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4. 00:48ㆍ고대사
아랫 글은 예맥족이 오월연제지역을 차지한 내용입니다. 일제치하 임시정부도 알았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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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자집 문고 제10책
서 언왕의 사적을 쓰다〔書徐偃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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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에 “목천자(穆天子)가 서쪽으로 순수(巡狩)하여 향락에 빠져 돌아올 줄 모르니, 서자(徐子)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난리를 일으키자, 조보(造父)가 왕을 수레에 싣고 먼 길을 달려 돌아와 난리를 구하고, 초(楚)나라에 명하여 서자를 토벌해 죽이게 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이에 의거하면 서자는 반역을 한 것이고, 목왕(穆王)이 제후에게 명하여 토벌하여 주살한 것이니, 오히려 예악과 정벌이 천자로부터 나온 것이다.
한 문공(韓文公 한유(韓愈))이 지은 〈구주서언왕묘비(衢州徐偃王廟碑)〉를 읽어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진나라가 여러 나라를 삼켰는데, 서(徐)가 그 안에 처하여 문덕(文德)으로 다스렸다. 언왕 탄(偃王誕)이 나라를 맡고부터 형벌과 정쟁을 일삼는 말폐를 제거하기에 더욱 힘쓰고, 임금의 책무와 백성을 돌보고 사방을 대하는 일을 모두 인의(仁義)로 행하였다. 이때에 주나라 천자 목왕(穆王)이 무도하여 천하를 다스림에 마음을 쓰지 않고 도사(道士)들의 말을 좋아하고, 팔룡(八龍)의 준마를 얻어 타고서 서쪽으로 유람을 가서 서왕모(西王母)와 함께 요지(瑤池) 가에서 연회를 베풀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가기를 잊었다. 사방에서 서로 다투는 제후들이 질정할 곳이 없어서 모두 서나라를 받들어 옥백(玉帛)이며 짐승을 서나라 조정에 폐백으로 바친 나라가 36국에 이르렀다. 서 언왕이 주궁적시(朱弓赤矢)의 상서를 얻자, 목왕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드디어 하늘의 명을 받았다고 하면서 조보(造父)에게 수레를 몰도록 명하여 먼 길을 달려 돌아와 초나라와 연합하여 서나라를 정벌하였다. 서나라 임금은 차마 자기 백성들을 싸움터로 내보낼 수 없어서 북쪽으로 팽성(彭城)의 무원산(武源山) 아래로 도망가니, 그를 따라온 백성이 일만여 집이 넘었다. 언왕(偃王)이 죽자 백성들은 그 산을 서산(徐山)으로 부르고 돌을 파서 방을 만들어 언왕을 제사 지내고, 그의 아들을 추대하여 과거처럼 임금으로 삼으니, 구왕(駒王), 장우(章禹) 등 할아버지와 손자가 서로 이었다.”
그리고 명문에 씌어 있기를,
“진나라는 기세가 세어 쓰러지고 서나라는 겸손으로 이어졌네. 온화한 언왕은 오직 도(道)를 좋아하여, 나라를 인(仁)과 바꾸니 완고한 자들에게 비웃음을 당하였네. 아, 저 언왕을 비록 옛날의 군주라 하더라도 누가 그와 대항하랴. 왕은 인을 위해 죽었건만 저 진나라는 포악함으로 망하였네.”
라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말한다면, 언왕은 아마 어진 임금이어서 제후들이 앞다투어 그에게 귀의하였으며, 목왕(穆王)이 정벌을 모의하자 차마 백성들을 싸움터에 내보낼 수 없어 사양하고 떠난 것인데, 역사서의 말과는 크게 서로 맞지 않으니, 후대 사람들이 장차 어느 설을 따라야 할 것인가? 이제 비문을 제동(齊東)의 허황한 말로 여긴다면, 한퇴지(韓退之 한유(韓愈))는 사당에 아첨할 위인이 아니니, 그렇다면 역사서를 믿을 수 없게 된다. 역사서를 믿을 수 없다면 장차 어디에서 지난 사적을 고찰할 수 있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목왕이 무도하여 스스로 천하를 버린 것은 역사서를 보아도 그러하다. 이때에 언왕이 인의로 다스림을 펴자 제후들이 귀부한 것은 필연의 형세이고, 목왕이 돌아오매 나라를 사양하고 달아나자 백성들이 시장으로 몰리듯이 따른 것도 필연의 이치이다. 그런데 사관(史官)이 여기에서 천하 만세에 군신(君臣)의 대경(大經)을 보이려 한다면 사실대로 써서는 교훈이 될 수 없으므로 ‘그 기회를 이용해 난리를 일으켰다.〔乘時作亂〕’라고 쓰고, 또 ‘초나라에 명하여 토벌하여 주살하였다.〔命楚討誅〕’라고 써서, 차라리 서자(徐子)의 사실을 왜곡할지언정 차마 천자의 권위가 뒤바뀌고 신하의 본분을 무너뜨리게 할 수 없어서 그랬던 것이다.
하물며 이때가 어느 때인가. 교주(膠舟)의 화(禍)는 천하의 큰 변고이고, 목왕과 초나라는 불공대천의 원수이다. 그럼에도 왕법(王法)의 주벌(誅伐)을 행하지 못하고 이에 팔룡(八龍)의 준마를 타고 서쪽으로 노닐어 향락에 빠져 돌아오길 잊었으니, 그가 어버이를 잊고 이치를 거슬러 하늘에 죄를 지은 것 또한 너무 심하였다. 그러므로 주나라 왕실이 망하지 않은 것은 머리털 하나에 매달린 위태로운 형국이었다.
언왕이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리어 초나라와 연합하여 토벌을 도모하였으니, 초나라는 바야흐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음을 요행으로 여겨 짐짓 서나라를 정벌하는 계획을 들어준 것이지, 천자를 존귀하게 여겨 그 명을 받든 것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집주인이 어리석고 나약하여 드센 노복들이 패악한 짓을 일삼고 시역(弑逆)의 죄를 범할 때, 주인의 아들이 이미 그 죄를 바로잡지 못한 채 다른 노복들의 완악방자(頑惡放恣)를 노여워하여, 도리어 그들과 연합하여 다스림을 도모하면, 그들은 비록 처벌을 면한다 하더라도 결국 속으로 부끄러운 마음이 있을 것이기에, 또 다른 노복들을 제거하여 집안의 권세를 독차지하고자 하여 겉으로 호응한 것뿐이다. 지금 목왕이 서나라를 정벌한 것이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때문에 역사서를 기록한 자가 이 일을 기록하면서 그 말은 혹 억누르기도 높이기도 하였으나, 후세 사람의 붓 한 자루 힘으로 당시 천자의 권위를 대행하려 하였으니, 그 뜻이 은미하다 하겠다. 아! 그때 가령 한 문공의 비문이 없었다면 서 언왕은 참람하게 난리를 일으켜 천자에 거역하다가 주벌을 당한 자에 불과하였을 것이니, 누가 그가 인의로운 군주였음을 알겠는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처럼 선악인포(善惡仁暴)가 뒤바뀌어 전해지지 않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니, 아! 슬프다.
[주-D001] 서 언왕의 사적을 쓰다 :
이 글은 문집 편차 순서로 보아 1804~1810년 사이에 지어진 글로 추정된다. 흔히 알고 있듯이 서 언왕(徐偃王)이 반란자가 아니라, 오히려 백성들의 신망을 얻은 인군(仁君)이었음을 밝힌 논설에 속하는 글이다.
[주-D002] 목천자(穆天子)가 …… 하였다 :
이 내용은 《사략(史略)》 권1 〈주(周)〉에 보인다. 서자(徐子)는 서주(西周) 시대 서국(徐國)의 임금 서 언왕(徐偃王)을 가리킨다. 조보(造父)는 주(周)나라 목왕(穆王) 때 말을 잘 몬 자이다.
[주-D003] 구주서언왕묘비(衢州徐偃王廟碑) :
한유(韓愈)가 짓고 복주 자사(福州刺史) 원석(元錫)이 썼다. 당나라 원화(元和) 10년(815) 12월 9일에 세웠다. 《御定佩文齋書畫譜 卷28 書家傳7 唐 元錫》 기록에 따라서는 서방(徐放)이 쓴 것이라고도 한다.
[주-D004] 주궁적시(朱弓赤矢) :
주궁은 붉은 칠을 한 활로써 동궁(彤弓)과 같다. 옛날에 천자가 유공(有功)한 제후나 대신에게 주어 정벌을 독단하게 한 상징물이다. 주 목왕(周穆王) 때 서 언왕이 평소 인의(仁義)로 소문이 났는데, 주나라에 통행하기 편하도록 진(陳)과 채(蔡)의 사이에서 운하를 준설하다가 주궁시(朱弓矢)를 얻어 천서(天瑞)라고 기뻐하며 왕으로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국으로서 따르는 나라가 36국이었다. 주 목왕이 그 소문을 듣고 초나라로 하여금 정벌하게 하였는데, 서 언왕은 백성을 사랑하여 싸우지 않다가 결국 초에 패하였다. 《水經注 濟水》
[주-D005] 교주(膠舟)의 …… 원수이다 :
교주의 화(禍)는 주나라 소왕(昭王)이 초(楚) 땅을 순수하다가 강가에서 배를 타게 되었는데, 평소 소왕의 실정(失政)을 미워하던 초나라 사람들이 아교로 만든 배를 바치니, 이에 소왕이 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아교가 녹아 배가 침몰하여 물에 빠져 죽은 사건을 가리킨다. 이 소왕이 주 목왕의 부친이고 초나라를 순수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불공대천의 원수라 한 것이다. 《史記 卷4 周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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