘러 지나서 동천안문(東天安門) 밖에 이르러, 동쪽으로 궁성의 해자와 도성의 해자에 모인다. 서쪽으로  갈래가 나눠져서 서직문(西直門) 왼쪽 수문을 경유해 들어가, 남쪽으로 흘러서 부성문(阜成門) 거치고 선무문(宣武門) 서쪽 수문을 경유, 내성의 해자로 흘러 모인다.  나머지 가방(街坊) 있는 자그마한 개천은  기록할  없다.

 

북경연혁(北京沿革) 

서계(書契) 이전의 연대(年代) 국도(國都) 상고할 수가 없으나, 경전(經傳) 나타난 것은 황제(黃帝) 도읍한 탁록(涿鹿) 이곳이다.  때문에 이백(李白) 북풍행(北風行)’,

연산의 눈송이 크기가 돗자리만 한데 / 燕山雪花大如席
조각 조각 날려 헌원대 떨어지네 / 片片吹落軒轅臺

 하였다.

고양씨(高陽氏) 전욱(顓頊)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유릉(幽陵)이라 하였다. 도당(陶唐)에서는 유도(幽都) 하였는데, 화숙(和叔) 살게  곳이다. ()에서는 유주(幽州) 하였는데, 공공(共工) 내쫓은 곳이다. 대개 옛날에 9(九州) 있었는데,  임금 때에 기주(冀州) 청주(靑州) 지역이 넓다고 하여 청주를 나누어 영주(營州) 만들고, 기주를 나누어 유주(幽州) 병주(幷州)  ()  만들었다. ‘순전(舜典)’, ‘12주를 처음 만들었다.’  것이 이것이다.

() 수토(水土) 다스리고 다시 구주를 만들었으며, (), () 그대로 따랐다. 주에서는 여기에 소공(召公) 봉하고 국호를 ()이라 하였다. ()에서는 상곡(上谷)이라 하였으며, () 연왕(燕王) 봉하였다가 뒤에 광양(廣陽)이라 고쳤으며, (), () 범양(范陽)이라 하였다.

 태종(遼太宗) 남경 석진부(南京析津府) 두었다.  둘레는 36리요, 8() 있었다. 동쪽은 안동문(安東門)ㆍ영춘문(迎春門), 남쪽은 개양문(開陽門)ㆍ단봉문(丹鳳門), 서쪽은 현서문(顯西門)ㆍ청보문(淸普門), 북쪽은 통천문(通天門)ㆍ공신문(拱辰門)이라 했다. () 연산부(燕山府) 두었다. 성의 둘레는 27리요,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 나라 임금 () 연경이라 일컬었는데, 뒤에 연이 열국(列國) 이름이므로 경사(京師)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 하여 마침내 성도(聖都) 고쳤다가 다시 중도(中都) 고쳤다. 이때 성의 둘레는 75리요, 13() 있었다. 동쪽은 선요문(宣曜門)ㆍ양춘문(陽春門)ㆍ시인문(施仁門), 남쪽은 풍의문(宜門)ㆍ경풍문(景風門)ㆍ단례문(端禮門), 서쪽은 호화문(灝華門)ㆍ여택문(麗澤門)ㆍ돈의문(敦義門), 북쪽은 통천문(通天門)ㆍ회성문(會成門)ㆍ숭지문(崇智門)ㆍ광태문(光泰門)이라 하였다.

() 대도(大都) 하였는데 궁궐의 유허(遺墟) 지금의 안정문(安定門) 밖에 있다. 성의 둘레는 60리요, 11문이 있었다. 동쪽은 제화문(齊化門)ㆍ숭인문(崇仁門)ㆍ광희문(), 남쪽은 여정문(麗正門)ㆍ문명문(文明門)ㆍ순승문(順承門), 서쪽은 화의문(和義門)ㆍ평칙문(平則門)ㆍ숙청문(肅淸門), 북쪽은 건덕문(建德門)ㆍ안정문(安定門)이라 한다.  후에 개평부(開平府) 도읍을 옮기고는 상도(上都) 일컬었으니, 바로 지금의 거용관(居庸關)이다. 대도(大都) 고쳐 중도(中都) 하고 (), () 나누어 세웠다.

 태조(明太祖)  무령 (徐武寧達) 보내 연을 평정하여 북평부(北平府) 하고, () 옛성을 헐어   땅을 줄이고는 연저(燕邸) 세웠다. 난을 평정한 뒤에는 순천부(順天府) 이름을 고쳤다. 그때의 성의 둘레는 40리이며 9문이 있었다. 남쪽은 여정문(麗正門) 뒤에 정양문(正陽門)이라 고쳤다. ㆍ문명문(文明門) 뒤에 숭문문(崇文門)이라 고쳤다. ㆍ순승문(順承門) 뒤에 선무문(宣武門)이라 고쳤다. 동쪽은 제화문(齊化門) 뒤에 조양문(朝陽門)이라 고쳤다. ㆍ동직문(東直門), 서쪽은 평칙문(平則門) 뒤에 부성문(阜成門)이라 고쳤다. ㆍ서직문(西直門), 북쪽은 안정문(安定門)ㆍ덕승문(德勝門)이라 한다.

가정(嘉靖) 때에 남성(南城)  외성(外城)이라고도 한다.  증축하였다. 둘레는 38리요 7문이 있었다. 남쪽은 영정문(永定門)ㆍ좌안문(左安門) 일명 강찰문(壃擦門)ㆍ우안문(右安門) 일명 초교문(草橋門) 동쪽은 광거문(廣渠門) 일명 사와문(沙窩門) ㆍ동편문(東便門), 서쪽은 광녕문(廣寧門) 일명 창의문(彰義門) ㆍ서편문(西便門)이라 하였다.

지금의  나라도 이곳에 도읍하였는데, 모두  나라의 옛것을 따랐

북부의 이필랄(伊畢喇) 소왕자(小王子) 서로 원수가 되어 여러차례 싸움을 벌였다는 내용 

·         국가달단(韃靼)

이듬해(1510)북부(北部) 역복랄(亦卜剌) [] 

 소왕자가 서로 원수가 되어 죽이려고 했다. 역복랄 서해(西海) [] 

로 도망가 숨었는데, 아이독시(阿爾禿廝) [] 

가 [역복랄연합하여 조서속번(洮西屬番)을 협박하고 여러 차례 침입하여 약탈하였다순무 장익(張翼)·총병 왕훈(王勛)이 제어할 수 없자 [적이점차 깊이 침입하여 변경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 [정덕] 8(1513) 여름에무리를 옹유(擁有)하여 [토내](討來川) [주둔하고] [] 

사신을 파견하여 장익의 처소에 이르러변경 지역에서 주둔하며 방목하면서 공물을 바치겠다고 청하였다. 장익이 금백(金帛)으로 회유하여 멀리 옮겨가도록 명하였으나, 역복랄은 마침내 서쪽으로 향해 오사장(烏斯藏) [] 

을 약탈하고 그곳을 점거하였다이로부터 () [] 

·() [] 

·송반(松潘) [] 

은 평안한 날이 없었다.

 

亦卜剌지금의 內蒙古自治區와 寧夏回族自治區 내의 河套平原에 거주하던 몽골족의 우두머리로亦不剌·亦孛來·倚巴·尾白兒·伊巴哩라고도 한다이것은 이슬람의 Ibrahim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16세기 초에 河套 지역으로 가서 거주하였고加思蘭과 亦思馬因이 잇달아서 피살되자 太師를 칭하면서 應紹不部의 部主가 되어 몽골우익을 장악하면서 세력이 강성해졌다達延汗(Dayan khan)이 몽골을 통일하는 것을 반대하여, 1509년 達延汗이 파견한 사신을 살해하였다그 이듬해 達延汗의 공격을 받아서 靑海로 도주하였다이때 安定·阿端·曲先·罕東을 격파하고 藏族과 撒里畏兀兒 지역의 부족들을 장악하였다. 1533년 俺答汗의 공격을 받았다『明史』 卷330 「西域」2에서는 亦不剌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西海靑海湖의 옛 이름이다鮮水’ 혹은 ‘鮮海’라고도 불렸다티베트어로는 ‘錯溫波’蒙古語로는 ‘庫庫諾爾’라고 했는데 푸른색 湖水·海洋이라는 뜻이다靑海湖 일대는 일찍이 卑禾族의 牧地였기 때문에 ‘卑禾羌海’라고도 불린다漢代에는 ‘仙海’라고도 불리다가北魏 시기부터 ‘靑海’라고 불리기 시작했다청해호는 靑海省 동북부에 위치한 중국 최대의 내륙 호수이다.

『武宗實錄』 卷80, 正德 6 10월 癸巳條을 보면阿爾禿廝는 그 부족의 丞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武宗實錄』 卷99, 正德 8 5월 庚午條을 보면“虜酋亦蔔剌次於討來川遣使阿蔔都等至肅州 ……”라고 되어 있다여기서 ‘討來川’은 洮賚·陶賴 또는 俗稱 福祿河라고도 불리는 河川으로甘肅 酒泉縣 서남부의 祁連山에서 시작되어 淸水河에 모여 黑河에 합류하여 居延海로 흘러간다.

烏斯藏明代에는 티베트를 烏斯藏이라고 불렀다시대에 따라 吐蕃西蕃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티베트의 지리적 범주는 좁은 개념의 티베트와 넓은 개념의 티베트로 나눌 수 있는데좁은 범위의 티베트는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내의 티베트자치구혹은 西藏자치구를 말하는 것이고넓은 범위의 티베트는 티베트자치구 외에도 靑海省 전역사천과 운남성의 서쪽 지역지금은 인도에 포함된 라다크 지역 일대까지 포함하는 범위이다현재 14대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티베트의 자치 혹은 독립을 꾀하는 이들은 넓은 의미의 티베트 개념을 사용하고 있고吐藩 제국도 넓은 의미의 티베트 지역을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에 이 글에서 사용하는 티베트 개념 역시 넓은 의미의 티베트가 될 것이다티베트의 지리적 환경을 보자면주변과 완벽히 격절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일단 티베트 지역 자체가 기본적으로 3,000~4,000m의 고원지대이고 서쪽과 남쪽은 파미르 고원과 히말라야 산맥이 감싸 안으면서 인도 지역과의 교통을 차단하고 있고북쪽은 곤륜산맥 뿐 아니라 타클라마칸 사막과 천산산맥이 겹겹이 막아서서 초원지대와의 교통을 막고 있다그나마 외부와의 교통이 유리한 지역은 청해성 지역과 사천운남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이는 후에 吐藩 왕조의 발전방향이 청해사천운남 지역에 집중되면서 唐과 충돌하는 배경이 된다또한 이러한 티베트의 폐쇄적 지리는 티베트 인들이 중국인도몽골 초원 지대와는 별개의 문화권을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洮州를 일컫는다지금의 甘肅省 臨潭縣으로그 지형은 西高東低의 형세로 대부분 지역이 高山·구릉 지대에 속해있다고대에는 羌族의 거주 지역이었는데秦代에는 隴西郡 臨洮縣으로 편제되었고漢代에는 臨洮縣이라고 칭했다남북조 시대의 北周에서 처음으로 洮州를 설치하였다隋 開皇 11(591)에는 臨潭縣으로 하였고唐 天寶 元年(742)에는 다시 臨洮라고 칭하였다이후 唐末부터 北宋 시대까지 이 지역은 吐藩이 점령하였다元·明代에는 洮州라고 칭했으며洪武 12(1379)에 洮州衛軍民指揮使司를 두었다.

岷州를 일컫는다지금의 甘肅省 定西市 岷縣으로, 1913년 이전까지는 岷州라고 불렸다南宋 이후 岷州 지역에는 다수의 티베트인들이 거주하였고 元나라에서는 至元 8(1271)에 岷州를 脫思麻路에 귀속시켰는데明에서는 洪武 11(1378)에 岷州衛를 설치하여 陝西都指揮司의 통제를 받게 하였다.

松潘四川省 阿 藏族·羌族 自治州 東北部에 위치한다역사상 유명한 변경의 重鎭으로 ‘川西門戶’로 이름이 높았다때문에 漢·唐 이후로 모두 關을 설치하고重兵을 두었다唐 高祖 武德 원년(618) 松州를 설치했고明 洪武 12(1379)에 松州潘州 2衛를 두었다가곧 松潘衛로 변경하여 이때부터 ‘송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