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는 왕원수(王元帥) 주원장 이하 백여 명의 목을 베어 왕께 바쳤다.

2022. 10. 22. 13:57이성계의 명조선

 

 

 

1)원문에는 주원장(朱元璋)으로 되어 있으나, 주원수(朱元帥)로 바로잡는다

 

원문

공민왕(恭愍王) 초에 원(元)나라의 정치가 쇠퇴하자 호걸들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이에 승상(承相) 탈탈(脫脫)이 고우(高郵)의 장사성(張士誠)을 정벌하러 가면서 고려(高麗)에 군사를 청하였으므로 왕이 승상 유탁(柳濯)과 장군 최영(崔瑩)으로 하여금 군사 2만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였다. 그러나 최영이 말하기를, “원나라는 우리의 원수입니다. 이 기회를 틈타 저들을 치는 것이 옳을 것이니,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여 여러 차례 왕에게 간언하였으나 왕이 이를 듣지 않았다. 이에 어쩔 수 없이 가서 원나라 군사를 도와주었는데, 이때 최영이 선봉이 되어서 총 27번의 전투에서 모두 크게 승리하였고, 회안(淮安)에 진영을 옮겨 방어하면서 주원장(朱元璋)【명(明)나라 태조(太祖)】의 10만 군사를 크게 격파하여 원나라를 구원하였다. 최영이 귀국할 때에 원나라의 내부 사정을 상세히 살펴 왕에게 보고하면서 북쪽으로 원나라를 정벌하러 가기를 요청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며 나라에 불충한 신하[賊臣] 기철(奇轍) 등을 주살하고 원나라의 정동행성 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혁파함으로써 원나라와의 관계를 끊었다. 이어서 인당(印璫)과 최영을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임명하고, 유인우(柳仁雨)와 황천보(黃天甫)를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기병(騎兵)과 보군(步軍) 1만 2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인당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원나라의 수만 명 병사를 크게 격파하였으며, 파사부(婆娑府)를 함락하고 봉천부(奉天府)를 포위하였고, 유인우는 쌍성(雙城)을 함락하고 함주(咸州) 북쪽의 여러 진(鎭)을 되찾았다. 이때 원나라의 사신이 와서 거짓말로 협박하기를, “원나라가 장차 80만 군대를 일으켜 압록강을 건널 것이다.”라고 하자, 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원나라를 정벌하러 나갔던 군사들을 불러들이고, 인당을 참수함으로써 사과하였다

그 후에 원나라의 홍건적(紅巾賊)【유복통(劉福通)이 병사를 일으켰을 때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렀기 때문이다.】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정주(靜州)⋅인주(麟州)【지금의 의주에 있다.】 등 여러 주를 함락하자 부원수(副元帥) 안우(安祐)와 상장군(上將軍) 이방실(李芳實) 등이 함종(咸從)에서 9번을 맞붙어 싸워서 크게 승리하니, 적들이 도망쳐 돌아갔다. 그 후에 또다시 적당의 우두머리인 반성(潘誠)⋅사류(沙劉)⋅관선생(關先生)⋅주원수(朱元帥)1) 등이 수십만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와서 안주(安州)를 습격하고 절령(岊嶺)에서 관군을 격파하였으며, 도성을 함락하였다. 이에 왕이 남쪽으로 피난을 가다가 복주(福州)【지금의 안동(安東)】에 이르러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으로 하여금 여러 군사를 인솔하여 적당을 치게 하니, 정세운이 정의심에 복받쳐 분통해 하면서 적의 무리를 소탕하기를 자신의 임무로 삼아 안우⋅이방실⋅김득배(金得培)⋅최영과 더불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적당을 크게 격파하여 사류와 관선생 등을 참수하고 도성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평장사(平章事) 김용(金鏞)이 정세운 등이 공을 세우는 것을 시기하여 정세운⋅안우⋅이방실⋅김득배를 무고하여 모두 죽여 버렸다

이때에 적국 원나라의 납합출(納哈出)이 또 북쪽 변경 지역을 침입하므로 우리 태조(太祖)2)께서 진격하여 크게 물리치셨다. 또 적신(賊臣)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들어가 원의 승상(丞相) 삭사감(搠思監)과 함께 모의하여 충선왕(忠宣王)의 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옹립하기로 하고, 김용을 내부의 공모자로 삼아 병사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고려를 향해 오자 최영⋅안우경(安遇慶) 등이 김용을 주살하고 최유를 격파하였다.

그 후에 왕이 원나라와 관계를 끊고자 우리 태조를 동북면 원수(東北面元帥)로 임명하고 지용수(池龍壽)를 서북면 원수(西北面元帥)로 삼아서 원나라를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태조가 보병(步兵)과 기병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동녕부(東寧府) 올랄성(兀剌城)을 함락하자 여러 성이 모두 멀리서 그 명망을 듣고 스스로 귀부하여 왔으므로 동쪽으로는 황성평(皇城坪), 북쪽으로는 동녕부,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기까지 부락들이 모두 텅 비게 되었다. 군사를 더 진군시켜 요양성(遼陽城)을 공파하고, 북원(北元)3)에 문서를 보내어 말하기를,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은 원래 우리나라의 옛 영토이므로 몽고(蒙古)와 한인(漢人)은 모두 여기에 관여할 수 없다.”라고 하시니, 이로 인하여 원나라와의 관계가 영구히 단절되었다.

고종(高宗) 이후로 100여 년 동안 원나라의 억압을 받아 한 나라의 정치와 교화에 관한 명령 및 왕위의 계승과 폐위까지도 모두 원나라의 명령을 따랐다. 심지어 충선왕과 충혜왕(忠惠王) 두 왕은 만리나 떨어진 남의 땅으로 유배를 당하여 낯선 곳의 외로운 넋이 되었는데, 다행이 하늘의 운수가 다시 돌아와서 그 굴레를 벗게 되었으나, 이때는 우리 부여족(扶餘族) 역사에서 가장 비관적인 시대이다. 독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기지 말고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다.

 

1)원문에는 주원장(朱元璋)으로 되어 있으나, 주원수(朱元帥)로 바로잡는다.
2)여기에서부터 등장하는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의미한다.
3)1368년 명나라 군사가 원나라의 수도 대도(大都)를 함락하자 몽골 지방으로 쫓겨 간 원나라의 잔존 세력을 가리킨다

 

황의돈 중등교과서 대동청사 - 4 ‘정토 원적과 국권의 복구(復舊)

출처 : 우리넷-역사교과서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a/webBook.do?md=2&levelId=ta_p101r_0030_0040

대동청사

1910년 황의돈이 중학교의 역사 교육을 위하여 편찬한 교과서. 역사교과서. 역사학자·애국계몽운동가·독립운동가인 해원(海圓) 황의돈(黃義敦, 1890~1964)이 단군 조선으로부터 영·정조 때까지의 한국사를 서술한 근대식 역사 교과서이

 

홍무제가 고려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다. 그 근거는 한국에서 전해지는 홍무제의 설화이다. 이 설화는 1894년 발행된 「조선기문」이라는 책에도 실려 있고 다른 몇몇 책에도 실려 있다. 설화에 따르면, 홍무제는 고려 말 경상도 웅천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학자들은 이에 홍무제의 고려인설을 부인하며 그 근거로 「주원장전」을 들었다. 「주원장전」은 1945년 발행된 홍무제의 전기인데, 이 전기문에는 홍무제가 지금의 중국 안휘성에서 태어났고 부친의 이름은 주우시이고, 모친의 이름은 천 엘밍이라고 나와 있다. 이 전기문을 근거로 든 중국 학자들은 홍무제는 틀림없는 정통 한족이라고 반박했다. 그런데 홍무제의 고려인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중국 학자들의 반론에 대한 반박을 제기했다. 「주원장전」의 내용과 「조선기문」의 내용이 흡사하고, 「조선기문」이 51년 먼저 발행되었기 때문에 「주원장전」은 「조선기문」의 내용을 참고해서 쓰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고전번역서 > 청장관전서 > 청장관전서 제62권 > 서해여언 >

명 태조(明太祖)의 선조는 삼척(三陟)에서 났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 태조실록 > 총서 > 최종정보

총서

태조가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 온 홍건적의 무리를 격퇴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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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홍건적(紅巾賊) 위평장(僞平章) 반성(潘誠)ㆍ사유(沙劉)ㆍ관선생(關先生)ㆍ주원수(朱元帥)ㆍ파두번(破頭潘) 등 20만 군사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서북 변방에 함부로 들어와서 우리에게 글을 보내[移文]기를,

“군사 1백 10만 명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니 속히 맞아 속히 맞아 항복하라.”

하였다. 태조는 적의 왕원수(王元帥) 이하 백여 명의 목을 베고 한 명을 사로잡아서 왕에게 바쳤다.

 

조선왕조실록 > 숙종실록 > 숙종 10년 갑자 > 1월 19일 > 최종정보

숙종 10년 갑자(1684) 1월 19일(을유)

10-01-19[01]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여 재이에 대하여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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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금이 신하들에게 묻기를,

“왜서계(倭書契)의 진위(眞僞)는 어떠한가?”

하니, 김석주가 말하기를,

정금(鄭錦)이 바다 만리를 건너서 남의 나라를 친다는 것은 사리(事理)가 반드시 어려울 것이고, 또 청인(淸人)이 이미 오삼계(吳三桂)를 멸망시켰고, 또 해구(海寇)와 서로 치므로 정금은 바야흐로 청인을 막기에 겨를이 없을 것인데, 어떻게 우리 나라까지 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근년에 남이성(南二星)이 연경(燕京)에 사행(使行)하였을 때에 우연히 정금의 글을 베낀 것을 얻었는데 ‘돛 하나만 달면 고려(高麗)까지 갈 듯한데, 어느 땅엔들 나라를 세울 수 없겠는가?’ 하였고, 또 예전에 동방의 땅을 다스린 자는 거의 다 다른 땅에서 왔는데 기자(箕子)ㆍ위만(衛滿)이 이것이며, 유복통(劉福通)은 중국에서 크게 일어나 곧바로 송경(松京)을 쳤고, 납합출(納哈出)은 북방에서 반란하여 자주 변방의 우환이 되었으니, 이것으로 보면 왜서(倭書)가 참된 것이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劉福通大創於中原, 而直擣松京;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29년 정묘 > 7월 27일 > 최종정보세종 29년 정묘(1447) 7월 27일(정사)29-07-27[01] 사졸 훈련과 징병에 대하여 대신들과 의논하다

옛적에 요(遼)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여진(女眞)의 군사가 만 명이 차면 천하에 적대할 이가 없다.’ 하더니, 요(遼)나라가 과연 만 명이 차고 남은 것에 패하였삽고, 고려 때에는 사적(沙賊)이 망한 원(元) 나라의 남은 졸병들로써 갑자기 서쪽 지방을 침범할 제, 변방이 막아내지 못하매, 드디어 거침없이 사뭇 밀어 무인지경을 들어오듯 하였으니, 이런 것이 곧 은감(殷鑑)이 되옵니다. 其在前朝, 沙賊以亡元之餘燼, 卒犯西鄙, 邊方失馭, 遂長驅不止, 如入無人之境, 是謂殷鑑。

 

중종실록 103권, 중종 39년 5월 27일 甲子 1번째기사 1544년 명 가정(嘉靖) 23년

또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여 모두들 돌 위에다 흙을 북돋우고 보리를 심어 먹으므로, 우리 나라에서 접대(接待)받지 않으면 먹고 살 것이 없어 장차는 궁지에 빠진 도적이 되어 부득이 노략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서·북 변방의 일도 또한 매우 허술하여 침범해 오는 일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전조 말년에 거란[契丹]이 한없이 밀려와 양근(楊根)·충주(忠州)·원주(原州)에까지 들어왔으므로, 문반(文班)과 종친까지 모두 군액에 충당했었으니,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또 시운으로 보더라도 백년토록 태평한 시운은 없었으니, 이번에 왜노들을 거절하는 것은 경솔한 일인듯 싶습니다. 그 왜노들은 입을 것과 먹을 것의 근원이 우리에게 있으므로 마침내는 반드시 항복을 애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와서 항복하면 반드시 경솔하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반드시 두 세 차례 와서 애걸한 다음에야 바야흐로 납관(納款)267) 을 허락하게 될 것이니, 변방 백성들이 받는 피해가 많을까 염려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권 / 경도 상(京都上),,,,,옛날을 살펴보면, “그 나라는 서너 나라로 봉해졌는데, 지금은 하나만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신라(新羅)ㆍ백제(百濟)ㆍ탐라(耽羅)가 지금은 다 그 소유가 되었다. 생각건대, 앞 사람의 실패한 자취를 밟지 않았으니, 그 까닭은 당시대의 깊은 은혜를 홀로 입었기 때문이다. 조서(詔書)로써 나라 세운 것을 허락하여 독자적으로 덕화를 펴게 하니, 본조 홍무(弘武) 2년에 고려국의 왕 왕전(王顓)이 표(表)로써 즉위(卽位)를 축하하여 조서로 독자적으로 교화를 펴도록 허락하고, 구뉴(龜紐)와 금인(金印)을 내려주었다本朝洪武二年,高麗國王王顓賀卽位。詔許自爲聲敎,賜以龜紐金印。】

 

태조(太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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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봉() 찬(撰)

우리 태조의 개국(開國)도 명태조 고황제(明太祖高皇帝)와 같은 때이다.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승정원일기 > 고종 > 고종 10년 계유 > 12월 19일 > 최종정보

고종 10년 계유(1873) 12월 19일(계사) 맑음

10-12-19[39] 만동묘 등을 다시 설치할 것 등을 청하는 청산의 유학 이병규 등의 상소

. 우리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과 우리 명 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는 동시에 나라를 세웠는데, 내지(內地)처럼 보아 번신(藩臣)의 예우를 극진히 한 지 300년이 되었습니다

 

해동잡록 4 본조(本朝)

성삼문(成三問)

차원부는 본시 처사로 공리를 생각하지 않고 바위 골짜기에다 집을 짓고 서너 명의 형들과 더불어 도[天眞]를 닦고 있었다. 태조가 나라의 근본인 중대사를 의논하려 하였으나 미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대상이 없어 아쉬워할 적에 갑자기 꿈을 꾸고 깨달은 점이 있었다. 과거에 위화도 회군을 의논하였을 적에 다섯 번의 칙서(勅書) 내려 한 달에 사흘은 방문해 주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서자(庶子)가 적자(嫡子)를 싫어하는 태자들의 이 일어나게 되어 네 형(兄)과 함께 주살되고 말았으니 이때의 사실을 누가 감히 명백하게 변명할 수 있을 것인가? 신은 또 중병이 있어서 마음과 정신이 어지러워 실수가 많아 평상시의 일을 기억하려 하나 잊어버리고 보답하지 않았다. 그 많은 은총에 보답 하나 못하였으니 신이 만 번 죽어도 죄를 용서 받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차원부가 원을 풀게 되었으니 어찌 시운의 성쇠에 따른 일이 아니겠는가마는 오로지 성상께서 선대의 유의(遺意)를 이어서 살펴보신 결과인 것이다.” 하였다

 

성호전집 25 / ()

안백순의 문목에 답하는 편지〔答安百順問目〕

예전에 《강감금단(綱鑑金丹)》이라는 책을 보니 태조(明太祖) 처음 태어난 날부터 이미 정통의 호칭을 붙였습니다. 실질보다 형식이 성하게 된 폐단이 줄곧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조선건국 1392(홍무25이방원 생년 1367+25 1392

 

고전번역서 > 존재집 > 존재집 제17권 > 잡저 > 최종정보

존재집 17 / 잡저(雜著)

춘추대의에 대한 변〔春秋大義辨〕

당시 탄환(彈丸)이나 검은 점 정도의 조그만 우리나라로써 부상당하고 잔약한 병졸들을 거느리고 북을 치며 강을 건너 장성(長城) 아래에서 사마귀가 수레바퀴에 대항하듯이, 계문(薊門) 밖에서 호랑이의 입을 손으로 더듬 듯이 하여 진(秦)나라 사람들이 함곡관을 열어 우리 병졸들을 맞이해 싸웠다면 의무려산(醫巫閭山) 초목(草木) 화표(華表) 우는 학이 모두 ()나라 병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좌해(左海수천 가 눈 깜짝할 사이에 위급한 상태로 빠져들어 종묘사직에 혈식(血食 제사)을 올리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부녀자와 어린아이라도 모두 불을 보듯 뻔히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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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영릉(寧陵 효종(孝宗))께서 살아 계실 때 바다를 건넌 명나라 황손의 소식이 아득했지만 그 혹 유잉(有仍) 일성(一成)이 있을지는 알 수가 없었고, 연경(燕京 청나라)이 비록 강하지만 그 운수가 부견(苻堅) 유총(劉聰)에 불과할지 또한 알 수 없었다. 군사의 출동에 명분이 있고 주장이 곧으면 씩씩하니, 만일 의리로 격려하고 인(仁)으로 결속하여 죽을 각오로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성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드물 것이다. 소강(少康)의 소규모 군대가 후예(后羿)의 40년 강성함을 멸망시켰고, 사현(謝玄)의 군사 4만 명이 부견의 자칭 백만 대군을 물리쳤으니, 전쟁에서 어찌 숫자의 많고 적음에 구애받겠는가.

중원의 양자강 남쪽 지역이 아직도  ()나라를 잊지 못해반쯤은 협박에 마지못해 따르고 있었고 천하에 변발 때문에 분노와 수치심을 품은 자가  태반이었다만일 사신 하나를 배로 보내 운남(雲南)ㆍ광주(廣州)ㆍ절강(浙江)ㆍ복주(福州) 다니면서 창의(倡義)하는 격문을 널리 전파했다면, 반드시 관중(關中)의 부로(父老)가 사마씨(司馬氏) 진(晉)나라의 지난날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을 것이고, 하북(河北) 호걸들이 속저(屬猪 ()나라의 별칭) 중원 회복을 원하였을 것이다. 드디어 타고(鼉鼓)를 둥둥 두드리고 압록강을 건너 깃발을 휘날리며 요동으로 진격해서 소탕하고 남방이 이에 호응했다면, 적의 군세가 두 방면으로 분리되었을 것이다. 오랑캐 땅으로 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 사람의 마음이 의심을 품었을 것이니, 정지룡(鄭芝龍)의 무리가 (뒤의 주서(朱序)가 되지 않았을지, 오삼계(吳三桂)라는 자가 공을 세워 죄를 갚겠다는 이릉(李陵)을 생각하지 않았을지를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이는 만에 하나의 요행이고, 군자가 헤아리는 상황은 아니었다.

비록 불행하게 공로를 세우지 못하더라도 돌아가 신종황제(神宗皇帝)를 뵙고 눈물을 흘리며 감히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사죄하고, 소경대왕(昭敬大王 선조(宣祖))에게 어찌할 수 없는 부득이한 심정으로 울면서 말한다면, 우러러봐도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굽어봐도 마음에 속임이 없으며, 이승에서는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저승에서는 귀신에게 버림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의로운 명성이 천하를 진동시키고 어진 소문이 온 사해에까지 퍼진다면 조선 강헌왕(康獻王 태조(太祖)) 나라는 만고토록 망하지 않을 것이다이것이 바로 주자의 당일(當日마음이었다.

 황조(皇朝 ()나라대일통의 만년(萬年보배로운 국운이 중간에 270 만에 운명을 다했으니,

자식 된 나라에서 하늘을 향해 울부짖고 땅을 치며 피를 뿜어 바다를 이루는 까닭이다. 그런데 지난날 임진왜란의 재앙이 바로 우리나라가 수립된  2  만에 발생하였다부모와 같은 은혜에 의지하여 다행히 70년을 연장하였으니, 70년이란 흡사 부모의 나이와 같다복수를 위한 군사 출동이 다행히 성취된다면 고황제(高皇帝)의 영령 덕분이며, 불행히 성취되지 못하더라도 각자의 위치에서 지조를 지킬 것이니, 또한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이것이 바로 효묘(孝廟 효종)의 당일 마음이고, 한 명의 신하 송(宋) 아무개가 명을 받들어 부지런히 힘쓴 것이었다. 만일 “우옹이 이를 가지고 임금을 협박하여 스스로 명성과 이익을 취했다.”라고 말한다면, 당시 또한 의탁할 만한 별도의 의론이 있었으니, 고심할 필요 없이 부귀를 편안히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필이면 만에 하나도 다행히 없는 일을 많은 사람들의 뜻과 어긋나면서까지 어렵게 도모했겠는가.

 

명나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명나라(明朝, 1368년 ~ 1662년)는 중국 역대 왕조 중 하나로 주원장(朱元璋)이 원나라를 몰아내고 세운 한족 왕조이다. 정식 국호는 대명(大明)이며, 모두 16명의 황제가 있었고 277년간 존속했다. 청나라의 거듭되는 침공과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하였고 그 뒤에는 청나라가 이자성의 반군과 남명(南明)을 제압하고 중국을 지배하였다

 

(1392+270=1662).(1368+294=1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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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 6 / 만물문(萬物門)

성회시말(聖檜始末)

《궐리지(闕里志)에 상고하니, “마른 회나무 두 그루가 찬덕전(贊德殿) 앞에 있는데, 높이는 여섯 길이 넘고 둘레는 한 길 넉 자이며 그 가지는 왼쪽의 것은 왼쪽으로, 오른쪽의 것은 오른쪽으로 연결되었다. 한 그루는 행단(杏壇) 동남쪽 모퉁이에 있어, 높이는 다섯 길이 넘고 둘레는 한 길 석 자이며 그 가지는 이리저리 서리고 굽은 것이 용의 모양과 흡사한데, 세상에서 이를 다시 살아난 전나무[再生檜]라고 한다.

진(晉) 나라 영가(永嘉) 3년에 말라 죽었다가 수(隋) 나라 의령(義寧) 원년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인데, 금(金) 나라 정우(貞祐) 갑술년에 북로(北虜)가 조묘(祖廟)를 침범했을 때 전나무 세 그루를 불태워 버렸다. 마침 49세 손 묘학 정(廟學正) 당(塘)이 족인(族人)과 함께 사당에서 병화(兵火)를 피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오색 구름이 사당 위로 퍼져 덮이고 구름 속에는 여러 마리 학이 오랫동안 날면서 울다가 흩어지는바, 모두 불타 버린 나머지에 있는 것만 갖고 궐하(闕下)까지 이르렀다.

지대(至大) 갑신년에 내성 지사(內省知事)로서 개봉부(開封府)에 부임한 이세룡(李世龍)이 공인(工人)을 시켜 선성(先聖)의 얼굴과 종사 제현(從祀諸賢)의 초상을 새기도록 하고, 연성공(衍聖公) 원조(元措)를 불러 모시게 한 다음, 그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80 만인 계사년은  세조의 지원(至元) 13이었는데, 도강(導江) 장자(張頾)가 교수(敎授)로 부임해 왔다.

갑오년 봄에 동무(東蕪)가 없어진 자리의 벽돌 틈바구니에서 전나무 싹이 뾰족히 터져 나오므로 장자가 친히 옛터에 옮겨 심고 맹서하면서 이르기를, ‘이 전나무가 잘 자라나면 공씨(孔氏)도 날로 흥왕할 것이다.’고 했는데, 이듬해 봄이 되자 전나무는 푸른빛이 아주 무성하게 되었다. 또 한 해를 지난 병신년에는 그의 임기가 차서 딴 곳으로 가게 되였는데, 전일 맹서한 말이 징험이 있다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성회명(聖檜銘)을 지어 사실을 기록하였다.

 계사년에서 우리 국조(國朝홍무(洪武) 원년까지는 겨우 75년밖에 되지 않는데, 이 전나무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으니, 이는 우리 중원(中原)에 훌륭한 다스림을 열어 주는 징조다.

[-D009] 지대(至大) :

원 무종(元武宗)의 연호. 지대는 무신년(1308)에서 경술년(1310)까지 3년간 이었으므로 아래 갑신년은 아마 무신년의 잘못인 듯함.

[-D011]   80 …… 지원(至元) 13 :

지원(至元)은 원 세조(元世祖)의 연호(1264~1294). 13년은 연표로 따져  결과 30년의 잘못인 듯함.

[-D012] 홍무(洪武) :

명 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章)의 연호.

 

지원131292 – 태종이방원 탄생년1367 = 75

 

 

명태조 주원장 :

출생 1328년 10월 21일
사망 1398년 06월 24일 음력 1328년 9월 18일 ~ 1398년 5월 10일
국적 중국 명(明)

태조 이성계

시대 조선
출생 1335년(충숙왕 복위 4)
사망 1408년(태종 8) 05월 24일
본관 전주(全州

태종 이방원

시대 조선
출생 1367년(공민왕 16)
사망 1422년(세종 4) 음력 5 10
본명 이방원(李芳遠)
본관 전주(全州)

영락제 주체

출생 1360. 5. 2, 중국 난징[南京]
사망 1424. 8. 5
국적 중국, 명(明)

 

조선왕조실록 > 영조실록 > 영조 27년 신미 > 5월 10일 > 최종정보

영조 27년 신미(1751) 5월 10일(병오)

27-05-10[01] 명 태조의 기신을 맞아 망배례를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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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후원(後苑)에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으니, ()나라 태조(太祖) 기신(忌辰)이었기 때문이다.

【원전】 43 집 402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조선왕조실록 > 영조실록 > 영조 30년 갑술 > 5월 9일 > 최종정보

영조 30년 갑술(1754) 5월 9일(정해)

30-05-09[03] 태종 황제의 기신의 망배례를 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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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명정전(明政殿)의 계상(階上)에서 태종 황제(太宗皇帝) 기신(忌辰)의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영조 41년 을유(1765) 5월 9일(계미)

41-05-09[01] 헌릉의 기신에 쓸 향을 숭현문에서 지영하다

임금이 헌릉(獻陵)의 기신(忌辰)에 쓸 향을 숭현문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원전】 44 집 199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주-D001] 헌릉(獻陵) :

태종(太宗)과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능.

 

영조 44년 무자(1768) 5월 10일(정유)

44-05-10[01]  태조와 조선 태종의 기신이어서 망배례를 행하다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거행하였는데, 이날은 명(明)나라 태조(太祖)의 기신이었고 또한 우리 태종 대왕의 기신이었다. 유신(儒臣)을 명하여 《명사(明史)》를 읽도록 하고, 또 《태종조보감(太宗朝寶鑑)》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태종대왕 기신일 1422년(세종 4) 음력 5월 10일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5년 계묘 > 1월 12일 > 최종정보

세종 5 계묘(1423) 1 12(갑오)

05-01-12[07] 일본국 축주 관사 평만경이 토산물을 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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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의 축주 관사(筑州管事) 평만경(平滿景)이 사람을 시켜 토산물을 바치니, 그를 접대하라고 명하였다. 그 서신(書信)에,“만경(滿景)은 선고 황제(先考皇帝) 돌아가셨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적에 하늘을 우러러보고 통곡했으며 땅에 몸을 던져 울었습니다. 크게 의지할 곳을 잃었으니, 불행한 일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었습니다. 우러러 마음을 상하여 평삼랑 좌위문(平三郞左衛門)으로 하여금 글을 받들어 슬픔을 고하오니, 삼가 아뢰어 드리기를 원합니다.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5년 계묘 > 2월 5일 > 최종정보

세종 5 계묘(1423) 2 5(병진)

05-02-05[05] 좌위문대랑이 사람을 시켜 토산물을 바치고소한하상가ㆍ원도진 등이 글을 올리다

좌위문대랑(左衛門大郞)이 사람을 시켜 토산물을 바쳤다. 소한하상가(小旱河常嘉)가 사람을 시켜 예조에 글을 올렸는데, 그 글에,“선고 황제(先考皇帝)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말을 받자와, 처음 듣고 놀라서 음식을 잊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상상하건대, 임금의 효성으로 사모하고 슬퍼하심이 지극하사 〈멀리 있는〉 저의 마음까지 감격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닷길이 멀어서 능히 몸소 소위(素幃)에 나아가 뵈옵지 못하와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사신으로 행인(行人) 석조선(釋祖禪)을 보내어 각하(閣下)에게 서신을 올리오니 삼가 위에 아뢰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였다.

 

세종 30년 무진(1448) 4월 27일(임오)

30-04-27[01] 휘덕전 진향과 장경을 청하는 일본 국사의 글

. 그 일본 국사의 글에 이르기를,

“일본 정사(正使) 문계정우(文溪正祐)는 재배 돈수(頓首)하고 조선국 예조의 제위(諸位) 합하(閤下)에 장(狀)을 올립니다.

…………..

정묘년 중추(仲秋)에 우리 왕경(王京)을 하직하고 무신년 4월 초승에 대국 지경에 들어오기까지 이미 아홉 달을 지냈으니 역려(逆旅)가 오래다 하겠고, 종자(從者)들의 노고가 가지가지인 것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아실 것이니, 어질게 사랑하여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태상 황후(太上皇后)께서 지난해에 세상을 떠나셨다는 말은 들었으나, 두 나라 중간에 큰 물결이 만리나 되어서 그 당시에 서로 위문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밀어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30년 무진 > 6월 21일 > 최종정보

세종 30년 무진(1448) 6월 21일(을해)

30-06-21[01] 일본국 사신 정우의 진향을 받을 것인가 여부를 논란하다

. 제문에 이르기를,

“남섬부주(南贍部洲) 일본군 정사(正使) 사문(沙門) 문계 건탁(文溪乾琢)은 공경하여 나라의 명령을 받고 정성스럽게 비박(菲薄)한 전을 조선 귀국(朝鮮貴國선태상 황후(先太上皇后) 존묘(尊廟) 아래에 갖추어 동맹(同盟)하여 서로 구휼하는 정성을 고하고, 삼가 승려(僧侶)를 거느려 소리를 같이하여 대불정(大佛頂) 만행수(萬行首) 능엄신축(楞嚴神祝)에서 모인 선리(善利)를 풍연(諷演)하여, 받들어 존묘(尊廟)의 장엄(莊嚴)한 갚을 땅을 삼습니다.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16년 무인 > 3월 9일 > 최종정보

………..

 우리 고황제(高皇帝)께서는 온갖 정무(政務)에 힘쓰시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에 뜻을 세우셨으니, 진실로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작은 종이에 적어 - 원문 빠짐 - 누더기 같았습니다. 만약 시행하지 않았으면 끝내 풀어 놓지 않았으며, 전각(殿閣)의 사이에 그림을 그리지 않아 - 원문 빠짐 - 《대학연의(大學衍義)》와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조회(朝會)를 파한 여가에 손에 받들고 읽어 한 가지 정책과 한 가지 법령이라도 체득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홍무(洪武) 연간이 상란(喪亂)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음에도 백성들이 안주하였고 물산(物産)이 풍부하였으며 천하는 안락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 영조실록 > 영조 44년 무자 > 5월 10일 > 최종정보

영조 44년 무자(1768) 5월 10일(정유)

44-05-10[02] 《대학연의》를 강한하고 입시한 유신들에게 아마를 하사하다

여러 유신을 명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가지고 입시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고황제(高皇帝) 《대학연의》를 전랑(殿廊)에서 썼었는데, 내가 이날을 만났으니, 《대학(大學)》을 강론하여야겠다.”

하고, 이어 친히 경 일장(經一章)을 외었다. 하교하기를,

“지금 《대학연의》를 강하면서 직접 본문을 외운 것은 옛날을 뒤따라 추모하는 뜻이다. 입시한 다섯 유신에게 모두 아마(兒馬) 한 필씩을 특별히 하사하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 태조실록 > 총서 > 최종정보

총서

태조가 무인이면서도 문인과 경사를 토론하고 대학연의》를 즐겨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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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본디부터 유술(儒術)을 존중하여, 비록 군중(軍中)에 있더라도 매양 창[戈]을 던지고 휴식할 동안에는 유사(儒士) 유경(劉敬) 등을 인접(引接)하여 경사(經史)를 토론(討論)하였으며, 더욱이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 보기를 좋아하여 혹은 밤중에 이르도록 자지 않았으며, 개연(慨然)히 세상의 도의(道義)를 만회(挽回)할 뜻을 가졌었다.

【원전】 1 집 11 면

【분류】 인물(人物) / 역사(歷史) / 왕실(王室) / 사상(思想) / 출판-서책(書冊)

[주-D001] 진덕수(眞德秀) :

송(宋)나라의 유학자. 주자 학파(朱子學派)의 학자로서 서산선생(西山先生)이라 일컬었으며

 

고전번역서 > 동사강목 > 동사강목 제15상 > 최종정보

………..

 태조는 장수 구실을 함에 있어 호령이 명확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마음씀이 활달하고 너그러웠다. 전쟁이 없는 여가에는 이름난 유학자들과 함께 경사(經史)를 토론하되 특히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즐겨 보고 개연히 세도(世道)를 만회할 뜻을 두었다. 용기와 지략이 일세를 덮었으며 영특함과 예기가 뛰어나 일시 물망이 모두 우리 태조에게 쏠렸다.

 

고전번역서 > 양촌집 > 양촌선생문집 제33권 > 책제류 > 최종정보

양촌선생문집 제33권 / 책제류(策題類)

전시(殿試) 책문의 제

왕은 말하노라. 《대학(大學)》은 성현들이 만세에 물려준 법으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리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 선유(先儒) 진씨(眞氏 이름은 덕수(德秀). 송 나라의 유학자)는 이를 더욱 부연하고 보완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저술하였으니,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하는 왕이나, 학문에 뜻을 둔 선비들이라면 마땅히 이를 참고하고 연구하여야 될 줄 안다. 부덕한 내가 임금자리에 있으면서 치도(治道)를 배워 기필코 세상을 안정시키고자 하므로, 정사를 보살피는 여가에 전부터 읽어 왔다. 그 글 내용의 절차에 대하여 의심스러운 것이 많으나 그 조목을 다 들어 논하지는 못하고 우선 큰 것만을 들어 말하노라.

...............................

이것은 내가 비록 대학연의》를 읽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바가 미치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인가. 아니면 정치와 법령이 현실에 맞지 않은 바가 있어서 이러한 것인가. 자대부들은 이를 남김없이 말하여 나의 훌륭한 정치를 원하는 마음에 부응케 할지어다.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 > 태종 1년 신사 > 윤 3월 23일 > 최종정보

태종 1 신사(1401)  3 23(임자)

01-윤03-23[01] 경연에서 불교 폐지론 등에 관해서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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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經筵)에 나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 ()하다가, 배연령(裵延齡)이 탁지(度支)가 되었을 때의 일에 이르러서,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사복시(司僕寺)에 신참(新參)의 말값[馬價]을 바치는 법이 있다는데, 있는가?”

하니, 시독관(侍讀官) 등이 대답하기를,

“있습니다.”

하였다.

 

고전번역서 > 동문선 > 동문선 제8권 > 칠언고시 > 최종정보


동문선 제8권 / 칠언고시(七言古詩)
주상(主上) 거가(車駕) 송헌(松軒)  시중(李侍中 李成桂)의 저(邸)에 임행(臨幸)하시매 조정의 여러분들이 다 시를 지어 하례하옵는데 기(幾) 자 운(韻)을 얻고서[伏覩車駕臨幸松軒李侍中第薦紳諸公咸作詩以賀得幾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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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종(尹紹宗)

서도ㆍ북도에도 모두 글 읽는 소리 / 西鄙北鄙絃歌聲
동왜ㆍ남만이 공물을 바치네 / 東倭南蠻琛厥
해륙의 운수가 40년에 다시 트여 / 漕斷陸輓四十年
어렴의 이가 통해 유민들이 모여들고 / 漁鹽利通來流鬼
전쟁에 시달렸던 연변 백성들도 / 萬戰四散沿邊民
고향에 돌아와서 폐허를 개간하고 / 咸還鄕墟墾荊葦
경연의 대유들을 조석으로 모셔서 / 經筵大儒侍朝夕
이제 삼왕을 부지런히 강설하네 / 二帝三王陳亹亹
성덕을 보양하여 날마다 새롭게 하니 / 輔養聖德日日新
주공 뒤에 이런 분 몇이 있었던고 / 周公之後曾有幾
서산연의 동궁에 내놓고 / 西山衍義進東宮
명덕ㆍ신민을 자초지종 아뢰니 / 明德新民窮首尾
보ㆍ부(벼슬 이름 태보(太保)와 태부(太傅))와 빈우들이 모두 기와 용(요순(堯舜) 때의 어진 신하)이니 / 保傅賓友盡夔龍
출입 기거에 어찌 소인을 친하랴 / 出入起居寧比匪
만세 대업을 공께서 여시니 / 萬世大平開自公
중흥의 정치를 하늘이 도우시네 / 中興致治實天棐
천자께서 갸륵히 여겨 특히 봉호내리시니 / 帝嘉匡復特勞賜
삼한 충의공  이름 빛날씨고 / 三韓忠義公有斐
배사공의 저택과 조보의 당도 / 裴司空第趙普堂
삼대 같은 거룩한 명주 못 모셨으나 / 未擧明主三代韙
상공께서 절하시고 낮을 점쳐서 만세수를 드리오니 / 公拜卜晝獻萬壽
공훈이 이ㆍ주와 함께 길이 크시나이다 / 宗勛永與伊周偉

[주-D003] 서산연의(西山衍義) :
송(宋) 나라 진덕수(眞德秀)의 호는 서산인데, 대학을 해설하여《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지어 임금께 올렸는데, 이때에 경연(經筵)에서 그 책을 강의하였다.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6년 갑진 > 2월 11일 > 최종정보

세종 6년 갑진(1424) 2월 11일(정사)

06-02-11[03] 산천에 작을 봉하는 것과 묘를 세우는 것에 관해 논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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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상정 제조(詳定提調) 성산 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 등에게 명하기를,

여러 곳의 성황(城隍) 산신(山神) 흔히 태왕(太王)ㆍ태후(太后)ㆍ태자(太子)ㆍ태손(太孫)ㆍ비()라고 칭하는 것은 심히 무리하다이것들은 진실로 요망한 귀신이니, 옛날에는 단(壇)을 산 밑에 설치하고 제사하였는데, 이제 감악(紺嶽) 등과 같은 산에는 묘(廟)를 산 위에 세우고 그 산을 밟으며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친압(親狎)하고 설만(褻慢)하여 불경(不敬)하다. 옛날 예(禮)에는 오직 국왕만이 봉강(封疆)안에 있는 산천에 제사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서민이 다 제사할 수 있게 되었으니, 명분이 엄숙하지 아니하다. 나의 생각으로는 단(壇)을 산 밑에 설치하고 신판(神板)을 두되, 다만 아무 산 신령이라 하여 다만 국가에서만 제사하고, 민간에서 지나친 제사는 금지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하려 하니, 경 등은 모두 산천에 작(爵)을 봉하는 것과 묘(廟)를 세우는 옛날 법제를 상고하여 아뢰라.”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 선조 27년 갑오 > 8월 10일 > 최종정보

선조 27 갑오(1594) 8 10(을묘)

27-08-10[02] 중국에 자문을 보내는 일과 몇가지 인사 문제를 논하다

, 성룡이 아뢰기를,

“전일에 총병이 품첩(稟帖)의 초안을 보여주었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많은 군사를 발송해야만 칠 수 있다고 하였고, 척금(戚金)의 품첩에도 ‘조선은 꼭 원조해야 할 나라이다. 고황제(高皇帝)께서 연경(燕京) 서울로 정하고 요좌(遼左)와 조선을 왼쪽 날개로 삼았으니 조선을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선조 27 갑오(1594) 6 2(기유)

27-06-02[04] 봉공의 반대하는 예부 주객 청리사 제독 회동관 주사 홍계준의 주본 내용

예부 주객 청리사 제독 회동관 주사 홍계준의 주본에,

그런데  우둔한 왜노만은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바다의 거북이와 물고기 족속 속에 던져버리고 문고(文告) 반열에 포함시키지 않아  훈계하심이 삼엄했었습니다우리 성조 문황제(成祖文皇帝때에 왜노가 애걸 복걸하여 비로소 봉공해주었으나 당시 조공의 시기와 사신의 숫자를 한정시키면서 우리의 방비를 더욱 닦았습니다. 그후 변태와 거짓이 갖가지로 나오고 배반과 복종함이 일정치 않아 선덕(宣德)정통(正統) 때부터 가정(嘉靖) 말엽까지 내지(內地)를 침략하여 그들이 지나간 곳은 폐허가 되었으므로 강남(江南)에서는 지금도 그들을 호랑이라고 말하니, 대체로 봉공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것입니다

 

태조 5 병자(1396) 12 3(정해)

05-12-03[01] 일기도ㆍ대마도를 정벌하러 떠나는 우정승 김사형 등에게 내린 교서

문하 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金士衡)으로 오도 병마 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를 삼고,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태학사(太學士) 남재(南在)로 도병마사(都兵馬使)를 삼고,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신극공(辛克恭)으로 병마사(兵馬使)를 삼고, 전 도관찰사(都觀察使) 이무(李茂)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삼아, 5() 병선(兵船) 모아서 일기도(一岐島) 대마도(對馬島) 치게 하였다길을 떠날 때에, 임금이 남대문 밖까지 나가서 이를 전송하고, 사형에게 부월(鈇鉞)과 교서(敎書)를 주고 안장 갖춘 말[鞍馬]ㆍ모관(毛冠)ㆍ갑옷ㆍ궁시(弓矢)ㆍ약상자(藥箱子)를 내려 주었으며, 재ㆍ무ㆍ극공에게는 각각 모관ㆍ갑옷ㆍ궁시를 내려 주었다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12년 경술 > 4월 13일 > 최종정보

세종 12 경술(1430) 4 13(계미)

12-04-13[05] 박안신이 왜구를 막을 병선을 제조할 것을 상소하다

무진년에 적이 우리 나라에서 요동(遼東) 치는 일이 있어서 전함(戰艦) 허소함을 알고 이에 진포(鎭浦) 와서 머물면서 경상도를 지나 들어와서 도둑질하고 돌아갔습니다이때 우리 태조 대왕께서 잠저(潛邸) 계실 적에 병권(兵權) 잡고 계셨는데 이에 크게 노하사이듬해 기사년에 꾀하여 변장을 보내어 병선을 거느리고 대마도에 가서 적선 수십 척을 불사르고 돌아오니적이 서로 경계하기를, ‘고려 병선이 이처럼 와서 공격하니 장차  섬에   없을 것이라.’ 하고가족을 데리고 이사하는 자가  있었습니다기해년에 적이 우리의 준비 없는 틈을 타서 비인(庇仁)에 와 닿아 병선을 불지르고 변장(邊將)을 죽이니, 우리 태종 대왕께서 계책을 결단하시고 장수에게 명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대마도에 가서 그 죄를 문책하고, 적선(賊船)을 불태우며 빼앗은 것이 거의 수백 척에 이르니, 적이 이에 간담이 떨어져서 항복을 청하고 귀순하였으니 오늘처럼 절박한 일은 없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 성종실록 > 성종 10년 기해 > 12월 21일 > 최종정보

성종 10 기해(1479) 12 21(임신)

 심회(沈澮)는 말하기를,

“옛날의 제왕(帝王)들도 각기 스스로 그 백성들을 보호했으니, 전하(殿下)께서도 마땅히 우리 백성의 힘을 아껴야 할 뿐인데, 어찌 중국(中國)을 섬기는 일에만 전일(專一)하여 우리 백성의 힘을 시달리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서거정(徐居正)은 말하기를,

고황제(高皇帝)께서 일찍이 말하기를, ‘그대의 나라는 해내(海內)의 제후(諸侯)에 비한다.’고 했으며, 지금의 천자(天子)도 우리를 예절로써 존중하고 있는데,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이 옳겠습니까? 옛날에 전조(前朝)에 있어서도 우리 나라를 동녕부(東寧府)로 삼아 조신(朝臣)을 보내어 이를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조정에 이르러서는 1년에 사자(使者)를 두 번이나 보낸 적이 또한 여러 번 있었습니다. 지금의 시기는 또한 전일보다는 단출한데도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의리에 있어서 어떻겠습니까?”

 

 

○ 태조가 개국하자, 재상 조반(趙胖)이 중국에서 생장하였으므로, 그를 주문사(奏聞使)로 삼아 명나라에 보냈는데, 고황제가 불러 들여 고려 왕조를 빼앗은 것을 꾸짖었다. 조반(趙胖)이 대답하기를, “역대로 창업하신 군주들은 거의 모두가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혁명을 이룩한 이들이요, 유독 우리나라만은 아닙니다.” 하여, 은밀히 명나라가 개국한 일과 견주어 지적하였다. 말도 중국말을 썼으므로, 황제가 이르기를, “그대가 어찌하여 중국말을 할 줄 아는가.” 하니, 조반이 아뢰기를, “신(臣)이 중국에서 생장하였고, 일찍이 폐하를  나라 탈탈(脫脫)  군중(軍中)에서  적이 있습니다.” 하였다황제가  당시의 일들을 물으니 반이 일일이  말하므로황제가 용상에서 내려와 조반의 손을 잡고 이르기를, “만약 탈탈이 있었더라면 내가 여기에 이르지 못하였을 것이다. 경은 진실로 나의 친구이다.” 하고, 빈객의 예로써 그를 대접하고, ‘조선(朝鮮)’이란 두 글자를 써서 보내주었다. 성현(成俔) 《용재총화(慵齋叢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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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집 2 / 항전척독(杭傳尺牘)

 고려는 5백 년 누렸다. 홍무(洪武) 28년에 본국 태조 황제를 위하여 조선이라 이름을 지었다. 이것이 국조의 연혁의 대개이다. 洪武二十八年。爲本國太祖。皇帝命名以朝鮮 홍무28 1395

기자는 평양에 도읍하니 지금 평안도이고, 신라는 경주에 도읍하니 지금 경상도이고, 백제는 부여에 도읍하니 지금 충청도이고, 고구려도 또 평양에 도읍하고, 고려는 송경(松京)에 도읍하고, 본국은 한양(漢陽)에 도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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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 20 / 경사문(經史門)

최영 공요(崔瑩攻遼)

내가 《여사(麗史)》에 상고해 보니, 대개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아태조(我太祖)의 위명(威名)이 날로 강성해지자 국내의 병력(兵力)으로써는 도저히 억눌러 막을  없었다이러므로 최영의 무리가 문득 상국(上國) 의뢰하여 그들의 하고 싶은 일을 도모하려고 했었다이때 대명(大明) 새로 천하를 평정시키느라고 외국을 도모할 생각이 없었던 까닭에변방 고을에 일을 만들어서 원제(元帝) 분노를 충격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후에 이목은(李牧隱) 경사(京師) 나아가게 되었다그는 돌아오기 전에 무슨 변이 생길까 두려워 태조와 함께 가기를 요청하자태조는, “내가 공과 함께 사신으로 가면 나라 일은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하면서 태종(太宗) 서장관(書狀官)으로 삼도록 하였다.

그는 돌아와 이르기를, “원제(元帝) 마음에 주견이 없는 사람입디다나의 의견에는 원제 반드시  사실을 물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제는 한마디도 묻지 않고묻는다는 것은 모두 나로서는 생각지 않던 것입디다.” 했는바지금까지 전해 오는 말이, “원제에게 동정(東征) 권했으나 듣지 않은 까닭에 이렇게 이른 말이다.”라고들 하니 말에 따르면 목은 같은 모든 사람의 마음도 짐작할  있다.

앞서 마침내 요동(遼東)에서 도망쳐 온 자가 있어 말하기를, “원제가 장차 처녀ㆍ수재(秀才)ㆍ환관(宦官) 각 1천 명과 소와 말도 각각 1천 필씩을 바치라고 요구할 것이다.” 하니, 최영은 “군사를 일으켜 치는 것이 옳겠다.”고 하였다.

또 서북면 안무사(西北面安撫使)가 요동도사(遼東都司)에게 와서 전하기를,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니, 방(榜)에, ‘호부(戶部)에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철령(鐵嶺) 이북ㆍ이동ㆍ이서는 (나라에 소속시키고 개원(開元)에서 관리하는 군인(軍人) 중에 한인(漢人)ㆍ여진(女眞)ㆍ달달(達達)ㆍ고려는 그냥 요동에 소속시켜 둔다고 씌어 있다.” 하므로 드디어 요동을 공격할 계획을 결정하였다.

나중에 조반(趙胖) 등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와 이르기를, “우리나라 사람 파평군(坡平君) 윤이(尹彝)와 중랑장(中郞將) 이초(李初)라는 자가 와서 원제에게, ‘이시중(李侍中) 모가 왕요(王瑤)를 세워 임금으로 삼았으나 요는 종실(宗室)이 아니고 시중의 인친(姻親)입니다. 요가 시중과 더불어 군사를 출동시켜 상국(上國)을 침범할 계획을 하므로 재상 이색(李穡) 등이 옳지 못하다고 하니, 즉시 이색ㆍ조민수(曺敏修)ㆍ이임(李琳)ㆍ변안열(邊安烈)ㆍ권중화(權仲和)ㆍ장하(張夏)ㆍ이숭인(李崇仁)ㆍ권근(權近)ㆍ이종학(李種學)ㆍ이귀생(李貴生) 등은 잡아 살해하려 하고, 우현보(禹玄寶)ㆍ우인열(禹仁烈)ㆍ정지(鄭地)ㆍ김종연(金宗衍)ㆍ윤유린(尹有麟)ㆍ홍인계(洪仁桂)ㆍ진을서(陳乙瑞)ㆍ경보(慶補)ㆍ이인민(李仁敏) 등은 잡아서 멀리 귀양보냈습니다. 그 중 좌천당한 재상들이 남몰래 우리를 시켜 천자께 고하도록 한 것입니다.’ 하고, 인해 원제가 친히 천하 군사를 출동시켜 토벌해 달라고 간청했다.” 것이었다.

이것으로 본다면 가령 천자가 동병(動兵)하기를 싫어하지 않고 또 조반(趙胖) 등도 힘껏 변명하지 않았다면, 왕사(王師)는 반드시 나오게 되었을 것이다.

윤이라는 자는 바로 윤유린(尹有麟)의 종제(從弟)였다. 이러므로 종연은 도망치고 유린은 자살하였다. 실상 이런 사실이 있었으니, 최영의 일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당시에 이리저리 모의한 것이 극에 달하였으니, 철령(鐵嶺)에서 명령하게 된 것도 그가 조작한 것이 꼭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다.

원제는 윤이와 이초의 말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서로 면질(面質)까지 시키며, 본국에서 모든 사람을 국문하도록 명하였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목은 같은 모든 사람의 죄는 숨길 수 없을 듯하다. 청주(淸州)의 강물이 불었다는 변고는 신명도 슬퍼했던 것인데, 모든 죄수가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은 그도 역시 천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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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003] 북벌(北伐) :

요동 정벌을 가리킴.

[-D007] 상국(上國) :

원(元) 나라.

[-D008] 대명(大明) :

주원장(朱元璋)이 세운 명 나라.

[-D009] 이목은(李牧隱) :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 자는 영숙(穎叔), 이름은 색(穡), 시호는 문정(文靖). 목은은 호이다.

[-D010] 태종(太宗) :

조선 제3대 임금 이방원(李芳遠)의 묘호.

[-D011] 이시중(李侍中) :

이성계(李成桂)의 벼슬을 호칭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