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정방(蘇定邦)을 따라 백제(百濟)를 평정하고는 그대로 신라(新羅)에 머물러 벼슬을 하면서 연안(延安)의 관적(貫籍)을 하사받았다

2022. 9. 15. 08:45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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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저집 제34권 / 행장(行狀) 1(一首)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시(諡) 문충(文忠) 이공(李公)의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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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本貫) 연안부(延安府)

증조(曾祖) 혼(渾)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증(贈)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祖) 순장(順長) 가선대부(嘉善大夫) 증 영의정(領議政)

고(考) 계(𡹘) 삼등 현령(三登縣令) 증 영의정

 

공의 휘(諱)는 정귀(廷龜)이고 자(字)는 성징(聖徵)이고 호(號)는 월사(月沙)이다. 소싯적의 호는 추애(秋崖)이고 혹은 습정(習靜), 혹은 치암(癡庵)이라고 하였으며, 만년의 호는 보만정주인(保晩亭主人)이다.

그의 선조는 당(唐)나라 출신이다. 중랑장(中郞將) 무(茂)가 소정방(蘇定邦)을 따라 백제(百濟)를 평정하고는 그대로 신라(新羅)에 머물러 벼슬을 하면서 연안(延安)의 관적(貫籍)을 하사받았다. 고려(高麗) 조에 소부감(少府監) 현려(賢呂)와 문림랑(文林郞) 영군(映君)이 있었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판도 판서(版圖判書) 효신(孝臣)과 호조 전서(戶曹典書) 종무(宗茂)가 있었다. 그리고 문강공(文康公)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휘 석형(石亨)은 문학으로 크게 이름을 날렸는데, 일찍이 세 차례의 과거에서 잇따라 장원을 차지한 바가 있다. 이분이 바로 공의 고조이다.

공의 고(考)인 의정공(議政公)은 문장과 기의(氣誼)로 세상에서 중히 여김을 받았다. 모두 21차에 걸쳐 과거에 응시해서 장원을 하기도 하고 둘째, 셋째를 차지하기도 하였으나 끝내 대과(大科)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는데, 제술(製述)한 글들 모두가 전송(傳誦)되었다. 그리고 고문(古文)의 표현을 잘 구사하여 한 시대 사대부의 묘도(墓道)에 관한 글을 많이 지었다. 공이 약관의 나이에 고과(高科)에 급제한 것을 보고서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상투를 틀고 글을 배운 이래로 사단(詞壇)을 내려다보면서 항상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턱수염을 뽑는 것과 같다고 여겼는데, 지금 녹사(祿仕)에 고달프게 시달리고 있으니 이것은 운명이라고 할 것이다. 너는 반드시 선업(先業)을 크게 빛낼 수 있을 것이니 우리 집안의 구물(舊物)을 너에게 전해 주겠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저술로 《상제예요(喪祭禮要)》, 《강목집석(綱目輯釋)》, 《문계방원(文溪厖諢)》이 있다.

공의 비(妣)인 정경부인(貞敬夫人) 김씨(金氏)는 신라 왕자 흥광(興光)의 후손으로서 현감(縣監)인 표(彪)의 딸이요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첨지(僉知) 이홍간(李弘幹)의 외손인데, 대의(大義)를 알고 고금(古今)의 치란(治亂)과 일의 시비와 사람의 사정(邪正)을 잘 분변하였으므로 첨지공이 기특하게 여겨 사랑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손녀가 사내였다면 우리 가문을 크게 빛냈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계부(季父)인 전한(典翰) 규(虯)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질녀는 여성 중에서 뛰어난 달사(達士)이다.”라고 하였다. 가정(嘉靖) 43년(1564, 명종 19) 10월 8일에 공을 낳았다. 그날 아침부터 범이 문밖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피했는데, 공을 낳자 떠나갔으니 그때가 사시(巳時)였다.

공은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걸어다닐 줄 알았고 언어를 배우면서부터 문자를 알았다. 6세에 유모가 공을 안고 문밖에 앉아 있을 적에 술에 취한 사람이 앞에 있는 다리를 건너가는 것이 보였다. 그때 버들개지가 날리고 피리 소리가 들렸는데, 공이 그 일을 이야기하면서 마치 가곡(歌曲)처럼 말하자 유모가 기이하게 여겨 의정공에게 알렸다. 이에 의정공이 묻기를 “네가 이 일을 가지고 시구를 지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니, 공이 거침없이 응대하기를 “부축하고 지나가는 작은 다리 너머로, 버들개지 다투어 어지러이 날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몇 가닥 피리 소리, 바람에 불려 와 취한 귀를 깨우누나.〔扶過小橋外 楊花爭亂飛 何處數聲笛 吹來醒醉耳〕”라고 하였다. 또 공자(公子)가 술에 취해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시구를 짓기를 “향초를 밟고 가는 황금 수레요, 술에 취해 가는 백마 탄 낭군이라.〔金輪踏香草 白馬郞醉去〕”라고 하니, 세상에서 신동(神童)이라고 일컬었다.

7세 때의 일이다. 같은 동네에 사는 기자헌(奇自獻)과 나이가 서로 비슷하였는데, 공의 허리띠가 해진 것을 보고는 자기의 비단 허리띠를 풀어서 공에게 주자 공이 받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공이 말하기를 “붕우가 주는 의복을 입는 것은 원래 좋은 일이나, 그의 허리띠는 받을 수가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대개 그의 바르지 못한 점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8세에 벽에 걸린 산수화를 보고는 제(題)하기를 “산 안개 늦게까지 걷히지 않아, 침침하게 거목에 휘감겨 있고, 산골 물 깊어서 건너지 못하나니, 밤사이 앞산에 비가 내려서.〔山靄晩不收 沈沈隱高樹 溪流深不渡 夜來前峯雨〕”라고 하였다.

9세에 당시초(唐詩抄)와 한시(韓詩)를 읽었다. 10세에 《소학(小學)》과 사서(四書)를 읽었다. 남산시(南山詩)를 두 번 읽고 나서 바로 암송하였는데, 사람들은 공이 이 시를 일찍이 익힌 적이 있었을 것이라고 여겼다. 원화성덕시(元和聖德詩) 또한 그러하였다. 11세에 《시경(詩經)》과 《서경(書經)》, 《사기(史記)》, 《한서(漢書)》를 읽었다. 남산시에 차운(次韻)한 뒤에 다시 7언(七言)으로 차운하였고 또 원도(原道)를 모방한 작품을 지었는데, 모두 사람들에게 전송(傳誦)되었으며 같은 마을의 사인(舍人) 홍적(洪迪)과 대제학 김귀영(金貴榮)도 베껴 갔다.

이해에 모부인(母夫人)의 상을 당하여 곡읍(哭泣)하고 벽용(擗踊)하며 집상(執喪)하기를 성인(成人)처럼 하였다. 병이 들고 몸이 상해서 뼈만 앙상하였으므로 의정공이 껴안고 울면서 타일렀으나 한 해를 넘겨서야 비로소 권도(權道)를 행하였는데, 이때에 건강을 해친 것이 일생에 걸쳐 병의 근원이 되었다.

14세에 승보시(陞補試)에서 장원하여 명성을 크게 떨쳤다. 18세에 판서인 권공 극지(權公克智)가 공을 사위로 맞아들였다. 일찍이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고 있다가 조정에서 장차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를 보내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침내 불가하다고 극언하는 상소문을 작성한 뒤에 돌아와서 권공을 뵙고 말하기를 “찬탈한 왜적의 두목과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은 대의(大義)로 볼 때 매우 분명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으니, 제가 항소(抗疏)를 올려 말씀드릴까 합니다.”라고 하였다. 권공이 당시에 대사헌(大司憲)으로 있다가 이 소를 보고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의견이 지극히 옳다. 그러나 유생이 꼭 상소할 성격의 것이 아니니, 내가 응당 이런 뜻으로 논계(論啓)하겠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왜적의 사자의 목을 베어야 한다〔斬倭使〕’라는 등의 몇 마디 말만 삭제하고 나머지는 모두 공의 글을 그대로 써서 차자(箚子)를 올리자, 선묘(宣廟)가 답하기를 “묘당(廟堂)에서 어찌 우연히 계획해서 이와 같이 의정(議定)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조중봉(趙重峯 조헌(趙憲) )의 상소가 또 올라왔는데, 그 내용도 바로 공의 뜻과 합치되는 것이었다.

을유년(1585, 선조 18)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고, 경인년(1590)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신묘년(1591) 봄에 승문원(承文院)에 뽑혀 보임(補任)되고 가을에 추천을 통해서 사국(史局)에 들어갔다. 홍여순(洪汝淳) 등이 공이 일찍이 태학(太學)에 있을 때 우계(牛溪 성혼(成渾) )의 유임을 청하는 소를 작성했다는 이유로 추천을 삭제하도록 논하였다.

임진년(1592) 4월에 가주서(假注書)로 입직(入直)하였다. 그때 왜적의 경보(警報)가 급박했으므로 상이 비국(備局)의 신하들을 소견(召見)하였는데, 신하들이 번갈아 아뢰는 내용이 복잡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공이 귀로 듣고 손으로 기록하는 민첩한 그 솜씨가 마치 물이 흐르는 듯하였다. 상이 자주 아래를 내려다보던 중에 용상(龍床)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연(御硯)이 떨어지면서 그 먹물이 공의 의복을 적시자 상이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닦아 주도록 하였다. 소대(召對)가 끝난 뒤에 승지가 기록한 내용을 가져다 살펴보니 하나의 글자나 하나의 말도 잘못된 곳이 없었으므로 정원(政院)에서 모두 깜짝 놀라며 혀를 내둘렀다.

급기야 왜적이 교기(郊畿)에 육박하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행행(行幸)하게 되었다. 그 하루 전에 권공(權公)이 갑자기 죽었는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공이 남아서 치상(治喪)을 하고 양주(楊州)에 가매장을 한 뒤에 샛길을 통해서 행재(行在)에 갔다가 성천(成川)에 가서 광해(光海)를 배알하였다. 10월에 설서(說書)에 임명되었다. 계사년(1593)에 광해를 수행하여 정주(定州)에서 대가를 영접하고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는데, 선묘가 하교하기를 “지금은 강관(講官)이 사관(史官)보다 더 중요하다.”라고 하고는 공을 도로 설서에 임명하도록 하였다.

명(明)나라의 경략(經略)인 병부 시랑(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이 의주(義州)에 와서 주둔할 적에 막중(幕中)에서 도학(道學)을 강론할 문학사(文學士)를 뽑아 보내도록 하자, 선묘가 엄선하라고 명하였는데 공과 황공 신(黃公愼)이 동시에 선발되었다. 시랑이 매우 극진하게 예우하면서 함께 《대학(大學)》을 강론하며 장(章)마다 그 뜻을 해설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주석한 말을 답습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명나라의 학술이 모두 육씨(陸氏 송(宋)나라 육구연(陸九淵) )를 숭상하고 주자(朱子)를 배격하는 상황에서 시랑 역시 육씨를 숭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숭상하는 바가 무엇인지 관찰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에 공이 답하기를 “소방(小邦)은 오직 정주(程朱)의 학술을 본받을 줄만 알 뿐 다른 학설은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라고 하고는 한결같이 주자의 뜻에 입각해서 해의(解義)를 지어 올렸다. 그러자 시랑이 그의 막료인 통판(通判) 왕군영(王君榮)에게 응대하여 설을 짓게 한 다음에 이를 간행하고는 그 이름을 《대학강어(大學講語)》라고 하였다.

순안어사(巡按御史) 주유한(周維翰)이 도착하자 통군정(統軍亭)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제독(提督) 이하 여러 장수들은 모두 들어가지 못한 채 밖에서 기다렸는데, 시랑과 어사가 당(堂)을 나누어 앉은 자리에 공과 황공이 참여하였다. 어사가 매우 근실하게 위로하고 장려해 주면서 “본국의 흥망성쇠는 세자에게 달려 있고, 세자의 현부(賢否)는 바로 공들에게 달려 있다.”라고 말하고는 악수하고 헤어졌다.

6월에 사서(司書)로 승진하였다. 9월에 시랑이 중국으로 귀환하자 공이 돌아와서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었다. 중국 사신 사헌(司憲)이 왔을 적에 이공 덕형(李公德馨)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지명하였는데,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11월에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임명되었다. 중국 사신이 돌아갈 때에 이공 항복(李公恒福)이 대신하여 원접사가 되고 나서 다시 공을 종사관으로 지명하였는데, 비국(備局)이 중국 조정에 수응(酬應)할 문서를 공이 주관하고 있다는 이유로 보내지 않았다. 정공 곤수(鄭公崑壽)가 또 대신해서 원접사가 되었는데, 출발하기 하루 전에 아뢰기를 “중국 사신과 수창(酬唱)할 경우 신은 글을 잘하지 못하니, 이모(李某)를 종사관으로 삼았으면 합니다.”라고 하여 일단 윤허를 받았으나, 그날 밤에 정원(政院)이 또 공이 중국어를 잘하는 만큼 밖에 나가 있게 하면 안 된다고 아뢰어 교체시켰다.

12월에 의정공이 삼등(三登)에서 병으로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던 중 토산(兎山)에 이르렀을 때 부음(訃音)을 듣고 말에서 떨어져 혼절했다가 한참 뒤에 깨어나서는 도보로 빈소에 가서 항상 얼음 위에 거처하며 눈보라도 피하지 않았다. 이듬해 2월에 영구(靈柩)를 모시고 돌아와 용인(龍仁)의 선영에 장례를 행하였다. 이때 삼등에서 40여 명의 상여꾼이 묘소에 올 때까지 한 사람도 길에서 도망친 자가 없었는데, 나무를 잘라 여막(廬幕)을 엮고 떠나면서 말하기를 “현령께서 끼친 은택도 잊을 수 없지만, 상주의 효성 역시 감동적이다.”라고 하였다.

상복을 벗었을 때 공이 다시 전조(銓曹)에 들어가는 것을 당로자(當路者)가 꺼린 나머지 공을 승진시켜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삼았다가 다시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출하였다. 그 뒤 세 번 병조 정랑(兵曹正郞)이 되고 두 번 직강(直講)이 되었으나 모두 병 때문에 응하지 못하였다. 승문원이 문학에 능한 10여 명을 뽑아 겸관(兼官)을 시킬 적에 공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병이 낫자 경성에 가서 병조 정랑에 임명되고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를 겸하였으며, 중국어를 잘한다고 하여 어전 전역(御前傳譯)에 임명되고 한학 교수(漢學敎授)를 겸하게 되었다. 이때 사역원 도제조(司譯院都提調)인 윤공 두수(尹公斗壽)가 공을 보고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와 같이 큰 재능을 어느 때에 쓸 것인가. 한학을 겸임하게 한 것도 나의 손에서 나왔으니, 누가 다시 막겠는가.”라고 하였다.

그해 9월에 명나라의 경리(經理)인 양공 호(楊公鎬)가 평양(平壤)에 도착한 뒤에 우리나라의 군병과 성지(城池)와 기계(器械)의 현황을 물으면서 3조(曹)의 상서(尙書)가 직접 와서 설명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조정이 매우 고민한 끝에 공에게 가서 각 조(曹)의 일을 답변하도록 하자, 공이 길을 떠나 봉산(鳳山)에 이르러서 경리를 만나 수행하고 돌아왔다.

이때 왜적이 침입하여 직산(稷山)까지 왔다가 중국 장수인 마 제독(麻提督 마귀(馬貴) )에게 패하여 돌아가자 제독이 추격하였는데, 마 제독의 접반사(接伴使)인 장공 운익(張公雲翼)이 종사관을 지명할 때마다 사람들이 모두 꺼리면서 피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공에게 이르자 공이 즉시 그날로 길을 떠나 전주(全州)까지 왔는데, 승문원이 또 공이 문서를 주관한다면서 상에게 소환하도록 청하였다. 언젠가 공이 양 경리(楊經理)에게 보내는 게첩(揭帖)을 지은 적이 있었는데, 상이 이를 보고서 하문하기를 “이 글이 매우 잘되었다. 누가 작성한 것인가?”라고 하기도 하였다.

10월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임명되고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을 겸하였다. 공이 일찍이 입직하고 있을 적에 중국 장수인 양 안찰(梁按察)이 졸지에 대궐로 오자 선묘가 어쩔 줄 모르고 나가서 영접하였다. 그런데 어전 역관(御前譯官)을 부를 틈이 없었으므로, 정원(政院)에서 사정이 급하게 되었으니 이모(李某)를 입시(入侍)하게 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선묘가 공에게 하문하기를 “그대가 이 일을 잘 처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왕복하면서 말을 전하였다. 그리하여 그 회동이 끝날 때까지 매우 풍부한 어휘로 빈틈없이 통역을 하자, 안찰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춘방(春坊)의 학사(學士)가 어쩌면 이렇게도 중국 말을 잘하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선묘도 승지에게 이르기를 “이모가 이렇게까지 다재다능할 줄은 내가 생각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공이 오래도록 당로자의 미움을 받아 언제나 산직(散職)에 배치되곤 하였다. 그러나 특별히 문학으로 임금의 인정을 받은 결과, 하루아침에 3품의 준직(準職)을 제수하라는 명을 받고 장악원 정(掌樂院正)이 되었다. 당시에 공의 자급(資級)이 통덕랑(通德郞)이었으니 무려 일곱 계단을 뛰어오른 것이었다. 무술년(1598)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 승문원이 아뢰기를 “예전에 승지는 본원의 제조(提調)를 겸할 수 없었습니다마는, 문재(文才)에 능한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여기에 구애받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하여, 공을 부제조(副提調)로 삼게 하였다.

관왕묘(關王廟)가 낙성되자 중국 장수가 제사를 올리러 가면서 출발할 즈음에야 상에게 함께 제사를 올리자고 청하였으므로 상이 창졸간에 행행하게 되었다. 여기에 필요한 제문(祭文)을 마련해야 했는데, 승여(乘輿)에 이미 멍에를 멘 상태에서 유사(有司)가 지제교(知製敎)를 불러올 것을 청하니, 선묘가 특명을 내려 공에게 작성하도록 하였다. 이에 공이 명을 받들어 그 즉시로 지어 올렸는데, 그 내용 중에 “봉황 같은 눈에 용 같은 수염의 그 모습, 지금도 삼연히 눈에 보이는 듯한데, 적토마 타고 언월도 들고서, 지금 막 격전 치르고 돌아오셨네.〔鳳眼虯髥 森然若見 赤兎偃月 新回酣戰〕”라는 등의 구절이 있었다. 선묘가 이 제문을 보고는 크게 칭찬하며 비단을 상으로 내렸다. 그 뒤에 상이 양 유격(楊遊擊)을 친히 제사 지낼 때의 제문과 경리(經理)에게 답하는 게첩(揭帖)도 모두 공에게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는데, 그때마다 비단을 하사하였다.

병으로 체직(遞職)되고 나서 병조 참지(兵曹參知)를 임명받았다. 상이 중국 장수를 접견할 때마다 공이 어전에서 통역하는 임무를 띠고서 입시하곤 하였는데, 당시에 중국 장수들이 도성 안에 가득하였으므로 그들을 만나는 일이 날마다 이어졌다. 또 대제학의 자리가 오래도록 비어 있는 상태에서 승문원이 수답(酬答)해야 할 일들이 날이 갈수록 많아졌는데 이 모두를 공에게 위임하였다. 그래서 공이 분주하게 중국 장수들을 만나는 한편으로 문서를 작성하여 응수해야 했는데, 문서를 짓는 것도 대부분 복잡하고 소란한 공청(公廳)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어떤 때는 입으로 불러 주면서 바로 작성하게 하기도 하고 밤부터 새벽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공이 언젠가 병이 들어서 며칠 동안 대궐에 나아가지 못하자, 선묘가 “요즈음 이모(李某)는 어디에 갔는가?”라고 하문하기까지 하였으니 공을 돌보아 줌이 이와 같았다. 그리고는 특별히 내구마(內廐馬)와 마장(馬裝)을 하사하니, 공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謝恩)하였다.

형 군문(邢軍門 형개(邢玠) )의 생일에 공이 왕명을 받고 하첩(賀帖)을 지어 올렸는데, 그중에 “오늘은 세상에 태어나신 날, 시절도 바로 구월이로세. 고요한 대낮의 원문에는 북해의 술통이 항상 가득하고, 맑은 가을날 막부에는 남루의 흥치가 얕지 않도다.〔屬玆初辰 時維九月 轅門晝靜 北海之樽常盈 幕府秋淸 南樓之興不淺〕”라는 등의 구절이 있었다. 선묘가 이것을 보고는 크게 기뻐하면서 별도로 1본(本)을 베껴서 안에 들이도록 하고 상으로 비단을 하사하였다. 삼공(三公)이 상에게 아뢰어 비국(備局)의 제조를 겸하게 하였는데, 통정(通政)의 자급으로 제조가 되는 규례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중국의 병부 주사(兵部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우리나라를 무함하는 주본(奏本)을 올리면서, 왜국을 유인해 중국을 침입하려 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는 별의별 자료를 끌어 모아 견강부회(牽强附會)하며 못할 짓이 없이 하더니, 급기야 우리나라가 조(祖)라고 칭하고 종(宗)이라고 칭하는 것을 대죄(大罪)로 거론하였다. 이에 황상이 오부(五府)와 구경(九卿)과 과도관(科道官)에게 명하여 토의하여 보고하라고 명하였다. 선묘가 정전(正殿)을 피하고 짚자리를 깔고서 대죄(待罪)하며 한 달이 넘도록 조회를 보지 않는 가운데, 온 조정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분개하며 원통하게 생각하였다. 선묘가 진주사(陳奏使)를 가려 보내도록 명하는 한편, 글을 잘하는 몇 사람을 뽑아서 각자 주문(奏文)을 작성해 올리도록 하였는데, 마침내는 공이 지은 글을 채택해서 쓰기로 하였다.

공은 정응태가 무함한 것에 대해 하나하나 분명하게 해명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 임금의 호칭을 조와 종으로 했다는 대목에 대해서는 “소방(小邦)은 바다 밖에 멀리 외따로 떨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삼국 시대 이래로 예의(禮義)와 명호(名號)를 정할 때에 중국을 사모하고 본받으려 한 나머지 비슷하게 본뜨려 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선신(先臣) 강헌왕(康獻王 태조(太祖) ) 때에 이르러 그동안 잘못 써 왔던 것들을 일체 바로잡아 자손에게 전해 주면서 금석(金石)처럼 굳게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임금에 대한 이 칭호만큼은 신라와 고려 때부터 시작되어 계속 이런 오류를 범해 오고 말았으니, 이는 대개 나라 안의 신민(臣民)들이 예전의 잘못된 습관을 답습한 나머지 그대로 따르기만 할 뿐 미처 고칠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는 실로 무지한 탓으로 망녕되게 행한 죄라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마는, 만약 이를 두고 참절(僭竊)했다고 한다면 이는 소방의 본마음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재상인 유공 성룡(柳公成龍)이 말하기를 “조라고 칭하고 종이라고 칭했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크게 관계되는 문제인데 이제 사실대로 털어놓는다면 헤아릴 수 없는 화를 당할 염려가 있다. 따라서 아예 빼 버리고 거론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조정의 의논이 오래도록 귀결되지 않았다. 이에 선묘가 수교(手敎)를 내리기를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다. 꺼릴 일이 뭐가 있겠는가. 이 일 때문에 죄를 받아야 한다면 나의 입장에서는 본디 기꺼이 받아야 할 것이다. 이 주문의 내용 그대로 진달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진주사(陳奏使)인 우상(右相) 이공 항복(李公恒福)이 응교(應敎)인 신흠(申欽)이 문사(文辭)에 능하니 서장관(書狀官)으로 데리고 가게 해 줄 것을 계청하자, 선묘가 답하기를 “내 생각에 오늘날 사명(詞命)을 훌륭하게 행할 자로는 이모(李某)만 한 이가 없다. 그의 문장을 보면 속마음을 곡진하고 간절하게 모두 토로하고 있을뿐더러 그의 사람됨이 또한 상당히 계모(計謀)가 있으니, 부사(副使)로 승격시키거나 별도로 대동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공이 또 아뢰기를 “신도 원래는 이모를 데리고 갈 수 있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모가 현재 승문원 제조의 신분으로 문서를 전담하고 있기 때문에 신흠을 청했던 것입니다. 지금 내리신 전하의 분부야말로 신 등이 원하면서도 감히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을 승진시켜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임명하고 부사로 차출하도록 명하였는데, 공이 연소한 나이에 단계를 뛰어넘어 승진했다는 이유로 사양하니, 상이 답하기를 “임금이 인재를 쓰는 도리가 어찌 연령이나 자급에 있겠느냐. 이 부사의 직책은 경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나라의 일이 매우 급하니 경은 응당 사양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기해년(1599, 선조 32)에 경사(京師)에 가서 상주(上奏)한 다음 구경(九卿)ㆍ육과(六科)ㆍ십삼도(十三道)ㆍ육부(六府)의 아문(衙門)에 정문(呈文)하였는데, 하루 동안 작성한 정문이 39본(本)이나 되었다. 또 각로(閣老) 이하 여러 관아에 출입하면서 모두 정문을 갖춰 해명하였는데, 그것도 모두 공이 작성한 것이었다.

천자가 주문(奏文)을 조정 신하들에게 내려 토의하게 하였는데, 그들이 주문을 읽어 내려가다가 조(祖)와 종(宗)의 칭호에 대해 설명한 대목에 이르러 모두 감탄하며 말하기를 “정말 솔직한 말이다. 임금에게 숨김없이 고한 것을 보니, 조선은 확실히 예의(禮義)의 나라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헌의(獻議)하기를 “주문이 명백하고 통쾌해서 읽어 내려가는 동안에 눈물이 고여 뚝뚝 떨어지려고까지 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천자가 유지(有旨)를 내리기를 “짐이 어찌 일개 소신(小臣)의 사적인 분노와 근거 없는 고자질 때문에 속국의 군민(軍民)이 눈물로 호소하는 간절한 정상(情狀)을 생각해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응태(丁應泰)는 거동이 어긋나고 잘못되었다. 위협을 가하며 탄핵을 하여 하마터면 대사를 그르칠 뻔했으니, 관적(官籍)을 회수하고 신문하도록 하라. 조선 국왕에게는 해부(該部)가 이자(移咨)하여 위유(慰諭)함으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보살펴 주려는 짐의 덕의(德意)를 알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 소식이 먼저 이르자 조야(朝野)가 환호하였다. 우리나라에 온 중국의 장관들도 대궐에 들어와 축하하면서 그 주문의 문장이 좋다고 모두 칭찬하였다. 호남(湖南)의 사인(士人)인 노인(魯認)이 표류하여 소주(蘇州)와 항주(杭州) 지역에 이르렀다가 돌아와서는 말하기를 “그 지역의 사자(士子)들이 많이 그 주문을 전해 가며 베끼고 있다.”라고 하였다. 공이 복명(復命)하자 선묘가 편전(便殿)에서 접견하고는 가자(加資)를 명하고 노비와 전결(田結)을 하사하였다.

비국(備局)의 유사당상(有司堂上)을 겸하였다. 조정이 북병사(北兵使)가 올린 계책에 따라 장차 야인(野人)을 정벌할 목적으로 관서(關西)와 관북(關北)의 정예 군사를 뽑게 하자 중외(中外)가 크게 소란해졌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 불가한 점을 극력 진달하니, 선묘가 답하기를 “내가 경이 재주가 있다는 것은 대강 알고 있었다마는 지혜가 보통보다 훨씬 뛰어나서 적의 상황을 손바닥 안에 놓고 들여다보는 것처럼 훤히 알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더군다나 남이 듣기 싫어하는 직언(直言)을 극력 말하였으니, 이는 또 보통 사람으로서는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나는 이런 인재가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 자랑스럽기만 하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비국에 유지를 내려 그 일을 정지하게 하니, 조야가 손뼉을 치며 기뻐하였다.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임명되었다. 그 뒤에 전조(銓曹)가 공을 경기 감사(京畿監司)에 의망(擬望)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이모는 대제학에 추천된 사람이다. 제학을 제수하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하였다. 상이 언젠가 경리(經理)를 접견할 적에 분부하기를 “이번에 접견하는 일이 심상하지 않으니 이모(李某)가 입시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 뒤에도 공이 계속해서 입시하자, 상이 또 분부하기를 “전에 이모에게 입시하도록 명한 것은 경리가 국가의 추기(樞機)에 관한 일을 혹시 물어볼까 염려해서였다. 다른 중국 장수들을 접견할 때에는 매번 입시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고 비단을 하사하였다.

뒤에 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가 결원(缺員)이 되자, 전교하기를 “이러한 때에 탁지(度支)의 장관은 재기(才器)가 합당하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우니 직질(職秩)을 따지지 말고 묘당(廟堂)에서 십분 가려 천거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공을 제수하였는데, 공이 사직해도 허락하지 않다가 다시 병으로 잇달아 사직하니 체직을 허락하였다. 그런데 그 이튿날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대신(大臣)이 회계(會啓)하기를 “이러한 때에 탁지의 장관은 다른 사람이 해낼 수가 없으니 이모를 그대로 임명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어찌할 겨를도 없이 입조(入朝)하여 곡림(哭臨)하고 나서 곧바로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를 겸임하게 되었다.

이때 국가의 비축 물자가 고갈되었기 때문에 염빈(斂殯)에 필요한 의복과 비단 등을 모두 시장에서 구해야만 하였다. 공의 생각에 관아에서 물품을 구입할 때마다 시장 백성들이 응하려 하지 않는 것은 즉시 값을 지불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해사(該司)에 보관 중인 은을 꺼내어 먼저 시장 백성들에게 지급하게 하니, 시장 백성들이 환희하면서 다투어 납부하겠다고 나섰다. 도감이 필요로 하는 물품이 매우 많았는데 하리(下吏)가 조종(操縱)하여 시장 백성들을 날마다 도감에 모이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고달프게 여겼다. 이에 공이 시장 백성들에게 모일(某日)에 각자 도감에 필요한 물품을 지참하고 일제히 모이도록 하고, 다른 날은 와서 기다리는 일이 없게 하였다. 그리고는 기약한 날짜가 되자 공이 도감에 앉아서 예전에 사용했던 의궤(儀軌)의 장부를 열람하며 백성들이 납부하는 물품을 살펴보고는 쓸 만한 것은 취하고 쓸 수 없는 것은 바꾸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한나절 만에 허다한 물품을 모두 조치하여 마련하니, 해조(該曹)도 비용을 절감하고 시장 백성들도 기뻐하였다.

8월에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였다. 10월에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자리를 옮겼다. 발인(發引)할 때 명을 받고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다. 도감의 제조 신분으로 산릉(山陵)에 갔는데, 하관(下棺)하기 전날 밤 영악전(靈幄殿)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재궁(梓宮)은 다행히도 모시고 나왔으나, 호행(扈行)한 백관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허둥지둥하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에 공이 각종 의물(儀物)을 맡은 사람들에게 각자 자기 물건을 챙겨서 피하고 다른 사람의 의물은 손대지 말도록 하였다. 이때 밤 시간이 벌써 반을 넘겼는데, 하현궁(下玄宮)할 시각은 인정(寅正 오전 4시 )으로 잡혀 있었다. 불을 진화한 다음에 각종 의물을 맡은 사람들을 소집하여 장부와 대조해서 점검해 보니 하나도 유실된 것이 없었다. 이에 즉시 낭관(郞官)으로 하여금 조정에 아뢰어, 세자(世子)가 백관을 인솔하고 곡림을 하고 위안제(慰安祭)를 행할 절목(節目)을 정하게 한 뒤에 광해(光海)의 악차(幄次)와 총호사(摠護使)인 이상 헌국(李相憲國)이 있는 곳에 가서 보고하였다.

이상(李相)이 처음에는 공이 이와 같이 조처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애를 태우며 공을 만나 보려고 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불을 끄느라 소란스러웠으므로 지척에 있으면서도 찾지를 못하였다. 그러다가 공을 보고는 붙들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고 하였는데, 공이 자세히 대답을 하니 이상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대와 같은 사람을 예판(禮判)으로 얻었으니 내가 무슨 걱정을 하겠소.”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삼공(三公)과 상의하여 재궁(梓宮)이 있는 곳에 악차(幄次)를 만든 뒤에, 광해(光海)에게 백관을 인솔하여 곡림하고 위안제를 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하현궁을 제시간에 맞춰서 행하게 되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오늘 불행히도 변고를 당했지만 각종 길흉(吉凶)의 의물들은 모두 손상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혹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뒷말을 할 걱정도 있으니, 삼사(三司)와 육경(六卿) 등 여러 관원들에게 점검해 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니, 삼공이 모두 동의하였다. 이에 마침내 여러 관원들을 모이게 해서 자세히 살펴보게 한 뒤에 의례(儀禮)대로 봉분(封墳)을 하였다.

신축년(1601, 선조 34) 정월에 세자시강원 우빈객(世子侍講院右賓客)을 겸하였다. 일찍이 연중(筵中)에서 김공 상용(金公尙容)이 대사간(大司諫)의 신분으로 아뢰면서 “궁금(宮禁)이 엄숙하지 못한 탓으로 청탁이 멋대로 행해져서 관작(官爵)과 형옥(刑獄)까지도 외부의 사람들이 개입하여 의논하는 일을 면치 못하고 있으며, 왕자(王子)가 의롭지 못한 일을 자행하고 있다.”라는 내용으로 극론(極論)하니, 상이 진노하여 이르기를 “그대는 간관(諫官)인데 어찌하여 모두 말해서 탄핵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하자, 좌우의 신하들이 겁에 질려서 감히 말하지 못하였으며, 혹자는 김공이 오활하고 고지식해서 실언(失言)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상용의 말이야말로 강직한 신하의 말이지 실언이 아닙니다. 상께서 응당 체념(體念)하시어 그런 일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지금 간관에게 어찌하여 모두 말하지 않느냐고 하교하신 것 역시 위대한 말씀입니다. 신하가 충직한 말을 아뢰자 임금이 제대로 포용해 줌은 물론이요 여기에 또 모두 말하게끔 하였고 보면, 간관의 입장에서는 직언(直言)하는 것이 바로 그의 직분이니 누군들 정성을 다하여 모두 말씀드리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상의 뜻이 조금 풀리면서 이르기를 “나에게 그와 같은 일은 없었다마는 궁중을 다시 경계시키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다.

5월에 병으로 체직되었다. 8월에 다시 예조 판서에 임명되고 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하였다. 경서(經書)를 언해(諺解)하는 작업을 임진왜란 이전에 시작했다가 끝내지 못하였는데, 선묘(宣廟)가 다시 청(廳)을 설치하고 경학(經學)에 능한 신하들을 널리 선발하여 지어 올리도록 하니 공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10월에 대제학에 임명되었다. 공이 세 차례나 사양하니, 상이 답하기를 “문형(文衡)의 직임은 다사(多士)의 의표(儀表)가 되고 나라의 종장(宗匠)이 되는 자가 맡아야 한다. 경의 문장이나 재덕(才德)으로 볼 때 어찌 감당할 수 없겠는가.”라고 하였다.

조사(詔使) 고천준(顧天俊)과 최정건(崔廷健)이 황태자를 책봉한 조서(詔書)를 반포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오자 공을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는데, 공이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박동열(朴東說)ㆍ이안눌(李安訥)ㆍ홍서봉(洪瑞鳳)을 종사관으로 삼고, 김현성(金玄成)ㆍ차천로(車天輅)를 제술관(製述官)으로 삼고, 권필(權鞸)을 백의(白衣)로 종사하게 하고, 한호(韓濩)를 가평 군수(加平郡守)에서 체직시켜 종사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전하는 ‘막부(幕府)의 성대한 문회(文會)’로서 예전에는 있지 않았던 일이다. 공이 조정을 하직하자 선묘가 인견(引見)하고는 호피(虎皮) 등의 물품을 하사하는 한편 머리에 쓰고 있던 초모(貂帽)를 손수 벗어 주기까지 하였는데, 공이 무릎을 꿇고 받들어 물러나니 그때까지도 상의 땀이 초모에 배어 있었다. 공이 이 초모를 종신토록 머리에 쓰고는 다 해져 너덜너덜 해져도 바꾸지 않았으며 세상을 떠나던 날에도 착용하고 있었다.

도성을 나가는 즉시로 사직을 하였으니, 그 이유는 예조의 업무가 많아서 오래도록 비워 둘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공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이배(移拜)하였다. 용만(龍灣 의주(義州) )에 도착하였으나 조사(詔使)가 제때에 오지 않아 석 달을 그곳에 머무르며 기다렸다. 이때 정인홍(鄭仁弘)의 당인(黨人)인 영남 사람 문경호(文景虎)가 상소하여 우계(牛溪 성혼(成渾) )를 공격하면서 우계의 여당(餘黨)이 아직도 관작을 보유하고 있다고 헐뜯자 제공(諸公)이 견책을 받고 파면되는 일이 줄을 이었다. 이에 공이 잇달아 소장을 올려 해직을 청한 결과 체차(遞差)되어 평양 영위사(平壤迎慰使)가 되었다. 그리고 조정에 돌아와서 문형을 사직하였는데 누차 사직한 끝에 체차되었고, 또 경연의 빈객(賓客)도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임인년(1602) 8월에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 효경전(孝敬殿)의 2주년 뒤의 제사 때에 태묘(太廟)의 음악을 사용하고 희생(犧牲)으로 태묘의 생체(牲體)를 나누어 쓰자, 공이 말하기를 “3년이 지난 뒤라도 아직 부묘(祔廟)하기 전에는 별묘(別廟)를 세운 뒤에 문소전(文昭殿)에서 생전(生前)에 썼던 물품으로 제사 지내는 규례를 따라야 마땅한데, 어떻게 태묘의 음악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생체를 나누어 쓰는 예법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니, 대신이 모두 옳다고 수긍하여 마침내 개정하였다.

전대(前代) 충현(忠賢)의 묘소에 치제(致祭)할 때 쓰는 제문(祭文)의 양식을 의정(議定)하면서, 정포은(鄭圃隱 정몽주(鄭夢周) )에 대해 ‘고려 시중 정공의 묘〔高麗侍中鄭公之墓〕’라고만 칭하고 이름은 부르지 말게 할 것을 청하자 선묘가 난색을 표하였다. 이에 공이 또 아뢰기를 “윗사람의 신분으로 아랫사람을 공경하는 것을 존현(尊賢)이라고 말하는데, 현자를 위해서 몸을 굽히는 것은 성스럽고 밝은 제왕의 성대한 일에 속합니다. 정모(鄭某)로 말하면 사문(斯文)에 공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본조(本朝)에 대해서도 신하로 섬기지 않은 의리를 보여 주었으니, 어찌 그의 묘소 앞에서 이름을 부르게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상이 따랐다. 공이 또 노산(魯山 단종(端宗)의 강봉(降封)된 칭호 )과 연산(燕山)의 후사(後嗣)를 세우자고 청하였으나, 그 의견은 끝내 행해지지 못하였다.

공이 일찍이 세자가 오래도록 중국 조정의 책봉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사신을 가려서 주청(奏請)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대신이 이에 따라 주청사(奏請使)를 보내기를 청하였는데, 여러 차례 바뀌었다가 결국에는 공이 명을 받고 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천재(天災)가 일어나서 상이 구언(求言)하자 공이 이 유지(有旨)에 응하여 만언(萬言)의 봉사(封事)를 올리면서, 군정(軍政)을 닦아 무비(武備)를 단속하고, 기강을 진작시켜 국체(國體)를 존엄하게 하고, 인심을 결속시켜 화기(和氣)를 불러오고, 언로(言路)를 열어 주어 훌륭한 계책들이 모여들게 하고, 공도(公道)를 넓혀 인재를 널리 수습하고, 실덕(實德)을 닦아 하늘의 꾸지람에 응하도록 청하였다.

공이 중국으로 떠날 적에 조정이 이자(移咨)하여 밀운(密雲) 군문(軍門)에 도움을 구하였으므로 승문원의 요청에 따라 역관(譯官) 1인을 더 보내게 되었는데, 공이 돌아왔을 적에 대관(臺官)이 권신(權臣) 유영경(柳永慶)의 뜻을 떠받들어 공이 제멋대로 역관을 더 데리고 갔다고 논계(論啓)하였다. 그런데 선묘가 당초에 승문원의 계청에 의한 것임을 살피지 못하고서 그만 답하기를 “지혜로운 자도 천 가지 생각 가운데 한 가지 실수는 반드시 있는 법이다. 어찌 우연한 실수를 가지고 재신(宰臣)에게 함부로 죄를 줘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끝내 윤허하지 않았으나, 공이 이 일로 인하여 불안하게 여긴 나머지 외방으로 나가기를 극력 청하였다. 그리하여 을사년(1605) 3월에 경기 감사에 임명되었다.

선묘가 사신(詞臣) 6, 7인을 선발하여 찬집청(纂集廳)을 설치하고 동국(東國)의 시문(詩文)을 가려 뽑으라고 명하였다. 윤공 근수(尹公根壽)와 이공 호민(李公好閔) 등이 아뢰기를 “이모(李某)를 이 일에 참여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백(畿伯)이 비록 외관(外官)이라고는 하더라도 항상 도성 안에 있으니, 파격적으로 찬집청 당상에 임명하여 함께 참여하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정포은(鄭圃隱)의 묘소가 용인(龍仁)에 있었으므로 공이 뜻을 같이하는 제공(諸公) 및 여러 유생들과 의논하고는 감영(監營)의 봉록(俸祿)을 출연하여 서원(書院)을 세웠는데, 그 일이 알려지자 상이 충렬(忠烈)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또 마전(麻田)의 숭의전(崇義殿)이 난리를 겪은 뒤에 퇴락하여 목주(木主)가 담벼락 사이에 버려졌으므로 공이 또 봉록을 출연하여 수선하고는, 향축(香祝)을 보내어 제사를 올리도록 하고 후손인 왕곤(王鵾)을 전감(殿監)으로 삼게 해 줄 것을 계청하였다. 또 죽산산성(竹山山城)과 수원산성(水原山城)을 보수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실록청(實錄廳)과 춘추관(春秋館)ㆍ의금부(義禁府)의 지사(知事)를 겸하였다. 그때 반궁(泮宮) 복도의 벽에 당로자(當路者)의 숨겨진 악행을 폭로하고는 탁란조정방(濁亂朝政榜)이라고 써 놓은 사건이 발생하자, 상이 진노하여 관관(館官)과 관노(館奴) 10여 인을 국문(鞫問)하여 벽에 써 붙인 사람을 찾도록 명하였다. 이에 유사(儒士) 3인이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죄목에 걸려 옥사가 일어나자 사람들마다 의구(疑懼)하며 중외(中外)가 불안에 떨었는데, 관관과 관노가 많이 죽었는데도 끝내 방(榜)을 붙인 사람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공이 여러 차례나 사람들을 곤경에서 구해 주었는데, 선묘가 추관(推官)에게 명하여 각자의 소견을 진달하게 하자 공이 또 이 옥사에서 억울하게 걸려든 사람들의 정상을 극력 진달하니, 상이 마침내 모두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일본이 사형수를 우리나라에 묶어 보내고는 임진년 당시에 능침(陵寢)을 범한 도적이라고 사칭하면서 화의(和議)를 청하였다. 이에 유영경(柳永慶)이 종묘에 고하고 진하(陳賀)하려고 하니, 공이 차자를 올려 그 불가함을 논하였다. 이때 권신(權臣)이 권력을 전횡하면서 자기 뜻대로 거리낌 없이 행하자 공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겸대한 직책을 모두 사체(辭遞)하고 서추(西樞)의 관직만 지닌 채 한 해가 다 가도록 침묵을 지키며 두문불출하였다. 그리고는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다시 지춘추관사를 겸하고 호조 판서가 되었다.

무신년(1608) 2월 1일에 선종대왕(宣宗大王)이 승하(昇遐)하였다. 공이 호판(戶判)의 신분으로 관례에 따라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의 직책을 겸하였으며, 또 행장찬집청(行狀撰集廳)의 당상(堂上)을 겸하여 행장을 지어 올렸다.

3월에 병조 판서로 천임(遷任)되었다. 국상 초기부터 계속해서 궁성을 호위하게 하였으므로 장사(將士)들이 야영(野營)을 하면서 고달픈 생활을 원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 해산시키자고 감히 청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공이 반복해서 진달하니 그날로 즉시 해산시키게 하였다. 난리를 치른 뒤에 군공(軍功)을 세우고 납속(納粟)을 하여 부장(部將)이 된 사람들 이하를 대상으로 교대로 상번(上番)시키면서 ‘일삭 금군(一朔禁軍)’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군병은 누구를 막론하고 군보(軍保)가 있었는데도 이 사람들에게는 군보가 없어서 자기들이 직접 양식을 싸 가지고 와서 상번을 하였으므로 군정(軍情)이 매우 고달프게 여겼다. 이에 공이 아뢰어 그들을 해산시켜 보내고, 단지 집에 있으면서 조련(操鍊)을 받다가 일이 발생할 경우에 부방(赴防)하게 하고는 그 이름을 의용대(義勇隊)라고 하였다. 그리고 내삼청(內三廳)에 소속된 참하관(參下官)들이 적체 현상을 보이자,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의 자리를 더 설치해서 그들이 승진되어 옮겨 갈 수 있는 길을 넓혀 주었다.

사제(賜祭)하기 위해 중국 사신 웅화(熊化)가 장차 올 예정이었으므로 공이 관반(館伴)이 되었다. 뒤에 또 세자시강원 우빈객과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ㆍ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ㆍ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ㆍ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를 겸하였다. 발인(發引) 때에 소요되는 군인이 무려 6000여 명에 달했는데 으레 외방에서 징발하곤 하였으므로 원도(遠道)의 농민이 왕래하다 보면 생업을 잃기 일쑤였다. 이에 공이 경중(京中)의 방리(坊里)에서 동원하여 그들을 대신하게 하고는 이를 정식으로 삼았는데, 그 뒤에 상을 당할 때마다 모두 이를 준행하였다. 행장을 지어 올린 공으로 가자(加資)되어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

웅화(熊化)가 와서 서로 만나 보고는 공에게 시를 증정하자 공이 즉시 차운(次韻)하니, 그가 크게 찬탄하면서 소첩(小帖)에 써서 역관(譯官)에게 보여 주며 말하기를 “글자 하나하나에 당나라 시인의 넋이 깃들어 있다.”라고 하였다. 관소(館所)에 머문 10여 일 동안 공에게 편복(便服) 차림으로 사적인 술자리에 들어오게 하여 시주(詩酒)로 환담을 나누면서 속마음을 모두 토로하였는데 말할 때마다 반드시 선생이라고 칭하곤 하였다. 작별할 무렵에는 애틋한 정을 이기지 못해 차마 헤어지지 못하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황화집(皇華集)》의 서문으로 봉황이 나는 것 같은 글을 얻고 싶다.” 하면서 공에게 지어 주기를 청하였는데, 공이 “국왕의 명이 있어야 하니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라고 일단 사양하였으나, 결국에는 왕명을 받들어 그 글을 지어 주었다.

태감(太監) 유용(劉用)이 뒤이어 우리나라에 왔다. 김수(金晬)가 호판(戶判)의 신분으로 이미 관반(館伴)이 되었으나, 광해(光海)가 특별히 공을 불러서 접대할 일을 함께 의논하도록 하였다. 태감이 도중에서 재물을 셀 수 없이 요구하자,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민간에 비축된 은(銀)을 긁어모으고 또 창고의 미곡을 꺼내어 그것으로 구매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웅 조사(熊詔使)가 은과 삼(蔘)을 가지고 가지 않아서 도감에 비축된 것이 있으니, 유용이 비록 형편없이 군다 할지라도 이미 마련한 은으로 충분히 대접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바야흐로 가뭄의 재앙이 참혹해서 백성들이 장차 죽음의 구렁에 빠져 들게 되었으니, 묘당(廟堂)에서 급급하게 강구해야 할 것은 백성을 살리고 기민(飢民)을 진휼하는 데에 있습니다. 접대하는 문제는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고사에 따르면 제주(濟州)에서 전복(全鰒)을 구매하는 것이 수천 첩(貼)에 이르렀는데, 차인(差人)꾼이 반값만 지불하고서 사 오곤 하였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절도(絶島)의 백성들이 원망과 고통이 필시 많을 것입니다. 예전에 구매하여 지금 남아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접대용으로 쓸 수 있는데, 더군다나 조사가 꼭 전복을 찾는다는 보장도 없는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설령 조사가 전복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것을 대신 주면 될 것이니, 더 구매하는 일은 중지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이미 보낸 절반의 물품 값 역시 환수하지 말도록 하여 전일에 억지로 팔게 했던 일을 보상해 주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광해가 따랐는데 그 뒤에 과연 전복의 용도에 부족한 점이 없었다. 그리고 제주 백성들이 깊은 바다 속에서 전복을 따다 보면 왕왕 죽는 자도 나오곤 하였으므로 더 구매하라는 명이 내려오면 목을 매어 죽으려고까지 하였는데, 그 명을 도로 취소하는 동시에 절반의 물품 값도 환수하지 않도록 했다는 말을 듣고는 온 섬 백성들이 고무되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또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접대도감(接待都監)에 복역하게 하는 인원으로 으레 외방에서 조발(調發)하는 숫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고 말 역시 100여 필이나 되었다. 이에 공이 외방에서 올라올 사람들에게 포목을 약간 거두어 경성에서 일꾼을 고용하자고 건의하니, 중외가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쓰고 남은 포목이 또한 매우 많았으므로 이것을 가지고 외병조(外兵曹)의 건물을 짓기까지 하였다.

누차 정고(呈告)하여 체직을 허락받고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말미를 청하여 선영에 성묘하고 돌아와서 기전(畿甸)의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고달픈 상황을 진달하고는, 또 아뢰기를 “백성들에게 이전(移轉)해 주는 곡식은 예전부터 내용물이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혹은 부패해서 먹을 수 없는 것도 있고, 혹은 흠축(欠縮)이 생겨서 수량이 줄기도 하기 때문에 백성은 많은데 곡식은 적은 관계로 백성들이 받는 양이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곡식을 받는 곳이 멀리 떨어진 경우에는 4, 5식(息 1식은 30리 )이나 되는 곳도 있어서 양식을 싸 가지고 왕래하다 보면 며칠이 금방 지나가곤 하는데, 여기에 또 간악한 관리들이 그들을 침탈하기 때문에 끝내는 곡식 자루도 채우지 못한 채 그냥 돌아가는 백성들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곡식을 옮겨서 기민(飢民)을 진휼하는 것이야말로 왕정에서 급선무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 폐단이 그만 거꾸로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지금은 단지 백성들에게 마구 부과하는 잡다한 부역(賦役)들을 모두 없애어 그들이 힘을 좀 펼 수 있게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상수리 열매나 콩잎이라도 편안히 앉아서 먹을 수 있게만 해 준다면 이것이 바로 기민을 구제하는 상책(上策)이라고 할 것인데, 만약 그들을 동요시킨다면 구제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선혜청에서 거둘 곡식을 지금 한창 납부하라고 독촉하고 있는데, 금년에 흉년이 들어서 마련해 내기가 필시 어려울 것입니다. 가을인 지금도 이미 이와 같으니 하물며 내년 봄은 또 어떠하겠습니까. 통영(統營)의 둔조(屯租) 수만 석(石)과 제반 작미(作米)한 것들을 진휼용으로 현재 선운(船運)해 오고 있는데, 이 곡식들은 우선 나누어 주지 말고 선혜청으로 옮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경기 백성들이 금년 가을과 내년 봄에 납부해야 할 곡식을 모두 감면케 해 준다면, 왕래하며 헛수고하는 폐해가 없게 될뿐더러 납부하라고 독촉하며 수고하는 괴로움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광해가 따랐다.

실록청(實錄廳)의 도청 당상(都廳堂上)을 겸하고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 이때 공이 아뢰기를 “병란(兵亂)을 당했을 때에 사절(死節)한 사녀(士女)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충신과 열부(烈婦)와 효자에 대해 각 도(道)에서 보고해 온 문서가 계속 쌓여 권축(卷軸)을 이루고 있습니다. 신이 신축년(1601, 선조 34) 연간에 본조(本曹)에 재직하면서 선왕(先王)의 하교를 직접 받들고 등급을 나누어 하나의 책자로 만들었는데 그중에 절부(節婦)가 특히 많았습니다. 보고된 자들은 모두 한 고을의 공론(公論)이라고 할 것인데, 그중에는 혹 잘못 알려진 나머지, 이름이 실제 내용보다 지나친 경우도 있겠지만, 사람은 미천해도 실제 내용이 그 이름보다 더한 경우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왜적의 칼날이 거의 나라 전체에 미친 상황에서 사절한 사녀가 몇 백 명을 넘는다고 하더라도 많다고는 할 수 없으니, 지금 새로 교화와 치리(治理)를 펼치는 날을 당하여 이들에게 똑같이 정표(旌表)하는 상을 내리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노산군(魯山君)의 분묘(墳墓)가 영외(嶺外) 멀리 황량한 땅에 있는데, 비록 사절(四節)마다 본관(本官)이 품관(品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설행하게 한다 해도 허술하기 짝이 없고, 부인의 분묘는 양주(楊州)에 있는데 벌채하고 방목하는 일을 금하지 않고 있을뿐더러 향화(香火)도 단절된 상태입니다. 예로부터 제왕은 비록 전대(前代)의 멸망당한 임금이라 할지라도 모두 숭봉(崇奉)하고 향사(享祀)하는 의전을 거행하였습니다. 따라서 지금 별도로 사우(祠宇)를 세워 신주(神主)를 받들게 한 뒤에 매년 한식(寒食)과 두 기일(忌日)에는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설행하게 하고, 사절(四節)에는 수령이 직접 분묘가 있는 곳에 가서 제사 지내도록 하는 한편 다시 봉식(封植 봉분을 높이 쌓고 나무를 심는 것 )을 가하고 분묘를 지키는 인원을 더 늘려 배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니, 광해가 모두 따랐다.

선묘(宣廟)의 삼년상을 마치고 부묘(祔廟)할 적에 고사에 따라 의인왕후(懿仁王后)에게 휘호(徽號)를 더 올리려고 하였다. 이때 심상 희수(沈相喜壽)가 아뢰기를 “이미 생시의 존호(尊號)가 있으니 더 휘호를 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공이 아뢰기를 “왕후는 부묘할 때에 으레 네 글자의 휘호를 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선종대왕(宣宗大王)에게 존호를 두 차례 올린 일이 있어도 이미 시호(諡號)를 올렸고 보면, 의인왕후에 대해서만 유독 생시의 존호가 있다고 해서 으레 올리는 휘호를 그만두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공의 말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광해가 공빈(恭嬪 광해의 생모인 김씨(金氏) )을 추숭(追崇)할 목적으로 예관(禮官)에게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게 하고, 또 유신(儒臣)에게 옛날의 예법을 널리 상고하여 아뢰게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그 위호(位號)와 절목을 알맞게 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너무 중하게 할 경우에는 예제(禮制)를 초과하여 모후(母后)가 두 분이 있게 되는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되고, 너무 가볍게 할 경우에는 사은(私恩)을 소홀히 하여 돌아가신 뒤의 효성을 바칠 길이 없게 됩니다. 옛날의 예법을 본받아 따르려고 한다면, 중자(仲子) 사당을 세운 것과 성풍(成風)에게 수의() 보낸  모두 《춘추(春秋)》에서 비난을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고, 한(漢)ㆍ당(唐)ㆍ송(宋) 때에 추숭했던 일 모두 성인(聖人)이 예법을 제정한 것과는 위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의인왕후께서 전하를 아들로 삼았고 보면, 전하의 입장에서는 사친(私親)에 대해서 원래 강복(降服)하는 예의 절차가 있어야 하니 모후와 똑같이 높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황조(皇朝)의 효종황제(孝宗皇帝)가 생모인 귀비(貴妃) 기씨(紀氏)를 추존하여 봉자전(奉慈殿)에서 별도로 제사 드리게 하였으니, 황조의 가법(家法)이 바르기로 말하면 효종이 가장 모범이 된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당대의 제왕이 행한 제도이고 사례가 또 동일하니, 이를 근거로 하여 의논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다만 그 위호로 말하면 우리나라는 위로 천자가 있는 만큼 사세(事勢)가 중국 조정과는 다른 점이 있는데, 본래의 위호를 그대로 쓴다면 추숭하는 실제 내용이 없게 될 듯하고, 위로 모후와 똑같이 한다면 지존한 분이 두 분 있게 되는 혐의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생존해 계실 때에는 비(妃)라고 칭했다가 돌아가신 뒤에는 후(后)라고 칭하는 것이 조종(祖宗)의 관례로 굳어졌으니, 후와 비는 등급에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추존하되 비라고 함으로써 약간 강쇄(降殺)하여 차이를 두는 뜻을 보이고, 여기에 휘호를 가하여 별묘(別廟)에서 향례(享禮)를 올리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그리고 기타 절목에 대해서는 모두 홍치(弘治 명나라 효종의 연호 )의 고사를 따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광해가 답하기를 “단지 비(妃)의 명호(名號)만 올리는 것은 추숭하는 전례(典禮)에 흠이 된다. 그리고 효종황제도 이미 자신을 낳아 준 귀비 기씨를 효목황태후(孝穆皇太后)라고 하였으니, 지금 역시 후(后)의 명호를 올려야 할 것이다. 별묘를 세우고 책보(冊寶)를 올리는 등의 의례(儀禮)를 갖추고 봉릉(封陵)하는 절목을 다시 더 상세히 의논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공이 다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극력 진달하였으나, 광해는 더욱 마음을 굳히고는 그러한 뜻을 바꿀 수 없다면서 더욱 사납게 답하였다. 공이 마침내 사직을 하고는 다시 경연에서 극력 진달하면서 체면(遞免)을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받지 못하였다.

봉자전(奉慈殿)의 제례를 태묘의 제례처럼 하라고 명하자, 공이 또 아뢰기를 “일단 태묘에 들어갈 수 없게 된 이상 제례에 시선(時膳 그 계절에 맞는 음식 요리 )을 써야지 태묘의 희생(犧牲)을 써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면서 중국 조정의 봉자전과 본조의 소경전(昭敬殿)의 제례를 인용하여 증거를 대었는데, 모두 여덟 차례를 아뢰고 나서야 허락을 받았다. 광해가 사묘(私廟)에 친제(親祭)를 올리려고 하자, 공이 또 아뢰기를 “신주(神主)의 제목을 아직 고치지도 않았는데 친제를 먼저 올린다면 행하는 일마다 온당하지 못하게 될 것이니, 별묘에 봉안하고 나서 행하소서.”라고 하였는데, 세 차례 아뢰고 나서야 허락을 하였다.

선종대왕의 상이 끝나고 부묘(祔廟)할 적에 유생과 기로(耆老)가 가요(歌謠)를 바치는 관례를 적용하려고 하자, 공이 아뢰기를 “이것이 비록 신하가 송축(頌祝)하는 일이긴 합니다만 원래 헛된 형식에 불과합니다. 지금 민생이 고달프고 국가에 일이 많을 뿐 아니라 아직도 남은 슬픔이 가시지 않았으니 번거로운 행사를 모두 행할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광해가 즐거워하지 않으면서도 축문(軸文)을 올리는 일만 행하고 결채(結彩) 등의 일은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동궁(東宮)의 관례(冠禮)를 행할 적에 찬관(贊冠)의 소임을 맡았고, 동궁이 입학할 적에 박사(博士)의 소임을 맡았는데, 찬관의 공을 인정받아 숭정대부(崇政大夫)로 가자되었다. 유생들이 선묘조 때부터 상소하여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다시 청하자 공이 경연에서 적극적으로 찬동하니, 광해가 대신과 의논하여 행하라고 허락하였다. 이조 판서로 천직(遷職)되자 세 차례 정고(呈告)하고 다시 사직하는 차자를 올렸으나, 온유하게 비답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신해년(1611, 광해군 3) 4월에 정인홍(鄭仁弘)이 차자를 올려 선현(先賢)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와 퇴계(退溪 이황(李滉) )를 비방하자 태학생(太學生)들이 상소하여 논변하며 정인홍의 이름을 청금록(靑衿錄 유적(儒籍) )에서 삭제하였다. 이에 광해가 크게 노하여 의논을 주도한 유생을 삭적(削籍)하고 금고(禁錮)시키도록 명하자, 제생(諸生)이 마침내 동맹 휴학을 하고 떠나갔다. 공이 대궐에 나아가 제생을 변호하며 논하자, 광해가 하교하기를 “의논을 주도한 유생의 죄는 용서할 수 없다만, 좌상과 대제학이 잇따라 극력 청하니 삭적하고 금고하는 일은 거행하지 말고 단지 장무관(掌務官)을 파직하고 대사성을 체직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공이 또 상소하여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극력 진달하면서 자신에게도 똑같이 처벌을 내려 줄 것을 청하였다. 그 뒤에도 잇따라 해면(解免)을 청하였는데, 몇 개월이 지나서야 전조(銓曹)에서 체직되고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

그 이듬해에 관례에 따라 창덕궁(昌德宮) 도감(都監)의 직책을 겸하였으며, 상을 받고 가자되어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진하였다. 명을 받고 어사(御史) 양호(楊鎬)의 송덕비(頌德碑)를 지었는데, 그가 이 글을 얻고는 매우 기뻐하면서 “이 상서(李尙書)가 나를 위해 좋은 문장을 지어 주었다.”라고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기자(箕子)는 우리 동방에 문명의 교화를 열어 주었는데, 그 덕을 기리고 그 공에 보답하는 전례(典禮)에 부족한 점이 있으니, 기자의 후손인 선우식(鮮于寔) 등에게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소서. 그리고 기자의 사당을 숭인전(崇仁殿)이라 하고 선우식을 전감(殿監)으로 삼되 직질(職秩)은 6품에 준하게 할 것이며, 자손들에게 대대로 지켜 나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신하를 보내 치제(致祭)할 것과 묘도(墓道)를 봉(封)하고 사우(祠宇)를 수축할 것, 제전(祭田)과 수복(守僕)을 늘려 줄 것, 선우(鮮于) 성을 가진 사람들을 복호(復戶)하고 군적(軍籍)에서 제외시켜 사우 아래에 모여 살면서 제사의 일을 행하게 할 것 등을 청하니 광해가 따랐다. 본도(本道)가 비석에 새겨 그 일을 기록할 것을 청하니, 마침내 공에게 명하여 그 글을 짓게 하였다. 본도의 사자(士子)가 일찍이 기자의 서원(書院)을 세웠는데, 이때에 와서 인현(仁賢)이라고 사액(賜額)하였다.

술사(術士) 이의신(李懿信)이 상소하여 교하(交河)로 천도(遷都)할 것을 청하니, 광해가 예조로 하여금 의계(議啓)하게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풍수지리설은 본래 신빙성이 없습니다. 현재의 도읍지인 한양(漢陽)이야말로 형세가 뛰어나기로 온 나라 안에서 제일입니다. 성조(聖祖)께서 창업을 하시고 몇 년 동안 경영하다가 이곳에 국도(國都)를 정하셨는데, 그 뒤로 200년 동안 나라는 태평하고 민생은 안정되었으며 정치는 융성하고 풍속은 아름다웠으니 만세토록 견고하게 유지될 땅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일개 필부(匹夫)의 황당무계한 말을 무턱대고 믿고서 200년의 기업(基業)과 백만 억의 생령(生靈)을 갑자기 내던져 뒤흔들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광해가 크게 노하였다. 그러나 공이 재차 아뢰며 극론하니 대신의 의논을 따르라고 명하였는데, 이렇게 해서 마침내 그 주장이 폐기되었다.

계축년(1613) 5월에 은적(銀賊) 박응서(朴應犀)가 이이첨(李爾瞻) 등의 사주를 받고 옥중에서 상변(上變)한 결과,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과 그 가속이 모두 체포되었다. 적당(賊黨) 정협(鄭浹)이 또 몰래 사주를 받고 공과 황공 신(黃公愼), 신공 흠(申公欽), 김공 상용(金公尙容) 등 10여 인이 연흥(延興)의 집에 모여서 연회를 열었다고 고발하였으므로 마침내 광해가 친국(親鞫)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공이 진술하기를 “김제남과 평일에 서로 친하게 지냈으므로 그가 초청해서 연회에 참석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광해가 공과 황신과 김상용을 어전 앞으로 나아오게 하고 말하기를 “경 등(卿等)은 모두 내가 중하게 의지하며 친근하게 여기는 신하들이다. 어찌 당파를 지어 반역을 도모할 리가 있겠는가. 모의를 주도한 자가 경 등의 중한 명성을 끌어들여 기만하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일단 적당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기 때문에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하고는 방송(放送)하였다. 공이 여섯 차례나 소를 올려 자신을 탄핵하였으나, 광해가 허락하지 않았다.

옥사(獄事)가 마무리되고 나서 종묘에 고할 적에 공에게 그 글을 짓도록 명하였는데, “스스로 부귀를 꾀할 줄 어린 동생이 어찌 알기나 하였으랴.〔自圖富貴 稚弟何知〕”라는 구절이 들어 있자 광해가 그 말을 고치라고 명하였다. 또 저주(咀呪) 관한 을 첨가해서 써 넣으라고 명하였는데, 공이 또 “정신없이 뇌까린 공초(供招)에서 나왔다.〔出於亂招〕”라는 구절을 써 넣자 광해가 또 난(亂) 자를 고치라고 명하였다.

연흥이 죽은 뒤에 대비(大妃)의 복상(服喪) 여부를 놓고 의논을 하였는데, 참판 오백령(吳百齡)이 공에게 묻자 공이 대답하기를 “김제남이 비록 반역죄로 죽었다고 하더라도 부자(父子)의 인륜이야말로 고금의 떳떳한 법이라고 할 것이니, 대비가 어떻게 복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 공이 바야흐로 사직 중이라서 예조의 일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참판이 물었던 것인데, 대신이 마침내 이러한 내용으로 헌의(獻議)하여 상복(喪服)과 소선(素膳)을 올리도록 하였다. 당시에 공이 내국 제조(內局提調)의 직책에서는 해면(解免)되지 않았으므로, 부제조인 정공 엽(鄭公曄)에게 말하기를 “대비전(大妃殿)에 조알(朝謁)하는 일이 폐지되었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의 상황에서 어떻게 차마 위문하는 예를 행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라고 하고는 마침내 대비전에 나아가 문안을 올렸다.

이이첨의 무리가 공이 종묘에 고하기 위해 전에 지은 제문의 표현이 잘못되었다는 것과 대비의 복상 문제와 내국에서 대비전에 문안을 올린 일 등을 트집 잡아 죄안(罪案)으로 삼은 뒤에 장차 중한 형률을 적용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 헌부(憲府)가 논계(論啓)하여 공을 파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예조 판서의 직책만 체직시켰다. 공이 또 대제학을 사체(辭遞)한 뒤에 다시 겸대한 모든 직책을 체직해 줄 것을 청하면서 네 차례나 소차(疏箚)를 올리니, 광해가 답하기를 “이미 종백(宗伯)도 그만두었고 문형(文衡)도 그만두었으니, 영예롭고 번다한 직책을 사양한 것이 그만하면 또 이미 많다.”라고 하고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에 공이 또 겸대한 직책과 지중추부사의 직책을 사직하였다.

이때 변무(卞誣)할 일이 발생하였으므로 공을 상사(上使)에 차임하면서 지중추부사를 제수하고 또 형조 판서를 제수하였다. 양사(兩司)가 연흥의 집에 가서 연회에 참석한 일을 트집 잡아 논계하며 파직을 청하였는데 광해가 허락하지 않았으나, 공이 즉시 정고(呈告)하여 체직되었다. 공이 또 상소하여 진주사(陳奏使)의 직임을 체직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세 차례 소를 올린 뒤에야 체직되었다. 뒤에 대신의 천거에 의해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공이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에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의 여러 전각에 부시(罘罳)를 설치한 철망(鐵網)이 없었으므로 장차 주성청(鑄成廳)을 설치하려고 하였는데 그 비용이 매우 많이 들었다. 공이 역관(譯官) 한 사람으로 하여금 수십 금(金)을 가지고 중강(中江)에 가서 무역을 하게 하자 몇 달이 채 못 되어 돌아왔는데, 이 자금으로 비용을 적게 들이면서도 여러 전각의 부시를 완전히 설치하였다. 공이 또 호조에 보관된 예전의 장부를 열람하면서 매년 포부(逋負)한 액수를 계산해 보니 무려 수천 동(同)에 이르렀는데, 해당 관리들을 조사하여 신문하자 모두 자복하였으므로 장차 이것을 가지고 경비에 보태 쓰고 세금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줄여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체직되고 말았는데, 후임자가 공이 마련한 자금을 별비(別備)라고 칭하면서 토목 공사 비용으로 보조하여 광해에게 아첨하였다.

병진년(1616) 겨울에 또 관복주청사(冠服奏請使)로 경사(京師)에 가서, 요청한 대로 중국 조정의 허락을 받고는 아직 귀환하지 않았을 적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제수되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가자되었다. 정사년(1617) 8월에 복명하였다. 이때 웅화(熊化)가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있다가 공을 보고는 반가워하면서 예전의 일을 이야기하며 시(詩)를 수창(酬唱)하였다. 웅화는 맑고 곧다는 중한 명성이 있었고 직책이 또 대헌(臺憲)이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오대(烏臺 어사대(御史臺) )의 개석(介石 빗돌 )에 비유하곤 하였다. 하루는 그가 공을 초청하여 그의 저택에서 연회를 베풀면서 매우 깍듯하게 예모를 갖추었는데, 중국 사람들이 모두 이 광경을 발돋움하고 구경하였다. 사신의 일이 원만하게 해결된 데에는 웅화의 힘이 많이 작용하였다.

계축년 이후로 흉악한 무리가 대비를 폐출(廢黜)하려고 꾀해 왔다. 그러다가 정조(鄭造)와 윤인(尹訒) 등이 맨 먼저 임금과 대비가 각각 별도의 궁(宮)에 거처해야 한다는 설을 꺼내어, 이윽고 광해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고 대비는 서궁(西宮)에 유폐되기에 이르렀다. 병진년 봄에 크게 가뭄이 들자 남대문을 닫은 적이 있었다. 공이 정공 엽(鄭公曄)과 함께 서궁에 가서 중추부에 새로 제수된 것을 사은(謝恩)하려고 하였는데, 궁의 뜰에 잡초가 우거진 것을 보고는 굳게 닫힌 궁문을 바라보며 울면서 말하기를 “열린 문을 닫을 것 없이 닫힌 문을 열기만 하면 하늘이 바로 비를 내려 주련만.”이라고 하였다. 이이첨이 그 말을 듣고는 장차 위에 아뢰어 국문하려고 하자, 어떤 이가 해명하기를 “농담으로 한 말이니 굳이 따질 것이 못 된다.”라고 하니, 이이첨이 노기를 띠며 말하기를 “농담하면서 우는 법도 있는가.”라고 하였으나 결국에는 죄를 주려는 일을 그만두었다. 당시에 위태로운 상황이 하루가 다르게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으므로, 화란(禍亂)이 장차 크게 일어나리라는 것을 공이 감지하고는 병든 몸을 이끌고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 ) 이공(李公)을 독음촌(禿音村)으로 찾아가 서로 결별하였는데, 헤어질 무렵에 지어 준 시에 “석양 녘에 흐르는 몇 줄기 눈물, 목릉 마을 어귀에 서 있는 말 한 마리.〔斜陽數行淚 立馬穆陵村〕”라는 구절이 있었다.

흉악한 무리가 다투어 모후(母后)를 폐출해야 한다고 소를 올리니, 광해가 그 소를 정부(政府)에 내려 정의(廷議)를 널리 모으게 하였는데, 공은 병을 이유로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광해가 정의에 불참한 자는 집에서 헌의(獻議)하도록 명하고는,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모(李某)는 국가를 위해 수고한 사람인데 지금 병이 들었으니, 내의(內醫)를 보내 병을 살피고 약을 처방해서 보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다음 날 나주(羅州)의 유생(儒生)인 진호선(陳好善)이 상소하여, 공이 정의에 응하지 않았으니 먼저 극형에 처하는 형률을 적용하라고 청하였다. 또 그다음 날에는 전창(全昶) 등이 상소하여 공과 김공 상용(金公尙容), 오공 윤겸(吳公允謙), 김공 권(金公權)이 헌의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논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 주찬(誅竄)하라는 말도 들어 있었다.

그 뒤에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이 도당(都堂)에 백관을 모으고 수의(收議)할 적에 공이 또 병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고는 의논하는 글을 작성하여 장차 보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친척인 재신(宰臣)이 와서 보고는 말하기를 “이 의논이 들어가는 날에는 화(禍)가 반드시 갑절이나 커질 것이다. 또한 중신(重臣)의 신분으로 유생으로부터 처벌하라는 상소를 당했으니 어떻게 태연히 헌의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공이 마침내 내용을 고쳐서 보내기를 “신이 듣건대 유생들이 서로 잇따라 소를 올리면서 먼저 주찬(誅竄)하라고 청했다 하기에, 사실(私室)에 거적을 깔고 엎드려 삼가 처벌을 기다리는 입장이라 감히 태연히 헌의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유생 전영(全瑩)이 또 상소하여 먼저 주극(誅殛)하라고 청하였다. 전영은 호서(湖西) 사람이다. 그의 모친은 공과 성씨가 같은 친족이었는데, 공이 장차 징벌을 받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전영을 보내 위문하게 하였다. 그런데 경성에 도착했을 때 허균(許筠)에게 핍박을 받고는 이 소를 지었다. 급기야 명함을 가지고 공에게 인사를 드리자 좌중의 손님들이 모두 안색이 변하고 하인들이 놀라서 피하였으므로, 전영이 그 이유를 묻고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그가 통곡하며 말하기를 “나는 본래 공에게 인사드리려고 왔는데, 어제 저녁에 객사(客舍)에 도착하니 허 판서가 소장(疏章) 하나를 꺼내어 나에게 바치게 하면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기에 바쳤을 뿐 상소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실제로 알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으므로, 이 말을 들은 자들이 전해 가며 웃었다.

무오년(1618) 2월에,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 중에서 공과 오윤겸(吳允謙), 이시언(李時彦), 송영구(宋英耈)는 삭출(削黜)하고 김권(金權)과 이신의(李愼儀)는 찬적(竄謫)하라고 합계(合啓)하니, 광해가 답하기를 “형률의 수위를 낮췄다 높였다 하고, 서너 사람만 거론하여 책임을 메우려 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모두 먼 지역으로 유배 보낼 것을 청하는 한편, 김상용(金尙容)과 윤방(尹昉)과 정창연(鄭昌衍)도 함께 논하였는데 상이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았다. 공은 양포(楊浦)로 나가서 명을 기다렸다.

기미년(1619) 겨울에 경사(京師)에 조회하러 간 사신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한림 검토(翰林檢討) 서광계(徐光啓)가 본국(本國)을 무함한 결과 장차 조선을 감호(監護)하러 나온다고 하였으므로, 광해가 크게 우려한 나머지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변무(卞誣)할 일을 빨리 의논하게 하면서 하교하기를 “모든 일에는 기회가 있다. 한번 그 기회를 잃으면 만 가지 일 모두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이러한 때에 어찌 상규(常規)에 구애받을 수 있겠는가.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비록 죄가 된다고 하더라도, 이번에 변무하려면 반드시 나라를 빛낼 솜씨를 가진 자를 가려야 할 것이니 이모(李某)를 진주상사(陳奏上使)로 차출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공을 판중추부사에 임명하였다.

경신년(1620) 4월에 경사에 도착하여 무함한 일을 명백히 해명하자 모든 의심이 완전히 풀렸다. 장차 귀환할 즈음에 천자가 승하하였는데, 사신들을 관소(館所) 안에 머물게 하고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공이 예부(禮部)에 정문(呈文)하여 말하기를 “대행황제(大行皇帝)가 승하했다는 부음(訃音)이 본국에 전해지면 국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거애(擧哀)하는 의식을 행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더군다나 본직(本職) 등이 경사에 와서 황궁 아래에 있는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곡림(哭臨)하는 반열을 따라서 참가하도록 해 주기를 바란다.”라고 하니, 각로(閣老) 방종철(方從哲)이 예부에 이르기를 “조선은 외국으로 대우하면 안 된다. 그의 말에 일리가 있으니 정말 예의의 나라라고 이를 만하다.”라고 하고는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의주(儀註) 절목(節目)에 이 항목을 첨가하고 공부(工部)로 하여금 상복을 만들어 주도록 하였는데, 그 복식이 《가례(家禮)》의 법도와 조금 다르자 공이 다시 정문하여 개정하도록 하였다. 그런 뒤에 반열을 따라 들어가 무영전(武英殿)의 좌측에서 성복례(成服禮)를 행하였고, 문화전(文華殿)에 나아가 황태자를 권진(勸進)하는 의식에 참여하였으며, 또 진향제(進香祭)에 참여하는가 하면 태창황제(泰昌皇帝 광종(光宗) )가 등극(登極)할 때 올린 하례(賀禮)에도 참여하였다.

본국으로 귀환하여 연서(延曙)에 도착했을 때 양사(兩司)가 합계(合啓)하였는데, 그 내용은 공이 김제남(金悌男)의 당인(黨人)으로서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북경(北京)에 있을 때에도 사서(私書)를 간행하고 배포하여 나라 안의 숨겨야 할 일을 퍼뜨렸으니 나국(拿鞫)하여 형률대로 처리하자고 청하는 것이었다. 이에 광해가 윤허하지 않으면서 하교하기를 “이번에 변무한 일이야말로 백관이 모두 나아가서 경하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양사가 아무 관계 없는 일을 가지고 조칙(詔勅)을 맞기도 전에 공이 있는 사신을 저격(狙擊)함으로써 막중한 대례(大禮)가 낭패로 돌아가게 만들다니, 내가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이모(李某)가 김제남과 혹시 알고 지낸 사이라 하더라도 어찌 당역(黨逆) 할 리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북경에 있을 때 문인(文人) 학사(學士)들 중에 공의 사고(私藁)를 보여 달라고 청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춘방(春坊)의 좌유덕(左諭德)인 주하(柱河) 왕휘(汪煇)가 서승(署丞) 섭세현(葉世賢)을 통해서 매우 간곡하게 요청해 왔다. 이에 공이 원집(原集)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마침내 도중에 지은 기행시(紀行詩) 100여 편을 기록한 뒤에 ‘조천기행록(朝天紀行錄)’이라고 이름을 붙여 그에게 주었더니, 왕휘가 크게 기뻐하면서 직접 서문을 지어 섭 서승과 상의해서 간행하였다. 그 뒤에 섭 서승이 반애(頒哀) 조사(詔使)의 신분으로 운남(雲南)에 사신으로 갈 적에 그 판본을 싣고 가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이첨의 무리가 평소에 공이 광해에게 표창과 은총을 받아 온 터에 이번에 또 변무하는 공을 세우자 더욱 시기하면서 기필코 모함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이 일을 트집 잡아서 나라 안의 숨겨야 할 일을 퍼뜨렸다는 것으로 무함한 것이었다.

공이 연서(延曙)에 머물면서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자 광해가 누차 들어오게 하도록 촉구하니, 대론(臺論)이 마침내 일시 정지되었다. 공이 여러 차례나 감히 복명하지 못하겠다고 사양하였으나, 광해가 허락하지 않고 교외에서 조칙을 영접하고는 하교하기를 “정성을 다해 주문(奏文)을 올려 그동안 쌓인 무함을 통쾌하게 해명하였다. 그 결과 황상이 조칙을 내려 깨끗이 씻어 주심으로써 천하 사람들이 모두 분명히 알게끔 하였다. 그리하여 금수(禽獸)의 구역이 바뀌어 의관(衣冠)의 영역이 되게 하였으니, 경이야말로 참다운 사신이라고 할 것이다.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기고 기뻐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조칙을 맞은 뒤에 양사가 다시 잇따라 논계하며 오래도록 고집하였으나, 광해가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신유년(1621, 광해군 13) 2월에 등극(登極) 조사(詔使) 유홍훈(劉鴻訓)과 양도인(楊道寅)이 우리나라에 온다는 보고가 이르자, 이이첨을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다. 이때 박승종(朴承宗)이 아뢰어 공을 의주 영위사(義州迎慰使)로 삼았으나, 공이 세 차례 사양하여 체차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사가 두 길로 나뉘어 온다는 말을 듣고는 다시 아뢰어 원접사로 차출하였으나, 뒤에 조사가 함께 온다는 말을 듣고는 중지하였다.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비국이 아뢰기를 “이모(李某)처럼 문한(文翰)의 숙망(宿望)을 지닌 사람이 양관(兩館)의 제학이 되어야 온당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박승종과 이이첨이 서로 대립하며 알력을 빚고 있었는데, 박승종이 공의 중한 명성에 기댈 목적으로 공을 수용(收用)할 것을 매번 청하였다. 그러자 이이첨이 갈수록 더욱 노한 나머지 양사를 사주하여 합계하게 하면서 공을 절도(絶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라고 청하는 한편, 심지어는 서궁(西宮 인목대비(仁穆大妃) )을 세우려고 모의하였다고까지 말하였으나, 광해가 답하기를 “서서히 처리하겠다.”라고 하였다. 양사가 또 서성(徐渻)과 공이 몰래 모의하고 있다고 논하였다

임술년(1622) 2월에 안찰사(按察使) 양지원(梁之垣)이 감군어사(監軍御史)의 신분으로 우리나라에 선유(宣諭)하러 오자 접반사(接伴使)를 선발하라고 명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이러한 때에 접빈(接賓)하는 신하로는 이모(李某)를 능가할 자가 없는데, 현재 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서 감히 계청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니, 광해가 답하기를 “오늘날 접반하는 임무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니 속히 계하(啓下)하여 떠나보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이어서 하교하기를 “김제남이 너희들에게 덕을 베푼 이 오래되었다. 남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꾀할 때마다 반드시 김제남을 빌려서 모함하곤 하는데, 그 말이 신기하지도 않고 듣기에도 피곤하니 그런 말은 이제 그만하는 것이 좋겠다. 이모는 중신(重臣)으로서, 선왕께서도 나라를 빛내는 그의 솜씨를 아름답게 여겨 그를 발탁해서 문형의 임무를 맡긴 뒤에 정응태(鄭應泰)의 무함을 통쾌하게 해명하게 하셨다. 그리고 내가 왕위를 이은 뒤에도 문형을 맡아 중국 조정에 가서 상주하였는데 그때마다 황은(皇恩)을 입곤 하였다. 그에게는 기록할 만한 공훈만 있을 뿐 치죄(治罪)할 만한 잘못이 없는데, 일이 있으면 기용하였다가 일이 끝나면 짓밟다니 같은 조정에 있는 의리로 볼 때에도 어떻게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단 말인가. 반드시 후회할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니, 양사가 즉시 정계(停啓)하였다. 공이 사직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자 즉시 길을 떠나 영송(迎送)하는 일을 마치고 조사(詔使)의 환심을 얻었다.

겨울에 합계하여 이귀(李貴)와 김자점(金自點)이 서궁(西宮)을 부호(扶護)한 죄를 논하였다. 이날 밤에 참판 남이공(南以恭)이 유희분(柳希奮)의 집에 있다가 공을 찾아와서 말하기를 “화기(禍機)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니 시급히 해소시키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공이 매우 경악하면서 그 즉시 출발하여 유희분을 찾아가서는, 이귀야말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모두 바치는 사람이니 다른 정상은 없는 것이 분명하다고 극력 말하였다. 그러자 유희분이 측은하게 여기며 그 말을 옳게 여겼으므로 사태가 수습될 수 있었다.

계해년(1623, 인조 1) 3월 12일에 금상(今上)이 반정(反正)하였다. 이날 밤에 이공 귀(李公貴)가 서자(庶子)를 보내 의거(義擧)를 일으킨 일을 말하였고, 얼마 뒤에 명패(命牌)가 이르렀으며 이어서 이시백(李時白)과 장신(張紳)이 와서 말하였다. 공이 대궐 안에 변고가 발생했다는 말을 처음 듣고는 어찌할 줄 모른 채 놀라 일어났다가, 의거를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서도 아직은 감히 곧장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옛 임금이 어떻게 되었는지 듣지 못하자 가인(家人)이 술을 올려도 울기만 할 뿐 고기를 먹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쪽지에 글을 써서 이공 귀에게 보내기를 “먼저 대비를 모시고, 대비의 명에 따라 백관을 소집해야만 체통을 세울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에야 창덕궁으로 나아가니, 상이 공에게 명하여 경운궁(慶運宮)의 서청(西廳)에 가게 하였다.

15일에 공을 예조 판서와 지경연사(知經筵事)에 임명하였다. 명을 받들고 관서(官署)에서 어압(御押)을 바치게 하였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하였다. 경연에서 우계(牛溪)의 신원과 복관을 청하고 율곡(栗谷)의 추증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사묘(私廟)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선조(宣祖)의 부친 )의 사당에 고제(告祭)를 올리게 하면서 이에 관한 절목을 강정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선묘(宣廟)의 손자 신분으로 들어와서 대통(大統)을 이으셨으니, 그 뒤에는 사묘에 대해서 행해야 할 전례가 당연히 있겠습니다마는 감히 무턱대고 품재(稟裁)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금 제문의 두사(頭辭)와 관련하여 유신(儒臣)이 널리 상고하고 대신이 의논을 바쳤어도 모두 적합한 논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신들이 천박한 학식으로 어떻게 경솔히 강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의례의소(儀禮義疏)》에 인후(人後)가 된 사람은 본생(本生)을 위해 기년(朞年)으로 강복(降服)하고 백숙(伯叔) 부모라고 칭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이는 실로 예나 지금이나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의리라고 할 것입니다. 전하가 이미 선묘의 뒤를 이었고 보면 본생에 대해서는 대원군으로 봉호(封號)해야 할 것인데, 이는 원래 덕흥(德興)의 고사가 있는 만큼 이에 의거해서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의논이 다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 속칭(屬稱)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분명한 전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송나라 영종(英宗)과 인종(仁宗), 그리고 우리 선묘와 명묘(明廟)의 경우는 그 항렬이 모두 숙질(叔姪)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 윤서(倫序)가 매우 순조롭습니다. 영종이 이미 인종의 아들이 되었고 보면 본생인 복왕(濮王)을 다시 부친으로 모실 수가 없고, 선묘가 이미 명묘의 아들이 되었고 보면 본생인 덕흥을 다시 부친으로 모실 수가 없으니, 백숙으로 칭해야 한다는 것은 그 사리가 매우 명백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위로 선묘의 뒤를 이었으니, 손자로서 조부의 뒤를 이어야 하는 것이 예법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에는 고위(考位 부친의 자리 )가 비어 있게 되는데, 정통(正統)이야 물론 문란케 할 수 없습니다마는 천륜으로 볼 때 고위를 비워 둘 수도 없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부친의 부친을 조부라고 하고 부친의 형제를 백숙이라고 하는데, 지금 소후(所後)에 대해서 이미 고(考)라고 칭할 여지가 없는 터에 소생(所生)에 대해서 또 백숙이라고 칭한다면 정의(情意)로 보나 예법으로 보나 모두 어긋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은 한 선제(漢宣帝)의 경우와 대략 같은 점이 있습니다. 선제가 소제(昭帝)의 뒤를 이었으니, 이것은 질손(姪孫)의 신분으로 종조(從祖)를 계승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생인 사황손(史皇孫)에 대해서 고(考)라고 칭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 도고(悼考)라는 칭호에 대해서 그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침원(寢園)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고, 또 뒤에 고(考)라고 칭하면서 다시 황(皇) 자를 추가하여 명위(名位)를 너무 높게 한 나머지 지존이 두 분 계시게 하는 혐의를 면치 못했기 때문에 정 부자(程夫子)가 예법을 어기고 인륜을 어지럽혔다고 말한 것이니, 이는 실로 후세 사람들을 경계시켜 미리 예방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 고(考)라는 글자를 붙인 것을 비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만약 고(考)라고만 칭하면서 황(皇) 자는 가하지 않고 자(子)라고만 칭하면서 효(孝) 자는 가하지 않는 동시에, 별도로 지자(支子)를 세워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되 사전(祀典)과 봉호를 일체 덕흥의 고사대로 따르게 한다면, 종통(宗統)을 중하게 하는 것과 본생에게 보답하는 두 가지 일 모두가 극진하게 될 듯도 합니다.

그런데 혹 말하기를 ‘백숙의 칭호는 복왕(濮王)의 의논 때에 이미 정론으로 굳어졌고, 한 선제(漢宣帝)가 황고(皇考)라고 칭한 것에 대해서는 정자(程子)가 예법을 어겼다고 말했으니, 백숙으로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라고 하는데, 이 설도 일리가 있을 듯싶습니다. 그리고 덕흥에 대한 제문의 두사(頭辭)에 대해서도 혹 종증조(從曾祖)라고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는데, 신들의 의견으로는 덕흥이 선묘에 대해서 이미 백숙이 되었고 보면 전하의 입장에서도 강쇄(降殺)하는 의리가 있어야 할 것이니, 지금 제문에 단지 덕흥대원군이라고만 쓰고 속칭(屬稱)은 꼭 쓸 필요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라고 하였다. 대신이 모두 이 의논이 옳다고 하자, 상이 그대로 따르라고 하교하였다.

원자(元子)의 보양관(輔養官)을 선발하라고 명하였는데, 공과 오공 윤겸(吳公允謙), 정공 엽(鄭公曄), 정공 경세(鄭公經世), 김공 장생(金公長生)이 동시에 선발되었다. 상의 명을 받고 원자의 휘(諱)를 정하였다. 9월에 판중추부사의 신분으로 예조 판서를 겸하였다.

10월에 폐중궁(廢中宮 광해의 부인 유씨(柳氏) )의 부음이 전해졌다. 밤에 대궐에 들어가서 아뢰고 의절(儀節)을 정한 다음에, 예조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을 보내 치상(治喪)하게 하고 그 친속을 보냈으며, 왕자(王子) 부인의 예를 적용하여 장례를 행하고 중사(中使)를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예로부터 제왕이 즉위하고 나면 곧바로 유사(有司)가 후계자를 세울 것을 청하곤 하였는데, 이는 국가의 근본에 관계될 뿐 아니라 실로 일찍부터 보양(輔養)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원자(元子)의 나이가 지금 10세를 넘은 만큼 서연(書筵)을 열어 학문을 강론하는 것이 하루가 급하니, 예법에 의거하여 책봉하되 길일(吉日)을 가려 거행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원자의 관례(冠禮)를 책례(冊禮) 이전에 행해야만 합니다. 책봉을 받은 뒤에는 곧바로 입학하고 알묘(謁廟)하는 등의 예식이 있게 되는데, 관례를 행하기 전에 그러한 예식을 행한다면 절차상 구애되는 점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제왕은 10세가 되기 이전이라도 관례와 책례를 행하였습니다. 한 문제(漢文帝)가 막 즉위하였을 때 그 아들인 경제(景帝)의 나이가 겨우 10세였는데도 유사가 건의하여 책례를 행하였으며, 아조(我朝)의 인묘(仁廟 인종(仁宗) )도 8세 때에 관례를 행하였습니다.  양공(魯襄公) ()나라에 있을 적에 진후(晉侯)  나이를 묻자 12세라고 대답하니진후가 ‘12년이면 세성(歲星) 하늘을  바퀴 도니 관례를 행할  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성공(成公) 사당에서 관례를 행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세자의 나이가 이미 12세가 되었으니, 관례를 어찌 내년까지 기다려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 2) 정월에 이괄(李适)이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키고는 곧장 경성으로 향하였는데 관군이 제대로 막지를 못하였다. 상이 공에게 명하여 자전(慈殿)과 중궁(中宮)과 동궁(東宮)을 호종(扈從)하여 먼저 강화(江華)로 떠나게 하였다. 공이 탑전(榻前)에서 아뢰기를 “신이 비록 재략(才略)은 없으나 대가(大駕)를 수행했으면 합니다. 그러면 혹 책응(策應)하고 호위하는 공을 세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사헌 정엽(鄭曄)도 아뢰기를 “신은 노모(老母)가 있으니 양전(兩殿)을 따라 먼저 강화로 갔으면 합니다. 이모(李某)는 재국(才局)과 주략(籌略)이 있으니 대가 옆을 떠나면 안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상이 이르기를 “예판(禮判)이 나를 수행하려고 하니 매우 가상하게 여겨져 탄복하는 바이다. 다만 자전의 행차에 대신과 중신이 없어서는 안 되고, 원자를 보도(輔導)하는 책임도 중하니 예판은 강화로 가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2월 7일에 임진(臨津)을 지키지 못했다는 보고가 이르자 대가가 도성을 떠나기로 의논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경성이 크니 적(賊)이 성곽을 포위하기는 또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적은 겨우 수천 명에 불과합니다. 서로(西路)에서 곳곳마다 무너지는 바람에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만, 경성을 졸지에 범할 수 없다는 것은 적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충청 병사(忠淸兵使)가 거느린 군대와 수원(水原)의 군대와 도감(都監)의 군대만 합쳐도 적의 10배나 됩니다. 그러니 상께서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하여 경성을 떠나지 않고 결사적으로 지키겠다는 뜻을 보여 주시는 동시에, 대장을 나누어 보내 동쪽과 서쪽의 교외에 진을 치도록 하십시오. 장만(張晩)의 군대도 반드시 적을 추격해 올 것인데, 적은 모두 오합지졸로서 협박에 못 이겨 따라온 자들이니 앞뒤로 우리의 공격을 받으면 저절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지금 만약 종사(宗社)를 버리고서 정신없이 달아나 피할 경우에는 한강을 건널 즈음에 필시 엎어지고 넘어지며 변고가 생기는 걱정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도성을 나간 뒤에는 모든 일이 군색해지고 급박해질 텐데, 적이 만약 경기(輕騎)로 뒤쫓아 온다면 길 위의 정비되지 않은 군대가 어떻게 그들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그 일을 생각하면 망극할 따름입니다.”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니, 상도 마음속으로 감동하였다. 그러나 여러 훈신(勳臣)들이 간첩(間諜)을 이미 적들이 보냈을 것인 만큼 도성 안에 내응(內應)하는 자들이 매우 많을 것이라고 했으므로, 공도 더 이상 강력하게 다투지 못하였다.

8일 날이 어두워진 뒤에 상이 도성을 빠져나갔다. 자전과 중궁과 원자는 당초에 길을 나누어 강화로 가기로 하였으나, 일단 출발한 뒤에 다시 결정하여 대가와 함께 가기로 하였으므로 공과 우상인 신공 흠(申公欽)이 양화도(楊花渡)까지 뒤따라가서 모시고 돌아왔다. 대가가 천안(天安)에 도착했을 때에 안현(鞍峴)의 첩보가 이르렀다. 상이 공에게 명하여 먼저 공주(公州)로 가서 산성(山城)의 형세와 묘사(廟社)의 처소를 살피게 하였다. 적장(賊將)인 기익헌(奇益獻) 등이 이괄(李适)과 한명련(韓明璉)의 머리를 베어 공주의 행재소(行在所)에 바치자, 상이 행궁(行宮)으로 거둥하여 그들의 수급(首級)을 받았다. 이때 예조의 관리가 한 사람도 온 자가 없었으므로 공이 손수 의주(儀註)를 기안(起案)하고 승첩을 고하는 글을 작성하여 올렸다. 이에 상이 백관을 거느리고 종묘에 친제(親祭)를 올렸으며, 밤에 백관이 진하(陳賀)하였다. 그다음 날에 상이 과거 시험장에 친림(親臨)하여 인재를 뽑은 뒤에 환도하였다. 공이 명을 받들고 과천(果川)에서 먼저 입경(入京)하여 태묘에 신주를 봉안하였다.

을축년(1625, 인조 3) 정월에 세자시강원 좌빈객(世子侍講院左賓客)에 임명되었다. 원자의 관례 때에 찬관(贊冠)이 되고 세자를 책봉할 때에 강학관(講學官)이 되었는데 그때마다 모두 가자되어야 마땅했으나, 공의 원래 자급이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인 관계로 공의 친족 가운데 1인을 6품의 관원으로 승진시키라고 명하였다. 4월에 의정부의 동벽(東壁)에 임명하여 공을 좌찬성(左贊成)으로 삼고 세자시강원 이사(世子侍講院貳師)를 겸하게 하였다. 6월에 황제의 조칙을 반포하기 위해 태감(太監) 호양보(胡良輔)와 왕민정(王敏政)이 입경하자, 공이 관반(館伴)이 되었다. 7월에 호패법(號牌法)을 시행할 적에 호패청 당상(號牌廳堂上)이 되었다. 병으로 사직하니, 판의금부사만 체차하도록 명하고 내의(內醫)를 보내 약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병인년(1626) 정월에 연주부부인(聯珠府夫人 인조(仁祖)의 모친 )이 대궐 안에서 작고하였으므로 공이 밤중에 들어가서 곡림(哭臨)하였다. 상이 삼년상(三年喪)을 행하려고 하자, 공이 대신을 따라 복합(伏閤)하며 간쟁하였다. 이때 공이 이미 예조 판서에서 체차되었으므로 해조(該曹)가 다른 사람을 예조 판서에 의망(擬望)하였으나, 상이 명하여 공을 판중추부사로 삼고 예조 판서를 겸하게 하였다. 공이 상장(喪葬)에 관한 절목을 의논해 아뢰자, 상이 준엄하게 비답을 내렸는데 그중에 “요즈음 예조가 군상(君上)을 어린애 다루듯 하고 있다. 예제(禮制)와 관련해서는 매번 자기 뜻대로 단정하면서 제도를 벗어난다고 하거나 예가 아니라고 하거나 《오례의(五禮儀)》에 없다고 하고 있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심보이며 이것이 또한 무슨 도리이냐. 인묘(仁廟 인종(仁宗) ) 이상의 조종(祖宗)이 발인(發引)할 때에도 모두 산릉(山陵)에 갔었다. 그런데 지금 문외(門外)에서 곡송(哭送)하는 것에 대해서도 제도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오례의》에 단지 조부모를 위한 복상의 예만 기재한 것도 조부모의 상이 모두 국상(國喪)이기 때문인 듯하다. 막중한 상례를 이렇게까지 기만하고 소홀히 하다니, 해관(該官)을 추고(推考)하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에 공이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발인할 때 《오례의》에 백관을 인솔하고 배왕(陪往)한다는 의례가 있습니다만, 이것은 대왕과 왕후의 상례에 신하가 임금을 장례 지내는 의례를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먼 시대의 일은 자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인묘가 산릉에 가려고 하자 대신과 예관이 쟁집(爭執)하여 성문 밖에서 곡송하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선묘(宣廟) 역시 세 차례나 국장(國葬)을 행하였습니다만 모두 궐문 안에서 곡송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사람들 모두가 전해 가며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하동부부인(河東府夫人 선조의 모친 )의 발인 때에도 선묘가 문외에서 곡송하려고 하자 예관이 쟁집하여 단지 궐내의 뜰아래에서 망곡(望哭)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상신(相臣)이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서연(書筵)의 복장을 천담복(淺淡服)으로 하려는 것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오례의》에 전하와 왕세자가 외조부모를 위해서는 추포대(麤布帶)를 5일 착용하고 벗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이는 제왕의 복제(服制)는 사대부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막중한 삼년상에 대해서도 전하께서 그래도 종통을 위해 강복(降服)을 해야 하고 보면, 왕세자의 상복을 또 어떻게 변제(變除)하는 의절(儀節)보다 낮추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왕세자가 기년복(朞年服)을 입는 것과 전하가 기년복을 입는 것 사이에는 원래 경중의 차이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졸곡(卒哭) 전에 일을 보실 때 이미 백포(白袍)를 착용하게 되어 있고 보면, 왕세자가 서연에서 일을 볼 때에는 천담복을 착용하는 것이 당연하고 졸곡 후의 복장 역시 차례로 조금씩 낮추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삼가 성상의 분부를 받들고 보니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니, 상이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6월에 황태자의 탄생을 반포하기 위한 조사(詔使)로 강왈광(姜曰廣)과 왕몽윤(王夢尹)이 입경(入京)하자 공이 관반(館伴)의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명을 받들어 《황화집(皇華集)》의 서문(序文)을 제술하였다. 겨울에 다시 좌찬성과 이사가 되었으며, 특명으로 예판을 그대로 겸하였다.

정묘년(1627, 인조 5) 정월에 달적(㺚賊)이 의주(義州)를 함락했다는 보고가 이르렀다. 공을 병조 판서로 삼고 찬성의 직책을 여전히 행하게 하였다. 공이 일단 상을 뵙고 고사(固辭)한 뒤에 다시 차자를 올리니, 상이 답하기를 “경(卿)의 재질과 방략(方略)이라면 이 난국을 충분히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이 아니고서는 이 임무를 감당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호병(胡兵)이 잇따라 여러 성을 함락하고 평양(平壤)에 이르자 대가(大駕)가 강화(江華)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적이 계속 글을 보내어 강화(講和)를 청하였다. 대가가 통진(通津)에 이르렀을 때에 대신을 불러 계책을 하문하였는데, 모두 아뢰기를 “서로(西路)의 대진(大鎭)이 차례로 함락되고 있고, 제로(諸路)의 근왕병(勤王兵)은 아직 이르지 않고 있습니다. 적이 경성을 점거할 경우에는 강화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섬이 되어 보존해 지킬 계책이 전혀 없으니, 그들이 강화를 요청하는 기회에 허락해 주는 것도 상황에 따라 변통하는 계책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강화에 도착했을 때에 적이 이미 평산(平山)까지 와서는 유해(劉海)를 강홍립(姜弘立), 박난영(朴蘭英) 등과 함께 보내 우호 조약을 체결하자고 요구하였다. 조정이 빈접(儐接)을 어렵게 여기자, 상이 신하들을 불러 의논하면서 이르기를 “이 일은 병판(兵判)이 맡는 것이 가장 적합하겠다.”라고 하였다. 공이 고사(固辭)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과 수답(酬答)하는 사이에 종사(宗社)의 안위가 걸려 있다. 경에 대해서는 그들 중에서도 필시 이름을 알고서 추중(推重)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피해서는 안 될 것인데, 이러한 때에 어찌 감히 수고하는 일을 꺼리겠습니까. 단지 신은 일을 처리하는 것이 우둔해서 대사를 그르칠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신이 중국 조정에 몇 차례 다녀왔으니 중국 조정에는 혹시 신의 이름을 아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호인(胡人)이야 어떻게 신의 이름을 알겠습니까.”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해(劉海) 같은 사람은 원래 중국인이니 어찌 경의 이름을 듣지 못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동행할 사람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나 재신(宰臣)을 막론하고 경이 직접 천거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과 이조 참판 장유(張維)와 함께 가게 해 줄 것을 청한 뒤에 연미정(燕尾亭)으로 가서 호차(胡差)를 만났다.

약조(約條)를 논하여 정할 적에, 평산(平山)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말 것, 맹약을 정한 다음 날에는 철군하여 돌아갈 것, 앞으로 형제의 나라라고 칭할 것, 철군한 뒤에는 압록강(鴨綠江) 연안을 넘어오지 말 것, 중국은 바로 부자(父子)의 관계를 맺은 나라로서 200년 동안 깍듯이 섬겨 왔으니 지금 너희 나라와 강화를 맺었다고 해서 배반할 수는 없다는 것 등을 제시하자, 유해(劉海)와 용골대(龍骨大) 등이 연일 강력하게 반대하며 다투었다. 그러다가 유해가 홀연히 손을 모으고 경의를 표하면서 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조선은 예의의 나라라고 하더니, 지금 제공(諸公)의 말을 듣고 보니 예의와 충신(忠信)으로 천하에 으뜸이 될 만한 나라일 뿐만이 아니다. 외딴 섬으로 피신하여 국가가 위기일발에 처한 상황에서 우리 군대가 만약 한 발만 앞으로 내딛으면 개성(開城)과 왕경(王京)이 금세 잿더미가 될 것이요, 군사의 칼날이 온 나라 안에 번득일 것이니 망하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를 지키며 시종일관 중국 조정을 배반하지 않으니 참으로 존경스럽기만 하다. 내가 이러한 뜻으로 두 분 왕자에게 보고하겠다.”라고 하고는 곧바로 글을 써서 밤중에 일기(一騎)를 급히 보내 문의하니, 두 왕자가 답하기를 “조선이 중국 조정을 배반하지 않는 것 역시 그 의사(意思)가 좋으니 그 뜻대로 하도록 허락하고, 단지 우리와 우호를 맺을 것만 굳게 약정하고 오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유해가 서면으로 요구한 세폐(歲幣)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공이 두 재신(宰臣)과 강력하게 다투면서 세폐는 모두 취소하고 단지 약간의 물품만 예물로 보내 호군(犒軍)하는 자료로 삼게 할 것을 주장하니, 호차(胡差)가 따랐다. 적이 회맹할 때에 백마(白馬)를 잡고 상이 또 직접 회맹에 참석하여 삽혈(歃血)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자 상이 하교하기를 “이러한 인심과 병력과 군율(軍律)을 가지고 과연 이 적을 당해 낼 수 있겠는가. 일단 그들을 토벌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들과 우호 조약을 맺고 하늘에 맹서하기로 한 이상 내가 회맹에 참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지금 세상에서 이 일을 비난하고 후세에서 이 일을 기롱한다 하더라도 나는 회맹에 참석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이 말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렇게까지 분부하시니, 이는 실로 국가를 회복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상께서 바야흐로 거상(居喪) 중에 계신 만큼 친히 삽혈을 할 수 없다는 뜻을 이미 호차에게 극진히 말하였으니, 이 일에 대해서는 신이 목숨을 걸고 감당해 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상은 단지 본부(本府)의 대청(大廳)에서 분향(焚香)만 하고 승지로 하여금 맹서하는 글을 읽게 하였으며, 공이 오윤겸(吳允謙), 김류(金瑬), 이귀(李貴), 신경진(申景禛) 등과 함께 서교(西郊)의 맹단(盟壇)이 설치된 곳에 가서 회맹하였다. 그리고 그 이튿날 철군하여 돌아갔는데, 그 뒤 유해가 다시 중국 조정에 귀순하고 나서 본국이 중국 조정을 배반하지 않은 실상을 극력 말했다고 한다.

공이 아뢰기를 “적이 비록 맹약을 간청하고서 물러갔다고는 하나, 우리가 하나도 따끔한 맛을 보여 주지 못했으니 그들이 무엇을 두려워해서 다시 오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는 군대가 없는 나라입니다. 지금 적이 물러간 것만 믿고서 전철(前轍)을 그대로 따른다면 적이 다시 쳐들어올 경우에 다시 어떻게 해 볼 계책이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병조 판서의 직책을 맡고 있을 적에 중국의 각 도(道)와 각 읍(邑)에 참장(參將)이나 유격(遊擊)이나 수비(守備)처럼 군대를 거느리는 장관(將官)을 둔 것에 의거해서, 각 읍에 있는 속오(束伍)의 구안(舊案)을 근거로 늙고 잔약한 자를 쫓아내고 새로 단속하여 장부를 작성한 뒤에 평상시에 조련시킴으로써 유사시에 그들을 거느리고 가서 적과 싸우게 하는 한편, 수령은 각 고을에서 그들을 위한 장비와 물자를 조달하여 지급하게 하도록 청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군사들도 장수를 알게 되고 장수도 군사들을 알게 되어 비상시에 제대로 쓸 수가 있을 것이요, 수령 역시 군사들을 거느리지 않는 만큼 변고를 당했을 때에 고을을 비우게 되는 폐단이 없을 것이니 이대로 시행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상이 재가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각 도에 영장(營將)을 설치하게 되었다.

환도한 뒤에 유해(劉海)와 용골대(龍骨大) 등이 또 오자, 상이 하교하기를 “적병이 아직도 의주에 있으니, 찬성 이모(李某)는 유해를 만나 보고 속히 철수하도록 타이르라.”라고 하였다. 공이 명한 대로 타이르니, 즉시 철군하겠다고 허락하였다.

명을 받들어 대원군의 지문(誌文)을 지어 올리니 숙마(熟馬)를 하사하였다. 황제의 등극을 반포하기 위해 조사(詔使)가 온다는 말을 듣고는 다시 공을 명하여 관반(館伴)으로 삼았다.

무진년(1628, 인조 6) 7월에 승진하여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공이 차자를 올려 고사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본래 보필하는 직임에 합당하니, 반드시 국가를 잘 다스려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속히 나와서 나를 바르게 보좌함으로써 여망(輿望)에 부응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재차 고사하니, 상이 또 답하기를 “경은 재덕(才德)이 평소에 드러났으니 이 직임에 실로 적합하다. 근력이 비록 쇠했다고는 하나 정신은 아직도 쇠하지 않았으니,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 부족한 나를 힘껏 보좌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왜사(倭使)인 현방(玄方)이 우리나라에 오자 공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현방은 본래 관백(關伯)이 보낸 것이 아닙니다. 지금 온 것은 단지 자기들 내부의 절박한 사정 때문으로, 도주(島主)의 상경(上京)을 이용해서 자신의 입지를 중하게 하고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관추(關酋)가 군대를 동원하여 침범해 오는 것은 원래 상경을 허락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반드시 그들의 상경을 허락해 주자고 의논드리는 이유는 대개 방비가 허술한 우리나라가 남쪽과 북쪽에서 교대로 침범을 당하는 상황에서 그들이 하루아침에 행장을 거두어 돌아가게 되면 무슨 모략을 꾸며 낼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기유년의 약조를 지금 만약 고쳐서 시행할 경우에는 그들이 부엌을 빌려 주면 마루까지 빌려 달라는 식으로 요청하면서 끝내는 옛날처럼 하자고 나올 것이 뻔한데, 그렇게 되면 물력(物力)을 감당하기 어려워질 뿐 아니라 중국 조정에도 이런 사정을 갖춰서 주문(奏文)을 올려야만 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특별히 부른다는 명분을 붙여서 단지 현방(玄方)과 지광(智廣)으로 하여금 간단히 몇 사람의 반종(伴從)만 이끌고 빨리 치달려 올라와 예조에 글을 올리게 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규례에 따라 부산(釜山)의 관소(館所)에서 접대하게 하되, 이러한 뜻을 분명히 유시(諭示)하여 관례로 굳어지지 않게 함으로써 그들의 음모를 꺾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한(汗)이 보낸 글을 보면 전일과 다른 것 같습니다. 그 글 가운데 기만하였다고 한 말은 패만(悖慢)하기 그지없으니 좋은 말로 꾸짖어서 그들이 뉘우칠 줄 알게 하고, 아울러 그 글에 언급되지 않은 내용도 설명하면서 그들 내부의 사정을 살펴보아야 할 것인데, 박난영(朴蘭英)을 경장(輕裝) 차림으로 달려가게 한다면 손상이 되는 점이 없을 듯도 합니다.

한편 생각건대 기미(羈縻 회유 )하면서 관계를 단절하지 않는 것이 원래 오랑캐를 대하는 제왕의 상도(常道)이긴 합니다만, 방비할 대책을 닦지 않고서 그들과의 우호 관계를 제대로 유지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왜국(倭國)의 사신이 공갈하고 협박하는 것이나 후금(後金)이 패만하게 글을 보낸 것은 모두 우리에게 방비할 능력이 없음을 업신여겨서 그런 것입니다. 정묘년에 강도(江都)로 피신했다가 적이 물러간 뒤에 신이 외람되게 병조 판서의 직책을 담당하였는데, 그때 바로 군대를 양성할 계책을 진달하여 마침내 각 도에 영장(營將)을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령이 원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영장이 재망(才望)을 갖추지 못해서 처음에는 서로 어긋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그 일이 일단 두서가 잡혔으니, 앞으로 적임자를 얻어서 제도에 맞게 연습을 시키고 적절히 무어(撫禦)하게 한다면 활용할 수 있는 8만의 군사를 확보하게 될 것인데, 이런 군사를 어디에서 쉽게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급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에 문서 한 장만 보내면 그 군사들을 징발할 수가 있는데, 설령 종횡무진 치달리게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수비하며 방어하게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본래 군대가 없는 나라이니 이 군사들 이외에는 달리 군사를 얻을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오직 사목(事目)을 신칙(申飭)해서 착실히 준행하게 하고 근거 없는 주장 때문에 저지되거나 동요되는 일이 없게끔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군대의 제도는 바로 훈련도감(訓鍊都監)의 제도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감의 군사는 2인을 급보(給保)하고 달마다 10여 두(斗)를 지급하며 여기에 또 상을 받고 승진하는 길도 있는 반면에, 이 군사들은 평상시에 양식을 직접 싸 들고 와서 훈련을 받다가 변고가 발생하면 무기를 들고 적을 막으러 가야 하는데, 이미 공사(公私)의 신역(身役)이 있는 데다가 가호(家戶)의 잡역(雜役)에 응해야 하니 그들이 어떻게 원망하며 고통스러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궁핍해서 본래 군대를 양성하는 제도를 두지 못했으니, 비록 중국 조정에서 군사들의 가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소금과 채소를 지급하고 달마다 은냥(銀兩)을 주는 규정을 모방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전세(田稅) 이외에 50복(卜)을 급복(給復)하게 하여 그들의 고통을 완화시키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조강(朝講)에 입시(入侍)하여 교화를 밝히고 풍속을 바르게 할 것,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현재(賢才)를 양성할 것, 《소학(小學)》을 많이 간행하여 중외에 널리 배포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뒤에 상이 명하여 교국(校局)과 성균관(成均館)에서 간행한 책자를 팔도(八道)에 나누어 보내도록 하는 한편, 정시(庭試)를 거행할 때에 입등(入等)한 유생 수백 인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공이 또 아뢰기를 “교화의 근본은 유술을 숭상하고 장려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先生)과 장자(長者)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사우(師友)의 도리가 끊어진 것이 오래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김장생(金長生)과 장현광(張顯光)을 성심껏 대우하지 않은 것이 아니건마는 그들이 오지 않고 있다. 지금 불러올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만약 이 두 사람을 예우(禮遇)하고, 상규(常規)로 부르지 않는다면 그들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을 지급하고 교자(轎子)를 타고서 올라오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공이 또 아뢰기를 “유현(儒賢)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으레 추증하는 전례가 있게 마련인데, 성혼(成渾)의 경우는 유독 추증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생시에 본디 벼슬에 뜻이 없었습니다만 선묘께서 발탁하여 참찬(參贊)으로 삼으셨는가 하면 심지어 복상(卜相)까지 하셨으니, 지금 추증하여 유술을 숭상하고 장려하는 뜻을 보여 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자, 상이 이르기를 “아직도 추증을 받지 못했단 말인가?”라고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아직도 받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성혼을 좌의정으로 추증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하는 아랫사람들을 경시하면서 자신의 총명을 과시하기를 좋아하니, 총좌()하는 병통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그 점을 경계하는데, 나도 그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내가 기질적으로 그러한 병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 고치지 못하고 있는데, 세세히 따지는 병통이야말로 대도(大道)에 매우 방해가 된다고 할 것이다. 옛날에 임금이 밥 속에 벌레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아랫사람들이 알까 두려워하여 숨기고 꺼내지 않았다 하니, 이는 매우 성대한 덕이라고 할 것이다. 내가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마는 내 뜻대로 일이 되지 않는 것을 볼 때마다 참을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일을 종합해서 고찰하며 명실(名實)이 부합하는지 살펴보는 것 역시 밝은 임금이 행하는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한(漢)나라 선제(宣帝)의 경우 밝게 살피는 임금이긴 하였지만, 한나라의 기업이 그로부터 마침내 쇠해졌다고 역사에서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개 정치를 행할 적에 세세히 살피는 일만을 숭상하게 되면 기상(氣象)이 경박해진 나머지 점점 남의 약점을 고자질하고 적발하는 풍조가 이루어져서 인심이 충후(忠厚)하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치를 행할 적에 세세히 살피는 일만을 숭상하면 한갓 번거로운 형식이나 말단의 일만 일삼게 되어 결국에는 성실한 면이 부족해지고 말 것이니, 일을 종합해서 고찰하며 명실이 부합하는지 살펴보기는커녕 치도(治道)가 날로 낮아지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중간 수준 이하의 임금에게는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리지도 못합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기질이 명민하고 지혜로우신데 세세히 따지는 병통을 면하지 못하고 계시기 때문에 감히 전하의 덕이 극진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말씀드린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시 마음에 새겨 유념하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다.

조강(朝講)을 마치고 사관(史官)이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이루어진 도유(都兪)의 성대한 광경이야말로 근래에는 보지 못했던 일이다.”라고 하였다.

좌의정 김공 류(金公瑬)가 탑전(榻前)에서 나만갑(羅萬甲) 등이 권세를 제멋대로 휘두른다고 말하자, 상이 대로(大怒)하여 하교하기를 “이자들의 죄상(罪狀)을 영상과 우상에게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영상과 함께 아뢰기를 “연소한 자들이 방 안에서 사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신들은 이에 대해 들은 적이 없습니다. 나만갑은 본래 성품이 선량한 데다 계려(計慮)가 있고, 관직을 극진히 수행하면서 남에게 원망 들을 말도 자신이 떠맡아 하며 피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가 조금 고지식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장점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신들은 조만간 국가의 실익을 위해 쓰일 사람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가 시론(時論)을 주도하며 취사(取捨)의 권한을 제멋대로 행사했다고 합니다만, 그는 미관말직의 하급 관원일 뿐인데 그러한 신분으로 그렇게 해 보려 했다고 하더라도 누가 그의 말을 채용하려고나 하겠습니까. 그리고 설사 언어를 조심하지 않고 함부로 시비를 논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자취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고 이미 말했고 보면 이를 죄안(罪案)으로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언어의 실수를 문제 삼아서 무작정 처벌을 한다면, 인심이 불안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청명한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되지 않을 듯싶습니다. 그리고 김세렴(金世濂)이 비방하는 의논을 받았으니 우선 청망(淸望)을 정지시키는 것도 안 될 것은 없겠습니다마는, 곧바로 그 실정을 알게 되었고 보면 그는 바로 하자(瑕疵)가 없는 사람이니 예전대로 거두어 쓰더라도 원래 무방할 것입니다. 김육(金堉)이 처음에는 발언을 하지 않다가 뒤에 끝내 버릴 수 없다고 말한 것 역시 전후로 들은 것이 달랐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오직 진정(鎭定)하고 재억(裁抑)하여 동인협공(同寅協恭)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상이 바야흐로 크게 노하여 나만갑은 멀리 유배 보내고 김육은 나국(拿鞫)하라고 명하니, 공이 영상과 함께 아뢰기를 “신들이 비록 형편없는 몸으로 대신의 숫자만 채우고 있다고 하더라도 조정의 분란을 진정시키고 부박(浮薄)한 풍조를 재억(裁抑)하는 것이 바로 그 직분이니, 만약 권세를 제멋대로 휘두르고 패거리를 짓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 마음속 깊이 미워하며 통렬히 끊어 버리지 않겠습니까. 예로부터 언어를 문제 삼아 사람을 처벌해서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었던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 점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였다. 상이 즉시 인견(引見)하자 또 극력 진달하니, 상의 노여움이 조금 풀려서 나만갑은 유배하는 벌을 감하여 중도부처(中途付處)하고 김육은 문외출송(門外黜送)하라고 명하였다. 공이 영상과 함께 동시에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제학 장유(張維)가 상소하여 나만갑을 변호하니, 상이 노하여 특명으로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제수하였다. 공이 영상과 함께 또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장유는 문장이나 재학(才學) 면에서 오늘날 제일류(第一流)의 인물입니다. 현재 태학사(太學士)를 맡고 있는 그의 직책을 강등하여 100리 고을의 수령으로 삼으시다니, 이는 실로 예전에 듣지 못했던 거조(擧措)입니다. 근래에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에 관련된 문서 작성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오고 있는데, 기의(機宜)를 잘 알아서 제대로 대처하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힘들고 위태로운 날을 당하여 진변(陳辯)하며 수응(酬應)하려면 언어와 문자로 표현하여 뜻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니, 신들이 우려하는 것은 정체(政體)가 온당함을 잃은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가도(椵島)의 유흥치(劉興治)가 난리를 일으켜 부총병(副摠兵) 진계성(陳繼盛)을 살해하자, 조정이 병력을 동원하여 토벌하려고 하였다. 공의 생각에는, 유흥치가 진계성을 살해한 것은 바로 자기들끼리 싸움을 한 것인데, 중국 조정에서 우리나라에 이자(移咨)하여 죽이지 말고 다독거리라고 한 만큼 중국 조정에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보지도 않은 채 미리 앞질러 토벌을 행한다는 것은 결코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그리하여 인대(引對)한 기회에 토벌해서는 안 된다고 극력 진달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와 부원수(副元帥) 정충신(鄭忠信)으로 하여금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진격하게 하였다. 그 뒤에 유흥치가 군사를 이끌고 떠나갔다는 말을 듣고는 그가 없는 섬을 그대로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공이 영상과 함께 또 파병(罷兵)할 것을 계청한 결과 제군(諸軍)이 마침내 철수하여 돌아왔다.

신미년(1631, 인조 9) 4월에 상이 대신을 명초(命招)하여 추숭(追崇)에 관한 일을 하문하자 각각 불가하다는 뜻을 진달하였다. 옥당(玉堂)이 차자를 올려 상의 뜻을 거스르자, 상이 이행원(李行遠) 등 5인을 나추(拿推)하라고 명하고 또 조경(趙絅)을 멀리 유배 보내라고 명하였다. 공이 차자를 올려 그 명을 환수하도록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을 위해서 그 명을 정침(停寢)하겠다.”라고 하였다.

공이 영상과 함께 빈청(賓廳)에 나아가 아뢰기를

“《예기(禮記)》 상복소기(喪服小記)에 ‘부친이 사이고 아들이 천자와 제후일 경우에는 천자와 제후의 예를 적용해서 부친을 제사하고, 그 시동(尸童)의 복은 사에 대한 복으로 한다.〔父爲士 子爲天子諸侯 祭以天子諸侯 其尸服以士服〕’라고 하였습니다. 복(服)도 오히려 가할 수가 없는데 더군다나 명위(名位)를 가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의례(儀禮)》 상복(喪服)에 ‘제후의 아들을 공자라고 한다. 그 공자의 자손 중에 한 나라의 임금으로 봉해진 자가 있을 경우에는 대대로 이 사람을 조로 삼고 공자를 조로 삼지 않는다.〔諸侯之子稱公子 公子之子孫有封爲國君者 世世祖是人也 不祖公子〕’라고 하였는데, 그 소(疏)에 ‘이 임금으로 봉해진 사람을 조로 삼고, 별자에게는 제사 지낼 수 없다.〔祖此受封之君 不得祀別子也〕’라고 하였고, 또 ‘공자가 대부가 된 경우에는 선군의 사당에 부묘(祔廟)할 수 없다.〔公子之爲大夫者 不得祔於先君之廟〕’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경전(經傳)에 분명히 나와 있는 글입니다.

탕왕(湯王)의 후손인 태갑(太甲)과 주 평왕(周平王)의 후손인 환왕(桓王)은 모두 손자로서 조부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경우인데, 그 소생(所生)을 추숭하여 태묘에 모셨다는 기록은 지금까지 보지 못하였습니다. 한 선제(漢宣帝)가 도고(悼考)를 추존한 일에 대해서 정자(程子 정이(程頤) )는 예법을 어기고 인륜을 어지럽혔다고 평하였으며, 범진(范鎭)은 소종(小宗)을 대종(大宗)에 합쳤다고 비난하였습니다. 또 한 애제(漢哀帝)가 정도공왕(定陶恭王)을 추존하려고 하자, 사단(師丹)은 자식이 부친에게 작위를 주는 의리는 없다고 반대하였습니다. 그리고 광무(光武)가 사친(四親)의 사당을 용릉(舂陵)에 세우고 명호(名號)를 가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주자(朱子)가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였는데, 제자인 하숙경(何叔京)이 ‘그 일이 물론 아름답기는 하지만 백승(伯升)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는 것만 못하였다.’라고 하자, 주자가 ‘이 논이 가장 바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은 전대(前代)의 득실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는 자료들입니다.

정자(程子)가 복의(濮議)에 대해서 말하기를 ‘요컨대 사체(事體)를 잘 헤아려서 별도로 사당을 세우고 칭호를 다르게 한 뒤에 그 자손들로 하여금 작위를 세습하여 제사를 받들게 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대통(大統)에 있어서도 두 분의 지존을 모시는 혐의가 있게 되는 잘못을 없앨 수 있고, 본생(本生)에 있어서도 존숭하는 도리를 극진히 할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사마광(司馬光)은 말하기를 ‘진한(秦漢) 이래로 방지(旁支)에서 들어와 대통을 계승한 뒤에 그 부모를 추숭하여 제후(帝后)로 만든 경우에는 모두 당시에 비난을 받았고 후세에 기롱을 받았다. 따라서 이것을 법도로 삼아서는 안 되니, 단지 고관대작(高官大爵)으로 높이는 것이 온당하다.’라고 하였으니, 소종(小宗)을 대종(大宗)에 합쳐서는 안 되는 것이 이와 같이 엄격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 자손들로 하여금 작위를 세습하여 제사를 받들게 해야 한다고 말했고 보면, 사묘(私廟)를 만들어서 지자(支子)로 하여금 그 제사를 주관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할 것이요, 이미 당시에 비난을 받고 후세에 기롱을 받았다고 말했고 보면, 추숭하여 태묘에 모시면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상은 선유(先儒)의 정론(定論)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들입니다.

사대부의 집안에서는 조부와 손자가 서로 후사가 될 수 없지만, 제왕의 집안에서는 전적으로 종통(宗統)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형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아우의 뒤를 이을 수 있고 숙부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조카의 뒤를 이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사복(嗣服)한 뒤에는 바로 군신(君臣)의 의리가 있고 부자(父子)의 도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춘추》의 전(傳)을 보면 노(魯)나라 민공(閔公)이 아우의 신분으로 먼저 임금이 되었고 희공(僖公)이 형의 신분으로 민공의 뒤를 이었는데, 선유(先儒)는 민공과 희공이 문공(文公)에 대해서 당연히 조(祖)와 예(禰)가 된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희공이 아우를 예묘(禰廟)로 삼아야 하고 문공은 또 숙부를 조묘(祖廟)로 삼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자(朱子)가 주묘소목도(周廟昭穆圖)를 지을 적에 효왕(孝王) 의왕(懿王) () 삼게 하였으니 이는 숙부의 신분으로 조카를 예묘로 삼은 것이고이왕(夷王) 효왕을 ()으로 삼게 하였으니 이는 종손(從孫) 신분으로 종조(從祖) 예묘로 삼은 것입니다. 예묘에 정위(定位)가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공자(孔子)는 이르기를 그분이 계시던 지위에 올라 그분이 행하던 예법을 행하며 그분이 연주하던 음악을 연주한다.〔踐其位 行其禮 奏其樂〕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지위에 오르지 못하면 그 대통에 참여할 수가 없고, 그 대통에 참여하지 못하면 그 사당에 끼일 수가 없는 법입니다. 지금 만약 사은(私恩) 때문에 대위(大位)에 추숭한다면, 종통의 측면에서 압굴(壓屈)하는 점이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묘제(廟制)의 측면에서도 방애되는 점이 있게 됩니다. 소목(昭穆)의 차서(次序)를 정할 때에 새로 신위(神位)를 올릴 경우에는 조천(祧遷)해야 할 신위가 있게 됩니다. 올리면 안 되는 사친(私親)의 신위를 올리려고 한 나머지 조천하면 안 되는 선조의 신위를 미리 조천한다면, 아마도 조종(祖宗)을 존경하는 도리에 어긋나는 점이 있게 될 듯싶습니다. 덕종대왕(德宗大王)은 비록 그 지위에 미처 오르지는 못했지만 명을 받고 책봉되어 일찍이 세자가 되었으니, 이는 예(禮)에서 말한 임금으로 즉위해야 합당한 신분〔合立君〕이었던 만큼 지금의 사례와는 서로 같지 않을 듯합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성상이 선묘(宣廟)의 손자로서 선묘의 뒤를 이었으니 인후(人後)가 된 것과는 차이가 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상께서는 난세를 평정하고 반정을 이룬 뒤에 중국 조정에 주문(奏聞)하고 대통을 계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위로 조체(祖體)를 잇고 종묘의 비자(丕子)가 되셨고 보면, 인후와 그 도리가 실로 같다고 할 것이요, 그 의리가 더욱 중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는 명분상으로도 바르고 예법상으로도 순탄한 것으로서 그 일이 전고(前古)에 밝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전례(典禮)를 강정(講定)하여 준행해 온 것이 지금 이미 8, 9년이나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논의하는 자들이 많은데, 예법을 논의하는 일로 말하면 또 본시 모여서 송사(訟事)를 하는 것처럼 중설(衆說)이 분분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다른 논의가 혹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번의 일은 얼마나 큰 예법인데 경솔하게 동요시켜 바꾸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호부(宋戶部)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그의  가운데에도 의기(義起) 대해서 논의한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막중한 예법을 어떻게 의기의 논에 입각해서 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만 경사(卿士)와 상의하지도 않고 나라 사람들의 말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면서 곧장 중국 조정에 주문한다면, 중국 조정에서는 외번(外藩)의 일에 대해서 필시 자세히 헤아려 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혹시 억지로 그런 논의를 따라 줄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이 일이 천하에 전파될 경우에 안목을 갖춘 자의 비난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겨울에 이조가 이행원(李行遠) 등을 청직(淸職)에 의망하였다. 이에 상이 진노하여 이조의 삼당상(三堂上 판서ㆍ참판ㆍ참의 )을 파직하라고 명하니, 공이 차자를 올려 강력히 간하였다.

임신년(1632, 인조 10) 정월에 좌의정으로 승진하고 세자부(世子傅)를 겸하였다. 상이 예관에게 추숭하는 예식을 속히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공이 영상과 함께 차자를 올려 누차 간했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2월에 사간 권도(權濤)는 국문하고 참찬 박동선(朴東善)은 삭탈관작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추숭과 관련된 휘호(徽號)의 글자 수에 대해서 논한 일 때문이었다. 정원(政院)과 옥당(玉堂)과 양사(兩司)가 모두 명을 환수하도록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에 공이 동료 재상과 함께 차자를 올려 논하니, 상이 답하기를 “권도가 헐뜯어 비난하고 업신여기며 거만하게 군 죄는 결단코 용서할 수 없다. 박동선은 경들이 그렇게 청하니 파직만 하라.”라고 하였다.

6월에 자전(慈殿)이 승하하였다. 공이 총호사(摠護使)가 되어 산릉(山陵)에 가서 장례에 관한 일을 처리하다가 풍현(風眩)의 증세를 얻었는데, 하현궁(下玄宮 하관식(下棺式) )을 행할 날이 되자 일을 거행할 수가 없었으므로 집으로 돌아왔으나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다. 이에 상이 내의(內醫)를 보내고 동궁(東宮)이 궁관(宮官)을 보내 문병을 하였으며 약물을 내리는 일이 계속 이어졌다. 공이 무려 20차례나 정고(呈告)를 한 끝에 체직을 허락받고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계유년(1633) 7월에 인정전(仁政殿)에 벼락이 치자 상이 삼공(三公)과 육경(六卿)과 삼사(三司)의 관원을 소견(召見)하였다.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근래에 성상이 설행(設行)하고 실시하는 사이에 형식적인 일이 많고 실질적인 일은 적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신하가 봉행할 때에도 착실하게 거행하는 일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전에 없던 변고를 당한 만큼 하늘의 뜻에 부응하여 실질을 위주로 하고 형식을 배제해야 하는 때인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상께서는 성의(誠意)ㆍ정심(正心) 방면에 더욱 힘을 기울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만약 구언(求言)을 하면서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실질적인 내용이 없거나, 백성을 구휼하면서도 은혜롭게 보살피는 실질적인 내용이 없거나, 폐해를 제거하면서도 진작시키는 실질적인 내용이 없다면, 어떻게 하늘의 견책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번의 변고가 어떤 일에 대한 반응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대적(大敵)이 변경을 짓누르면서 아침에 떠나면 저녁에 도착하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방비할 대책을 전혀 강구하지 못한 채 병력과 군량이 모두 부족하기만 하니, 유린을 당하는 화란이 꼭 없으리라고 보장하기도 어렵습니다. 지금 오랑캐가 듣기 좋게 달콤한 말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 역시 모략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늙고 병든 신이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근심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제대로 생각하여〔克念〕 실덕(實德)을 닦으려고 힘쓰신다면, 지극한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하늘의 노여움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갑술년(1634) 7월에 차자를 올려 공의 선조인 문강공(文康公 월사의 조부 ) 석형(石亨)이 지은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 6권을 바쳤다. 문강공은 성묘(成廟)조에 진서산(眞西山 남송(南宋)의 진덕수(眞德秀) )이 지은 《대학연의(大學衍義)》야말로 임금이 정치를 행하는 대법(大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 권질(卷帙)이 너무 많고 논설이 잡다해서 임금이 날마다 복잡한 정무를 처리하는 여가에 열람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여 마침내 번다한 내용을 간추려 정리하고, 이와 함께 경계로 삼기에 절실한 것으로는 동방의 사적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고려(高麗)의 사적(事蹟)을 뽑아 각 조목의 아래에 편입한 뒤에 《대학연의집략》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위에 올렸다. 이에 성묘가 명하여 간행하도록 하였는데, 난리를 겪고 나서 그 책이 분실되고 공의 집에 오직 1권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공이 이때에 이르러 위에 올리면서 첨가하여 편집한 뜻을 진달하였는데, 《대학연의》를 진강(進講)할 즈음에 이 책도 아울러 열람해 주기를 바라는 한편, 이 책에서 논한 경외심(敬畏心)을 높일 것, 일욕(逸欲)을 경계할 것, 내치(內治)를 엄하게 할 것, 민정(民情)을 살필 것 등 4개 조목을 인용하며 경계시키는 내용을 진달하였다. 이에 상이 답하기를 “공이 올린 《대학연의집략》은 내가 일찍이 그 이름을 들었지만 여태 그 책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다행히 이 책을 얻어서 살펴보니, 실로 수신(修身)하고 제가(齊家)하는 중요한 도리가 담겨 있고, 사욕을 막고 자신을 경계하는 밝은 거울이 될 만하다. 또 차자에서 진달하며 열거한 4개 조목도 모두 오늘날 약석(藥石)이 될 만한 말이었다. 내가 비록 불민하지만 마음에 담고 힘껏 행해서 경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겠다.”라고 하고는 털 담요 1부(部)를 하사하였다.

상의 부친을 부묘(祔廟)하라는 명이 내려오자 양사(兩司)가 합계하여 간하니, 대사헌 강석기(姜碩期)와 대사간 조정호(趙廷虎) 등 8인을 삭출(削黜)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에 대사간 유백증(兪伯曾)이 논계(論啓)하는 일을 정지하려고 하자 부제학 김광현(金光炫) 등이 유백증을 파직하라고 청하니, 상이 진노하여 멀리 떨어진 변방 요새에 정배(定配)하라고 또 명하였다. 이 일들에 대해 공이 모두 차자를 올려 논하였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이때 공의 병이 오래도록 낫지 않아서 문을 닫고 조정의 정사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으나, 임금이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걱정하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면서 간절히 말씀드리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을해년(1635, 인조 13) 4월 29일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니, 춘추 72세였다. 이날 맑게 갠 하늘에 저녁까지 번개가 치면서 붉은 섬광이 하늘에 뻗치더니 밤이 깊어서야 비로소 흩어졌다. 며칠 전에 세자가 공의 병환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는 두 차례나 액정(掖庭)에 있는 사람을 보내는가 하면 다시 궁관을 보내어 병세를 물었으며, 상이 내의(內醫)를 보내 병을 살피게 하고 약물을 보내는 일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가 공이 서거하자 상이 애도하면서 철조(輟朝)를 하고 3일 동안 소선(素膳)을 올리라고 명하였으며 제사와 부의(賻儀)를 예법대로 행하게 하였다. 세자는 백관을 거느리고 별전(別殿)에서 거애(擧哀)하는 동시에 7일 동안 소선을 올리라고 명하고 조문과 부의를 특별히 더 가하였으며, 그 뒤에 친히 임곡(臨哭)하여 애통한 심정을 극진히 표하고는 공의 자제들의 손을 잡고 위무(慰撫)하였다. 그리고는 환궁하여 강관(講官)에게 말하기를 “경상(卿相)의 지위에 오래 있었는데도 그 집이 그토록 비좁고 누추한 것을 보니 진정 귀인(貴人)이라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위로는 경상으로부터 백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의 빈소에 와서 곡을 하고 조문하였으며, 아래로는 여대(輿儓)와 천례(賤隷)에 이르기까지 며칠 동안 와서 곡을 한 자가 무려 수백 인이나 되어 길을 가득 채웠다. 태학의 유생 180여 인도 모두 와서 조문하였다. 그해 7월 모일에 용인(龍仁) 문수산(文秀山) 선영의 사좌해향(巳坐亥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학문에 근면하고 묻기를 좋아했다는 것과 한 몸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고 임금을 받든 것에 대한 시법(諡法) 두 가지를 적용하여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공은 자태가 영이(穎異)하고 음성이 청랑(淸朗)하였으며, 풍도가 호상(豪爽)하고 풍류가 영발(映發)하였다. 그래서 공을 바라보노라면 신선 중의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들과 거할 때에는 즐겁게 담소하면서 종일토록 화기애애하였으며, 평생토록 거친 언어나 조급한 기색이 없었고 나태한 모습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속마음을 남김없이 드러내 보여 주며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공을 찾아오는 사람들마다 노소(老少)와 존비(尊卑)를 막론하고 모두 만족스럽게 생각하며 떠나곤 하였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가릴 적에는 비록 흔적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경위(涇渭)가 절로 분명해서 항상 옳은 쪽을 따랐을 뿐 그른 쪽에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문숙(文肅) 정엽(鄭曄)이 당세의 인물을 논할 때에 공을 으뜸으로 꼽으면서 “화기로운 가운데에서도 그 소신이 확고하였다.”라고 평했던 것이다.

내외의 족속에 대해서는 친소(親疎)와 원근(遠近)을 따지지 않고 모두 골육처럼 대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족첩(族牒)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 중에 외지고 먼 지방에 사는 이들이 무슨 일로 상경할 때면 번번이 공을 먼저 찾아와 의탁하면서 마치 자기 집에 온 것처럼 여겼다. 과거 시험을 보여 인재를 뽑을 때면 그때마다 반드시 지필묵(紙筆墨)을 미리 준비해 놓고서 응시하러 오는 향족(鄕族)을 기다리곤 하였다. 빈궁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힘이 닿는 대로 반드시 진휼해 주었으며, 죄수를 재심리(再審理)하여 의논을 올릴 때에는 반드시 평번(平反 관대한 쪽으로 처리함 )을 위주로 하여 온전히 살려 준 사람이 많았다. 경상(卿相)의 지위에 있은 40년 동안 일찍이 전장(田莊)을 경영하거나 원옥(垣屋)을 늘리고 꾸미는 일이 없었다. 집안의 생활이 군색하여도 있고 없는 것을 따지지 않고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과 음식을 대접하게 하였는데, 풍성하든 약소하든 있는 그대로 정성을 다해 대접해 보냈다.

항상 대체(大體)를 견지하고 형식적인 번다한 일은 생략하였으며, 남의 과오를 보면 오로지 덮어 주려고 노력하였다. 매번 조당(朝堂)이나 공회(公會)에 나아가 계차(啓箚)를 입으로 불러 주곤 하였는데, 그때에 신진(新進) 낭속(郞屬)이 글자를 잘못 쓰더라도 결코 나무라지 않고 더러는 잘못 쓴 곳에 따라 고치기도 하였다. 자제가 과오를 범할 때에도 한 번도 화내며 꾸짖지 않고 조용히 말하며 훈계함으로써 스스로 반성할 길을 열어 주었으며, 작은 과실일 경우에는 아예 묻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나 동복(僮僕)을 부릴 때에도 모두 그러하였다.

공은 특히 효우(孝友)에 지극히 독실한 면모를 보였다. 임진왜란 때에 공이 의정공(議政公)을 모시고 행재(行在)로 뒤따라갈 적에 양주(楊州)에 이르러 적에게 길이 막혔으므로 며칠 동안이나 산골짜기에 숨어 있게 되었다. 이때 의정공이 워낙 허기가 져서 풀씨를 먹으려 할 정도가 되자 공이 눈물을 흘리면서 산을 내려와 먹을 것을 찾아다녔는데, 당시에 적병이 사방을 에워싸 촌락이 잿더미가 되고 인적이 완전히 끊어졌기 때문에 막막해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때 한 노인이 바위 위에 앉아서 도시락을 앞에 놓고 있는 것을 홀연히 보고는 공이 그 앞으로 나아가 절을 하였는데, 도시락 속에 밥이 가득하였으므로 공이 사연을 말하고 구걸을 하니 노인이 도시락을 모두 내주었다. 이에 공이 사양하면서 반절만 나누어 주기를 청하니, 노인이 말하기를 “이 도시락을 가지고 돌아가서 며칠 동안이라도 드리도록 하라.”라고 하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 자리를 떠난 일도 있었다.

또 누님이 고양(高陽)에 살고 있었는데 생사를 알지 못했으므로 의정공이 공에게 찾아가 보라고 명하였다. 성산(城山)에 이르렀을 때 한 무리의 왜적이 졸지에 들이닥치자 산 위에 피신한 사람들이 어떻게 계책을 세워야 할지 몰랐다. 공이 대중에게 말하기를 “죽기는 매한가지이니 응당 항거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니, 대중이 공을 추대하여 장수로 삼았다. 왜적이 개미 떼처럼 붙어서 올라오기 시작하자, 무인(武人) 신거관(愼居寬)과 신거용(愼居庸) 형제가 모두 공의 옆에서 왜적을 향해 활을 쏘았는데, 원래 재관(材官) 출신으로 무용(武勇)이 뛰어났기 때문에 왜적을 매우 많이 죽였다. 이렇게 서로 대치하며 거의 한나절이 지나도록 공이 우뚝 서서 동요하지 않고 대중을 지휘하였는데, 그동안 왜적의 탄환이 세 번이나 공에게 날아왔지만, 하나는 모자에 맞고 하나는 왼쪽 겨드랑이를 스쳐 지나가고 하나는 바지 아래를 뚫고 지나가서 모두 위기를 모면할 수가 있었다. 그러자 왜적이 또 탄약을 장전하여 공을 겨누었는데, 공의 생각에 천행(天幸)으로 세 발의 탄환은 피할 수 있었으나 다시 모면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하였고, 또 신거관 형제 등 여러 사람들이 잇따라 적의 탄환을 맞고 죽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깊은 골짜기를 뛰어넘고 벼랑을 타고서 그곳을 피하였다. 의복을 살펴보니 바지에 탄환 구멍이 있었고 왼쪽 겨드랑이에는 탄 흔적이 보였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누님을 찾아뵙고 돌아오니, 사람들이 신명의 보우(保佑)를 받았다고 말하였다.

삭녕(朔寧)에 도착하였을 때에 감사 심대(沈岱)가 징파도(澄波渡)에 진을 쳤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 고을 사람들이 이를 믿고 동요하지 않았는데, 의정공 역시 여행에 지친 나머지 하루라도 그곳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공이 심대의 영루(營壘)에 가서 살펴본 결과 반드시 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돌아와서 의정공에게 고하고는 그 즉시 재촉하여 출발하였는데, 밤중에 길을 떠나 겨우 몇 리쯤 갔을 적에 왜적이 과연 심대의 영루를 습격하여 한 고을을 도륙(屠戮)하고 말았다. 기전(畿甸)에서 행조(行朝)에 도착할 때까지 이처럼 위기에 처했다가 다행히 면하게 된 경우가 몇 차례나 되었다.

선인(先人)의 기신(忌辰)이 돌아오면 반드시 목욕하고 재계(齋戒)하였는데, 엄동설한에도 그렇게 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으며 노년에 이르러서도 똑같이 하였다. 가묘(家廟)에서 삭망(朔望)의 제전(祭奠)을 올리는 일 역시 병이 들었어도 반드시 직접 나아가 행하곤 하였다. 5대조의 묘소에 향화(香火)를 올리는 일이 끊어졌으므로 공이 제사의 격식을 정한 뒤에 자손으로 하여금 교대로 행하면서 폐하지 않게 하였으며, 언젠가는 경성에 있는 자손 30여 인과 함께 가서 제사를 올리기도 하였다. 문강공(文康公)의 구기(舊基)에 사우(祠宇)가 없자 애써 경영하여 건립한 뒤에 제사를 주관하는 자로 하여금 신주(神主)를 모시고 와서 거처하게 하였다. 집에 방루(房樓)가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였으나 선세(先世)의 구거(舊居)라 하여 끝내 철거하지 않았다.

과부가 된 누님이 옆집에 살고 있었는데, 하루도 찾아가서 서로 만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리고 매일 밤마다 반드시 자질(子姪)을 침방(寢房)에 모이게 한 뒤에 학업을 점검하고 뜻을 말하면서 술과 음식을 차려 놓고 노래하고 시를 읊으며 즐겁게 보냈는데, 혹 새벽닭이 울 때가 되어서야 자리가 파하기도 하였다. 공은 특히 인재를 장려하여 진출시키기를 좋아하였다. 어떤 사람이 예능(藝能)을 한 가지라도 지녔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추천하여 사기를 북돋아 주곤 하였다. 조정에 지나친 거조(擧措)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그때마다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반면에 임금이 훌륭한 거조와 아름다운 정사를 행하는 것을 보면 간혹 등대(登對)했다가 파하고 나와서 반드시 기뻐하며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믿을 분은 우리 전하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비록 병환이 위독한 상태에 있을 때라도 잠시도 나라의 일을 잊은 적이 없었는데, 언젠가는 말하기를 “내가 집안일에 대해서는 이처럼 소활하였다마는 나랏일에 대해서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감히 허술하게 대한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을 설행하는 일이 있을 때면 그 조목들이 밤중에도 눈앞에 꼭 선명하게 보이곤 하였다.”라고 하였다.

공은 소싯적부터 문사(文詞)에 종사한 결과 마침내 세상의 종장(宗匠)이 되어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그런데 일찍이 태극문변서(太極問卞序)와 회재답망기당서오잠발(晦齋答忘機堂書五箴跋)을 저술하여 성리(性理)의 요체를 논했고 보면, 공의 뜻이 미상불 성현의 학문을 사모했다고 할 것이니 공의 문장도 사실은 경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오도(吾道)와 관계되는 일이면 반드시 극력 주장하고 담당하면서 마치 미치지 못할 것처럼 닦아 거행하고 일으켜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공이 글을 지을 때에는 구름이 떠가고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으며 퇴고(推敲)하거나 신고(辛苦)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그 글이 비록 금석(金石)에 새기거나 응제(應制)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거의 모두 남에게 붓을 잡게 하고 입으로 불러 주어 완성했을 뿐 윤색을 가하지도 않고 별로 생각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일단 세상에 나오면 그때마다 사람들의 입에 널리 오르내리곤 하였다.

공이 지은 시문으로는 《조천록(朝天錄)》 4권, 《권응록(倦應錄)》 2권, 《폐축록(廢逐錄)》 2권, 《습유록(拾遺錄)》 2권이 있고, 그 밖에 비지(碑誌)와 행장(行狀)이 모두 15권, 소차(疏箚)ㆍ계의(啓議)ㆍ자주(咨奏)ㆍ게정(揭呈)이 모두 10권, 표전(表箋)ㆍ서기(序記)ㆍ잡저(雜著)가 모두 4권이며, 또 《서연강의(書筵講義)》 1권, 《대학강어(大學講語)》 1권, 일기(日記) 25권이 전한다. 공청(公廳)에서 작성한 계사(啓辭)와 연석(宴席)에서 읊은 작품 가운데에는 흩어져 없어진 것들이 매우 많으며, 임진왜란 이전에 지은 것들은 모두 분실되었다고 한다.

공은 일찍부터 선묘(宣廟)의 지우(知遇)를 받았다. 그리하여 낭서(郞署)로부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육경(六卿)의 지위에 뛰어올랐는데 이 모두가 상이 친히 발탁한 것이었으니, 이처럼 군신(君臣)의 뜻이 계합(契合)한 경우야말로 세상에 드문 만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광해의 시대에 이르러 공이 의리를 지키면서 전혀 동요하지 않자 뭇 흉적들이 매우 미워하면서 온갖 방법으로 모함하여 해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광해는 공의 재질을 인정하여 중국 조정의 의혹을 해소시키는 일은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공이 사신으로 나가기만 하면 중국 조정이 본국에 대한 의혹을 말끔히 풀 수 있게 하였으므로, 광해가 여전히 공을 신임하면서 시종일관 공을 해치려는 음모를 막아 보전해 주었다. 만년에는 당저(當宁 인조(仁祖) )의 지우를 받고 본병(本兵 병조 판서 )과 종백(宗伯 이조 판서 )의 신분으로 항상 이공(貳公 찬성 )을 겸하였으며, 마침내 재상의 지위에 오르는 등 은수(恩數)가 갈수록 융숭하였다. 공은 전후에 걸쳐 아홉 차례나 예조의 장관을 지내고 문형(文衡)을 두 차례 맡았으며, 네 번이나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중국 사신을 네 차례나 접빈(接賓)하였다.

국가의 예악(禮樂)ㆍ전장(典章)과 문물(文物)ㆍ의도(儀度) 중에는 공이 제정한 것이 많았고,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에 관한 크고 작은 자주(咨奏)와 게정(揭呈)도 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그리고 국가가 간난(艱難)하고 험조(險阻)한 상황을 맞았을 때나 난리를 당해 파월(播越)하는 때를 만났을 때에도 직접 나서서 떠맡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위험한 상황도 피하지 않았다. 주선(周旋)하고 응대하는 사이에 있는 힘껏 충성을 다 바쳐 번번이 분란을 해소시킴으로써 국가의 일이 끝내 안정을 되찾게 하였으니, 공이 국가를 위해 세운 공이야말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하겠다.

이 때문에 도하(都下)의 아동이나 주졸(走卒)로부터 궁향(窮鄕)ㆍ초야(草野)의 어리석고 천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의 별호(別號)를 일컬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신이 중국에 갈 적마다 중국의 학사와 대부들도 번번이 공의 안부를 묻곤 하였다. 전년에 절사(節使)가 중국에 갔을 적에 옥전(玉田)의 유사(儒士)가 무술년(1598, 선조 31)에 공이 변무(卞誣)한 주문(奏文)을 꺼내어 보여 주었는가 하면, 영원사(寧遠寺)의 승려 역시 공이 기증한 시를 암송하고 공의 별호를 일컬으면서 안부를 묻기도 하였다. 공이 중국 사람들에게 흠모를 받은 것이 또 이와 같았다.

공은 2남 2녀를 두었다. 아들 명한(明漢)은 대사성이고 소한(昭漢)은 병조 참지이다.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선발되었는데, 소한은 또 중시(重試)에 급제하기도 하였다. 장녀는 참판 홍영(洪霙)에게 출가하였는데, 그 역시 문과 출신이다. 차녀는 유학(幼學) 정현원(鄭玄源)에게 출가하였다.

명한은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일상(一相)은 수찬인데 17세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다음 가상(嘉相)은 진사이고, 다음은 만상(萬相)이고, 다음은 단상(端相)이다. 딸은 어리다. 소한은 좌찬성 이상의(李尙毅)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4녀를 낳았다. 장남은 원상(元相)이고, 다음 홍상(弘相)은 진사이고, 다음은 태상(太相)이고, 다음은 익상(翊相)이다. 딸은 모두 어리다. 홍영은 5남 4녀를 낳았다. 장남 주원(柱元)은 정명공주(貞明公主)에게 장가들어 영안위(永安尉)가 되었고, 다음 주후(柱後)는 진사이고, 다음은 주신(柱臣)이고, 다음은 주한(柱韓)이고, 다음은 주국(柱國)이다. 장녀는 이준구(李俊耈)에게 출가하여 1남 2녀를 낳았고, 다음은 진사 이시술(李時術)에게 출가하여 3남 3녀를 낳았고, 다음은 이항진(李恒鎭)에게 출가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나머지는 어리다. 정현원은 3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일상은 이조 판서 이성구(李聖求)의 딸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았고, 가상은 전 참의 나만갑(羅萬甲)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원상은 전 장령(掌令) 박안제(朴安悌)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홍주원은 4남을 낳았고, 주후는 경력 유석(柳碩)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고, 주신은 유학 홍간(洪柬)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공의 자제인 명한 등이 공의 사적(事蹟)을 차례로 서술한 뒤에 내가 일찍이 공에게 수학(受學)하면서 가장 후하게 대우를 받았다는 이유로 행장을 써 줄 것을 청하였다. 내가 감히 사양할 수 없기에, 삼가 서술한 사적을 바탕으로 대략 간추려 정리해서 세상의 사관(史官)들이 채택할 자료로 이상과 같이 제공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