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19. 19:35ㆍ이성계의 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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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집 제6권 / 신사행록(辛巳行錄)
홍라산(紅羅山)에서 차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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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라산 이름 방여도에 분명히 나와 있거니와 / 紅羅山在方輿圖
그 속 어딘가 조무래기 오랑캐 소굴도 있으렷다 / 其中卽知巢胡雛
지금 요새 따라 지나가는 나의 발길 / 我今行役沿塞過
보이나니 십리허에 온통 누런 갈대숲뿐 / 相望十里彌黃蘆
언뜻 이는 연진에 장졸(將卒)들 시름이 어떠할까 / 煙塵乍起愁軍將
전투란 원래가 지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을 / 所鬪由來非智愚
가련타 관문 밖의 백성들 아비 자식이여 / 可憐關外民父子
참혹한 죽음 아니면 끌려다니는 신세로세 / 不遭磔爛卽牽驅
사방 오랑캐 막는 도리 그 누가 말했던가 / 守在四夷誰是道
이것 말고 흉노를 평정할 계책이 또 있을까 / 否恐無策平匈奴
[주-D001] 홍라산(紅羅山) :
요동 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 광녕 중둔위(廣寧中屯衛)의 서쪽 70리 지점에 있는 산 이름으로, 이곳에 장성(長城)을 쌓아 요새로 삼고 있는데, 홍라산(虹螺山)으로 쓰기도 한다. 《大明一統志 卷25》 《讀史方輿紀要 卷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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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집 후집 제1권 / 시(詩)○조천록(朝天錄)
홍라산〔紅羅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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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예로부터 홍라산이라 불리는데 / 山號紅羅古
맑은 가을 하늘에 푸른 봉우리 높네 / 秋晴碧巘長
사람들이 말하기를 원나라 순제가 / 人言元順帝
우리 고황제에게 나라를 양보했다지 / 國讓我高皇
천하를 통발과 올무처럼 버리고 / 四海筌蹄棄
수레 한 대로 꿩이나 토끼처럼 숨었네 / 單車雉兎藏
어찌하여 형옥(荊玉)으로 만든 옥새를 / 寧將荊玉璽
오랑캐 땅에 내버렸는가 / 拋却犬戎鄕
[주-D001] 홍라산(紅羅山) :
영원위(寧遠衛) 인근의 산으로, 원 순제(元順帝)가 명나라 군대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 죽은 곳이라 한다.
[주-D002] 어찌하여 …… 내버렸는가 :
원 순제가 명나라 군대에게 패배하여 사막으로 들어간 뒤 옥새를 잃어버렸다는 설이 있다. 《皇朝文獻通考 卷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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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원록 제3권 / 1760년(영조36, 경진)
25일(을미) 맑고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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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전현으로부터 35리를 가서 봉산점(蜂山店)에서 아침을 먹고 또 37리를 가서 계주에서 묵었다. 새벽에 내가 오정과 함께 먼저 출발하여 동성문(東城門)으로 들어가니 문이 2겹이며, 돌 겉면에 새기기를, ‘영욱(迎旭)’이라 하였다. 또 누각이 있었는데 《현지》를 살펴보니, 현의 성은 성화(成化) 3년(1467)에 축조하였다. 둘레는 1,220보이며 성문은 3개인데 동쪽은 영욱, 서쪽은 공신(拱宸), 남쪽은 내훈(來薰)이며 그 북쪽은 오랫동안 막혀 있다. 융경 원년(1567)에 3척을 증축하여 올렸고 숭정 8년(1635)에는 그 안을 모두 벽돌로 바꾸었다. 얼마 있다가 다시 해자를 파고 팽가교(彭家橋)의 물을 끌어 들였다고 한다. 골목을 지나 거인(擧人) 유비정(劉秘正)의 집에 들어갔는데 유비정은 나이 60세가량이었다. 문에 나와 맞이하여 읍하고 이끌어 작은 방으로 들어갔는데 방은 자못 깨끗하였다. 얼마 있다가 차를 내오고 안부를 묻고 통성명이 끝나자 유비정이 오정이 입은 군복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 사람은 무관이군요.”
하고 내 도포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 사람은 문관이군요.”
내가 말하였다.
“저는 벼슬이 없습니다. 단지 선비의 옷을 입었을 따름입니다.”
유비정이 의자를 옮겨 가까이 앉더니 오랫동안 그것을 만져보았다. 내가 서루(書樓)에 올라보기를 청하니 유비정이 그 아들을 시켜 우리들을 들어왔던 문으로 나가 십자가를 지나 꺾어 남쪽으로 향하였다. 작은 협문으로 들어가니 대나무가 숲을 이루어 집을 가렸고 그 방으로 들어가니 유비정이 이미 먼저 도착해 있었다. 방 안에 층층의 시렁을 두르고 시렁 위에는 책을 몇 백 질(帙)이나 쌓아 놓았는데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제자백가(諸子百家)가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편목(篇目)을 반도 못 본 사이 날은 이미 저물려 하였다. 몇 종류의 책을 뽑아 오정에게 사오라고 하고 말을 달려 서성을 나섰는데 이것이 공신문(拱宸門)이었다. 8리를 가니 서팔리보(西八里堡)며, 5리를 가니 오리둔(五里屯), 3리를 가서 채정교(采亭橋)에 이르렀는데 이는 돌로 만든 징검다리〔石矼〕였다.
《일통지》를 살펴보니, 이 다리는 옥전현 서쪽 20리 남수하(藍水河) 위에 놓여있다. 전하기를, ‘금나라 때 학사(學士)였던 읍인(邑人) 양회(楊繪)가 세웠으며 채정(彩亭)은 양회의 호다.’라 하였다. 9리를 가니 대고수점(大枯樹店)이라 하는데 역자가 서북쪽 두 언덕 사이에 한 큰 나무를 가리켜 말하기를, “이것이 고수입니다. 점은 이로써 이름 지은 것입니다.”라 하였다. 전해오길, ‘이 나무에 잎이 나면 진정한 군주〔眞主〕가 나온다. 잎이 난 지가 이미 몇 년이 되었다.’라 하였는데 황하의 물이 이같이 맑아질 것인가는 알지 못하겠다.
대고수점을 지나면서부터 길이 더욱 북쪽에 가까워져 산기슭을 따라 가니 그 남쪽은 넓은 들이라 한번 바라보니 아득하였다. 2리를 가서 소고수점(小枯樹店)을 지나고 8리를 가서 봉산점에 이르렀다. 점 북편에 산이 있었으니, 봉산(蜂山)이었다. 토질은 단단한 암석〔石骨〕으로 되어 있고 그 무늬는 물결과 같으며 그 형상이 소라껍질 같기도 하고 자라가 엎드려 있는 것 같기도 한데 30리를 이어져 있었다. 나산점(螺山店)에 이르러 나산(螺山)이 되고 별산점(別山店)에 이르러 별산(別山)이 된다. 소교방(小橋坊)을 지나면 취병산(翠屛山)이 되다가 어수(漁水) 서편에 이르러 비로소 끝난다. 점사에 들어갔는데 아버지께서 아직 출발하시지 않았기에 주방에서 내온 밥을 먹는데 오정이 쫓아왔다. 《주례찬소(周禮纂疏)》와 《한위총서(漢魏叢書)》는 값이 비싸서 사지 못하였고 부채 5개로 《예기체주(禮記軆註)》와 바꿔 왔으니 한탄스러웠다.
또 출발하여 2리를 가서 나산점에 이르니 그 북쪽이 나산이다. 《계주지(薊州志)》를 살펴보면, 나산은 주의 성 동남쪽 40리에 있으니 홍라산(洪羅山)이라고도 하고 또 홍라험(紅羅嶮)이라고도 하며 나산(羅山)이라고도 한다. 금나라 대정 29년(1189) 10월 나산에서 사냥하였다고 하는데 바로 이곳이라 하였다
> 고전번역서 > 지봉집 > 지봉집 제16권 > 속조천록 > 최종정보
지봉집 제16권 / 속조천록(續朝天錄) 신해년(1611, 광해군3) 8월부터 임자년(1612) 5월까지이다.
동관 도중에〔東關道中〕 이날 오랑캐가 쳐들어오리란 경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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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로는 계속 험난한 길 통과하는데 / 客行長向畏途過
언덕 너머 사막엔 낙타 풀어놓았네 / 隔岸胡沙放橐駝
이내 너머 발해의 조수 소리 들리고 / 煙外潮聲聞渤澥
안개 속에 홍라산 산색이 드러나네 / 霧中山色見紅羅
관에 다다르자 성의 햇살 다 떨어지고 / 孤城落日臨關盡
변새 나서니 수루의 호가 유독 슬퍼라 / 古戍悲笳出塞多
그래도 한나라 비장 있어 반가우니 / 猶喜漢家飛將在
천교가 감히 교하 건너지 못하리라 / 天驕不敢渡交河
홍라는 산 이름이다.
[주-C001] 속조천록(續朝天錄) :
지봉이 동지사 겸 주청사(冬至使兼奏請使)로 명(明)나라에 갔다 올 때까지의 시록(詩錄)이다. 당시 정사(正使)는 이상의(李尙毅), 부사(副使)는 지봉, 서장관은 황경중(黃敬中)이었다. 《光海君日記 4年 6月 7日》 《少陵集 左贊成少陵李公年譜》
[주-D001] 한나라 비장(飛將) :
흉노가 ‘한나라 비장군[漢之飛將軍]’이라고 부르면서 두려워했던 명장 이광(李廣)으로, 곧 그와 같은 명장을 뜻한다.
[주-D002] 천교(天驕) :
‘천지교자(天之驕子)’의 준말로, 한나라 때 흉노를 일컫던 말이다. 이후 강성한 주변 세력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 고전번역서 > 목은집 > 목은시고 제17권 > 시 > 최종정보
목은시고 제17권 / 시(詩)
이의호가(已矣乎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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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가 없도다 / 已矣乎
천자가 북으로 순수해 동쪽 구석에 오니 / 天子北狩來東隅
장백산 앞에는 푸른 초야도 많거니와 / 長白山前多綠蕪
타봉에다 양락이랑 담요까지 벌였는데 / 駝峰羊酪羅氍毹
외론 성 굳게 지키며 상기도 걱정하여라 / 孤城堅壁尙爲虞
감히 중원을 향해서 영토를 다툴쏜가 / 敢向中原爭版圖
어쩔 수가 없도다 / 已矣乎
당시의 세가들이 모두 다 쇠퇴해졌거니 / 當時世家盡零落
행여 후사를 부탁할 만한 인재가 있으랴 / 倘有臥龍堪付託
성정에서 조서 듣고 속으로 눈물 흘렸고 / 省庭聽詔淚流臆
진하표는 먼지 낀 채 시렁에 묶여 있네 / 賀表塵棲束高閣
바다 서쪽은 길이 막히고 산도 험준하니 / 海西路梗山崢嶸
이는 결코 부로들의 정성이 부족해서 / 不是父老無精誠
지척의 존엄한 천자를 안 뵙는 게 아닐세 / 咫尺違顔天子明
어쩔 수가 없도다 / 已矣乎
백발의 늙은 목은은 구곡간장 다 녹는데 / 白頭老牧腸九回
북풍은 나날이 남대로 불어닥치는구나 / 北風日日吹南臺
왕년의 사필은 맹렬한 천둥과 같았으니 / 他年史筆如奔雷
고정 부자는 참으로 뛰어난 재주고말고 / 考亭夫子眞豪才
[주-D001] 이의호가(已矣乎歌) :
이의호는 절망하여 탄식하는 말로서, 즉 공자가 이르기를 “어쩔 수 없구나. 나는 아직 자기 과실을 능히 알아서 속으로 반성하는 자를 보지 못했노라.[已矣乎 吾未見能見其過 而內自訟者也]” 하였고, 또 이르기를 “어쩔 수 없구나. 나는 아직 덕 있는 이 좋아하기를 마치 여색 좋아하듯이 하는 자를 보지 못했노라.[已矣乎 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公冶長, 衛靈公》
[주-D002] 천자(天子)가 …… 오니 :
여기의 천자는 바로 원 순제(元順帝)를 가리킨다. 원 순제 28년(1368)에 순제가 명병(明兵)에게 쫓기어 처음에는 상도(上都)인 개평부(開平府)로 행행하여 지냈고, 29년에는 다시 그곳까지 명병의 공격을 받게 되어 마침내 만주(滿洲) 열하성(熱河省) 응창부(應昌府)로 옮겨 행행해 있다가 그다음 해인 30년에 순제가 끝내 그곳에서 생을 마쳤던 데서 온 말이다. 그 후로는 순제의 장자(長子) 소종(昭宗)이 순제의 뒤를 이어 그곳에서 다시 즉위했으나, 또 명병에게 쫓기어 다시 원(元)의 구도(舊都)인 화림(和林)으로 옮겼고, 그 후 또 쫓기어 금산(金山)으로 옮겨 지내다가 마침내 즉위한 지 8년 만에 금산에서 생을 마쳤다
성호사설 제27권 / 경사문(經史門)
화이이속(華夷異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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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세조(元世祖)가 일본을 칠 적에 만병(蠻兵) 10만이 구풍(颶風)을 만나다 죽고 돌아간 사람은 겨우 세 사람뿐이었으며, 뜬 시체가 포구를 메워 밟고 건너갈 만했다.
사람들의 말이, “조선을 위해서다. 충렬왕(忠烈王)이 공주에게 장가들어 특별한 총애가 비할 데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세조(世祖)가 서정(西征)한 지 4년 만에 인도에 이르렀고, 면전(緬甸 버어마)과 과와(瓜哇)를 쳐 성(城)을 점령하고도 전쟁을 중지하지 않고 무력을 자행하였으니, 진 시황이나 한 무제(漢武帝)도 하지 않았던 바이다.
저 서역(西域)과 해도(海島)는 재화와 보물이 나는 곳으로서 중국의 진귀하고 기이한 것이 모두 서남으로부터 오므로 그의 사치한 마음이 한도가 없고 탐하는 마음이 날로 더해졌다. 이러하고도 나라를 백 년이나 누린 것은 또한 이상한 일이다.
그가 죽고 성종(成宗)이 즉위해서는 공자의 사당을 다시 세우고 시호를 높이되 중등 현인(賢人)의 시호를 바꾸어 대성지성(大成至聖)이라고 하자, 이에 인심이 크게 기뻐하여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음식이 되기 쉬운 것같이 되었으니, 그 여러 대를 이어가게 된 것은 성종의 힘 아님이 없다. 또한 순제(順帝) 때에 이르러서는 사치하기를 전례없이 하다가, 그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
무릇 인정은 검약을 사치만 못하게 여기고, 물화(物華)는 북방이 남방만 못하여, 사치하는 방법은 청렴한 것보다 탐하는 것만 못하므로, 내지(內地)에 살게 된 뒤로는 궁실ㆍ의복ㆍ음식이 근고(勤苦)와 맹지(猛鷙)를 유약하고 나태한 것으로 일변시켰고, 모든 내외의 관장(官長)에 있어서도 저의 종족이 아니면 쓰지 아니하였으니, 이른바 ‘달로화적(達魯花赤)’이 이것이다.
오직 자기만이 이(利)를 독차지하여 천하의 인심을 크게 잃었으므로, 그 허둥지둥 도망칠 때 숙위하는 금병(禁兵) 외에는 모두 따라가지 않았으니, 사씨(史氏)의 이른바 “비단 중국만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아울러 본래의 부락마저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대개 중국 본토에서 생장하여 사치하는 풍속에 물들었다면 곧 중국 사람인데, 하루아침에 저 괴로운 추위의 북방 땅, 담요에 낙장(酪漿) 먹는 고장으로 몰려났으니 견디어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겨우 건덕문(建德門)을 나가자 곧 설사병을 앓다가 죽고,그 자식은 유리표박하여 요동(遼東) 심양(瀋陽)에 의탁하였으니, 이는 필시 음산(陰山)의 옛 소굴을 편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므로 북방 풍속은 반드시 무력으로 이기기를 노린다. 그런 까닭에 차지하기도 반드시 돌연히 하게 되고 잃는 것도 조짐도 없이 잃으니, 사치가 심하여 힘이 쇠하였기 때문이다. 그들도 오히려 이러한데, 더구나 본래부터 중국에 사는 자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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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05] 그 자식은 유리표박하여 심양(瀋陽)에 의탁하였으니 :
이 말은 《원사》 소종본기(昭宗本紀)에 의하면, 순제가 죽자 그의 장자 애유식리달랍(愛猶識理達臘)이 응창(應昌)에 즉위하였으니 이가 바로 소종(昭宗)이다. 응창이 함락되자 화림(和林)으로 도망하였다가 금산(金山)에서 죽었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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