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皇后) 기씨(奇氏) [후비(后妃)]

2023. 1. 14. 09:02이성계의 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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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 제70권 / 인물고(人物考) 4 후비(后妃), 명원(名媛), 중관(中官)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皇后) 기씨(奇氏) [후비(后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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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자홀도황후(完者忽都皇后) 기씨는 고려 사람으로, 황태자인 애유식리달랍(愛猷識理達臘)을 낳았다. 가문이 본디 미천하였는데, 황후가 귀하게 됨으로 해서 삼대(三代)가 모두 왕작(王爵)에 추봉(追封)되었다. 처음에는 휘정원사(徽政院使) 독만질아(禿滿迭兒)의 추천으로 궁녀가 되어 차(茶)를 올리는 일을 맡아 순제를 섬겼다.

황후는 성격이 영특하고 약아서 날마다 총애를 받았다. 그 뒤에 답납실리황후(答納失里皇后)가 이를 질투하여 자주 매질하면서 욕보였다. 답납실리황후가 해를 당한 뒤에 순제가 기씨를 황후로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자 백안(伯顔)이 안 된다고 다투니, 백안을 정승 자리에서 파직시켰다. 그 뒤 사랄반(沙剌班)이 드디어 둘째 황후로 세우기를 청하여 흥성궁(興聖宮)에 거처하였다. 황후는 휘정원(徽政院)을 고쳐서 자정원(資政院)이라 하였다.

황후는 일이 없을 적이면 《여효경(女孝經)》이나 사서(史書)를 가져다가 읽으면서 어진 행실이 있었던 역대의 황후들을 본보기로 삼았다. 사방에서 바치는 공헌품(貢獻品) 가운데 혹 진미(珍味)가 있을 경우에는 먼저 심부름꾼을 보내어 태묘(太廟)에 바친 다음에야 자신이 먹었다. 이 당시에 순제가 정사에 자못 싫증을 내고 있었는데, 황후가 황태자와 더불어 내선(內禪)을 받을 계책을 꾸몄다. 이에 박불화(朴不花)를 보내어 승상(丞相)으로 있던 태평(太平)에게 자신들의 뜻을 알렸는데, 태평이 가부를 답하지 않았다. 순제 역시 황후의 뜻을 알고는 노하여 멀리하고는 두 달간이나 보지 않았다.

당초에 기씨 일족으로 고려에 있던 자들이 세력을 믿고 멋대로 굴자 고려의 왕이 노하여 이들을 모두 죽였다. 23년(1363, 공민왕12)에 황후가 황태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어찌하여 나를 위해서 복수하지 않는가?” 하였다. 그러자 드디어 경사(京師)에 머물러 있던 고려의 왕족 가운데 사람을 고려 왕으로 삼고, 기씨 족속의 아들인 삼보노(三寶奴)를 원자(元子)로 삼았다. 그런 다음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최첩목아(崔帖木兒)를 승상(丞相)으로 삼아 보내면서 군사 1만 명을 보내고, 아울러 왜병(倭兵)을 불러들여 함께 고려로 쳐들어가게 하였다. 그런데 압록강(鴨綠江)을 지나가던 중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크게 패해 단지 17기(騎)만이 살아서 되돌아오니, 황후가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25년(1365, 공민왕14)에 백안홀도황후(伯顔忽都皇后)가 붕어(崩御)하였다. 중서성(中書省)의 신하가 기 황후를 정위(正位)인 중궁(中宮)의 자리에 앉혀야 한다고 말하니, 순제가 답하지 않았다. 그 뒤 12월에 이에 책보(冊寶)를 주었는데, 그 책문(冊文)에 이르기를,

“곤(坤)으로써 건원(乾元)을 이으니 인도(人道)에 있어서 부부(夫婦)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후(后)로서 천하의 어머니가 되니 왕화(王化)가 실로 국가에서 비롯되는도다. 전례(典禮)를 떳떳하게 행함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대 숙량합씨(肅良合氏)는 명족(名族)의 집안에서 태어나 이곳으로 와 짐을 섬기었도다. 마음을 조심하여 서로 이루어주느라 매번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하였고, 공손함과 검소함으로 아랫사람을 거느리면서 여러 해 동안을 그렇게 하였도다. 이미 태자궁에서 원자가 탄생하는 상서로움이 있었는데, 다시 태자궁에서 손자가 탄생하는 경사가 있었도다.
저 중궁의 자리를 돌아보건대, 참으로 어진 아내를 두는 것이 합당하도다. 종척(宗戚)의 대신들이 모두들 그렇게 말하고 거듭 청하였으며, 액정(掖庭)의 여러 관원들이 모두들 우러러 사모하면서 떠받들었도다. 그런데도 여러 차례 겸손하게 사양하였으니, 더욱더 가상하도다. 이제 섭태위(攝太尉) 아무개를 대신 보내어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서 옥책(玉冊)과 옥보(玉寶)를 주어 그대를 황후로 삼는도다.
아, 마음을 삼가 곤정(壼政)을 닦으면서 더욱더 곁에서 보좌하는 마음을 힘쓰고, 밝게 덕음(德音)을 이어받아 함께 길고도 넓은 복록을 보전하라. 총애하는 명을 공경히 하여 수(壽)와 복(福)을 넓게 하라.”

하였다. 그 뒤 28년(1368, 공민왕17)에 순제를 따라 북쪽 화림(和林)으로 도망쳤다. 《원사》

○ 기씨(祁氏) -살펴보건대, 《원사》에는 기씨(奇氏)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맞다. 이하도 같다.- 는 성품이 영특하고 약아서 순제에게 총애를 받았다. 황후 백오아씨(伯吾兒氏)가, 기씨가 순제에게 총애받는 것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불평스럽게 여겨 밤이나 낮이나 매질을 해 대었으므로 기씨가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저녁에 또 기씨를 앞에다가 꿇어앉혀 놓고 죄를 캐물으면서 기씨의 몸을 인두로 지졌다. 그다음 날 사천(司天)이 아뢰기를, “어제저녁에 화성(火星)이 후비(后妃)를 범하였습니다.” 하였다. 당초 세조황제(世祖皇帝)의 가법(家法)에는 고려의 여자를 천하게 여겨 궁 안으로 들이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조종(祖宗)의 가법을 무너뜨리니, 식자들이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임을 알았다.

○ 지원(至元) 원년(1335, 충숙왕4)에 옹길랄씨(翁吉剌氏)를 세워 황후로 삼고는 정궁황후(正宮皇后)라고 하고, 다시 기씨를 세워 차황후(次皇后)로 삼고는 흥성궁(興聖宮)에 거처하게 한 다음 흥성궁황후(興聖宮皇后)라고 불렀다. 두 궁의 후(后)가 모두 황후가 된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 지정(至正) 18년(1358, 공민왕7)에 기 황후의 궁에서 고려의 미인들을 많이 두고 있으면서 권세 있는 대신들에게 이 여인들을 보내 주었는데, 경사(京師)의 달관(達官)이나 귀인(貴人)들은 반드시 고려의 여인을 얻은 뒤에야 명가(名家)가 되었다. 고려의 여인들은 아름답고 교태로워서 남자를 잘 섬겼으므로, 들어가게 되면 대부분 남자의 총애를 독차지하였다. 지정 이후로부터 궁중의 급사(給事)나 사령(使令)은 태반이 고려의 여인들이었다. 이 때문에 사방 사람들이 의복이나 신발, 모자, 기물 등을 모두 고려의 모양새를 본떠 만들었다. 이것은 한 시대의 풍기(風氣)에 관계되는 것이니,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이상 모두 경신외사(庚申外史)》 ○ 《원시선(元詩選)》에 실려 있는 장욱(張昱)의 원궁사(元宮詞)에 이르기를, “궁중 의복 새로이 고려 양식 숭상하니, 허리 지난 모난 깃에 짤막한 옷소매네. 밤마다 궁중에서 앞 다투어 구경하니, 일찍이 이 옷 입고 어전 왔기 때문일세.[宮衣新尙高麗樣 方領過腰半臂裁 連夜家爭借看 爲曾着過御前來]” 하였다.

유기(劉基)의 무산고(巫山高)는 기 황후를 풍자해서 지은 것이다경신군(庚申君)이 기비(奇妃)를 총애하여 황후로 삼자, 기비가 권력을 전횡하면서 당파를 심어 궁중 안을 어지럽혔으므로 무산고를 지어서 풍간(諷諫)한 것이라고 한다. 《열조시집(列朝詩集)》 ○ 《열조시집》에 또 이르기를, “유기가 지은 초비탄(楚妃歎)과 양보음(梁甫吟) 역시 기 황후를 풍자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하였다. ○ 명(明)나라 주헌왕(周憲王) 주유돈(朱有燉)의 《성재신록(誠齋新錄) 원궁사에 이르기를, “붉은 볼 보조개에 버들처럼 가는 허리, 복이 바로 화근일 줄 그 어찌 알았으랴. 고려의 기 황후를 책봉하던 그날에는, 유월에도 날 음산해 대설이 날렸어라.[杏臉桃腮弱柳腰 那知福是禍根苗 高麗妃子初封冊 六月陰寒大雪飄]” 하고, “기씨는 압록강의 동쪽에서 살다가, 한창 나이 되어서 중궁 자리 차지했네. 한림이 엊그제 새 조서를 지으니, 삼대 모두 은혜 받아 작록이 높아졌네.[奇氏家居鴨綠東 盛年纔得位中宮 翰林昨日裁新詔 三代蒙恩爵祿崇]” 하고, “좋은 술 새로 걸러 옥병에 담아 올리니, 물가 정자 깊숙한 곳 더위라곤 전혀 없네. 군왕께서 웃으면서 기비 향해 말하누나, 어쩜 이리 서경의 타랄소와 비슷한가.[白酒新蒭進玉壺 水亭深處暑全無 君王笑向奇妃問 何似西京打剌蘇]” 하고, “어제 아침 들어온 고려의 여인들은, 태반이나 기씨의 친족이라 하는데, 그대로 여관으로 늙히기가 싫어서, 이들 모두 보내어서 두 궁빈을 삼누나.[昨朝進得高麗女 太半咸稱奇氏親 最苦女官難派散 總敎送作二宮嬪]” 하였다. ○ 《열조시집》의 명나라 한왕(漢王) 주고후(朱高煦)의 의고시(擬古詩)에 이르기를, “순제는 공교로운 생각이 많아, 양공조차 그에 미칠 수가 없었네. 기 황후가 중전 자리 어지럽히자, 아들들이 그 교만함 이어받았네. 간사한 자 여러 차례 등용이 되매, 군읍마다 못된 정사 불어났다네.[順帝饒巧思 良工弗能及 奇后褻坤儀 儲子驕相襲 奸回屢登庸 弊政滋郡邑]” 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려사》에 이르기를, “기 황후는 행주인(幸州人)이다. 고조(高祖)인 기윤숙(奇允肅)은 관직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아버지인 기자오(奇子敖)는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에 보임된 다음 여러 차례 승진하여 총부 산랑(摠部散郞)이 되었다. 기자오는 전서(典書) 이행검(李行儉)의 딸에게 장가들어 기식(奇軾), 기철(奇轍), 기원(奇轅), 기주(奇輈), 기륜(奇輪)을 낳았으며, 황후는 계녀(季女)이다. 충혜왕(忠惠王) 때 순제(順帝)가 고용보(高龍普)와 박불화(朴不花) 등을 보내어 기자오에게 병덕승화육경 공신(秉德承化毓慶功臣)을 추증하고 영안왕(榮安王)을 책봉하고서 장헌(莊獻)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리고 그의 처인 이씨는 영안왕부인(榮安王夫人)을 삼았고, 그의 문에 정절(貞節)이라고 정표(旌表)하였으며, 한림학사(翰林學士) 구양현(歐陽玄)에게 묘비(墓碑)를 찬하도록 명하여 하사하였다. 그 뒤에 다시 또 3대를 추봉(追封)해서 왕으로 삼고, 기식과 기철 등을 모두 행성참지정사 한림학사(行省參知政事翰林學士) 등의 관직을 제수하여 총애하는 은전을 내렸다.” 하였다.

 

유기(劉基, 1311년 7월 1일 ~ 1375년 5월 16일)는 중국 명나라의 군사참모전략가, 정치가, 시인이다. 자(字)가 백온(伯溫)이기에 유백온(劉伯溫)이라고도 불린다. 시호는 문성(文成). 저장성(浙江省) 온주(溫州) 문성현(文成縣) 남전(南田) 출신이다. 그의 출신지 문성이 후에 청전(青田)이라 부르기 시작하여, 때때로 그를 유청전(劉靑田)으로 칭해지기도 한다.

 

주고후(朱高煦, 1380년 12월 30일 ~ 1426년 10월 6일)은 명나라 초기의 종실로 영락제 주체의 차남이자 인효문황후 서씨의 소생이다. 1395년 할아버지인 태조 주원장으로부터 고양군왕(高陽郡王)에 책봉되었으며 1399년 아버지인 연왕 주체가 정난의 변을 일으키자 선봉장으로서 이에 가담하며 큰 공을 세웠고 이러한 공으로 당시 아버지의 영지를 지키던 형인 연왕세자 주고치(후일 홍희제)보다도 더욱 총애를 받았다.

이후 아버지가 황위에 오르자 1404년 한왕(漢王)의 작위를 받았으나 형인 주고치를 없애고 황태자에 오르려는 야심을 공공연히 보였으며 이로 인해 부황 영락제로부터 의심을 받았다. 1424년 영락제가 몽골 원정 도중 죽고 형 황태자 주고치가 황위에 올랐으나 곧 사망하고 황태손 주첨기가 황위에 올라 선덕제가 되었다. 선덕제가 황위에 오르자 황위를 찬탈할 좋은 기회라 여긴 주고후는 소속 장수들을 모아 북경을 쳤으나 선덕제의 친정과 조정 장수들의 활약으로 군세가 깨지고 주고후는 잡힌 후 처형되었으며 그 가족 역시 구족이 몰살되었다.

가족[편집]

아들들[편집]

  1. 의장세자 주첨학(懿莊世子 朱瞻壑)
  2. 왕세자 주첨기(王世子 朱瞻圻)
  3. 왕세자 주첨탄(王世子 朱瞻坦)
  4. 제양군왕 주첨자(濟陽郡王 朱瞻垐)
  5. 임치군왕 주첨역(臨淄郡王 朱瞻域)
  6. 치천군왕 주첨역(淄川郡王 朱瞻墿)
  7. 창락군왕 주첨성(昌樂郡王 朱瞻垶)
  8. 제동군왕 주첨평(齊東郡王 朱瞻坪)
  9. 임성군왕 주첨도(任城郡王 朱瞻壔)
  10. 해풍군왕 주첨장(海豊郡王 朱瞻㙊)
  11. 신태군왕 주첨방(新泰郡王 朱瞻垹)

주유돈(朱有燉, 1379년 2월 6일 ~ 1439년)은 중국 명대 초기의 극작가이다. 본명은 주헌왕(周憲王)이다.

명태조의 손자이며, 본명은 주유돈(朱有燉), 호는 성제(誠齊)이다. 명초 북방의 여러 왕실(王室)은 배우를 고용하여 북극 유행의 거점이 되고 있었는데, 주헌왕은 영헌왕(寧獻王) 주권(朱權)과 더불어 최대의 연극 후원자 겸 극작가였다. 신선담(神仙譚)을 주축으로 하는 31종에 이르는 작품은 원나라 잡극의 의고체(擬古體)에 불과하고 생기가 없으나, 그때까지의 주역인 독창 이외에 조연진(助演陣)의 합창·윤창(輪唱)을 도입하는 등 연출 기술의 진보에 기여한 공은 매우 크다

 

[-D001] 자정원(資政院) : 

자정원(資正院)의 잘못이다.

[-D002] 황후가 황태자에게 이르기를 : 

원문에는 ‘后謂皇后子曰’로 되어 있는데, 《원사(元史)》 권114 기황후열전(奇皇后列傳)에 의거하여 ‘后謂皇太子曰’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D003] 고려의 …… 사람 : 

충선왕(忠宣王)의 서자(庶子)인 덕흥군(德興君) 왕혜(王譓)를 가리킨다. 몽고명(蒙古名)은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이다.

[-D004] 다시 …… 있었도다 : 

원문에는 ‘復慶孫枝於甲觀’으로 되어 있는데, 《원사》 권114에 의거하여 ‘復流慶孫枝於甲觀’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D005] 총애하는 …… 하여 : 

원문에는 ‘共欽寵命’으로 되어 있는데, 《원사》 권114에 의거하여 ‘其欽寵命’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D006]  : 

원문에는 ‘乃’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朝鮮廣文會本)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D007] 경신군(庚申君) : 

원나라 순제(順帝)를 가리킨다. 순제 27년(1367) 8월 경신일에 명나라 군사들이 원나라의 서울을 점령하여 원나라가 망하였으므로, 순제를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D008] 성재신록(誠齋新錄) : 

원문에는 ‘誠齋新祿’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D009] 타랄소(打剌蘇) : 

몽고어로 ‘주(酒)’의 음역(音譯)인바, 술을 말한다.

[-D010] 여관(女官) : 

궁궐에서 대전(大殿)과 내전(內殿)을 모시던 내명부(內命婦)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