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6. 10:26ㆍ고대사
청장관전서 제65권 / 청령국지 2(蜻蛉國志二)
이국(異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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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中國) 동한(東漢)의 광무제(光武帝 25~57) 때에 해당하는 수인(垂人) 때에 비로소 중국과 교통하였다. 추고(推古 593~628) 때에 성덕태자(聖德太子)가 소야 매자(小野妹子 오노 노이모꼬)를 수(隋) 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그 글에,
“해 돋는 곳의 천자가 달 보이는 곳의 황제에게 문안한다.”
하였으므로, 수 나라 황제가 이 글을 보고 기쁘지는 않았으나, 반한사(反翰使 서한을 되돌려 보내기 위한 사신) 배세청(裵世淸)을 소야 매자와 함께 왜국으로 보내니, 성덕태자가 불러서 그 무례를 꾸짖었다. 배세청이 두려워 물러나왔는데, 다시 소야 매자와 유교 학생(儒敎學生)ㆍ석전 학승(釋典學僧)을 시켜 배세청을 따라 중국에 들어가게 하였다. 신공(神功) 때에 당(唐) 나라 사신 유덕고(劉德高)가 와서 통호(通好)하였는데, 그가 돌아갈 때에 일본수군판부석적(日本守君坂部石積)이 따라서 중국에 들어가 고종(高宗)을 뵈었다.영귀(靈龜)2년 직비(直備 기비 노 마끼비[吉備眞備])가 당 나라 사신을 따라 중국에 들어갔고, 뒤에 또 부사(副使)로 들어갔다. 아배조형(阿倍朝衡)이 당 나라에 들어간 것은 당 현종(唐玄宗) 때이다. 명(明) 나라 홍무(洪武) 원년(1368)에 후광엄(後光嚴)이 선승(禪僧) 중진(中津)ㆍ묘좌(妙佐)를 보내어 시(詩)를 바쳤다. 4년에 관서친왕 회량(關西親王懷良)이 명 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일본 국왕 회량이라 칭하였으므로, 명 나라에서는 참으로 국왕인 줄 알았다. 회량은 남조(南朝)의 궁(宮 ‘미야’ 친왕에 대한 존칭)인데, 국지무정(菊池武政 기꾸찌 다께마마사)이 군주(君主)로 받들었으며, 뒤에 명 나라 사신이 축자(筑紫 쓰꾸시)에 왔을 때에 몰래 그 연고를 말하였다. 족리의만(足利義滿 아시까가 요시미쓰)이 국지무정을 공벌(攻伐)하였다. 응영(應永) 8년(1401)에 족리의만이 명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황금 1천 냥과 기물(器物) 약간을 바치니, 황제가 족리의만을 일본 국왕으로 봉(封)하였으며, 그가 죽고 나서 성조(成祖)가 공헌왕(恭獻王)이라 증시(贈諡)하고 사제(賜祭)하였다. 후토어문(後土御門) 문명(文明) 6년(1474)에 족리의정(足利義政 아시까가 요시마사)이 조선에 글을 보내어 명 나라의 감합인신(勘合印信)을 구하였는데, 대내개의흥(大內介義興)이 이를 맡았다. 족리의만 이래로 대내개가(大內介家)가 주방(周防)에서 외국에 관한 일을 맡고, 배를 만들어 상인(商人)을 왕래시켜 왔는데, 후내량(後奈良) 향록(享祿) 20년에 대내개의륭(大內介義隆 ‘오오우찌 요시다까’[大內義隆] 1507~1551)의 가신(家臣)이 모반하매, 의륭이 자살하고 감합인신을 잃었다. 그래서 왜선이 명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동국(東國) 수인(垂仁) 3년(B.C. 27)에 신라의 왕자 천일창(天日槍 아메노 히호꼬)이 비로소 내빙(來聘)하여, 우태옥(羽太玉 하후도 노다마)ㆍ족고옥(足高玉 아시다까 노다마)ㆍ제록옥록적석(鵜鹿玉鹿赤石 우가가노아까시[鵜鹿鹿赤石]) 각각 1개와 출석소도(出石小刀 이즈시노 가다나) 1구(口)와 출석리무(出石利杅 이즈시노호꼬[出石杅]) 1지(枝)와 일진경(日眞鏡 ‘히노가가미’[日鏡]) 1면(面)과 웅신리(熊神籬 구마노히모로기) 1구(具) 등 모두 일곱 가지 물건을 바치니, 단마국(丹馬國 다지마노구니)에 간직하여 신물(神物)로 삼았다. 천일창이 단마국 출도(出島 이즈시) 사람 태이(太耳 후도미미)의 딸인 마다오(麻多烏)를 얻어 단마제조(丹馬諸助 다지마 모로스꾸)를 낳고, 제조가 단마일삼저(丹馬日三杵 다지마히나라기[丹馬日楢杵])를 낳고, 일삼저가 청언(淸彦 기요히꼬)을 낳고, 청언이 전도간수(田道間守 다지마모리)를 낳았는데, 간수는 명을 받들고 신라에 가서 귤나무[橘樹]를 가져온 사람이다.
응신(應神) 15년(284)에 백제에서 아직기(阿直岐)를 보내어 왔고, 이듬해에 왕인(王仁)이 왔다. 계체(繼體 507~531) 때에 백제의 오경박사(五經博士) 단양이(段楊爾)가 왔고, 흠명(欽明) 13년(552)에 백제에서 불상(佛像)ㆍ불경(佛經)을 보내어 왔고, 또〈15년에〉 오경(五經)과 역박사(曆博士)ㆍ의박사(醫博士) 등 여러 박사와 약을 아는 사람들을 보내어 왔다. 민달(敏達) 원년(572)에 고구려에서 오우서(É羽書)를 보내어 왔고 12년에 백제의 일라(日羅)가 왔다. 효덕(孝德) 백치(白雉) 2년(651)에 신라의 사신 지만사찬(知萬沙湌)이 왔는데, 당(唐) 나라의 의관(衣冠)을 착용하였으므로 풍속을 변이(變移)하게 될까 염려하여 드디어 쫓아보냈다.
숭신(崇神) 65년(B.C. 33)에 임나국(任那國 미마나) 나라 사람이 왔는데, 그 사람은 이마에 뿔이 있었으며 나는 의부가라(意富加羅 오호기라) 나라의 왕자이며 이름은 도노아아라사(都怒我阿羅斯 쓰누가아라시도[都怒我阿羅斯等])이다.’ 하였다. 월전(越前 고시노구니[越國])의 사반포(笥飯浦 게이노우라)에 가서 3년 동안 살고 돌아갈 때에 왜황(倭皇 숭신의 아들 수인(垂仁)이다)이 말하기를,
“너희 본국의 이름을 고치되 어간성 천황(御間城天皇)의 어명(御名)을 따라 그대로 너희 나라 이름으로 하라.”
하고는, 적견(赤絹)을 주었다. 그래서 돌아가 국명을 미마나(彌摩那)라 고쳤는데, 신라 사람들이 군사를 일으켜 그 적견을 빼앗았으며, 마침내 신라에게 멸망하였다.
천지(天智) 5년(666)에 탐라(耽羅)에서 비로소 내빙(來聘)하였고, 7년에 방물(方物)을 바치니 오곡(五穀)의 씨를 내렸다. 성무(聖武) 신귀(神龜) 5년(728)에 발해국(渤海國)에서 비로소 내빙하였고, 광인(光仁)ㆍ차아(嵯峨)ㆍ인명(仁明)ㆍ청화(淸和)ㆍ우다(宇多)ㆍ제호(醍醐) 때에도 내빙을 끊지 않았다. 후원융(後園融) 영화(永和) 3년(1377)에 고려의 사신 정몽주(鄭夢周)가 축전(筑前 지꾸젠)에 내빙하였는데, 그때 대우(大友 오오도모)씨가 행인(行人 사자(使者))을 침학(侵虐)하였으므로 정몽주도 구금당했었으나, 마침내 감화되어 예대(禮待)하여 보냈다. 곽인(郭麟)은 구금당하여 절의(節義)를 굽히지 않고 죽었는데, 무덤의 풀이 다 서쪽을 향하였다. 고려의 사신으로는 또한 나흥유(羅興儒)ㆍ안길상(安吉常)ㆍ이자용(李子庸) 등이 있었다.
남만(南蠻) 예전부터 천축(天竺 인도의 옛 이름)과 남만(南蠻) 여러 나라의 장삿배가 일본에 왔고, 일본 사람들도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전에 암액리아(諳厄利亞 포르투갈어의 암그리아, 곧 영국)ㆍ이서파이아(以西巴爾亞 에스파니아, 곧 스페인의 옛 이름)와 아마항(阿媽港 중국 광동(廣東)에 있는 지명)ㆍ여송(呂宋 루손, 곧 필리핀의 북쪽 큰 섬 이름) 등의 남만 사람들이 야소법(耶蘇法 예수교)을 일본에 퍼뜨려서 일본의 서국(西國 기내(畿內) 이서 지방을 가리킴) 사람들이 사술(邪術)에 친근하므로, 그것을 금지하여 그 괴수를 능지(凌遲)하고 당여(黨與)를 참수(斬首)하되,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불법(佛法)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용서하였다. 관영(寬永) 15년(1638) 이래로 남만의 배가 와서 정박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고 일본 사람이 외국에 왕래하는 것도 금지하였으나, 아난타(阿難陀 미상)ㆍ섬라(暹羅 샴, 곧 타이의 옛 이름)ㆍ교지(交趾 인도지나반도의 동북부)ㆍ동경(東京 인도지나반도의 동북부)ㆍ대원(大寃 타이완[臺灣])과 중국에서는 해마다 와서 정박하였으며, 점성(占城 인도지나반도의 동남부)ㆍ간보채(柬埔寨 캄보디아)ㆍ태니(太泥 말레이반도의 중북부)ㆍ육갑(六甲 말레이반도의 중남부)ㆍ교류파(咬𠺕吧 카루파. 지금의 자카르타)ㆍ조와(爪哇 자바)ㆍ번차(番且)ㆍ모라가(母羅伽 말라카. 셀레베즈의 동쪽 섬)ㆍ발니(渤泥 보르네오. 타이의 남부인 바르니라고도 함)ㆍ막와이(莫臥爾 모우르. 옛 인도의 한 지방명)ㆍ방갈랄(傍葛剌 수마트라의 벤쿨렌?)ㆍ파사(波斯 페르시아)ㆍ파우(琶牛 페구. 버마의 남부)ㆍ소문답랄(蘇門答剌 수마트라) 등 무릇 35개국에는 아란타(阿蘭陀 홀랜드) 사람들이들어가서 교역하여 그곳 토산의 화물을 가져와 일본에서 팔았으니, 일본이 나라가 가멸하고 군사가 강해져 바다 가운데에서 세력을 떨치는 까닭은 능히 외국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마가타(摩迦陀) 관영(寬永) 15년 이전에 천축(天竺)에 간 일본 사람이 많았다. 파마(播磨 하리마)의 고사(高砂 다까사고)의 뱃사람이 관영 3년 10월 16일에 장기(長崎 나가사끼)에서 배를 띄워 이듬해 3월 3일에 천축 마가타국(摩迦陀國)에 이르렀다. 장기에서 남으로 6백 40리를 가면 규롱(圭籠)이라는 태원(太寃)의 북쪽 끝에 이르는데, 태원은 대만(臺灣)이다. 거기서 서쪽으로 6백 50리 가면 광동(廣東) 바다에 이르는데, 이곳은 바다가 깊어서 깊이가 천 길쯤 된다. 밤에 남방으로 큰 별 둘을 보고 방위를 정하여 남으로 3백 리 가면 구비(駒鼻)에 이르는데, 이곳은 중국의 동남 모퉁이이다. 거기서 서쪽으로 3백 리 가면 교지(交趾)에 이르고, 또 남으로 4백 리 가면 점성(占城)에 이르고, 또 남으로 4백 리 가면 간보채(柬埔寨) 땅에 이르고 또 남으로 2백 리 가면 섬라(暹羅) 땅에 이르고, 또 서북으로 8백 리 가면 마가타국 유사천(流沙川) 어귀에 이른다. 장기에서 여기까지 3천 7백 리인데, 중국 이수로 계산하면 3만 7천 리가 된다. 칠구월부터 삼사월까지는 무더워서 날마다 서너 번 멱감는다. 옷은 직철(直裰)과 같고, 작은 칼을 차고, 머리털은 꼭대기에 묶어서 비녀를 꽂으며, 여인도 원계(圓䯻 둥글게 틀어올린 머리)하며, 천관(天冠)에 영락(瓔珞)을 단다. 부도(浮屠 승려)의 계법(戒法)이 매우 엄하여, 걸어다닐 때에 여인의 발자취를 밟지 않는다. 정월부터 곡식을 심어 3월ㆍ6월ㆍ10월 세 번 익으며, 그 짚은 두 길이나 된다. 집집이 공작(孔雀)을 기르는데, 봉황(鳳凰)이 하늘을 날면 공작이 두려워서 집안으로 도망해 들어간다.
유구(琉球) 복건(福建 중국 복건성)의 동남에 해당하며, 일본 살마(薩摩)의 서남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도읍 이름은 나패(那覇)이다. 건방(乾方)의 섬을 팔두산(八頭山)이라 하는데 그 사이의 해로(海路)ㆍ육로(陸路)는 모두 3백 70리이며, 팔두산에서 복건까지는 50리이며, 나패에서 살마까지는 3백 80리인데 그 사이에 작은 섬 일곱이 있다. 그 풍속은 환기(紈綺 비단, 환은 흰 깁 기는 무늬 있는 비단)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자기(磁器)ㆍ철부(鐵釜)를 귀하게 여기며, 귀신을 몹시 믿고 의약(醫藥)을 모른다.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은 부인을 시(尸 신령을 대신하여 제사를 받는 자)로 삼으며 그 우두머리를 여군(女君)이라 부른다. 오경(五經)은 없으나 사서(四書)는 있으며, 《두율우주(杜律虞注)》를 경(經)으로 삼는다. 화살은 2백 보까지 갈 수 있다. 풍속이 기한(飢寒)을 잘 견디며, 싸움을 좋아한다. 못 벗어날 것을 알면 칼을 당겨서 스스로 죽는다. 강한 나라라고 일컬으나 유구인 열이 왜인 하나를 당하지 못한다. 일본의 원의조(源義朝 ‘미나모도 노 요시도모’ 1123~1160)는 용맹하고 힘세기가 짝이 없는데, 이조원(二條院) 때에 이두(伊豆 이즈)에 유배되었다가 유구에 이르러 요괴[魑魅]를 쫓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죽은 뒤에 사당을 세웠는데, 순천대명신궁(舜天大明神宮)이라 한다. 이곳의 토산물로는 파초포(芭蕉布)ㆍ흑사탕(黑沙糖)ㆍ포성주(泡盛酒)ㆍ번초(番蕉)ㆍ유구연(琉球筵)이 있다.
하이(蝦夷) 일명 획복(獲服)이라 하고 일고견국(日高見國)이라고도 하고 모인국(毛人國)이라고도 부르는데, 일본의 동북 바다 가운데에 있다. 그 땅은 남북으로 길고, 북으로 숙신(肅愼)과 인접하였으며, 험한 산이 많다. 그 남쪽 바닷가의 포구 송전(松前 마쓰마에)은 송전지마수(松前志摩守 마쓰마에 시마노가미)의 성거(城居)이다. 송전에서 육오(陸奧 쓰무)의 진경(津輕 쓰가루)까지 바다로 15리이고, 송전에서 증우야(曾宇夜 소오야[宗谷])까지 3백 80리인데 증우야는 하이 땅의 북쪽 끝이다. 증우야에서 가량부지(加良不止 가라후도[樺太])까지 43리인데, 가량부지는 섬 이름이며 곧 숙신에 속한 땅이다. 남자나 여자나 피발(被髮)하고 문신(文身)하며 사람됨이 용맹하고 남녀가 섞여 살며 부자의 분별이 없다. 겨울에는 굴에서 자고 여름에는 둥우리에 살며, 털가죽을 입고 짐승의 피를 마신다. 키는 6척이며 피발하고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다. 다닐 때에는 발소리가 나지 않고 높은 데에 오르거나 물에서 헤엄칠 때에는 짐승처럼 빠른데 염장(鹽醬)을 먹지 않기 때문이다. 한 말을 들 힘도 없으나 이마에만은 힘이 있어서 짐은 다 이마의 힘을 쓴다. 수명 40~50세를 넘기는 사람이 드문데, 이것은 고기만을 먹고 곡식을 먹지 않기 때문이다.
군장(君長)의 호칭을 사구사윤(沙具沙允)이라 하고 귀릉(鬼菱)이라고도 부르며, 그 나라에는 글자가 없었다. 은혜를 받고서는 잊으나 원수지면 갚으며, 화살을 묶은 머리 속에 감추고 칼을 옷 안에 찬다. 당 나라 현경(顯慶 656~660) 때에 왜사(倭使) 석진수길상(石津守吉祥)을 따라 당 나라에 들어갔다. 경행(景行 B.C. 71~A.D. 130) 때에 군사를 내어 하이를 토벌하매, 하이가 일본의 종나라[奴國]가 되었다. 물고기 기름[魚脂]을 마시는데, 지주(脂酒)라 한다. 활을 쏘면 멀리 가지는 않으나, 쏘면 반드시 짐승을 맞힌다. 또 초오두약(草烏頭藥 초오두는 독초(毒草)의 이름)을 만들어 촉에 발라 사람을 쏘면 피부가 썩어 해지는데, 바삐 피부를 도려내고 날마늘을 갈아 붙이면 곧 살아난다. 부모와 지아비의 상(喪)을 당하면 친속(親屬)이 모여 와서 목도(木刀)로 상을 당한 사람의 머리와 등을 두들겨 살이 다 상하여 터지고 거의 죽게 되어야 그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을 효행(孝行)으로 여기며, 이것을 조타(弔打)라 한다. 곁에 있던 사람이 얼른 안아서 바다에 던지고 짠물로 씻으면 헌 데가 나으며, 더는 애모(哀慕)하지 않는다. 남이 잘못하여 죽은 사람의 일을 물으면 분노하여 좋아하지 않는데, 물건으로 보상하면 ‘잊어 가는 슬픔을 어찌하여 다시 권하여 비탄(悲歎)하게 하느냐?’ 한다.
혹 전하기를 ‘원의경(源義經 미나모도 노 요시쓰네)이 육오(陸奧)에 있을 때에 태형(泰衡)의 난(難)을 당하여 거짓으로 죽은 체하고 하이로 달아났는데, 백성이 다들 경복(敬服)하였으며, 죽은 뒤에 사당을 세워 남무의경(南無義經)이라 칭한다.’고도 한다. 이곳의 토산물로는 녹비(鹿皮)ㆍ웅비(熊皮)ㆍ엽호피(獵虎皮 엽호는 바다짐승의 이름)ㆍ오해서(熬海鼠 마른 해삼)ㆍ올눌제(膃肭臍 물개의 음경(陰莖))ㆍ곤포(昆布 다시마)ㆍ복(鰒 전복ㆍ일본에서는 복어를 뜻하기도 함)이 있다.
대원(大冤) 하문(厦門 아모이)에서 남쪽(실은 동쪽)으로 1백 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중국에서는 손방(巽方 동남방)이 되고 일본에서는 신유방(申酉方 신방과 유방의 간방(間方), 신방은 동남, 유방은 서방)이 된다. 일명 대만(臺灣)이라고도 하고 동녕(東寧)이라고도 하고 또 탑갈사고(塔曷沙古)라고도 부른다. 날씨가 늘 덥고 인품(人品)이 비천(卑賤)하며, 나는 듯이 가볍고 빠르며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한다. 아란타(阿蘭陀) 사람들이 빼앗아 성곽(城郭)을 만들고 일본을 왕래할 때의 여관(旅館)으로 삼았었는데, 지금은 중국의 고을이 되었다. 이곳의 토산물로는 백사탕(白沙糖)ㆍ녹비(鹿皮)ㆍ산마피(山馬皮)가 있다. 일본까지 바다로 5백 40리이다.
안남(安南) 옛 교지(交趾)이다. 일본에서 바다로 1천 4백 리 떨어져 있으며, 날씨가 따뜻하여 서리와 눈을 보지 못한다. 남녀가 다 염치(染齒 이를 철장(鐵漿)으로 물들임)하며, 남자는 정수리를 삭발한다. 복주(福州)ㆍ장주(漳州)의 상인들이 무역하여 일본으로 온다. 이곳의 토산물로는 기남(奇楠)ㆍ침향(沈香)ㆍ철도목(鐵刀木)ㆍ빈랑(檳榔)ㆍ소방(蘇方)ㆍ육계(肉桂)ㆍ곽향(藿香)ㆍ야자주(椰子酒)ㆍ호초(胡椒)ㆍ등황(藤黃)이 있다.
동경(東京) 교지(交趾)의 도부(都府)이며, 본디 형제의 나라였는데, 자손에 이르러 서로 다투어서, 교지와 동경이 두 나라로 나뉘었다. 두 나라의 경계에 있는 기야모(岐夜牟)라는 산에 천하에서 제일이라는 육계(肉桂)나무가 있었는데, 병화(兵火) 때문에 산이 타서 육계가 멸종되었다. 이곳의 인물은 교지와 같으나, 정수리를 삭발하지 않고 머리를 묶는다. 일본까지 바다로 1천 6백 리이다. 이곳의 토산물로는 천아융(天鵝絨 우단)ㆍ축사(縮砂 나무이름. 축사밀(縮砂蔤))ㆍ아연(亞鉛)ㆍ용안(龍眼)ㆍ도기(陶器)ㆍ칠기(漆器)가 있다.
점성(占城) 한(漢) 나라의 임읍(林邑)이었으며, 남천축(南天竺 오천축(五天竺)의 하나. 인도의 남부)에 인접하여 있다. 매우 더워서 벌거벗거나 흰 첩포(氎布 털로 짠 고운 천)를 몸에 두르며, 머리털을 모아서 상투를 틀거나 흩여서 뒤로 늘어뜨린다. 중국 사람이 그곳에 가서 무역하여 일본에 통한다. 일본에서 1천 7백 리 떨어져 있다. 이곳의 토산물로는 백단(白檀)ㆍ코끼리ㆍ보살석(菩薩石)ㆍ맹화유(猛火油 석유류(石油類))ㆍ화주(火珠)가 있다.
간보채(柬埔寨) 곧 남천축의 소속이며, 사철 덥다. 일본까지 바다로 1천 리이며, 사람들이 다 벌거벗는다. 중국 사람이 가서 무역하여 일본으로 온다. 이곳의 토산물로는 녹비(鹿皮)ㆍ상아(象牙)ㆍ서각(犀角)ㆍ혈갈번지화(血竭樊枝花)가 있다.
태니(太泥) 남천축 안의 작은 나라이다. 인물은 간보채와 같으나, 언어가 다르다. 중국 사람이 무역하여 일본에 이른다. 일본에서 2천 2백 리 떨어져 있다. 이곳의 토산물로는 서국미(西國米)ㆍ빙편(氷片 용뇌(龍腦))ㆍ사향묘(麝香猫)ㆍ앵무(鸚鵡)가 있다.
육갑(六甲) 태니의 남쪽에 인접한 나라이며, 태니보다 작은데, 육곤(六昆)이라고도 한다. 일본까지 바다로 2천 2백 리이다. 중국 사람들이 무역하여 일본으로 온다. 이곳의 토산물로는 연와(燕窩 해조(海鳥)의 이름)ㆍ빈랑(檳榔)ㆍ소방(蘇方)ㆍ등석(藤席)ㆍ유향(乳香 향목(香木)의 이름)이 있다.
섬라(暹羅) 남천축 안에 있는 나라이며, 일본에서 2천 4백 리 떨어져 있다. 매우 더우나 겨울철 밤에는 조금 서늘하다. 벌거벗고 허리에 흰 면포(綿布)를 두르며, 머리털은 짧게 오그라졌다. 이곳의 왕이 해마다 3척의 상선을 일본에 보내어 물건을 파는데, 6~7월에 남풍을 얻으면 배를 띄운다. 이곳의 토산물로는 아선약(阿仙藥 설사에 먹는 약의 이름)ㆍ백두구(白荳蔲 약초의 이름)ㆍ화포(花布 짐승ㆍ화초 등의 채색 무늬를 넣어 짠 피륙의 이름)ㆍ교피(鮫皮 상어 가죽)가 있다.
여송(呂宋) 대원(大冤) 남쪽에 있으며, 일본에서 8백여 리 떨어져 있다. 야소(耶蘇)의 종문(宗門)을 배우므로, 관영(寬永) 15년(1638) 이래로 그들이 와서 정박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곳의 토산물로는 녹비(鹿皮)ㆍ우피(牛皮)ㆍ소방(蘇方)이 있다.
아마항(阿媽港) 광동(廣東)의 남도(南島)이다. 예전부터 고약방(膏藥方)과 과자(果子)ㆍ곡종(穀種)을 가져와서 바쳤으며, 여송(呂宋)과 함께 남만(南蠻)에 속하는데, 이곳 사람들이 많이 야소의 종문이 되었으므로, 관영 15년에 왕래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일본까지 9백여 리이다.
교류파(咬𠺕吧) 일본에서 3천 4백 리 떨어져 있고, 조와국(爪哇國)에 속하며, 중국의 정남에 있는 해도(海島)이다. 중고(中古) 이래로 아란타(阿蘭陀) 사람이 빼앗아 성곽을 쌓고 여러 나라로 통상(通商)하는 항구로 삼았다. 북극(北極)에서 1백 도(度) 떨어져 있어 적도(赤道)의 남쪽에 해당하므로 매우 더운데, 겨울철에는 더욱 덥고 5~6월에는 도리어 서늘하다. 뒤에 아란타와 혼인하고 관(館)을 세워 접대하였으며, 화물(貨物)을 거둬서 일본에 왕래하였다. 이곳의 물산(物産)으로는 주사(朱砂)ㆍ몰약(沒藥 약향(藥香)의 원료가 되는 나무의 이름)ㆍ석황(石黃 안료(顔料)의 이름. 석웅황(石雄黃))ㆍ자단(紫檀 가구(家具) 등의 재목으로 하는 나무의 이름)ㆍ공청(空靑 염료(染料)ㆍ약재로 쓰이는 광물의 이름)ㆍ용뇌(龍腦)ㆍ파차(巴且 파초)ㆍ살구[杏]ㆍ아랄길주(阿剌吉酒 양주(洋酒)의 이름 Arak)가 있다.
발니(渤泥) 중국 서남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일본에서 3천 9백 리 떨어져 있는데, 인물은 섬라와 같고, 토산물로는 용뇌(龍腦)가 있다.
방갈랄(榜葛剌)은 곧 동인도(東印度)이며 일본까지 3천 3백 리인데, 아란타가 무역하여 일본에 이르며, 토산물로는 나가천침(羅加天綅)ㆍ금건면포(金巾綿布 옥양목. canequine)가 있다.
막와이(莫臥爾)는 남천축 안에 있고, 풍속은 섬라와 같으며, 일본까지 3천 8백 리인데, 토산물로는 화포(花布)ㆍ화모전(花毛氈)이 있다.
성다묵(聖多黙 산토메, 인도 동해안에 있는 지명)은 막와이와 가까운 나라이고, 일본에서 3천 8백여 리 떨어져 있으며, 토산물로는 교록혁(鮫鹿革 상어ㆍ사슴의 가죽)이 있는데, 섬라와 중국 사람들이 그 토산물을 일본에 가져와서 판다.
인제아(印第亞 인디아) 천축의 서남 모퉁이이며, 일본에서 4천 리 떨어져 있는데, 중국 사람들과 아란타 사람들도 왕래하지 않으며, 예전에는 일본에 많이 왔으나 지금은 오지 않는다. 이곳의 물산으로는 피혁(皮革)이 가장 좋다.
파우(琶牛)는 남천축 안에 있으며, 일본에서 2천 5백 40리 떨어져 있는데, 풍습은 섬라와 같고, 석가(釋迦)의 구적(舊跡)이 이곳에 있으며, 토산물로는 상아(象牙)ㆍ아연(亞鉛)이 있다.
파사(波斯)는 서양에서 인도로 오는 길목이며, 일본에서 5천 1백 리 떨어져 있는데, 토산물로는 안식향(安息香)ㆍ포도주(葡萄酒)가 있다.
안타만(晏陀蠻)은 사람들의 몸이 옻처럼 검으며, 일본에서 8천여 리 떨어져 있다.
아란타(阿蘭陀) 서북 끝에 있는 가장 추운 나라이며, 홍모국(紅毛國)이라고도 한다. 모두 7대주(大州)가 있고, 아란타는 그 중의 한 주이었는데, 지금은 총명(總名)이 되었다. 7대주의 이름은 세이라모지(世伊羅牟止)ㆍ구류우녜해(具留宇禰解)ㆍ우이다량목(宇伊多良木)ㆍ계류지우모지(計留止宇牟止)ㆍ호우포류이세류(乎宇布留伊世流)ㆍ포리이수량모지(布利伊須良牟止)ㆍ호량모태(乎良牟太)이다. 일본에서 1만 2천 9백 리 떨어져 있다. 그 나라의 임금은 고모파이아(古牟波爾亞)라 부른다. 그 나라 사람들은 살갗이 희고 머리털이 붉고 코가 높고 눈이 둥글며, 늘 개처럼 한 다리를 들고 오줌누며, 아름답게 꾸민 모직(毛織) 옷을 많이 입는다. 먼 나라와 무역하기를 좋아하여, 교류파(咬𠺕吧)에 관(官)을 두고 일본과 그 밖의 여러 나라에 상선을 보내는데, 10년마다 한 번 회계(會計)한다. 그 차관(次官)은 해마다 6~7월에 장기(長崎 나가사끼)에 와서 이듬해 봄에 강호(江戶 에도)에 나아가 연시(年始)와 교대(交代)의 예(禮)를 올리고, 다시 6~7월에 오는 사람과 교대하여 가는데, 그 사람을 가비단(加比丹)이라 한다. 글을 가로 쓰며, 음식을 먹을 때에는 낮은 관원이 앞에서 고무(鼓舞)하여 권한다. 장수하지 못하여 60세 된 사람이 매우 드물며, 성정(性情)이 정교한데 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산수(算敎)와 외치 의약(外治醫藥)이 가장 좋다. 상선이 35~36개국에 왕래하므로 진기한 물건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소문답랄(蘇門答剌)ㆍ파우(琶牛)ㆍ방갈랄(傍葛剌)ㆍ파사(波斯)ㆍ발니(渤泥) 등의 나라에는 아란타만이 왕래할 수 있는데, 대개 그 배들은 다 8개의 돛이 있으므로 순풍ㆍ역풍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의 토산물로는 성성피(猩猩皮)ㆍ산호주(珊瑚珠)ㆍ마노(瑪瑙)ㆍ호박(琥珀)ㆍ목내이(木乃伊)ㆍ안경(眼鏡)ㆍ나경(羅經 나침판)ㆍ토규(土圭 시계)ㆍ성척(星尺 별의 도수를 측정하는 기계)이 있다.
[주-D001] 신공(神功) …… 뵈었다 :
신공이 다스리던 201~269년은 중국의 한말(漢末)ㆍ삼국초(三國初)에 해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당 고종(唐高宗)의 재위(在位)는 649~683년이니, 원문의 ‘신공 때에’ 아래에 빠진 글이 있는 듯하다. 원문의 그 아래 이야기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제명(齊明) 5년 7월에 보이는데, 여기에도 유덕고(劉德高)를 따라서 중국에 들어갔다는 말은 없다. 그때 일본 사신은 쇼오기무게[小錦下 : 관계(官階)] 사까이베노무라지 이와시끼[坂合部連石布] 등으로 되어 있고 “바다를 건너다가 역풍을 만나 사끼이베노무라지 이나쓰미[坂合部連稻積] 등이 표류하였다.”는 주(註)가 있다. 원문에는 고종을 뵈었다고 하였으므로 이들이 당 나라에 갔던 일을 말하는 것일 터인데, 그 주를 상고하면 이나쓰미[稻積]와 이와시끼[石布]는 반드시 동일인이라 할 수 없으나, 원문에 석적(石積)이라 한 것도 두 사람을 혼동한 듯하다.
[주-D002] 영귀(靈龜) 2년 …… 들어갔고 :
영귀 2년(716)에는 견당사(遣唐使)를 임명하였고, 떠난 것은 그 이듬해이다.
[주-D003] 아배조형(阿倍朝衡) :
아베 노 나까마로[阿倍仲麻呂 698~770], 717년에 견당사(遣唐使)를 따라 당 나라에 들어가 당 현종 때에 중국에서 벼슬하면서 조형(朝衡 : 조향(晁鄕)으로도 씀)이라 이름을 고쳤다.
[주-D004] 중진(中津)ㆍ묘좌(妙佐) :
중진은 절해중진(絶海中津)이며, 묘좌는 절해중진과 함께 명 나라에 갔던 여림양좌(汝霖良佐)를 말하는 듯하다.
[주-D005] 관서친왕 회량(關西親王懷良) :
관서에 출진(出鎭)한 친왕 회량이라는 뜻이다. 왕통 계승 문제로 변란이 일어나 쫓겨서 요시노[吉野]에 있던 남조(南朝)의 후제호(後醍醐)는 아들들을 각지로 보내어 세력을 심고 왕조의 재건을 도모하였다. 그런데 이때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임명된 가네나가[懷良] 친왕을 말하는 것인데, 이를 별칭하여 진서궁(鎭西宮)ㆍ구주궁(九州宮)ㆍ아소궁(阿蘇宮) 등으로 부른다.
[주-D006] 대내개의흥(大內介義興) :
오오우찌 요시오끼[大內義興]. 1477~1528. 성 밑에 스께[介 : 차관(次官)]를 붙인 것은 그 가문이 주방(周防 : 스오오) ‘스께’를 습작(襲爵)하기 때문이다.
[주-D007] 향록(享祿) 20년 :
이 사건은 천문(天文) 20년(1551)에 있었던 것이며, 향록은 1528~1531년의 4년간 쓴 연호이다.
[주-D008] 풍속을 …… 쫓아보냈다 :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마음대로 풍속을 바꾼 것을 미워하여 꾸짖어 쫓아보냈다고 하였다.
[주-D009] 어간성 천황(御間城天皇) :
곧 숭신 천황(崇神天皇)이다. 이름이 미마기이리비고[御間城入彦]이므로 이렇게 부른다.
[주-D010] 7년 :
8년의 오기(誤記)일 것이다. 《일본서기》 천지(天智) 8년 정월 조에 “탐라에서 왕자 구마기(久麻伎)를 보내 공물을 바쳤는데, 탐라왕에게 오곡(五穀)의 씨를 내렸다.” 하였다.
[주-D011] 곽인(郭麟) :
충렬왕 18년(1292) 선유사(宣諭使) 김유성(金有成)을 따라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일본에 갔다.
[주-D012] 건방(乾方)의 …… 하는데 :
건방(서북방)은 곤방(坤方 : 서남방)을 잘못 적은 것일 것이다. 팔두산(八頭山)은 팔중산 열도(八重山列島)를 말하는 것이며, 이 섬들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뻗어 있는 유구 열도(琉球列島)의 서남단에 있고, 나하[那霸]는 유구 열도의 복판에 있는 가장 큰 섬에 있다.
[주-D013] 《두율우주(杜律虞注)》 :
원대(元代)의 우집(虞集)이 두보(杜甫)의 칠언율시(七言律詩)를 모아 주해를 붙여 만든 책.
[주-D014] 원의조(源義朝)는 …… 하였다 :
이 이야기는 요시도모[義朝]의 아우인 다메도모[爲朝]와 ‘다메도모’의 아들에 관한 전설이다. ‘다메요시’는 1156년의 난(亂) 때에 숭덕상황(崇德上皇)편에 서서 후백하천황(後白河天皇)에게 편든 ‘요시도모’에게 패전하여 이즈[伊豆]의 오오시마[大島]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여러 섬에 세력을 폈으나, 1170년에 추토군(追討軍)에게 패하여 자살하였다. 그런데 유구의 기록에는, 1165년에 다메도모가 ‘이즈’로부터 유구로 건너와 한 영주(領主)의 누이와 인연을 맺어 존돈(尊敦)을 낳고 자신은 일본으로 돌아갔고, 그 뒤 존돈이 15세 때에 이용(利勇)이란 역신(逆臣)이 임금을 죽이고 왕이 되매, 존돈이 군사를 일으켜 이용을 죽이고 추대되어 왕이 되었는데 순천왕(舜天王)이라 칭하였다고 전한다.
[주-D015] 하이(蝦夷) :
‘에미시’ ‘에비스’ ‘에소’ 등 여러 가지로 읽는다. 대개 일본의 중앙 정권이 미치지 않던 무쓰[陸奧]로부터 동북 지방을 말하는 것인데, 동북 지방을 개척해 나아감에 따라 이 이름이 가리키는 지방도 점점 동북 밖으로 옮겨 갔다. 원문에 획복(獲服)이라 한 것은 미상하다. 히다까미 노 구니[日高見國]라 한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상륙풍토기(常陸風土記)》 등 여러 기록에 보이는데, 대개 ‘무쓰’의 남부의 한 지방으로 보이며 그 나라가 옮겨 다녔을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사실(史實)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원문에서 지방을 밝힌 것은 지금의 북해도(北海島)인데도 고사(古事)에 언급한 것은 거의 다 ‘무쓰’ 등지의 일이다.
[주-D016] 피발(被髮) :
머리털을 땋거나 틀어올리거나 하여 꾸미지 않고 자연대로 두는 것. 그러나, 《일본서기》 경행(景行) 27년 2월 조의 다께노우찌 노 스꾸네[武內宿禰]의 주언(奏言) 중에 “동쪽 오랑캐 가운데에 히다까미 노 구니[日高見國]가 있습니다. 그 나라 사람들은 남녀가 다 퇴결(椎結 : 뒤로 늘어뜨려 방망이 모양으로 묶은 머리)하고 문신하며 사람됨이 용맹한데, 이를 통틀어 에미시[蝦夷]라 합니다 …… ” 하였으니, 원문의 이 대목은 위의 《일본서기》의 글을 베낀 것인데, 피발과 퇴결은 머리 모양이 다른 것이며, 원문에도 뒤에는 ‘화살을 묶은 머리 속에 감춘다.’ 하였으니, 퇴결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주-D017] 왜사(倭使) …… 들어갔다 :
《일본서기》제명(齊明) 5년 7월 조에 “사까이베 이와시끼[坂合部石布]와 쓰모리 기사[津守吉祥]를 당 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면서 미찌노꾸[道奧 : 곧 무쓰(陸奧)의 에미시(蝦夷)] 남녀 두 사람을 당 나라 천자에게 보였다.” 하였다. 원문에 ‘석진수길상’이라 한 것은 두 사신의 이름을 혼동한 것이다.
[주-D018] 태형(泰衡)의 난(難) :
요시쓰네[義經]가 형 요리도모[賴朝]에게 미움을 사서 몰리게 되자 후지와라[藤原]씨에게 비호를 구하였었으나, 요리도모의 압박에 못 이긴 후지와라 노 야스히라[藤原泰衡]에게 습격당하여 자살한 일.
[주-D019] 안타만(晏陀蠻) :
버어마와 수마트라 사이의 바다에 있는 섬들로 된 나라인 안다만이라고 하나, 원문에서나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등에서나 일본에서 7~8천 리가 된다 하였는데, 그렇다면 페르시아보다도 훨씬 멀어야 하나, 반드시 이곳이라 확신하기 어렵다.
[주-D020] 가비단(加比丹) :
‘가삐딴’이라 읽는다. 포르투갈어 capitāo의 음역(音譯)이며, 선장(船長)의 뜻이다.
[주-D021] 목내이(木乃伊) :
‘미이라’라 읽는다. 아라비아 등지에서 나는 나무에서 채취한 즙(汁)으로 만든 방부제(防腐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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