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9. 16:56ㆍ대륙조선 일반
부(附) 영길리국 표선기(英吉利國漂船記)
임진년 7월에 영국 배가 홍주(洪州) 불모도(不毛島) 뒷바다에 표류해 오자, 고대도(古代島) 앞 항구에 끌어다 정박시키고, 충청 감사가 장계하였다. 묘당(廟堂)에서는 임역(任譯)을 보내어 홍주 목사 및 수사(水使), 우후(虞候)와 함께 실정을 묻게 하였다.
글을 써 묻기를,
“너희들이 멀리 험한 바다를 건너느라 많은 괴로움을 겪었을 터인데 빠져 죽거나 병을 앓는 염려가 없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죽은 일도 없고 병도 없었습니다. 귀국의 큰 관원이 먼 나라 사람을 예의로 대우하니 걱정이 없어지고 즐겁게 되었습니다.”
“배 안에 나무나 식량은 떨어진 것이 없는가?”
“나무, 닭, 소는 떨어져 가고 채소뿐입니다.”
“너희들은 어느 나라 어느 지방에 거주하는가?”
“우리나라 이름은 영길리국(英吉利國 영국) 또는 대영국(大英國)이라 하고, 난돈(蘭墩 런던)과 흔도사탄(忻都斯坦 힌두스탄) 지방에 살고 있습니다.”
“너희들의 이웃 나라에 소영국(小英國)이 있어 대영국이라고 하는 것인가?”
“있지 않습니다. 세 나라가 합하여 하나가 되고 황상(皇上) 한 분이 주관하기 때문에 대영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 나라의 이름은 무엇 무엇인가?”
“영국, 애란국(愛蘭國 아일랜드), 사객란국(斯客蘭國 스코틀랜드)입니다.”
“황상 한 분은 누구를 말하는가?”
“우리 영국 임금입니다.”
“너희 나라에서도 대청(大淸)을 아는가?”
“북경(北京) 황제국(皇帝國)이라고 합니다.”
“해마다 서로 통상하며 또한 가져다 바치는 것이 있는가?”
“청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오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청에 가 교역하는데, 두 나라가 고루 크고 세력이 같으므로 진공(進貢)하지 않습니다.”
“군신(君臣)의 분별이 없는가?”
“흠차(欽差)가 우리나라에서 북경에 가도 계단 아래에서 고두례(叩頭禮)를 행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로 어느 곳을 가다가, 어느 곳에서 언제 어떤 바람을 만나 여기에 왔는가?”
“공적으로 무역 조약을 맺고자 단지 이곳에 와서 귀국(貴國)의 대왕 천세폐하(大王千歲陛下)께 문서를 바치려고 올해 2월 20일에 서남풍(西南風)을 만나 동쪽으로 향하여 왔습니다.”
“만일 여기에 도착하려고 하였다면 바람에 표류된 것이 아니잖은가?”
“중의(中意)는 문서를 바치려고 온 것입니다.”
“문서는 너희 나라 임금의 명으로 온 것인가?”
“문서를 해설(解說)하러 온 것입니다.”
“무역 조약을 맺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무역 조약을 하려면 피차간에 예가 있는 것이어서 공적(公的)인 것이지 사적(私的)인 것이 아니며, 또한 공사(公司)의 사정은 오직 대왕(大王)의 성지(聖旨)를 기다리는 데 있습니다.”
“공사의 사정이란 무슨 일인가?”
“우의(友誼) 있는 교역(交易)을 설립(設立)해야 합니다. 또 이러한 예물(禮物)이 배에 실려 있으며, 화단(貨單)을 쓴 문서를 가지고 위로 대관대인(大官大人)에게 바쳐 대왕 천세폐하께 주달하여 그 비답(批答)을 받는 것입니다.”
“교역한다면 무슨 물건을 요구하는가?”
“우리들은 양포(羊布), 우단[大呢], 우모(羽毛), 초자(硝子), 유리 그릇, 시계 등의 물품으로 귀국의 금(金), 은(銀), 동(銅)과 대황(大黃) 같은 약재 및 다른 물화(物貨)를 사고자 하는데, 우리들이 보고 마음에 맞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본래 금, 은, 동이 나는 데가 아니고, 그 나머지 다른 물화도 없으니 무엇으로 교역을 하겠는가?”
“귀국은 진실로 좋은 물화와 보물이 많으니, 귀국 대왕께서 우리와의 매매를 윤허하신다면 귀국의 관원과 백성들이 좋은 의복을 입게 될 것이므로,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같아서는 다만 산물(産物) 몇 가지를 가지고 가 이것이 중국의 것과 같은 모양의 것인지 알아보게 하여 주시기 바랄 뿐입니다.”
“이 배에 실은 물화가 얼마나 되는가?”
“금은으로 800냥입니다.”
“그 물화는 너희 나라에서 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어디에 쓰려는 것인가?”
“가는 곳마다 팔 수 있는 것으로서 이 지방에서도 팔려고 합니다.”
“선원(船員)은 모두 몇 사람이나 되는가?”
“67명입니다.”
“성명과 나이, 거주지는?”
“4품(品) 자작(子爵) 선장(船長) 호하미(胡夏米)는 나이 30, 난돈(蘭墩 런던)에 살고, 출해리사(出海李士)는 나이 32, 난돈에 살고, 6품(品) 거인(擧人) 의생(醫生) 하(何)는 나이 29, 난돈에 살고, 제일 과장(第一夥長) 파록(波綠)은 나이 38, 난돈에 살고, 제이 과장 심손(心遜)은 나이 22, 난돈에 살고, 제삼 과장 약한(若翰)은 나이 20, 난돈에 살고, 화사(畫師) 제문(弟文)은 나이 19, 난돈에 살고, 시종(侍從) 미사(米士)는 나이 15, 난돈에 살고, 필도로(必都盧)는 나이 20, 난돈에 살고, 과계(夥計 심부름꾼) 벽다라(辟多羅)는 나이 40, 흔도사탄(忻都斯坦 힌두스탄)에 살고, 마행(馬行)은 나이 26, 흔도사탄에 살고, 임이(林爾)는 나이 30, 흔도사탄에 살고, 임홍(林紅)은 나이 34, 흔도사탄에 살고, 파가(巴加)는 나이 26, 흔도사탄에 살고, 파지(巴地)는 나이 29, 흔도사탄에 살고, 수수(水手)는 나이 34, 흔도사탄에 살고, 야만(耶熳)은 나이 20, 흔도사탄에 살고, 육한(肉翰)은 나이 21, 흔도사탄에 살고, 명하(明夏)는 나이 44, 흔도사탄에 살고, 마흥(馬興)은 나이 25, 흔도사탄에 살고, 마시(馬是)는 나이 26, 흔도사탄에 살고, 마시(馬是)는 나이 25, 흔도사탄에 살고, 진주(陳舟)는 나이 31, 흔도사탄에 살고, 네 사람도 모두 성명이 진주(陳舟)로 흔도사탄에 사는데 다만 나이가 각각 틀리고, 손해(遜海)는 나이가 20, 흔도사탄에 살며, 열 사람도 역시 모두 성명이 손해로 흔도사탄에 사는데 나이가 각각 같지 않으며, 제일 주자(第一廚子) 모의(慕義)는 나이 50, 흔도사탄에 살고, 제이 주자 무리(無理)는 나이 30, 흔도사탄에 살고, 지범(止帆) 오장(吳長)은 나이 21, 흔도사탄에 살고, 육반(𨂔班) 시년(施年)은 나이 59, 흔도사탄에 살고, 시만(施慢)은 나이 18, 흔도사탄에 살고, 시환(施環)은 나이 16, 흔도사탄에 살고, 시니(施尼)는 나이 18, 흔도사탄에 삽니다.”
“자작(子爵)이란 칭호와 거인(擧人)이란 칭호는 무엇을 일컫는 것인가?”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에 자가 넷째 번이 되므로 4품 자작이라 한 것이요, 거인은 곧 문고(文考)입니다.”
“마흥(馬興), 진주(陳舟), 손해(遜海) 등 여러 사람은 어찌 성명이 서로 같은가?”
“형제처럼 여기는 사람은 성명을 같게 하는 것이 영국의 법입니다.”
“이 배는 공선(公船)인가 사선(私船)인가?”
“공선입니다.”
“배 이름을 무엇이라 하는가?”
“안리(安利)입니다.”
“선표(船標)를 가지고 있는가?”
“있습니다.”
“관직을 가진 사람이 어찌하여 배를 탔는가?”
“관리가 문서(文書)를 받드니 어찌 배를 타지 못합니까? 만일 민간인이라면 어떻게 감히 문서를 모시겠습니까?”
“관직이 있는 사람을 어찌하여 선주(船主)라고 하는가?”
“배 전체를 주관하기 때문입니다.”
“병기(兵器)는 무엇하려고 배에 실었는가?”
“공선이기 때문에 병기를 실었습니다. 환도(環刀)가 30자루, 총이 35자루, 창이 24자루, 대대포(大大砲)가 8문(門)입니다.”
“너희 나라에도 활과 화살이 있는가?”
“없습니다.”
“영국 사람들은 배를 집으로 삼아 사는가?”
“아닙니다. 집에서 삽니다.”
“무슨 곡식의 농사를 짓는가?”
“대미(大米)와 오곡(五穀)의 농사를 짓습니다.”
“영국은 산이 많은가 물이 많은가?”
“산이 많습니다.”
“영국 서울을 무엇이라 하는가?”
“난돈(蘭墩 런던)이라 합니다.”
“영국은 면적이 몇 리나 되는가?”
“중국과 같습니다.”
“난돈(蘭墩 런던) 성(城)은 얼마나 큰가?”
“75리입니다.”
“문무(文武) 관원은 얼마나 되는가?”
“몇 백 명이나 됩니다.”
“영국왕의 성(姓)은 무엇인가?”
“함즉(咸即)입니다.”
“영국에서 북경까지는 몇 리나 되며, 우리나라까지는 몇 리나 되는가?”
“북경과의 거리는 약 7만 리인데, 수로(水路) 4만 리에 육로 3만 리이며, 귀국과의 거리는 수로로 7만 리입니다.”
“너희 나라에서 우리나라까지 길이 먼데, 그 사이에 몇 개의 나라를 지나왔는가?”
“크고 작은 나라가 있습니다. 작은 나라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큰 나라로 하나는 법란(法蘭 프랑스), 둘은 품송(品松 프로이센), 셋은 아라사(鵝羅斯 러시아), 넷은 오지리아(奧地里亞 오스트리아)입니다.”
“올 때에 지나온 곳의 나라 사람들을 보았는가?”
“본 곳도 있고 보지 않은 곳도 있습니다.”
“지나온 네 나라가 북쪽에 있는가 남쪽에 있는가?”
“서남쪽이나 동남쪽에 있었습니다.”
“여기 올 때 우리나라 국경을 몇 군데나 거쳤는가?”
“장산(長山), 녹도(鹿島), 동소도(東小島)를 지나왔습니다.”
“몇 월 며칠에 장산에 이르렀으며, 장산은 어느 쪽에 있고, 며칠이나 머물렀는가?”
“그곳은 북쪽에 있었으며, 항구 안에 반나절쯤 머물렀습니다.”
“장산 사람들을 보았는가?”
“어부 몇 백 명을 보았습니다.”
“서로 말한 일이 있는가?”
“식량을 사려고 하였으나, 그들이 ‘작은 땅도 없다.’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장산 항구 안에 인가(人家)가 얼마나 있던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곳에 머물 때 문서와 예물을 왜 받들어 올리지 않았는가?”
“대인이 그곳에 있지 않아서입니다.”
“어느 날 녹도(鹿島), 동소도(東小島)에 이르러 며칠이나 머물렀는가?”
“6월 24일에 도착하여 4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장산에서 녹도로 갈 때에 몇 번이나 다른 곳에 머물렀는가?”
“고기 잡는 사람들이 이미 써서 알려 주었습니다.”
“장산에서 글을 써서 물은 사람의 성명이 누구인가?”
“경솔하게 되겠기에 묻지 않았습니다.”
“녹도는 또 어떻게 알았는가?”
“이곳에 온 뒤에 알았습니다.”
“이 배는 무슨 재목으로 어느 해에 만들었는가?”
“가시나무[桋木]로 7년 전에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문답하는 동안 적간(摘奸)을 꾀하자, 그들이 일제히 방해하여 막고 배 안에 출입(出入)하지 못하게 하였다. ‘변방의 사정은 중요한 일이어서 이렇게 할 수 없다.’는 뜻의 글을 써서 보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고, 물품 목록도 보기를 청했으나 또한 보여 주지 않으니, 재화(財貨)의 다소와 집물(什物)이 얼마인지를 자상하게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 배의 상하에 장치한 칸 수도 적간할 수가 없었는데, 물은즉 답하기를,
“큰 것이 10칸, 작은 것이 20칸입니다.”
하였다. 그 사람들의 용모는 더러는 희어 분을 바른 것 같고, 더러는 검어 먹을 칠한 듯하며, 혹 머리털을 완전히 깎기도 하고 혹 정수리를 깎아 버리고 뇌(腦) 위의 털을 조그맣게 한 가닥으로 땋아 드리웠다.
입은 의복은 양포(羊布)나 성전(猩氈)이나 삼승(三升)으로 만들었다. 저고리는 두루마기[周衣] 모양이나 협수(狹袖) 모양인데 띠를 붉은 단(緞)으로 하였고, 적삼[衫]은 단령(團領) 오른편 섶에다 금단추를 옷깃이 합쳐진 곳에 달았는데 그 소매가 넓거나 좁다. 바지는 우리나라의 것과 모양이 같아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며 더러는 검고 더러는 희며, 관작(官爵)이 있는 사람의 의복은 무늬 있는 단(緞)이 선명하였다.
머리에 쓰는 것으로 자작(子爵) 호하미(胡夏米)의 것은 푸른 단(緞)으로 만들되 마치 족두리같이 앞을 검은 뿔로 장식하였다. 그 밖의 것은 혹은 홍전(紅氈) 혹은 검은 삼승(三升)으로 더러는 감투[甘吐] 모양같이 하고 더러는 두엄달이(頭掩達伊) 모양같이 하고 더러는 풀로 짠 전립(氈笠) 모양과 같이 하였다.
버선[襪子]은 흰 좌사(左紗)나 흰 삼승으로 만들었는데 등 위에 꿰맨 데가 없고, 신[鞋]은 검은 가죽으로 만들어 발막(發莫) 모양과 같았다.
선체(船體)는 외[瓜]를 쪼갠 듯이 뱃머리와 선미(船尾)가 뾰족하고, 그 길이는 30발[把], 너비는 6발이다. 삼(杉) 나무 쪽[片]을 붙이는데 쇠못으로 박고, 못대가리의 폭 사이를 기름 섞은 회(灰)로 발랐다. 물에 잠기는 기둥과 판자는 모두 구리쇠 쪽을 붙이고 구리쇠 못으로 총총 박았으며, 치목(鴟木 키)도 구리로 둘러싸 선미 밖에 붙였다. 상하 삼판(杉板)에 유리로 창문을 냈고, 좌우 삼판 위에 난간을 만들되 판목(板木)으로 칸을 가로질러 꾸몄으며, 뱃머리에는 취사장을 만들었다. 선미에 선관(船官)이 거처하는 방을 만들었는데 지극히 화려하게 하였으며, 방 위에 판자를 깔고 사방에 놋쇠로 난간을 만들었다. 뱃머리에는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기름 섞은 회로 발라 꽂았는데 마치 멀리 바라보는 듯한 모양이었다.
또 긴 나무를 반쯤 눕게 꽂아 앞 돛[㠶]의 끈을 매달았다. 선상(船上)의 허리 중앙에 닻[碇]이 닿는 데를 만들었는데, 아래는 판자를 깔아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게 하고, 위는 장구 모양으로 하여 맷돌처럼 움직이게 만들고 놋쇠[豆錫]로 장식하여 세워 두었다. 닻줄은 철사로 꼬았는데 크기가 서까래만 하다. 배 양쪽 머리에는 각각 건령구(乾靈龜)를 설치하고, 배 좌우에는 쇠 갈고리를 박아 돛끈을 매달았다.
배 가운데의 1칸에는 검고 흰 염소, 닭, 오리, 돼지, 개를 기르는데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다. 배 양쪽 머리에는 각종 색깔의 기를 꽂아 앞길의 물 깊고 얕음을 재는 데 호응하였다. 관작(官爵)이 있는 자가 거처하는 문 앞에는 한 사람을 시켜 갑옷을 입고 칼을 잡고 온종일 시위(侍衛)하여 출입하는 사람을 금하게 하였다.
물 긷는 배 네 척은 푸르거나 검게 칠하였고, 본판(本板)을 구리쇠로 만들어 항상 선미의 좌우에 달아 두다가 때때로 물에 띄워 사용하였다. 돛대는 앞 돛대는 19발, 가운데의 돛대는 22발, 뒤 돛대는 16발이다. 앞뒤와 가운데의 돛대는 각각 3층과 6층으로 수레바퀴 모양과 같이 만들고, 놋쇠로 난간을 상층과 가운데 층에 하고 나무대 둘을 가로로 붙여 사람을 수용할 곳을 만들었다. 큰 활대[弓竹]를 항시 3층의 위에 걸되, 흰 삼승 돛을 또 3층으로 나누어 붙여 수시로 폈다 거뒀다 한다. 돛끈[帆索]은 드리우기를 줄이 헝클어진 것 같은데 간간이 큰 가닥이 있고, 또한 작은 끈으로 구름사다리[雲梯] 모양을 묶어 만들어, 돛을 펼 때에는 사람이 그 층 위에 올라가 폈다.
그들이 쓰는 그릇은 화기(畫器)와 유리요, 수저는 모두 은이었다.
그 주문(奏文) 한 봉(封)과 예물 세 봉을 굳이 거절하고 받지 않았더니 심지어는 그 종선(從船)에다 옮겨 싣고 보내오기를 몇 차례인지 모르며 쫓아 보내기를 또한 한두 차례가 아니었다. 끝내 그만두지 않고 마침내는 강가에 실어다 두므로, 주문(奏文) 및 예물을 우선 동임(洞任)의 집에 봉하여 주고 엄하게 수직(守直)하도록 단속하여 처분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작은 책자 세 권과 예물의 물명(物名) 도록(都錄) 세 벌을 그들이 주기에 책자 한 권과 도록 한 벌은 영문(營門)에 봉하여 올리고, 또 한 벌은 수영(水營)에 봉하여 올리고, 또 1벌은 병영(兵營)에 봉하여 올렸다. 선표(船標)는 자획(字畫)이 꼬불꼬불하여 거칠고 어지러워 도화(圖畫)와 같아 해득하여 모방해 낼 수가 없으므로 베끼어 올리지 못하였다.
그들의 성명, 나이, 용모의 특징을 성책(成冊)하여 올렸으며 공궤(供饋), 수직(守直)하는 절차를 연이어 더욱 단속하여 거행하게 하였다. 실정을 문초하는 절차가 가장 시급한 일인데 일문일답(一問一答) 외에는 지리하다고 하거나 눈썹을 찌푸리며 좋아하지 않거나 손을 흔들며 묻지 말라고 하였다. 이상은 홍주 목사 및 수영 우후가 순영(巡營)에 고한 사연.
“지금 보고한 사연 속의 그 사람들이 대답한 것을 보건대, 심상한 표류선과는 다른 데가 있습니다. 무릇 관계되는 일의 거행을 더욱 자상히 살펴야 하는데 배 안의 물건들을 끝내 적발하지 못하여 법례에 어긋남이 있고, 실정을 문초하는 사연 가운데 의당 물어야 될 것을 묻지 않은 것이 또한 많이 있습니다. 이른바 주문(奏文)과 예물(禮物)이 이미 서로 통신(通信)하는 나라의 것도 아니고 명분도 없이 바치는 것이면 그들이 비록 굳이 받기를 청하더라도 단연코 조정의 처분이 있기 전에는 마음대로 받을 수 없다는 뜻으로 말을 좋게 하여 깨우쳐 일러 돌려주고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두어 차례 갔다 왔다 하다가 마침내 동리 일 보는 사람에게 봉하여 두게 되었으니, 이것은 받아 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어서 일의 근본[事體]으로써 헤아리면 천부당만부당합니다.
당해(當該) 수영 우후와 홍주 목사가 처음에 지체하고 진행하지 못한 것은 풍우(風雨)에 막힌 때문에 완만하여 일에 미치지 못함을 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음번으로는 보고하는 사연의 모호함이 또한 매우 소홀한 데다가 그 배를 경솔하게 먼저 고대도(古代島)로 끌어다 정박시킨 것도 경솔한 짓에 가깝습니다.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논감(論勘)할 작정이었으나, 그 사람들의 주문 및 예물을 봉하여 도로 전하지 못한 것을 다만 잘못으로 간주하여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너무나 변방 사정에 관계되는 일이라 결단코 그대로 두고 그 일이 끝남을 기다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수영 우후 김영수(金瑩綬)와 홍주 목사 이민회(李敏會)를 먼저 파출하십시오.
그들이 책자 한 권과 예물 도록(禮物都錄) 한 벌을 신(臣)의 영(營)에 봉하여 올린 것은 이미 그들의 사정을 기록하여 보인 것이므로 굳게 봉하여 비변사(備邊司)로 올려보냈습니다. 물명 도록(物名都錄) 같은 것도 다른 범상한 문자와 다르고, 예물을 이미 받아서는 부당하다면 도록 역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원본을 도로 내려보내어 그 사람들에게 돌려주게 하고, 따로 한 벌을 등본하여 비변사로 올려보냈습니다.
그 사람들의 말에 이미 무역(貿易) 조약의 설립과 주문(奏文), 예물 등의 말이 있었는데, 이보다 엄밀한 일이 없는 데다가 또한 전에는 없던 예로서 감히 함부로 논의하여 청할 수 없습니다. 이에 낱낱이 계문(啓聞)하고, 그들의 나이와 용모의 특징도 한결같이 성책(成冊)의 기록에 따라 조례대로 다음에 기록하였으니,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소서.
그 사람들의 대답 가운데 이미 장산(長山) 항구 안에 반나절 동안 머물며 식량 사는 일 등의 문답이 있고, 또 녹도(鹿島) 동쪽 작은 섬에 갔다고 하였는데, 그 소재지(所在地)를 자상하게 심문하여 기록하지 못하고, 보고한 사연이 또한 너무도 소홀하여 빠뜨림이 있어 다시 더 자세하게 탐문하여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배 안의 집물(什物)도 다시 여러 가지로 간절하게 깨우쳐 일일이 적간하여서 기록하여 보고하도록 말을 만들어 신칙(申飭)하였습니다. 정탐(偵探), 수직(守直), 공궤(供饋)와 잡인을 금하는 등의 절차를 각별하게 거행하여 혹시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에서 연이어 더욱 신칙하였습니다. 다시 신(臣)의 영(營) 비장들을 보내어 함께 입회(立會)하여 검칙(檢飭)하게 하였습니다. ……” 이상은 충청 감사의 장계 발미.
영국 사람이 원래 사는 땅은 중국과의 거리가 멀리 7만 리나 떨어져 있다. 즉 이런데도 그 배는 남쪽으로 떠나 아프리카 대륙[亞非利加洲]이라는 큰 지방을 거쳐 드디어 동북쪽으로 와서 오필(奧必)에 이르렀다. 이렇게 먼 길을 다니는데도 영국 사람들이 탄 배는 시원스럽게 빠르고 편안하여 이처럼 중난하고 큰 바다를 떠다녔으니, 감히 그 목적한 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로 그들은 광풍이 크게 일어남을 만나게 되면 오직 선주(船主)와 과장(夥長) 등의 좋은 계책이나 사공의 담력만 믿고 가다가 얼마 가지 않아 배가 부서지는 환란을 당하기도 한다. 또 해양(海洋)에 있으면 해적들이 감히 향해 오지 못한다 한다. 그 나머지 국사(國事) 등에 관한 말은 문세(文勢)가 기괴하여 다 해석하기 어려우므로 감히 올려 기록하지 못하였다. 이상은 영국 인품과 국사의 대략적 설명.
“대영국(大英國) 선주(船主) 호하미(胡夏米)는 삼가 수군절도사 이 대인(李大人)에게 품합니다. 현재 영국 배가 여기에 이르렀는데, 문서와 아울러 미미하나마 드릴 토산물을 조선국 대왕 전하께 받들어 올릴 것이 있습니다. 이에 간청하오니 관원을 시켜 보내어 우리들을 응접 인도하여 조정에 문서를 받들고 가 주달하게 하여 주시면 위덕(威德)이 적지 않겠습니다. 임진(壬辰) 33년 6월 27일 호하미 착서(着署).” 그 아래 붉은 인장을 찍었음. 이상은 그 사람들의 편지.
“미미한 물품을 바쳐 올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대왕 천세폐하께서 은혜를 내리시어 멀리 버리지 말아 주소서. 애석하게도 기묘한 진품(珍品)이나 보배롭게 보아 주실 성상의 하람에 받들어 올릴 만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이것으로 삼가 공경하는 뜻을 펴고, 아울러 현지 배에 싣고 온 물화의 견본을 보여 드릴 따름입니다.” 이상은 그 사람들의 주문.
우단[大呢] 홍색 1필, 청색 1필, 흑색 1필, 포도색 1필.
우모(羽毛) 홍색 1필, 청색 1필, 포도색 1필, 종색(棕色) 1필, 황색 1필.
양포(羊布) 14필, 잡물(雜物)ㆍ천리경(千里鏡) 2개, 파리 그릇[玻瓈器] 6건, 꽃무늬 금 전고(鈿叩) 6벌, 그 나라의 지리서[道里書] 26가지. 이상은 그 사람들의 예물 도록.
[주-D001] 황력 재자관(皇曆齎咨官) :
옛날 중국에서 보내 주는 책력을 받으려고 중국 조정에 자문을 가지고 갔던 관원이다.
[주-D002] 두엄달이(頭掩達伊) :
두룽다리, 추위를 막기 위해 머리에 쓰는 일종의 쓰개이다.
[주-D003] 발막(發莫) :
마른신의 한 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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