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4. 00:33ㆍ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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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선생문집 제10권 / 동사문답(東史問答)
성호 선생에게 올린 편지. 기묘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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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역사는 삼국 이후의 문장이 용렬하고 속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은 대부분 윤색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건대, 문장은 비록 좋지 못하나 윤색을 한다면, 그 사기(辭氣)의 억양 사이에 혹 사실을 잃을 염려가 없지 않고 또 후학의 신중한 태도가 아닐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 일을 제가 어떻게 감히 경솔하게 착수하겠습니까. 다만 선생님께서 자주 작성하기를 권하시는 분부가 계시고, 또 여러 역사책을 보면 모두 뜻에 차지 않는데도 여기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뒷날 단지를 덮는 휴지 조각이 되는 것을 생각지 않고 망녕되이 만들어서 원초(原草 최초로 기초함)한 삼국 이상의 것 다섯 권을 올리오니, 만일 선생님의 감정을 거친다면 참으로 큰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조섭중에 해가 있을까 두려울 뿐입니다. 책 머리에 몇 자씩 적어 지시를 보이셔서 뜻을 기울이도록 해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사론(史論)은 반드시 대의가 관계되는 곳에서 논의하려고 하는데 필력이 미치기 어려우니 개탄할 노릇입니다.
공험진(公嶮鎭)은 《고려사》에서, “여진이 길주(吉州)를 포위하자 오연총(吳延寵)을 보내서 구제케 하였는데, 오연총이 가서 공험진에 이르니, 적이 길을 막고 엄습했다.” 하였으니, 공험진이 길주의 남쪽에 있는 것이지 지금 사람이 이른바 “두만강 북쪽에 있다.”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두만강 북쪽의 공험진은 국토를 개척한 뒤에 옮겨 설치하고 옛 이름을 그대로 간직한 것일 것입니다.
《고려사》 지리지에 “동북쪽은 선춘령(先春嶺)으로 경계를 하였는데, 그 땅은 고구려를 지나갔다.” 하였으니, 이 말도 또한 사실과 틀립니다. 고구려가 흥성할 때는 지금의 오라(烏喇) 이남을 두었으니, 선춘령 정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또 고려 때에는 길주 이북으로부터 선춘령에 이르기까지 천여 리는 상고할 만한 주현(州縣)이 한 곳도 없으니 무엇 때문입니까? 생각건대, 선춘령에 비를 세운 것은 마치 연연산(燕然山)에 올라가 돌에 공적을 새긴 따위와 같은 것이고, 그 경계가 여기에 그친 것을 말함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지의 공험진에도 역시 선춘령이 있어 두만강 북쪽에 있는 것과 더불어 이름이 같았을 것입니다. 《고려사》에, “윤관(尹瓘)이 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를 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공민왕 5년에 유인우(柳仁雨) 등이 쌍성(雙城)을 탈환하니 조소생(趙小生)이 이판령(伊板嶺) 지금의 마천령(磨天嶺)이다. 북쪽 입석(立石)의 땅으로 도망해 들어갔다. 그래서 지도를 상고해서 옛 땅을 수복했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이판의 북쪽은 본래 고려의 땅이 아니고 입석의 땅은 윤관(尹瓘)이 비를 세워 국경을 정한 곳이 아니겠습니까? 국경을 정리하는 것은 나라를 가지는 큰 일인데 역사책에서 이렇게까지 그에 대한 글을 빠뜨리고 있으니 개탄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북쪽 국경의 개척은 대부분 원말 여계(元末麗季)에 있었는데, 우리 태조에 와서 비로소 두만강 이남의 공주(孔州)ㆍ경주(鏡州) 등 7주(州)를 정하셨습니다. 윤장께서 매번 말씀하시기를 “이같은 일은 참으로 긴요한 것을 빠뜨렸다.” 하시는데, 그 뜻은 대개 한 몸으로 말하면 신심(身心)이 중요함이 되고 외물(外物)이 가벼움이 되며, 한 나라로 말하면 국내의 우환이 급함이 되고 국외의 일이 느슨함이 되는 것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참으로 옳습니다.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비단 신심만을 위할 것이 아니라 또한 국내의 우환에 대해서도 걱정해야 됩니다. 그러나 걱정할 자가 스스로 많으니, 그 지위가 없으면서 망녕되이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옛날 대현(大賢)으로 말하면 《초사(楚辭)》를 주 내고 《참동계(參同契)》를 풀이하였는데, 그것은 또한 무슨 뜻으로 그랬겠습니까? 평소에 생각해보니, 명 태조(明太祖)의 철령위(鐵嶺衛)에 대한 일이 종당 후일의 이야깃거리가 될 것은 과연 하교와 같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강구해보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요지(遼地)에는 본래 철령(鐵嶺)이란 이름이 없었는데 명 태조가 장차 우리 철령으로 위(衛)를 삼으려고 했다가 계획대로 되지 않자 요지로 옮겨 설치하였으니, 지금의 철령현(鐵嶺縣)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경지(盛京志)》에 “철령의 옛성이 지금의 철령현 소재지 남쪽 5백 리 지점인 고려 지경에 있는데, 명 태조 홍무(洪武) 21년에 철령위를 그 곳에 설치했다가 26년에 현 소재지를 지금의 땅으로 옮겼다.” 하였는데, 그 연대를 상고하니 박의중(朴宜中)이 사신가던 때와 같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중국 사람은 오직 위를 우리 땅에 세운 것만 알고 그 곡절은 모릅니다. 후일에 만일 강계(彊界)를 가지고 다툰다면 마땅히 저들이 지금의 현 소재지 남쪽 5백 리 지점에 설치한 것을 가지고 대변(對辯)할 자료를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합란쌍성(合蘭雙城)이 참으로 윤장의 말씀과 같다면 과연 오라 철령현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휘(趙暉)가 원 나라에 붙은 뒤에 원 나라가 현소재지를 지금의 함흥(咸興)과 영흥(永興)으로 옮기고 옛 칭호를 간직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현도(玄菟)는 본래 우리 땅인데 뒤에 요북(遼北)으로 옮겼으나 현도라는 이름은 고치지 않았습니다. 대방(帶方)은 먼저 북쪽 지방에 설치했다가 뒤에 남쪽 지방에 설치하였는데 대방의 이름은 그대로 있었고, 안동도호(安東都護)가 처음에는 평양에 있다가 뒤에 요지에 있었는데 안동의 이름은 예전대로였으니 이것은 바로 그 예입니다. 비록 합란쌍성을 함흥과 영흥이 아니라 하더라도 당시의 문자를 상고하면 분명히 함흥부와 영흥부의 땅입니다.
그 때 명 태조에게 올린 표문은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지은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 “금(金)의 요동(遼東) 함주(咸州)에 쌍성현이 있으므로 본국 함주 근처의 화주(和州)에 옛날에 쌓은 작은 성 둘이 있음을 인하여 모호하게 주청(奏請)해서 드디어 화주를 쌍성으로 사칭했다.”는 것이 있는데, 이 한 토막의 말뜻은 애매모호합니다. 설령 조휘가 화주를 쌍성으로 칭했다 하더라도 원 나라 사람이 어찌 요동 합주에 쌍성이 있음을 모르고 우리 나라의 화주로 해당시켰겠습니까. 다행히도 명 태조가 이것을 다시 힐문하지 않았습니다. 왜인은 자고로 통상(通商)을 업으로 삼았기 때문에 서양에 이르기까지 해외의 여러 나라를 왕래하지 않는 나라가 없으므로 지금 날로 더욱 부성하여 재보(財寶)가 가득 차 있고 상선(商船)이 많이 몰려듭니다. 또 일본은 중국과 통상하여 강남(江南), 서촉(西蜀)의 물화가 남쪽으로 쏟아지기 때문에 중국 생산물이 우리 나라에 오는 경우가 극히 적습니다. 혹자는 “중국의 도로가 막혀 통하지 못한 곳이 많기 때문이다.”고 말하나 이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 여가 있는 날 지도 한 폭을 그려서 서북쪽에는 요심(遼瀋)ㆍ오라(烏喇)ㆍ영고(寧古)를 적어 넣고, 동북해외(東北海外)로부터 전라해(全羅海)의 동쪽에 이르기까지에는 일본을 적어 넣고 또 그 밖에 여러 만이국(蠻夷國)을 죽 적었습니다. 그리고 또 요해(遼海)로부터 전라서해(全羅西海)에 이르기까지에는 중국의 산동성(山東省)ㆍ강남성(江南省)ㆍ절강성(浙江省) 등 연해주군(沿海州郡)을 적어 넣고 보니, 우리 나라가 비록 해외 편방(海外偏邦)이라 하지만 실은 사면으로 외적을 받는 땅입니다.
그러니 비단 서북 연륙(西北連陸)만이 두려워할 대상이 아닙니다. 근래에는 해상 방어가 소홀하고 도서 지방의 관리가 부실하니 참으로 애석합니다. 옛부터 중국의 침투는 등주(登州)ㆍ내주(萊州)ㆍ회남(淮南)ㆍ절강(浙江)으로부터 배를 타고 동쪽을 건너니 4, 5일이 못 되어서 우리 땅에 닿습니다. 또 신라의 청해진(靑海鎭)은 지금의 강진(康津)ㆍ완도(莞島)였는데 중국 사람이 항상 신라 사람을 약탈하였습니다. 장보고(張保皐)가 청해진에 온 뒤에는 그 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중국 사람이 옛날 우리 서남해(西南海)를 침범하였으니, 왜인만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왜인은 노략질하여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니 고려 말에 동ㆍ북도가 항상 그 피해를 받았습니다. 지금 들으니, 동해의 수심이 점점 낮아지므로 고기잡이 왜인들이 대부분 우리 동해로 나와 울릉도 같은 데는 이르지 않을 때가 없다 합니다. 근년에 대마도 왜인이 삼(蔘) 시장을 열기를 청할 때에도 “당신네가 만일 허락해주지 않으면 당신네 동해를 건너가 강원도와 북도에서 삼을 캐겠다.” 하였다니, 이 일 또한 염려됩니다.
여진(女眞)은 동해에 접해 있으므로 수영을 잘 합니다. 옛부터 바닷길을 이용하여 우리 나라를 침범하였으니, 《고려사》를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조선조에서도 전일에 해랑도(海浪島)를 가지고 걱정하였습니다. 해랑도뿐만 아니라 서해나 북해 속의 심원한 여러 섬에도 불순한 무리가 없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일은 한번 기찰(譏察)하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중국은 운세가 쇠하고 몽고는 한참 왕성한데, 듣자하니 학문에 열중하고 뜻이 작지 않다 합니다. 우리 사신은 해마다 왕래하면서도 어떤 오랑캐가 성하고 어떤 추장이 강한지 몰라서 후일 변란을 제압할 방법에 전연 캄캄하니 개탄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선조 때는 명사들이 조정에 가득하였는데, 서애(西厓) 같은 제공들이 평의지(平義智)가 종의조(宗義調)의 아들임을 몰랐고, 또 평수길(平秀吉)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변란을 대응하려고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우리 나라 사람들의 졸렬한 태도입니다. 이런 것들을 여쭈오니 참으로 긴요하지 못한 일을 여쭙는가 싶습니다. 그러나 한가한 가운데 생각이 미치기에 아울러 여쭙게 된 것입니다.
민호(民戶)의 다과에 대해서는 사가(史家)가 반드시 적어야 할 사항인데 《고려사》에 징빙할 글이 없으니, 개탄할 노릇입니다. 기묘년
[주-D001] 연연산(燕然山)에……새긴 따위 :
후한(後漢) 때 두헌(竇憲)이 선우(單于)를 깨뜨리고 연연산에 올라가 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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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三韓)의 시말(始末)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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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三韓)이란 우리나라의 삼남(三南 충청 남북도ㆍ전라 남북도ㆍ경상 남북도)의 옛 호칭인데, 요동(遼東)도 삼한이라 칭한다. 또는 구한(九韓)이라는 명칭이 있어서 예부터 변설(辨說)이 많았으므로, 지금 먼저 중국 사람들이 인거(引據)한 것을 취하고 다음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변증한 것을 가져 여기에 남김없이 변증하려 한다.
고정림(顧亭林 정림은 고염무(顧炎武)의 호)의 《일지록(日知錄)》에,
“서서(書序)에 ‘성왕(成王)이 이미 동이(東夷)를 정벌(征伐)하였다.’ 하였는데 그 전(傳)에는 ‘동이는 해동(海東)의 여러 오랑캐인 구려(駒麗)ㆍ부여(扶餘)ㆍ한맥(馯貊)의 무리이다.’ 하였고 정의(正義)에는 ‘ 《한서(漢書)》에 의하면, 고구려(高句麗)ㆍ부여(扶餘)ㆍ한(韓)은 있으나 이 한(馯)은 없으니, 한(馯)은 바로 한(韓)으로서 음(音)은 같으나 글자가 다른 것이다.’ 하였다. 《후한서(後漢書)》광무제본기(光武帝本紀) 건무(建武) 20년조에 ‘동이(東夷)인 한국(韓國) 사람이 민중(民衆)을 인솔하고 낙랑(樂浪)에 와서 내부(內附)했다.’ 하였고, 동이전(東夷傳)에는 ‘한(韓)에 3종(種)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진(弁辰) 《진서(晉書)》ㆍ《양서(梁書)》에는 변한(弁韓)으로 되어 있다. 이다. 마한 54개국은 서쪽에 위치하여 북쪽으로 낙랑, 남쪽으로 왜(倭)와 연접해 있고 진한 12개국은 동쪽에 위치하여 북쪽으로 예맥(穢貊)과 연접해 있고 진한의 남쪽에 위치한 변진 역시 12개국으로서 남쪽으로 왜와 연접해 있다. 이 모두 78개국 가운데 백제(百濟)가 바로 그 중 1개국이다. 그 가운데 큰 나라는 1만여 호(戶)쯤 되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쯤 되는데,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지방(地方)은 모두 합해서 4천여 리쯤 되고 동쪽과 서쪽에는 바다로 한계를 삼은 곳으로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다. 그 중에는 마한이 가장 큰데, 그들은 자기들의 종족(種族)을 진왕(辰王)으로 세워서 모조리 삼한(三韓)의 지역에 군림(君臨)한다.’ 하였다. 《한서》 조선전(朝鮮傳)에 ‘진번(眞番)과 진국(辰國)이 글월을 올려 천자(天子)를 뵈려 하였으나, 다시 막혀서 통하지 못하였다.’ 하였는데,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진(辰)은 진한국(辰韓國)을 이른 것인데, 《사기》에는 잘못 진번(眞番)의 방국(旁國)이라 했다.’ 하였고,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에 의하면 ‘제왕(齊王) 정시(正始) 7년에는 유주 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高句麗)ㆍ예맥(穢貊)을 토벌하자, 한나해(韓那奚) 등 수십 나라가 모두 자기 종족(種族)을 거느리고 항복하였고 진류왕(陳留王) 경원(景元) 2년에는 낙랑(樂浪)의 외이(外夷)인 한(韓)ㆍ예맥(穢貊)이 각기 자기의 부족(部族)을 거느리고 와서 조공(朝貢)했다.’ 하였다. 《진서(晉書)》 장화전(張華傳)에는 ‘동이(東夷)인 마한(馬韓)ㆍ신미(新彌) 등 여러 나라는 산과 바다를 겹겹이 끼고 있는 곳으로 중국과의 거리가 4천여 리나 되는데, 역대(歷代)에 걸쳐 귀부(歸附)하지 못한 20여 나라가 모두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공해 왔다.’ 하였고, 두씨(杜氏 당(唐) 나라 두우(杜佑)를 가리킴)의 《통전(通典)》에 의하면 ‘삼한(三韓)의 지역은 해도(海島)의 위며 조선의 동남쪽에 있다.’ 하였으니, 이는 그 봉역(封域)과 조공(朝貢)의 본말(本末)을 말한 것이다. 유희(劉熙)의 《석명(釋名)》에 ‘한양(韓羊)ㆍ한토(韓兎)ㆍ한계(韓鷄)에 대한 요리(料理)의 본법(本法)은 한국(韓國)에서 나왔다.’ 하였고 후위(後魏) 때 양고(陽固)의 연색부(演賾賦)에,
저 끊임없이 이어가는 삼한을 보며 / 覩三韓之累累兮
저 수많은 만이(蠻夷)를 보노라 / 見卉服之悠悠
하였으니, 이는 그 풍토(風土)를 말한 것이다.
《송사(宋史)》천문지(天文志)에 ‘구국(狗國 별[星] 이름) 네 별[四星]은 건성(建星)의 동남쪽에 위치하여 삼한(三韓)ㆍ선비(鮮卑)ㆍ오환(烏桓)ㆍ험윤(玁狁)ㆍ옥저(沃且) 등속을 주관한다.’ 하였으니, 이는 그 점상(占象)을 말한 것이고, 《송사》 고려전(高麗傳)에 이르기를 ‘숭녕(崇寧 송 휘종(宋徽宗)의 연호) 이후에 처음으로 삼한통보(三韓通寶)를 주조(鑄造)했다.’ 하였다. 《요사(遼史)》 이국외기(二國外紀 이국은 고려와 서하(西夏)를 가리킴)에 의하면, 고려왕자(高麗王子)인 삼한국공(三韓國公) 옹(顒), 삼한국공 훈(勳), 삼한국공 우(俁)가 보이고 《요사》의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고주(高州)의 삼한현(三韓縣)에 대하여, 진한(辰韓)은 부여(扶餘)이고 변한(弁韓)은 신라(新羅) 《북사(北史)》에는 진한을 신라라고 하였다. 이고 마한(馬韓)은 고려(高麗)인데, 개태(開泰 요 성종(遼聖宗)의 연호) 연간에 성종(聖宗)이 고려를 정벌하고는 삼국(三國)의 유민(遺民)들을 사로잡아다가 이 삼한현을 설치해서 여기에 살게 하였다.’ 하였다. 여기에 의거하건대, 이는 바로 삼국 사람들을 사로잡아다가 내지(內地)에 현(縣)을 설치하고 살피면서, 삼한(三韓)이의 이름을 취해 온 것뿐이다. 이는 마치 한(漢) 나라 때 상군(上郡)에 있었던 귀자현(龜玆縣)을 문득 서역국(西域國)이라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지금 사람들 곧장 요동(遼東)을 삼한(三韓)이라 하는데, 이는 바로 내지(內地)를 외국(外國)으로 지목한 것이다. 그 이유는 천계(天啓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 연간에서 비롯되었다. 천계 연간에 처음 요양(遼陽)을 잃은 이후로 장주문(章奏文) 가운데, 요양 사람을 삼한 사람이라 이른 말이 있었으니, 이는 요양을 소외시킨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요양 사람들 스스로 요양을 삼한이라 칭하니, 이 또한 스스로를 소외시켰을 뿐이다. 《북사(北史)》에 이르기를 ‘신라(新羅)의 선대(先代)는 본디 진한(辰韓)의 종족(種族)이고 그 지역은 고려(高麗)의 동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진한(辰韓)은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서로 전하는 말에 의하며, 진(秦) 나라 때 망명(亡命)한 사람들이 노역(勞役)을 피해 마한(馬韓)으로 가자, 마한이 동쪽 한 지경을 떼어 그들을 살게 하였는데, 그들이 진(秦) 나라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진한(秦韓)이라 명명(命名)하였고 그들의 언어(言語)와 명물(名物) 또한 마치 중국 사람과 같았다. 또 진한의 왕은 항상 마한(馬韓) 사람으로 세워서 대대로 전해 왔고 진한 사람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으니, 이는 분명 유랑민(流浪民)들이었기 때문에 항상 마한에게 절제를 받아온 것이다. 진한이 처음에는 6국(國)이었다가 차츰 나누어져서 12개국이 되었는데, 신라가 곧 그 중의 하나이다.’ 하였으니, 이는 또 전사(前史)와는 다르다. 《당서(唐書)》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현경(顯慶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 5년에 백제(百濟)를 평정하고 그 땅을 나누어 오도독부(五都督府 웅진(熊津)ㆍ마한(馬韓)ㆍ동명(東明)ㆍ금련(金漣)ㆍ덕안(德安)이다)를 설치했다.’ 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곧 마한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중국 사람이 삼한(三韓)을 변증한 시말(始末)이다. 또는 《시경(詩經)》 대아(大雅) 한혁장(韓奕章)에,
저 웅장한 한 나라 성을 / 溥彼韓城
연 나라 군사가 다 쌓았네 / 燕師所完
한 대문으로 변증한 것도 있다. 《시경》 한혁 제6장에,
저 웅장한 한 나라 성을 / 溥彼韓城
연 나라 군사가 다 쌓았네 / 燕師所完
선조로부터 명을 받아 / 以先祖受命
오랑캐들을 단속함으로써 / 因時百蠻
왕이 한후에게 맡기셨네 / 王錫韓侯
추와 맥을 / 其追其貊
한후가 북국을 받아 / 奄受北國
그곳의 백(伯)이 되니 / 因以其伯
성을 쌓고 못[池]을 파며 / 實墉實壑
밭 일구고 세법(稅法)을 정하여 / 實畝實籍
비휴 가죽에 / 獻其貔皮
붉은 표범과 누런 곰 가죽을 바치옵네 / 赤豹黃羆
한 주(注)에,
“부(賦 시체(詩體)의 한 가지)이다. 보(溥)는 크다는 뜻이요 연(燕)은 소공(召公)의 나라이다. 사(師)는 군사[衆]란 뜻이요 추(追)와 맥(貊)은 이적(夷狄)의 나라이다. 용(墉)은 성(城)이요 학(壑)은 못[池]이다. 자(籍)는 세(稅)이고 비휴[貔]는 맹수(猛獸)의 이름이다. 한후(韓侯)가 처음 봉(封)해질 때 소공(召公)이 사공(司空)으로 있었는데, 왕(王)이 소공의 군사를 명하여 이 성(城)을 쌓게 하였으니, 마치 소백(召伯)이 사(謝 신백(申伯)이 봉해진 주(周) 나라 읍명(邑名))를 경영한 유(類)와 같다. 왕이 한후의 선조(先祖)가 오랑캐들의 장(長)이 되었던 것으로 인해 한후에게 추와 맥을 맡기고 백(伯)으로 임명, 성지(城池)를 닦고 전묘(田畝)를 다스리고 세법(稅法)을 바르게 하여, 그 토지에서 생산된 것을 왕에게 조공(朝貢)하도록 한 것이다.”
하였다. 또 한혁장의 맨 첫장에,
크고 높은 저 양산을 / 奕奕梁山
우임금이 다스렸네 / 維禹甸之
이제 환하게 트인 그 길을 따라 / 有倬其道
한후가 와서 명을 받네 / 韓侯受命
한 주에,
“혁혁(奕奕)은 크다는 뜻이요 양산(梁山)은 한(韓) 나라의 진(鎭)이다. 전(甸)은 다스린다는 뜻이요 탁(倬)은 밝다는 뜻이다. 한(韓)은 나라 이름이요 후(侯)는 작(爵)이다. 한후는 무왕(武王)의 후손이요 수명(受命)은 한후가 즉위하여 상복(喪服)을 벗고 사복(士服) 차림으로 들어가 천자(天子)를 뵙고 명(命)을 받은 것이다.”
하였고, 주자(朱子)는 이르기를,
“장차 한후를 말하기 위해 먼저 그 나라를 내세워 ‘양산(梁山) 아래에 환한 길이 있다.’ 한 것이니, 바로 한후가 이 길을 따라서 주(周) 나라에 조회하고 명을 받았던 것이다.”
하였다. 《연사(燕史)》에 이르기를,
“ 《시경》에서 말한 추(追)와 맥(貊)은 연(燕) 나라 북쪽에 있는 나라이니, 한(韓)은 연(燕)의 북쪽에 있고 맥(貊)은 한(韓)의 북쪽에 있는 나라였다. 한(韓)은 연(燕)에 귀부(歸附)하고 따라서 동(東)으로 옮겼는데, 한(漢) 나라 초기에 삼한(三韓)이라 하였다.”
하였고,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옛날 주 선왕(周宣王) 때에도 한(韓) 나라가 있었는데, 그 지역이 연(燕)에 가까웠기 때문에 《시경》에 이르기를 ‘저 웅장한 한 나라 성을, 연 나라 군사가 다 쌓았네.’ 한 것이다. 그 후에 있었던 한서(韓西)라는 나라도 성(姓)이 한(韓)인데, 위만(衛滿)에게 침공을 받아 바닷가에 옮겨가서 살았다.”
하였다. 고염무(顧炎武)가 말하기를,
“ 《수경주(水經注)》에 의하면 ‘성수(聖水)는 방성현(方城縣)의 옛성[故城] 북쪽을 경유하고 또는 동남쪽으로 한성(韓城)의 동쪽을 경유한다.’ 하였는데, 《시경》의 ‘저 웅장한 한 나라 성을 연 나라 군사가 다 쌓았네. 왕이 한후에게 추와 맥을 맡기니, 문득 북국(北國)을 받았네.’ 한 주(注)에 왕숙(王肅)이 말하기를 ‘지금의 탁군(涿郡) 방성현(方城縣)에 한후성(韓侯城)이 있다.’ 하였고, 《수경주》에도 ‘습수(濕水)는 양향현(良鄕縣)의 북쪽 경계를 경유하여 양산(梁山)의 남쪽을 거쳐간다.’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크고 높은 저 양산[奕奕梁山]이란 것이다. 구설(舊說)에 ‘한국(韓國)이 동주(同州)의 한성현(韓城縣)에 있다.’ 하였는데, 조씨(曺氏)는 말하기를 ‘무왕(武王)의 아들이 처음 한(韓)에 봉해졌을 때 소양공(召襄公)이 북연(北燕)에 봉해져 사공(司空)이 되었으므로 왕이 연 나라 군사를 시켜 성을 쌓게 한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 동주(同州)는 연(燕)과의 거리가 2천여 리나 된다. 즉 소공(召公)에게 사공(司空)을 임명하여 방토(邦土)를 맡겼으니, 땅의 원근(遠近)을 헤아려 공사를 일으키고 부역을 시키는 데 있어서 의당 경기(京畿)의 가까운 곳에서 인력(人力)을 동원했어야 할 터인데, 어찌 2천여 리 밖에서 인력을 동원하여 성을 쌓았단 말인가. 하물며 추(追)와 맥(貊)은 동북쪽의 오랑캐들인데다 《시경》의, ‘궤보가 가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蹶父之靡國不到]’는 말로 보더라도 한(韓)의 지역은 아주 먼 북쪽 변방에 있었던 듯하다. 또 상고하건대,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옛날 주선왕(周宣王) 때에 한후(韓侯)가 있었는데, 그 나라가 연(燕) 나라와 가까웠기 때문에, 《시경》에 이르기를 「저 웅장한 한 나라 성을 연 나라 군사가 다 쌓았네.」한 것이다. 그 후에 있었던 한서(韓西)도 성(姓)이 한(韓)인데, 위만(衛滿)에게 침공을 받아 바닷가에 옮겨가서 살았다.’ 하였다. 한(漢) 나라 시대는 고대(古代)와 멀지 않아서 의당 전수(傳授)한 것이 있을 것이므로, 이제 《수경주》의 말로 정론(定論)을 삼는다.”
하였다. 《후한서(後漢書)》에 이르기를,
“기준(箕準)이 위만의 침공을 받아 좌우(左右)의 관인(官人)들을 거느리고 바닷가로 옮겨가서 마한(馬韓)을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뒤에 그의 후손이 멸망하자, 마한 사람이 다시 스스로 진왕(辰王)이 되었다.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20년에 한(韓)의 염사(廉斯) 사람 소마시(蘇馬諟) 등이 낙랑(樂浪)에 와서 공헌(貢獻)하자, 광무제가 소마시에게 한(漢)의 염사 읍군(廉斯邑君)으로 봉(封)하고 낙랑군(樂浪郡)에 염사를 예속하도록 했다.”
하였다.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기준의 아들 및 친척으로서 그대로 그 나라에 남아 있는 자는 성(姓)을 한씨(韓氏) 그대로 하였고 기준은 바닷가로 가서 살았는데, 한번 간 후로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하였고, 《박물지(博物志)》에 이르기를,
“기자(箕子)의 아들이 조선(朝鮮)에 살았는데, 그의 후손이 연(燕) 나라를 쳐서 옛 국토를 되찾았다가 뒤에 다시 조선이 망하자, 바다로 들어가 선국사(鮮國師)가 되었다. 그의 두 아내는 흑색(黑色)의 귀고리를 단 두 청사(靑蛇)였는데, 이는 구망(句芒)의 신(神)이다.”
하였고, 《통고(通考)》에도 이르기를,
“기자(箕子)의 아들 우친(友親)이 그대로 본국에 남아서 한씨(韓氏)로 성을 삼았다.”
하였으니, 이가 혹 한후(韓侯)의 성을 따라서 한(韓)으로 성을 삼았던 것인지, 아니면 그의 아버지 준(準)이 마한(馬韓)을 공탈(攻奪)하여 왕(王)이 되었으므로 성을 한(韓)으로 삼았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삼한(三韓) 지방에 대한 역사를 찬술(撰述)한 변론이 매우 많다. 이를테면, 《삼국사지리지(三國史地理志)》ㆍ《동국통감(東國通鑑)》ㆍ《여지승람(輿地勝覽)》ㆍ《주관육익(周官六翼)》ㆍ《삼국유사(三國遺事)》ㆍ《동사찬요(東史纂要)》ㆍ《동국지리변(東國地理辨)》ㆍ《기년아람(紀年兒覽)》ㆍ《문헌비고(文獻備考)》 등에서 이미 변석(辨析)하였으니, 지금 꼭 여러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으므로, 조금씩 다른 점만을 취해서 변증하려 한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사설(僿說)》에,
“기준(箕準)이 마한(馬韓) 땅을 빼앗아 왕(王)이 되었으니, 기씨(箕氏) 이전에 벌써 한(韓) 나라가 있었던 것이다. 진(辰)과 진(秦)은 음(音)이 같은 것으로 《춘추전(春秋傳)》에 보이는 진영(辰嬴)이 바로 그 증거이니, 진한(辰韓)은 진(秦) 나라 사람들이 들어와서 창립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韓)의 이름은 어디서 유래된 것인지 모르겠다. 장량(張良)이 진 시황(秦始皇)을 저격하려 할 때 동쪽으로 와서 창해군(滄海君)을 만나 보았는데, 설자(說者)의 말에 ‘창해는 곧 예맥(穢貊)이다.’ 하였으니, 그곳은 지금의 강릉(江陵)에 해당된다.
그러나 한 무제(漢武帝) 때에 예군(穢君 예맥의 임금) 남려(南閭)가 요동(遼東)에 내부(內附)함으로써 그 땅을 창해군(滄海郡)으로 만들었다 하는데, 조그마한 고을 하나를 가지고 군(郡)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고 보면, 그 땅이 반드시 남쪽으로 멀리 뻗쳤을 것이다. 육국(六國) 중에서 한(韓) 나라가 진(秦) 나라에 가장 가까웠으므로 진 나라를 피해 망명하는 일은 반드시 한 나라에서 먼저 시작했을 것이다. 《사기(史記)》에 이르기를 ‘즉묵대부(卽墨大夫)가 제왕(齊王) 건(建)에게 말하기를 「삼진(三晉)의 대부(大夫)들이 진 나라를 피하여 아(阿)와 견(甄) 사이에 와 있는 자가 수백 명에 이르고 있다.」했다.’ 하였으니, 이로써 증거를 삼을 수 있다. 장량(張良)은 한(韓) 나라 사람이기에 진(秦) 나라에 원수를 갚기 위해 반드시 동쪽으로 달려와 창해군(滄海君)을 만나보았을 것이요, 그 창해 역사(滄海力士)도 반드시 죽음을 무릅쓰고 철퇴(鐵椎)를 품에 간직, 한번 보복해 줄 것을 기도하였을 것이니, 평소에 마음이 서로 통하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어찌 그러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또 장량이 어찌 만 리 밖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급히 달려와 손쉽게 이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단 말인가. 창해가 어느 지방임은 막론하고라도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인 것만은 사실이므로 장량이 이곳을 왕래함에 있어 반드시 바닷길을 이용하여 우리나라 서해(西海)의 해변에 정박했을 것이니 창해는 곧 그 지방일 것이다. 생각건대, 당시에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나누어져 한수(漢水)를 경계로 삼았을 것이다. 지금의 황해(黃海)ㆍ평안(平安) 양도는 당시에 삼조선(三朝鮮 단군ㆍ기자ㆍ위만 조선)의 땅이었고, 한수 이남은 처음에 통솔하는 자가 없었으므로 중국에서 창해라고만 명칭하였는데, 한(韓) 나라 사람들이 진(秦) 나라의 난리를 피하여 이곳에 와서 웅거하였으므로 국호를 한(韓)이라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장량이 그들과 함께 진 나라에 원수를 갚으려 했던 것이다.
《한서》 교사지(郊祀志)에 ‘곡영(谷永)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진 시황(秦始皇)이 처음으로 천하를 겸병(兼幷)하고는 서복(徐福)ㆍ한종(韓終) 등을 시켜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배에 가득 싣고 바다에 나가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을 구해 오게 하였는데, 그들은 이내 도망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했다.’ 하였다. 그렇다면 서복 외에도 한종이 있었으니, 한종은 반드시 한(韓) 나라의 후예로서 장량과 똑같이 진 나라를 원수로 여기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변진(弁辰)도 틀림없이 그 뒤를 따라 나온 자들이고 또 진(秦) 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진(辰)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비록 상고할 수는 없으나, 이치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마한(馬韓)이 이미 기준에게 쫓겨난 후 마한과 진한 두 나라 사이에 따로이 변한(弁韓)이 있었으니, 바로 이것이다. 변(弁)은 혹 당시의 지명(地名)에 의한 것인지도 알 수 없는데, 마한과는 다른 것으로 마한에 예속되었던 나라가 아닌가 한다.”
하였다. 나는 상고하건대, 한(韓)의 지역은 낙랑(樂浪)의 남쪽 변방으로서 한(漢) 나라 때에는 중국의 강역(疆域) 안에 들지도 않았었다. 한(韓)이라고 칭한 것은 기준(箕準)에게서 연유된 듯하고, 기준이 한이라고 칭하게 된 것은 남쪽 금마군(金馬郡)으로 달아나기 이전에 있었던 듯하다. 《시경》 한혁장(韓奕章)에,
저 웅장한 한 나라 성을 / 溥彼韓城
연 나라 군사가 다 쌓았네 / 燕師所完
왕이 한후에게 / 王錫韓侯
추와 맥을 맡기니 / 其追其貊
하였고,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는,
“옛날 주 선왕(周宣王) 때에 한후(韓侯)가 있었는데, 그 나라가 연(燕) 나라에 가까웠고 그 뒤에 위만(衛滿)에게 침공을 받아 바닷가로 옮겨가서 살았다.”
하였는데, 왕응린(王應麟)ㆍ고염무(顧炎武)가 모두 그 말을 옳게 여겼으니, 그렇다면 한후란 누구일까. 이가 혹 기씨(箕氏)가 아닌지. 한혁장의 ‘그대의 선조를 계승하게 하노니.[纘戎祖考]’라는 말의 선조와 ‘선조가 명을 받아 오랑캐들을 단속하므로[以先祖受命 因時百蠻]’라는 말의 선조가 어찌 기자(箕子)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만일 한(韓) 나라가 과연 희성(姬姓)의 나라로서 진(晉) 나라에 병합(幷合)된 한(韓) 나라라면 연(燕) 나라 군사가 성(城)을 쌓았을 리가 없기 때문에 정현(鄭玄)이 ‘평안(平安)한 때에 백성들이 쌓은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천착이다. 왕숙(王肅)은 이르기를 ‘탁군(涿郡) 방성현(方城縣)에 한후성(韓侯城)이 있다.’ 하였는데, 그의 의도는 정현을 비난함과 동시에 한(韓) 나라가 맥국(貊國)과 서로 연접해 있지 않았음으로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왕부의 말에 의하면, 한(韓) 나라가 연(燕) 나라의 동쪽에 위치해 있으면서 맥(貊)의 지역을 통솔하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추(追)는 전유(前儒)들도 모른 이가 많았는데, 이는 반드시 예맥(穢貊)의 부속(部屬)일 것이다. 이 시(詩)의 맨 첫장에 양산(梁山)을 일컫고, 이어서 ‘이제 환한 그 길을 따라, 한후가 와서 명을 받네.[有倬其道 韓侯受命]’ 하였으니, 이를 의당 ‘한후가 들어가서 천자를 뵙고 명을 받아가지고 돌아가면서 이 길을 경유하였다.’고 해석해야 할 것인데, 정현(鄭玄)은 양산을 가리켜 ‘한(韓)의 진산(鎭山)이다.’ 하였고 ‘저 환한 길을 따라[有倬其道]’의 도(道)자에 대해서는 모씨(毛氏)ㆍ정씨가 다같이 도덕(道德)의 도(道) 자로 보았으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한서》 고조본기(高祖本紀) 4년조에,
“북맥(北貉)과 연인(燕人)이 효기(梟騎 날래고 굳센 기병(騎兵))를 거느리고 와서 한(韓) 나라를 도왔다.”
하였는데, 그 주(注)에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북맥(北貉)은 나라이고 효(梟)는 건(健)의 뜻이다.”
하였고, 사고(師古)는 말하기를,
“맥(貉)은 동북방에 있는데, 삼한(三韓)의 무리들이 모두 맥(貉)의 유(類)이다.”
하였다. 그리고 석재(碩齋) 윤행임(尹行恁)의 《신호수필(薪湖隨筆)》에는,
“ 《모시(毛詩)》에서 말한 추(追)ㆍ맥(貉)의 추(追)는 곧 예(穢)이다.”
하였다. 나는 또 상고하건대, 양웅(揚雄)의 《양자방언(揚子方言)》에 의하면,
“비(貔) 이(狸)의 별명(別名)인데, 음은 비(毗)이다. 를 북연(北燕)과 조선(朝鮮) 사이에서는 비(貉) 음은 비(丕)이다. 라고 한다.”
하였으니, 비(貔)는 곧 추(追)ㆍ맥(貉)의 토산(土産)이다. 이익(李瀷)의 《사설(僿說)》에,
“진 시황(秦始皇)이 서복(徐福)과 한종(韓終) 등을 보내어 바다에 들어가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不死藥)을 구해 오게 하였으나, 그들은 이내 돌아가지 않고 도망하여, 서복은 왜(倭)로 들어가 왕(王)이 되었고 한종은 우리나라 남쪽 변방으로 들어와서 마한황(馬韓王)이 되었다.”
하였으니, 이 말이 억설(臆說)인 듯하다. 그러나 전진(前晉) 왕가(王嘉)의 《습유기(拾遺記)》에 의하면,
“한 혜제(漢惠帝) 2년(무신)에 사방(四方)이 모두, 천하가 통일된 것을 칭송, 천하가 태평하고 전쟁이 그쳐 머나먼 나라들이 여러 나라를 거쳐와서 조공하였다. 이때 한종(韓終)의 아들로서 한치(韓稚)라는 성명을 가진 도사(道士)가 바다를 건너왔는데, 이는 곧 동해(東海)의 신사(神使)로 성덕(聖德)이 온 천하에 흡족하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기꺼이 복종하여 온 것이다. 한치가 물러간 후 그가 간 곳을 알 수 없자, 황제가 여러 방사(方士)를 시켜 장안(長安)의 성(城) 북쪽에 선단(仙壇)을 세우게 하고 이름을 사한관(司韓館)이라 하였는데, 속(俗)에서는 ‘사한신(司寒神)을 성 북쪽에 제사한다.’ 했다.”
하였다.
기준이 위만(衛滿)을 피해 한 혜제(漢惠帝) 원년 정미(서기전 194)에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도망가서 금마저(金馬渚) 지금의 익산군(益山郡)이다. 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마한(馬韓)이라 하였으니, 마한이란 곧 그 옛 명칭을 따라서 호(號)를 삼은 것이고 그때 쫓겨나간 마한의 옛 임금이 바로 한종(韓終)인 듯하다. 기준이 즉위한 지 2년째 되던 해가 바로 한 혜제 2년(무신)이니, 한종의 아들 한치(韓稚)가 한(韓) 나라에 조회한 해는 바로 그가 나라를 잃은 지 2년째 되던 해가 된다. 그러나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일로 아무런 빙증이 될 만한 사책(史冊)이 없으니,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설원(說苑)》에 상고하건대, 무왕(武王)의 아들 중에 우(邘)에 봉해진 아들이 있어, 그가 한(韓)의 삼국(三國) 시대에 해당하니, 《시경》 한혁장(韓奕章)에 나오는 한(韓)은 무왕의 아들이 봉해진 한(韓)이 아닌 듯하다.
동사(東史)에 의하면, 기준(箕準)을 마한(馬韓)의 시조(始祖)로 삼아 호강왕(虎康王)이라고만 호칭하였을 뿐, 그 뒤를 이은 임금에 대해서는 전한 것이 없는데, 덕양 기씨(德陽奇氏)의 족보에 상고해보면, 광주(光州)에서 도랑을 파다가 얻었다는 비석(碑石)에 기자(箕子) 이후의 세대(世代), 즉 태조(太祖) 문성대왕(文聖大王) 기자에서부터 애왕(哀王) 준(準)에 이르기까지의 41세 주 무왕(周武王) 기묘년(己卯年)에서부터 한 고조(漢高祖) 12년(병오)에 이르기까지이다. 의 세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기준이 남쪽으로 도망가서 마한왕(馬韓王)이 되었던 사실은 없고, 또 강왕(康王) 탁(卓)을 마한의 개국시조(開國始祖)로 삼아 계왕(稽王)까지의 8세(世) 한 혜제(漢惠帝) 2년(무신)에서 시작하여 성제(成帝) 홍가(鴻嘉) 4년(갑진)까지이다. 만에 백제(百濟)의 온조왕(溫祚王)에게 병합된 때까지의 세대(世代)ㆍ명시(名諡)ㆍ기년(紀年)이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되었으니, 이상한 일이다. 어떤 이는 이를 초가(草家) 김백련(金百鍊)에게서 전해진 것이라고 하나, 자세하지 못하다. 동사(東史)에는 또,
“마한(馬韓)의 원왕(元王)에게 아들 셋이 있었는데, 우평(友平)ㆍ우성(友誠)ㆍ우량(友諒)이다. 나라가 망하자 우평은 고구려로 달아나 유리왕(琉璃王)에게 벼슬하여 북원 선우씨(北原鮮于氏)가 되었고 우성은 백제에 항복, 온조왕(溫祚王)에게 벼슬하여 덕양 기씨(德陽奇氏)가 되었고 우량은 신라에 귀부(歸附), 탈해왕(脫解王)에게 벼슬하여 상당 한씨(上黨韓氏)가 되었다.”
하였다. 이정귀(李廷龜)의 숭인전비문(崇仁殿碑文)에 상고하건대,
“마한(馬韓) 말엽에 기자의 잔손(孱孫) 세 사람이 있었는데, 친(親)이라는 사람은 뒤에 한씨(韓氏)가 되었고 평(平)이라는 사람은 기씨(奇氏)가 되었고 양(諒)이라는 사람은 용강(龍岡)의 오석산(烏石山)에 들어가 살다가 뒤에 선우씨(鮮于氏)가 되었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말한 친(親)이 곧 《통고(通考)》에 이른바,
“기준의 아들 우친(友親)이 그 나라에 그대로 남아서 성(姓)을 한씨(韓氏)로 하였다.”
고 한 우친이란 사람이다. 그리고 평(平)과 양(諒)은 기씨(奇氏)의 족보 내용과 같다. 그런데 그 후에는 그 성을 가진 사람이 각기 달라서 지금 상고할 수가 없다.
또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세보(世譜)에 상고하건대,
“마한(馬韓) 말엽 원왕(元王) 훈(勳)에게 아들 셋이 있었는데, 우평(友平)ㆍ우성(友誠)ㆍ우량(友諒)이었다. 나라가 망하자 우평은 고구려로 달아나 유리왕(琉璃王)에게 벼슬하여 북원 선우씨(北原鮮于氏)가 되었고 우성은 백제에 항복, 온조왕(溫祚王)에게 벼슬하여 덕양 기씨(德陽奇氏)가 되어 행주(幸州)로 본관(本貫)을 삼았고 우량은 신라에 귀부, 탈해왕(脫解王)에게 벼슬하여 상당 한씨(上黨韓氏)가 되어 청주(淸州)로 본관을 삼았다. 기자(箕子)로부터 40세손인 종통왕(宗統王) 비(否) 초명(初名)은 휼(恤)이다. 에 이르러 비로소 기(箕)로 성을 삼았는데, 진 시황(秦始皇) 15년 기사(서기전 232)에 즉위하여 26년에 훙(薨)함으로써 재위 기간은 12년이었다.”
하였다. 《운서(韻書)》에 이르기를,
“기자가 조선(朝鮮)에 봉해지고 그의 작은아들 중(仲)이 식읍(食邑)으로 우(于)를 받음으로써 선우씨(鮮于氏)가 되었다.”
하였는데, 조맹부(趙孟頫)가 선우추(鮮于樞)에게 준 시(詩)에 ‘기자의 후손으로 수염 많은 늙은일세.[箕子之後多髥翁]’ 하였으니, 선우씨가 기자의 후손임이 분명하다. 《삼국지(三國志)》에 의하면,
“위 명제(魏明帝) 경초(景初) 연간에 선우사(鮮于嗣)라는 사람이 낙랑 태수(樂浪太守)로 있었는데, 명제가 선우사 및 대방 태수(帶方太守) 유흔(劉盺)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 이군(二軍)을 평정한 다음 여러 한국(韓國) 신지(臣智)들에게는 읍군(邑郡)의 인수(印綬)를 주고 그 다음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읍장(邑長)의 인수를 주도록 했다.”
하였고, 《진서(晉書)》에 의하면,
“진 무제(晉武帝) 태강(太康) 2년에 선우영(鮮于嬰)이라는 사람이 평주 자사(平州刺史)로 있었는데, 선비족(鮮卑族)이 요서(遼西)에 침입하자 선우영이 그들을 쳐부수었다.”
하였다. 홍만종(洪萬宗)의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에 이르기를,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1368~1398) 연간에 선우경(鮮于京)이라는 자가 중령별장(中領別將)을 지냈는데, 그의 7대손(孫)인 식(寔)이 태천(泰川)에서 와 숭인전(崇仁殿) 곁에 살자, 드디어 식(寔)을 기자(箕子)의 후손이라 하여 전감(殿監)에 제수함으로써 그의 자손이 전감을 세습(世襲)했다.”
하였다. 그리고 선우씨 가운데는 돈암(遯菴) 선우협(鮮于浹)과 선우각(鮮于恪) 같은 저명인사도 있다.
또 기씨(箕氏)가 있는데, 《만성통보(萬姓統譜)》에 의하면 ‘기씨(箕氏)는 기자(箕子)의 후손으로서 국호(國號)를 성씨로 삼은 것이다.’ 하였다. 또 주(周) 나라 때에는 기정(箕鄭)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진 문공(晉文公)이 그에게 기민(飢民) 구제하는 방법을 묻자, 그는 신(信)으로 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기풍(箕酆)은 진(晉) 나라 대부(大夫)이고 한(漢) 나라 때 기감(箕堪)은 서화령(西華令)을 지냈으며, 기사(箕肆)는 장도(臧荼)의 장수였고 기조(箕稠)는 오환교위(烏桓校尉)를 지냈으며, 기담(箕澹)은 진(晉) 나라 때에 유곤(劉琨)에게 석늑(石勒)을 공파(攻破)하라고 권유한 사람이다.
그 구한(九韓)이라는 것은 비록 야언(野言)을 견강부회해 놓은 것인 줄은 알지만 생략할 수는 없기 때문에 기록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新羅)의 중[僧] 안홍(安弘)이 쓴 구한에 대한 기록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구한은 일본(日本)ㆍ중화(中華)ㆍ오월(吳越)ㆍ타라(乇羅)ㆍ응유(鷹遊)ㆍ말갈(靺鞨)ㆍ단국(丹國)ㆍ여진(女眞)ㆍ예맥(穢貊)이다.”
정의(正義)에 현도(玄菟)와 낙랑(樂浪)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대(漢代) 이후에 정해진 것이기는 하나, 이른바 만식(滿飾)ㆍ부유(鳧臾)ㆍ소가(素家)ㆍ동도(東屠)ㆍ천비(天鄙)라는 곳은 어느 지역인지 모르겠다. 안홍(安弘)이 기록한 것도 신라 시대에 병립(幷立)했던 나라들인데, 응유(鷹遊)라는 것은 지금 상고할 수가 없고, 중화(中華)와 오월(吳越)도 구한(九韓)의 수(數)에 들어갔으니, 이는 믿을 수가 없다. 다만 《후한서(後漢書)》에서 논(論)한 것이 오히려 근거가 될 만하다.
혹은 한(韓)을 한(寒)으로 쓰기도 하는데, 왕회해(王會解)의 예인(穢人)에 대한 주(注)에,
“예(穢)는 한예(寒穢)인데, 동이(東夷)의 별종(別種)이다.”
하였고, 패사(稗史)에는,
“한국(韓國) 사람들이 먹는 닭을 한계(寒鷄)라 한다.”
하였으니, 이는 그 음(音)이 서로 같은 까닭에 잘못 일컬어진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한(韓)을 가리켜 한(馯)이라고 하는데, 한(馯)이라고 한 것은 천하게 여기는 말이다. 그러나 중국에는 한(馯)으로 성(姓)을 삼은 사람이 있으니, 이를테면 순열(荀悅)의 《한기(漢紀)》에,
“순경(荀卿)의 선배로 성은 한(馯)이고 이름은 비(臂)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가 곧 중니(仲尼)와 나란히 일컬어진 자궁(子弓)이란 사람이다.”
한 데서 알 수 있다. 상고하건대, 우리 동방(東方)의 지역은 청주(靑州)의 변방으로 《서경(書經)》 우공(禹貢)에서 말한 우이(嵎夷)의 지역인데, 여기가 곧 은(殷)ㆍ주(周) 시대 고죽국(孤竹國)의 이웃 나라이다. 기자(箕子)가 여기에 와서 살자, 무왕(武王)이 이곳에 기자를 봉해 주었으니, 마치 태백(太伯)이 구오(句吳)에 봉해진 것과 같다. 《상서(尙書)》의 전(傳)에 이르기를,
“동이(東夷)는 해동(海東)의 여러 오랑캐인 구려(駒麗)ㆍ부여(扶餘)ㆍ한맥(馯貊)의 무리인데, 무왕(武王)이 상(商) 나라를 이긴 후로 모두 중국과 통해졌다.”
하였다. 여기서 말한 한(馯)은 곧 한(韓)이니, 조선(朝鮮)이라고 하지 않고 한이라고 한 것은 이때부터 중국에 복속(服屬)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주(周) 나라가 수백 년을 지나서는 연(燕) 나라의 공격을 받아 서쪽 땅을 잃었는데, 진(秦) 나라가 연 나라의 접경(接境)이고 보면, 그 지역은 대체로 패수(浿水)의 동쪽일 것이며, 한(漢) 나라 초기에는 위만(衛滿)의 소유가 되었었는데, 무제(武帝)가 군사를 일으켜 쳐서 사군(四郡)을 설치하였으니, 이는 삼대(三代) 시대의 옛 강토를 수복(收復)한 것이다.
한 소제(漢昭帝)는 진번(眞蕃)을 현도(玄菟)에 병합시키고 임둔(臨屯)을 낙랑(樂浪)에 병합시켰는데, 후한(後漢) 건안(建安 후한 헌제(獻帝)의 연호. 196~220) 연간에는 다시 여기에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위(魏) 나라를 거쳐 진(晉) 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혹은 평주(平州)에 예속시키고 혹은 유주(幽州)에 병합시키기도 하여, 한번도 관리(官吏)를 두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영가(永嘉) 연간에 중국이 망하자, 고구려(高句麗)가 비로소 현도(玄菟)를 취득하고 또 낙랑(樂浪)을 함락시켰으며, 백제(百濟)는 그 남쪽 지역인 대방(帶方)의 땅을 공취(攻取)하였고 신라(新羅)는 그 동부(東部) 칠현(七縣)의 땅을 차지하였다.
여러 사책(史策)을 두루 상고해보면, 사군(四郡)이 이군(二郡)으로 합해지고 이군이 더 불어서 삼군(三郡)이 되고 삼군이 다시 변하여 삼국(三國)으로 되었던 대략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서북(西北)은 조선(朝鮮)이 되고 동남(東南)은 삼한(三韓)이 되어 한수(漢水)로 경계를 삼았으니, 서로 통합해서 말할 수는 없다. 당(唐) 나라 시대 이후로 고씨(高氏)를 계승하여 낙랑ㆍ현도 이군(二郡)을 차지한 자는 바로 발해(渤海)의 대씨(大氏)이고, 오계(五季 후량(後梁)ㆍ후당(後唐)ㆍ후진(後晉)ㆍ후한(後漢)ㆍ후주(後周)의 오대(五代)를 일컬음) 시대 이후로는 낙랑(樂浪)은 고려(高麗)에 부속되고 현도(玄菟)는 여진(女眞)에 병합되었다. 이것이 동방(東方)의 연혁(沿革)에 대한 일대 변증이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기자(箕子)가 우리 동녘에 봉해지자, 단군(檀君)의 후손이 당장경(唐藏京)으로 도읍을 옮겼고 당장은 문화현(文化縣)에 있는데, 여기서도 단군이라 호칭하였으니, 단(檀)은 바로 국호이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상고하건대 ‘단궁(檀弓)은 낙랑(樂浪)에서 생산된다.’ 하였으니, 단(檀)은 활을 만드는 나무가 아니요, 국호(國號)을 붙여서 활의 이름을 지은 것이다. 기자(箕子)가 봉작(封爵)을 받아 자작(子爵)이 되었으니, 기(箕)는 바로 국호인데, 성토(星土)의 분야(分野)로 따져보면 기성(箕星)이 그곳에 해당하므로 국호를 기(箕)라고 하였을 것이다. 조선(朝鮮)이라는 것은 다만 한사군(漢四郡)의 통칭으로서 마치 중국(中國)을 제주(齊州)라고 이르는 것과 같다.
한수(漢水)의 남쪽은 또 별다른 지역으로서 당시에 삼한(三韓)의 명칭이 있었으니, 한(韓)은 바로 남방(南方)의 통칭이었는데, 삼국(三國)이 각기 마(馬)ㆍ변(弁)ㆍ진(辰) 밑에다 한(韓)자를 붙여 나라를 구별하였던 것이다.”
하였으니, 이 말이 매우 근리하다.
[주-D001] 소백(召伯)이 …… 경영 :
《시경(詩經)》 소아(小雅) 서묘(黍苗)에 “사(謝) 땅에 세운 훌륭한 공을 소백이 경영하였네.[肅肅謝功 召伯營之]” 하였다.
[주-D002] 중니(仲尼)와 …… 자궁(子弓) :
여기에서 말한 자궁은 주(周) 나라 때 은일(隱逸)이었던 주장 자궁(朱張子弓 : 자궁은 주장의 자(字))을 가리키는데, 《순자(荀子)》 비십이자(非十二子)에 “아래로는 중니와 자궁의 뜻을 본받는다.[下則法仲尼子弓之義]” 하였다.
[주-D003] 영가(永嘉) …… 망하자 :
서진(西晉) 말기의 큰 난리, 즉 유총(劉聰)이 낙양(洛陽)을 함락시키고 회제(懷帝)를 시해한 난리를 말한다. 영가는 진 회제(晉懷帝)의 연호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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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 제67권 / 인물고(人物考) 1 사군(四郡) 이전(以前),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발해(渤海)
소련(少連), 대련(大連) [사군(四郡) 이전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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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소련과 대련 두 사람은 모두 거상(居喪)을 잘하였다. 3일 동안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3개월 동안을 해이하게 하지 않았으며, 1년 동안을 슬퍼하고, 3년 동안을 조상(弔喪)하지 않았는데, 동이(東夷)의 아들이다.” 하였다. 《예기(禮記)》
○ 일민(逸民)으로는 백이(伯夷), 숙제(叔齊), 우중(虞仲), 이일(夷逸), 주장(朱張), 유하혜(柳下惠), 소련(少連)이었다. 유하혜와 소련에 대해 평하기를,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하였으나, 말이 윤리에 맞으며 행실이 사려에 맞았으니, 이와 같을 뿐이다.” 하였다. 《논어(論語)》 ○ 살펴보건대, 《한서(漢書)》의 고금인표(古今人表)에는 “소련은 상중(上中)의 어진 사람이고, 대련은 상하(上下)의 지혜로운 사람이다.” 하였다.
마융(馬融)이 말하기를, “성인께서 《춘추(春秋)》를 지으면서 중국(中國)에 대해서는 높이고 만이(蠻夷)에 대해서는 배척한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중국은 예의(禮義)가 있고 만이는 예의로써 책할 수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도 소련과 대련이 거상을 잘하여, 비록 공자의 고제(高弟)인 증자(曾子)나 민자(閔子)의 지극한 효성으로서도 이와 같은 데 불과할 뿐이었다. 이에 공자가 칭찬하여 ‘동이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대개 그가 능히 이 예를 행한 것을 아름답게 여긴 것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가 능히 시속(時俗)을 변화시킨 것을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그러나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순(舜) 임금은 동이(東夷)의 사람이다. 문왕(文王)은 서이(西夷)의 사람이다.’ 하였으니, 저 순 임금과 문왕이 동이와 서이의 사람이라면 소련과 대련 두 사람이 동이의 사람으로서 예에 합당하게 한 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겠는가.” 하였다. 《예기주(禮記注)》
살펴보건대, 능적지(凌迪知)가 말하기를, “발해(渤海)의 대씨(大氏)는 바로 대련의 후예이다.” 하였고, 호삼성(胡三省)은 말하기를, “《예기(禮記)》에 ‘대련은 거상을 잘하였다.’ 하였는데, 동이 가운데 대씨가 있은 지가 오래되었다.” 하였다. 그렇다면 대련의 후예가 일찍이 동국(東國)에서 끊어진 적이 없었다가 그 뒤 발해에 이르러서 창성한 것인가?
[주-D001] 소련(少連) :
원문에는 ‘小連’으로 되어 있는데, 《논어(論語)》 미자(微子)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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