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28. 20:17ㆍ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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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명이 아뢰기를,
“북로의 흉년은 무신년(1728, 영조4)이 가장 심하였습니다. 그러나 회령(會寧), 무산(茂山), 종성(鍾城) 세 고을은 그 당시에도 초실(稍實)에 들었고, 작년과 금년은 남관의 약간 고을과 북관이 모두 풍년이 들어서, 남관으로 곡식을 옮기는 것 때문에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일이 자못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진정되었습니다. 또한 이 성(城)은 공역(工役)할 곳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회령의 민정(民丁)을 1차 사역한 뒤에 값을 주어 모군(募軍)하게 하였으니, 필시 백성에게 크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신은 형편(形便) 1통을 우러러 아룁니다.
영고탑(寧古塔)은 즉 저들이 의탁하는 곳인데 육진(六鎭)과 불과 5, 6백 리 떨어져 있습니다. 저들이 만약 와서 웅거한다면 어염(魚鹽)을 반드시 육진에서 마련할 것이므로 분명 분쟁 지역이 될 것입니다. 신은 항상 이 때문에 매우 염려하였습니다. 마침 영고탑의 지도를 얻어서 가지고 들어왔으나 보잘것없어서 감히 올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송진명이 승지에게 전하니, 승지가 내시에게 전하고, 내시가 책상 위에다 펼쳤다. 상이 손으로 직접 가리키며 보기를 그치지 않았다. 송진명이 또 운두산성도(雲頭山城圖)를 폈다. 상이 책상 아래에 펴도록 명하고서 굽어보았다. 송진명이 아뢰기를,
“이는 오국성(五國城)의 옛터입니다. 송나라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이곳에 갇혀 지냈고, 고령진(高嶺鎭) 5리쯤에 또 두 황제의 능이 있다는 말이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국성은 과연 우리나라의 지방인가?”
하자, 김재로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그 당시에도 조선에 길을 빌린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송진명이 아뢰기를,
“김종서(金宗瑞)가 북병사(北兵使)로 있을 때 육진을 개척하였는데 그전에는 오랑캐 땅이었습니다. 신이 북도를 순행할 때에 무산에서 회령을 향해 가던 중 길가에 불쑥 솟아오른 암벽을 갑자기 보았는데, 삼면이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그 위에 들이 펼쳐져 있어 완연히 산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회령에 이르러 고을 사람에게 물어보니, 오국성의 옛터인데 아직까지 옛 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미 역참을 지났으므로 데리고 간 군관에게 가서 형편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극구 칭찬하는 바람에 마침내 이곳에 성을 쌓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상소를 올리기로 마음을 먹고 경성(鏡城)으로 돌아와서 병사 정수송(鄭壽松)에게 말하니, 정수송이 ‘일찍이 연신(筵臣) 조진희(趙鎭禧)가 아뢴 바로 인하여 비국에서 병영에 물어보았기 때문에 이미 이치를 따져 치계(馳啓)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 사람과 견해가 서로 같은 것을 기뻐하여 마침내 상소를 올려 성을 쌓기를 청하였습니다. 인하여 당시 회령 부사 한범석(韓範錫)으로 하여금 다시 상세히 살펴서 논하여 보고하도록 하니, 한범석이 일일이 몸소 살피고서 이처럼 지형을 그려서 보냈습니다. 천연의 요새와 지형적 이점이 거의 나라를 통틀어 제일이고, 한 면의 성을 쌓을 수 있는 곳이 그다지 넓지 않아서 필시 물력을 크게 허비하지 않을 것이며, 금성탕지(金城湯池)의 견고함을 이룰 수 있으니 결코 쓸모없이 버릴 땅이 아닙니다. 신이 돌아올 때에 1000섬의 곡식을 구해 주고 양식으로 삼아 성 쌓는 것을 시작하도록 하였습니다.
“북병사 이행검(李行儉)의 장계도 이와 같았습니다. 대개 육진은 평야에 위치하고 있어서 믿을 만한 성이 하나도 없습니다. 변경 일대의 진보(鎭堡) 등은 군기(軍器)와 양향(糧餉)이 넉넉하지 않은 곳이 없으나, 성지(城池)는 번호(藩胡)가 살 때 일시적으로 몸을 숨기던 곳에 불과할 뿐입니다. 외적을 방어함에 있어서는 결코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필경에는 도적에게 곡식을 실어 내주는 일이 반드시 닥칠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에 성을 수축하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조정에서 매번 마천령(磨天嶺)을 관방(關防)으로 삼았기 때문에 영외(嶺外) 10여 고을과 수십 진보의 백성들은 항상 자기들을 헌신짝 버리듯이 한다는 원망을 갖고 있으니 또한 모두 도적으로 변할 염려가 있습니다. 근래에 온 집안이 남쪽으로 옮겨 오는 자가 매우 많은데, 이 성을 수축하는 것은 실로 인심을 굳게 결속시키는 중요한 방도가 됩니다. 그리고 양향을 이곳에 축적하고 군기도 여기에 보관해 두면서 두만강 일대의 자녀와 재물들을 거두어들인다면, 만백성에게 의탁하는 곳이 생길 뿐만 아니라, 어찌 성을 수비하는 계책에 보탬이 없겠습니까. 차유령(車踰嶺)과 무산령(茂山嶺)이 솥의 발처럼 우뚝 솟아 있고 봉수의 연기가 서로 응하며 소식을 통할 수 있으니, 북적(北賊)이 반드시 이곳을 버리고 곧장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서로 대항하면 비록 7, 8일을 지체하더라도 내지(內地)에서 변란에 대응하는 방도가 어찌 넓고 넓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성터를 그린 도형(圖形)을 보니 그 좋은 것을 알겠다. 여러 신하의 뜻은 어떠한가?”
하자, 김동필이 아뢰기를,
“육진은 성을 지킬 곳이 없는데, 이곳은 이처럼 천연의 요새이니 신이 지방에 있을 때에도 성을 쌓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고, 김재로가 아뢰기를,
“신은 함흥(咸興) 이북은 일찍이 가 본 적이 없어서 형편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송진명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 도형을 보니, 육진의 백성은 달리 지킬 수 있는 성보(城堡)가 없어서 모두 이곳에 성을 쌓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허락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송인명이 아뢰기를,
“당초 육진을 개척할 때에는 백성을 모집하여 들어와 살게 하였고, 혹은 다른 도의 죄인을 옮겨 와 채웠기 때문에 민심이 확고하지 못하였습니다. 근래에는 문교(文敎)가 점점 펴지고 인재 또한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단지 마천령으로 방수(防守)를 삼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저들이 만약 영고탑에 온다면 우리들은 장차 저쪽 사람들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만약 이곳에 성을 쌓으면 인심이 확고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송진명이 아뢰기를,
“북변(北邊)의 정사는 마땅히 인심을 수습하는 것을 제일 급한 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은 순행하다가 당도한 때에 매양 부로(父老)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게 되면 효유하기를 ‘백성이 된 자는 속미(粟米)와 마사(麻絲)를 내어 윗사람을 섬기는데, 너희들은 1년 내내 편안히 앉아 있으면서 한 자의 포(布)나 한 말의 곡식도 바치지 않는다. 조정에서는 수천 리를 멀다고 여기지 않고 삼남(三南)에서 바친 목면(木棉), 목화(木花), 지의(紙衣) 등속을 옮겨 와서 해마다 사급(賜給)하였다. 너희들은 마땅히 감격하여 은혜를 갚아야 하고, 왕화(王化)가 멀리 떨어져 있다 하여 스스로 막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성지(城池)가 편리한지의 여부는 묻지 않고, 다만 이때 성을 쌓는 것이 어떠한지를 물었을 뿐이다. 수령 중에 일을 맡을 자는 진실로 백성들로 하여금 즐겁게 나아가게 하면 되고, 억지로 역사(役事)에 나아가게 하여 원망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을 신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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