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조선(朝鮮)을 계승하든지, 이미 자기가 하도록 허가하고 즉시 정명(正名)하게 하였는데,

2023. 1. 4. 16:03이성계의 명조선

 조선왕조실록 > 태조실록 > 태조 3년 갑술 > 2월 19일 > 최종정보

태조 3년 갑술(1394) 2월 19일(기축)

03-02-19[01] 표전 문제 등 황제가 힐문한 10가지 조항에 대해 해명하는 주문

[DCI]ITKC_JT_A0_A03_02A_19A_00010_2005_001_XML DCI복사 URL복사

조정(朝廷)의 사신 김인보(金仁甫)ㆍ장부개(張夫介)가 돌아가니, 임금이 주본(奏本) 1통(通)을 지어서 부쳐 올리고,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선의문(宣義門)에 이르러 전송하였다. 그 주문(奏文)은 이러하였다.

“홍무(洪武) 26년(1393) 12월 초8일에 흠차 내사(欽差內史) 김인보(金仁甫) 등이 이르러 좌군 도독부(左軍都督府)의 자문(咨文)을 받아, 삼가 성지(聖旨)를 받자왔는데, 이르기를, ‘어찌해서 고려의 이성계(李成桂)가 스스로 변방의 흔단(釁端)을 일으켜 해마다 그치지 않는가? 그 계량(計量)은, 창해(滄海) 강토(疆土)를 빙 둘러 있고 겹친 산[重山]을 짊어져서 험지(險地)를 삼은 것은 믿는 데 불과하니, 자주 흉완(兇頑)한 짓을 함부로 행하여, 우리 조정에서 군사 징발함을 한(漢)나라ㆍ당(唐)나라와 같이 여기고 있다. 또한 한(漢)나라ㆍ당(唐)나라 장수들은 기사(騎射)에는 장점이 있고 주즙(舟楫)에는 단점이 있는 까닭으로, 바다를 건너는 데 고생을 하고 군사의 행진이 뜻대로 되지 않았었다. 짐(朕)은 중국을 평정함으로부터 호로(胡虜)를 물리치고 하해(河海)와 육지(陸地)를 통틀어 정벌했으니, 수군(水軍)의 여러 장수들이 어찌 한(漢)나라ㆍ당(唐)나라의 한 일에 비할 수 있겠는가? 만약 반드시 군사가 삼한(三韓)에 이르지 않더라도 전후(前後)에 유인(誘引)한 여진(女眞)의 대소(大小) 가족들을 돌려보내고, 유인된 여진(女眞)의 변방을 수비한 천호를 보내어 오고, 이후에는 간사한 꾀를 만들어 변방의 흔단(釁端)을 일으키지 말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 하여금 편안하게 한다면, 바야흐로 동이(東夷)의 군주가 되고 후사(後嗣)도 또한 번성하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삼가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소방(小邦)이 천조(天朝)를 섬기기를 지성으로 하고 두 마음이 없으니, 어찌 감히 스스로 변방의 흔단(釁端)을 일으키겠습니까? 국토(國土)는 좁고 인민은 적은데, 보잘것없는 산해(山海)를 무엇이 믿을 것이 있기에, 흉완(兇頑)한 짓을 함부로 행하겠습니까? 전후(前後)에 여진(女眞)을 유인한 적이 진실로 없었는데, 지금 삼가 성지를 받고 전일에 있었다고 함을 알았으니, 두렵고 낭패하여 몸둘 곳이 없습니다.

신(臣)의 선대(先代)는 본디 조선(朝鮮)의 유종(遺種)인데, 신의 22대 조상(祖上) 이한(李翰)에 이르러 신라(新羅)에 벼슬하여 사공(司空)이 되었으며, 신라가 망하자 이한(李翰)의 6대 손(孫)인 이긍휴(李兢休)가 고려에 들어와 벼슬하였으며, 이긍휴(李兢休)의 13대 손(孫)인 이안사(李安社)가 전대의 원(元)나라에 벼슬했으니, 이 분이 신의 고조(高祖)였습니다. 이로부터 뒤에는 고려의 관작은 받지 않았습니다. 원(元)나라 말기에 군사가 일어나매, 신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은 신(臣)들을 거느리고 피란하여 동쪽으로 왔습니다. 그 당시에 마침 왜구(倭寇)의 작란(作亂)이 있었으며, 또 모원수(毛原帥)ㆍ관선생(關先生)ㆍ나하추(納哈出)가 잇달아 들어와서 침구하니, 신이 무재(武才)를 좀 익혔던 이유로써 신을 항오(行伍)에 배치하였지마는, 신의 관직은 현달(顯達)하지 못하였습니다. 고려의 공민왕이 세상을 떠남으로부터 위성(僞姓)인 신우(辛禑)에 이르기까지 16년 동안에,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ㆍ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 등이 잇달아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서 백성들에게 해독을 퍼뜨려 죄악이 가득하였으므로, 스스로 주륙(誅戮)을 취(取)하였습니다. 신은 본마음[素心]이 근신(謹愼)하여 다른 과실이 없었으므로, 신을 거용(擧用)하여 문하 수 시중(門下守侍中)으로 삼아 바야흐로 나라의 정사(政事)에 참여하게 했는데, 뜻밖의 최영(崔瑩)이 도리어 광망한 계획을 내어 신우(辛禑)와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공격하였습니다. 신은 소국(小國)이 상국(上國)의 국경을 침범할 수 없다는 것으로써 여러 사람들에게 대의(大義)로 개유(開諭)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오니, 신우(辛禑)는 그 죄를 알게 되고, 최영은 참형(斬刑)을 당했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종실(宗室) 왕요(王瑤)로써 나라 일을 임시로 서리(署理)하게 하고, 정몽주(鄭夢周)를 문하 시중(門下侍中)으로 삼았는데, 몽주는 최영의 실패한 자취를 경계하지 아니하고 왕요와 더불어 다시 요동(遼東)을 공격하려고 모의하니, 나라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하므로, 왕요는 물러나 사제(私第)로 돌아가고, 몽주는 참형(斬刑)을 당하였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왕씨(王氏)의 후손은 세상의 인망(人望)에 맞을 만한 사람이 없고, 군국(軍國)의 정무(政務)는 하루라도 통솔이 없어서는 안 되겠다고 여겨, 이에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ㆍ기로(耆老)들이, 신이 대국(大國)을 섬기는 충성이 있는 이유로써 함께 추대하여 군국(軍國)의 정무(政務)를 임시로 보게 하고, 즉시 주문(奏聞)하여 삼가 윤허(允許)를 얻었습니다. 신은 본디 무부(武夫)이므로 실로 사리(事理)를 아는 능력이 없사오며, 또 신의 선대(先代)는 고려에 있었으므로 전혀 빙자(憑藉:어떤 다른 힘을 빌려서 의지함 )할 세력이 없었는데, 다행히 성은(聖恩)을 힘입어 오늘날이 있게 되었으니, 감사하여 떠받드는 정성은 하늘의 해와 같이 명백합니다. 하물며, 최영ㆍ정몽주의 한 일이 밝은 거울처럼 가까이 있었는데, 신이 만약 그 간사한 계획을 계속한다면, 성은(聖恩)은 비록 신을 용서하고자 하더라도 나라 사람들이 어찌 즐거이 용서하겠습니까? 신이 목석(木石)이 아닌데 어찌 감히 심력(心力)을 수고롭게 하면서 이러한 이익이 없는 흔단(釁端)을 만들어 스스로 화(禍)를 초래하겠습니까? 신이 만약 기망(欺罔)한다면 천지 귀신이 위에서 굽어보실 것입니다. 지금 조관(條款)의 정유(情由)를 낱낱이 한조목 한조목씩 열기(列記)하여서 삼가 갖추어 주문(奏聞)합니다.

1관(款)에 ‘조정(朝廷)에서 매양 장수에게 명령하여 요동(遼東)을 지키게 했는데, 저들이 즉시 사람을 보내어 포백(布帛)과 금은(金銀)의 유(類)로써 거짓으로 행례(行禮)한다고 이유로 삼고 있으나, 마음속은 우리의 변장(邊將)을 꾀는 데 있다.’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조회(照會)해 보니, 소방(小邦)에서 무릇 사신을 보내어 중국 서울에 갈 적에는 반드시 요양(遼陽)을 경유하여 가게 되는데, 특별히 조정(朝廷)을 중하게 여겨 혹은 토산물인 포백(布帛)으로써 행례(行禮)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인정(人情)에서 나오는 것인데 어찌 서로 꾀려는 이치가 있었겠습니까?

1관은 ‘요사이 사람을 보내어 제왕(齊王)의 처소에 이르러 행례(行禮)하였는데, 보내 온 사람이 거짓으로 이상한 말을 하면서 스스로 그 나라를 비방하고 있으니, 마음속은 왕(王)의 동정(動靜)을 정탐하는 데 있다.’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를 조회(照會)해 보니, 소방(小邦)에서 다만 사신을 보내어 중국 서울에 갈 적엔 제왕부(齊王府)를 경유하여 가게 되므로, 제왕 전하(齊王殿下)에게 나아가서 행례(行禮)한 것이며, 또 그 중간에 혹시 언사(言辭)의 실수가 있었다면, 대개 이것은 명령을 받고 간 원인(員人)의 과실이므로 소국(小國)의 알 바가 아닌 것입니다.

1관은 ‘전부터 자주 청하여 약속을 듣겠다 하고는, 약속한 지가 이미 오래 되매, 가고 난 뒤에는 곧 전일의 약속을 어기고 암암리에 여진(女眞)을 꾀어서 가족 5백여 명을 거느리고 몰래 압록강을 건너게 했으니, 과연 이것이 약속을 듣겠다고 한 것인가? 죄의 큰 것이 이 흔단(釁端)보다 더 할 것이 없다.’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조회(照會)해 보니, 소국(小國)의 군민(軍民)이 잇달아 요동(遼東)으로 도망해 가서 군정(軍丁)에 충당된 사람과 혹은 잠시 거주한 사람은 본디부터 유인한 일이 없었는데도, 고향을 생각하여 도로 다시 도망해 와서 산골짜기 사이에 몰래 거주하고 있는데, 신이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요사이 요동 도사(遼東都司)에서 온 자문(咨文)에 의거하여, 사람을 보내어 소기(小旗) 이한니(李閑爾) 등을 처자(妻子)까지 합쳐 23명을 잡아서 요동 도사에 보냈으며, 홍무(洪武) 26년(1393) 5월 13일에 삼가 수조(手詔)를 받고는 즉시 관할 서북면의 각 부(府)ㆍ주(州)ㆍ군(郡)ㆍ현(縣)에서 본디는 본국인(本國人)에 속했던 박용(朴龍) 등을 가족 3백 88명까지 잡아 오고, 파절 천호(把截千戶) 김완귀(金完貴) 등까지 잡아 와서, 전 밀직 부사(密直副使) 조언(曺彦)을 시켜 압송(押送)한 것과, 취(取)하여 조사한 본래 거주하던 여진인(女眞人) 구을토(仇乙土) 등 1백 16명은 파견해 온 천호(千戶) 왕탈환불화(王脫歡不花)의 관령(管領)에게 부쳐, 모두 홍무(洪武) 26년 8월에 흠차 내사(欽差內史) 황영기(黃永奇)ㆍ최연(崔淵) 등과 함께 요동 도사에 보내어 서로 주고받고 했습니다.

1관은 ‘근일에 요동(遼東)에서 와서 아뢰기를, 「금년 7월에 불한당[劫賊] 1명을 잡아 왔는데 살펴보니, 고려 해주(海州) 청산(靑山) 파절 천호(把截千戶) 합도간(哈都干)의 하민(下民)으로서, 이름은 장갈매(張葛買)인데, 그가 말하기를, 고려왕(高麗王)이 흑포(黑布) 30통을 합도간(哈都干)에게 귀착(歸着)시켜 배 17척을 내게 했는데, 배마다 군사 40명, 노젓는 사람[搖櫓人] 18명, 백호(百戶) 1명씩이며, 연강(燕江)의 오천호(吳千戶)를 시켜 관령(管領)하게 하고는 7월 초5일에 길을 떠났습니다. 배 위의 사람은 모두 왜적(倭賊)처럼 꾸미고, 배도 모두 흑색(黑色)으로 꾸며, 거짓으로 매매(賣買)합니다.」 하면서 소식을 정탐하게 하되, 만약 관군(官軍)을 만나면 다만 이것이 왜선이라고 말하고는, 연로(沿路)에서 겁략(劫掠)하여 잡아가면서 안치(安置)했는데, 화자(火者) 9명 중에서 1명은 죽이고, 6명은 놓아 돌려보내고, 2명을 남겨 두어 길을 인도하게 하여, 7월 28일 밤에 금주(金州)의 위도(衛島)에 도착하여 조금 정박했다가 오천호(吳千戶)가 매(每) 선척(船隻)에 남은 군사 10명을 내어 간수(看守)하게 하고, 그 나머지 군인들은 자기가 인솔하여 언덕에 올라 신시(新市)의 군둔(軍屯)을 불사르고 겁탈하여, 군인과 가속(家屬)을 합계 4명을 사로잡아 가고, 2명을 죽이고, 3명을 살상(殺傷)하였다.’고 하였으며,

1관은 ‘또 거짓으로 왜적(倭賊)을 꾸며 선척(船隻)을 타고 산동(山東)의 영해주(寧海州)로 가서 언덕에 올라 본주(本州)의 인연을 겁살(劫殺)하였음을, 본디 잡혀 갔던 화자(火者)가 도망해 돌아와서 말하여 그전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삼가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소방(小邦)이 성조(聖朝)를 섬기면서 지성으로 하고 두 마음이 없는데, 어찌 감히 소민(小民)을 보내어 배를 타고 거짓으로 왜적(倭賊)을 꾸며서 금주(金州)와 산동(山東) 등지에 가서 언덕에 올라 도둑질을 하여 인명(人命)을 살상(殺傷)하였겠습니까? 그 장갈매(張葛買)가 일컬은 바 ‘거짓으로 매매(賣買)한다 하면서 소식을 정탐한다는 것’은, 신은 실로 갈매(葛買)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 못하오며, 더구나 만약 도둑질을 하여 겁살(劫殺)했다고 한다면 인정(人情)이 조격(阻隔)하여졌을 것이니 어떻게 사정을 정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거짓인 것은 분변(分辨)하지 않더라도 자명(自明)한 일입니다. 그전에 윤이(尹彝)와 이초(李初)가 도망하여 경사(京師)에 가서 시비(是非)를 거짓 꾸몄으나, 황제께서 살펴 만리 밖의 일을 환하게 아시어, 윤이와 이초가 이미 그 죄에 복종하여 처형(處刑)되었사온데, 신은 아마 장갈매(張葛買)도 역시 이런 등류의 불량(不良)한 무리로서, 잡혀서 관청(官廳)에 이르매, 문득 없는 사실을 꾸며 내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소국에서 사신을 보내매 이와 같은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사오니, 위에 하늘의 해가 있사온데 입으로는 사정을 호소(呼訴)하기가 어렵겠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성자(聖慈)께서 조관(朝官)을 파견하여 잡힌 겁적(劫賊) 장갈매를 보내시어 나라 사람들과 대변(對辨)한다면 문득 거짓인가 참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관(款)은 ‘표문(表文)을 올려 입공(入貢)한다 일컫고는 매양 말[馬]을 가져오면서, 말을 기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징발하여 보니, 말이 모두 둔하고 타서 지친 것들 뿐이며, 이번에 바친 말 중에는 다리가 병들고 이[齒]가 없는 것과 길들이지 않은 것이 반이나 되며, 그 나머지는 비록 관절병(關節病)은 없지마는, 또한 모두 둔하여 지성으로 바친 물건이 아니니, 이런 것으로써 업신여기고 화단(禍端)을 만드는 것보다는 어찌 줄여서라도 물건이 좋고 뜻이 성실한 것만 같겠는가?’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조회(照會)해 알아보니, 소국에서 생산되는 말이 본래 작고 둔하므로, 무릇 공헌(貢獻)할 때를 당하게 되면 힘을 다하여 가려서 바치게 되는데, 대개 길이 매우 멀기 때문에 다리가 병들고 피곤해 약한 것도 있을 것이오나, 소방(小邦)이 어찌 감히 업신여기겠습니까?

1관(款)은 ‘국호(國號)를 고치는 한 가지 절차는 사람을 보내어 조칙(詔勅)을 청하므로 혹은 조선(朝鮮)을 계승하든지, 이미 자기가 하도록 허가하고 즉시 정명(正名)하게 하였는데, 지금 이미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으로 고치고서도 표문(表文)에는 그전대로 권지 국사(權知國事)라 일컫게 되니, 무슨 계획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간사한 짓을 서서 계획을 부리는 것 뿐만이 아니라, 실은 저들의 상서롭지 못한 징조이다.’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홍무(洪武) 26년(1393) 2월 15일에 배신(陪臣) 한상질(韓尙質)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오면서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와서, 삼가 성지(聖旨)를 받았사온데, 그 칙지에, ‘동이(東夷)의 국호(國號)는 다만 조선(朝鮮)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그 유래(由來)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근본으로 삼아서 본받아, 하늘의 뜻을 본받고 백성을 잘 다스려서 후사(後嗣)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하였는데, 삼가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고쳐 일컬은 외에, 신은 생각하기를 국왕(國王)의 명작(名爵)을 내리지 않았다고 여겨, 감히 함부로 왕(王)이라 일컫지 못한 것이며, 실로 업신여기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지금 좌군 도독부(左軍都督府)의 자문(咨文)을 받아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즉시 명칭을 바루어야 된다.’ 하였으며, 또 도독부(都督府)에서 온 자문(咨文)에 의거하면, ‘조선 국왕(朝鮮國王) 이(李)에게 자문(咨文)을 보내니 이에 준하여 사은 표전(謝恩表箋)의 수찬(修撰)을 제폐하라.’ 하기에, 삼가 위의 명에 의거하여 시행하였으며,

1관(款)은 ‘이미 국호(國號)를 고치도록 허가했는데 사자(使者)가 돌아간 뒤에 오래 되도록 소식이 없었으며, 먼저 사람을 요왕(遼王)과 영왕(寧王)의 곳에 보내어 행례(行禮)하면서 조선국 권지 국사(朝鮮國權知國事)라 일컫고, 한달 후에야 겨우 표문(表文)을 올려 사은(謝恩)하니, 존비(尊卑)의 구분을 고의(故意)로 먼저 하고 뒤에 하였다.’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조회(照會)해 알아보니, 국호(國號)를 고치고 사은(謝恩)하는 일은 홍무(洪武) 26년 3월 초9일에 문하 평리(門下評理) 이염(李恬)을 파견하여 표전(表箋)과 예물(禮物)을 가지고 경사(京師)로 가게 했는데, 간 뒤에 요왕(遼王)과 영왕(寧王)이 봉작(封爵)을 받고 도래(到來)하였다는 것을 들어 알았습니다. 신은 소방(小邦)이 요녕(遼寧)과 경계가 서로 가까우므로 특별히 조정(朝廷)을 중시(重視)함으로써 마땅히 행례(行禮)해야 되겠기에, 그해 4월 초6일에 전 밀직 사(密直使) 박원(朴原)과 전 밀직 부사(密直副使) 유운(柳雲) 등을 파견하여 요왕과 영왕 전하(殿下)에게 가서 행례(行禮)하게 하였는데, 위의 항목의 이염(李恬)은 대개 경사(京師)에 가는 길이 매우 멀고 또 진헌(進獻)할 안자(鞍子)와 예물(禮物)을 가져가기 때문에 시일을 오래 지체하여 서울에 이르게 된 것이니, 어찌 감히 고의로 먼저 가고 뒤에 간 것이겠습니까?

1관(款)은 ‘지난해에 왕창(王昌)으로 하여금 내조(來朝)하기를 청하므로 허가하지 아니하고, 그 뒤에 왕요(王瑤)에게 국사(國事)를 맡겼더니, 또 내조(來朝)하기를 청하므로 역시 허가하지 아니하였는데, 드디어 요(瑤)의 아들 석(奭)으로 하여금 내조(來朝)하게 하고서, 조정(朝廷)에 이르자 도로 돌려보내고는, 그 부자(父子)가 부도(不道)하다고 일컬어 마침내 시역(弑逆)을 행하였으니, 그들이 여러 번 내조(來朝)하기를 청한 것은 마음속으로 중국에서 정벌할까 두려워한 까닭으로, 이 일을 가탁(假託)하여 신용을 얻으려고 한 것이다.’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가만히 보건대, 전대(前代)의 신창(辛昌)과 왕요(王瑤) 등이 여러 번 친히 조회하기를 청하였으며, 요(瑤)가 아들 석(奭)을 보내어 친히 천조(天朝)에 조회하고 환국(還國)하여, 그 아버지와 더불어 부도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고 반역을 꾀하기까지 하니, 나라 사람들이 이를 싫어하여 사저(私邸)로 물러가게 하고, 나라 사람들이 모두 신을 왕으로 추대하여 조정(朝廷)에 주달(奏達)하니, 성자(聖慈)께서 그 사정을 환하게 아시고 신에게 권지 국사(權知國事)를 허가하였으니, 그 왕요(王瑤) 부자(父子)는 현재 단란(團欒)하게 모여 살게 하여 타고난 수명(壽命)을 보전하도록 하였으며,

1관(款)은 ‘국호(國號)를 고친 데 대한 사은(謝恩)하는 표전(表箋) 내에 업신여기는 언사(言辭)를 섞었으니, 소국(小國)으로써 대국(大國)을 섬기는 정성이 과연 이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조회(照會)해 알아보니, 소방(小邦)이 먼 지방에 궁벽하게 있어서, 언어(言語)도 통하지 못하고 문견(聞見)도 넓지 못하여, 문자(文字)를 대강 익혀서 사정을 겨우 말하게 되므로, 표전(表箋)을 제작(製作)하는 데 있어서 체제와 격식을 잘 알지 못하여 잘못된 것이고, 감히 고의(故意)로 모만(侮慢)한 것은 아닙니다.”

【원전】 1 집 55 면

【분류】 외교-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