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19. 16:30ㆍ백두산
상경로(上京路)는 금나라가 설치한 로들 가운데 하나로 지금의 헤이룽장성과 외만주 지역을 통치하는 행정 구역이었다. 완안부의 근거지로 인해 금나라의 초기 수도가 되었으나 그들이 정강의 변으로 중국 화북 지역을 점령하고 1153년(해릉양왕 정원 원년)에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버려졌다.
몽골 제국의 침공하에 상경이 파괴되고 청나라가 만주에 봉금령을 내리면서 만주 지역은 러시아 제국이 만주를 차지하기 전까지 사실상 무주공산인 오지로 남게 되었다.[1]
연혁[편집]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를 비롯한 수많은 생여진 부족들의 근거지가 있던 곳으로 1138년(천권 원년)에 상경(上京)으로 이름을 바꿨다. 완안부 인근에 있던 하천인 송화강은 당시에 안출호수(安出虎水)로 불렸는데, 이 안출호를 뜻글자로 바꾼 금(金)이 여진족이 세운 통일 국가의 국명이 되었다. 안출호수, 혼동강(混同江), 내유하(來流河), 송와강(松瓦江), 압자하가 흐르고 있다.
행정 구역[편집]
상경회령부[편집]
조주(肇州)[편집]
하급주로 방어사를 두었다. 옛 출하점으로 조기왕(肇基王)이 길쌈하던 곳이다. 1130년(천회 8년), 아골타가 요나라를 격퇴하고 줄르 설치했다. 1138년 10월 방어사를 두고 회령부의 속주로 두었다. 해릉양왕시절 제주(濟州)를 지탱하는 군으로 바뀌었다.
1198년(승안 3년), 태조의 땅이었다는 이름으로 절진을 설치하고 무흥군(武興軍)이라는 군명을 받았다. 1214년( 정원 2년), 무흥군 절진으로 이름짓고 초토사를 두었다. 1현 5,375호를 두었다.
현명한자대략적 위치비고
시흥기 | 始興倚 | 첸궈얼뤄쓰 몽골족 자치현 서북 팔랑진(八郞鎭) 탑호성고성지(塔虎城古城址) | 흥주와 동시기에 설치되었다. 압자하와 흑룡강이 있다. |
융주(隆州)[편집]
신주(信州)[편집]
속로[편집]
포여로(蒲與路)[편집]
금나라 초에 만호(萬戶)가 설치되었는데 해릉양왕시기 폐지되고 절도사가 설치되었다. 1198년, 절도부사(節度副使)를 파견했다. 남쪽으로 상경까지 670리거리로 동쪽에 호리개까지 1,400리 거리이다. 북쪽으로 국경선 지역에 있는 화로화탄모극(火魯火疃謀克)까지 3,000리거리에 있었다. 당시 치소가 있던 고성이 치치하얼 시 커둥 현에 위치하고 있다.
합라로(合懶路)[편집]
고려에게 환원받은 동북 9성일대에 설치되었고 총관부를 두었다. 1153년(정원 원년) 총관을 윤(尹)으로 고치고 병마도총관을 겸임하게 했다. 절도부사를 두었다. 1198년병마부관(과거에는 공해총(貢海蔥)이라 칭함)을 두었고 1187년(대정 27년)에 파했다. 이록고수(移鹿古水)가 있고 서쪽으로 상경까지 1,800리, 동남쪽으로 고려국경까지 500리거리에 있다.
휼품로(恤品路)[편집]
갈소관로(曷蘇館路)[편집]
절도사를 두었다. 1128년(천회 7년), 치소를 영주에 옮겨두었다. 도통사(都統司)를 두었다. 1193년(명창 4년)에 폐지했다. 용화관(龍化關)이 있는데 이를 여진어로 갈실한관(曷撒罕關)이라고 한다.
호리개로(胡裏改路)[편집]
금나라 초에 만호를 두었다가 해릉양왕이 폐지하고 절도사를 파견했다. 1198년, 절도부사를 두었다. 서쪽으로 상경까지 630리, 북쪽까지 금나라 변경
각주
총서
태조가 군대를 거느리고 동북면의 영토를 확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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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19년(1370) 경술 정월, 태조는 기병 5천 명과 보병(步兵)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면(東北面)으로부터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6백여 리(里)를 행진하여 설한령(雪寒嶺)에 이르고, 또 7백여 리를 행진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 이날 저녁에 서울의 서북방에 자기(紫氣)가 공중에 가득차고 그림자가 모두 남쪽으로 뻗쳤는데, 서운관(書雲觀)에서 말하기를,
“용감한 장수의 기상입니다.”
하니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이성계(李成桂)를 북방에 보냈으니 반드시 그 감응(感應)일 것이다.”
하였다. 이때 동녕부(東寧府) 동지(同知) 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는 태조가 온다는 말을 듣고 우라 산성(亐羅山城)으로 옮겨 가서 지켜 대로(大路)에 웅거하여 막고자 하였다. 태조가 야둔촌(也頓村)에 이르니, 이원경(李原景) 【원경(元景)은 곧 오로첩목아(吾魯帖木兒)이다.】 이 와서 도전(挑戰)하다가 조금 후에 갑옷을 버리고 재배(再拜)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先祖)는 본디 고려 사람이니, 원컨대, 신복(臣僕)이 되겠습니다.”
하고, 3백여 호(戶)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그 추장(酋長) 고안위(高安慰)는 오히려 성(城)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리 군사들이 그를 포위하였다. 이때 태조는 활과 살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수종(隨從)하는 사람의 활을 가져와서 편전(片箭)을 사용하여 이들에게 쏘았다. 무릇 70여 번이나 쏘았는데 모두 그 얼굴에 바로 맞으니, 성중(城中) 사람들이 겁이 나서 기운이 쑥 빠졌다. 안위(安慰)는 능히 지탱하지 못하여 처자(妻子)를 버리고 줄에 매달려 성을 내려와서 밤에 도망하였다. 이튿날 두목(頭目) 20여 명이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항복하여, 여러 산성(山城)들은 소문만 듣고 모두 항복하니, 호(戶)를 얻은 것이 무릇 만여호(萬餘戶)나 되었다. 전쟁에서 얻은 소 천여 마리와 말 수백여 필을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주니, 북방 사람이 크게 기뻐하여 귀순(歸順)한 사람이 저자[市]와 같았다. 이에 동쪽으로는 황성(皇城)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동녕부(東寧府)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텅 비게 되었다. 황성(皇城)은 옛날 여진(女眞) 황제(皇帝)의 성(城)이다. 태조는 원(元)나라 추밀 부사(樞密副使) 배주(拜住)와 동녕부(東寧府)의 이원경(李原景)ㆍ이백안(李伯顔)ㆍ이장수(李長壽)ㆍ이천우(李天祐)ㆍ현다사(玄多士)ㆍ김아(金阿)ㆍ노정(魯丁) 등 3백여 호(戶)가 와서 〈왕에게〉 바쳤다. 태조가 우라(亐羅)에 들어갈 적에 무너진 담안에서 곡성(哭聲)이 있음을 듣고 사람을 시켜 가 보게 했더니, 한 사람이 벌거벗고 서서 울며 말하기를,
“나는 원(元)나라 조정에서 장원 급제(壯元及第)한 배주(拜住)인데, 귀국(貴國)의 이인복(李仁復)도 나와 동년(同年)입니다.”
하였다. 태조는 장원(壯元)의 이름을 한번 듣고는 곧 옷을 벗어서 그를 입히고, 말을 주어서 그를 타게 하여 마침내 그와 함께 오니, 왕이 배주(拜住)에게 한복(韓復)이란 성명(姓名)을 내려 주었다. 한복이 태조를 섬기되 매우 조심성 있게 하였다.
【원전】 1 집 6 면
【분류】 인물(人物) / 가족(家族) / 왕실(王室) / 역사(歷史) / 외교(外交)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8년 병오 > 7월 1일 > 최종정보
세종 8년 병오(1426) 7월 1일(임진)
08-07-01[03] 강계도의 군마를 3번으로 나누어 방어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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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조에서 평안도 감사의 관문(關文)에 의하여 계하기를,
“강계(江界)의 만포 구자(滿浦口子)와 상대한 저쪽 땅인 황성(皇城)에 거주하는 올량합(兀良哈) 장삼보(張三甫)가 진무(鎭撫) 안유겸(安有謙)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노비(奴婢)를 너희 절제사(節制使)가 북경으로 풀어 보내어, 우리들이 안접(安接)하여 살 수 없으므로, 이미 가재와 아이들은 파저강(婆猪江)으로 보냈으니, 우리가 피선(皮船) 5, 6척으로 틈을 타서 강을 건너가서 강가의 농민들을 표략(剽掠)하면, 우리가 잃은 노비들을 충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하오니, 저들은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오랑캐이온즉, 변란의 발생을 미리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강계도(江界道)의 군마를 6번으로 나눈 것 같으면, 삼익(三翼)에 번(番)에 오르는 군사가 겨우 90여 명이 되므로, 아마도 능히 사변에 대응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청하옵건대 이를 3번으로 나누어 방어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3 집 35 면
【분류】 외교-야(野)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부방(赴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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