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노(高家奴)가 군사 4만을 이끌고 강계(江界)에 와서 투항하였다.

2022. 10. 11. 18:00이성계의 명조선

(명 태조 홍무 11, 1378)고가노(高家奴)가군사 4만을 이끌고 강계(江界)에 와서 투항하였다.

병인신우 12년(1386), 대명 홍무 19년

황제 지휘첨사 고가노(高家奴) 서질(徐質) 보내와서.....(나의 생각 / 고려에 군사를 데리고 항복했는데, 뭐라도 한 자리 주었겠지.  왜 명나라에 귀화했을까. 나하추도 고려에 입조해 1품 관직을 하사받았는데, 왜 명나라에 항복했는가?)

고려사절요 29 / 공민왕 4(恭愍王四) 1354년,

임자 21(1372), 대명 홍무 5년.........(나의 생각/ 왜 고려사절요에 년도수를 잘못 적었을까

그건 누군가 손을 대고 조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기해년(1359, 공민왕8) 요양(遼陽) 심양(瀋陽지방에서 군사들이 일어났을 적에 ...........(나의 생각/이것이 바로 원의 반란이 일어난 홍건적의 난이다. 한족 홍건적난이 아닌 군벌간 전쟁으로 인하여 망한 원의 잔졸 몽고 거란족.沙敵 즉 사막의 적으로 소위 백두산인 알타이산의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쳐들어온 것이다. 1800년대 러시아 지도에 나타난 원의 첫 수도 화림 카라코룸과 원의 대도 북경 캄발리크, 그리고 대륙의 산서성이 알타이산 서쪽과 남쪽에 그려져있어 홍건적의 난은 한족의 난이 아닌 것이다.  원의 잔졸 몽고 거란족인 것은 태종.세종.영조.중종실록등에  나옵니다.  심양은 동북삼성으로 조작되었고, 카라코룸은 몽골 항애산맥으로 조작되어 대륙조선을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대륙조선사연구회  카페에서 확인하세요. 황현 매천야록.윤치호 영문일기등에 러일전쟁중에 황해도.평안도.함경도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살인.약탈.강간의 기록과 헝가리 민속학자 버라토시 코리아 조용한 아침의 나라 저서에 1907년중 조선의 북쪽 대부분은 러시아에게 빼앗기고, 남쪽 대부분은 중국에게 빼앗기어 반도가 되어있었다. 독립운동가 희산 김승학님의 애국가에 우랄산부터 대마도까지 수륙수만리...와 세종실록에 나오는 우라(랄)산의 기록등 즉 조선의 북쪽경계는 알타이산임을 잊지맙시다. 동광 제36호 1932년 08월 01일  地下에 秘藏된 金銀寶貨, 千古秘密 蒙古의 寶山, 朝鮮 先民의 남긴 遺物, 그 秘鍵은 누구의 손으로 열릴까 ......신생 몽골국가가 대륙조선의 북방한계를 조작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 심양로(瀋陽路달로화적(達魯花赤) 교주(咬住) 는 조선의 이천계로 곧 교주(咬住)이다. 명에 항복했다는데 얼마나 엉터리인가?이성계의 가족이니 명이 조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고려사절 28 > 공민왕 2 > 최종정보 1352년

요양성 총관(遼陽省摠管고가노(高家奴) 보낸 사신이 와서 옥잔과 개를 바쳤다.

 여름 4월에 요양행성동지(遼陽行省同知고가노(高家奴)패하여 도망가는 홍두적을 공격하여 4천여 명을 베고사신을 보내어 적의 괴수 파두반(破頭潘) 사로잡았음을 사신을 보내 보고해 왔다.

 

 고려사절 28 > 공민왕 3 > 최종정보 1353년

요양 평장(遼陽平章고가노(高家奴) () 바치니왕이 이를 놓아 보냈다왕은 성품이 자애로워 동물을 차마 해치지 못해서 왕위에 있은  10 년이 지나도록 번도 사냥을 하지 않았다.

 

고려사절요 29 / 공민왕 4(恭愍王四) 1354년

임자 21(1372), 대명 홍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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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에 태후에게 존호를 올리고죄수를 사면하였다. ○ 오산불화(於山不花)ㆍ나하추(納哈出)고가노(高家奴등이 와서 이성(泥城)ㆍ강계(江界등지를 침범하였다.

 

고려사절 32 > 신우 3 > 최종정보

병인신우 12년(1386), 대명 홍무 19년

황제 지휘첨사 고가노(高家奴) 서질(徐質) 보내와서, "기해년 도적을 피하여 동쪽으로 심양의 군사와 백성 4만여 호를 조사하여 찾아간다." 하였으니이것은 전원의 심양로 다루하치(達魯花赤교주(咬住) 무고 때문이다  3 필을 것을 요청하고 필에 무명 8필과 비단 2필을 주는데말을 요양(遼陽)까지 보내와서 값을 받아가게 하였다.

 -D002] 기해년 : 

고려 공민왕 8원나라 순제(順帝지정(至正) 19년인데이때에 중국에서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우리나라에까지 그들이 침입하였다.

 

동사강목 14

임인년 공민왕 11( 순제 지정 22, 1362)

적의 남은 무리 파두반(破頭潘 10여만 명이 달아나서 압록강을 건너 쫓겨갔다파두반은 달아나다가 요양 행성(遼陽行省) 동지(同知고가노(高家奴)에게 사로잡혀 죽고드디어 적이 평정되었다. 

동사강목 15

경술년 공민왕 19( 태조 홍무 3, 1370)

11 우리 태조가 지용수 등과 함께 동녕부를 함락시켰다.

……….

.당시 만호(萬戶 (裵彦등이 고가노(高家奴) 치러 석성(石城)으로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머물러 기다리려고 하였으나 일관이 그렇게 말하므로 드디어 군대를 돌이켰다처음 성이 함락될 아군이 성안의 창고들을 거의 불태워 버렸기 때문에 군중(軍中) 식량이 모자랐던 것이다

 

동사강목 15

임자년 공민왕 21( 태조 홍무 5, 1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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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정월 태후(太后)에게 존호(尊號) 올리고 사유(赦宥)하였다.

숭경왕태후(崇敬王太后) 호하고문예부(文睿府) 고쳐 숭경부(崇敬府) 하였다.

지연(池淵) 서북면 원수(西北面元帥) 삼았다.

당시 () () 잔당(殘黨) 거의 거두어 복속시켰으나 유독 납합출(納哈出)만이 금산(金山)에서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어산불화(於山不花)고가노(高家奴)  동녕부(東寧府) 남은 무리인 호발도(胡拔都)ㆍ장해마(張海馬등과 함께 여진 잡종(女眞雜種) 이끌고 자주 이성(泥城)ㆍ강계(江界등지를 침구하므로 지연을 보내어 방비하게 하였다.

 

동사강목 16 을묘 고려 전폐왕 (前廢王禑원년부터무진 14 6월까지 14년간

무오년 전폐왕  4( 태조 홍무 11, 1378)

11 좌소조성도감(左蘇造成都監) 설치하였다.

………..

고가노(高家奴) 와서 투항(投降)하였다.

고가노는 () 평장(平章)으로 요동(遼東) 심양(瀋陽사이에 있으면서 () 붙기도 하고원에 귀부(歸附)하기도 하다가 이때에 와서 군사 4만을 이끌고 강계(江界) 와서 투항하였다.

 

동사강목 16

병인년 전폐왕  12( 태조 홍무 19, 1386)

12 번개가 치고 지진이 있었으며어두운 안개로 사방이 막혔다.

명에서 사신을 보내어 말을 사고요동과 심양(瀋陽) 유민(流民) 찾아 돌아갔다.

황제 지휘첨사(指揮僉事고가노(高家奴) 서질(徐質) 보내어  5 필을 사고 기해년 이후의 요동과 심양의 유민 4만여 호를 추쇄(推刷)하려 하였는데그것은 () 심양로(瀋陽路달로화적(達魯花赤) 교주(咬住) 등의 무고에 의한 것이었다.

 

해동역사 15 / 세기(世紀) 15

고려(高麗) 4

○ 19년에 신우 12 지휘첨사(指揮詹事고가노(高家奴등을 보내어 기단(綺段) 포필(布疋) 가지고 고려로 가서 말을 사게 하였는데 1필당 문기(文綺) 2 8필을 주게 하였다《속문헌통고》

전에 원나라에서 고려의 포마(鋪馬 역마(驛馬) 말함)에게 몽고 문자(蒙古文字) 받아들이고, 쌍마(雙馬)에게는 4통의 현자호(玄字號)단마(單馬)에게는 2통의 홍자호(洪字號)기선(起船)에게는 2통의 안자호(安字號) 내려 주었다《대명회전(大明會典)

○ 20년에 신우 13 고가노(高家奴등이 고려에서 말을 사고는 돌아와서 고려 왕이 말값을 받지 않겠다고 표문을 올려 청하였다고 아뢰었다황제 허락하지 않고예부에 유시하기를,

짐이 여러 번국(藩國)들을 대우함에 있어서 성실과 믿음으로 하기에 힘써 왔다고려에서 전에 약속한 것을 지키고는 값을 주고 말을 사는 것을 허락하였기에 사람을 파견해서 말을 사들였다그런데 지금 저들이 값을 감히 받지 못하겠다고 하고 있는데이것이 어찌 그들의 본심이겠는가대개 위세를 두려워해서 그런 것이다위세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핍박하는 것은 짐이 바가 아니다너는 짐의 뜻을 자문에 보내어 고려의 국왕에게 알리라.”

하고이어 연안후(延安侯당승종(唐勝宗)에게 유시해서 고려의 말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쓸만한 말을 가려 값을 갚아 주고 노둔하고 허약한 말은 값을 적당하게 감한 다음 이어 고려의 국왕에게 보고하여 알리게 하였다 칙서가 요동에 도착하였을 마침 고려에서 보낸  3 40필이 요동에 도착하였다당승종이 칙서의 내용대로 값을 쳐주었다.

이에 앞서 기해년(1359, 공민왕8) 요양(遼陽) 심양(瀋陽지방에서 군사들이 일어났을 적에 백성들이 난을 피하여 고려로 흘러 들어갔는데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중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고가노(高家奴)ㆍ서질(徐質등이 고려로 말을 사러 때에 미쳐서 예전에 원나라에서 항복해 장수 교주(咬住) 등이 사실을 말하자황제가 고가노 등에게 명하여 가서 찾아보게 하였다이때에 이르러 고려가 말을 보내는 편에 이들을 보내어 드디어 요양과 심양에서 옮겨간 유민 나타리(奈朶里)ㆍ불반(不反 45() 3 58명이 돌아왔다《이상 모두 엄주별집(弇州別集)

 

해동역사 38 / 교빙지(交聘志) 6

상국사(上國使) 2

○ 19(1386, 우왕12) 겨울에 지휘첨사(指揮詹事고가노(高家奴) 서질(徐質등을 파견하여 고려에 사신으로 가서 말을 사오게 하였다《엄주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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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

도조가 죽자 어린 교주 대신 임시로 환조 이자춘이 관직을 계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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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至正) 2(1342) 임오 7 24일에 도조가 ()하였다. 함흥부(咸興府) 예안부(禮安部) 운천동(雲天洞) 장사지내니, 의릉(義陵)이다. 탑사불화(塔思不花) 사유를 갖추어 개원로(開元路) 사람을 보내어 알리니, 개원로에서 조감(照勘) 보매, 탑사불화는 정실(正室) 아들이므로, 탑사불화로 하여금 관직을 이어받게 하였다. 9월에 탑사불화가 돌아가[], 아들 교주(咬住)가 어리[幼]었다. 나해(那海), 어머니 조씨(趙氏) 고려의 왕족(王族)임으로써 그의 완자불화(完者不花) 함께 모두 원윤(元尹) 정윤(正尹) 되고, 조총관(趙摠管) 세력을 믿고 드디어 분수에 넘치는 마음을 내어, 애고(哀苦) 중을 틈타 선명(宣命) 인신(印信) 훔쳐 가니, 관내(管內) 군민(軍民)들이 모두 노하기를,

조씨는 적실(嫡室) 아닌데, 나해(那海) 어찌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을 수가 있느냐?”

하였다. 환조(桓祖) 탑사불화(塔思不花) 아내 박씨(朴氏)에게 이르기를,

형수께서 스스로 개원로(開元路) 가서 변명하십시오.”

하였다. 박씨는 안변(安邊) 사람 득현(得賢) 딸이다. 환조는 교주(咬住)와 함께 박씨를 따라 개원로(開元路)에 나아가서 진소(陳訴)하니, 본로(本路)에서 사유를 갖추어 황제에게 아뢰었다. 지정(至正) 3년(1343) 정월에 원(元)나라에서, 조씨는 적실(嫡室)이 아니고, 교주(咬住)는 유약(幼弱)하다고 하여, 환조로 하여금 임시로 관직을 이어 받았다가, 교주가 정년(丁年)이 됨을 기다려 그에게 관직을 주도록 하고, 이내 사자(使者)를 보내어 나해(那海)를 목 베게 하였다. 나해가 소식을 듣고 선명(宣命) () 가지고 차인사(遮仁寺) 숨으니, 잡아서 이를 죽였다. 완자불화(完者不花) 영돈녕(領敦寧)으로 치사(致仕) 이지(李枝) 아버지다.

【원전】 1 2

【분류】 인물(人物) / 가족(家族) / 왕실(王室) / 역사(歷史)

[-D001] 원윤(元尹) : 

고려 종친(宗親) 훈신(勳臣) 작호(爵號).

[-D002] 정윤(正尹) : 

고려 종친(宗親) 훈신(勳臣) 작호(爵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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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

환조가 교주에게 관직을 돌려주고자 했으나 받지 않다. 교주가 우달치에 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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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조(桓祖) () 이자춘(李子春)이니, 몽고 이름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이다. 7, 8세부터 보통 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었으며, 점점 장성해지자 말타고 활쏘기를 했는데, 관직을 이어받으매 사졸(士卒)들이 즐거이 붙좇았다. 교주(咬住)가 점점 장성하매, 환조가 직사(職事)를 그에게 돌려주고자 하니, 교주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교주가 뒤에 환조를 따라 공민왕(恭愍王) 뵈오니, 왕이 우다치(亐多赤) 소속시켰다. 벼슬이 중순 군기 (中順軍器尹) 이르렀다.

【원전】 1 2

【분류】 인물(人物) / 왕실(王室) / 역사(歷史) / 인사(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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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

태조가 환조의 적장자인 이천계를 극진히 대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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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환조(桓祖) 세상을 떠나니, 이천계(李天桂)는 자기가 적사(嫡嗣)가 된 이유로써 마음속으로 태조를 꺼리었다. 태조의 [] 양민(良民)임을 하소하는 사람이 있으니, 천계는 누이인 강우(康祐) 아내와 모여 모의(謀議)하고 양민(良民)임을 하소한 사람과 서로 결탁하여 난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태조는 일을 마음에 두지 않고 그들을 처음과 같이 대접하였다. 병진년 여름에 이르러 어느 사람이 천계의 관하(管下) 사람의 이미 혼인한 아내를 빼앗으므로, 천계가 노하여 구타해 죽이니, 천계를 마침내 옥에 내려 가두었다. 천계가 일찍이 권세를 부리[用事]는 재상(宰相)을 꾸짖어 욕하였으므로, 재상이 드디어 그전 감정으로써 장차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태조가 변명하여 구원하고 힘써 청하였으나, 마침내 구원하여 내지 못하였으므로, 매우 이를 슬피 여겨 여러 고아(孤兒)들을 어루만져 양육하고 무릇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들을 모두 자기가 주관(主管)하였다. 강우(康祐) 아내는 집이 가난하니, 태조는 이를 불쌍히 여겨 노비(奴婢) 많이 주어 생업을 넉넉하게 하였다. 개국(開國) 후에 천계의 아들을 모두 높은 관작에 임명하였다. 천계는 곧 교주(咬住)이다.

【원전】 1 7

【분류】 인물(人物) / 왕실(王室) / 사법(司法) / 외교(外交) / 신분(身分) / 역사(歷史)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4 14권 한국광복군 Ⅴ   >   『光復』第1卷   >   1卷 第1(1941. 2. 1)
 
 
(1)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야 한다설령 장기간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단기간만이라도 쌍방이 이해관계를 같이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반드시 쌍방이 서로를 신뢰해야 한다어느 한쪽이 중도에 일방적으로 조약을 폐기하는 사태 없이 끝까지 신용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 스탈린은 얼마 전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과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은 기본적으로 상호간의 모순과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자본주의 세계는 사회주의 소련의 존재를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다소련을 포위하고 있는 일체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호시탐탐 소련에 대한 침범과 타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역설한 바 있다일구가 아무리 감언이설로 속이려 해도 소련을 끌어안을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전 관동군참모부의 기관지인『哈爾濱新聞』은 사설에서 “알타이산과 알타이산 이동의 토지는 아시아에 속하는 것으로 이는 모두 일본문화 확장의 영역에 포함된다. 아시아의 모든 영역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필히 모든 것의 위에 군림해야 한다. 아울러 일본은 최소한 바이칼호 이동의 토지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공언하였다더구나 근자에 발생한 張鼓峰과 노몬한사건으로 피해를 당한 소련인의 피가 아직 마르기도 전인 상황에서 일본이 의도하는 바를 스탈린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일전 일구와 汪精衛傀儡政府 사이에 맺어진 ‘僞約’의 제3조는 “일본은 공동방공을 실행하기 위해 만몽 및 화북의 특정지구 내에 군대를 주둔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자신을 가상적으로 간주하고 있는 일구에 대해 소련은 특별한 방비를 취하고 있다지금으로부터 얼마 전인 지난해 12 1주일소련대사는 왜정부에 “소련의 대중국정책은 불변임”을 성명하였다이는 목하 일구에 대한 소련정부의 분명한 인식이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4 14권 한국광복군 Ⅴ   >   『光復』第1   >   1卷 第· 6(1941. 8. 20)
 
 
 역사의 변화에 따라 인류의 정의와 평화를 지키려는 세력은 날로 팽창하고 있음에 비해 악랄한 침략자의 세력은 갈수록 쇠약해지고 있다세계의 대세는 날로 서광이 비추고 있다독 · 소전쟁이 발발한 이후 중 · 영 · 미 · 소의 연합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침략과 반침략의 양대 전선이 더욱 분명하게 구분되고 있는 것이다어느 진영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될지는 이미 판가름났다고 할 수 있다특히 동아 피압박민족 공동의 적-일본제국주의는 중일전쟁의 수렁에 빠진데다 국제적인 반침략세력의 포위에 갇혀 궤멸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일구는 일찍이 反共의 전위부대를 자임하였다독 · 이와 방공협정을 체결한 일구는 두 나라의 위세를 빌어 소련을 위협하고 시베리아 우랄산과 알타이산 동쪽의 토지는 모두 아시아에 속하며 일본문화를 확장할 영역이라고 공개적으로 표시하였다. 일본해군은 남양을 일본의 생명선으로 간주하고 오랫동안 남양점거를 기도하였다.
 현재 일구의 짝인 히틀러는 과거에 맺은 방공협정의 기본정신을 이어받아 대거 소련을 침공하고 있다이는 일구가 북진하여 공동으로 소련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혹은 남진정책을 실행하여 남양의 자원을 탈취하고 영 · 미 세력을 견제하여 맹우 히틀러의 소련침공에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독 · 소전쟁이 발발하자 관계국은 중립이든 비중립이든 거의 모두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심지어는 축심국의 부용인 헝가리 · 스페인 · 루마니아 내지는 슬로바키아까지도 소련과 단교하거나 직접 참전하는 등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공의 선봉-축심동맹의 거두인 일구는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배회하고 있다독 · 소전쟁이 발발한지 한 달이 다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일구는 북진도 남진도 감행하지 못하고 중립을 선포하지 않은채 중립을 지키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신문명 동아일보  
기사제목 「오비」河探險隊 去處突然不明(하르빈
발행년월일 1936 04 03
발행구분 조간 
면수 03 
단수 11 
표제어 오비강탐험(Obi  探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