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4. 00:45ㆍ대륙조선 일반
동광 제23호 > 正音以前의 조선글, 이 논문은 朝鮮文字의 역사적 고찰 제2편 本論의 시작이다
잡지명 | 동광 제23호 |
발행일 | 1931년 07월 05일 |
기사제목 | 正音以前의 조선글, 이 논문은 朝鮮文字의 역사적 고찰 제2편 本論의 시작이다 |
필자 | 金允經 |
기사형태 | 논설 |
正音以前의 조선글, 이 논문은 朝鮮文字의 역사적 고찰 제2편 本論의 시작이다
金允經
1. 傳하지 못한 文字
1. 三皇內文. 몇몇 考證學者의 말이라고 權悳奎氏는 支那 古代의 太昊伏羲氏가 처음으로 만들엇다는 八卦라는 것도 朝鮮文字와 淵源이 深密하다고 하엿으나(註5) 이것은 너무 막연하니 그만 두더라도 拘朴子에 『黃帝東到靑丘, 過風山, 見紫府先生, 受三皇內文... 』(註6)이라 한 三皇內文은 朝鮮古代의 문자 잇음을 증거하는 것이외다. 그러타 하면 權悳奎氏와(註5) 崔鉉培氏도(註7) 이른 바와 같이 黃帝때 사람 蒼頡이 새발의 자욱(鳥跡)을 보고 짓기 시작하엿다는 한자도 三皇內文과 무슨 脉絡이 잇다고 추측됩니다.
2. 神誌秘詞文. 文獻備考의 藝文考의 書名에 『神誌秘詞』가 보이고 또 大東韻玉에 『神誌, 檀君時人, 自號仙人』이라 하엿으며 또 『書雲觀秘記, 有九變震檀之圖, 朝鮮卽震檀』이라 하엿는데 龍飛御天歌註에는 『九變圖局, 檀君時人神誌所撰圖讖之名, 言東國歷代定都凡九變其局, 並言本朝鮮受命建都之事』라 하엿고, 三國遺事 卷3의 寶藏奉老普德移庵條에는 『時武陽王聞其賢(割註略) 徵入爲臣, 自稱姓蓋名金, 位至蘇文, 乃侍中職也』의 割註에는 『唐書云, 蓋蘇文自謂莫離支, 猶中書令, 又按神誌秘詞序云, 蘇文大英弘序並註, 則蘇文乃職名有文證, 而傳云, 文人蘇英弘序, 未詳熟是』라고 하엿으며, 또 世祖實錄에 『世祖3년 丁丑 5월, 諭8道 관찰사 曰, 古朝鮮秘詞, 大辯說, 朝代記, 誌公記, 表訓天詞, 三聖密記, 安含老元董仲三聖記, 道證記, 動天錄, 地華錄等 文書, 不宜藏於私處, 如有藏者, 許令進上, 其廣諭公私及寺社』라 함이 잇고 또 睿宗實錄 己丑 9월 條와 成宗實錄 己丑12월 條에도 같은 勅命을 나리어 그러한 古書를 찾아 들이게 한 일이 잇엇는데 이 여러 문헌에 의하여 壇朝의 神誌秘詞가 최근 李朝때까지 전하던 것임을 밝히 알겟습니다. 그러하면 그 神誌秘詞는 곳 檀君時代에 문자가 잇엇던 것을 증명하는 것이외다. 그러하나 이제 그때의 글이 전하지 아니하니 그 문자는 어떠한 文字 엿던가를 살필 길이 없음이 유감이외다. 權悳奎氏는 『句麗의 大英弘은 神誌秘詞를 한문으로 번역하고 또 序와 註를 더하엿다』(註8)고 하엿는데 이는 아마 전에 인용한 三國遺事의 기사에 근거한 말인 듯 합니다. 만일 그러타 하면 그 기사만으로는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또 龍飛御天歌 註에 들어난 祊�誌의 九變圖局이란 것의 내용을 말한 것을 보면 극히 後代人의 손으로 된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점도 없지 아니합니다. 또 平壤誌에 『平壤法首橋有古碑, 非諺, 非梵, 非篆, 人莫能曉』라고, 또 『癸未(이는 宣祖16년)2월, 掘覺右碑之埋于法首橋者, 出而視之, 則折爲三段, 碑文非隷字, 如楚書樣, 或謂此是檀君時神誌所書云, <32> 歲久遺失』이라 함을 보면 전에 神誌秘詞 云云의 기사와 아울러서 檀君時代에 문자가 잇엇다는 것을 시인하게 합니다.
3. 王文文. 柳文化譜에 『王文 書文字, 而如篆, 文卽受競之父』라 하엿습니다. 이 王文이라는 사람은 西曆 기원전 12세기경의 扶餘 사람이엇섯은 즉 그 문자는 扶餘文字엿던 것이 틀림 없읍니다. 이에 대하여 權悳奎氏는 神誌의 쓴 것이라는 平壤法首橋를 碑文이라던가 또는 徐市의 題名이라고 전하여 오는 南海島에 잇는 岩石刻文(註9)이 王文 文字와 같은 것이 아닌가 추측하엿으며 또 日本 蝦夷땅의 手宮 文字란 것도 아마 북부 大陸朝鮮에 행하던 고대문자라고 推斷하엿읍니다. (註 10, 註 8, 註 5)
獨墺關稅同盟이 생기는 것을 보고 佛英伊捷의 各國은 一■를 喫하엿다. 『너이들은 서로 사랑해야한다 그러나 戀愛를 해서는 못써』 이러케 博愛의 使徒 브리안君이 說敎를 한다. (戀愛하는 男子는 獨乙 女子는 墺 外誌에서)
4. 刻木文. 梁書에 新羅를 가르치어서 『與高麗相類, 無文字, 刻木爲信, 言語待百濟而後通焉』이라 하엿는데 그 『無文字』라 함은 자만한 支那 사람의 입버릇으로서 자기들 밖에는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아니하며(南蠻, 北狄, 西羌, 東夷라 함은 그 一例) 또 따라서 자기네 밖의 민족의 문화는 문화라고 인정하지 아니하는 터라 자기네의 한문 이외의 문자야 그것이 아무리 훌륭하다 할찌라도 그들의 눈에 문자로 보일 리 萬無한 일이외다. 그리하여 한문과 다른 新羅의 문자를 볼 때에 곳 『無文字』라 하고 다만 『刻木爲信』이라 한 것입니다. 그러하면 그 『刻木爲信』이라 이른바 의사발표의 符號는 곳 新羅 고유의 또는 壇朝와 扶餘朝 以來의 문자를 가르치어 이름이 분명하야 보입니다. 三國史記 新羅 智證麻立干條에 『4년 冬10月, ,群臣上言, 始祖創業以來, 國名 未定, 或稱 斯羅, 或稱 斯盧, 或言 新羅, 臣等以爲新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則, 其爲國號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至今22世, 但稱方言未有尊號, 今群臣一意謹上尊號, 新羅國王, 王從之』라 함을 보면 建國以來 智證 麻立干 때까지 22代, 560년간은 방언 혹은 大師均如傳의 이른바 鄕札을 쓰어 오던 것이 명백합니다. 그러하나 한문이 수입되므로부터 어느 때부턴가 한자의 音 혹은 뜻을 빌어서 吏讀이라는 문자를 만들어 그것에 대신하여 쓰게 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하나 우에 인용함과 같이 智證麻立干 때에 이르어서는 한문의 세력이 매우 세게되어 이미 그것에 중독이 되엇다고 보이는 것은 居西干, 次次雄, 尼師今, 麻立干 들으로 부르던 統治者의 尊號도 버리고 『王』이라 하며, 또 國號도 방언의 音대신으로 한문의 문자적 핊�석의 뜻을 붙이어 『德業日新, 綱羅四方之義』로 『新羅』라 한다고 하엿습니다. 또 眞興王때에 이르어서는 『伊飡異斯夫奏曰, 國史者, 記君臣之善惡,<33> 示褒貶於萬代, 不有修撰, 後代何觀, 王深然之, 命大阿飡居柒夫等, 廣集文士, 俾之修撰』(註11)이라 한 대로 國史의 編簒 或은 일반 공용 문서에까지 鄕札 대신으로 한문을 쓰게된 것 같읍니다. 그 뒤로 역대의 爲政家는 점점 한문을 숭상하고 國文을 賤視하며 景德王 때에는 전국의 지명까지 다 한문으로 바꾸어서 (註12) 마침내 支那人으로 하여금 『新羅文字同於中國』 (註13) 이라고 말하게 함에 이른 것이외다.
5. 高句麗文字. 三國史記 新羅 憲康王條에 『12年 春, 北鎭奏, 狄國人 入鎭, 以片木掛樹而歸, 遂取以獻, 其木書15字云寶露國與黑水國人, 共向新羅國和通』이라 하엿고, 또 同書 高句麗 嬰陽王 11年 條에는 『詔大學 博士 李文眞, 約古史爲新集5卷, 國初始用文字, 時有人記事100卷, 名日留記, 至是刪修』라 하엿습니다. 이것은 北方 高句麗의 문자 잇엇음을 증명하는 문헌이외다. 만일 扶餘에 문자 잇엇다 함과 이 말을 연락하여 생각하면 더욱 명백하다 하겟습니다. 만일 扶餘에 문자 잇엇다하면 그 直系인 高句麗에도 文字 잇을 것이 분명한데 『國初始用文字』라 하엿으니 더욱 그것을 確證하게 되는 것이외다. 또 그 片木書 문자도 高句麗文字 엿으리라고 생각되는 것은 그 寶露, 黑水의 地方이 다 일쯕이 高句麗의 節制를 받고, 또 그 문화에 沐浴하게된 까닭이외다. 이같이 그 片木書 文字가 高句麗文이라하면 그것을 알게 되는 나라, 즉 新羅도 高句麗와 같은 文字를 쓴 것이 인정되는 것이외다.
6. 百濟文. 三國史記 百濟 近肖古王 30年 條에 『古記云, 百濟開國以來, 未有文字記事, 至是得博士高興, 始有書記, 然高興未嘗顯於他書, 不知其何許人也』라 하엿는데 新唐書에는 『百濟有文字籍記』 라고 보입니다. 이 둘은 서로 모순됨 같이 보이나 『未有文字記事』의 뜻은 문자가 없다는 것이 아니요 문자의 기록이 이때까지 없엇다는 것이외다. 細井肇氏가 『생각하건대 高句麗가 그 建國 때부터 문자를 가짐이 사실이라 하면 麗濟兩國의 지리적 관계로 보던지 또 그 혈통적 관계로 보던지 百濟도 예ㅅ적부터 문자를 가지고 日用 凡百을 적는대 쓰엇으리라고 살피어 집니다. 그러하나 한 國家로서의 기록은 즉 博士 高興을 얻은 뒤부터 百濟書紀가 비롯오 구비되게 된 것이라고 봄이 타당할 것입니다』 (註14)한 것은 온당한 견해라고 생각됩니다. 高句麗의 『國初始用文字』와 百濟의 『臣與高句麗源出扶餘, 先世之時, 篤崇舊疑』(註15)을 합하여 보면 더욱 분명히 그러하다고 믿게 되는 것이외다.
7. 鄕札. 新羅 神德王 때의 사람 大師均如의 傳에 『我邦之才子名公, 解吟唐什, 彼土之鴻儒碩德, 莫解鄕謠, 矧復唐文, 如帝綱交羅, 我邦易讀, 鄕札似梵書連布, 彼土難暗』 (註16) 이라한 것은 新羅의 고유문자 잇음을 무엇보다도 힘잇게 증거 세우는 말이외다. 이 鄕札의 형상이 『似梵書連布』라 한 것은 梵書와는 같은 글이 아님을 反証하는 것이며 또 동시에 漢字도 아님을 증거세우는 말이외다. 이 같은 新羅 固有의 文字鄕札을 보고서 『無文字 刻木爲信』이라 한 것도 자기네 외에는 서람을 사람으로 보지 아니하는 자만한 支那人으로서는 당연한 筆法이라 할만한 것이외다. 이 『鄕札 似梵書連布』라 한 均如傳의 기사와 『平壤法首橋有古碑, 非諺, 非梵, 非篆, 人莫能曉』와 『碑文非隷子, 如梵書樣, 或謂此是檀君時神誌所書云』이라한 平壤誌記事와 『王文書文字, 而如篆如符』라 한 柳文化譜외 기사와 徐示의 題名이라고 전하는 南海島의 岩面刻字(縱 1尺 5寸, 橫 3尺 2寸)(註9)가 秦의 篆書와 판이한 일들은 합하여 확실히 朝鮮 古代의 고유 문자가 잇엇다는 일과 그 古代文字는 동일한 한가지 엿섯다는 일을 단언하게 하는 것이외다. 또 日本北海道 小樽手宮의 洞穴(墓穴이라고 판명 됨)에 잇는 이상한 조각의 문자에 대하여 中目覺博士는 그것이 古代 土耳其의 문자를 縱으로 새긴 것이라 하고 또 그 문자로 표현된 말은 烏蘇里江 地方에 살던 肅愼族의 말이며 그 뜻은 <34> 『나는 부하를 데리고 大海를 건느어서... 싸우어...이 洞穴에 들엇다... 』함이라 하고, 또 박사는 그 이유에 대하여 西曆紀元 제7세기초에 中央亞細亞의 기후의 변동으로 인하여 突厥族의 東西 이동이 일어남을 말하고, 肅愼이 그 문자를 변하여 씀을 말하고, 다슋� 北海道가 肅愼의 식민지엿음을 말하여서 手宮洞穴의 문자는 그 곳이 肅愼 移民의 추장의 墓 됨을 보인 것이라 하엿습니다. (註17) 이에 대하여 崔鉉培氏는 『만일 이 考証과 독파를 정확하다 하면 距今 1270년 전경에 北部朝鮮(朝鮮과 肅愼과는 동일 명칭)에서 土耳文字를 다소 변형하여 자국어를 적음에 쓴 것이라 할 것이외다. 그러하다면 手宮文字는 결국 우리의 손으로 창작된 古代文字가 아니라고 못할 것이외다』(註7)하엿습니다. 그러하면 이것도 전의 결론을 더욱 확실하게 하는 것이라고 볼만한 것이외다. 여기에 한 말 더하여 두고 싶은 것은 鄕札과 吏讀을 혼동하여 동일시하는 오류에 대하여서외다. 申采浩氏는 『吏讀文은 후세에 胥吏들이 사용하엿기 때문에 이름인데 新羅에서는 鄕書라 이르고 百濟에서는 혹은 假名이라 한 듯하다』(註18)하엿고, 또 權悳奎氏도 『이 鄕札 卽 吏讀文은 한문의 全音 혹은 全義, 半音 혹은 半意를 취하여 만든 일종의 문자라』(註19)하엿으나, 필자는 그것이 온당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鄕書, 즉 鄕札은 梵書를 連布한 것 같이 된 문자요 한자를 빌어쓴 것이 아니지마는 吏讀는 한자를 빌어서 그 음 혹은 그 뜻으로 방언을 적게 된 것임으로 아주 딴 종류라고 생각합니다.
다넘어가는 피사塔과 같이 뭇솔리니의 政治는 기우러가면서 그래도 아직도 서잇다.(外誌에서)
8. 渤海文字. 渤海는 본디 高句麗의 1부족인 靺鞨에서 일어난 것임은 전에 이미 말하엿거니와 (緖論 中 渤海條 叅照)靺鞨이란 민적은 唐虞代에는 息愼, 殷國代에는 肅愼 또는 稷愼, 漢代 以後에는挹婁, 南北朝(元魏)代에는 勿吉, 隋唐代에는 靺鞨이라는 이름으로 支那史에 전하는 것이외다. 後漢書(권 115)의 『挹婁古肅愼之地』와 魏書(권 100)의 『勿吉國古肅愼國也』와 隋書(권 81)의 『靺鞨卽古肅愼氏也』들을 보아 명백합니다. 그리하여 이 靺鞨은 나종의 女眞, 滿洲族과도 동일 계통에 속하는 것이외다. 이른바 通古斯族이 이것입니다. 문자에 관한 문헌으로서는 舊唐書에 『風俗與高麗及契丹同, 頗有文字及書紀』라 함이 잇고, 또 高麗史에 『唐武后時, 高句麗人大祚榮走保遼東, 睿宗封爲渤海郡王, 因自號渤海國, 幷有扶餘肅愼等 10餘國, 有文字禮樂』이라 하엿습니다. 王塵叢談과 古今奇觀에는 동일 기사가 잇어서 그 의미는 대략 『唐의 天寶年間에 渤海의 國書가 唐에 왓다. 그러나 唐朝에서는 그 문자를 해득할 사람이 없엇다. 唐의 玄宗은 비상히 염려하고 잇엇는데 秘書監 賀知章이 李太白을 薦하여 金巒殿에 들어 이 글을 풀어 읽고 그 答書를 草할제 高力士가 신을 벗고 楊貴妃가 먹을 갈앗다』함이외다. 또 李太白 全集에 의하면 樂史의 李翰林別集序에 이르기를 『唐玄宗이 李太白을 부르어 和蕃書를 草하는데 생각이 懸河와 같앗다』하엿고 築建의 李君碣記에는 『玄宗이 李白을 翰林待詔로 부르어 和蕃書를 草하엿다』<35> 하엿고, 范仲正의 序文에도 「李太白이 答蕃書를 草할 쌔 辯이 懸河와 같앗다』하엿습니다. 이 『和蕃書』, 『答蕃書』는 다 前記 渤海 國書에 대한 答書를 이름이외다. 그러하나 新舊唐書에는 李太白읊� 부르어 楊貴妃를 기리는 淸平詞를 쓴 사실까지 기재하면서도 이 渤海國書 事件은 전연 기재하지 아니하엿고 또 李太白 全集에도 答書의 사건만은 기입하면서 그 答書文은 기입하지 아니하엿습니다. 前記의 『頗有文字 及 書記』와 이 蕃書를 李太白 외에는 아무도 모른 사실과 그 答書文이 기재되지 아니한 사실들은 그 渤海에서 온 國書文字가 한문과 다른 문자 즉 渤海 고유의 문자 엿던 것을 증명하는 것이외다. 또 高句麗의 후계자 되는 민족이라는 점만으로도 문자가 잇을 만한 일은 의심없읍니다. 다만 의문으로 남는 것은 渤海의 문자가 鄕札이엇던가 혹은 그 밖의 어떠한 문자엿던가 함이외다. 이에 대하여 權悳奎氏는 『渤海는 高句麗의 繼體로 句麗의 쓰던 吏讀文을 썻을 것은 의례인데 어떤 이는 이를 좀 설명적으로 말하여 契丹이 渤海를 滅하고 그 官制를 본받아 五京官制를 세웟은 즉 隷書字의 半片을 떼어 만든 契丹字가 渤海의 口訣을 본받음이 의심 없고 女眞이 契丹을 滅하고 契丹字를 본떠 女眞字를 만들엇다는 것도 반듯이 渤海 口訣의 유전일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러케 三國이나 渤海가 口訣을 쓴 것은 사실이다. 그러타고 口訣이나 吏讀文을 쓴 대에 그치고 그 밖의 다른 무슨 글이 없엇으리라 속단하는 것은 매우 경솔한 일이라 한다. ...아무러턴지 나는 壇朝로부터 高麗朝가지 따로 글이 잇엇다는 것을 말하고저 한다』(註 19)(註 10)(註5)하엿습니다. 그러하나 古代文字가 잇어서 後代까지 전하엿다는 것은 명백하나 渤海의 문자가 吏讀文이엇는지 口訣文이엇는지, 이제 전하지 못한 古代文字엿는지 이를 단언하기는 주저되는 바외다. 또 權氏는 蕃書의 기사에 대하여 『이것이 果爲 소설적 허구의 문자ㄹ까. 아닊�라, 渤海는 句麗의 舊疆을 復하고 山東半島를 정복하고 句麗의 恥辱을 雪하던 大朝라 문자 없을 리 的無하며 더욱 그 文意의 然함을 보아 漢族의 自家蔽久으로 허구인 듯이 전한 문자로되 실재로 아니볼 수 없는데 근년에 咸關以北에서 渤海字(或 女眞字)碑가 往往히 발견되매 다시 渤海文의 유무를 의논할 까닭이 없다』(註5)하엿습니다. 또 申釆浩氏는 『이미 아마 渤海의 國書가 吏讀 혹은 口訣의 渤海字로 되엇음으로 唐人이 이를 해독하지 못함이요 李太白의 答書도 渤海字로 한 것인 고로 그 글월이 李太白集에 게재되지 못함이라. 或曰 右의 사실이 新舊兩唐書에 보이지 않고 오직 소설 중에 보일 뿐이니 어찌 遵信하리오 하나 어느 때는 소설이 혹 史冊보다 遵信할 가치가 잇는 것이라』(註 18)하고 또 『和蕃書와 答蕃書는 다 渤海에 답한 國書를 가르침이라. 무릇 李太白 평생의 득의가 이 國書 答章의 件이어늘 어찌하여 新舊 兩唐書에는 李太白을 부르어 楊貴妃를 讚한 淸平詞를 지엇다 할 뿐이요 渤海에 答한 國書의 一件에는 말도 없으며 李太白 全集에는 그 答書한 사실만 적고 또한 그 答書는 적지 않앗으며 唐文苑英華나 全唐文抄 等 名書에는 李太白의 尋常한 詩와 文까지 수록하면서 돌이어 그 득의의 作인 渤海에 답한 글을 빼엇느냐. 唐 玄宗의 天寶年間은 渤海 武帝의 後요 文宗의 初라. 武帝의 때에 海軍大將 張文休를 보내어 山東省에 들어가 唐의 登州判史 韋俊을 죽이고 遼東 等地에서 唐將 高侃等의 大兵을 함락하여 渤海의 국위가 唐을 壓한 고로 渤海가 드디어 전례를 <36> 破하고 渤海字로 쓴 國書를 唐에 보내매 唐 玄宗의 君臣이 卒然히 그 글을 해독할 이가 없어서 걱정하다가 마침 渤海字의 학자 李太白을 얻어 이를 草答하여 당시의 외교의 難題를 해결하게 되엇으나 그러하나 支那 古代의 남의 글로 국제에 왕래한 일이 없다가 이제 渤海에 대하여 新例를 열은 것이 무한의 수치인 고로 唐書에는 그 사실을 빼엇으며 李太白 全集에는 그 사실은 모호하게 썻으나 그 문자는 게재하지 아니함인가 하노라』(註18)하엿습니다. 이상 權, 申 兩氏이 견해는 적절하다고 共鳴하는 바라 다시 蛇足을 더할 필요는 없으나 新舊唐書에 빼어버린 이유는 외국문자의 새 예를 끼침을 부끄럽게 생각함보다도 늘 무시하여 오던 외적에게 모욕을 당함을 부끄럽게 앎으로 그리하엿으리라고 생각합니라.
9. 高麗文字. 高麗時代에 한자 이외에 이제까지 전하는 吏讀와 口訣이 잇음은 다 알고 잇는 일임으로 이제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으나 이제 전하지 아니한 古代文字도 사용하엿던 證迹을 찾아볼 수 잇습니다. 李德懋의 淸脾錄을 통하여 전하는 바를 보면 光宗때 사람 張儒(號는 晉山 나종 顯宗때 戶部尙書)가 나라의 사명을 띠고 支那의 江南(吳越錢氏時代)에 가 잇을 때에 일쯕 高麗에서 어느 好事者가 그때 樂府의 寒松亭曲을 瑟의 밑에 새기어 바다에 흘리어 보낸 것이 그 곳에 漂着하엿는데 江南의 사람들이 이것을 보아도 알아낼 수 없음으로 이것을 張儒에게 가지고 온 고로 張儒는 곳 이를 漢詩로 번역하여 『月白寒松夜, 波安鏡浦秋, 哀鳴來又去, 有信一沙鷗』라 하엿다 하는 바 (지금도 그 朝鮮말 시조가 전함) 寒松亭曲의 원문은 高麗固有의 문자로 적은 것이엇음을 살필 수 잇습니다. 또 高麗 鑄造의 元祐通寶의 昔面文字 『*』은 이제 쓰는 한글의 『오』와 같음을 보아도 高麗의 고유문자를 사용함이 잇음을 알겟읍니다. 또 申景濬은 『東方舊有俗用文字, 而其數不備, 其形無法, 不足形一方之言, 而備一方之用也』(註 20)라 함을 보면 그 『舊有俗用文字』라 함은 在來의 문자가 잇음을 밝히 증거하는 동시에 그것은 한자를 <37> 차용하는 吏讀도 아니요 口訣도 아닌 어떠한 문자가 잇음을 보이는 것이외다. 왜 그러한고 하면 만일 그것이 吏讀나 口訣을 가르침이라면 얼마던지 빌어 쓸 수 잇는 한자를 『其數不備』라 할 리 만무하고 또 『其形無法』이라 할 리도 만무한 것이외다. 그리고 申景濬은 英祖때의 사람인 고로 訓民正音이 제정 실행된 지 수백 년 뒤 됨에도 불구하고 그 때 까지도 舊文字가 전하엿던 것을 증 명하여 주는 것이외다. 英祖때까지 전하엿다 하면 高麗時代에 이미 그 문자가 잇엇을 것은 無疑한 일이외다. 이러케 고찰하여 오고 본 즉 이처럼 최근까지 오래 전하여 오던 그 문자가 웨 이제는 흔적도 똑똑히 남아 잇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일게 됩니다. 아무리 兵亂 火災가 많앗다 할찌라도 믿기 어렵습니다. 이에 대하여 權悳奎氏는 訓民正音의 前身이 즉 舊文字라 하엿습니다. (註 10及5) 그리고 世宗은 다만 舊文字를 연구하고 정리하고 또 국력으로 發布 실행시킨 것이라 보앗습니다.
(註 5) 權悳奎著 『朝鮮語文經緯』
(註 6) 洪葛著 『抱朴子』, 東方朔神異經, 韓致奫著 『海東繹史』卷1
(註 7) 崔鉉培著 『古代文學論』 (『現代評論』 제2권 제1호)
(註 8) 權悳奎著 『朝鮮留記上』63
(註 9) 朝鮮總督府編 『朝鮮金石總覽』
(註 10) 조선어 연구회 編 『한글』 제1호
(註 11) 『三國史記』 권4 眞興王 6年 條
(註 12) 同 右 권9 景德王 16년 條
(註 13) 『隨書』, 『海東繹史』
(註 14) 細井擊著 『朝鮮文化史論』
(註 15) 『三國史記』百濟盖鹵王 18년 條
(註 16) 高麗文宗詩人赫連挺著 『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均如大師는 新羅 神德王時人)
(註 17) 中目覺博士著 『小樽の古代文字』
第二十一世紀의 貴物은 무엇이냐. 卽 「아직도 失職하지않은 사람」 失業많은 世上을 諷刺한 것이다.(外誌에서)
(註 18) 申釆浩著 『朝鮮古來의 문자와 詩歌의 변천』(東亞日報 申子元朝號以下)
(註 19) 權悳奎著 『正音以前의 朝鮮 글』 (中外日報 丁卯10월 24일호)
(註 20) 申景濬著 『訓民正音圖解』序文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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