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17. 13:20ㆍ백두산
>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2년 병진 > 10월 9일 > 최종정보
영조 12년 병진(1736) 10월 9일(기사) 맑음
12-10-09[27] 소대를 행하여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을 강하였다
[, 상이 이르기를,
“주서가 나가라. 그리고 비답을 전한 뒤에 《송명신언행록속집》 제2권을 가지고 들어오라.”
하였다. 윤지태가 명을 받들고 나가서 비답을 전한 뒤에 《송명신언행록속집》 2권을 가지고 입시하였다. 조상명이 《송명신언행록속집》의 〈충사도전(种師道傳)〉을 읽었고 김약로가 〈유협전(劉鞈傳)〉을 읽었고 윤지태가 〈이약수전(李若水傳)〉을 읽었고 이성중이 〈홍호전(洪皓傳)〉을 읽었고 원경순이 〈주변전(朱弁傳)〉을 읽었다. 읽기를 마치자 조상명이 아뢰기를,
“《송명신언행록속집》은 정강(靖康)의 난에 순절(殉節)한 선비를 기록한 것인데 특별히 글의 뜻을 기려 아뢸 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 가운데 이약수(李若水)가 목숨을 바친 것과 홍호(洪皓)가 굽히지 않은 일은 더욱 현저하게 두드러집니다. 홍호의 일은 더욱 감개한 부분이 있으니 10년을 냉산(冷山)에 갇혀 있으면서 오실(悟室)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는데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끝내 역적 진회(秦檜)에게 중상을 당한 것입니다. 당시 보위에 있던 임금이 밝지 못하였다는 것을 이런 일을 근거해 알 수 있는데 절의 굳은 지사가 손상을 입고 고통을 당하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때 장돈(章惇)과 채경(蔡京)의 무리가 정권을 잡아서 단정하고 정직한 선비를 거의 다 쫓아내었다. 그러므로 남조(南朝) 때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이는 오직 이 시랑(李侍郞 이약수(李若水)) 한 사람뿐이었다.”
하였다
[주-D003] 홍호(洪皓)가 …… 일 :
남송 고종(高宗) 때의 충신으로 금나라에 사신 갔다가 억류되어 15년 만에 돌아왔는데, 냉산에 갇혀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宋史 洪皓列傳》
> 조선왕조실록 > 영조실록 > 영조 26년 경오 > 2월 4일 > 최종정보
영조 26년 경오(1750) 2월 4일(정축)
26-02-04[01] 승지 남태기에게 황제총에 대해 묻다
[DCI]ITKC_JT_U0_A26_02A_04A_00010_2005_023_XML DCI복사 URL복사
임금이 승지 남태기(南泰耆)에게 묻기를,
“네가 북도에서 돌아왔으니, 이른바 황제총을 보았겠구나?”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북평사(北評事)로 있으면서 그 무덤을 보았는데, 무덤은 행영(行營)의 서쪽 30리 되는 곳에 있었습니다. 무덤의 형태는 높고 큰데, 곁에는 허다한 무덤이 있어 배장(陪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오국성은 지금의 볼하진(乶下鎭)에 있는데 성의 사면은 천길 절벽이고 다만 동서로 통하는 한 길만이 있었습니다. 금(金)나라 사람들이 중원 천자(中原天子)를 사로잡아 이곳에 가두었다 합니다. 듣건대 주민들이 송나라 때의 돈을 습득했는데 돈의 이름은 지화(至和)라 하였으니 지화는 송나라 인종(仁宗)의 연호입니다. 홍호(洪晧)가 냉산(冷山)에 갇히었다 하는데, 냉산은 지금의 삼수(三水)입니다.”
하였다.
> 고전번역서 > 치평요람 > 치평요람 제129권 > 송 > 최종정보
치평요람 제129권 / 송(宋)
[고종(高宗)]
[DCI]ITKC_BT_1483A_1300_010_0010_2015_048_XML DCI복사 URL복사
[《통감속편(通鑑續編)》 16권, 《송사기사본말(宋史紀事本末)》 17권 〈진회주화(秦檜主和)〉, 《회암집(晦庵集)》 98권 〈봉사직비각주공행장(奉使直祕閣朱公行狀)〉,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속집 5권 〈주변(朱弁)〉]
행인(行人 조근(朝覲)이나 빙문(聘問)을 맡은 관리) 홍호(洪皓)ㆍ장소(張邵)ㆍ주변(朱弁)이 금(金)나라에서 돌아왔다. 건염(建炎) 연간 이래로 사명(使命)을 받들고 금나라에 갔다가 구금된 자가 30여 인이나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금나라에서 화의(和議)가 성사되었다고 하여 사신의 귀환을 허락한 것이다. 그런데 오직 세 사람만 돌아오고 그 나머지는 모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금나라 사람의 생각에 그들이 돌아가 자신들의 근심거리가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사람을 보내어 추격하였는데, 7명의 기병(騎兵)이 회수(淮水)에 도착하였을 때 홍호 등이 이미 배에 올라 있었다.
홍호 등이 냉산(冷山)에 거주하였는데, 그곳에서 회령(會寜)과의 거리가 2백 리였다. 그 지대가 매우 추워서 4월이 되어야 비로소 풀이 돋아나고, 8월이 되어도 눈이 내렸으므로, 땅굴 속에 1백여 가호가 살고 있었는데, 진왕(陳王) 올실(兀室)의 부락이었다. 올실이 홍호를 존경하여 자기의 아들을 가르치도록 하였으나, 2년 동안 음식을 제공하지 않았다.
일찍이 많은 눈이 내려 땔감이 떨어지자, 말똥으로 불을 지펴서 면(麵)을 구워 먹기도 하였다. 어떤 사람이 촉(蜀)을 점령할 계책을 바치자, 올실이 그 계책을 가지고 홍호를 찾아가 물으니, 홍호가 극력 타당성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올실이 남침(南侵)의 의지를 확고하게 가지고 말하기를, “그 누가 바다가 크다고 말하였는가? 나의 힘으로 바닷물을 말려버릴 수 있다. 단지 하늘과 땅만 서로 부딪치게 할 수 없을 뿐이다.”라고 하니, 홍호가 다시 다탕성이 없다고 반박하였다. 올실이 노여워하며 말하기를, “네가 화의(和議)를 주선하는 관원이 되어 이와 같이 입이 강경하니,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할 줄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니, 홍호가 말하기를, “마땅히 죽을 줄로 알고 있습니다. 대국(大國)에서 행인(行人)을 죽였다는 오명을 받지 않아야 하니, 나를 물에다 던져버리고 연못에 빠져 죽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올실이 의롭게 여기어 그만두었다.【1】
'백두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나라 황성 (0) | 2022.10.19 |
---|---|
극동아시아 우랄산과 알타이산 동쪽의 토지는 모두 아시아에 속하며 (0) | 2022.10.18 |
백두산의 남쪽 물이 동북쪽으로 흐르는 것을 두만강이라 하고, 서북쪽으로 흐르는 것을 압록강이라 한다 (1) | 2022.10.13 |
갑산에 도착하여[到甲山 ] 백룡퇴 가 황사 모래벌판 / 白龍堆畔黃沙磧 (1) | 2022.10.13 |
평안도(平安道)와 영안도(永安道)는 사막(沙漠) 지대와 접하였기 때문에 (0) | 2022.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