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31. 03:29ㆍ이성계의 명조선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별책 4 94권 『韓民』(중문판) > 『韓民』 > 『韓民』 제1기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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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民』 제1기 제2호
본간은 이미 내정부와 중앙선전부에 등록을 신청하였음
본호의 심사증 번호는 雜字1696號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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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임시정부가 孫大總統과 국회비상회의의 깊은 동정을 얻게 된 경과
중한문화와 왜노
姚薦楠
대중화민국과 대한민국은 과거 황제와 단군 이래로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어 온 형제의 나라이다. 인류문명의 진화와 발전 결과, 20세기에 들어 두 나라는 공히 제국이 아닌 민국으로 변하게 되었다.
필자는 아직도 중화민국 기원 1년 전에 있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辛亥革命이 일어나던 해에 필자는 北京에 있는 한 우인의 집에서 한국인 친구 申圭植과 필담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민국 국체는 제국 국체보다 절대 월등한 것’이라는데 인식을 같이하였다.
中華民國이란 국호는 中國國民黨 총리이신 孫中山 선생이 同盟會 시대에 이미 확정하신 국호이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申 군이 임시정부에 관여했을 때 비로소 확정된 뒤 지금까지도 계속 사용되고 있다. 이로써 중한 두 형제의 나라는 공히 민국이란 이름으로 동아에 우뚝 서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어떠한가? 그들은 일찍이 중한 두 나라로부터 문물을 전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그들만이 천황제를 고집하여 모든 백성을 노예로 삼고 있다. 천황은 만악의 근원인 군벌들을 앞세워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일본은 지금도 皇祖니 皇宗이니 皇國이니 皇軍 따위 등등 미개시대의 낡은 용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있다. 지금도 백성들은 천황과 군벌의 억압과 착취에 허덕이는지라 사람들은 일본 삼도를 생지옥이라 부르는 것이다.
나는 늘 왜노들이 천황이라 부르는 자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지 않는 한, 삼도의 왜노들은 결코 단 하루도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해왔다. 왜노들은 소위 유신 이래로 역사를 조작하고 남을 침략하는 등 비인도적인 죄악을 저질러 문명의 진화를 가로막았다.
배은망덕한 왜노들은 인도와 공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비인간적인 온갖 죄악을 자행하였다. 이 모든 것의 화근은 바로 천황제에 있는 것이다. 睦仁이 뿌린 죄악의 씨앗은 이미 너무나 깊이 뿌리를 내려 죽음에 이르기 전에는 쉽사리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大倭帝國을 大倭民國으로 탈바꿈시키는 일대개혁이 유일한 기사회생의 방도이다.
題詞
王芃生
삼한과 중국은 일찍부터 교통이 빈번하였다. 특히 한국과 가까운 연나라와 제나라 사람들은 수시로 한국을 왕래하였다. 삼한을 통해 중국문화를 받아들인 왜인들은 이로써 점차 개화되었으나, 호전적이고 침략적인 천성은 버리지 못하였다. 한국의 삼국시대에 왜의 여왕 齊明은 2만 7천의 군사를 파견하여 白江을 침략했다. 신라는 당나라 장수 劉仁軌 · 杜爽 등과 연합하여 왜군을 섬멸하고 전함 4백여 척을 불태우니 왜군의 남은 군사들은 항복을 청하였다.
유인궤는 항복한 왜군을 이끌고 태산에 가서 당나라 高宗을 알현하였다. 이때의 패전 이후 왜왕은 다시는 서쪽을 침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전쟁이 중한 두 나라가 힘을 합쳐 왜구의 침략을 막은 첫 번째 사례였으며, 이 전쟁에서 중한 연합군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왜는 6백년 동안 중한 두 나라에 복종하며 별다른 사단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원나라 초년에 왜를 치다가 소위 神風을 만나 패배한 뒤부터 왜인들은 다시 서쪽을 넘보기 시작하였다. 명나라 때에는 왜구가 한국의 연해지역을 시끄럽게 하더니 급기야는 중국에까지 출몰하였다. 그러나 李成桂에 의해 왜구들은 한국에서 쫓겨나고, 이성계는 그 공으로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왜적의 우두머리 豊臣秀吉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 길을 빌린다는 명분으로 한국을 침범했으나, 명나라에서 보낸 원군에 의해 울산과 평양에서 대패하였다. 명나라 군대는 비록 벽제전투에서 패배하여 약간의 손실을 입기는 하였으나, 용산에 있던 적의 식량창고를 불태움으로써 패배를 만회하고 적들을 패퇴시킬 수 있었다. 결국 7년을 버티던 풍신수길은 명나라에 굴복하고 일본국왕에 봉해지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하였다. 이 전쟁은 왜구의 침입에 맞서 중한 두 나라가 협력하여 장기전을 펼친 끝에 마침내 승리한 대표적 경우였다.
그 후로 豊臣을 대신하여 德川이 일어났는데, 한국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왜국이 장차 사단을 일으킬 것이라고 고해 왔으나 청나라에서는 오랫동안 海禁을 풀지 않았고, 또 한국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로부터 왜국 실정에 어두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점차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왜국은 특히 서양과 접촉한 이후부터는 교활한 음모를 다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왜국이 閔妃를 시해하고 한국을 침략하자 청나라는 수륙 양면으로 원군을 파견하여 한국을 돕고자 하였으나 불행히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그마한 패배를 아랑곳하지 않고 지구전을 전개하여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나라와는 달리, 청나라는 급히 강화를 서둘러 왜적의 기세를 더욱 드높여주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9 · 18사변 직전 왜황은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이 무작정 국경을 넘지 못하도록 하고, 일단 신의주에 3일간 머물며 사태를 관망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林銑十郞은 왜황의 명을 받들지 않고 독단적으로 왜군을 遼東省으로 진입시키고 말았다. 이에 후방의 안전을 확보한 관동군이 동쪽으로 吉林을 침략하고, 북쪽으로 黑龍江省을 범하였으며, 古賀 연대는 서쪽으로 錦州를 공격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만몽 전체가 왜적의 손에 들어감으로써 지금 전쟁이 전면전으로 비화된 것이다.
그간 발생한 종종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도 중한 두 나라가 이와 잇몸처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천년을 하루같이 성쇠고락을 같이한 형제의 나라였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한국혼
睨觀 申圭植 遺稿
머리말
경술년에 나라가 망하자 나는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쓸쓸한 고궁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슬프고 아팠다. 屈原이 離騷를 통해 나타낸 슬픔과 눈물, 包胥가 진나라 조정에서 방성대곡한 일들은 모두 닭이 목 놓아 울듯, 비바람이 치듯 가슴 속의 비통함을 표현한 것이었다. 내가 한국혼을 쓰려고 작정한 것도 가슴속의 비통함과 울분을 토해내며, 사람들에게 민족주의가 무엇인지, 복수의 대의가 무엇인지 깨우쳐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주변환경이 여의치 않아 오래도록 글을 완성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임자년에 한국혼의 구상을 마치고 모 조직의 창립식에서 그 대강을 강연한 바 있었다. 그러다가 갑인년에 비로소 탈고하여 주변 친구들에게 보이기는 하였으나 감히 활자화시키지는 못하였다. 작년 독립을 선포한 이후 조국광복을 위해 우리 동포들이 더욱 노력하고 분투하여 혁명의 기운이 커지기 시작하니 나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심히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시세가 변하자 이 글을 발표하기를 청하는 동지들이 적지 않았다. 정세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내일을 기약하기 쉽지 않은 터라 출판할까도 생각했으나 결국 완곡하게 청을 거절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나 또 다시 震壇 잡지사의 동료들이 출판을 청하자 마침내 원문을 정리하여 펴내게 되었다. 다만 출판을 앞두고도 원문은 전혀 더하거나 빼지 않았다. 따라서 글의 중간에 시의에 맞지 않는 표현이 있더라도 독자들이 원래의 뜻을 다르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대한민국 2(1920)년 10월 日汕廬에서 一民
백두산에 바람이 솔솔하니 천지도 시름을 짓고, 푸른 파도 구비치는 곳에 거북과 용이 일어나서 춤을 춘다. 기나긴 어두운 밤은 샐 줄을 모르고, 모진 비바람은 세상을 더욱 어둡게 하구나. 5천년 역사에 빛나던 나라는 오랑캐의 郡縣이 되고, 3천만의 백성은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도다. 아아! 슬프도다! 우리나라는 망하였다. 우리들은 길이길이 망국노가 되고 말 것인가?
마음이 죽어버린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망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죽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미 망국의 백성이 되어 참혹한 학대를 받고 있는 터이나, 아직도 흐리멍덩하여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두 번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오호라!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완전히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이다.
가령 우리들의 마음이 아직 죽어버리지 않았다면, 비록 지도가 그 색깔을 달리하고 역사가 그 칭호를 바꾸어 우리 대한이 망하였다 하더라도,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대한이 살아있는 것이니, 우리들의 마음이 곧 대한의 혼인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죽지 않았다면 혼은 돌아올 날이 있을 것이다. 힘쓸지어다! 우리의 동포들이여! 다함께 대한의 혼을 보배로 여겨 소멸되지 않도록 할 것이며, 먼저 각자의 마음을 구해내어 죽지 않도록 할 것이다.
오오라! 우리의 동포들이여! 지금 이미 망국의 백성이 되어 다 같이 노예와 우마처럼 욕을 받으며, 형세는 밖으로 긴박하고 기한은 몸에 절박한데도, 아직 나라가 망하기 이전만을 회상하여 아무렇지도 않은 척 두려움도 없이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없다는 말인가?
러시아는 폴란드를 점령한 뒤 귀족과 평민의 어린이들을 잡아 시베리아로 보내어 얼음과 눈 속에 뒹굴어 얼고 굶주려 죽게 하였다. 아이들을 태운 기차가 떠나려 할 때, 아이들의 부모들은 자기들도 함께 가기를 원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바퀴에 매달리고 철길 위에 드러누워 기차가 떠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을 호송하던 코사크 병사들은 채찍으로 때리고 발길로 차서 모두 철로 밖으로 쫓아내 버렸다. 마침내 열차가 떠나려고 움직이자 한꺼번에 아들을 부르고 딸을 찾는 통곡소리와 피눈물이 얽히었다.
시베리아로 가는 도중에 아이들에게 지급되는 음식은 겨우 거칠고 검은 빵 조각뿐이었다. 병든 아이들은 번번이 황야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졌다. 철로 연변에 던져져 죽은 어린이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어떤 아이는 빵 조각을 손에 쥐고 먹으려다 숨이 끊기어 눈을 감지 못한 채 죽어 있었다. 이것은 폴란드가 멸망한 후 발생한 뼈아픈 이야기인 것이다.
망국 유민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다. 우리도 결국에는 폴란드의 전철을 밟아 망국노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우리들은 지난날에 폴란드인들을 애처롭게 여겼지만, 지금에 와서는 우리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달랠 겨를도 없게 되었다. 슬프고 슬프도다! 아아! 동포들이여! 우리들은 폴란드인들과 마찬가지로 끝내 떨치어 일어나지 못할 것인가? 우리들은 저들의 악랄한 통치를 받으면서도 다시는 우리 스스로를 구하지 못할 것인가? 우리를 지켜주던 신명들은 자손들이 전멸하는 것을 앉아서 바라다만 보고,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에 따라 도태되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아아! 우리의 동포들이여! 잠시 시간을 내어 나의 눈물 나는 통한의 말을 들어보게나.
눈물은 마르더라도 말은 끝이 없어야 하고, 말은 끝이 있더라도 마음은 죽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옛날 오나라의 왕 夫差는 그의 아버지가 비참하게 죽은 것을 원통히 생각하여 사람을 늘 마당에 서 있도록 하고, 자기가 출입할 때마다 번번이 “부차야! 너는 월나라의 왕이 너의 아버지를 죽인 것을 잊었느냐?”하고 꾸짖게 하였다. 그때마다 부차는 “내 어찌 감히 그 원수를 잊을 수 있겠느냐!”고 답하였다. 이 어찌 천고에 길이 남을 통언이 아니겠는가.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부차의 마음이 얼마나 사무쳤겠는가! 한시라도 복수의 마음을 잊지 않고 영혼에 경각심을 심기 위해 부차는 이런 방법을 쓴 것이었다.
또 초나라 사람들은 “초나라 백성이 모두 죽고 단지 세 가구만 남더라도 진나라를 멸망시킬 자는 반드시 초나라 백성일 것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이 또한 천고에 길이 남을 비통한 이야기가 아닌가! 초나라 사람들은 자기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에 대한 복수를 종지로 삼고, 반드시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이처럼 마음이 죽지 않도록 통언을 새기며 스스로를 독려했던 것이다.
마음이 죽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비통한 이야기를 마치 경종을 듣는 것과 같이 여길 것이다. 그렇기에 오나라는 월나라에 복수할 수 있었고, 초나라의 후예가 진나라를 전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한나라는 망하였어도 張子房의 철추는 남아 있고, 진나라는 망하였어도 포서의 눈물은 남아 있다. 통언의 효용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 동포들을 위해 통언을 쓰려고 하니 나의 마음은 한없는 고통으로 터질 듯하여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할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다만 나의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글로 쓰려고 하지만, 또한 그것이 피인지 눈물인지 모르겠다. 이 글을 읽는 우리 동포들이 각자가 느끼는 고통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였다가 망국의 치욕을 씻고 난 다음에 잊어버리기를 바랄 뿐이다.
아아! 우리나라가 망하게 된 원인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법치가 문란하고, 원기가 쇠하였으며, 민지가 미개하였고, 외세에 아첨하여 잠깐의 편안함에 안주하고, 자만심이 강한 반면 열등감도 강하였으며, 당파싸움에 날 새는 줄 모르면서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 근본적인 원인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라를 망하게 만든 이런 여러 원인의 근본요인은 결국 양심을 잃어버린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양심을 잃어버림으로써 과거와 현재에 무감각한 건망증이 나타나게 되고, 건망증으로 인하여 수많은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건망증이 심해지면서 우리가 잊은 것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첫째, 선조의 교화와 그 종법을 잊어버렸다. 둘째, 선민의 功烈과 그 利器를 잊어버렸다. 셋째, 국사를 잊어 버렸다. 넷째, 국치를 잊어버렸다. 모두가 건망증에 빠짐으로써 결국에는 나라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무슨 까닭으로 건망증이 나라를 망하게 만든 원인이라고 하는가? 선조의 교화와 종법을 잊어버렸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하늘을 본받아 도를 닦고 나라를 세우며 천지를 개벽시켜 자손들에게 전한 것은 5천년 전 동방 태백산에 신으로 강림한 우리의 신조 檀君이 아니겠는가? 인간을 교화시켜 신도의 교를 베풀고, 하늘에 제사지내 근본에 보답하는 예를 세웠으며, 벌레와 짐승을 몰아내고 산천을 평정하며, 구족을 복속시키고 만방을 화목케 하며, 의식과 정교를 고르게 한 것은 모두 우리 선조들이 우리에게 준 은혜였다.
그리하여 성현과 철인들이 대를 이어 일어나고, 토지는 날로 개척되며, 문화는 날로 융창하고 武治는 날로 강성하였다. 옛날에 우리나라가 神人國, 君子國, 夫餘大國, 禮義東邦, 海東勝國, 父母國, 上國, 神聖族, 尙武族이니 하여 여러 이름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모두 우리 조상들이 남긴 위대한 공적의 흔적인 것이다.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고,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며,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며,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남이 없으며, 산 것을 죽임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5조목의 가르침은 우리가 대대로 지켜야 할 종법인 것이다. 조상의 덕을 갚으려면 하늘과 더불어 끝이 없어야 하며, 자손만대에 이르도록 영원히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고 분란이 일어나 나라에 요사한 것이 생기고, 실없이 자기 스스로를 천하게 생각하여, 모든 종법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는 버릇이 몇 백년 동안 길러져, 마침내 만악의 결과를 맺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종묘와 사직은 없어지고, 신령에게 제사지내지 않으며, 그 옛날 백성들이 우러러 빛나던 三神祠와 崇靈殿은 모두 황폐하여 무성한 잡초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옛글에 말하기를 “나라는 반드시 천지간에 더불어 서야 할 것이니, 이것은 예의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근본이 먼저 뒤틀리면 가지와 잎사귀도 그에 따르는 것이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아사달의 산마루와 왕검성의 옛터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는 것을 금할 길 없다.
선민들의 功烈과 利器를 잊어버렸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늘이 내리신 영웅이며 절세의 위인으로서, 많은 난을 당하여 중흥의 업적을 이룬 이는 3백 년 전 벽파진과 한산도에서 적을 무찌르고 순국한 忠武公 李舜臣이 아니겠는가? 한 몸을 희생하여 만백성을 소생케 하였으며, 사나운 오랑캐를 섬멸시켜 이웃나라까지 편안케 하였으니, 그 드높은 공렬은 천세에 빛나는 것이다.
옛날 명나라의 제독 陳璘은 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李舜臣은 하늘이 내린 장군이다”라고 하였으며, 그가 명나라 조정에 올린 보고에는 “천하에 제일가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순신은 감히 가늠하기조차 힘든 엄청난 공을 세웠다”고 하였다. 또한 적들도 이순신 장군을 하늘이 내린 신이라고 칭하였다.
그러므로 日本海軍撰記에는 “이순신은 고금의 해전에서 첫 번째로 꼽히는 위인으로, 영국의 넬슨보다도 훨씬 뛰어나다”고 하였다. 근자에 일본해군 대좌 邊田이 쓴 전기에는 “豊臣秀吉의 지력과 小西行長의 용력으로 조선을 위협하고 명나라를 쳐들어가는 기세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위인을 만나 좌절되고 말았으니 그는 누구인가? 조선의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이순신은 영국의 넬슨, 일본의 東鄕平八郞과 더불어 세계의 三傑이다. 그 온화한 성격과 신과 같은 지략은 셋 가운데서도 최고라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영국 海軍記에는 “조선의 戰船은 철판으로 싼 것이 거북이의 등과 같은 데, 그것을 이용하여 일본의 목조선을 대파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철갑선을 만든 것은 조선인이었다”고 하였다.
아아!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거북선이 없었다면 한국은 벌써 폐허가 되고 말았을 것이며, 중국도 또한 편안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명나라의 장수로 충무공의 공렬을 시기하여 매사에 말썽을 피우고 견제하던 陳璘과 같은 자도 그처럼 진심으로 이순신의 공업에 탄복하였다. 일본은 10만 수군이 하루아침에 섬멸되어 원한이 뼈에 사무쳤지만, 이순신을 그처럼 숭배하였고,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자랑하는 영국도 이토록 그를 찬미하였던 것이다.
결국 중국이 이순신을 잊지 않았고, 일본이 이순신을 잊지 않았으며, 세계가 이순신을 잊지 않았다. 아래로는 어룡과 초목까지도 이순신의 정성과 충의에 감동하였거늘(충무공의 시에 “나라일 지극히 위급하여졌으나, 이 난국 헤쳐나갈 사람 없네. 바다를 두고 다짐하니 어룡도 움직이고, 산에 맹세하니 풀과 나무도 이 마음 알아주는구나”라고 한 것이 있다) 홀로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잊어버린 것이다. 잊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이순신을 박해하였으니, 사람이 망하면 나라도 없어지게 마련이다.
아아! 슬프도다! 그 당시 三都가 함락되고 왕은 수레를 타고 피난하였으며, 여러 고을이 적에게 함락되고 수많은 장수들이 패배하여 흩어져 달아날 때, 충무공은 홀로 적과 맞서 싸워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역사에는 “왜구가 사단을 일으켰음에도 조야는 아무 방비도 하지 않았고 반성하는 바도 없었다. 그러나 오로지 이순신만이 홀로 이를 깊이 염려하여 날마다 방어공사에 힘쓰고, 쇠사슬을 구어 이것으로 항구 주변의 바다를 둘러막았으며, 새로운 모양의 전함을 제작하였다. 새로 만든 전함은 철판으로 둘러싸서 마치 거북의 등과 같이 하였고, 선두는 용머리와 같이 선미는 거북꼬리처럼 만들었다. 배의 전후에는 대포를 장착하였고, 배의 좌우에는 고르게 포혈을 만들어 병사들은 선창 속에 숨어 배를 운행하면서 포를 쏘게 하였다. 배의 사방팔방에는 모두 창을 꽂았으며, 진퇴가 자유롭고 빠르기가 나는 새와 같아서 적선을 불살아 버림으로써 싸움마다 승리를 거두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충무공이 누차 큰 공을 세우자 간사한 자들이 이를 질투하여 공의 병권을 빼앗고 옥에 가두었다. 적을 무찔러 원수를 갚은 것이 도리어 중죄가 되었던 것이다. 때마침 적이 재차 쳐들어와 또 다시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충무공을 옥중에서 불러내어 적을 맞아 싸우도록 하였다. 그 때 충무공은 마침 모친상을 당하여 길을 떠나기 전 탄식하며 말하기를 “한 마음의 충효가 이에 이르러 모두 헛되게 되었구나!”라고 하였다.
충무공은 또 “맹세코 원수를 섬멸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라며 비장한 각오를 하였다. 다시 전장에 나가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마침내 한산도에 이르러 대승을 거두고 적을 거의 섬멸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은 끝내 철갑선에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었다. 이는 천고에 가장 비통한 일이다.
오호라! 충무공의 한 몸에 이렇듯 한국의 안위와 존망이 얽매여 있었건만, 공을 모함하려던 자들은 실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충무공을 모함하고 시기했던 자들은 오히려 공이 임금과 어깨를 겨루고 공로를 홀로 차지하였기에 시기를 불러오게 된 것이니 자업자득이라고 말하였다.
공이 순국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저들은 공이 손수 만든 거북과 용모양의 철갑선을 이상한 물건이라고 방치하여 녹슬고 썩어버리게 하였다. 국방의 이기는 응당 어떤 보화보다도 귀중히 여겨야 할 것이거늘, 도리어 헌 신짝 버리듯이 하여 경중을 가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영국인이 해상의 패권을 잡게 되었고, 왜인들이 그 찌꺼기를 훔쳐다가 도리어 우리를 업신여기게 되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우리의 조국은 예로부터 끊임없이 융성하여왔다.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무력을 숭상하여 강토가 날로 개척되었다. 위만,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의 침입과 거란, 몽고의 침략, 그리고 홍건적과 흑치적의 소요 등 외환을 겪었으나, 뛰어난 무용을 갖춘 영웅적 임금들인 고구려의 大武神王과 廣開土王, 백제의 威德王과 東城王, 신라의 太宗武烈王과 文武王, 발해의 大 씨와 고려의 王 씨가 대를 이어 굴기하여 국위를 멀리 나라 밖까지 떨쳤던 것이다. 충성과 용맹, 지혜와 모략을 갖춘 장군으로 신라의 金庾信과 張保皐, 고구려의 乙支文德과 楊萬春, 고려의 姜邯瓚과 金方慶 같은 인재들이 배출되어 나라의 간성이 되었기에 천하가 두려워하여 우리나라를 강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려가 쇠망하고 조선이 흥하여 태조가 나라를 평정한 이래로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식견을 갖춘 임금인 태종과 세조 같은 이가 그 뒤를 이었다. 이들은 용맹스런 장수와 현명한 재상의 보필을 얻어 안으로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밖으로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여 한 때 국운이 크게 융성하였다. 그러나 그 후 태평성대가 너무 오래 계속되니 문무의 벼슬아치들이 모두 주색에 빠지고 붕당을 이루어 권력다툼만 하며, 나라와 백성을 돌보지 않고 국방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임진년에 일본이 침입해오자 온 나라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다. 조정의 신하들은 서로 바라보고 안색만 변하였을 뿐 꼼작도 하지 못하고 아무런 대책도 마련할 수 없었다. 다행히 이순신과 權慄, 郭再祐, 趙憲, 金千鎰 등이 몸을 바치어 나라를 구함으로써 마침내 위태로움에서 벗어나 안정을 되찾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난이 끝나고 나라가 평안해지기는 하였으나 이로부터 국력은 날로 쇠하여 다시는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다. 벼슬아치와 글 읽는 자들은 또 다시 쓸모없는 문장 구절의 해석에만 매달리게 되고, 한 푼 어치의 가치도 없는 공담으로 허송세월하여 마침내 병자호란의 화를 불러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조선 말엽에 이르러서는 외세의 침입을 막지 못하고 자주 강화의 굴욕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태연하여 수치로 여기지 않고 되는대로 나날을 허송하였다. 이에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시세의 변화를 알지 못하고 무기력한 정부에 대하여 이미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게 되었다.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던 근본정신을 잃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하게 되는 것이니, 어찌 경술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라가 망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주인이 하루아침에 노예로 전락하고, 제자가 스승에게 칼을 겨누는 것이야말로(신라 脫解王 2년에 신라의 신하 昔於老는 왜의 사신에게 “조만간 너희 왕을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식모로 삼겠다”고 하였다. 伐休王 10년에는 일본에 큰 기근이 들어 신라에 식량을 구걸하였다. 그리고 고려 文宗 때는 일본의 薩摩主와 對馬島主가 여러 차례 方物을 바쳤다. 백제 古爾王 50년에는 왕자 阿直岐와 박사 王仁이 처음으로 일본에 건너가서 경전과 논어, 천자문을 가르치고 또 각종 공업을 전하였다. 백제 武寧王 11년에는 박사 段楊으로 하여금 일본에 五經을 전하게 하였다. 威德王 23년에는 불경과 더불어 僧尼, 佛工, 舍利와 僧師, 土木工, 瓦工, 畵工을 보내어 불교를 전수하였다. 武王 2년에는 달력을 선물하고 천문학 등을 전하여 이를 가르쳤다.) 수치 중의 수치이고, 아픔 중의 아픔이다.
重文輕武의 버릇은 국가의 위태로움과 허약함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그 폐단이 극단에 이르러서는 적들로 하여금 나를 우습게 여기게 만들게 되니, 명나라가 망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중문경무의 습속은 마치 나는 새가 없어지자 좋은 활을 던져버리고, 교활한 토끼가 죽자 사냥개를 삶아 먹는 것과 같아, 병사들의 사기를 꺾는 것이니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있겠는가?
金慶孫, 韓希愈, 金德培, 李芳實, 鄭世雲, 安遇慶 등은 모두 우리 한국의 명장들이었다. 그러나 몽고의 난이 끝나고 왜구가 격파되며, 홍건적에 승리하고 내란이 평정된 뒤 논공행상의 과정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무장들은 혹은 귀양당하고, 혹은 노예로 삼고, 혹은 죽이기도 하였다. 또 군사를 이끌고 동정하여 섬나라 오랑캐를 크게 무찌른 鄭地 장군은 개선하자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명나라를 막아내고 왜구를 무찔러 커다란 공훈을 세운 崔瑩 장군은 목을 베어버렸다. 송악산이 괴로워서 슬퍼하고 박연 폭포도 울부짖는다.
아아! 한양에서 일어난 일들은 또 말해 무엇하랴! 翼虎 장군 金德齡은 끝내 쇠뭉치와 칼날 밑에서 죽었고, 임진란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鄭文孚는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목을 매 죽었다. 장군이 된지 10년 만에 도망병 하나를 목 벤 것으로 자리에서 쫓겨난 權彦愼의 불평의 울부짖음은 천년이 지났음에도 탄식의 소리로 들려오고 있다.
郭再祐는 의병을 일으킬 때 “위에 있는 자들이 나라의 존망을 생각하지 않으니, 초야에 있는 자는 죽으란 말인가!”고 탄식하였다. 벼슬을 그만둘 때 그는 또 말하기를 “군신상하가 마땅히 뉘우치고 깨달아 분발하여 한마음 한뜻으로 국력의 회복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만약 지금처럼 현명한 신하를 멀리하고 간사한 자들을 가까이 하며, 당파를 만들어 사리사욕을 채우기에만 힘쓴다면, 반드시 나라는 위태로운 지경에 빠져 망하고 말 것이다”고 하였다.
송나라가 망하게 된 것은 秦檜의 죄가 위로 하늘에 닿았기 때문이다. 만약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때 宗澤과 岳飛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그들의 뜻을 펼칠 수 있게 하였더라면, 어찌 조정이 한 귀퉁이에 몰려 끝내 다시는 떨쳐 일어서지 못하게 되었겠는가?
행주에서 대첩을 거둔 도원수 권율은 진중에서 파직되었고, 하늘이 내린 홍의장군 곽재우는 끝내 귀양살이로 늙게 되었다. 나라의 위기를 건지고 명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여 천하를 평정할 큰 뜻을 품은 林慶業도 또한 간신 金自點의 손에 죽게 되었다. 南怡 장군은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어지고, 두만강의 물은 말이 마셔 말랐어도, 남아 스물에 아직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였으니, 후세에 어느 누가 대장부라 칭하리오?” 라고 읊은 시 한 수 때문에 살신의 화를 입게 되었다.
간신들이 활개를 치고 명분을 지키려는 열사들은 원통하게 죽어버려 나라의 원기가 꺾이게 되는 것은 이처럼 그 내력이 있는 것이다. “어질고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배를 멀리한 것은 前漢이 흥성하게 된 까닭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질고 현명한 신하를 멀리하고 소인배를 가까이 한 것은, 後漢이 기울어져간 까닭이 되는 것이다” 라고 한 중국 諸葛武候의 말을 되새겨보니 눈물이 빗발치듯 함을 금할 수가 없다.
위에서 말한 것은 마치 승냥이가 길을 막게 된 것은 임금이 현명하지 못한 탓이라고 함과 같은 것이다. 나의 친구인 육군 참령 李祖鉉은 장수가문의 아들로서 용맹이 뛰어나 스무 살도 못 되어 능히 맨주먹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을 수 있었다. 이에 친척들이 놀래어 힘센 송아지가 수레를 부수어 버리는 격으로 장차 가문에 화가 될까 두려워하여 몰래 그를 없애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울면서 목숨을 살려줄 것을 애원하자 친척들은 조현을 얽어매어서 젓가락에 약을 바른 다음 불에 달구어 온몸을 지짐으로써 근육이 줄어들어 힘을 못 쓰게 하였다.
어느 날 조현이 옷을 벗고 나에게 보이는데, 불에 달군 젓가락으로 지진 자국이 겹쳐 있어 몸에 온전한 피부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지난날을 이야기할 때마다 매우 흥분하여 머리카락을 곤두세우고 치를 떨곤 하였다. 후일 그는 개혁에 뜻을 두었다가 죄를 입어 귀양살이로 떠돌다가 서글피 세상을 뜨고 말았다. 아마도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가슴을 어루만지며 원통함을 참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아! 인재를 박해하고 꺾어버림에 있어서 조야가 이처럼 마찬가지였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未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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