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대왕이 왕위를 헌 신짝 같이 내던지게 하고 장혜(章惠)와 소도(昭悼) 두 공을 요절하게 하였으니, 간신의 죄는 죽여도 남습니다.

2023. 3. 16. 16:10이성계의 명조선

 연려실기술 제1권 / 태조조 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

정릉(貞陵)의 폐복(廢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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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조에서 아뢰기를, “참의(參議) 이준구(李俊耈)가 정릉을 봉심하니 봉릉(封陵)은 둘레가 66척이고 높이가 7척쯤 되며, 사면의 사토가 거의 다 허물어졌고 곡장(曲墻) 또한 다 퇴락하였습니다. 석물(石物)로는 혼유석(魂遊石)ㆍ장명등(長明燈) 각각 일좌(一坐)와 문석(文石)ㆍ망주석(望柱石)ㆍ양석(羊石)ㆍ호석(虎石)ㆍ마석(馬石) 각각 한 쌍이 차례로 배열되고, 능은 40여 보에 돌로 사면을 쌓았고, 중앙에 모두 계단이 있습니다.
안의 시설은 한 칸쯤 네모난 석축(石築)이 있는데, 매년 한식에 막을 설치하여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고, 능 아래 백여 보쯤에 또 10여 칸의 터가 있는데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이 완연하니, 이곳은 틀림없이 재소(齋所)의 옛터입니다.”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 판중추부사 정치화(鄭致和), 영상(領相) 정태화(鄭太和), 좌상(左相)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재실(齋室)을 중건하여 수직(守直)하고 수호(守護)하는 일들을 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현종이 명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 병조에서 아뢰기를, “정릉 수호군(貞陵守護軍)을 조천(祧遷)한 능의 예에 의하여 마땅히 30호(戶)로 정해 줄 일입니다.” 하니, 현종이 이르기를, “반은 보병으로 정해 주고, 반은 본릉으로부터 차차 정해 보라.” 하였다.

중건청 당상(重建廳堂上)은 이조 참판 윤집(尹鏶)과 예조 참판 이준구(李俊耈)로 삼았는데, 3월 13일에 비로소 착공하였다.

○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또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삼가 생각건대, 천하 국가를 다스린다는 것은 대륜(大倫)을 밝히고 대법(大法)을 세우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른바 ‘대륜’이라는 것은 부자ㆍ군신ㆍ부부이고, 이른바 ‘대법’이라는 것은 이 세 가지 사이에 행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하나라도 밝지 못함이 있고 이 세 가지 사이에 행하는 것이 하나라도 미진함이 있으면 중국이 이적에 빠지고 인류가 금수로 되는 까닭에, 성인이 스스로 자기가 행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이것을 가지고 먼저 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본조가 개국한 이래로 삼강이 바르고 오상이 밝아서 고려의 호속(胡俗)을 일변(一變)하고 당당하게 삼대의 대도에 오른 까닭에 중국에서 언제나 우리를 ‘소중화(小中華)’라고 일컬었습니다.

러나 불행히도 개국초에 간신 정도전 등이 위태로운 말로 선동하고 간특한 꾀를 몰래 행하여, 태조대왕이 왕위를 헌 신짝 같이 내던지게 하고 장혜(章惠)와 소도(昭悼) 두 공을 요절하게 하였으니, 간신의 죄는 죽여도 남습니다. 오직 우리 태종의 성덕(盛德)과 순효(純孝)가 전의 사람들보다 마치 요임금이 전하고 순임금이 받은 것처럼 질서 정연하여 변고를 만나 처리하는 도리가 당시에 유감이 없었고, 후세에 할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신덕왕후의 능에 대해서만 의절(儀節)이 부족하고 태묘에 배향하는 예가 오래 실행되지 않았으니, 이것은 당시 예관이 예의를 알지 못하고 망녕되게 잘못 헤아려서 이와 같이 만든 것입니다.
이어 그대로 답습하여 이럭저럭 해오다가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태묘에 비록 주현소월(朱絃疏越)의 음악을 연주하고 옥찬황류(玉瓚黃流)의 제주(祭酒)를 올린다 하더라도 태종의 영은 반드시 슬피 탄식하고 벌컥 성내실 것이고, 태종 또한 반드시 그 영이 좌우에 오르내릴 때 송구스러워 불안하고 걱정스러워 어쩔 줄 모를 것입니다.
또, 일국의 신민들도 성자신손(聖子神孫 태종의 자손인 역대 국왕들)이 태종의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지 못함을 의심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다행히 오늘날 성상께서 지극한 효성으로 먼 조상을 추념해서 특별히 예관에게 명하여 정릉을 봉심하여 나무가 넘어져 능을 누르고 있는 것은 곧 제거하고, 수호하는 관원과 재사(齋舍)를 차례로 세웠으니, 어찌 다만 조종의 신령이 명명중(冥冥中)에서 기뻐하실 뿐이겠습니까. 온 천하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고 효성스러운 성상을 우러러 봅니다. 그러나 묘향(廟享)의 의절을 아직까지 지연시켜 결정하지 못하고 능묘의 예를 달리하여 저것[능]은 받들고, 이것[태묘에 모시는 것]은 폐하니, 근거가 없는 처사입니다.
신이 밤낮으로 근심하여 가슴에 불이 붙는 것 같더니, 이제 선조조 태학생(太學生) 채증광(蔡增光)의 소장을 보니, 그때 조정에서는 신덕왕후의 문제에 대한 의논이 일제히 나와 그 말들이 매우 상세하고 절실하였습니다. 또 삼가 권근(權近)이 왕명에 의하여 지은 〈정릉 흥천사 기문(貞陵興天寺記文)〉을 보니, 태조가 애통하게 생각하며 시호를 추증한 뜻과 명 태조가 칙서로 조문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그 글을 상세히 살펴 보셔서 특별히 예관으로 하여금 묘향의 의절도 함께 의논하게 하소서.” 하였다.

○ 6월에 부학(副學) 이민적(李敏迪), 응교 남이성(南二星), 교리 윤심(尹深)ㆍ이규령(李奎齡)ㆍ부교리 김만균(金萬均), 수찬 홍주국(洪柱國), 부수찬 김만중(金萬重) 등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생각건대, 천하의 일이 본래 폐지되었다가 후에 거행되는 것이 있고, 또 일시에 굽혀도 후세에 영원히 펴는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