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변(北邊)에 빙산(氷山)이 입추가 지나야 그 얼음이 녹기 시작한다

2022. 9. 30. 14:28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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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7 기사(1629) 7 14(정유) 맑음

07-07-14[15] 자정전에 특진관 이서 등이 입시하여 나만갑의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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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午時) 상이 자정전(資政殿) 나아갔다. 특진관 이서(李曙), 지사 서성(), 참찬관 심액(), 시독관 이경증(李景曾), 검토관 최유해(崔有海), 가주서 기만헌(奇晩獻), 기사관 윤구(尹坵)ㆍ송국택(宋國澤) 등이 입시하였다. 상이 전에 배운 대목을 ()으로 읽었다. 이경증이도약수(導弱水)’에서흑수(黑水)’까지 대문(大文) 강하였다. 상이 새로 배운 대목을 각각 번씩 음으로 읽고 해석하였다. 이경증이 지의(旨義) 강론하기를,

() 위아래는 모두 산천의 형세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유독 장에서만 상세히 말하지 않은 것은, 대개 서북쪽에 치우친 지역이어서 본래 중국 땅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록 넓게 섭렵하기는 했어도 두루 알지는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이른바 약수(弱水) 흑수(黑水)라는 것은, 대저 천지 사이에 있는 사물의 물성(物性) 일정한 것도 있고 변하는 것도 있어 본디 수가 없으니, 모든 강물은 물체를 띄우기 마련인데 약수는 약해서 띄우지 못하고 모든 물은 맑은 법인데 흑수는 맑으니 어찌 - 원문 빠짐 -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물에 대한 설이 - 5, 6 원문 빠짐 -

또한 이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이서가 아뢰기를,

장연(長淵) 모래밭은 위에서 말을 달릴 수가 있습니다- 원문 빠짐 - 보니, 그 모래가 흘러 다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사(流沙)는 모래 먼지가 높이 날지 않던가?”

하니, 이서가 아뢰기를,

그랬습니다.”

하였다. 이경증이 아뢰기를,

“북변(北邊)에 빙산(氷山)이 있습니다. 신이 일찍이 4월에 보니 암석 사이에 그때까지도 얼음이 있었는데 입추가 지나야 그 얼음이 녹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곳의 수목은 다른 산과는 다르지 않던가?”

하니, 이경증이 아뢰기를,

초목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만, 보니까 산속에 풍혈(風穴) 많았는데 사람이 그곳에 다가가면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산이 높고 크던가?”

하니, 이경증이 아뢰기를,

그다지 높고 크지는 않았습니다.”

하였다. 이서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갑산(甲山)에 이르러 흐르는 냇물을 보았더니 물빛이 검은색이었습니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말하기를, ‘상수리나무의 잎이 물에 잠긴 채로 쌓여서 그렇다.’고 하였으니, 대개 잎이 썩어서 물이 검은색이 된 것입니다.

하자, 서성이 아뢰기를,

신이 함흥(咸興) 쪽에서 황토령(黃土嶺) 넘을 보니 10 사이에 나무가 하늘을 덮을 정도로 빽빽하였으나 그곳의 물이 때문에 검게 것을 보지 못하였는데 삼수(三水) 갑산(甲山) 이르러서는 물과 돌이 모두 검은색이었습니다. 신이 고서(古書) 두루 보지 못하여 일찍이 젊었을 때에 식견이 있는 사람에게 질의하여 드디어 하나를 완성하였는데 지금은 책을 잃어버렸습니다. 흑수는 견주(岍州)에서 발원(發源)하는데 견주는 운남(雲南) 땅으로 원(元)나라 때부터 이미 중국 영토가 되어 명(明)나라 이후부터는 그대로 호구를 조사하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장액(張掖)은 양주(涼州)에 가깝고 총령(叢嶺)이 그 동남쪽에 있습니다.”

하였다. 최유해가 아뢰기를,

전지() 바로 ()나라 무제(武帝) 곤명(昆明)에다 팠던 못입니다. 무제는 무력과 전쟁에 치중하여 오랑캐에 힘을 쏟은 임금이니, 본디 칭송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만, 일에 임해서는 모든 일을 착실히 하였기 때문에 능히 리의 영토를 개척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곤명의 연못에다 물고기를 길러 종묘(宗廟) 제향 내공(內供) 수용에 충당하고 이상 백성들한테 취하지 않았으니, 뜻은 매우 좋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설마 그랬겠는가. 무제는 극도로 사치를 부린 임금이다. 연못을 비록 크게 파긴 하였으나 어찌 다만 연못의 물고기를 쓰는 것으로만 그쳤겠는가.”

하자, 최유해가 아뢰기를,

말은 《서경잡기(西京雜記)》에 보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체로 민간에서 제수(祭需) 마련하고 어버이를 봉양하는 수단으로 물고기를 기르는 것만 것이 없다.”

하니, 최유해가 아뢰기를,

범려(范蠡) 재물을 늘린 것도 물고기를 기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이서가 아뢰기를,

백성의 가운데 농사보다 중요한 것이 없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관개(灌漑) 힘을 쏟으려고 하지 않고 한결같이 - 원문 빠짐 - 중원(中原) 사람들에게 훨씬 미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원 사람들은 - 5, 6 원문 빠짐 - 착실히 한다. 일찍이 듣건대- 5, 6 원문 빠짐 -

또한 반드시 원망을 사는 일이 있습니다. 대개 우리나라가 법을 세운 초기에는 - 원문 빠짐 - 지나치게 거두는 폐단이 없어 (), () 등의 물품을 모두 장인(匠人)에게 책임을 지우고 백성들한테서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인심이 불선하고 일이 옛날과 같지 않아서 공물(貢物) 문제가 당금의 거폐(巨弊) 되었습니다.”

하자, 이서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남포 현감(藍浦縣監) 제수된 적이 있었는데, 비록 고을에 흔한 것이 물고기였지만 공물의 값은 매우 비쌌습니다. 만약 물고기가 잡히는 때에 미리 잡아서 젓갈을 담가 봉진(封進)하게 한다면 백성들이 값도 들이지 않을 것인데, 때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백성들에게 거두기 때문에 값이 비쌉니다. 백성들이 때문에 원망하고 괴로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또한 제대로 수령을 얻지 못하여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