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만 수나라군 패전 과 5000리 조선 해안선

2022. 9. 18. 12:37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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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년 병인(1866) 9월 3일(기미) 맑음

 중국의 지형은 들이 넓고 산이 드물어 천연적인 험지가 매우 적은데 서양 오랑캐의 용병술은 평원이나 강해(江海)에서의 싸움에 강한 면모를 발휘하니 그들이 질주하는 기술을 멋대로 부린 것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와 달라 삼면이 높은 산맥으로 첩첩이 싸여 있고 산골짜기는 밭을 일구기에 적당하니, 실로 보루를 높이 쌓고 벽을 깊숙이 쌓고자 한다면 정경(井陘)과 같은 험준함이 없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 저들이 비록 엿보아 넘어 들어오고자 한다 해도 또한 그때마다 사로잡히게 될 것이니, 어찌 감히 수족을 놀릴 수 있겠습니까. 만들기만 잘하면 그 강함이 약해지기 쉽고 지키기만 잘하면 그 험준함이 견고해 질 수 있으니, 병갑(兵甲)이나 기계(器械)의 예리함은 이에 상관없는 것입니다.
수 양제(隋煬帝)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융졸(戎卒)이 200만 명에 정기(旌旗)가 900여 리에 이어졌으니 그 용맹한 장수와 굳센 병사들이 어찌 서양 오랑캐보다 열 배 정도가 될 뿐이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오히려 살수(薩水)에서 패하고 신성(新城)에서 퇴각하여, 요하(遼河)에 이르러 헤아려 보니 돌아온 자가 2700명뿐이었고 군량과 기계가 다 없어진 상태였습니다. 이 어찌 한 모퉁이 편사(偏師)의 강함이 이루어 낸 것일 뿐이겠습니까. 실로 고지에 올라 험준한 형세를 의지하지 않고 서로 대륙의 평야 지대에서 겨루었다면 그 성패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 태종이 천하를 석권하여 사해에 위세를 떨쳤는데도 황제가 직접 정벌에 나서게 되었을 때 뭇 신하들이 모두 고려는 산을 따라 성(城)을 만들어 끝내 함락시키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태종이 듣지 않고 이내 기병과 보병 10만 명에 전함(戰艦) 500척을 내어 동래주(東萊州)에서 배를 타고 평양까지 왔는데, 끝내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던 안시성(安市城)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성 아래에서 군대를 정돈하고서 성주(城主)에게 비단 100필을 하사하여 그 견고한 수비를 기렸습니다. 애석하게도 구사(舊史)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여 성주의 성명이 전해지지 않았는데, 성을 빙 둘러싸고 견고히 지켰던 의리는 이미 천하에 다 알려진 바입니다.
그 후 원주(原州)에서 거란(契丹)을 막아내고, 귀주(龜州)와 자주(慈州)에서 몽고(蒙古)에 저항했던 것도 모두 이로 인하여 승리를 얻은 것이었습니다. 이에 거란에서 원정을 나서려 할 때 그 신하가 간하기를 ‘고려는 산성(山城)을 중심으로 지키고 있어 대군이 가서 정벌한다 해도 공을 세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돌아오지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였는데, 거란이 이 말을 들었다면 반드시 스스로 형세를 살펴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니 어찌 갑자기 험준한 곳에 깊이 들어와 우리로 하여금 수고로이 방어하게까지 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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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승리로는 행주(幸州)에서의 쾌전이 가장 큰 것이었는데, 산기슭이 암석으로 덮여 있어 시석(矢石)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적이 와서 힘껏 공격하다가 패배하여 돌아간 것입니다. 파주(坡州)의 성은 토산이 우뚝히 솟아 있고 다른 대응하는 봉우리가 없어 왜적이 다 모였어도 애당초 감히 공격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담양(潭陽)의 성은, 적 가운데 이를 본 사람도 말하기를 ‘만약 조선이 견고히 지킨다면 우리가 어찌 공격하여 함락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이 그 당시의 수성(守城)에 관한 개견(槪見)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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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한다면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누구나 다 그러하니, 사람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멍하니 어찌해야 좋을지를 모르고 있다가 살 길이 이에 있음을 알게 되면 오히려 물불이라도 피하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사람도 많이 들지 않고 기간도 오래 걸리지 않아 재용도 크게 손상되지 않고 힘도 많이 들지 않는 데다 또 그들을 위하여 법을 내걸어 권장하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반드시 앞다투어 달려와 그 수고로움도 잊고 갑절 더 힘을 들여, 며칠도 안 되어 수십리 사이에 모두 우뚝히 나타나 천 리의 견고한 성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또 활과 화살, 화포, 대포, 조총 및 권율(權慄)이 만든 화륜포(火輪砲) 등의 무기를 많이 준비하였다가 나누어 주어 익히도록 하고, 또 해당 고을에서 여러 가지 무기를 나누어 만들어 여러 요새로 보내 주고 이어 큰 돌을 많이 모아 대비하고 있도록 합니다.
또한 강의 흐름이 얕아 건너다닐 수 있는 곳에는 반쯤 건넌 곳에 마름쇠[菱鐵]를 설치하되 물살에 떠내려 가거나 파묻히지 않도록 하고, 큰 배가 반드시 경유하는 길목에는 강 입구쪽 물줄기들에 큰 쇠사슬을 널리 설치해 놓되 타서 녹아 끊어지지 않도록 하여 항상 험준한 산성과 더불어 서로 돕는 형세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 된다면 삼면의 해방(海防) 5천 리 안에 방역(方域)의 관문이 첩첩이 겹치고 경성(京城)의 울타리가 정연하게 자리잡게 될 것이니, 비록 서양배 백천 척이 다가오더라도 끝내 감히 우리 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엿보지 못하고 벌써 분위기를 살피고서 멀리에서 막힐 것입니다. 설혹 어리석고 예민하지 못하여 끝내 위급한 사태를 일으킨다 해도 사람과 기물이 갖추어져 있고 군대가 정돈되어 있어 이미 스스로 믿는 구석이 있으니, 비록 도망치도록 권한다 해도 도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처자를 이끌고 저축해둔 식량을 싣고 모두 그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양향(糧餉)이 이에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한 장의 공문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전달되더라도 실어와야 할 백만 석의 곡식과 충성을 바칠 천만 명의 군사도 잠깐 사이에 모을 수 있습니다. 또 비록 군사를 멀리서 징발해 온다 하더라도 그 건재한 어른이나 부녀, 아동의 숫자가 군사의 수보다 몇 십배는 더 많을 것이니, 그들로 하여금 그저 산림 속에 숨어 있도록 한다면 쇠잔한 쓸모없는 백성에 불과하겠지만 실로 이에 수습하여 조리 있게 단결시킨다면 모두 때에 닥쳐 쓸모있는 결사적인 군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각각 통제를 받되 각자 수비하며 마을의 북을 울려대고 검은 깃발을 죽 늘어놓아 항상 사방을 성원할 부대처럼 차리고 있어 적으로 하여금 이곳을 지나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