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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제30권 잡편 / 변새
변새
고려가 처음으로 여진을 평정하고 국경을 개척하여 점차 넓혀서 철령을 경계로 삼았다. 예종 때에 이르러 비록 9성을 설치하였으나 점령하자마자 곧바로 잃었는데, 우리 태조(太祖)가 북쪽 변방을 평정하고 공주(孔州)ㆍ경주(鏡州)ㆍ길주(吉州)ㆍ단주(端州)ㆍ청주(靑州)ㆍ홍주(洪州)ㆍ함주(咸州) 등 7주를 설치하였다.
태조 7년(1398)에 알목하(斡木河)는 사실상 국조(國祖)의 왕업이 이루어진 기초가 되는 곳이라 하여 경원부(慶源府)를 설치하였는데, 뒤에 여진족에게 빼앗겼다. 태종 9년(1409)에 관부(官府)를 소다로(蘇多老)로 옮겼는데 이듬해에 여진족이 또다시 침략해 오므로 이 지역의 백성들을 경성(鏡城)에 이주시켜 그 땅을 비워 두고, 또 관부를 부거(富居)로 옮겼으며 석막(石幕)에 영북진(寧北鎭)을 증설하여 요새로 삼았다. 알목하는 뒤에 동맹가첩목아(童孟哥帖木兒)에게 점령당했는데, 올적합(兀狄哈)이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세종 16년(1434)에 김종서(金宗瑞)를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로 삼아 공주(孔州)와 경주(鏡州)의 옛 땅을 수복하게 하였는데, 김종서가 명을 받은 지 3년에 시의(時議)가 불편함을 다투어 쟁론하며 비난하는 자들의 글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이에 김종서는 “용성(龍城)이 견고하다 하지만 산천의 요새가 없으니 실로 사면으로 침략을 받는 지역이며 부거(富居)와 석막(石幕)도 모두 국경이 될 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러니 적이 멸망한 이 시기에 성읍(城邑)을 배치하여 국경을 다시 튼튼하게 하는 것이 만세를 위한 이로움입니다. 더구나 조종(祖宗)의 옛 강토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고 축성의 편의함에 대해 수천 자의 소(疏)를 올렸다. 세종이 이 계책을 훌륭하게 여겨서 변방 방어의 일을 전적으로 김종서에게 맡기고, 영북진을 백안수소(伯顔愁所)로 옮겼다.
알목하의 서북쪽은 적들이 왕래하는 요충지에 해당하며 알타리(斡朶里)의 유족(遺族)이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에 큰 진을 설치하여 북쪽 관문을 방어하고, 회질가(會叱家)에 경원부(慶源府)를 또다시 설치하였으며, 공주의 옛 읍성을 증축하여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았다. 큰 진에는 5품관 여직(勵直)을 두고, 영북진과 소다로에는 새내(塞內)의 백성 각각 1100호를 이주시키되 호수(戶數)가 부족한 경우에는 경상ㆍ전라ㆍ충청ㆍ강원에서 400호씩 이주시켜 600여 리의 땅을 개척하였다.
세종 15년(1433)에 상이 최윤덕(崔潤德)을 보내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홀라온(忽剌溫)을 치게 하였는데, 참수(斬首)하고 포로로 잡은 것이 400명이었다. 19년(1437)에 다시 이천(李蕆)에게 새상(塞上 평안도 지역)의 병력 3000명을 동원하여 파저강(婆猪江) 유역에 있는 여진 잡종(雜種)을 치게 하였는데, 그들의 여막과 쌓아둔 재물을 모두 불태웠으며 참수하고 포로로 잡은 것이 100여 명이었다. 세종은 김종서를 매우 존중하고 총애하여 황보인(皇甫仁)과 함께 정승으로 삼았는데, 노릉(魯陵 단종(端宗)) 2년(1454) 정사(靖社) 때에 죽음을 당하였다.
알목하는 바로 두만강 남쪽에 있다. 오랑캐 말인 알목하는 오음회(吾音會)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회령부이다. 회질가ㆍ백안수소ㆍ소다로는 옛 공주의 땅인데, 회질가는 지금의 경원부이며 경원의 옛 유적지에 소다로의 옛 군영(軍營) 터가 있다. 석막과 부거는 부령(富寧)의 옛 고을 이름이며, 석막은 지금의 부령부이고, 용성(龍城)은 옛 경주의 북쪽 경계이며, 영북진(寧北鎭)은 지금의 경성부(鏡城府)이다.
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 1월 7일 丙申 2번째기사 1427년 명 선덕(宣德) 2년
알타리의 지휘 권두가 배사하다
알타리(斡朶里)의 지휘 권두(權豆)가 배사(拜辭)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말하기를,
"잘 가거라."
고 하니, 권두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신(臣)의 아비가 신에게 이르되, ‘나는 이미 늙었다. 너는 마땅히 가서 조회하여 마음을 한 곳에 써서 나라를 받들라. ’고 하였으니, 신은 남아서 시위(侍衛)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네 아비의 호의(好意)를 알고 또 너의 말도 가상(嘉尙)히 여긴다. 그러나 너는 일찍이 〈명나라〉 조정에 시위(侍衛)한 사람이니, 이 곳에 남는 것이 옳지 못하다. 비록 시위하지 않더라도 이미 너의 충성은 알았노라."
하였다. 안장 갖춘 말과 옷 두 벌과 청면포(靑綿布)·청면주(靑緜紬) 각 5필 씩을 내려 주었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35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책 55면
· 【분류】
외교-야(野) / 무역(貿易)
○斡朶里指揮權豆拜辭, 上引見曰: "好去。" 權豆叩頭曰: "臣父謂臣曰: ‘我旣老矣。 汝當往朝, 專心奉國。’ 臣願留侍衛。" 上曰: "予知汝父好意, 且嘉爾言, 然爾曾侍衛朝廷者也, 留此不可。 雖不侍衛, 已知汝忠誠。" 賜鞍馬、衣二領、靑緜布紬各五匹。 성호사설 제3권 / 천지문(天地門)
생숙여진(生熟女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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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동쪽 육진(六鎭)의 땅은 옛날 숙신(肅愼)의 지경이니, 석노(石砮)가 있어서 징험할 수 있다. 뒤에 여진(女眞)으로 일컬었다. 신라 말기에 발해(渤海)가 5천 리의 땅을 통합했으니, 서쪽은 온 요동을 모두 차지했고, 동쪽은 바다에 이르렀다.
여진은 생여진(生女眞)과 숙여진(熟女眞)의 분별이 있다. 옛날에 속말(粟末)ㆍ흑수(黑水)의 두 부(部)가 있었으니, 곧 흑수는 생여진이고, 속말은 숙여진이다. 속말은 혼동강(混同江)의 일명이기도 하다. 근원이 백두산에서 나와서 북쪽으로 흐르다가 새외(塞外)에서 나오는 한 흐름과 합쳐 꺾이어 동쪽으로 흐르고 다시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내 생각으로는 흑룡강에 가까운 것이 생여진이 되고, 속말에 가까운 것이 숙여진이 된다고 본다. 속말은 뒤에 발해를 세워 흑수를 복속(服屬)시키고, 혼동강을 경계로 삼아 남쪽에 가까운 것이 생여진이 되고, 북쪽에 가까운 것이 숙여진이 되었다. 그러므로 남여진(南女眞)ㆍ북여진(北女眞)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또 그 중에는 동ㆍ서의 분별이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사》에서 이른바, 동ㆍ서여진(東西女眞)이 이것이다. 금(金) 나라의 선조가 경박(鏡泊)에서 일어났으니, 혼동강 동쪽, 흑룡강 서쪽에 있었다. 성종(成宗 고려) 때에 이르러 서희(徐熙)의 말에, “거란의 동쪽이 이미 생여진의 웅거한 바 되었다.” 했으니, 흑수부가 이미 남쪽을 개척했던 것이다. 청 나라의 선조가 흥경(興京)에서 일어났으니, 이것이 이른바 건주여진(建州女眞)이다. 분묘(墳墓)와 종족(宗族)이 모두 백두산 서쪽에 있었으며, 뒤에 생여진과 숙여진을 통합하여 하나로 만들었다.
백두산 줄기가 북막(北漠)에서 나와 남쪽으로 달려서 분수령(分水嶺)에 이르고, 다시 꺾이어 동쪽으로 나와서 가로 천 리에 뻗쳤으니, 옛날에 불함산(不咸山)이라고 일컬은 곳이다. 그 속칭이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鄰)이니, 가이민(歌爾民)은 장(長)이고, 상견(商堅)은 백(白)이며, 아린(阿鄰)은 산(山)이다. 이렇게 해서 일명을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했다.
동가강(佟家江)의 여러 흐름은 분수령에서 나와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동가강을 혹 통가강(通加江)으로 일컫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이르는바 파저강(婆猪江)인 것 같으며, 흥경(興京)과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
산맥이 여진의 지경으로 들어가서 분수령에 이르는 그 사이에 장령(長嶺)이 있으니, 그 속칭이 가이민 주돈(歌爾民朱敦)이다. 가이민은 장(長)이고, 주돈은 영(嶺)인 것이다. 장령은 남쪽은 납록와집(納綠窩集)에 접하고, 북쪽은 고로눌와집(庫魯訥窩集)에 접하였으며, 와집(窩集)이라는 것은 수림(樹林)이다. 흥경의 여러 흐름은 모두 분수령에서 나와 납록에 이르고 요하(遼河)로 들어간다. 장령에서 고로눌(庫魯訥)에 이르는 사이의 여러 흐름으로서 그 서쪽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서북으로 흘러서 요하로 들어가고, 그 동쪽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동북으로 흘러서 혼동강으로 들어가니, 그 형세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다. 백두산에서부터 북쪽은 곧 북향의 국세를 이루어서 물이 모두 북쪽으로 흐른다. 혼동강 동쪽의 경박(鏡泊) 및 오수리강(烏蘇里江)이 그 가장 큰 것이다.
요하는 일명 거류하(巨流河)라고 하며, 장령의 여러 물과 합치는데, 그 근원이 새외(塞外)에서 나오는 것은 상고할 수 없다. 이들 물을 합쳐서 남쪽으로 흐르니, 이른바 요서(遼西)ㆍ요동(遼東)이 이것으로 경계를 삼는다. 성경(盛京)ㆍ흥경(興京)이 모두 요동에 있으며, 동쪽은 봉천부(奉天府)가 되고, 서쪽은 금주(錦州)가 된다. 오늘날 목책(木柵)을 설치했으니, 서쪽은 산해성(山海城 산해관(山海關)을 말함)에 접하고, 비스듬히 동북으로 뻗쳐 있다.
요하 및 북쪽에서 오는 산맥을 넘고, 또 혼동강을 넘으면 몽고(蒙古)의 경계가 되니, 몽고는 호(胡)다. 중국의 북막(北漠)에서부터 동쪽으로 흑룡강 밖에 이르는데, 합하여 48부(部)가 되니, 이른바 청태극(靑太極)ㆍ황태극(黃太極)이 이것이다. 서액라사(西額羅斯)에 사는 것을 합이합(哈爾哈)이라 하고, 동액라사(東厄羅斯)에 사는 것을 대비달자(大鼻㺚子)라 한다고 한다. 《통고(通考)》에 본다면, 실위(室韋)의 9부(部)가 숙신(肅愼)의 북쪽에 있다고 했으니, 지금의 달자(㺚子)가 그 유종(遺種)인 것 같다. 실위의 서쪽 천여 리 되는 곳에 지두우(地豆于)ㆍ오락후(烏洛侯)가 있고, 실위의 북쪽에 구도매(驅度寐) 등 여러 종족(種族)이 있으니, 혹 가깝고 혹 멀지만 요는 모두 지금의 이른바 달자인 것이다. 이제 들으니, 흑룡강과 혼동강 사이에 특별히 애호장군(艾滸將軍)을 두어서 이에 대비한다고 했다.
그 요하에 가까운 것으로는 거란이 가장 강성하다. 글안을 비롯하여 오환(烏桓)ㆍ선비(鮮卑)는 곧 동호(東胡)의 유종으로서 모두 중국의 동북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뒤에 원(元)에 병합되어 몽고로 혼칭되고, 책(柵)이 설치되어 한계가 정하여졌다.
성경(盛京)에서 선창(船廠)ㆍ오랄(烏剌)을 거쳐 영고(靈古)에 이르기까지 1천 1백 30리인데, 그 길이 곧장 도달하지 못하고, 중간에 책(柵)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장령(長嶺)의 북쪽 큰 줄기를 넘어서 비로소 선창에 도달한다. 그 조운(漕運)은 요하(遼河)의 근원에서 이둔하(易屯河)에 이르는 두 물 사이의 백 리 거리에 수로(水路)가 없으므로 거운(車運 수래를 이용한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큰 줄기를 넘게 되니, 또한 책(柵) 밖으로 나가서 육로(陸路)의 북쪽에 있게 된다. 조운은 반드시 물에 말미암는 것이니, 이치상 반드시 이와 같을 것이지만, 분수령에서부터 고로눌(庫魯訥)ㆍ장령에 이르는 사이에 반드시 다소의 통로가 있을 것인데도, 육로를 또한 책 밖으로 쫓아감은 어찌된 것인가? 산세가 남쪽으로 향할수록 더욱 험준해서 그쪽 길에 평이함만 같지 못한 때문일까? 이것은 알 수 없다.
의주에서 성경에 이르기까지 4백 50리, 성경에서 산해관에 이르기까지 8백 70리이니,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연경으로 들어가는 이정(里程)이다. 산해관에서부터 동해에 이르기까지 5천여 리인데, 영고의 동쪽이 이미 3천 리이다. 그 수세를 살핀다면 모두 동북쪽으로 흐르고 있으니, 아마도 바다에 접한 낮고도 평탄한 땅인 것만 같다.
이제 일본 동북의 하이(蝦蛦)도 또한 넓고 평탄하며 비습한 곳으로서 북쪽을 향하여 뻗어서 혹 끊어지기도 하고, 혹 이어지기도 하면서 위로 숙신의 땅에 접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의 동해를 평평한 호수로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호수가 없는 것이다. 그 접해 있는 것이 어느 곳으로 통했는지 알지 못하겠는데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흑룡강(黑龍江) 북쪽에 있다.”고 했다. 오랄(烏喇)은 두만강과의 거리가 7백20리이고, 영고(寧古)는 6백 리에 불과하다고 한다.
국초(國初)에 이만주(李滿住)ㆍ범찰(凡察)의 무리가 모두 강계부(江界府)에 가까이 접근했으니, 만주(滿住)라는 것은 이름이 아니고, 곧 가한(可汗)의 호칭과 같은 것이다. 할아비 아합출(阿哈出) 및 아비 석가노(釋家奴) 때부터 명(明) 나라에서 사성(賜姓)을 받았으니, 이른바 이사성(李思誠)은 곧 아합출이고, 이현충(李顯忠)은 곧 석가노이다. 사성(思誠)의 아들 맹가불화(猛哥不花)와 손자 초만답실리(椒滿答失里)는 많이 우리나라 변경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뒤에 만주(滿住)는 유자광(柳子光)에게 격참(擊斬)되었다. 내 생각으로는, 그 성이 이(李)로 된 것은 우리나라를 인연한 때문이라 본다. 《통고(通考)》에 “금성(金姓) 완안(完顔)은 곧 왕성(王姓)이다. 이때에 고려에 복속(服屬)한 때문이다.” 했으니, 사성의 성이 이(李)로 된 것도 또한 우리나라를 우러러 사모하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이로 인하여 이를 내려준 것이 아니겠는가?
범찰은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의 아들이니. 그 아들 동창(童倉)에게 전했고, 동창은 그 아우 동산(童山)에게 전했으며, 동산은 그 아들 탈라(脫羅)에게 전했다. 그 뒤 누전(累傳)하여 규장(叫塲)ㆍ타실(他失)에 이르렀으니, 천명제(天命帝)는 곧 타실의 아들이라고 한다.
[주-D028] 천명제(天命帝) :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세우고 연호를 천명(天命)으로 했기 때문에 천명제(天命帝)로 일컬어짐.
연산군 9년 계해(1503) 9월 18일(신사)
09-09-18[03] 성준과 이극균이 여진족에게 관직을 제수하여 회유할 것을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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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준ㆍ이극균이 아뢰기를,
“함경도는 나라의 울타리로써 만일 오진(五鎭)이 없었다면 변방 일이 근심됩니다. 세종조에는 성(城) 밑 야인(野人)들에게 겸사복(兼司僕)을 제수하도록 하였는데, 야인들은 성질이 우직하여 우리 나라 사람들과 같이 간사하지 않으므로, 조정에 들어와서 모시고 싶어 하는 자가 있으면 잡직(雜職)을 제수하도록 하여, 동청례(童淸禮) 같은 자는 위장(衛將) 등직에 제수되어야 하며, 올량합(兀良哈)은 야인 중의 평민이요, 알타리(斡朶里)는 금(金)나라의 후손이며, 청례의 아비 동소로가무(童所老加茂)는 일찍이 선왕조에 공이 있으니, 세종께서 회령진(會寧鎭)을 설치하려면서도 적당한 장소를 얻지 못하매 소로가무가 자진하여 그 집을 철거하고 땅을 바쳤으니, 그 공이 적지 않습니다. 세종께서 그 공을 중히 여겨 예빈시 판사(禮賓寺判事)의 딸에게 장가들게 하였으니, 청례의 외조부는 곧 사족(士族)인데, 어찌 대우가 내외 구별이 있을 것이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이로써 아뢰었는데, 홍문관(弘文館)에서 ‘사람의 낯에 짐승 마음이니, 조정에 모시게 할 수 없다.’고 탄핵하여 일이 그만 중지되었습니다. 세조 때에도 야인이 조정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지금 역시 저들 중의 특출한 자를 뽑아서 관직을 제수한다면, 저들이 반드시 다투어 스스로 따라오며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원전】 13 집 575 면
【분류】 외교-야(野)
성종 24년 계축(1493) 2월 4일(기해)
24-02-04[02] 올량합ㆍ알타리의 야인이 귀순할 뜻을 밝힌 글을 보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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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三衛) 야인(野人)이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대왕(大王) 건주위(建州衛) 좌위(左衛)ㆍ우위(右衛)의 보하토 도독(甫何吐都督)ㆍ나하 도독(羅下都督)ㆍ토로 도독(吐老都督)ㆍ삼위 삼도독(三衛三都督) 아거하(阿車下) 달한 도독(達罕都督)은 대황제(大皇帝)께 〈귀순하기를〉 마음을 기울여 바랐습니다. 그뒤에 주합인(朱哈人)이 작적(作賊)하였음을 삼도독(三都督)은 알지 못하였으며, 건주위(建州衛) 호라위 도독(胡羅衛都督) 아들이 작적하였으므로, 우위ㆍ좌위의 보하토ㆍ나하ㆍ토로ㆍ삼도독은 숙(叔)ㆍ백숙(伯叔)ㆍ제(弟)인 거노토왕(巨奴吐王)ㆍ동약사(童若沙)ㆍ어마치(於馬赤)를 보냈고, 왕시리여(王時里汝)ㆍ거거(巨車)ㆍ보하토의 동자(童子)ㆍ달한의 아들 기응거(其應巨)ㆍ노낭시(奴郞時)ㆍ나하(羅何)ㆍ어마치(於馬赤) 등을 보내었으며, 삼도독이 오마하(吾馬下) 땅에 있는 나하 도독의 아비 옹거 도독(雍車都督)을 보내었습니다. 황제(皇帝)시여! 황제께서는 때때로 온순하고 공순하며 부지런하심을 금황제(金皇帝)는 알고 있습니다. 황제시여! 황제께서는 때때로 아소서. 옹주(雍朱)ㆍ중거(衆巨)ㆍ진타리(陳他里)ㆍ비거(非巨)ㆍ나운토(羅雲吐)ㆍ반지거(盤知巨)ㆍ소라합(所羅哈) 등 삼위인(三衛人)은 나하 도독에 앞서 보내었고 만포(滿浦) 땅에는 동약사(童若沙) 등 명인(名人)이 있으나, 보내었던 7인은 대도(大都) 밖에서 죽었습니다. 지금 만포 땅이 대도(大都)에 있음을 금황제는 알고 있습니다. 나하 도독의 아들 나온거(羅溫車)는 글로써 적습니다.”
하였는데, 명하여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議政府)에 의논하게 하였다. 윤필상(尹弼商)은 의논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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