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5. 08:40ㆍ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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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제30권 잡편 / 변새
변새
고려가 처음으로 여진을 평정하고 국경을 개척하여 점차 넓혀서 철령을 경계로 삼았다. 예종 때에 이르러 비록 9성을 설치하였으나 점령하자마자 곧바로 잃었는데, 우리 태조(太祖)가 북쪽 변방을 평정하고 공주(孔州)ㆍ경주(鏡州)ㆍ길주(吉州)ㆍ단주(端州)ㆍ청주(靑州)ㆍ홍주(洪州)ㆍ함주(咸州) 등 7주를 설치하였다.
태조 7년(1398)에 알목하(斡木河)는 사실상 국조(國祖)의 왕업이 이루어진 기초가 되는 곳이라 하여 경원부(慶源府)를 설치하였는데, 뒤에 여진족에게 빼앗겼다. 태종 9년(1409)에 관부(官府)를 소다로(蘇多老)로 옮겼는데 이듬해에 여진족이 또다시 침략해 오므로 이 지역의 백성들을 경성(鏡城)에 이주시켜 그 땅을 비워 두고, 또 관부를 부거(富居)로 옮겼으며 석막(石幕)에 영북진(寧北鎭)을 증설하여 요새로 삼았다. 알목하는 뒤에 동맹가첩목아(童孟哥帖木兒)에게 점령당했는데, 올적합(兀狄哈)이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세종 16년(1434)에 김종서(金宗瑞)를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로 삼아 공주(孔州)와 경주(鏡州)의 옛 땅을 수복하게 하였는데, 김종서가 명을 받은 지 3년에 시의(時議)가 불편함을 다투어 쟁론하며 비난하는 자들의 글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이에 김종서는 “용성(龍城)이 견고하다 하지만 산천의 요새가 없으니 실로 사면으로 침략을 받는 지역이며 부거(富居)와 석막(石幕)도 모두 국경이 될 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러니 적이 멸망한 이 시기에 성읍(城邑)을 배치하여 국경을 다시 튼튼하게 하는 것이 만세를 위한 이로움입니다. 더구나 조종(祖宗)의 옛 강토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고 축성의 편의함에 대해 수천 자의 소(疏)를 올렸다. 세종이 이 계책을 훌륭하게 여겨서 변방 방어의 일을 전적으로 김종서에게 맡기고, 영북진을 백안수소(伯顔愁所)로 옮겼다.
알목하의 서북쪽은 적들이 왕래하는 요충지에 해당하며 알타리(斡朶里)의 유족(遺族)이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에 큰 진을 설치하여 북쪽 관문을 방어하고, 회질가(會叱家)에 경원부(慶源府)를 또다시 설치하였으며, 공주의 옛 읍성을 증축하여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았다. 큰 진에는 5품관 여직(勵直)을 두고, 영북진과 소다로에는 새내(塞內)의 백성 각각 1100호를 이주시키되 호수(戶數)가 부족한 경우에는 경상ㆍ전라ㆍ충청ㆍ강원에서 400호씩 이주시켜 600여 리의 땅을 개척하였다.
세종 15년(1433)에 상이 최윤덕(崔潤德)을 보내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홀라온(忽剌溫)을 치게 하였는데, 참수(斬首)하고 포로로 잡은 것이 400명이었다. 19년(1437)에 다시 이천(李蕆)에게 새상(塞上 평안도 지역)의 병력 3000명을 동원하여 파저강(婆猪江) 유역에 있는 여진 잡종(雜種)을 치게 하였는데, 그들의 여막과 쌓아둔 재물을 모두 불태웠으며 참수하고 포로로 잡은 것이 100여 명이었다. 세종은 김종서를 매우 존중하고 총애하여 황보인(皇甫仁)과 함께 정승으로 삼았는데, 노릉(魯陵 단종(端宗)) 2년(1454) 정사(靖社) 때에 죽음을 당하였다.
알목하는 바로 두만강 남쪽에 있다. 오랑캐 말인 알목하는 오음회(吾音會)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회령부이다. 회질가ㆍ백안수소ㆍ소다로는 옛 공주의 땅인데, 회질가는 지금의 경원부이며 경원의 옛 유적지에 소다로의 옛 군영(軍營) 터가 있다. 석막과 부거는 부령(富寧)의 옛 고을 이름이며, 석막은 지금의 부령부이고, 용성(龍城)은 옛 경주의 북쪽 경계이며, 영북진(寧北鎭)은 지금의 경성부(鏡城府)이다.
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 1월 7일 丙申 2번째기사 1427년 명 선덕(宣德) 2년
알타리의 지휘 권두가 배사하다
알타리(斡朶里)의 지휘 권두(權豆)가 배사(拜辭)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말하기를,
"잘 가거라."
고 하니, 권두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신(臣)의 아비가 신에게 이르되, ‘나는 이미 늙었다. 너는 마땅히 가서 조회하여 마음을 한 곳에 써서 나라를 받들라. ’고 하였으니, 신은 남아서 시위(侍衛)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네 아비의 호의(好意)를 알고 또 너의 말도 가상(嘉尙)히 여긴다. 그러나 너는 일찍이 〈명나라〉 조정에 시위(侍衛)한 사람이니, 이 곳에 남는 것이 옳지 못하다. 비록 시위하지 않더라도 이미 너의 충성은 알았노라."
하였다. 안장 갖춘 말과 옷 두 벌과 청면포(靑綿布)·청면주(靑緜紬) 각 5필 씩을 내려 주었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35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책 55면
· 【분류】
외교-야(野) / 무역(貿易)
○斡朶里指揮權豆拜辭, 上引見曰: "好去。" 權豆叩頭曰: "臣父謂臣曰: ‘我旣老矣。 汝當往朝, 專心奉國。’ 臣願留侍衛。" 上曰: "予知汝父好意, 且嘉爾言, 然爾曾侍衛朝廷者也, 留此不可。 雖不侍衛, 已知汝忠誠。" 賜鞍馬、衣二領、靑緜布紬各五匹。 성호사설 제3권 / 천지문(天地門)
생숙여진(生熟女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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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동쪽 육진(六鎭)의 땅은 옛날 숙신(肅愼)의 지경이니, 석노(石砮)가 있어서 징험할 수 있다. 뒤에 여진(女眞)으로 일컬었다. 신라 말기에 발해(渤海)가 5천 리의 땅을 통합했으니, 서쪽은 온 요동을 모두 차지했고, 동쪽은 바다에 이르렀다.
여진은 생여진(生女眞)과 숙여진(熟女眞)의 분별이 있다. 옛날에 속말(粟末)ㆍ흑수(黑水)의 두 부(部)가 있었으니, 곧 흑수는 생여진이고, 속말은 숙여진이다. 속말은 혼동강(混同江)의 일명이기도 하다. 근원이 백두산에서 나와서 북쪽으로 흐르다가 새외(塞外)에서 나오는 한 흐름과 합쳐 꺾이어 동쪽으로 흐르고 다시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내 생각으로는 흑룡강에 가까운 것이 생여진이 되고, 속말에 가까운 것이 숙여진이 된다고 본다. 속말은 뒤에 발해를 세워 흑수를 복속(服屬)시키고, 혼동강을 경계로 삼아 남쪽에 가까운 것이 생여진이 되고, 북쪽에 가까운 것이 숙여진이 되었다. 그러므로 남여진(南女眞)ㆍ북여진(北女眞)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또 그 중에는 동ㆍ서의 분별이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사》에서 이른바, 동ㆍ서여진(東西女眞)이 이것이다. 금(金) 나라의 선조가 경박(鏡泊)에서 일어났으니, 혼동강 동쪽, 흑룡강 서쪽에 있었다. 성종(成宗 고려) 때에 이르러 서희(徐熙)의 말에, “거란의 동쪽이 이미 생여진의 웅거한 바 되었다.” 했으니, 흑수부가 이미 남쪽을 개척했던 것이다. 청 나라의 선조가 흥경(興京)에서 일어났으니, 이것이 이른바 건주여진(建州女眞)이다. 분묘(墳墓)와 종족(宗族)이 모두 백두산 서쪽에 있었으며, 뒤에 생여진과 숙여진을 통합하여 하나로 만들었다.
백두산 줄기가 북막(北漠)에서 나와 남쪽으로 달려서 분수령(分水嶺)에 이르고, 다시 꺾이어 동쪽으로 나와서 가로 천 리에 뻗쳤으니, 옛날에 불함산(不咸山)이라고 일컬은 곳이다. 그 속칭이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鄰)이니, 가이민(歌爾民)은 장(長)이고, 상견(商堅)은 백(白)이며, 아린(阿鄰)은 산(山)이다. 이렇게 해서 일명을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했다.
동가강(佟家江)의 여러 흐름은 분수령에서 나와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동가강을 혹 통가강(通加江)으로 일컫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이르는바 파저강(婆猪江)인 것 같으며, 흥경(興京)과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
산맥이 여진의 지경으로 들어가서 분수령에 이르는 그 사이에 장령(長嶺)이 있으니, 그 속칭이 가이민 주돈(歌爾民朱敦)이다. 가이민은 장(長)이고, 주돈은 영(嶺)인 것이다. 장령은 남쪽은 납록와집(納綠窩集)에 접하고, 북쪽은 고로눌와집(庫魯訥窩集)에 접하였으며, 와집(窩集)이라는 것은 수림(樹林)이다. 흥경의 여러 흐름은 모두 분수령에서 나와 납록에 이르고 요하(遼河)로 들어간다. 장령에서 고로눌(庫魯訥)에 이르는 사이의 여러 흐름으로서 그 서쪽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서북으로 흘러서 요하로 들어가고, 그 동쪽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동북으로 흘러서 혼동강으로 들어가니, 그 형세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다. 백두산에서부터 북쪽은 곧 북향의 국세를 이루어서 물이 모두 북쪽으로 흐른다. 혼동강 동쪽의 경박(鏡泊) 및 오수리강(烏蘇里江)이 그 가장 큰 것이다.
요하는 일명 거류하(巨流河)라고 하며, 장령의 여러 물과 합치는데, 그 근원이 새외(塞外)에서 나오는 것은 상고할 수 없다. 이들 물을 합쳐서 남쪽으로 흐르니, 이른바 요서(遼西)ㆍ요동(遼東)이 이것으로 경계를 삼는다. 성경(盛京)ㆍ흥경(興京)이 모두 요동에 있으며, 동쪽은 봉천부(奉天府)가 되고, 서쪽은 금주(錦州)가 된다. 오늘날 목책(木柵)을 설치했으니, 서쪽은 산해성(山海城 산해관(山海關)을 말함)에 접하고, 비스듬히 동북으로 뻗쳐 있다.
요하 및 북쪽에서 오는 산맥을 넘고, 또 혼동강을 넘으면 몽고(蒙古)의 경계가 되니, 몽고는 호(胡)다. 중국의 북막(北漠)에서부터 동쪽으로 흑룡강 밖에 이르는데, 합하여 48부(部)가 되니, 이른바 청태극(靑太極)ㆍ황태극(黃太極)이 이것이다. 서액라사(西額羅斯)에 사는 것을 합이합(哈爾哈)이라 하고, 동액라사(東厄羅斯)에 사는 것을 대비달자(大鼻㺚子)라 한다고 한다. 《통고(通考)》에 본다면, 실위(室韋)의 9부(部)가 숙신(肅愼)의 북쪽에 있다고 했으니, 지금의 달자(㺚子)가 그 유종(遺種)인 것 같다. 실위의 서쪽 천여 리 되는 곳에 지두우(地豆于)ㆍ오락후(烏洛侯)가 있고, 실위의 북쪽에 구도매(驅度寐) 등 여러 종족(種族)이 있으니, 혹 가깝고 혹 멀지만 요는 모두 지금의 이른바 달자인 것이다. 이제 들으니, 흑룡강과 혼동강 사이에 특별히 애호장군(艾滸將軍)을 두어서 이에 대비한다고 했다.
그 요하에 가까운 것으로는 거란이 가장 강성하다. 글안을 비롯하여 오환(烏桓)ㆍ선비(鮮卑)는 곧 동호(東胡)의 유종으로서 모두 중국의 동북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뒤에 원(元)에 병합되어 몽고로 혼칭되고, 책(柵)이 설치되어 한계가 정하여졌다.
성경(盛京)에서 선창(船廠)ㆍ오랄(烏剌)을 거쳐 영고(靈古)에 이르기까지 1천 1백 30리인데, 그 길이 곧장 도달하지 못하고, 중간에 책(柵)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장령(長嶺)의 북쪽 큰 줄기를 넘어서 비로소 선창에 도달한다. 그 조운(漕運)은 요하(遼河)의 근원에서 이둔하(易屯河)에 이르는 두 물 사이의 백 리 거리에 수로(水路)가 없으므로 거운(車運 수래를 이용한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큰 줄기를 넘게 되니, 또한 책(柵) 밖으로 나가서 육로(陸路)의 북쪽에 있게 된다. 조운은 반드시 물에 말미암는 것이니, 이치상 반드시 이와 같을 것이지만, 분수령에서부터 고로눌(庫魯訥)ㆍ장령에 이르는 사이에 반드시 다소의 통로가 있을 것인데도, 육로를 또한 책 밖으로 쫓아감은 어찌된 것인가? 산세가 남쪽으로 향할수록 더욱 험준해서 그쪽 길에 평이함만 같지 못한 때문일까? 이것은 알 수 없다.
의주에서 성경에 이르기까지 4백 50리, 성경에서 산해관에 이르기까지 8백 70리이니,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연경으로 들어가는 이정(里程)이다. 산해관에서부터 동해에 이르기까지 5천여 리인데, 영고의 동쪽이 이미 3천 리이다. 그 수세를 살핀다면 모두 동북쪽으로 흐르고 있으니, 아마도 바다에 접한 낮고도 평탄한 땅인 것만 같다.
이제 일본 동북의 하이(蝦蛦)도 또한 넓고 평탄하며 비습한 곳으로서 북쪽을 향하여 뻗어서 혹 끊어지기도 하고, 혹 이어지기도 하면서 위로 숙신의 땅에 접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의 동해를 평평한 호수로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호수가 없는 것이다. 그 접해 있는 것이 어느 곳으로 통했는지 알지 못하겠는데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흑룡강(黑龍江) 북쪽에 있다.”고 했다. 오랄(烏喇)은 두만강과의 거리가 7백20리이고, 영고(寧古)는 6백 리에 불과하다고 한다.
국초(國初)에 이만주(李滿住)ㆍ범찰(凡察)의 무리가 모두 강계부(江界府)에 가까이 접근했으니, 만주(滿住)라는 것은 이름이 아니고, 곧 가한(可汗)의 호칭과 같은 것이다. 할아비 아합출(阿哈出) 및 아비 석가노(釋家奴) 때부터 명(明) 나라에서 사성(賜姓)을 받았으니, 이른바 이사성(李思誠)은 곧 아합출이고, 이현충(李顯忠)은 곧 석가노이다. 사성(思誠)의 아들 맹가불화(猛哥不花)와 손자 초만답실리(椒滿答失里)는 많이 우리나라 변경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뒤에 만주(滿住)는 유자광(柳子光)에게 격참(擊斬)되었다. 내 생각으로는, 그 성이 이(李)로 된 것은 우리나라를 인연한 때문이라 본다. 《통고(通考)》에 “금성(金姓) 완안(完顔)은 곧 왕성(王姓)이다. 이때에 고려에 복속(服屬)한 때문이다.” 했으니, 사성의 성이 이(李)로 된 것도 또한 우리나라를 우러러 사모하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이로 인하여 이를 내려준 것이 아니겠는가?
범찰은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의 아들이니. 그 아들 동창(童倉)에게 전했고, 동창은 그 아우 동산(童山)에게 전했으며, 동산은 그 아들 탈라(脫羅)에게 전했다. 그 뒤 누전(累傳)하여 규장(叫塲)ㆍ타실(他失)에 이르렀으니, 천명제(天命帝)는 곧 타실의 아들이라고 한다.
[주-D028] 천명제(天命帝) :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세우고 연호를 천명(天命)으로 했기 때문에 천명제(天命帝)로 일컬어짐.
연산군 9년 계해(1503) 9월 18일(신사)
09-09-18[03] 성준과 이극균이 여진족에게 관직을 제수하여 회유할 것을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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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준ㆍ이극균이 아뢰기를,
“함경도는 나라의 울타리로써 만일 오진(五鎭)이 없었다면 변방 일이 근심됩니다. 세종조에는 성(城) 밑 야인(野人)들에게 겸사복(兼司僕)을 제수하도록 하였는데, 야인들은 성질이 우직하여 우리 나라 사람들과 같이 간사하지 않으므로, 조정에 들어와서 모시고 싶어 하는 자가 있으면 잡직(雜職)을 제수하도록 하여, 동청례(童淸禮) 같은 자는 위장(衛將) 등직에 제수되어야 하며, 올량합(兀良哈)은 야인 중의 평민이요, 알타리(斡朶里)는 금(金)나라의 후손이며, 청례의 아비 동소로가무(童所老加茂)는 일찍이 선왕조에 공이 있으니, 세종께서 회령진(會寧鎭)을 설치하려면서도 적당한 장소를 얻지 못하매 소로가무가 자진하여 그 집을 철거하고 땅을 바쳤으니, 그 공이 적지 않습니다. 세종께서 그 공을 중히 여겨 예빈시 판사(禮賓寺判事)의 딸에게 장가들게 하였으니, 청례의 외조부는 곧 사족(士族)인데, 어찌 대우가 내외 구별이 있을 것이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이로써 아뢰었는데, 홍문관(弘文館)에서 ‘사람의 낯에 짐승 마음이니, 조정에 모시게 할 수 없다.’고 탄핵하여 일이 그만 중지되었습니다. 세조 때에도 야인이 조정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지금 역시 저들 중의 특출한 자를 뽑아서 관직을 제수한다면, 저들이 반드시 다투어 스스로 따라오며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원전】 13 집 575 면
【분류】 외교-야(野)
성종 24년 계축(1493) 2월 4일(기해)
24-02-04[02] 올량합ㆍ알타리의 야인이 귀순할 뜻을 밝힌 글을 보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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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三衛) 야인(野人)이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대왕(大王) 건주위(建州衛) 좌위(左衛)ㆍ우위(右衛)의 보하토 도독(甫何吐都督)ㆍ나하 도독(羅下都督)ㆍ토로 도독(吐老都督)ㆍ삼위 삼도독(三衛三都督) 아거하(阿車下) 달한 도독(達罕都督)은 대황제(大皇帝)께 〈귀순하기를〉 마음을 기울여 바랐습니다. 그뒤에 주합인(朱哈人)이 작적(作賊)하였음을 삼도독(三都督)은 알지 못하였으며, 건주위(建州衛) 호라위 도독(胡羅衛都督) 아들이 작적하였으므로, 우위ㆍ좌위의 보하토ㆍ나하ㆍ토로ㆍ삼도독은 숙(叔)ㆍ백숙(伯叔)ㆍ제(弟)인 거노토왕(巨奴吐王)ㆍ동약사(童若沙)ㆍ어마치(於馬赤)를 보냈고, 왕시리여(王時里汝)ㆍ거거(巨車)ㆍ보하토의 동자(童子)ㆍ달한의 아들 기응거(其應巨)ㆍ노낭시(奴郞時)ㆍ나하(羅何)ㆍ어마치(於馬赤) 등을 보내었으며, 삼도독이 오마하(吾馬下) 땅에 있는 나하 도독의 아비 옹거 도독(雍車都督)을 보내었습니다. 황제(皇帝)시여! 황제께서는 때때로 온순하고 공순하며 부지런하심을 금황제(金皇帝)는 알고 있습니다. 황제시여! 황제께서는 때때로 아소서. 옹주(雍朱)ㆍ중거(衆巨)ㆍ진타리(陳他里)ㆍ비거(非巨)ㆍ나운토(羅雲吐)ㆍ반지거(盤知巨)ㆍ소라합(所羅哈) 등 삼위인(三衛人)은 나하 도독에 앞서 보내었고 만포(滿浦) 땅에는 동약사(童若沙) 등 명인(名人)이 있으나, 보내었던 7인은 대도(大都) 밖에서 죽었습니다. 지금 만포 땅이 대도(大都)에 있음을 금황제는 알고 있습니다. 나하 도독의 아들 나온거(羅溫車)는 글로써 적습니다.”
하였는데, 명하여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議政府)에 의논하게 하였다. 윤필상(尹弼商)은 의논하기를,
“이번 이 서계(書契)의 내용은 비록 자세히 알지는 못하겠으나, 대개는 귀순(歸順)하고자 하여 사람을 보내어 알리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하고, 이극배(李克培)ㆍ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해사(該司)에 회부시켜 의논해서 아뢰게 한 다음에 다시 의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허종(許琮)은 의논하기를,
“서계의 내용은 대의(大意)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만, 귀순할 뜻을 밝힌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앞서 하유(下諭)에 의하여 추장(酋長)이 직접 오기를 기다려서 귀순을 들어주겠다고 개유(開諭)함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정문형(鄭文炯)은 의논하기를,
“이번의 서계는 분명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납관(納款)의 뜻에 지나지 않습니다. 변장(邊將)에게 말하게 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성심(誠心)으로 귀순(歸順)한다면 우리 나라에서 반드시 거절하지 않을 것이니, 영안도(永安道)의 길로 해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한다.’라고 이렇게 말하여 그들의 정세(情勢)를 관찰(觀察)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유지(柳輊)는 의논하기를,
“이번에 서계를 보건대 글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우나, 대개 귀순할 뜻이고, 또한 자제(子弟)를 보내어 화호(和好)를 맺겠다는 뜻이 있습니다. 신(臣)의 생각으로는, 오는 자는 거절하지 않고 포장(褒奬)을 거듭 더하여 그들의 구청(求請)하는 바를 들어주고, 만약 상경(上京)하기를 청하면 영안도의 길로 오도록 허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허종의 의논을 따라 드디어 서북면 도원수(西北面都元帥) 이극균(李克均)에게 하서(下書)하기를,
“이번에 삼위(三衛)의 서계(書契)를 보건대 앞서 서계의 내용과 같다. 만약 귀순하고자 한다면 추장이 직접 오라고 앞서 하유(下諭)대로 대답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12 집 272 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주-D001] 삼위(三衛) :
올량합(兀良哈)의 건주 본위(建州本衛)와 알타리(斡朶里)의 건주 좌위(建州左衛)ㆍ건주 우위(建州右衛)를 일컬음. 건주 삼위(建州三衛).
[주-D002] 납관(納款) :
성심으로 복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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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새기략
백두산고〔白頭山考〕
흑룡강은 흑룡강성의 동쪽에 있다. 옛 이름은 흑수(黑水)이며, 완수(完水), 실건하(室建河), 알난하(斡難河)라고도 한다. 객이객(喀爾喀 할하)의 북쪽 경계인 긍특산(肯特山)에서 발원하니, 지역민들은 오눈하(敖嫩河)라고 한다. 여러 물줄기를 만나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니포초성(尼布楚城 네르친스크)을 지나 남쪽을 향해 내지(內地)로 들어간다. 또 동쪽에 고륜호(枯淪湖)가 있는데, 거기서 흘러나온 액이고납하(額爾古納河)가 서남쪽에서 와서 만나 흐르다가, 아극살성(雅克薩城) 남쪽에 이르러 꺾여 동남쪽으로 흐른다. 흑룡강성 북쪽 90리에 이르러 정계리강(淨溪里江)의 물이 북쪽에서 흘러들어 오며, 흑룡강성을 돌아 동남쪽으로 흐른다. 북쪽에서 온 우만하(牛滿河)를 남쪽에서 받아들이고, 동쪽으로 흐르다가 혼동강과 만나 이로부터 합류한다. 또 동쪽으로 가다가 오소리강이 남쪽에서 흘러들어 오고, 동북쪽으로 꺾여 혁림하(革林河), 형곤하(亨滚河) 등의 여러 하천을 받아들이고 바다로 들어간다. 강희 22년(1683, 숙종9)에 장군(將軍)과 부도통(副都統)을 설치하여 성을 쌓고 지키게 하였다.
흑룡강은 백두산 북쪽에서 발원하여 퍅개(愎介) 땅을 거쳐 혼동강과 합류해 바다로 들어간다. 강의 좌우에 허전인(許全人)이 산다. 허전인은 까마귀 고기, 사슴 몸통, 소 다리를 먹는다. 퍅개인도 고기를 먹으며, 개 수레[狗子車]를 짐을 싣고 끄는 데 사용한다고 한다.
두만강은 백두산 남쪽 갑산의 천평에서 발원한다. 동쪽으로 흘러 어윤강(魚潤江)이 되며, 우리 육진과 저쪽 땅을 돌아 흐른다. 허항령 북동쪽의 물과 후춘(後春) 남산(南山)의 물이 모두 이 강에 모인다. 남북으로 수삼백 리이며, 동서로 6, 7백 리이다. 경흥(慶興) 녹둔도(鹿屯島)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현재 강의 남쪽은 우리 땅에 속하고, 북쪽은 영고탑에 속한다.
두만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을 슬해(瑟海)라고 부른다. 무이보(撫夷堡)의 서봉대(西烽臺)에 올라 바라보면 청흑색의 물빛이 하늘과 맞닿아 있다.
두만강에서 흑룡강까지, 남해(南海)로 가는 거리는 570여 리이다. 남해는, 저들이 지칭하는 남해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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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수(黑水)
《구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는 남쪽으로 신라와 서로 접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월희말갈(越喜靺鞨)에서 동북쪽으로는 흑수말갈(黑水靺鞨)에까지 이른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흑룡강(黑龍江)은 흑룡강성(黑龍江城)의 동쪽에 있으며, 옛 이름은 흑수(黑水)이고, 완수(完水)라고도 한다. 또 실건하(室建河)라고도 하고, 알난하(斡難河)라고도 한다. 그 근원은 객이객(喀爾喀) 북쪽 경계의 긍특산(肯特山)에서 나오는데, 그 지방 토착인들은 오란하(敖嬾河)라고 한다. 여러 개의 작은 물을 모아서 동북쪽으로 흘러 이포초성(泥布楚城)의 남쪽을 지나 내지(內地)로 들어와 흘러 아극살성(雅克薩城)의 남쪽을 지난 다음, 꺾어져서 동남쪽으로 흘러 흑룡강성을 감돈다. 여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과 합류한다. 《북사(北史)》 오락후국열전(烏洛侯國列傳)을 보면, “오락후국의 서북쪽에 완수가 있는데, 동북쪽으로 흘러 난수(難水)와 합류한다.” 하였고, 《구당서》 실위열전(室韋列傳)을 보면, “대산(大山)의 북쪽에 대실위부락(大室韋部落)이 있으며, 그 부락의 곁에는 실건하가 있다. 이 물의 근원은 돌궐(突厥)의 동북쪽 경계인 구륜박(俱倫泊)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나하(那河), 홀한하(忽汗河)와 합류하고, 여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남흑수말갈(南黑水靺鞨)의 북쪽과 북흑수말갈(北黑水靺鞨)의 남쪽을 지난 다음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금사》 지리지를 보면, “조주(肇州) 시흥현(始興縣)에 흑룡강이 있다.” 하였고, 《원사》 태조기(太祖紀)를 보면, “1년에 황제가 알난하의 근원지에서 황제위에 올랐다.” 하였고, 《대명일통지》를 보면, “흑룡강은 개원성(開原城)에서 북쪽으로 2500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북산(北山)에서 나오는데, 흑수말갈이 예전에 이곳에 거주하였다. 남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흑수라는 명칭은 남북조(南北朝) 시대 때 시작되었으며, 흑룡강이란 이름은 《금사》에서 나온다. 그 상원(上源)은 《북사》에 나오는 완수이며, 《구당서》에 나오는 실건하이다. 지금의 오란하가 정원(正源)인데, 오란하는 바로 《원사》에 나오는 알난하(斡難河)가 음이 변한 것이다.
○ 약수(弱水)
《진서(晉書)》 숙신씨열전(肅愼氏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숙신씨는 일명 읍루(挹婁)라고도 하는데, 불함산(不咸山)의 북쪽에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구만한국(寇漫汗國)과 접해 있으며, 북쪽은 약수(弱水)에까지 닿아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읍루는 바로 말갈인데, 말갈은 북쪽으로 흑수 지방까지 닿아 있다. 그런즉 약수는 흑수인 듯하다. 그리고 《후한서》에는 이르기를, “부여(夫餘)의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하였는데, 역시 이 물을 가리킨다.
이상은 경계 바깥에 있는 수(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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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새기략
백두산고〔白頭山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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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은 무산부(茂山府) 서쪽 306리에 있다. 옛 이름은 불함산(不咸山)이다. 중국 사람은 장백(長白), 동방 사람은 백두(白頭)라고 부르니, 산이 아주 높고 사계절 항상 얼음과 눈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산해경(山海經)》에 “넓은 황야 가운데 산이 있는데, 불함산이라고 하며,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라고 하였다.
《진서(晉書)》에 “숙신씨가 불함산 북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불함산에 대해 살펴보건대, 우리나라 역사[東史]에 따르면 북옥저(北沃沮)와 말갈(靺鞨)이 모두 불함산 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우리나라 경내에 불함산이 있었던 듯하나, 어느 산이 옛 불함산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백두산을 불함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근거에 따른 것인가.
《위서(魏書)》에 “물길국(勿吉國)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나라 말로는 ‘태백(太白)’이다. 호랑이, 표범, 곰, 이리 등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이 이 산을 용변으로 더럽힐 수 없다 하여, 산을 지나가는 자들은 모두 용기에 담아서 간다.”라고 하였다.
《요지(遼志)》에 “장백산이 냉산(冷山) 동남쪽 1000여 리에 있다. 그 산 속의 금수들은 모두 하얗다. 사람이 감히 들어가지 않는데, 그곳을 더럽혀 뱀에게 물리는 해를 입을까 두려워서이다.”라고 하였다.
《금사(金史)》 〈세기(世紀)〉에 “그 북쪽으로 혼동강(混同江)과 장백산(長白山)이 있다. 혼동강은 흑룡강(黑龍江)이라고도 한다. 이른바 ‘백산(白山)과 흑수(黑水)’가 바로 이것이다. 대정(大定) 12년(1172)에 장백산신(長白山神)을 흥국영응왕(興國靈應王)에 봉하고, 그 산 북쪽에 묘우(廟宇)를 세웠다. 명창(明昌) 연간에 다시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에 책봉하였다.”라고 하였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장백산은 삼만위(三萬衛) 동북쪽 1000여 리에 있으니, 옛 회령부(會寧府)의 남쪽 60리이다. 너비는 1000리, 높이는 200리이다. 그 정상에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며,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혼동강이 되며, 동쪽으로 흘러 아야고하(阿也苦河)가 된다.”라고 하였고, 《성경통지(盛京通志)》에 “장백산은 곧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隣)이니, 선창(船廠) 동남쪽 1300여 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명통지(明統志)》에 “동쪽으로 흘러 아야고하가 된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살펴보건대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압록강,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토문강(土門江), 북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혼동강이라고 하니, 아야고하라는 이름의 강은 없다. 옛날과 지금의 호칭이 다르기 때문이다.
《청일통지(淸一統志)》에 “장백산은 길림오라성(吉林烏喇城) 동남쪽에 있으니 너비가 1000여 리에 이른다. 동쪽으로 영고탑(寧古塔)으로부터 서쪽으로 봉천부(奉天府)에 이르기까지 여러 산이 모두 이 산에서 발맥(發脈)한다. 산 정상에 못이 있는데, 압록, 혼동, 토문 세 강의 발원지이다. 금(金)나라 때 세운 묘우는 훼손되었고, 본조(本朝)에서 높여 장백산지신(長白山之神)으로 삼고 성 서남쪽에 있는 온덕항산(溫德恒山)에서 망제(望祭)를 지낸다. 강희(康煕) 17년(1678)에 대신(大臣) 각라오목눌(覺羅吳木訥) 등을 보내 산에 올라 형세를 살피도록 하였다. 그들이 산에 가서 산록 한 곳을 보니 사방 둘레로는 숲이 빽빽한데 그 가운데 둥글고 평평한 곳에서는 초목이 나지 않았다. 숲을 나와 10리쯤 가니 향기 나는 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노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산 중턱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쳐다볼 수가 없었는데, 여러 대신이 꿇어앉아 황제의 칙지를 읽자 바로 구름과 안개가 걷혀 산의 형세가 훤히 드러났다. 오를 만한 산길로 반쯤 갔을 때 섬돌 같은 대[石砌臺]가 있었는데, 평평해서 사방을 바라보기 좋았다. 그곳에서 보니 산 정상은 둥그런 형상이고 눈이 쌓여 하얬다. 정상에 올라 보니, 다섯 봉우리가 빙 둘러 솟아 있는 것이 마치 관아 같고, 남쪽의 한 봉우리가 조금 낮아 마치 문 같았다. 가운데의 못은 아득히 먼데, 산벼랑과의 거리가 50길쯤 되고, 둘레는 40여 리쯤 되었다. 산의 사방에서 수많은 물줄기가 세차게 흐르니, 바로 큰 세 강의 발원이다. 강희 23년(1684)에 주방협령(駐防協領) 늑출(勒出) 등을 다시 보내 둘러보고 산의 형세를 살피도록 하였는데, 그 너비와 길이는 《명통지》에 쓰인 바와 대략 같았다. 그 정상에는 별다른 나무가 살지 않고 흰 꽃을 피운 풀들이 많았다. 남쪽 산자락이 굽이굽이 뻗어 가다가 두 줄기로 갈라지는데, 그중 서남쪽 방향의 산줄기는 동쪽으로 압록강을, 서쪽으로 통가강(通加江)을 끼었으며, 그 산줄기가 끝나는 곳에서 두 강이 만난다. 다른 한 줄기는 산의 서쪽을 돌아 북쪽으로 수백 리를 뻗었는데 여러 물줄기에 의해 갈라지므로 구지(舊志)에서는 통틀어 분수령(分水嶺)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서쪽으로 흥경(興京)에 이르기까지 나무가 우거지고 숲이 깊어 하늘과 해를 가리는 곳을 두고 지역민은 납록와집(納綠窩集)이라고 부른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흥경문(興京門)으로 들어가 개운산(開運山)을 이룬다. 납록와집에서 북쪽으로 한 산줄기가 40여 리 뻗었는데, 지역민은 이를 가이민주돈(歌爾民朱敦)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다시 서쪽 방향으로 영액변문(英額邊門)으로 들어가 천주(天柱)와 융업(隆業) 두 산을 이룬다. 산줄기가 구불구불 뻗어 있어 지역에 따라 산(山)이라고도 하고 영(嶺)이라고도 하여 그 이름은 같지 않으나, 모두 이 장백산에서 갈라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통지》에는 “선창 동남쪽 1300여 리에 있다.”라고 하였으나, 지금 살펴보건대 이 산은 실제로 주(州 길림오라성)의 동남쪽 600리에 있다.주-D009
혹 개마대산(蓋馬大山)이라고도 하니, 이는 오늘날의 백두산이다.
백두산은 동북쪽에 웅장하게 솟아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하늘로 높이 치솟아 있고, 천 리가 하나같이 푸르다. 멀리서 바라보면 정상이 마치 높은 상에 흰 항아리를 엎어 놓은 것 같다. 대택(大澤 천지)의 동쪽에는 돌사자가 있는데, 색이 누렇고 꼬리와 갈기가 움직이는 듯하다. 중국 사람들이 망천후(望天犼)라고 부른다.
산세(山勢)는 경태방(庚兌方 서쪽)으로부터 오고 산체(山體)는 남쪽을 등지고 북쪽을 바라본다. 그 북쪽은 숙신(肅愼), 남쪽은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이다. 그 동남쪽은 평탄하여 미미하게 맥이 있는데 세 번 웅크리고 산줄기를 이루어 손사방(巽巳方 동남쪽)으로 내려와 분수령이 되니, 곧 삼한(三韓) 산천(山川)의 시조이다.
백두산 정상은 가운데가 움푹 꺼져 못을 이루었는데, 둘레는 4, 5십 리이고 깊이는 100여 길이다. 비가 와도 불어나지 않고 비가 안 와도 줄지 않으며, 푸른 파도가 도도하게 일렁이니 사람들이 감히 다가가 보지 못한다. 정상의 사방에 봉우리들이 각각 우뚝 서 있는데, 정오(正午 남쪽)의 한 줄기가 못 안으로 쑥 들어왔다가 곧장 수구(水口)로 향한다. 못을 따라 둘레를 헤아려 보면 1만 2000보(步)이고, 그 저변에서 봉우리까지를 세어 보면 1800보이며, 수구의 동서쪽 너비는 150보이고, 남쪽 산줄기가 들어온 길이는 300여 보이며, 상봉으로부터 사방 봉우리의 둘레를 모두 계산하면 8, 9십 리쯤 된다. 북쪽으로 툭 터져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혼동강이 되고, 동쪽으로 한 물줄기가 겹겹의 봉우리와 암석 사이로 숨어 흘러 비로소 토문강이 되니, 곧 두만강의 상류이다.
대택의 물은 신령한 원기(元氣)가 모여 이루어졌는데 수구가 북쪽으로 트여 있어 경박(鏡泊)으로 흘러가며, 대택 사방 봉우리의 큰 맥은 모두 저들의 소유이고 산 뒤로 면면히 이어진 작은 자락이 곧 우리의 소유이니, 저들은 온전하게 얻었고 우리는 치우치게 얻었다 하겠다. 완안씨(完顔氏 금나라) 이래로 흑수와 백산 사이에서 공업이 나타나지 않음이 없었으니, 저들이 번갈아 중국 땅의 주인이 된 것은 이 때문인가……………………….
흑룡강은 흑룡강성의 동쪽에 있다. 옛 이름은 흑수(黑水)이며, 완수(完水), 실건하(室建河), 알난하(斡難河)라고도 한다. 객이객(喀爾喀 할하)의 북쪽 경계인 긍특산(肯特山)에서 발원하니, 지역민들은 오눈하(敖嫩河)라고 한다. 여러 물줄기를 만나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니포초성(尼布楚城 네르친스크)을 지나 남쪽을 향해 내지(內地)로 들어간다. 또 동쪽에 고륜호(枯淪湖)가 있는데, 거기서 흘러나온 액이고납하(額爾古納河)가 서남쪽에서 와서 만나 흐르다가, 아극살성(雅克薩城) 남쪽에 이르러 꺾여 동남쪽으로 흐른다. 흑룡강성 북쪽 90리에 이르러 정계리강(淨溪里江)의 물이 북쪽에서 흘러들어 오며, 흑룡강성을 돌아 동남쪽으로 흐른다. 북쪽에서 온 우만하(牛滿河)를 남쪽에서 받아들이고, 동쪽으로 흐르다가 혼동강과 만나 이로부터 합류한다. 또 동쪽으로 가다가 오소리강이 남쪽에서 흘러들어 오고, 동북쪽으로 꺾여 혁림하(革林河), 형곤하(亨滚河) 등의 여러 하천을 받아들이고 바다로 들어간다. 강희 22년(1683, 숙종9)에 장군(將軍)과 부도통(副都統)을 설치하여 성을 쌓고 지키게 하였다.
흑룡강은 백두산 북쪽에서 발원하여 퍅개(愎介) 땅을 거쳐 혼동강과 합류해 바다로 들어간다. 강의 좌우에 허전인(許全人)이 산다. 허전인은 까마귀 고기, 사슴 몸통, 소 다리를 먹는다. 퍅개인도 고기를 먹으며, 개 수레[狗子車]를 짐을 싣고 끄는 데 사용한다고 한다.
두만강은 백두산 남쪽 갑산의 천평에서 발원한다. 동쪽으로 흘러 어윤강(魚潤江)이 되며, 우리 육진과 저쪽 땅을 돌아 흐른다. 허항령 북동쪽의 물과 후춘(後春) 남산(南山)의 물이 모두 이 강에 모인다. 남북으로 수삼백 리이며, 동서로 6, 7백 리이다. 경흥(慶興) 녹둔도(鹿屯島)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현재 강의 남쪽은 우리 땅에 속하고, 북쪽은 영고탑에 속한다.
두만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을 슬해(瑟海)라고 부른다. 무이보(撫夷堡)의 서봉대(西烽臺)에 올라 바라보면 청흑색의 물빛이 하늘과 맞닿아 있다.
두만강에서 흑룡강까지, 남해(南海)로 가는 거리는 570여 리이다. 남해는, 저들이 지칭하는 남해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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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宗純皇帝實錄 卷之一千四百二十二 乾隆五十八年 二月 十四日 1번째기사 1793년(청 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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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丑。諭軍機大臣等。據明亮奏。查明尼布楚城。雅克薩城原委一摺。該處境地。既經松鄂托。與俄羅斯使臣。議以雅克薩城內屬。尼布楚城屬俄羅斯。並令將向住雅克薩之俄羅斯。盡徹回伊察罕汗地方。現在雅克薩。曾否設卡撥人駐守。著傳諭明亮等。查明遇便奏聞。
朔方備乘 卷 第七
2014.01.16.
한하여 기록하였음 (*는 지명임) *黑龍江城 北極高五十度 偏東十度五十八分 *尼布楚城 北極高五十一度四十八分 偏西十七分(以上乾隆二十二年奏準) *克嚕倫河巴爾城 北極...
송사전 몽고열전(蒙古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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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흥(祥興 위왕(衛王)의 연호) 1년(1278, 지원 15), 제가 애산(崖山)에 머물러 있었다. 장홍범(張弘範)이 조양(潮陽)으로 진군하여 문천상(文天祥)을 붙잡아다 대도(大都)로 송치하였다. 백이(伯夷)를 소의청혜공(昭義淸惠公)으로, 숙제(叔齊)를 숭양인혜공(崇讓仁惠公)으로 추봉하고, 정호(程顥)를 예국공(豫國公)으로 가봉하였다. 양련진가(楊璉眞珈)가 소흥(紹興)ㆍ제제(諸帝)의 능묘 및 대신의 무덤을 무려 1백 1개소나 파헤치고 금은 보석을 취해 갔다. 염희헌(廉希憲)을 불러 중서성(中書省)에 들어오게 하니 병이 위독하다 칭탁하고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천하의 일이 진실로 견제받는 데가 없다면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의 정치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장홍범이 애산(崖山)에 진군하자 육수부(陸秀夫)가 제(帝)를 업고 바다에 빠지니, 후궁과 제신들 가운데도 따라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 양 태후(楊太后)도 다른 배에 있다가 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장세걸(張世傑)이 시체를 건져 바닷가에 장사하고 바다에 빠져 죽으니 송(宋)의 국통은 끊어졌다. 홀필렬(忽必烈)이 통일 이전의 연호를 중통(中統)으로 개원하니 무릇 4년이다. 지원(至元) 16년 2월에 비로소 천하를 통일하였다.
철목진(鐵木眞)은 사막 동북 알난하(斡難河)에서 처음 일어나고 와활태(窩闊台)는 사막 서쪽 화림(和林)에서 즉위하니, 본디 당(唐) 나라 때 회골(回鶻)의 비가사한(毗伽司汗)의 옛 성을 회동의 장소로 삼아서, 처음에는 원창로(元昌路)를 세웠고, 나중에 화림사(和林司)로 고쳐 운영하다가, 홀필렬이 연경(燕京)으로 천도하여 대도(大都)라고 부르면서부터는 화림 선위사(和林宣慰司)로 개설하여 늘 훈구 왕공으로 통할하게 하였다. 여기서 북으로 3천 리를 가면 아지리해자(阿只里海子)이고, 또 5백 리를 가면 겸주(謙州)ㆍ익란주(益蘭州)이며, 다시 1천 리를 가면 대택(大澤)에 이른다.
상도(上都)는 환주(桓州) 동쪽에 있는데, 온 지역이 모두 소나무여서 천리송림(千里松林)으로도 불린다. 흘필렬이 개평부(開平府)로 일컫다가 이윽고 상도(上都)로 올려 일찍이 그곳에서 피서하였고, 궁궐과 시사(市肆)의 웅장함은 대도와 대등하다. 그리고 동경(東京)은 곧 요양(遼陽)인데, 홀필렬이 요양 등 각 곳에 행성(行省)을 개설하여 통솔한 노(路)가 일곱이었다.
한대(漢代) 이래로 판도(版圖)에 소속된 것이 혼동강(混同江) 이동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는데, 요(遼)와 금(金)이 창흥하면서 비로소 널리 땅을 개척하였고, 원(元)에 와서는 더 멀리 북으로 음산(陰山)을 넘고, 서로 유사(流沙)까지 닿고, 동으로 요좌(遼左)를 다 차지하고, 남으로 해표(海表)를 넘어가서 그 도리(道里)는 숫자로 셀 수가 없다.
병제(兵制)는, 1만 부(夫)의 장은 만호(萬戶), 그 다음은 천호(千戶), 백호(百戶)의 순이다. 홀필렬이 내직으로는 오위(五衛)를 세워 숙위(宿衛)를 총괄케 하고, 외직으로는 만호 밑에 총관(總管)을 두고, 천호 밑에 총파(總把)를 두고, 백호 밑에 탄압(彈壓)을 두어 다시 추밀원(樞密院)으로 총괄케 하였다. 한 집안에서 15세 이상 70세 이하의 남자는 중과(衆寡)를 막론하고 모두 군대에 편입시켜 10명씩 1패(牌)로 삼았으며, 어린아이가 조금 자라면 다시 입적시켜 점정군(漸丁軍)이라 불렀다.
관제(官制)는 철목진(鐵木眞) 이하 관계(官階)가 매우 간략하다. 단사관(斷事官)이 가장 중임인데 직위는 삼공(三公)의 위이다. 승상(丞相)은 대필도적(大必闍赤)이라고 부르는데 병권을 장악했을 때는 좌우만호(左右萬戶)라 한다. 그 뒤에 금의 제도를 모방하여 행성(行省) 및 원수(元帥)와 선무사(宣撫使)를 두었다.
홀필렬이 관제를 제정할 때 중서성(中書省)은 정무(政務)를 총괄하고, 추밀원(樞密院)은 병권을 장악하고, 어사대(御史臺)는 출척(黜陟)을 맡게 하였으며, 외직으로는 행성(行省)ㆍ행대(行臺)ㆍ선위사(宣慰司)ㆍ염방사(廉訪司)가 있고, 목민관(牧民官)으로는 노(路)ㆍ부(府)ㆍ주(州)ㆍ현(縣)의 달로화적(達魯花赤)이 있는데 몽고 사람에게는 장(長)을, 남쪽 사람에게는 부(副)를 맡겼다.
대(代)마다 배천(拜天)의 예를 행하고, 의관과 제기는 순박함을 숭상했다. 보본반시(報本反始)의 마음은 자연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라, 몽가(蒙哥 헌종의 이름)가 처음 면복(冕腹)을 갖추고 하늘에 제사하고 종묘(宗廟)의 제사는 희생을 놓고 말젖을 드리며, 무격(巫覡)이 본국 말로 누대의 제와 후의 휘를 불러 고유한다. 그 후 홀필렬이 비로소 제복과 제기를 마련하고 희생은 말ㆍ소 각 한 마리, 염소ㆍ사슴ㆍ멧돼지ㆍ거위 각 일곱 마리를 썼다.
제왕이 죽으면 널을 황남목(黃楠木)을 쓰고 통나무를 두 쪽으로 쪼개어 주검 모양처럼 판다. 염(殮)에는 초피(貂皮)의 속가죽으로 된 웃옷[襖]과 가죽으로 된 모자ㆍ신ㆍ버선을 쓰고, 또 금으로 된 술병ㆍ술잔ㆍ주발ㆍ쟁반 한 개씩과 수저 각 한 벌을 넣으며, 염이 끝나면 황금으로 네 가닥의 테를 만들어 묶는다. 국초에는 모든 관복을 몽고 풍속대로 따랐고, 홀필렬이 한(漢)ㆍ당(唐)ㆍ송(宋)ㆍ금(金)의 제도를 취했다. 제복(祭服)ㆍ공복(公服)ㆍ질손(質孫)을 만들었다. 질손(質孫)은 한어로 일색복(一色服)인데 궁내의 큰 잔치가 있을 때면 입고, 계절에 따라 똑같지는 않으나 정해진 제도는 없으며, 훈척 대신(勳戚大臣) 및 근시(近侍)들은 하사해야 입는다. 그리고 아래로 악공(樂工)ㆍ위사(衛士)까지도 모두 제 옷이 있어서 상하가 일치하지는 않으나 이를 통틀어 질손이라 한다.
철목진(鐵木眞)은 하악(夏樂)을 쓰고, 와활태(窩闊台)는 금악(金樂)을 썼으며, 홀필렬(忽必烈)이 비로소 대성악(大成樂)을 제정하였다. 국초에는 오로지 금의 법을 썼는데 사람을 많이 다치고 너무 가혹하다 하여, 홀필렬이 번거롭고 가혹한 조항은 제외하고 가벼운 전례만 찾아 썼다.
다음과 같이 논한다.
몽고가 북적(北狄)으로서 처음 일어날 당시에는 너무 하찮았기 때문에 달단(韃靼)에 부속되었는데, 철목진이 저 멀리 사막 밖에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서 하(夏)를 무찌르고, 금(金)을 내치고, 서역(西域)을 소탕하였고 와활태(窩闊台)가 10로에 사명을 펴 부세를 정하고 선비를 높여 주었으며, 관후한 정치와 검약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내마진씨(乃馬眞氏)가 귀유(貴由)의 명을 따르지 않음으로 해서 야율초재(耶律楚材)는 분통이 터져 죽기까지 하였으며, 귀유가 일찍 죽고 나서는 사뙨 아내가 칭제(稱制)하여 그 계통이 끊어질 뻔하였다. 그러다가 뭇 신하들이 몽가(蒙哥)를 추대하여 서남(西南)으로 넓은 국경을 개척하여 중국의 영토까지 침입하였으며, 그 뒤 홀필렬이 큰 포부를 가지고 온 천하를 통일하였다.
아! 삼대(三代) 이래로 이적(夷狄)이 중국을 침략은 하였어도 중국에 들어와서 제 노릇을 한 자는 없었으나, 호원(胡元)은 비로소 제 노릇을 하였다. 예로부터 멸망하지 않은 나라는 없지만 그래도 중국의 정통만은 끊어진 적이 없었는데, 오제(五帝)ㆍ삼왕(三王)께서 물려준 중국이 끝내 제유(諸儒)의 도학(道學)이 크게 발전되던 그 시대에 멸망되고 말았으니, 이것은 만고에 없었던 일대 변혁이다. 슬프다!
각주정보 (2)
번호 주석명 주석내용 서명
1 알난하(斡難河) 오랑캐 땅의 이름이다. 그 땅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나, 원(元)의 철목진(鐵木眞)이 처음으로 알난하에서 제위(帝位)에 나아갔다고 하였으므로 인용한 말로, 즉 청(淸) 나라를 가리킨
오논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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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난하에서 넘어옴)
오논강 전경
오논강(몽골어: Онон гол, ᠥᠨᠥᠨ
ᠭᠣᠣᠯ 오논 요울, 러시아어: Онон)은 러시아와 몽골을 흐르는 강으로 유역 길이는 818 km, 유역 면적은 94,010 sq. km이다. 헨티산맥의 동쪽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인고다강과 합류하여 실카강을 이룬다.
칭기즈 칸이 해당 강 부근에서 태어나고 자랐다.[1]
또한 미디어에 소개된 곳은 EBS 1TV의 《세계테마기행》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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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제30권 잡편 / 변새
변새
고려가 처음으로 여진을 평정하고 국경을 개척하여 점차 넓혀서 철령을 경계로 삼았다. 예종 때에 이르러 비록 9성을 설치하였으나 점령하자마자 곧바로 잃었는데, 우리 태조(太祖)가 북쪽 변방을 평정하고 공주(孔州)ㆍ경주(鏡州)ㆍ길주(吉州)ㆍ단주(端州)ㆍ청주(靑州)ㆍ홍주(洪州)ㆍ함주(咸州) 등 7주를 설치하였다.
태조 7년(1398)에 알목하(斡木河)는 사실상 국조(國祖)의 왕업이 이루어진 기초가 되는 곳이라 하여 경원부(慶源府)를 설치하였는데, 뒤에 여진족에게 빼앗겼다. 태종 9년(1409)에 관부(官府)를 소다로(蘇多老)로 옮겼는데 이듬해에 여진족이 또다시 침략해 오므로 이 지역의 백성들을 경성(鏡城)에 이주시켜 그 땅을 비워 두고, 또 관부를 부거(富居)로 옮겼으며 석막(石幕)에 영북진(寧北鎭)을 증설하여 요새로 삼았다. 알목하는 뒤에 동맹가첩목아(童孟哥帖木兒)에게 점령당했는데, 올적합(兀狄哈)이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세종 16년(1434)에 김종서(金宗瑞)를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로 삼아 공주(孔州)와 경주(鏡州)의 옛 땅을 수복하게 하였는데, 김종서가 명을 받은 지 3년에 시의(時議)가 불편함을 다투어 쟁론하며 비난하는 자들의 글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이에 김종서는 “용성(龍城)이 견고하다 하지만 산천의 요새가 없으니 실로 사면으로 침략을 받는 지역이며 부거(富居)와 석막(石幕)도 모두 국경이 될 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러니 적이 멸망한 이 시기에 성읍(城邑)을 배치하여 국경을 다시 튼튼하게 하는 것이 만세를 위한 이로움입니다. 더구나 조종(祖宗)의 옛 강토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고 축성의 편의함에 대해 수천 자의 소(疏)를 올렸다. 세종이 이 계책을 훌륭하게 여겨서 변방 방어의 일을 전적으로 김종서에게 맡기고, 영북진을 백안수소(伯顔愁所)로 옮겼다.
알목하의 서북쪽은 적들이 왕래하는 요충지에 해당하며 알타리(斡朶里)의 유족(遺族)이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에 큰 진을 설치하여 북쪽 관문을 방어하고, 회질가(會叱家)에 경원부(慶源府)를 또다시 설치하였으며, 공주의 옛 읍성을 증축하여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았다. 큰 진에는 5품관 여직(勵直)을 두고, 영북진과 소다로에는 새내(塞內)의 백성 각각 1100호를 이주시키되 호수(戶數)가 부족한 경우에는 경상ㆍ전라ㆍ충청ㆍ강원에서 400호씩 이주시켜 600여 리의 땅을 개척하였다.
세종 15년(1433)에 상이 최윤덕(崔潤德)을 보내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홀라온(忽剌溫)을 치게 하였는데, 참수(斬首)하고 포로로 잡은 것이 400명이었다. 19년(1437)에 다시 이천(李蕆)에게 새상(塞上 평안도 지역)의 병력 3000명을 동원하여 파저강(婆猪江) 유역에 있는 여진 잡종(雜種)을 치게 하였는데, 그들의 여막과 쌓아둔 재물을 모두 불태웠으며 참수하고 포로로 잡은 것이 100여 명이었다. 세종은 김종서를 매우 존중하고 총애하여 황보인(皇甫仁)과 함께 정승으로 삼았는데, 노릉(魯陵 단종(端宗)) 2년(1454) 정사(靖社) 때에 죽음을 당하였다.
알목하는 바로 두만강 남쪽에 있다. 오랑캐 말인 알목하는 오음회(吾音會)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회령부이다. 회질가ㆍ백안수소ㆍ소다로는 옛 공주의 땅인데, 회질가는 지금의 경원부이며 경원의 옛 유적지에 소다로의 옛 군영(軍營) 터가 있다. 석막과 부거는 부령(富寧)의 옛 고을 이름이며, 석막은 지금의 부령부이고, 용성(龍城)은 옛 경주의 북쪽 경계이며, 영북진(寧北鎭)은 지금의 경성부(鏡城府)이다.
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 1월 7일 丙申 2번째기사 1427년 명 선덕(宣德) 2년
알타리의 지휘 권두가 배사하다
알타리(斡朶里)의 지휘 권두(權豆)가 배사(拜辭)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말하기를,
"잘 가거라."
고 하니, 권두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신(臣)의 아비가 신에게 이르되, ‘나는 이미 늙었다. 너는 마땅히 가서 조회하여 마음을 한 곳에 써서 나라를 받들라. ’고 하였으니, 신은 남아서 시위(侍衛)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네 아비의 호의(好意)를 알고 또 너의 말도 가상(嘉尙)히 여긴다. 그러나 너는 일찍이 〈명나라〉 조정에 시위(侍衛)한 사람이니, 이 곳에 남는 것이 옳지 못하다. 비록 시위하지 않더라도 이미 너의 충성은 알았노라."
하였다. 안장 갖춘 말과 옷 두 벌과 청면포(靑綿布)·청면주(靑緜紬) 각 5필 씩을 내려 주었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35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책 55면
· 【분류】
외교-야(野) / 무역(貿易)
○斡朶里指揮權豆拜辭, 上引見曰: "好去。" 權豆叩頭曰: "臣父謂臣曰: ‘我旣老矣。 汝當往朝, 專心奉國。’ 臣願留侍衛。" 上曰: "予知汝父好意, 且嘉爾言, 然爾曾侍衛朝廷者也, 留此不可。 雖不侍衛, 已知汝忠誠。" 賜鞍馬、衣二領、靑緜布紬各五匹。 성호사설 제3권 / 천지문(天地門)
생숙여진(生熟女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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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동쪽 육진(六鎭)의 땅은 옛날 숙신(肅愼)의 지경이니, 석노(石砮)가 있어서 징험할 수 있다. 뒤에 여진(女眞)으로 일컬었다. 신라 말기에 발해(渤海)가 5천 리의 땅을 통합했으니, 서쪽은 온 요동을 모두 차지했고, 동쪽은 바다에 이르렀다.
여진은 생여진(生女眞)과 숙여진(熟女眞)의 분별이 있다. 옛날에 속말(粟末)ㆍ흑수(黑水)의 두 부(部)가 있었으니, 곧 흑수는 생여진이고, 속말은 숙여진이다. 속말은 혼동강(混同江)의 일명이기도 하다. 근원이 백두산에서 나와서 북쪽으로 흐르다가 새외(塞外)에서 나오는 한 흐름과 합쳐 꺾이어 동쪽으로 흐르고 다시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내 생각으로는 흑룡강에 가까운 것이 생여진이 되고, 속말에 가까운 것이 숙여진이 된다고 본다. 속말은 뒤에 발해를 세워 흑수를 복속(服屬)시키고, 혼동강을 경계로 삼아 남쪽에 가까운 것이 생여진이 되고, 북쪽에 가까운 것이 숙여진이 되었다. 그러므로 남여진(南女眞)ㆍ북여진(北女眞)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또 그 중에는 동ㆍ서의 분별이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사》에서 이른바, 동ㆍ서여진(東西女眞)이 이것이다. 금(金) 나라의 선조가 경박(鏡泊)에서 일어났으니, 혼동강 동쪽, 흑룡강 서쪽에 있었다. 성종(成宗 고려) 때에 이르러 서희(徐熙)의 말에, “거란의 동쪽이 이미 생여진의 웅거한 바 되었다.” 했으니, 흑수부가 이미 남쪽을 개척했던 것이다. 청 나라의 선조가 흥경(興京)에서 일어났으니, 이것이 이른바 건주여진(建州女眞)이다. 분묘(墳墓)와 종족(宗族)이 모두 백두산 서쪽에 있었으며, 뒤에 생여진과 숙여진을 통합하여 하나로 만들었다.
백두산 줄기가 북막(北漠)에서 나와 남쪽으로 달려서 분수령(分水嶺)에 이르고, 다시 꺾이어 동쪽으로 나와서 가로 천 리에 뻗쳤으니, 옛날에 불함산(不咸山)이라고 일컬은 곳이다. 그 속칭이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鄰)이니, 가이민(歌爾民)은 장(長)이고, 상견(商堅)은 백(白)이며, 아린(阿鄰)은 산(山)이다. 이렇게 해서 일명을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했다.
동가강(佟家江)의 여러 흐름은 분수령에서 나와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동가강을 혹 통가강(通加江)으로 일컫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이르는바 파저강(婆猪江)인 것 같으며, 흥경(興京)과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
산맥이 여진의 지경으로 들어가서 분수령에 이르는 그 사이에 장령(長嶺)이 있으니, 그 속칭이 가이민 주돈(歌爾民朱敦)이다. 가이민은 장(長)이고, 주돈은 영(嶺)인 것이다. 장령은 남쪽은 납록와집(納綠窩集)에 접하고, 북쪽은 고로눌와집(庫魯訥窩集)에 접하였으며, 와집(窩集)이라는 것은 수림(樹林)이다. 흥경의 여러 흐름은 모두 분수령에서 나와 납록에 이르고 요하(遼河)로 들어간다. 장령에서 고로눌(庫魯訥)에 이르는 사이의 여러 흐름으로서 그 서쪽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서북으로 흘러서 요하로 들어가고, 그 동쪽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동북으로 흘러서 혼동강으로 들어가니, 그 형세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다. 백두산에서부터 북쪽은 곧 북향의 국세를 이루어서 물이 모두 북쪽으로 흐른다. 혼동강 동쪽의 경박(鏡泊) 및 오수리강(烏蘇里江)이 그 가장 큰 것이다.
요하는 일명 거류하(巨流河)라고 하며, 장령의 여러 물과 합치는데, 그 근원이 새외(塞外)에서 나오는 것은 상고할 수 없다. 이들 물을 합쳐서 남쪽으로 흐르니, 이른바 요서(遼西)ㆍ요동(遼東)이 이것으로 경계를 삼는다. 성경(盛京)ㆍ흥경(興京)이 모두 요동에 있으며, 동쪽은 봉천부(奉天府)가 되고, 서쪽은 금주(錦州)가 된다. 오늘날 목책(木柵)을 설치했으니, 서쪽은 산해성(山海城 산해관(山海關)을 말함)에 접하고, 비스듬히 동북으로 뻗쳐 있다.
요하 및 북쪽에서 오는 산맥을 넘고, 또 혼동강을 넘으면 몽고(蒙古)의 경계가 되니, 몽고는 호(胡)다. 중국의 북막(北漠)에서부터 동쪽으로 흑룡강 밖에 이르는데, 합하여 48부(部)가 되니, 이른바 청태극(靑太極)ㆍ황태극(黃太極)이 이것이다. 서액라사(西額羅斯)에 사는 것을 합이합(哈爾哈)이라 하고, 동액라사(東厄羅斯)에 사는 것을 대비달자(大鼻㺚子)라 한다고 한다. 《통고(通考)》에 본다면, 실위(室韋)의 9부(部)가 숙신(肅愼)의 북쪽에 있다고 했으니, 지금의 달자(㺚子)가 그 유종(遺種)인 것 같다. 실위의 서쪽 천여 리 되는 곳에 지두우(地豆于)ㆍ오락후(烏洛侯)가 있고, 실위의 북쪽에 구도매(驅度寐) 등 여러 종족(種族)이 있으니, 혹 가깝고 혹 멀지만 요는 모두 지금의 이른바 달자인 것이다. 이제 들으니, 흑룡강과 혼동강 사이에 특별히 애호장군(艾滸將軍)을 두어서 이에 대비한다고 했다.
그 요하에 가까운 것으로는 거란이 가장 강성하다. 글안을 비롯하여 오환(烏桓)ㆍ선비(鮮卑)는 곧 동호(東胡)의 유종으로서 모두 중국의 동북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뒤에 원(元)에 병합되어 몽고로 혼칭되고, 책(柵)이 설치되어 한계가 정하여졌다.
성경(盛京)에서 선창(船廠)ㆍ오랄(烏剌)을 거쳐 영고(靈古)에 이르기까지 1천 1백 30리인데, 그 길이 곧장 도달하지 못하고, 중간에 책(柵)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장령(長嶺)의 북쪽 큰 줄기를 넘어서 비로소 선창에 도달한다. 그 조운(漕運)은 요하(遼河)의 근원에서 이둔하(易屯河)에 이르는 두 물 사이의 백 리 거리에 수로(水路)가 없으므로 거운(車運 수래를 이용한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큰 줄기를 넘게 되니, 또한 책(柵) 밖으로 나가서 육로(陸路)의 북쪽에 있게 된다. 조운은 반드시 물에 말미암는 것이니, 이치상 반드시 이와 같을 것이지만, 분수령에서부터 고로눌(庫魯訥)ㆍ장령에 이르는 사이에 반드시 다소의 통로가 있을 것인데도, 육로를 또한 책 밖으로 쫓아감은 어찌된 것인가? 산세가 남쪽으로 향할수록 더욱 험준해서 그쪽 길에 평이함만 같지 못한 때문일까? 이것은 알 수 없다.
의주에서 성경에 이르기까지 4백 50리, 성경에서 산해관에 이르기까지 8백 70리이니,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연경으로 들어가는 이정(里程)이다. 산해관에서부터 동해에 이르기까지 5천여 리인데, 영고의 동쪽이 이미 3천 리이다. 그 수세를 살핀다면 모두 동북쪽으로 흐르고 있으니, 아마도 바다에 접한 낮고도 평탄한 땅인 것만 같다.
이제 일본 동북의 하이(蝦蛦)도 또한 넓고 평탄하며 비습한 곳으로서 북쪽을 향하여 뻗어서 혹 끊어지기도 하고, 혹 이어지기도 하면서 위로 숙신의 땅에 접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의 동해를 평평한 호수로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호수가 없는 것이다. 그 접해 있는 것이 어느 곳으로 통했는지 알지 못하겠는데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흑룡강(黑龍江) 북쪽에 있다.”고 했다. 오랄(烏喇)은 두만강과의 거리가 7백20리이고, 영고(寧古)는 6백 리에 불과하다고 한다.
국초(國初)에 이만주(李滿住)ㆍ범찰(凡察)의 무리가 모두 강계부(江界府)에 가까이 접근했으니, 만주(滿住)라는 것은 이름이 아니고, 곧 가한(可汗)의 호칭과 같은 것이다. 할아비 아합출(阿哈出) 및 아비 석가노(釋家奴) 때부터 명(明) 나라에서 사성(賜姓)을 받았으니, 이른바 이사성(李思誠)은 곧 아합출이고, 이현충(李顯忠)은 곧 석가노이다. 사성(思誠)의 아들 맹가불화(猛哥不花)와 손자 초만답실리(椒滿答失里)는 많이 우리나라 변경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뒤에 만주(滿住)는 유자광(柳子光)에게 격참(擊斬)되었다. 내 생각으로는, 그 성이 이(李)로 된 것은 우리나라를 인연한 때문이라 본다. 《통고(通考)》에 “금성(金姓) 완안(完顔)은 곧 왕성(王姓)이다. 이때에 고려에 복속(服屬)한 때문이다.” 했으니, 사성의 성이 이(李)로 된 것도 또한 우리나라를 우러러 사모하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이로 인하여 이를 내려준 것이 아니겠는가?
범찰은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의 아들이니. 그 아들 동창(童倉)에게 전했고, 동창은 그 아우 동산(童山)에게 전했으며, 동산은 그 아들 탈라(脫羅)에게 전했다. 그 뒤 누전(累傳)하여 규장(叫塲)ㆍ타실(他失)에 이르렀으니, 천명제(天命帝)는 곧 타실의 아들이라고 한다.
[주-D028] 천명제(天命帝) :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세우고 연호를 천명(天命)으로 했기 때문에 천명제(天命帝)로 일컬어짐.
연산군 9년 계해(1503) 9월 18일(신사)
09-09-18[03] 성준과 이극균이 여진족에게 관직을 제수하여 회유할 것을 청하다
[DCI]ITKC_JT_J0_A09_09A_18A_00030_2005_007_XML DCI복사 URL복사
성준ㆍ이극균이 아뢰기를,
“함경도는 나라의 울타리로써 만일 오진(五鎭)이 없었다면 변방 일이 근심됩니다. 세종조에는 성(城) 밑 야인(野人)들에게 겸사복(兼司僕)을 제수하도록 하였는데, 야인들은 성질이 우직하여 우리 나라 사람들과 같이 간사하지 않으므로, 조정에 들어와서 모시고 싶어 하는 자가 있으면 잡직(雜職)을 제수하도록 하여, 동청례(童淸禮) 같은 자는 위장(衛將) 등직에 제수되어야 하며, 올량합(兀良哈)은 야인 중의 평민이요, 알타리(斡朶里)는 금(金)나라의 후손이며, 청례의 아비 동소로가무(童所老加茂)는 일찍이 선왕조에 공이 있으니, 세종께서 회령진(會寧鎭)을 설치하려면서도 적당한 장소를 얻지 못하매 소로가무가 자진하여 그 집을 철거하고 땅을 바쳤으니, 그 공이 적지 않습니다. 세종께서 그 공을 중히 여겨 예빈시 판사(禮賓寺判事)의 딸에게 장가들게 하였으니, 청례의 외조부는 곧 사족(士族)인데, 어찌 대우가 내외 구별이 있을 것이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이로써 아뢰었는데, 홍문관(弘文館)에서 ‘사람의 낯에 짐승 마음이니, 조정에 모시게 할 수 없다.’고 탄핵하여 일이 그만 중지되었습니다. 세조 때에도 야인이 조정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지금 역시 저들 중의 특출한 자를 뽑아서 관직을 제수한다면, 저들이 반드시 다투어 스스로 따라오며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원전】 13 집 575 면
【분류】 외교-야(野)
성종 24년 계축(1493) 2월 4일(기해)
24-02-04[02] 올량합ㆍ알타리의 야인이 귀순할 뜻을 밝힌 글을 보내 오다
[DCI]ITKC_JT_I0_A24_02A_04A_00020_2005_036_XML DCI복사 URL복사
삼위(三衛) 야인(野人)이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대왕(大王) 건주위(建州衛) 좌위(左衛)ㆍ우위(右衛)의 보하토 도독(甫何吐都督)ㆍ나하 도독(羅下都督)ㆍ토로 도독(吐老都督)ㆍ삼위 삼도독(三衛三都督) 아거하(阿車下) 달한 도독(達罕都督)은 대황제(大皇帝)께 〈귀순하기를〉 마음을 기울여 바랐습니다. 그뒤에 주합인(朱哈人)이 작적(作賊)하였음을 삼도독(三都督)은 알지 못하였으며, 건주위(建州衛) 호라위 도독(胡羅衛都督) 아들이 작적하였으므로, 우위ㆍ좌위의 보하토ㆍ나하ㆍ토로ㆍ삼도독은 숙(叔)ㆍ백숙(伯叔)ㆍ제(弟)인 거노토왕(巨奴吐王)ㆍ동약사(童若沙)ㆍ어마치(於馬赤)를 보냈고, 왕시리여(王時里汝)ㆍ거거(巨車)ㆍ보하토의 동자(童子)ㆍ달한의 아들 기응거(其應巨)ㆍ노낭시(奴郞時)ㆍ나하(羅何)ㆍ어마치(於馬赤) 등을 보내었으며, 삼도독이 오마하(吾馬下) 땅에 있는 나하 도독의 아비 옹거 도독(雍車都督)을 보내었습니다. 황제(皇帝)시여! 황제께서는 때때로 온순하고 공순하며 부지런하심을 금황제(金皇帝)는 알고 있습니다. 황제시여! 황제께서는 때때로 아소서. 옹주(雍朱)ㆍ중거(衆巨)ㆍ진타리(陳他里)ㆍ비거(非巨)ㆍ나운토(羅雲吐)ㆍ반지거(盤知巨)ㆍ소라합(所羅哈) 등 삼위인(三衛人)은 나하 도독에 앞서 보내었고 만포(滿浦) 땅에는 동약사(童若沙) 등 명인(名人)이 있으나, 보내었던 7인은 대도(大都) 밖에서 죽었습니다. 지금 만포 땅이 대도(大都)에 있음을 금황제는 알고 있습니다. 나하 도독의 아들 나온거(羅溫車)는 글로써 적습니다.”
하였는데, 명하여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議政府)에 의논하게 하였다. 윤필상(尹弼商)은 의논하기를,
“이번 이 서계(書契)의 내용은 비록 자세히 알지는 못하겠으나, 대개는 귀순(歸順)하고자 하여 사람을 보내어 알리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하고, 이극배(李克培)ㆍ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해사(該司)에 회부시켜 의논해서 아뢰게 한 다음에 다시 의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허종(許琮)은 의논하기를,
“서계의 내용은 대의(大意)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만, 귀순할 뜻을 밝힌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앞서 하유(下諭)에 의하여 추장(酋長)이 직접 오기를 기다려서 귀순을 들어주겠다고 개유(開諭)함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정문형(鄭文炯)은 의논하기를,
“이번의 서계는 분명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납관(納款)의 뜻에 지나지 않습니다. 변장(邊將)에게 말하게 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성심(誠心)으로 귀순(歸順)한다면 우리 나라에서 반드시 거절하지 않을 것이니, 영안도(永安道)의 길로 해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한다.’라고 이렇게 말하여 그들의 정세(情勢)를 관찰(觀察)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유지(柳輊)는 의논하기를,
“이번에 서계를 보건대 글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우나, 대개 귀순할 뜻이고, 또한 자제(子弟)를 보내어 화호(和好)를 맺겠다는 뜻이 있습니다. 신(臣)의 생각으로는, 오는 자는 거절하지 않고 포장(褒奬)을 거듭 더하여 그들의 구청(求請)하는 바를 들어주고, 만약 상경(上京)하기를 청하면 영안도의 길로 오도록 허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허종의 의논을 따라 드디어 서북면 도원수(西北面都元帥) 이극균(李克均)에게 하서(下書)하기를,
“이번에 삼위(三衛)의 서계(書契)를 보건대 앞서 서계의 내용과 같다. 만약 귀순하고자 한다면 추장이 직접 오라고 앞서 하유(下諭)대로 대답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12 집 272 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주-D001] 삼위(三衛) :
올량합(兀良哈)의 건주 본위(建州本衛)와 알타리(斡朶里)의 건주 좌위(建州左衛)ㆍ건주 우위(建州右衛)를 일컬음. 건주 삼위(建州三衛).
[주-D002] 납관(納款) :
성심으로 복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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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새기략
백두산고〔白頭山考〕
흑룡강은 흑룡강성의 동쪽에 있다. 옛 이름은 흑수(黑水)이며, 완수(完水), 실건하(室建河), 알난하(斡難河)라고도 한다. 객이객(喀爾喀 할하)의 북쪽 경계인 긍특산(肯特山)에서 발원하니, 지역민들은 오눈하(敖嫩河)라고 한다. 여러 물줄기를 만나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니포초성(尼布楚城 네르친스크)을 지나 남쪽을 향해 내지(內地)로 들어간다. 또 동쪽에 고륜호(枯淪湖)가 있는데, 거기서 흘러나온 액이고납하(額爾古納河)가 서남쪽에서 와서 만나 흐르다가, 아극살성(雅克薩城) 남쪽에 이르러 꺾여 동남쪽으로 흐른다. 흑룡강성 북쪽 90리에 이르러 정계리강(淨溪里江)의 물이 북쪽에서 흘러들어 오며, 흑룡강성을 돌아 동남쪽으로 흐른다. 북쪽에서 온 우만하(牛滿河)를 남쪽에서 받아들이고, 동쪽으로 흐르다가 혼동강과 만나 이로부터 합류한다. 또 동쪽으로 가다가 오소리강이 남쪽에서 흘러들어 오고, 동북쪽으로 꺾여 혁림하(革林河), 형곤하(亨滚河) 등의 여러 하천을 받아들이고 바다로 들어간다. 강희 22년(1683, 숙종9)에 장군(將軍)과 부도통(副都統)을 설치하여 성을 쌓고 지키게 하였다.
흑룡강은 백두산 북쪽에서 발원하여 퍅개(愎介) 땅을 거쳐 혼동강과 합류해 바다로 들어간다. 강의 좌우에 허전인(許全人)이 산다. 허전인은 까마귀 고기, 사슴 몸통, 소 다리를 먹는다. 퍅개인도 고기를 먹으며, 개 수레[狗子車]를 짐을 싣고 끄는 데 사용한다고 한다.
두만강은 백두산 남쪽 갑산의 천평에서 발원한다. 동쪽으로 흘러 어윤강(魚潤江)이 되며, 우리 육진과 저쪽 땅을 돌아 흐른다. 허항령 북동쪽의 물과 후춘(後春) 남산(南山)의 물이 모두 이 강에 모인다. 남북으로 수삼백 리이며, 동서로 6, 7백 리이다. 경흥(慶興) 녹둔도(鹿屯島)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현재 강의 남쪽은 우리 땅에 속하고, 북쪽은 영고탑에 속한다.
두만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을 슬해(瑟海)라고 부른다. 무이보(撫夷堡)의 서봉대(西烽臺)에 올라 바라보면 청흑색의 물빛이 하늘과 맞닿아 있다.
두만강에서 흑룡강까지, 남해(南海)로 가는 거리는 570여 리이다. 남해는, 저들이 지칭하는 남해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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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수(黑水)
《구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는 남쪽으로 신라와 서로 접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월희말갈(越喜靺鞨)에서 동북쪽으로는 흑수말갈(黑水靺鞨)에까지 이른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흑룡강(黑龍江)은 흑룡강성(黑龍江城)의 동쪽에 있으며, 옛 이름은 흑수(黑水)이고, 완수(完水)라고도 한다. 또 실건하(室建河)라고도 하고, 알난하(斡難河)라고도 한다. 그 근원은 객이객(喀爾喀) 북쪽 경계의 긍특산(肯特山)에서 나오는데, 그 지방 토착인들은 오란하(敖嬾河)라고 한다. 여러 개의 작은 물을 모아서 동북쪽으로 흘러 이포초성(泥布楚城)의 남쪽을 지나 내지(內地)로 들어와 흘러 아극살성(雅克薩城)의 남쪽을 지난 다음, 꺾어져서 동남쪽으로 흘러 흑룡강성을 감돈다. 여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과 합류한다. 《북사(北史)》 오락후국열전(烏洛侯國列傳)을 보면, “오락후국의 서북쪽에 완수가 있는데, 동북쪽으로 흘러 난수(難水)와 합류한다.” 하였고, 《구당서》 실위열전(室韋列傳)을 보면, “대산(大山)의 북쪽에 대실위부락(大室韋部落)이 있으며, 그 부락의 곁에는 실건하가 있다. 이 물의 근원은 돌궐(突厥)의 동북쪽 경계인 구륜박(俱倫泊)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나하(那河), 홀한하(忽汗河)와 합류하고, 여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남흑수말갈(南黑水靺鞨)의 북쪽과 북흑수말갈(北黑水靺鞨)의 남쪽을 지난 다음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금사》 지리지를 보면, “조주(肇州) 시흥현(始興縣)에 흑룡강이 있다.” 하였고, 《원사》 태조기(太祖紀)를 보면, “1년에 황제가 알난하의 근원지에서 황제위에 올랐다.” 하였고, 《대명일통지》를 보면, “흑룡강은 개원성(開原城)에서 북쪽으로 2500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북산(北山)에서 나오는데, 흑수말갈이 예전에 이곳에 거주하였다. 남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흑수라는 명칭은 남북조(南北朝) 시대 때 시작되었으며, 흑룡강이란 이름은 《금사》에서 나온다. 그 상원(上源)은 《북사》에 나오는 완수이며, 《구당서》에 나오는 실건하이다. 지금의 오란하가 정원(正源)인데, 오란하는 바로 《원사》에 나오는 알난하(斡難河)가 음이 변한 것이다.
○ 약수(弱水)
《진서(晉書)》 숙신씨열전(肅愼氏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숙신씨는 일명 읍루(挹婁)라고도 하는데, 불함산(不咸山)의 북쪽에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구만한국(寇漫汗國)과 접해 있으며, 북쪽은 약수(弱水)에까지 닿아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읍루는 바로 말갈인데, 말갈은 북쪽으로 흑수 지방까지 닿아 있다. 그런즉 약수는 흑수인 듯하다. 그리고 《후한서》에는 이르기를, “부여(夫餘)의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하였는데, 역시 이 물을 가리킨다.
이상은 경계 바깥에 있는 수(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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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고〔白頭山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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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은 무산부(茂山府) 서쪽 306리에 있다. 옛 이름은 불함산(不咸山)이다. 중국 사람은 장백(長白), 동방 사람은 백두(白頭)라고 부르니, 산이 아주 높고 사계절 항상 얼음과 눈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산해경(山海經)》에 “넓은 황야 가운데 산이 있는데, 불함산이라고 하며,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라고 하였다.
《진서(晉書)》에 “숙신씨가 불함산 북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불함산에 대해 살펴보건대, 우리나라 역사[東史]에 따르면 북옥저(北沃沮)와 말갈(靺鞨)이 모두 불함산 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우리나라 경내에 불함산이 있었던 듯하나, 어느 산이 옛 불함산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백두산을 불함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근거에 따른 것인가.
《위서(魏書)》에 “물길국(勿吉國)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나라 말로는 ‘태백(太白)’이다. 호랑이, 표범, 곰, 이리 등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이 이 산을 용변으로 더럽힐 수 없다 하여, 산을 지나가는 자들은 모두 용기에 담아서 간다.”라고 하였다.
《요지(遼志)》에 “장백산이 냉산(冷山) 동남쪽 1000여 리에 있다. 그 산 속의 금수들은 모두 하얗다. 사람이 감히 들어가지 않는데, 그곳을 더럽혀 뱀에게 물리는 해를 입을까 두려워서이다.”라고 하였다.
《금사(金史)》 〈세기(世紀)〉에 “그 북쪽으로 혼동강(混同江)과 장백산(長白山)이 있다. 혼동강은 흑룡강(黑龍江)이라고도 한다. 이른바 ‘백산(白山)과 흑수(黑水)’가 바로 이것이다. 대정(大定) 12년(1172)에 장백산신(長白山神)을 흥국영응왕(興國靈應王)에 봉하고, 그 산 북쪽에 묘우(廟宇)를 세웠다. 명창(明昌) 연간에 다시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에 책봉하였다.”라고 하였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장백산은 삼만위(三萬衛) 동북쪽 1000여 리에 있으니, 옛 회령부(會寧府)의 남쪽 60리이다. 너비는 1000리, 높이는 200리이다. 그 정상에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며,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혼동강이 되며, 동쪽으로 흘러 아야고하(阿也苦河)가 된다.”라고 하였고, 《성경통지(盛京通志)》에 “장백산은 곧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隣)이니, 선창(船廠) 동남쪽 1300여 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명통지(明統志)》에 “동쪽으로 흘러 아야고하가 된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살펴보건대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압록강,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토문강(土門江), 북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혼동강이라고 하니, 아야고하라는 이름의 강은 없다. 옛날과 지금의 호칭이 다르기 때문이다.
《청일통지(淸一統志)》에 “장백산은 길림오라성(吉林烏喇城) 동남쪽에 있으니 너비가 1000여 리에 이른다. 동쪽으로 영고탑(寧古塔)으로부터 서쪽으로 봉천부(奉天府)에 이르기까지 여러 산이 모두 이 산에서 발맥(發脈)한다. 산 정상에 못이 있는데, 압록, 혼동, 토문 세 강의 발원지이다. 금(金)나라 때 세운 묘우는 훼손되었고, 본조(本朝)에서 높여 장백산지신(長白山之神)으로 삼고 성 서남쪽에 있는 온덕항산(溫德恒山)에서 망제(望祭)를 지낸다. 강희(康煕) 17년(1678)에 대신(大臣) 각라오목눌(覺羅吳木訥) 등을 보내 산에 올라 형세를 살피도록 하였다. 그들이 산에 가서 산록 한 곳을 보니 사방 둘레로는 숲이 빽빽한데 그 가운데 둥글고 평평한 곳에서는 초목이 나지 않았다. 숲을 나와 10리쯤 가니 향기 나는 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노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산 중턱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쳐다볼 수가 없었는데, 여러 대신이 꿇어앉아 황제의 칙지를 읽자 바로 구름과 안개가 걷혀 산의 형세가 훤히 드러났다. 오를 만한 산길로 반쯤 갔을 때 섬돌 같은 대[石砌臺]가 있었는데, 평평해서 사방을 바라보기 좋았다. 그곳에서 보니 산 정상은 둥그런 형상이고 눈이 쌓여 하얬다. 정상에 올라 보니, 다섯 봉우리가 빙 둘러 솟아 있는 것이 마치 관아 같고, 남쪽의 한 봉우리가 조금 낮아 마치 문 같았다. 가운데의 못은 아득히 먼데, 산벼랑과의 거리가 50길쯤 되고, 둘레는 40여 리쯤 되었다. 산의 사방에서 수많은 물줄기가 세차게 흐르니, 바로 큰 세 강의 발원이다. 강희 23년(1684)에 주방협령(駐防協領) 늑출(勒出) 등을 다시 보내 둘러보고 산의 형세를 살피도록 하였는데, 그 너비와 길이는 《명통지》에 쓰인 바와 대략 같았다. 그 정상에는 별다른 나무가 살지 않고 흰 꽃을 피운 풀들이 많았다. 남쪽 산자락이 굽이굽이 뻗어 가다가 두 줄기로 갈라지는데, 그중 서남쪽 방향의 산줄기는 동쪽으로 압록강을, 서쪽으로 통가강(通加江)을 끼었으며, 그 산줄기가 끝나는 곳에서 두 강이 만난다. 다른 한 줄기는 산의 서쪽을 돌아 북쪽으로 수백 리를 뻗었는데 여러 물줄기에 의해 갈라지므로 구지(舊志)에서는 통틀어 분수령(分水嶺)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서쪽으로 흥경(興京)에 이르기까지 나무가 우거지고 숲이 깊어 하늘과 해를 가리는 곳을 두고 지역민은 납록와집(納綠窩集)이라고 부른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흥경문(興京門)으로 들어가 개운산(開運山)을 이룬다. 납록와집에서 북쪽으로 한 산줄기가 40여 리 뻗었는데, 지역민은 이를 가이민주돈(歌爾民朱敦)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다시 서쪽 방향으로 영액변문(英額邊門)으로 들어가 천주(天柱)와 융업(隆業) 두 산을 이룬다. 산줄기가 구불구불 뻗어 있어 지역에 따라 산(山)이라고도 하고 영(嶺)이라고도 하여 그 이름은 같지 않으나, 모두 이 장백산에서 갈라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통지》에는 “선창 동남쪽 1300여 리에 있다.”라고 하였으나, 지금 살펴보건대 이 산은 실제로 주(州 길림오라성)의 동남쪽 600리에 있다.주-D009
혹 개마대산(蓋馬大山)이라고도 하니, 이는 오늘날의 백두산이다.
백두산은 동북쪽에 웅장하게 솟아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하늘로 높이 치솟아 있고, 천 리가 하나같이 푸르다. 멀리서 바라보면 정상이 마치 높은 상에 흰 항아리를 엎어 놓은 것 같다. 대택(大澤 천지)의 동쪽에는 돌사자가 있는데, 색이 누렇고 꼬리와 갈기가 움직이는 듯하다. 중국 사람들이 망천후(望天犼)라고 부른다.
산세(山勢)는 경태방(庚兌方 서쪽)으로부터 오고 산체(山體)는 남쪽을 등지고 북쪽을 바라본다. 그 북쪽은 숙신(肅愼), 남쪽은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이다. 그 동남쪽은 평탄하여 미미하게 맥이 있는데 세 번 웅크리고 산줄기를 이루어 손사방(巽巳方 동남쪽)으로 내려와 분수령이 되니, 곧 삼한(三韓) 산천(山川)의 시조이다.
백두산 정상은 가운데가 움푹 꺼져 못을 이루었는데, 둘레는 4, 5십 리이고 깊이는 100여 길이다. 비가 와도 불어나지 않고 비가 안 와도 줄지 않으며, 푸른 파도가 도도하게 일렁이니 사람들이 감히 다가가 보지 못한다. 정상의 사방에 봉우리들이 각각 우뚝 서 있는데, 정오(正午 남쪽)의 한 줄기가 못 안으로 쑥 들어왔다가 곧장 수구(水口)로 향한다. 못을 따라 둘레를 헤아려 보면 1만 2000보(步)이고, 그 저변에서 봉우리까지를 세어 보면 1800보이며, 수구의 동서쪽 너비는 150보이고, 남쪽 산줄기가 들어온 길이는 300여 보이며, 상봉으로부터 사방 봉우리의 둘레를 모두 계산하면 8, 9십 리쯤 된다. 북쪽으로 툭 터져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혼동강이 되고, 동쪽으로 한 물줄기가 겹겹의 봉우리와 암석 사이로 숨어 흘러 비로소 토문강이 되니, 곧 두만강의 상류이다.
대택의 물은 신령한 원기(元氣)가 모여 이루어졌는데 수구가 북쪽으로 트여 있어 경박(鏡泊)으로 흘러가며, 대택 사방 봉우리의 큰 맥은 모두 저들의 소유이고 산 뒤로 면면히 이어진 작은 자락이 곧 우리의 소유이니, 저들은 온전하게 얻었고 우리는 치우치게 얻었다 하겠다. 완안씨(完顔氏 금나라) 이래로 흑수와 백산 사이에서 공업이 나타나지 않음이 없었으니, 저들이 번갈아 중국 땅의 주인이 된 것은 이 때문인가……………………….
흑룡강은 흑룡강성의 동쪽에 있다. 옛 이름은 흑수(黑水)이며, 완수(完水), 실건하(室建河), 알난하(斡難河)라고도 한다. 객이객(喀爾喀 할하)의 북쪽 경계인 긍특산(肯特山)에서 발원하니, 지역민들은 오눈하(敖嫩河)라고 한다. 여러 물줄기를 만나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니포초성(尼布楚城 네르친스크)을 지나 남쪽을 향해 내지(內地)로 들어간다. 또 동쪽에 고륜호(枯淪湖)가 있는데, 거기서 흘러나온 액이고납하(額爾古納河)가 서남쪽에서 와서 만나 흐르다가, 아극살성(雅克薩城) 남쪽에 이르러 꺾여 동남쪽으로 흐른다. 흑룡강성 북쪽 90리에 이르러 정계리강(淨溪里江)의 물이 북쪽에서 흘러들어 오며, 흑룡강성을 돌아 동남쪽으로 흐른다. 북쪽에서 온 우만하(牛滿河)를 남쪽에서 받아들이고, 동쪽으로 흐르다가 혼동강과 만나 이로부터 합류한다. 또 동쪽으로 가다가 오소리강이 남쪽에서 흘러들어 오고, 동북쪽으로 꺾여 혁림하(革林河), 형곤하(亨滚河) 등의 여러 하천을 받아들이고 바다로 들어간다. 강희 22년(1683, 숙종9)에 장군(將軍)과 부도통(副都統)을 설치하여 성을 쌓고 지키게 하였다.
흑룡강은 백두산 북쪽에서 발원하여 퍅개(愎介) 땅을 거쳐 혼동강과 합류해 바다로 들어간다. 강의 좌우에 허전인(許全人)이 산다. 허전인은 까마귀 고기, 사슴 몸통, 소 다리를 먹는다. 퍅개인도 고기를 먹으며, 개 수레[狗子車]를 짐을 싣고 끄는 데 사용한다고 한다.
두만강은 백두산 남쪽 갑산의 천평에서 발원한다. 동쪽으로 흘러 어윤강(魚潤江)이 되며, 우리 육진과 저쪽 땅을 돌아 흐른다. 허항령 북동쪽의 물과 후춘(後春) 남산(南山)의 물이 모두 이 강에 모인다. 남북으로 수삼백 리이며, 동서로 6, 7백 리이다. 경흥(慶興) 녹둔도(鹿屯島)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현재 강의 남쪽은 우리 땅에 속하고, 북쪽은 영고탑에 속한다.
두만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을 슬해(瑟海)라고 부른다. 무이보(撫夷堡)의 서봉대(西烽臺)에 올라 바라보면 청흑색의 물빛이 하늘과 맞닿아 있다.
두만강에서 흑룡강까지, 남해(南海)로 가는 거리는 570여 리이다. 남해는, 저들이 지칭하는 남해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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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宗純皇帝實錄 卷之一千四百二十二 乾隆五十八年 二月 十四日 1번째기사 1793년(청 실록)
원본 보기
○丁丑。諭軍機大臣等。據明亮奏。查明尼布楚城。雅克薩城原委一摺。該處境地。既經松鄂托。與俄羅斯使臣。議以雅克薩城內屬。尼布楚城屬俄羅斯。並令將向住雅克薩之俄羅斯。盡徹回伊察罕汗地方。現在雅克薩。曾否設卡撥人駐守。著傳諭明亮等。查明遇便奏聞。
朔方備乘 卷 第七
2014.01.16.
한하여 기록하였음 (*는 지명임) *黑龍江城 北極高五十度 偏東十度五十八分 *尼布楚城 北極高五十一度四十八分 偏西十七分(以上乾隆二十二年奏準) *克嚕倫河巴爾城 北極...
송사전 몽고열전(蒙古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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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흥(祥興 위왕(衛王)의 연호) 1년(1278, 지원 15), 제가 애산(崖山)에 머물러 있었다. 장홍범(張弘範)이 조양(潮陽)으로 진군하여 문천상(文天祥)을 붙잡아다 대도(大都)로 송치하였다. 백이(伯夷)를 소의청혜공(昭義淸惠公)으로, 숙제(叔齊)를 숭양인혜공(崇讓仁惠公)으로 추봉하고, 정호(程顥)를 예국공(豫國公)으로 가봉하였다. 양련진가(楊璉眞珈)가 소흥(紹興)ㆍ제제(諸帝)의 능묘 및 대신의 무덤을 무려 1백 1개소나 파헤치고 금은 보석을 취해 갔다. 염희헌(廉希憲)을 불러 중서성(中書省)에 들어오게 하니 병이 위독하다 칭탁하고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천하의 일이 진실로 견제받는 데가 없다면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의 정치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장홍범이 애산(崖山)에 진군하자 육수부(陸秀夫)가 제(帝)를 업고 바다에 빠지니, 후궁과 제신들 가운데도 따라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 양 태후(楊太后)도 다른 배에 있다가 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장세걸(張世傑)이 시체를 건져 바닷가에 장사하고 바다에 빠져 죽으니 송(宋)의 국통은 끊어졌다. 홀필렬(忽必烈)이 통일 이전의 연호를 중통(中統)으로 개원하니 무릇 4년이다. 지원(至元) 16년 2월에 비로소 천하를 통일하였다.
철목진(鐵木眞)은 사막 동북 알난하(斡難河)에서 처음 일어나고 와활태(窩闊台)는 사막 서쪽 화림(和林)에서 즉위하니, 본디 당(唐) 나라 때 회골(回鶻)의 비가사한(毗伽司汗)의 옛 성을 회동의 장소로 삼아서, 처음에는 원창로(元昌路)를 세웠고, 나중에 화림사(和林司)로 고쳐 운영하다가, 홀필렬이 연경(燕京)으로 천도하여 대도(大都)라고 부르면서부터는 화림 선위사(和林宣慰司)로 개설하여 늘 훈구 왕공으로 통할하게 하였다. 여기서 북으로 3천 리를 가면 아지리해자(阿只里海子)이고, 또 5백 리를 가면 겸주(謙州)ㆍ익란주(益蘭州)이며, 다시 1천 리를 가면 대택(大澤)에 이른다.
상도(上都)는 환주(桓州) 동쪽에 있는데, 온 지역이 모두 소나무여서 천리송림(千里松林)으로도 불린다. 흘필렬이 개평부(開平府)로 일컫다가 이윽고 상도(上都)로 올려 일찍이 그곳에서 피서하였고, 궁궐과 시사(市肆)의 웅장함은 대도와 대등하다. 그리고 동경(東京)은 곧 요양(遼陽)인데, 홀필렬이 요양 등 각 곳에 행성(行省)을 개설하여 통솔한 노(路)가 일곱이었다.
한대(漢代) 이래로 판도(版圖)에 소속된 것이 혼동강(混同江) 이동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는데, 요(遼)와 금(金)이 창흥하면서 비로소 널리 땅을 개척하였고, 원(元)에 와서는 더 멀리 북으로 음산(陰山)을 넘고, 서로 유사(流沙)까지 닿고, 동으로 요좌(遼左)를 다 차지하고, 남으로 해표(海表)를 넘어가서 그 도리(道里)는 숫자로 셀 수가 없다.
병제(兵制)는, 1만 부(夫)의 장은 만호(萬戶), 그 다음은 천호(千戶), 백호(百戶)의 순이다. 홀필렬이 내직으로는 오위(五衛)를 세워 숙위(宿衛)를 총괄케 하고, 외직으로는 만호 밑에 총관(總管)을 두고, 천호 밑에 총파(總把)를 두고, 백호 밑에 탄압(彈壓)을 두어 다시 추밀원(樞密院)으로 총괄케 하였다. 한 집안에서 15세 이상 70세 이하의 남자는 중과(衆寡)를 막론하고 모두 군대에 편입시켜 10명씩 1패(牌)로 삼았으며, 어린아이가 조금 자라면 다시 입적시켜 점정군(漸丁軍)이라 불렀다.
관제(官制)는 철목진(鐵木眞) 이하 관계(官階)가 매우 간략하다. 단사관(斷事官)이 가장 중임인데 직위는 삼공(三公)의 위이다. 승상(丞相)은 대필도적(大必闍赤)이라고 부르는데 병권을 장악했을 때는 좌우만호(左右萬戶)라 한다. 그 뒤에 금의 제도를 모방하여 행성(行省) 및 원수(元帥)와 선무사(宣撫使)를 두었다.
홀필렬이 관제를 제정할 때 중서성(中書省)은 정무(政務)를 총괄하고, 추밀원(樞密院)은 병권을 장악하고, 어사대(御史臺)는 출척(黜陟)을 맡게 하였으며, 외직으로는 행성(行省)ㆍ행대(行臺)ㆍ선위사(宣慰司)ㆍ염방사(廉訪司)가 있고, 목민관(牧民官)으로는 노(路)ㆍ부(府)ㆍ주(州)ㆍ현(縣)의 달로화적(達魯花赤)이 있는데 몽고 사람에게는 장(長)을, 남쪽 사람에게는 부(副)를 맡겼다.
대(代)마다 배천(拜天)의 예를 행하고, 의관과 제기는 순박함을 숭상했다. 보본반시(報本反始)의 마음은 자연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라, 몽가(蒙哥 헌종의 이름)가 처음 면복(冕腹)을 갖추고 하늘에 제사하고 종묘(宗廟)의 제사는 희생을 놓고 말젖을 드리며, 무격(巫覡)이 본국 말로 누대의 제와 후의 휘를 불러 고유한다. 그 후 홀필렬이 비로소 제복과 제기를 마련하고 희생은 말ㆍ소 각 한 마리, 염소ㆍ사슴ㆍ멧돼지ㆍ거위 각 일곱 마리를 썼다.
제왕이 죽으면 널을 황남목(黃楠木)을 쓰고 통나무를 두 쪽으로 쪼개어 주검 모양처럼 판다. 염(殮)에는 초피(貂皮)의 속가죽으로 된 웃옷[襖]과 가죽으로 된 모자ㆍ신ㆍ버선을 쓰고, 또 금으로 된 술병ㆍ술잔ㆍ주발ㆍ쟁반 한 개씩과 수저 각 한 벌을 넣으며, 염이 끝나면 황금으로 네 가닥의 테를 만들어 묶는다. 국초에는 모든 관복을 몽고 풍속대로 따랐고, 홀필렬이 한(漢)ㆍ당(唐)ㆍ송(宋)ㆍ금(金)의 제도를 취했다. 제복(祭服)ㆍ공복(公服)ㆍ질손(質孫)을 만들었다. 질손(質孫)은 한어로 일색복(一色服)인데 궁내의 큰 잔치가 있을 때면 입고, 계절에 따라 똑같지는 않으나 정해진 제도는 없으며, 훈척 대신(勳戚大臣) 및 근시(近侍)들은 하사해야 입는다. 그리고 아래로 악공(樂工)ㆍ위사(衛士)까지도 모두 제 옷이 있어서 상하가 일치하지는 않으나 이를 통틀어 질손이라 한다.
철목진(鐵木眞)은 하악(夏樂)을 쓰고, 와활태(窩闊台)는 금악(金樂)을 썼으며, 홀필렬(忽必烈)이 비로소 대성악(大成樂)을 제정하였다. 국초에는 오로지 금의 법을 썼는데 사람을 많이 다치고 너무 가혹하다 하여, 홀필렬이 번거롭고 가혹한 조항은 제외하고 가벼운 전례만 찾아 썼다.
다음과 같이 논한다.
몽고가 북적(北狄)으로서 처음 일어날 당시에는 너무 하찮았기 때문에 달단(韃靼)에 부속되었는데, 철목진이 저 멀리 사막 밖에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서 하(夏)를 무찌르고, 금(金)을 내치고, 서역(西域)을 소탕하였고 와활태(窩闊台)가 10로에 사명을 펴 부세를 정하고 선비를 높여 주었으며, 관후한 정치와 검약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내마진씨(乃馬眞氏)가 귀유(貴由)의 명을 따르지 않음으로 해서 야율초재(耶律楚材)는 분통이 터져 죽기까지 하였으며, 귀유가 일찍 죽고 나서는 사뙨 아내가 칭제(稱制)하여 그 계통이 끊어질 뻔하였다. 그러다가 뭇 신하들이 몽가(蒙哥)를 추대하여 서남(西南)으로 넓은 국경을 개척하여 중국의 영토까지 침입하였으며, 그 뒤 홀필렬이 큰 포부를 가지고 온 천하를 통일하였다.
아! 삼대(三代) 이래로 이적(夷狄)이 중국을 침략은 하였어도 중국에 들어와서 제 노릇을 한 자는 없었으나, 호원(胡元)은 비로소 제 노릇을 하였다. 예로부터 멸망하지 않은 나라는 없지만 그래도 중국의 정통만은 끊어진 적이 없었는데, 오제(五帝)ㆍ삼왕(三王)께서 물려준 중국이 끝내 제유(諸儒)의 도학(道學)이 크게 발전되던 그 시대에 멸망되고 말았으니, 이것은 만고에 없었던 일대 변혁이다. 슬프다!
각주정보 (2)
번호 주석명 주석내용 서명
1 알난하(斡難河) 오랑캐 땅의 이름이다. 그 땅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나, 원(元)의 철목진(鐵木眞)이 처음으로 알난하에서 제위(帝位)에 나아갔다고 하였으므로 인용한 말로, 즉 청(淸) 나라를 가리킨
오논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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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난하에서 넘어옴)
오논강 전경
오논강(몽골어: Онон гол, ᠥᠨᠥᠨ
ᠭᠣᠣᠯ 오논 요울, 러시아어: Онон)은 러시아와 몽골을 흐르는 강으로 유역 길이는 818 km, 유역 면적은 94,010 sq. km이다. 헨티산맥의 동쪽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인고다강과 합류하여 실카강을 이룬다.
칭기즈 칸이 해당 강 부근에서 태어나고 자랐다.[1]
또한 미디어에 소개된 곳은 EBS 1TV의 《세계테마기행》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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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제30권 잡편 / 변새
변새
고려가 처음으로 여진을 평정하고 국경을 개척하여 점차 넓혀서 철령을 경계로 삼았다. 예종 때에 이르러 비록 9성을 설치하였으나 점령하자마자 곧바로 잃었는데, 우리 태조(太祖)가 북쪽 변방을 평정하고 공주(孔州)ㆍ경주(鏡州)ㆍ길주(吉州)ㆍ단주(端州)ㆍ청주(靑州)ㆍ홍주(洪州)ㆍ함주(咸州) 등 7주를 설치하였다.
태조 7년(1398)에 알목하(斡木河)는 사실상 국조(國祖)의 왕업이 이루어진 기초가 되는 곳이라 하여 경원부(慶源府)를 설치하였는데, 뒤에 여진족에게 빼앗겼다. 태종 9년(1409)에 관부(官府)를 소다로(蘇多老)로 옮겼는데 이듬해에 여진족이 또다시 침략해 오므로 이 지역의 백성들을 경성(鏡城)에 이주시켜 그 땅을 비워 두고, 또 관부를 부거(富居)로 옮겼으며 석막(石幕)에 영북진(寧北鎭)을 증설하여 요새로 삼았다. 알목하는 뒤에 동맹가첩목아(童孟哥帖木兒)에게 점령당했는데, 올적합(兀狄哈)이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세종 16년(1434)에 김종서(金宗瑞)를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로 삼아 공주(孔州)와 경주(鏡州)의 옛 땅을 수복하게 하였는데, 김종서가 명을 받은 지 3년에 시의(時議)가 불편함을 다투어 쟁론하며 비난하는 자들의 글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이에 김종서는 “용성(龍城)이 견고하다 하지만 산천의 요새가 없으니 실로 사면으로 침략을 받는 지역이며 부거(富居)와 석막(石幕)도 모두 국경이 될 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러니 적이 멸망한 이 시기에 성읍(城邑)을 배치하여 국경을 다시 튼튼하게 하는 것이 만세를 위한 이로움입니다. 더구나 조종(祖宗)의 옛 강토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고 축성의 편의함에 대해 수천 자의 소(疏)를 올렸다. 세종이 이 계책을 훌륭하게 여겨서 변방 방어의 일을 전적으로 김종서에게 맡기고, 영북진을 백안수소(伯顔愁所)로 옮겼다.
알목하의 서북쪽은 적들이 왕래하는 요충지에 해당하며 알타리(斡朶里)의 유족(遺族)이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에 큰 진을 설치하여 북쪽 관문을 방어하고, 회질가(會叱家)에 경원부(慶源府)를 또다시 설치하였으며, 공주의 옛 읍성을 증축하여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았다. 큰 진에는 5품관 여직(勵直)을 두고, 영북진과 소다로에는 새내(塞內)의 백성 각각 1100호를 이주시키되 호수(戶數)가 부족한 경우에는 경상ㆍ전라ㆍ충청ㆍ강원에서 400호씩 이주시켜 600여 리의 땅을 개척하였다.
세종 15년(1433)에 상이 최윤덕(崔潤德)을 보내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홀라온(忽剌溫)을 치게 하였는데, 참수(斬首)하고 포로로 잡은 것이 400명이었다. 19년(1437)에 다시 이천(李蕆)에게 새상(塞上 평안도 지역)의 병력 3000명을 동원하여 파저강(婆猪江) 유역에 있는 여진 잡종(雜種)을 치게 하였는데, 그들의 여막과 쌓아둔 재물을 모두 불태웠으며 참수하고 포로로 잡은 것이 100여 명이었다. 세종은 김종서를 매우 존중하고 총애하여 황보인(皇甫仁)과 함께 정승으로 삼았는데, 노릉(魯陵 단종(端宗)) 2년(1454) 정사(靖社) 때에 죽음을 당하였다.
알목하는 바로 두만강 남쪽에 있다. 오랑캐 말인 알목하는 오음회(吾音會)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회령부이다. 회질가ㆍ백안수소ㆍ소다로는 옛 공주의 땅인데, 회질가는 지금의 경원부이며 경원의 옛 유적지에 소다로의 옛 군영(軍營) 터가 있다. 석막과 부거는 부령(富寧)의 옛 고을 이름이며, 석막은 지금의 부령부이고, 용성(龍城)은 옛 경주의 북쪽 경계이며, 영북진(寧北鎭)은 지금의 경성부(鏡城府)이다.
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 1월 7일 丙申 2번째기사 1427년 명 선덕(宣德) 2년
알타리의 지휘 권두가 배사하다
알타리(斡朶里)의 지휘 권두(權豆)가 배사(拜辭)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말하기를,
"잘 가거라."
고 하니, 권두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신(臣)의 아비가 신에게 이르되, ‘나는 이미 늙었다. 너는 마땅히 가서 조회하여 마음을 한 곳에 써서 나라를 받들라. ’고 하였으니, 신은 남아서 시위(侍衛)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네 아비의 호의(好意)를 알고 또 너의 말도 가상(嘉尙)히 여긴다. 그러나 너는 일찍이 〈명나라〉 조정에 시위(侍衛)한 사람이니, 이 곳에 남는 것이 옳지 못하다. 비록 시위하지 않더라도 이미 너의 충성은 알았노라."
하였다. 안장 갖춘 말과 옷 두 벌과 청면포(靑綿布)·청면주(靑緜紬) 각 5필 씩을 내려 주었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35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책 55면
· 【분류】
외교-야(野) / 무역(貿易)
○斡朶里指揮權豆拜辭, 上引見曰: "好去。" 權豆叩頭曰: "臣父謂臣曰: ‘我旣老矣。 汝當往朝, 專心奉國。’ 臣願留侍衛。" 上曰: "予知汝父好意, 且嘉爾言, 然爾曾侍衛朝廷者也, 留此不可。 雖不侍衛, 已知汝忠誠。" 賜鞍馬、衣二領、靑緜布紬各五匹。 성호사설 제3권 / 천지문(天地門)
생숙여진(生熟女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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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동쪽 육진(六鎭)의 땅은 옛날 숙신(肅愼)의 지경이니, 석노(石砮)가 있어서 징험할 수 있다. 뒤에 여진(女眞)으로 일컬었다. 신라 말기에 발해(渤海)가 5천 리의 땅을 통합했으니, 서쪽은 온 요동을 모두 차지했고, 동쪽은 바다에 이르렀다.
여진은 생여진(生女眞)과 숙여진(熟女眞)의 분별이 있다. 옛날에 속말(粟末)ㆍ흑수(黑水)의 두 부(部)가 있었으니, 곧 흑수는 생여진이고, 속말은 숙여진이다. 속말은 혼동강(混同江)의 일명이기도 하다. 근원이 백두산에서 나와서 북쪽으로 흐르다가 새외(塞外)에서 나오는 한 흐름과 합쳐 꺾이어 동쪽으로 흐르고 다시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내 생각으로는 흑룡강에 가까운 것이 생여진이 되고, 속말에 가까운 것이 숙여진이 된다고 본다. 속말은 뒤에 발해를 세워 흑수를 복속(服屬)시키고, 혼동강을 경계로 삼아 남쪽에 가까운 것이 생여진이 되고, 북쪽에 가까운 것이 숙여진이 되었다. 그러므로 남여진(南女眞)ㆍ북여진(北女眞)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또 그 중에는 동ㆍ서의 분별이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사》에서 이른바, 동ㆍ서여진(東西女眞)이 이것이다. 금(金) 나라의 선조가 경박(鏡泊)에서 일어났으니, 혼동강 동쪽, 흑룡강 서쪽에 있었다. 성종(成宗 고려) 때에 이르러 서희(徐熙)의 말에, “거란의 동쪽이 이미 생여진의 웅거한 바 되었다.” 했으니, 흑수부가 이미 남쪽을 개척했던 것이다. 청 나라의 선조가 흥경(興京)에서 일어났으니, 이것이 이른바 건주여진(建州女眞)이다. 분묘(墳墓)와 종족(宗族)이 모두 백두산 서쪽에 있었으며, 뒤에 생여진과 숙여진을 통합하여 하나로 만들었다.
백두산 줄기가 북막(北漠)에서 나와 남쪽으로 달려서 분수령(分水嶺)에 이르고, 다시 꺾이어 동쪽으로 나와서 가로 천 리에 뻗쳤으니, 옛날에 불함산(不咸山)이라고 일컬은 곳이다. 그 속칭이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鄰)이니, 가이민(歌爾民)은 장(長)이고, 상견(商堅)은 백(白)이며, 아린(阿鄰)은 산(山)이다. 이렇게 해서 일명을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했다.
동가강(佟家江)의 여러 흐름은 분수령에서 나와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동가강을 혹 통가강(通加江)으로 일컫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이르는바 파저강(婆猪江)인 것 같으며, 흥경(興京)과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
산맥이 여진의 지경으로 들어가서 분수령에 이르는 그 사이에 장령(長嶺)이 있으니, 그 속칭이 가이민 주돈(歌爾民朱敦)이다. 가이민은 장(長)이고, 주돈은 영(嶺)인 것이다. 장령은 남쪽은 납록와집(納綠窩集)에 접하고, 북쪽은 고로눌와집(庫魯訥窩集)에 접하였으며, 와집(窩集)이라는 것은 수림(樹林)이다. 흥경의 여러 흐름은 모두 분수령에서 나와 납록에 이르고 요하(遼河)로 들어간다. 장령에서 고로눌(庫魯訥)에 이르는 사이의 여러 흐름으로서 그 서쪽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서북으로 흘러서 요하로 들어가고, 그 동쪽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동북으로 흘러서 혼동강으로 들어가니, 그 형세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다. 백두산에서부터 북쪽은 곧 북향의 국세를 이루어서 물이 모두 북쪽으로 흐른다. 혼동강 동쪽의 경박(鏡泊) 및 오수리강(烏蘇里江)이 그 가장 큰 것이다.
요하는 일명 거류하(巨流河)라고 하며, 장령의 여러 물과 합치는데, 그 근원이 새외(塞外)에서 나오는 것은 상고할 수 없다. 이들 물을 합쳐서 남쪽으로 흐르니, 이른바 요서(遼西)ㆍ요동(遼東)이 이것으로 경계를 삼는다. 성경(盛京)ㆍ흥경(興京)이 모두 요동에 있으며, 동쪽은 봉천부(奉天府)가 되고, 서쪽은 금주(錦州)가 된다. 오늘날 목책(木柵)을 설치했으니, 서쪽은 산해성(山海城 산해관(山海關)을 말함)에 접하고, 비스듬히 동북으로 뻗쳐 있다.
요하 및 북쪽에서 오는 산맥을 넘고, 또 혼동강을 넘으면 몽고(蒙古)의 경계가 되니, 몽고는 호(胡)다. 중국의 북막(北漠)에서부터 동쪽으로 흑룡강 밖에 이르는데, 합하여 48부(部)가 되니, 이른바 청태극(靑太極)ㆍ황태극(黃太極)이 이것이다. 서액라사(西額羅斯)에 사는 것을 합이합(哈爾哈)이라 하고, 동액라사(東厄羅斯)에 사는 것을 대비달자(大鼻㺚子)라 한다고 한다. 《통고(通考)》에 본다면, 실위(室韋)의 9부(部)가 숙신(肅愼)의 북쪽에 있다고 했으니, 지금의 달자(㺚子)가 그 유종(遺種)인 것 같다. 실위의 서쪽 천여 리 되는 곳에 지두우(地豆于)ㆍ오락후(烏洛侯)가 있고, 실위의 북쪽에 구도매(驅度寐) 등 여러 종족(種族)이 있으니, 혹 가깝고 혹 멀지만 요는 모두 지금의 이른바 달자인 것이다. 이제 들으니, 흑룡강과 혼동강 사이에 특별히 애호장군(艾滸將軍)을 두어서 이에 대비한다고 했다.
그 요하에 가까운 것으로는 거란이 가장 강성하다. 글안을 비롯하여 오환(烏桓)ㆍ선비(鮮卑)는 곧 동호(東胡)의 유종으로서 모두 중국의 동북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뒤에 원(元)에 병합되어 몽고로 혼칭되고, 책(柵)이 설치되어 한계가 정하여졌다.
성경(盛京)에서 선창(船廠)ㆍ오랄(烏剌)을 거쳐 영고(靈古)에 이르기까지 1천 1백 30리인데, 그 길이 곧장 도달하지 못하고, 중간에 책(柵)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장령(長嶺)의 북쪽 큰 줄기를 넘어서 비로소 선창에 도달한다. 그 조운(漕運)은 요하(遼河)의 근원에서 이둔하(易屯河)에 이르는 두 물 사이의 백 리 거리에 수로(水路)가 없으므로 거운(車運 수래를 이용한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큰 줄기를 넘게 되니, 또한 책(柵) 밖으로 나가서 육로(陸路)의 북쪽에 있게 된다. 조운은 반드시 물에 말미암는 것이니, 이치상 반드시 이와 같을 것이지만, 분수령에서부터 고로눌(庫魯訥)ㆍ장령에 이르는 사이에 반드시 다소의 통로가 있을 것인데도, 육로를 또한 책 밖으로 쫓아감은 어찌된 것인가? 산세가 남쪽으로 향할수록 더욱 험준해서 그쪽 길에 평이함만 같지 못한 때문일까? 이것은 알 수 없다.
의주에서 성경에 이르기까지 4백 50리, 성경에서 산해관에 이르기까지 8백 70리이니,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연경으로 들어가는 이정(里程)이다. 산해관에서부터 동해에 이르기까지 5천여 리인데, 영고의 동쪽이 이미 3천 리이다. 그 수세를 살핀다면 모두 동북쪽으로 흐르고 있으니, 아마도 바다에 접한 낮고도 평탄한 땅인 것만 같다.
이제 일본 동북의 하이(蝦蛦)도 또한 넓고 평탄하며 비습한 곳으로서 북쪽을 향하여 뻗어서 혹 끊어지기도 하고, 혹 이어지기도 하면서 위로 숙신의 땅에 접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의 동해를 평평한 호수로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호수가 없는 것이다. 그 접해 있는 것이 어느 곳으로 통했는지 알지 못하겠는데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흑룡강(黑龍江) 북쪽에 있다.”고 했다. 오랄(烏喇)은 두만강과의 거리가 7백20리이고, 영고(寧古)는 6백 리에 불과하다고 한다.
국초(國初)에 이만주(李滿住)ㆍ범찰(凡察)의 무리가 모두 강계부(江界府)에 가까이 접근했으니, 만주(滿住)라는 것은 이름이 아니고, 곧 가한(可汗)의 호칭과 같은 것이다. 할아비 아합출(阿哈出) 및 아비 석가노(釋家奴) 때부터 명(明) 나라에서 사성(賜姓)을 받았으니, 이른바 이사성(李思誠)은 곧 아합출이고, 이현충(李顯忠)은 곧 석가노이다. 사성(思誠)의 아들 맹가불화(猛哥不花)와 손자 초만답실리(椒滿答失里)는 많이 우리나라 변경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뒤에 만주(滿住)는 유자광(柳子光)에게 격참(擊斬)되었다. 내 생각으로는, 그 성이 이(李)로 된 것은 우리나라를 인연한 때문이라 본다. 《통고(通考)》에 “금성(金姓) 완안(完顔)은 곧 왕성(王姓)이다. 이때에 고려에 복속(服屬)한 때문이다.” 했으니, 사성의 성이 이(李)로 된 것도 또한 우리나라를 우러러 사모하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이로 인하여 이를 내려준 것이 아니겠는가?
범찰은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의 아들이니. 그 아들 동창(童倉)에게 전했고, 동창은 그 아우 동산(童山)에게 전했으며, 동산은 그 아들 탈라(脫羅)에게 전했다. 그 뒤 누전(累傳)하여 규장(叫塲)ㆍ타실(他失)에 이르렀으니, 천명제(天命帝)는 곧 타실의 아들이라고 한다.
[주-D028] 천명제(天命帝) :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세우고 연호를 천명(天命)으로 했기 때문에 천명제(天命帝)로 일컬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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