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8. 12:27ㆍ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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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필기 제13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해중(海中)의 군대(軍隊) 이동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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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군대의 이동은 모두 바다를 경유해서 요동(遼東)으로 나왔는데, 한(漢)의 팽오(彭吳)가 예맥(濊貊)과 조선(朝鮮)에 침입했을 때에 중국의 연제(燕齊) 지방이 휩쓸리어 소동(騷動)이 일었다. 그리고 양복(楊僕)이 위씨조선(衛氏朝鮮)의 우거왕(右渠王)을 침공할 때에 발해(渤海)를 건너서 열구(列口)에 이르렀는데 이 열구란 한강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곳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漢)의 광무제(光武帝)가 장군을 보내 바다를 건너와서 청천강(淸川江) 이남의 지역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조위(曹魏 삼국 시대의 위나라)는 유흔(劉昕)을 보내 침공해 왔고, 사마의(司馬懿 조위의 권신(權臣)으로 진(晉) 무제의 조부)는 우리나라를 공격하려고 군량을 운반하였는데 이를 위해 등주(登州)에다 수입성(水入城)을 쌓았으며, 탁발위(拓跋魏 북위(北魏))는 백제를 침벌(侵伐)하였다.
수(隋)나라 대업(大業) 8년(612, 고구려 영양왕23)에 내호아(來護兒)가 바다를 건너 패수(浿水)로 들어와서 평양에 주둔하였으며, 당(唐)나라가 정관(貞觀) 18년(644, 보장왕3)에 고구려를 정벌할 때 산동반도의 내주(萊州)에서 곧장 평양으로 왔는데 등주(登州)의 북쪽에 오호도(烏胡島)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용삭(龍朔) 1년(661, 부여 풍왕1)에 소열(蘇烈 소정방(蘇定方)을 말하는데, 열이 이름이고 정방이 자임)이 백제를 멸망시킬 때에 등주의 성산(成山)에서 출발하여 인천의 덕적도(德積島)에 도착하였다. 이 성산의 동쪽 10리에 소석산(召石山)이란 산이 있는데 이 산은 진시황(秦始皇)이 바다를 건너려고 다리를 만들던 곳이라 한다.
원(元)나라는 범문호(范文虎)를 보내 흑산도(黑山島)의 수로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제주도의 남쪽 바다를 경유하여 일기도(一歧島)에서 고려의 군대와 만나서 왜(倭)를 정벌하였다. 선조 무술년(1598, 선조31) 왜적이 침략할 때에는 진린(陳璘)이 절강(浙江)의 군병을 동원하여 당진(唐津)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유구(琉球)와 섬라(暹羅)에 조칙을 내려서 우리나라를 돕도록 하고자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군대로 말하면 백제가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가서 월주(越州)의 땅을 경계로 삼았는데 이는 곧 옛날 월(越)나라 구천(句踐)이 도읍했던 곳이며, 또 바다를 건너 북쪽으로 가서 요서(遼西)의 진평(晉平)을 경략(經略)하였는데 이는 곧 옛날 고죽국(孤竹國)의 지역이다.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 시중(侍中)에게 올린 글에 보면 백제도 일찍이 중국의 제로(齊魯) 지방을 침공하여 이를 뒤흔들어 놓은 일이 있다고 한다.
고려 고종(高宗) 임진년(1232, 고종19)에 정응경(鄭應卿)이 수군(水軍) 3천 명을 거느리고 용주포(龍州浦)를 출발하여 몽고의 요청에 호응했던 일이 있으며, 인조 18년(1640)에는 임경업(林慶業)과 이완(李浣)이 주사(舟師) 5천 명을 거느리고 열두 달치 식량을 준비해 가지고 안의(安義)의 바닷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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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전역(戰役)으로 말하면, 진(晉)나라 때 백제가 일찍이 바다를 건너서 북쪽으로 가 요서(遼西)의 진평군(晉平郡)을 침략하였으며, 또 제(齊)와 노(魯)를 침략하였다. 고려 때에 이르러서는 고종(高宗) 임진년(1232, 고종19)에 정응경(鄭應卿)이 전함과 수군을 거느리고 용주포(龍洲浦)에서 출발하여 몽고(蒙古)의 군사와 만났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인묘(仁廟) 경진년(1640, 인조18)에 임경업(林慶業)과 이완(李浣)이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와 의주(義州)의 바닷가에서 만났다.
대개 우리나라의 서쪽과 남쪽의 바다에서 등주와 내주 등 여러 주로 갈 경우, 순풍을 만나면 6, 7일이 지나지 않아서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사신이 왕래하거나 군사가 출동하여 정벌할 경우에는 대부분 해로를 따라 갔다. 오늘날에 국가의 방비를 튼튼하게 하기를 계획하는 자는 산골짜기의 요해지에만 방비 시설을 갖출 것이 아니라 바다를 방비하는 데 더욱더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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