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7. 20:45ㆍ대륙조선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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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24년 경신(1800) 5월 9일(경인)
24-05-09[02] 광주(廣州)의 유생(儒生) 이의가(李義可)가 헌릉(獻陵)의 수목을 함부로 베어 내지 못하게 금하고 보호하는 일로 상소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또 광주 유수(廣州留守)는 의견을 갖추어 장계로 보고하며, 사관(史官)을 보내 국내(局內)를 자세히 살펴보고 서계(書啓)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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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소의 대략에,
“근년 이래 기상이 순조로워서 풍년이 들었지만 인심이 어긋나는 것은 나날이 달라지고 다달이 달라져서 풍년이 들면 더욱 교만해지고 흉년이 들면 또한 원망하므로, 상제께서 혹 풍년을 내려 성명(聖明)을 돌보는 뜻을 보이다가도 번번이 다시 가뭄을 내려 완악한 풍속을 일깨우곤 합니다. 오직 오르내리는 우리 조종(祖宗)의 영령이 상제의 좌우에 계시면서 아래의 백성을 묵묵히 도우시어 해마다 이달에 날이 가물면 반드시 비를 내리니 예로부터 5월 10일에 내리는 비를 태종우(太宗雨)라고 하고 4일에 내리는 비를 효종우(孝宗雨)라고 불렀습니다. 금년의 가뭄은 근래에 드물게 심했는데 다행히도 며칠 전 1보지락 정도의 비가 내리자 모두가 하늘에 계신 효묘(孝廟)의 영령이 도우셨다고 하였습니다. 게다가 헌릉의 기신(忌辰)이 내일이니 머지않아 비가 올 것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만 또한 어찌 감히 미리 기필하겠습니까. 신은 헌릉이 있는 산 아래에서 나고 자라며 지난 일들을 두루 경험하였는데 대체로 근년에는 이날에도 비가 내린 적이 드물었습니다. 아, 우리 성조(聖祖)의 밝은 영령께서 어찌 혹시라도 이 백성을 돌보시는 마음을 풀어 놓으셨겠습니까. 다만 민심이 예전 같지 않아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위로 천심(天心)에 노여움이 쌓이고 실로 아래에서 백성들이 재이를 불러서 지극히 존귀하신 우리 전하를 그 중간에서 홀로 근심하시게 한 것이니 신은 실로 통탄스럽습니다.
신은 삼가 충성을 바치고 싶은 정성으로 감히 보잘것없는 충정을 아뢰고자 합니다. 아, 헌릉 일국(一局)은 예로부터 명산(名山) 복지(福地)라고 하였습니다. 왕성(王城)에서 이곳까지 3, 4십 리 사이에 나무들이 울창하게 서로 얽히고 아름다운 기운이 빽빽이 맺혀 있으니 동남쪽으로는 청계산(淸溪山)ㆍ광교산(光敎山)이 있고 서북쪽으로는 관악산(冠岳山)ㆍ모락산(慕洛山)이 있으며, 이 4대 명산의 기운을 성대하게 받아 엄숙히 대일통(大一統)의 체모를 이룬 곳이 바로 구룡산(九龍山)입니다. 구룡산에서 흘러온 지맥(地脈)이 모여서 대모산(大姆山)이 되었는데 하늘이 신비로운 이곳을 아껴 우리 성조의 궁검(弓劍)을 모실 땅으로 남겨 주셨습니다. 사방 40리의 능역(陵域)을 설치하고 수졸(守卒) 70명을 둔 것은 대개 수호하는 곳을 넓게 하고 금양(禁養)하는 절차를 중시하고자 해서였습니다. 아, 우리 태종대왕께서 성대한 덕과 높은 공으로 억만년을 이어 갈 기업(基業)을 여셨고 능침의 맑은 기운 속에 천백 대(代)의 상서(祥瑞)가 모였으니, 먼 선조를 추모하여 효도의 도리를 넓히고자 그 수호하는 법을 중시하여 처음부터 지금까지 매우 엄숙하고 정성스럽게 시행해 왔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수호하는 법도가 점차 해이해져서 침랑(寢郞)이란 자들은 슬렁슬렁 지내며 승진을 위한 사다리쯤으로 여기고, 능졸(陵卒)이란 자들은 한갓 드세고 사나운 버릇만 키우고 있습니다.
능침을 둘러싸고 있는 4개 면(面)의 백성들은 오로지 나무를 찍어 내는 것을 생활 방편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들은 능졸들과 함께 계방(契坊)을 만들어서 봄에 화소(火巢)를 만들 때가 되면 집집마다 떡과 술을 마련해 와서 능졸들에게 대접하고는 약속을 거듭 밝히는데 ‘계방에 소속된 백성에 대해서는 도끼를 빼앗을 수 없고 이름을 고해서는 안 된다.’라고 합니다. 이런 일이 해마다 반복되므로 모두가 정상적인 일로 여기고 백성들은 마치 무인지경에 들어간 듯 나무를 몰래 베어 가고 그것을 본 수졸은 짐짓 모르는 척합니다. 때로 능관(陵官)이 산을 순시하게 되어 나무를 몰래 찍어 내던 백성이 붙잡힐 것 같으면 순졸(巡卒)이 눈을 깜박이고 손을 저어서 달아나게 합니다. 이렇게 하는 자들이 어찌 계에 소속된 백성뿐이겠습니까마는 그들의 족속이 아니면 모두가 인척(姻戚)입니다. 어쩌다가 족속도 아니고 인척도 아니며 계방에 속하지도 않은 한두 빈호(貧戶)가 있으면 능졸이 그를 관에 고하고 공공연히 패자(牌子)를 내어 이름을 부르며 ‘수본(手本)에 들어 있다.’라고 하며 죄가 없는데도 그 집안사람을 연좌시켜서 억지로 낫과 도끼 등속을 바치게 하여 통과 비용을 물린 뒤에야 능졸에게 죄를 받지 않습니다. 게다가 강변에 사는 수천 호(戶)에게는 땔나무가 계수나무만큼 귀한데 능침의 나무가 아니면 마련할 방도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녀가 무리를 지어 날마다 산을 덮는데, 사람마다 동전 몇 닢씩을 갖고 가서 순졸에게 주니 순졸의 매일매일 소득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능관이 법을 어기는 일이 없다면 능졸이 어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능관은 본래 한미한 선비였다가 갑자기 많은 장작을 얻게 되었으므로 반드시 자기 집을 따뜻하게 할 생각을 하고 그러고도 부족하여 또 번번이 추위를 호소하는 빈한한 친구나 가난한 친족에게 나누어 주곤 합니다. 또 어쩌다가 법을 지키며 공무를 행하는 신하가 열에 한둘은 있지만 오랫동안 쌓여 온 폐단을 바로잡기는 역시 어렵습니다. 그러니 능졸이라는 자는 거리낄 것이 없어 감히 함부로 취하여 크게는 판재(板材), 그다음으로는 노〔船棹〕, 그 아래로는 기둥과 서까래 등속, 또 그보다 아래로는 취사용 나무들을 마소에 실어서 날이면 날마다 공공연히 시장에 내다 파느라 성문으로 뻔질나게 들어가고 아침저녁으로 구름같이 지고서 강촌에 가서 파는 것을 또 어찌 이루 다 헤아리겠습니까. 그 폐단이 이러한데도 감히 관에서 몰랐다고 하겠으며 또한 금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까마는 이는 그 형세가 본래 그러합니다. 어쩌다가 예조에서 예기치 못한 때에 적간(摘奸)할 염려가 있으면 근처의 민호(民戶)를 지휘하여 그때그때 나무뿌리를 묻어 두고 사이사이에 잡목이나 소나무를 심어 두니 그 계책이 참으로 졸렬합니다.
신은 능관을 특별히 신칙하여 스스로 법을 어기는 일이 전혀 없게 한 뒤에야 수졸을 문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수졸이 법을 어기는 일이 없으면 일반 백성이 또 어찌 감히 금법(禁法)을 어기겠습니까. 또한 무릇 금법을 시행하는 방도로는 반드시 상황에 따라 늦추고 조이는 술법이 중요합니다. 낙엽은 생나무에 비해 중요성이 현저히 다른 데다가 형세로 보아 일률적으로 엄하게 막기만은 어렵습니다. 찬바람이 불어 잎이 진 뒤 열흘 동안은 모두 땔나무를 해 가도록 허락하여 근처의 백성들에게 힘닿는 대로 낙엽을 긁어 가게 하고 열흘이 지난 뒤에는 날마다 정례적으로 능관이 직접 산을 순시하여 만약 능 근처에서 나무꾼 한 사람이라도 발각되면 잡는 족족 본부(本府)에 보고하고 유수가 조율(照律)하여 감단(勘斷)하게 하소서.
그리고 능졸 70호에 대해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묶어서 통 내에서 금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통수(統首)까지 아울러 법에 따라 원배(遠配)하고, 능 부근에 사는 백성들에 대해서는 10호마다 감고(監考)를 두어 금령을 어기는 자가 있는지를 살피게 하고, 담당 지역 내에서 금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또한 능군이 금법을 어길 경우 통수까지 다스리는 것과 같은 법으로 그 감고를 다스리고, 또 능 부근 강변의 이(里)에는 이마다 감고 몇 사람을 두어 생나무가 매매되는지를 살피게 하여 만약 금령을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파는 자와 사는 자를 잡는 즉시 능관에게 보고하게 하며, 감고가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이 염탐할 때에 발각된다면 역시 위에 말한 규례대로 엄히 조율하여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또 본부에서 별도로 진관(津官)을 신칙하여 생나무나 생장작이 진촌(津村)에서 유통될 경우에는 엄히 금단하고 본부에 낱낱이 보고하게 하며, 혹 살피지 못한 것이 염찰할 때 발각되면 진장(津將)을 엄히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생나무가 거래되는 길을 끊어 버리면 능침의 나무는 예전 상태를 회복할 수 있고 백성들의 습속은 징계될 것이며, 능관이 감히 전처럼 방심하지 못할 것은 저절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대모산은 본릉의 주산(主山)으로 예전부터 하늘을 찌를 듯한 큰 나무들이 내룡(來龍)을 보호하고 있었는데 근래 수십 년 사이에 민둥산이 되어 현재는 한 그루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이 말한, 민심이 옛날 같지 않아서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 일입니다.
산의 북쪽에 봉헌사(奉獻寺)가 있는데 두부를 만들어 사전(祀典)에 이바지하던 곳이었습니다. 삼가 세종조의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살펴보니 ‘불교가 거짓됨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능침을 모신 뒤에 골짜기가 텅 비어 쓸쓸할 것이니 이 점이 내가 차마 못 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는데, 뒤에 유정현(柳廷顯)이 아뢴 말로 인하여 절을 세우는 데 대한 논의가 마침내 취소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봉헌사를 언제 처음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근래에 시골 백성들이 감히 마음대로 헐어서 팔고 집 한 칸만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 작은 절을 중건(重建)하고 승려를 모집하여 그들에게 두부를 만들어 대제(大祭)에 이바지하게 하고, 대모산의 북쪽 구역은 승려들로 하여금 금양을 돕게 한다면 또한 사전을 중시하고 간교한 습속을 막는 하나의 장치가 될 것입니다.”
하여, 비답하기를,
“승선(承宣)이 잘 알았다고 말했다는 걸 들었다. 그것은 비록 너의 상소를 받지 않겠다는 말이지만 능침의 수목을 함부로 베어 내지 못하게 금하고 보호하는 막중한 사안에 관계된 일이라서 가져다 살펴보고 비답을 내린다.”
하였다. 이어 또 예조 당상을 소견하여 광주 유수를 엄히 신칙해서 각별히 닦아 밝힐 방도에 대해 특별히 정식(定式)을 정하게 하라고 하였다.
○ 예조 판서 이만수가 아뢰기를,
“방금 광주의 유학 이의가의 상소로 인하여 헌릉의 수목을 함부로 베어 내지 못하게 금하고 보호하는 일에 대해 해당 유생을 불러서 물어본 뒤 어전(御前)에 나와 상께 여쭈어 처리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교하신 대로 해당 유생에게 상세히 물어보고 또 그 상소를 가져다 살펴보았습니다.
능침의 수목은 일의 체모가 매우 막중합니다. 우리 성상의 지극한 효성으로 능침의 수목을 보호하고 심어 가꾸는 방도에 대해 일마다 각별히 정성을 쏟아 그동안 간곡하게 반복하여 당부하고 훈계하셨습니다. 하지만 능 근처에 사는 백성들이 능졸과 한통속이 되어 몰래 찍어 내는 폐단이 이처럼 심하여 유생이 상소하여 아뢰는 일이 생기기에 이르렀는데도 능관은 게으름을 피우며 단속하지 않고 광주부에서는 전혀 살펴 신칙하지 않고 있으니 일이 이보다 더 한심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대모산은 본릉 안의 주봉(主峯)으로 매우 소중한 곳인데 남아 있는 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고까지 하니 더더욱 매우 놀랍고 송구합니다. 각 능침에 봄가을로 나무를 심는 일에 대해 무오년(1798, 정조22)에 정식을 정한 이후로 단자(單子)를 작성하여 본조에 보고하게 하고 있습니다. 본릉의 경우 무오년 10월의 보고에서는 대모산 왼쪽 기슭의 나무가 성긴 곳에 회(檜)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했고, 기미년(1799) 3월의 보고에서는 주봉 동편의 뒤쪽 기슭에 상수리 400말을 뿌렸다고 했습니다. 이는 유생의 상소에서 말한 내용과는 크게 어긋나는데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본릉은 면적이 매우 넓으므로 과조(科條)를 엄하게 세워서 특별히 단속하지 않는다면 명을 내리더라도 세월이 갈수록 차츰 해이해져 필시 아무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능졸 가운데서 통수를 뽑아 세우고, 민호에 감고를 두고, 각 진장들이 조사해 살피고, 조포사(造泡寺)를 중건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다면 분명히 실효를 거두고 뒷날의 폐단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니, 광주부에 분부하여 그 내막을 자세히 조사하고 그렇게 조치하는 것이 편리할지를 상세히 살펴서 의견을 갖추고 하나로 결론을 내어 장계로 보고하게 하여, 보고를 받은 뒤에 본조에서 다시 상께 여쭈어 처리하고 절목을 작성해서 영구히 준수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전후의 능관들을 비록 모두 소급하여 감처(勘處)하기는 어렵지만 유생의 상소 내용대로 과연 대모산에 나무를 전혀 심지 않았다면 무오년(1798) 이후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능관은 엄히 감처하지 않을 수 없으니, 또한 광주부에서 그 문제도 자세히 조사하여 계본(啓本)으로 보고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그대로 따르고 전교하기를,
“입시(入侍)한 사관(史官)이 나아가 오늘 밤 향사(享祀)하는 의절(儀節)을 잘 살펴보고 그대로 머물러서 국내(局內)와 국외(局外)를 두루 살핀 다음 낱낱이 서계하게 하라.”
하였다.
[주-D001] 헌릉(獻陵) :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능이다.
[주-D002] 궁검(弓劍)을 모실 땅 :
왕의 능(陵)을 뜻하는 말로, 여기선 헌릉(獻陵)을 가리킨다. 옛날 황제(黃帝)가 형산(荊山) 아래에서 솥을 주조한 뒤 하늘에서 내려온 용을 타고 승천하였는데 함께 타지 못한 소신(小臣)들이 용의 수염을 잡고 있다가 용의 수염이 빠지는 바람에 모두 떨어졌고, 이때 황제의 활과 검도 함께 떨어졌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卷28 封禪書》
[주-D003] 땔나무가 계수나무만큼 귀한데 :
전국 시대 소진(蘇秦)이 “초나라의 곡식은 옥보다도 귀하고, 장작은 계수나무보다 비싸다.〔楚國之食貴于玉 薪貴于桂〕”라고 불평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戰國策 楚策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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