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 순무사 신헌 장강과 한수 사이에 풍류가 자욱하여 / 風流藹然江漢間

2022. 11. 14. 18:58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운양집 1 / ()○건재집(健齋集) 을축년(1865, 고종2) 12월에 나는 건침랑(健寢郞)에 임명되었는데 무진년(1868) 봄에 교체되어 돌아왔다.  시집은 당시 입직할  지은 것이다.

양화진 순무사 신헌 楊花陣 巡撫使 申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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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나루 달이  떠오르니 / 楊花渡頭月初出
엄숙한 북소리  그치자 사졸들이 순찰하네 / 嚴鼓纔罷巡士卒
이슬 맞으며 중원에 주둔하는 장군 / 將軍暴露駐中原
철갑엔 서리 가득하고 바람은 쓸쓸하네 / 鐵衣霜滿風瑟瑟
강에  부어 마시며 음식도 나눠 먹으며 / 投醪飮河能分甘
도롱이 빌려  막고 군율 엄히 다스렸네 / 借笠禦雨亟用律
장사꾼이 노래하며 진영 앞에서 물건 파니 / 販夫歌呼賣陣前
장사들 즐거워하며 집안 걱정 잊었네 / 將士歡娛忘家室
군사 파하라는 전유에도 난국을 지키니 / 傳諭罷兵猶持難
산처럼 무거운 형세로 꼼짝하지 않았네 / 勢重如山不徐疾
장강과 한수 사이에 풍류가 자욱하여 / 風流藹然江漢間
원개 전아함에 짝이  만하네 / 元凱儒雅堪儔匹
신융 같은 맹장이 되어서 / 願同辛肜作虎臣
사방 오랑캐 복종하여 평안을 누렸으면 / 四夷賓服享安逸

 

[-D001] 신헌(申櫶) :

1810~1884.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관호(觀浩), 자는 국빈(國賓), 호는 위당(威堂)ㆍ금당(琴堂)ㆍ동양(東陽)ㆍ우석(于石), 시호는 장숙(壯肅)이다. 실학과 개화파의 영향을 받아 근대적 군사제도 수립에 노력했으며, 강화도조약과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조선  대표로 참여했다. 1866년(고종3) 병인양요 때에는 총융사가 되어 강화도를 수비했다. 1876년 전권대관(全權大官)에 임명되어 구로다〔黑田淸隆〕와 강화도조약을 체결했으며, 1882년에도 전권대관의 자격으로 미국의 슈펠트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그는 국방책으로 정약용의 민보방위론(民堡防衛論)을 계승하여 민간 자위(自衛)에 입각한 민보 방위 체제를 주장했고, 병인양요를 거치면서 서양식 근대무기를 수용하여 수뢰포(水雷砲)와 마반차(磨盤車)  신식 무기를 제작했다. 저서로 《민보집설(民堡輯說)》, 《융서촬요(戎書撮要)》, 《금석원류휘집(金石源流彙集)》, 《유산필기(酉山筆記)》, 《농축회통(農畜會通)》, 《심행일기(沈行日記)》 등이 있다.

[-D002] 양화(楊花)나루 :

서울 마포 서남쪽 잠두봉 아래에 있던 조선 시대의 나루이다. 삼진(三鎭)의 하나로, 양화진영(楊花津營)이 있었으며 양천에서 강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나루터였다.

[-D003] 강에 …… 마시며 :

《여씨춘추(呂氏春秋)》 〈순민(順民)〉에 “월왕(越王)이 회계(會稽)의 수치를 괴롭게 여기고……백성들을 양육하여  마음을 이끌려고 했다. 달고 부드러운 음식이 있는데 나눌  없으면 감히 먹지 않았고, 술이 있으면 강에 부어서 백성들과 함께 마셨다.”라고 했다.

[-D004] 원개(元凱) :

팔원팔개(八元八凱)이다. 전설에 고신씨(高辛氏)에게 재자(才子) 8인이 있는데 8원(元)이라 하고, 고양씨(高陽氏)에 재자 8인이 있는데 8개(愷)라고 했다. 순(舜)이 요(堯)에게 그들을 천거했는데 모두 정교(政敎)로써 찬미되었다.

[-D005] 신융() :

후한(後漢)의 장군이다. 돈황도위(敦煌都尉) 등을 지내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