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30. 12:31ㆍ이성계의 명조선
위화도 회군
威化島回軍
시대
1388년 |
고려 말 이성계와 최영은 요동 정벌 문제를 놓고 격렬하게 대립했다. 고려는 최영의 주도로 명나라를 징벌하기 위해 요동 정벌을 추진했고, 이성계는 현실적인 한계를 들어 강력하게 반대했다. 우왕의 지시로 이성계가 지휘하는 요동 정벌군이 압록강까지 나아갔으나 위화도에서 군사를 되돌린다. 이후 이성계 일파는 우왕과 창왕, 공양왕까지 폐위하고 역성혁명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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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제30권 원집 잡편 / 변새(邊塞)
[변새(邊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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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여진(東女眞)은 말갈(靺鞨)의 유족(遺族)으로 고구려 땅에 모여 살았다. 그 지역은 사방 2백 리인데,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개마산(盖馬山)까지 이르렀으며, 남쪽으로는 장주(長州)와 정주(定州)에 인접하였다. 본디는 옛 고구려의 땅이다.
고려 숙종(肅宗) 10년(1105)에, 여진이 변방을 자주 침략하므로 크게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려 하다가 숙종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예종(睿宗)이 즉위한 2년(1107) 가을에, 윤관(尹瓘)을 대원수(大元帥)로 삼고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군사 17만을 이끌고 여진의 부락을 무찔러 쫓아내고 국경을 정하였는데, 동으로는 화관령(火串嶺), 북으로는 궁한령(弓漢嶺), 서로는 몽라골령(蒙羅骨嶺)까지였다. 그리고 빼앗은 철령(鐵嶺) 이북 1천여 리 땅에는 함주(咸州)ㆍ영주(英州)ㆍ웅주(雄州)ㆍ길주(吉州)ㆍ복주(福州)ㆍ의주(宜州)ㆍ공험진(公險鎭)ㆍ통태진(通泰鎭)ㆍ평융진(平戎鎭)의 9성(城)을 설치하여 북쪽 경계를 삼았다.
함주는 지금의 함흥부(咸興府)이고 영주는 몽라골령 아래에 있으며 웅주는 길주의 화관령 아래에 있다. 복주는 옛 독로올(禿魯兀)로 지금의 단천군(端川郡)이며 의주는 정주 남쪽에 있다. 공험진은 회령부(會寧府)의 소하강(蘇下江) 연안에 있는데 선춘령(先春嶺) 동남 두만강(豆滿江) 이북 7백 리 지점에 위치하였다. 예종 3년에 선춘령에다 윤관의 업적을 기록한 비(碑)를 세워 그곳으로 국경을 삼았다.
함주에는 대도독부(大都督府)를 설치하고 다른 여러 주(州)와 진(鎭)에는 방어사(防禦使)를 두었으나 여진이 강성해지자, 예종 4년(1109)에는 그 땅을 모두 되돌려 주었는데 그후에 원(元) 나라에 몰수되었다.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북쪽 변방을 평정하여 다시 길주를 설치하고 영주 이외의 모든 진을 길주에 소속시켰다.
고려가 처음으로 여진을 평정하고 땅을 차츰 넓혀서 철령으로 경계를 삼았다. 예종 때 비록 9성(城)을 설치하였으나 그 땅을 차지하자마자 도로 잃고 말았는데, 우리 태조(太祖)가 북쪽 변방을 평정하고 공주(孔州)ㆍ경주(鏡州)ㆍ길주(吉州)ㆍ단주(端州)ㆍ청주(靑州)ㆍ홍주(洪州)ㆍ함주(咸州) 등 7주를 설치하였다.
태조 7년(1398), 알목하(斡木河)는 사실상 이 나라 왕업(王業)의 기틀을 이룩한 곳이라 하여 경원부(慶源府)를 설치하였는데, 뒤에 여진의 침략을 받았다. 태종(太宗) 9년(1409)에 부(府)를 소다로(蘇多老)로 옮겼다가 이듬해에 여진이 또다시 침략해 오므로 그곳 백성들을 경성(鏡城)으로 이주(移住)시켜 그 땅을 비워 두고 부(府)를 부거(富居)로 옮겼으며, 석막(石幕)에다 영북진(寧北鎭)을 증설하여 거기에서 알목하를 방어하였다. 뒤에 동맹가첩목아(童孟哥帖木兒)가 이곳을 점거하였는데, 올적합(兀狄哈)이 그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세종(世宗) 16년(1434), 김종서(金宗瑞)를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로 삼아 공주ㆍ경주의 옛 땅을 복구토록 하였는데, 김종서가 명을 받은 지 3년이 지나 시의(時議)가 불편함을 다투어 쟁론하며 비난하는 자들의 글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이에 김종서는,
“용성(龍城)이 견고하다 하지만 실은 산천(山川)의 요해(要害)가 없어 사면으로 침략을 받는 지역이며 부거와 석막도 모두 국경이 될 만한 곳이 못 됩니다. 그러니 적이 멸망한 이 시기에 성과 읍을 다시 배치하여 국경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 만세를 위한 이익입니다. 더군다나 조상의 옛 영토를 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하고, 성을 쌓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을 들어서 수천 자의 소(疏)를 올렸다. 세종은 그 계획을 좋게 여겨 변방 방어의 일을 전적으로 김종서에게 맡기고 영북진을 백안수소(伯顔愁所)로 옮겼다. 이곳은 알목하의 서북쪽으로 적들이 왕래하는 통로의 요충지이며, 알타리(斡朶里)의 유족이 사는 곳이다. 때문에 큰 진(鎭)을 설치하여 북쪽 관문을 방어하였다. 그리고 다시 경원부를 횟가[會叱家]에 설치하고, 옛 공주(孔州) 고을의 성을 증축하여 두만강으로 국경을 삼았다. 큰 진에는 5품관 여직(勵直)을 두고 영북진과 소다로에는 새내(塞內 길주ㆍ공주를 말함)의 백성 각각 1천 1백 호를 이주시키고 모자라는 것은 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ㆍ강원도에서 4백 호씩 이주시켜 6백여 리의 땅을 개척하였다.
세종 15년(1433)에 상이 최윤덕(崔潤德)을 보내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홀자온(忽剌溫)을 토벌케 하니 포로와 참수(斬首)가 4백여 명이었다. 19년(1437)에 다시 이천(李蕆)을 시켜 새상(塞上 평안도 지역)의 군사 3천을 동원하여 파저강(婆豬江) 유역에 있는 여진의 잡종(雜種)을 무찌르고 그들의 소굴을 불사르게 하였는데, 그때 참수와 포로가 1백여 명이었다. 세종은 김종서를 매우 높이 대우하여 황보인(皇甫仁)과 함께 정승을 삼았는데, 노릉(魯陵 단종(端宗)) 2년(1454) 정사(靖社) 때에 죽음을 당하였다.
알목하는 두만강 남쪽의 오랑캐 말이며 오음회(吾音會)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회령부(會寧府)이다. 횟가ㆍ백안수소ㆍ소다로는 옛 공주의 땅이며, 횟가는 지금의 경원부인데 경원의 고적으로 소다로의 옛 영지(營地)가 있다. 석막과 부거는 옛 부령군(富寧郡)으로 석막이라 부르며 지금의 부령부이고 용성은 옛 경주(鏡州)의 북쪽 경계였으며 영북진은 지금의 경성부(鏡城府)이다.
김종서의 축성소(築城疏)에,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용성은 진(秦) 나라의 함곡관(函谷關)과 같다.’라고 하오나 그 지역에는 산천의 막힘이 없어 실은 사면으로 침략받는 곳입니다. 그들의 말과 같이 용성으로 경계를 삼는다면, 만약 도적이 육박해 올 경우 그들은 마천령(磨天嶺)으로 경계를 삼자 할 것이고 또 육박해 오면 그때는 철령(鐵嶺)으로 경계를 삼자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고려의 전철로써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조종의 옛 강토는 왕업의 기틀을 이룩한 곳인데 버려두고 지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선왕의 유지를 이어 받드는 후손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근거 없이 말하는 무리들은, 망녕되게 첫 해에 눈이 많이 온 것과 이듬해에 질병이 많았던 것을 끌어대 가지고 한갓 큰일을 방해하여 공적을 그르치려고 할 뿐이옵니다. 큰일을 이룩하는 이는 작은 폐단을 생각하지 않고, 큰 업적을 세우는 이는 작은 피해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성급하게 성과를 거두려 하지 말고 작은 이익에도 얽매이지 마소서. 세월을 두고 깊이 생각하여 변함없이 굳건하게 버티어 간다면 자연 근거 없는 말은 잠잠해지고 백성의 원망과 폐단이 없어질 것이며, 백성의 식량도 충분해지고 군사의 힘 또한 강화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랑캐들이 자연 굴복하게 되어 새로 설치한 고을이 영원토록 견고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무창군(茂昌郡)은 본디 여연부(閭延府)의 상무로(上無路)였는데, 세종 23년(1441)에 처음으로 무창현(茂昌縣)을 두었고 이듬해에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군 동쪽 130리에 있는 원주보(原州堡)와 80리에 있는 보산보(甫山堡)는 모두 옛 군영(軍營)이었다. 동쪽으로 갑산(甲山) 마상화(磨上和)까지 160리, 서쪽으로 여연부 소온량(所溫梁)까지 130리, 남쪽으로 자성군(慈城郡) 죽전현(竹田峴)까지 80리, 북쪽으로 압록강까지 1리이다.
여연부는 본디 옛 갑산부의 여연촌(閭延村)이었는데, 태종 16년(1416)에 처음으로 여연군을 두었고 세종 17년(1435)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키면서 갑산의 소훈두(小薰豆) 서쪽을 떼어 붙여 동쪽 경계 지역을 넓혔다. 동쪽으로 무창군 다락구비(多落仇非)까지 45리, 서쪽으로 우예군(虞芮郡) 하무로(下無路) 북쪽까지 65리, 남쪽으로 자성군 신로현(新路縣)까지 105리이며 그 북쪽은 압록강까지 4리이다.
우예군은 본디 여연부의 하무로였는데 세종 25년(1443)에 우예군을 두었다. 군 서쪽에 소우예(小虞芮)가 있는데 동쪽으로 하무로까지 30리이고 남쪽으로 자성군 잉질항(芿叱項)까지 50리, 북쪽으로 조명간(趙明干)까지 20리, 서쪽으로 압록강까지 1리이고 그 바깥은 독로강(禿魯江) 강계(江界) 이다.
자성군은 여연군의 번강(番江) 유역에 있는데 강계부(江界府) 동쪽 경계까지 130리이다. 자성군 북쪽 120리에는 상토보(相土堡)가 있고 그 바깥에는 홀자온인데, 《삼수지(三水誌)》에,
“삼수에서 서쪽으로 옛 무창군 서쪽 경계까지 110리이다.”
라고 적혀 있다.
4군(郡 무창ㆍ여연ㆍ우예ㆍ자성)의 땅은 동으로 허천(虛川)부터 서쪽으로 독로강 만년군(萬年郡)까지 443리이고 남과 북은 압록강에서 영흥군(永興郡) 양덕(陽德) 경계까지 5백 리이다. 본래 숙신국(肅愼國) 말갈의 터전으로 조선의 옛 땅이었는데 여진에게 빼앗겼다. 우리 태종과 세종이 북쪽 경계에 6진(鎭)을 설치하고 또 압록강 유역에 4군을 설치하였는데 홀자온과 올량합(兀良哈) 그리고 파저강 유역의 여러 오랑캐들이 변경을 자주 침략하므로 세종 15년(1433)에 최윤덕을 보내 쳐부수었고 19년(1437)에 또 이천을 보내 토벌하였다. 세조 원년(1455)에 와서는 4군 지역 9백여 리를 버리고 오랑캐와 관계를 끊었다.
[주-D001] 시의(時議)가 …… 늘어났다 :
경성(鏡城)에 성(城) 쌓는 것을 반대하는 여론이 늘어난 것을 말한다. 조정 대신들이, 용성(龍城)은 4군(郡)의 요충 지대이므로 경성을 그곳으로 옮기고 도절제사의 본영을 삼아 요충지만 지키면 되는 것이지 굳이 인력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世宗實錄 18年》
[주-D002] 여직(勵直) :
서반(西班) 토관(土官)의 정5품(正五品) 벼슬이다. 《經國大典 兵典》
[주-D003] 함곡관(函谷關) :
진(秦) 나라 관(關)의 이름이다. 산곡(山谷)이 함(函)과 같아서 함곡관이라 하였는데, 지금의 하남성(河南省)에 있다. 《史記 卷7 項羽本紀 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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