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戶籍)에 민호(民戶) 수백 호가 쓰여 있고 식실봉의 호(戶)가 쓰여 있으니,

2023. 1. 11. 01:53이성계의 명조선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5년 기유 > 12월 2일 > 최종정보

영조 5 기유(1729) 12 2(임인) 맑음

05-12-02[20] 희정당에서 소대를 행하는 자리에 참찬관 김시형(金始炯) 등이 입시하여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진강하고, 북도(北道) 봉수군(烽燧軍)에게 낙복지(落幅紙) 보내는 , 서운관(書雲觀) 신칙하는 , 경사 뒤의 은택이 백성들에게 미치도록 하는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DCI]ITKC_ST_U0_A05_12A_02A_00210_2018_124_XML DCI복사 URL복사

신시(申時)에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갔다. 소대(召對)를 행하러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이다. 참찬관 김시형(金始炯), 시독관 이종성(李宗城), 검토관 신치근(申致謹), 가주서 이종연(李宗延), 기사관 최익수(崔益秀)ㆍ홍득후(洪得厚)가 차례로 입시하였다.

이종성이 《동국통감(東國通鑑)》 제18권을 읽었는데 ‘고려 선종 사효왕(高麗宣宗思孝王)’에서 ‘수국사(修國史)’까지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번(下番)이 읽으라.”

하니, 신치근이 ‘오년춘정월(五年春正月)’에서 ‘시의중지(時議重之)’까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읽으라.”

하니, 김시형이 ‘구년춘삼월(九年春三月)’에서 ‘참지정사(參知政事)’까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잠시 물러나라.”

하니, 신하들이 합문(閤門) 밖으로 물러가서 한참 있다가 다시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서가 읽으라.”

하니, 이종연이 ‘숙종 명효왕(肅宗明孝王)’에서 ‘시설주전관(始設鑄錢官)’까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상번 겸춘추가 읽으라.”

하니, 최익수가 ‘삼년춘정월(三年春正月)’에서 ‘동중서 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까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하번 겸춘추가 읽으라.”

하니, 홍득후가 ‘칠년춘삼월(七年春三月)’에서 ‘이흥사전지리(以興使錢之利)’까지 읽었다. 이종성이 아뢰기를,

“‘겨울 11월 정포도감(征袍都監)에 명하여……’라고 한 것은 고려(高麗)가 용병(用兵)의 나라였기 때문에 정포도감을 설치하여 의복을 변방의 사졸(士卒)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니, 곧 우리나라의 북도(北道) 같은 먼 변방에 유의(襦衣)와 지의(紙衣)를 제급(題給)하는 제도입니다. 가난한 백성은 한정이 없어서 두루 줄 수 없기 때문에 봉수군(烽燧軍)에게만 제급하였는데, 그 이유는 높은 데에 있어서입니다. 신이 북도에 있을 때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의 백성들이 종이를 구걸하기에 신이 괴이하게 여겨 물었더니, 모두 말하기를 ‘낙복지(落幅紙) 1장만 얻으면 겨울을 충분히 넘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비국에 신칙하여 낙복지를 많이 보내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좋은 말이다. 마땅히 비국에 신칙하겠다.”

하였다. 신치근이 아뢰기를,

“선조대왕께서 일찍이 강연(講筵)에서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에게 이르기를 ‘넓은 집과 따뜻한 담요에서도 나는 오히려 추위와 더위를 견디지 못하는데, 아, 우리 곤궁한 백성들은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라고 하시고, 이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조(聖祖)의 말씀을 추념하시어 백성을 보호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좋은 말이다.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신치근이 아뢰기를,

“송(宋)나라는 문명한 나라였지만, 양경략(楊景略)은 승도(僧徒)를 모아서 문종(文宗)과 순종(順宗)의 혼전(魂殿)에 도량(道場)을 설치하였으니, 사신(使臣)의 체모로 볼 때 몹시 잘못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심하다고 할 만하다. 공자가 이르기를 ‘사방에 사신으로 나가서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지난번 유신(儒臣) 먼저 시대의 규모를 보는 것이라고 말하였으니, 이로써 송나라의 규모를 볼 수 있다. 예의의 나라라는 중국(中國)이 도리어 이 요(遼)나라 사신도 하지 않던 일을 한단 말인가.”

하자, 이종성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지난번에 이미 진달하였습니다만, 송나라의 운이 점점 쇠하였기 때문에 이러했던 것입니다. 상께서 신이 전날에 아뢴 말을 기억하시니, 신은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하였다. 신치근이 아뢰기를,

요나라 임금이 재화를 구한 사신을 책망한 것은 체모에 적합했다고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성쇠의 기미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수(死囚)를 판결할 때 음악을 정지하고 소선(素膳)을 올렸다.’라고 하였는데, 음악을 정지한 것은 가하지만 소선을 올린 것은 어떠한가?”

하니, 이종성이 아뢰기를,

“이것은 예법에 나오지 않는 예입니다. 음악을 정지하는 것은 마음을 맑게 하고 잡념을 없애려는 뜻입니다.”

하였다. 신치근이 아뢰기를,

“감선(減膳)과 관련된 글은 있어도 소선과 관련된 글은 없습니다. 신이 《여사(麗史)》를 대략 보았는데, 《여사》가 이 《동국통감》보다 낫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사》는 다만 고려의 역사서일 텐데, 누가 찬술한 것인가?”

하자, 신치근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에서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에게 찬술하게 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사(漢史)》처럼 열전(列傳)과 세가(世家)가 있는가?”

하니, 이종성이 아뢰기를,

“소신은 황공하오나, 삼가 일찍이 옛말을 들으니, 우리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정인지로 하여금 《여사》를 찬술하게 하였을 때, 자주 유자(柚子)와 정과(正果)를 하사하셨는데, 인출(印出)되었을 때 세종대왕께서 살펴보시고 유자와 정과가 아깝다는 하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옥당에 있는가? 살펴본 뒤에 내릴 것이니, 내일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이종성이 아뢰기를,

재이를 당한 뒤에 예부(禮部)에서 아뢴 이 좋습니다. 당시에는 화재가 일어날 것을 미리 알 수 있었으니, 나라는 거칠고 엉성했지만 사람은 질박하고 성실했기 때문에 술업(術業)에 정통할 수 있었습니다. 천문을 살피는 관원이 재앙이 올지 복이 올지 미리 알아서 인사(人事)를 다스렸는데, 신이 글 뜻과 관련하여 감히 아뢸 것이 있습니다. 국가에서 천문을 살피는 관원을 둔 까닭은 우러러 재앙이 올지 복이 올지를 살펴서 백성의 농사철을 공경히 내려 주려고 한 것이니, 그 직임이 가볍지 않고 중합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서운관(書雲觀)의 관리는 하늘의 기상을 전혀 모르고, 심지어 상도(常度)가 있는 일식과 월식조차도 오히려 정밀하게 계산하여 오차가 없게 하지 못하니, 각별히 징계하는 방도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이미 하교하였다. 통역하는 자들로 말하더라도 음운(音韻)을 잘 아는 자가 매우 드물어서, 비록 이들이 양국의 언어를 잘 통역하는 자들이었는데도, 이런 직임마저도 신칙하라고 하였는데, 하물며 청대(靑臺)에서 길흉을 점치는 직임에 있어서이겠는가. 나라에서 권장하고 징계하는 방도가 없으면 또 어찌 술업에 집중하여 정통하기를 요구할 수 있겠는가. 그 가운데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은 으레 동반직(東班職)에 응당 제수하는 규정이 있는데 전조(銓曹)에서 한 사람도 천거한 사람이 없었다. 지금부터는 각별히 신칙하여 두드러지는 사람을 즉시 조용(調用)하고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면 본감(本監)에서 벌을 주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이종성이 아뢰기를,

“신이 마침 정원에 갔는데, 기설제(祈雪祭)의 일 때문에 예조에서 초기를 올렸습니다. 금년에는 눈이 안 오니 진실로 또한 이상한 일입니다. 초기에 납일이 머지않았는데 아직 삼백(三白)의 징험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였는데 앞으로 풍년이 들지 흉년이 들지의 징조는 우선 제쳐 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겨울에 눈이 내리고 여름에 비가 내리는 것은 하늘의 은택입니다. 은택이 내려야 하는데 내리지 않으면 어찌 재이가 아니겠습니까.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비를 기원하고 사람들이 모두 근심스럽게 여기지만,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으면 눈앞의 급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변고로 여기지 않습니다. 전후로 천둥의 변고로 인하여 경계하고 신칙하는 윤음을 자주 내리셨으나 삼동(三冬)에 눈이 안 오는데도 상께서 또한 두려워하고 반성하는 일이 없으니, 하늘을 본받아 교화를 행하는 도리가 전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절실하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두 근심스럽게 여기지만,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으면 아무렇지 않은 듯 여긴다는 말은 참으로 유신의 말과 같다. 해당 조에서 비록 기설제를 지내더라도 납향 전에 세 번 눈이 내리는 것은 이미 가망이 없다. 이번 겨울은 눈이 오지 않아 건조하고 추우니, 모맥(牟麥 보리)이 틀림없이 다 죽었을 것이다. 지금 들리는 바는 어떠한가?”

하자, 김시형이 아뢰기를,

“신이 충청도에서 동짓달 보름 뒤에 출발하여 올라왔는데, 그 전에 한 번 눈이 내렸지만 즉시 그쳤고, 그 뒤에는 다시 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농민들이 쌓인 눈으로 보리농사를 점치는데, 땅에는 조금의 눈도 쌓인 것이 없고 날씨는 이와 같이 괴상하니, 보리농사가 끝내 우려됩니다.”

하였다. 이종성이 아뢰기를,

“선종(宣宗)의 ‘약효득부(藥效得否)’의 시를 보건대, 제왕이 만약 학문의 공력이 있다면, 비록 지기(志氣)가 쇠했을 때나 질병이 깊어진 때라 하더라도 옛사람은 이불을 걷고 나의 손과 발을 보아라.’라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청정한 곳에 올라 부처에게 예를 드림이네.’라는 말을 남겼겠습니까. 사신(史臣)이 비록 이를 두고 ‘어찌 〈대풍가(大風歌)와 같은 강개한 시만도 못하다고 할 수 있겠나.’라고 하였지만, 한(漢)나라 고조(高祖)는 그래도 패자(覇者)의 기상이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신의 말이 비록 이러하더라도 말할 것이 못 되니, 이단(異端)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하였다. 신치근이 아뢰기를,

지금 봄이 한창이어서 () () 있는데, 열병(閱兵) 생기(生氣) 거스르는 것입니다.’라고 한 것은 그 말이 질박하고 성실하며 조리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이종성이 아뢰기를,

“신치근이 진달한 말이 좋습니다. 범범하게 보면 견강부회한 것 같지만, 대개 군왕의 도리는 양덕(陽德)을 북돋아야 하니, 그 말이 맞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양덕을 북돋는 뜻이 있지만, 봄 농한기에 강마해야 하는 말과는 경우가 다르다.”

하였다. 이종성이 아뢰기를,

“요(遼)나라에서 새 임금을 책봉할 때 식읍(食邑)이 7000호(戶)이고, 식실봉(食實封)이 700호였습니다. 신이 북도에 갔을 때 진전(眞殿)에 들어가 봉심(奉審)하였는데, 들으니 태조(太祖) 때의 고적(古蹟)이 예전에 이곳에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임진년(1592, 선조25)의 병화(兵火)에 대부분 소실되고 다만 1장이 남았는데, 호적(戶籍)에 민호(民戶) 수백 호가 쓰여 있고 중간은 낙장(落張)되어 이어 볼 수가 없었습니다. 태조의 관함(官銜) 가운데 식실봉의 호(戶)가 쓰여 있으니, 고례(古例)가 그러합니다. 이것은 귀하게 여길 만한 일이어서 알지 않아서는 안 될 것 같기에,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적의 일은 지금 유신의 말로 인하여 처음 들었으니,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하였다. 신치근이 아뢰기를,

“본궁의 입자(笠子), 통개(筒箇), 궁시(弓矢) 따위가 지금까지도 구궁(舊宮)에 있습니다. 또 손수 심은 쌍송(雙松)이 있는데 크기가 각각 수십 아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십 아름의 크기면 얼마쯤 되는가?”

하였다. 신치근이 두 팔을 둥글게 모아서 아뢰기를,

“거의 이만하니, 시민당(時敏堂)의 소나무와는 다릅니다.”

하고, 이종성이 아뢰기를,

“보통 소나무와는 달라 그 크기에 위아래의 차이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위는 구불구불한가?”

하니, 이종성이 아뢰기를,

“넓은 뜰을 거의 뒤덮었는데 까막까치도 감히 그 위엔 앉지 않습니다. 이것은 민간에 전해 오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요나라 사신 왕악(王蕚)의 일은 하번이 이미 진달하였는데, 성쇠의 기미와 관계가 있다고 하교하셨으니, 성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근래 청(淸)나라 사신의 일을 가지고 말해 보더라도, 강희제(康熙帝) 때는 이와 같지 않았으니 그 당시에 한 칙사가 우리나라에 해를 끼치자, 강희제가 그 사신을 잡아 가두었다고 합니다. 그 뒤로 나온 자들은 폐단이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사신을 책망할 수 없다. 옹정제(雍正帝)가 지난번 우리를 욕보인 것은 전적으로 탐욕스럽고 포학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이러하고도 아랫사람들을 신칙하고 면려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종성이 아뢰기를,

“요나라와는 부득이 화친을 맺었지만, 송(宋)나라는 시종일관 잊지 않았습니다. 휘종(徽宗) 때 송나라가 금(金)나라와 더불어 요나라를 멸하려고 하자 고려가 의인(醫人)을 보내어 여진(女眞)과 화친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고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자어류(朱子語類)》에 고려가 마음을 다하여 상국을 섬겼다고 하였습니다. 남쪽으로 천도(遷都)한 뒤에 휘종과 흠종(欽宗)은 오국성(五國城)에 갇혔는데, 민간에 전하기를, 오국성이 육진(六鎭)에 있어서 그때 해로(海路)로 맞이하려고 하였지만 뜬소문에 동요되어서 실행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적으로 고려를 책망할 수는 없다. 송나라 고종(高宗)이 한쪽 구석인 임안(臨安)에서 중원을 회복할 뜻이 없었으니, 나는 참으로 개탄스럽다.”

하였다. 이종성이 아뢰기를,

“고려는 북(北)으로 교린(交隣)하고 남(南)으로 정성을 다했으니 소국으로서 대국을 섬기는 의리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 또한 질박하고 성실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비록 신처수(申處洙) 을 가지고 보더라도, 또한 문(文)에 너무 치우쳐서 일어난 일이다. 그 이름만 사모하고 그 실상은 없으니, 나는 참으로 개탄스럽다.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유생들이 올린 상소에서 문묘(文廟)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또한 질박하고 성실한 풍모가 없다. 만약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치욕을 잊지 못한다면 저 청나라 사람들이 나왔을 때 어찌 볼 수 있겠는가. 그런데 매번 칙사를 볼 때 구경하는 사람들이 길을 메우니 마음으로 항상 개탄스럽게 여겼다. 이것은 모두 외면만을 꾸미는 것이니, 어찌 고려조의 진실함과 같겠는가. 우리나라는 이미 연호가 없는데, 만약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으면, 비록 지금이 기유년(1729, 영조5)이지만 훗날에 어떻게 상고(詳考)할 수 있겠는가. 사저(私邸)에 있을 때 이것을 가지고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에게 물었는데, 사용해도 된다고 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고려가 북으로 교린하고 남으로 섬긴 것은 질박하고 성실했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이종성이 아뢰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지조를 지키는 뜻이 있어서 모두 주(周)나라를 존숭하는 의리를 아는데, 어찌 문(文)이 우세한 폐단만 있고 문이 우세한 실상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동안 우리나라의 척화(斥和)는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어서, 척화만 하였을 뿐 공격하고 수비하는 준비를 하지 못하여 종묘사직을 욕되게 하기까지 하였으니, 식자들이 지금까지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성조(聖祖) 효묘(孝廟)께서는 주나라를 매우 존숭하셨지만 청나라를 대할 때에도 성실하셨다.”

하였다. 이종성이 아뢰기를,

가을 7월에 예부(禮部)에서 아뢴 이 좋습니다. 지금의 목백(牧伯)은 예전 방면(方面)의 직임과 같으니, 은택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폐단은 곧, 감사와 수령이 그저 차일피일 미루기만 일삼아 실질적인 은택이 제때에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기 때문인데, 지금까지도 그러합니다. 신이 글 뜻 이외에 또 소회가 있어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이제 성대한 의식이 거행되어서 성고(聖考 숙종)가 더욱 빛나게 되셨고 큰 은혜를 미루어 나아가 팔도가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조정의 관리들에게는 각각 가자(加資)하였고 선비들에게는 과거를 설행하여 경사를 함께하였으며 잡범(雜犯)으로 사죄(死罪)인 자들까지도 또한 모두 용서를 받았는데, 유독 실질적인 혜택이 소민(小民)들에게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백성들은 성고의 유민이 아닌 자가 없는데도, 성고를 위하는 기쁘고 경사스러운 날에 유독 널리 베푸는 은택을 받지 못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어찌 성덕(聖德)에 부족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농사가 조금 풍년이 들었다는 이유로 오래된 환자(還上)를 현재 독촉하여 받아 내고 있습니다. 근래에 여러 번 흉년이 들었고 또 부역에 시달려 백성들이 생계를 꾸려 가지 못하여, 전에 부유했던 자들이 지금 도리어 가난해지고, 전에 살아 있던 자들이 지금은 이미 사망하기도 하였습니다. 게다가 풍년이 들었다고 하여 공사(公私)의 빚을 모조리 받아 내면, 백성들이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송나라 신하 소식(蘇軾)이 말하기를 ‘백성은 흉년으로 복종한다.’라고 하였는데 정말로 이런 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국가가 비록 경사를 함께한다고 말하지만 소민들은 일찍이 은택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기내(畿內)가 이러하니 삼남(三南) 지방은 더욱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은전은 진실로 신하가 감히 우러러 청할 바가 아니지만, 큰 경사가 있은 뒤에 은혜를 미루어 베푸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제 또한 생각한 바가 있어서 예를 마친 뒤에 세 가지를 하교하였는데, 유신은 어찌 모르는가. 몇 년 전 세자의 관례(冠禮)를 치르고 진하(陳賀)받은 뒤에 대신을 불러 하교하기를 ‘국가에 경사가 있어 사대부는 과거를 설행하여 경사를 함께하였는데, 소민은 은혜를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때 은혜를 베풀어 경사를 함께하는 뜻을 보이지 않는다면, 어느 때에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세자가 초례(醮禮)한 다음 날 또 하교를 하였는데 그 뒤에 한 가지 일도 실효가 없었고, 어제 하례를 받은 뒤에 또 전조(田租)의 절반을 감해 주라고 하교하려고 하였는데 이 또한 실효가 없으면 거의 겉치레나 다름없을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에 부끄럽게 여기고 망설이며 결단하지 못하였다. 유신이 진달한 것이 이러하니, 승지와 하번의 뜻은 어떠한가?”

하자, 김시형이 아뢰기를,

“‘은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않아 실로 경사를 함께하는 뜻이 없습니다.’라고 한 것은 그 말이 절실합니다. 다만 묵은 환자의 일은, 삼남은 이미 전부 거두었을 것이고, 게다가 오래된 환자를 거두지 못한 것은 대부분 양반과 관리이며 소민은 간혹 있습니다. 또 혹 환자를 모두 납부하여 자문(尺文)을 받았는데도 거두어들인 기록에는 없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간교한 아전이 농간을 부린 짓입니다. 지난번 공산현(公山縣)의 을사년(1725, 영조1) 조(條) 환자 300섬을 한 색리가 백성들에게 받아먹고 환자를 거두지 못했다고 달아 놓아서, 다 조사를 한 뒤에 색리를 잡아들이도록 하였는데 이미 도주한 뒤였습니다. 이것을 보건대, 조정에서 비록 묵은 환자를 거두지 않더라도 반드시 은택이 소민에게 미치는 실상이 없으니, 이종성의 이 말은 또한 편벽됩니다. 토호와 관리가 과연 대부분 이렇게 바치지 않고 있으나, 또 장차 토호와 관리들을 미워하여 소민들까지 아울러서 구휼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편견입니다.”

하고, 신치근이 아뢰기를,

“소신의 뜻도 김시형과 같습니다. 지금 비록 정봉(停捧)하더라도 반드시 백성에게 미치는 실질적인 혜택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김시형이 아뢰기를,

“새 환자는 10월 안에 모두 거두었고, 묵은 환자도 이미 반은 거두었는데, 지금 정봉한다면 또 반드시 분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분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한 말이 맞다.”

하였다. 김시형이 아뢰기를,

“전후의 윤음이 간절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는데, 아래에 있는 자들이 왕명을 받들어 교화를 펴지 못하여 은택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세(田稅)의 절반을 감면해 주는 것도 이미 늦었다.”

하였다. 김시형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비록 전세의 절반을 감면해 주더라도, 이미 8결(結)로 1부(夫)를 삼고 8결 안의 경작자가 세금을 모아서 호수(戶首)에게 주니, 소민에게 이익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세를 감면해 주더라도 혜택이 고르지 않으니, 전토(田土)를 가진 백성들만 혜택을 받고 전토가 없는 백성들은 혜택을 받지 못한다.”

하였다. 김시형이 아뢰기를,

“이종성이 진달한 것이 대체는 좋습니다. 지금 백성의 생활이 고달픈데 이렇게 전에 없던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어찌 경사를 함께하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고의 깊은 인애(仁愛)와 두터운 은택을 백성들이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것은 대저 백성에게 미친 실질적인 혜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혜택을 널리 베풀고자 하니 이전처럼 실효가 없어서는 안 된다. 그대들이 나가 도승지에게 말하여, 대신과 상의한 뒤에 들어오면, 마땅히 소대(召對)하여 상의하고 처리하겠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기자묘(箕子廟)를 세워 제사하라. 이것은 전대(前代)와 삼한(三韓)이 거행하지 못했던 전례(典禮)이다.”

하니, 이종성이 아뢰기를,

“신이 또한 우러러 진달하려고 하였는데 결행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문하시니 감탄이 그치질 않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본받을 만한 일입니다. 《선묘보감(宣廟寶鑑)》은 지금 이미 다 썼으니, 새로 제수된 교리 정우량(鄭羽良)과 수찬 이만유(李萬維)를 내일 아침을 기다려 패초하여 현토(懸吐)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 탑전 하교(榻前下敎)를 내었다. - 상이 귤 한 쟁반을 내려 주니 신하들이 소매에 담아서 물러났다. 밤이 이미 2경(更)이었다.

[-D001] 지난번 …… 말하였으니 : 

이해 11월 21일 경연에서 이종성(李宗城)이 “역사서를 보는 법은 먼저 한 시대의 규모를 보고 그다음에 군주의 규모를 보아 그 요령(要領)이 마땅한지 아는 것입니다.”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承政院日記 英祖 5年 11月 21日》

[-D002] 요나라 …… 만합니다 : 

요나라 사신 왕악(王蕚)이 흥왕사(興王寺)의 소종(小鍾)을 보고 탄미하자, 그 절의 중인 후(煦)가 그 종을 바치겠다고 하니, 왕악이 좋다고 하였다. 그런데 요나라에서 그 사실을 알고 왕악이 사신으로 가서 망녕되이 물품을 요구하였다고 하여, 왕악에게 엄한 형을 내리고 종을 바치지 말도록 한 일을 말한다. 《東國通鑑 卷18 高麗紀 肅宗5年》

[-D003] 재이를 ……  : 

1090년(선종7) 3월에 천둥 번개가 친 뒤에 화재가 났었는데, 이 뒤에 예부에서 아뢰기를 “오직 예(禮)를 따르고 덕을 닦아야 극복할 수 있으며, 역사(役事) 일으키는 것을 그만두고 절검(節儉)에 힘써야 합니다.”라고 하여 왕이 따른 일이 있다. 《東國通鑑 卷18 高麗紀 宣宗7年》

[-D004] 이불을 …… 보아라 : 

증자(曾子)가 임종할 때 제자들을 불러 한 말이다. 《論語 泰伯》

[-D005] 청정한 …… 드림이네 : 

선종(宣宗)이 몸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지은 시의 끝 구절에 ‘약효가 있고 없는 것이야 어찌 염려하랴. 덧없는 인생 시작이 있었으니 어찌 끝이 없으리. 오직 원하는 것은 여러 가지 선행을 닦아 청정한 곳에 올라 부처에게 예를 드림이네.[藥効得否何敢慮 浮生有始豈無終 唯應願切修諸善 淨域超昇禮梵雄]’라고 하였다. 《東國通鑑 卷18 高麗紀 宣宗9年》

[-D006] 사신(史臣) : 

이제현(李齊賢)을 가리킨다.

[-D007] 대풍가(大風歌) : 

한 고조(漢高祖)가 천자가 된 뒤에 고향인 풍패(豐沛)를 지나다가 부로(父老)들과 술을 마시면서 부른 노래이다.

[-D008] 지금 …… 것입니다 : 

1094년(선종11) 봄 2월에 선종(宣宗)이 열병하려 하니, 어사대에서 이 말과 “병(兵)은 금(金)으로 목(木)을 이깁니다.”라는 말을 하며 반대했지만, 윤허하지 않았다. 《東國通鑑 卷18 高麗紀 宣宗11年》

[-D009] 남쪽으로 천도(遷都) : 

송(宋)나라 고종(高宗)이 1128년에 금(金)나라에게 쫓겨서, 양자강(揚子江)을 건너 임안(臨安)으로 도읍을 옮긴 것을 말한다.

[-D010] 신처수(申處洙)  : 

신처수는 삼전도(三田渡)의 비문(碑文)을 쓴 오준(吳竣)에 대하여 간언했다가 갑산부(甲山府)로 귀양을 갔다. 《英祖實錄 5年 11月 10日, 12日》

[-D011] 가을 ……  : 

1102년(숙종7)에 예부에서 “왕자(王者)가 순수(巡守)하는 것은, 제후가 스스로 한 나라를 전단(專斷)하여 위복(威福)을 제 마음대로 해서 위에서 내린 명령을 막아 은택이 아래로 흐르지 않을까 염려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 순수하여 백성들을 위해 폐해를 제거하였던 것입니다.”라고 말하여 은택이 백성들에게 미치게 하도록 청한 일이 있었다. 《東國通鑑 卷18 高麗紀 肅宗7年》

[-D012] 자문(尺文) : 

관아에서 조세 따위를 받아들이고 발급하는 영수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