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마루에 오르면 하얀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데, 곧 유구(琉球)의 지경이다

2022. 9. 1. 17:25제주도

사》 고기(古記)

○ 15대손 고후(高厚)ㆍ고청(高淸)ㆍ곤제(昆弟) 형제 3명이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眈津)에 정박했는데, 대개 신라의 전성시기였다. 이때에 객성(客星)이 남방에 나타났으므로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이국인(異國人)이 와서 조회(朝會)할 징조입니다”고 하였다. 고후 등이 이르자 왕이 가상히 여겨 후를 성주(星主)라 칭하였는데, 별을 움직여 징조를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고청으로 하여금 임금의 가랑이 사이로 나오게 하며, 자기 아들처럼 사랑하여 왕자라 칭하였고, 또 그 막내 동생을 도내(都內)라 부르고, 읍호(邑號)를 탐라(耽羅)라 하였으니, 처음으로 탐진에 배를 대어 신라에 조회하였기 때문이다. 각각 보배로 만든 일산과 옷과 띠를 하사하여 보냈다.

○ 이로부터 자손이 번성하고 신라를 공경히 섬기니, 드디어 고(高)를 성주로 삼고, 양(良)을 왕자로 삼고, 부(夫)를 도상(徒上)으로 삼았다. 후에 양(良)을 고쳐 양(梁)으로 하였다. 여지승람》 《고려사》 고기(古記)

후에 백제에 속하였다. 문주왕 2년 병진(476)에 방물(方物)을 갖추어 와서 조공을 바쳤다.

○ 동성왕(東城王) 21년(499)에 탐라국에서 공물을 바치지 않으므로 임금이 친히 정벌하러 무진주(武珍州)에 이르렀는데, 탐라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죄를 빌었으므로 중지하였다. 《여지승람》

○ 백제가 멸망하자 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탐라국 임금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하였다. 《여지승람》 ○ 그때 백제가 망한 지 얼마 안 되어 음률이 아직 백제의 관직 명칭을 쓰고 있었다.

○ 고려 태조 20년(937)에 태자 말로(末老)를 보내어 와서 조회하였으므로 성주와 왕자에게 벼슬을 내려 주었다. 《여지승람》

○ 숙종 10년(1105)에 탁라(乇羅)를 고쳐 탐라군으로 삼았다. 의종(毅宗) 때에 낮추어 현령(懸鈴)으로 삼았다. 《여지승람》

○ 목종(穆宗) 5년(1002)에 탐라산에 네 구멍이 열리고 빨간 물이 솟아나와 5일 만에 멈추자, 물이 와석(瓦石)이 되었다. 또 10년에 산이 탐라 바다 속에서 솟아 나왔다. 산이 처음 나올 때에 구름과 안개가 캄캄하게 끼었고 지진이 우레 같았는데, 7일 밤낮 만에 개이기 시작하였다. 산의 높이가 1백여 길이나 되고, 둘레가 40여 리였으며 연기와 남기(嵐氣)가 그 위를 가려서 바라보면 유황색(硫黃色) 같았고 초목이 없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목종이 태학 박사(太學博士) 전공지(田拱之)를 보내 가서 보게 하니, 공지가 몸소 산 아래에 이르러 그 형상을 그려서 올렸는데, 서산(瑞山)지금은 대정현(大旌縣)에 속한다. 《여지승람》 이라 이름하였다. 얼마 안 되어 임금과 모후(母后)가 강조(康兆)에게 시해되는 변을 당하였고, 원종(元宗) 때에는 몽고 군사를 피하여 강화(江華)로 들어갔다. 환도하자 장군 배중손(裵仲孫)과 노영희(盧永禧) 등이 야별초(夜別抄)의 군사로서 강화에서 반란을 일으켜 종실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세워 왕으로 삼고, 강화에 머물렀던 백관의 처자 및 공사(公私)의 재화를 크게 약탈하여 바다를 건너 남으로 달아나서 진도(珍島)에 웅거하였다가 돌아서 제주로 들어갔다. 군사를 내어 나주(羅州)ㆍ전주(全州) 등의 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고려에서 김방경(金方慶)을 보내 몽고 군사와 합동으로 위주(僞主) 온(溫)을 진도에서 쳐서 목베이니, 남은 무리가 다시 제주도로 들어가 바다에 출몰하면서 충청도에 침입하여 고란도(孤蘭島)의 전선(戰船)을 불태우고, 홍주 부사(洪州副使) 이행검(李行儉)을 잡아가니 개성이 계엄(戒嚴)하였다. 14년에 또 김방경을 보내 몽고 장수 흔도(忻都) 등과 모여서 토벌하니, 적의 괴수 김통정(金通精) 등이 달아나 산으로 들어가 자살하고, 그 무리 1천 3백 70여 명을 목베었다.

충렬왕 3년(1277)에 목마장(牧馬場)을 만들었다. 《여지승람》

○ 원(元) 나라 세조가 제주에 목장을 설치하고 10만 필의 몽고 말을 풀어놓아 번식하게 하고, 다루하치[達魯花赤]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그 토지를 곧 고려에 주고 해마다 공물(貢物)을 바치게 하였다 《동문광고》 충렬왕(忠烈王) 20년 조에 있다.

○ 20년에 왕이 원 나라에 조회하고 탐라를 돌려주기를 청하니, 원 나라 승상(丞相) 완택(完澤) 등이 아뢰어 황제의 뜻을 받들어 우리에게 돌려주었다. 다음 해에 제주(濟州)로 고쳤다. 《여지승람》

○ 26년에 원 나라 황태후가 또 구마(廐馬)를 방목하였다가 31년에 다시 우리에게 돌려주었다. 《여지승람》

○ 제주의 왕자 문창유(文昌裕)에게 성주(星主)의 칭호를 내려 주고, 고인조(高仁朝) 등에게는 장복(章服)을 내려 주었다. 《동문광고》

○ 공민왕 11년(1362)에 원 나라에서 부추문(副樞文) 아단불화(阿但不花)로 탐라 만호(耽羅萬戶)를 삼았다. 《여지승람》

○ 원 나라 목자(牧子)가 강폭하여 여러 번 나라에서 보낸 목사(牧使)와 만호를 죽이고서 반란을 일으키므로, 김유(金庾)가 목자를 토벌하자 원 나라에 호소하여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하기로 청하였다. 왕이 원 나라에 아뢰어, 본국으로 하여금 스스로 관리를 임명하고 고사(故事)와 같이 목자가 기르는 말을 골라서 바치기를 청하니, 황제가 따랐다. 《여지승람》

○ 명(明) 나라가 일어나자 조서를 내려 전마(戰馬) 1만 필을 바치라고 하므로, 임금이 제주에 사신을 보내어 말을 바치라고 명하니, 원 나라 목자 합치(哈赤) 등이 말하기를, “이 말은 바로 세조(世祖) 황제가 기른 것인데, 어찌 명 나라에 바칠 수 있는가.” 하고, 드디어 난을 일으켜 관리를 죽이니, 임금이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을 보내 그들을 쳐서 죽이고 다시 관리를 두었다. 《동문광고》

○ 일찍이 원 나라 순제(順帝)가 천하가 크게 어지러운 것을 보고, 제주도에 들어가 보존하고자 하여 공장(工匠)을 섬 안에 보내 크게 궁실을 짓도록 하였다가, 계획이 미처 시작되기도 전에 명 나라 군사에게 몰려 북쪽 개평(開平)으로 달아났다. 공민왕이 영전(影殿)을 짓는 역사에 원 나라 공장 원세(元世) 등 11명을 제주도에서 부르니, 개성에 이르자, 원세가 재상에게 말하기를, “원 나라 황제가 토목 공사를 일으키기 좋아하다가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스스로 천하를 보전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에 우리들로 하여금 제주도에다 궁궐을 짓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섬에 들어와 보전하기도 전에 나라는 망하고 몸은 도망쳐 우리들을 이 모양으로 의식(衣食)을 잃게 했습니다. 원 나라는 넓은 천하를 가지고도 백성을 수고롭게 하다가 패망하였습니다. 고려가 비록 크지만 인민을 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공(諸公)은 임금에게 아뢰소서.” 하였다. 《동문광고》

○ 우리 태종 2년(1402)에 성주 고봉례(高鳳禮)와 왕자 문충세(文忠世)등의 성주와 왕자의 칭호가 참람되다 하여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管)으로,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고칠 것을 청하였다. 《여지승람》

○ 진산(鎭山)은 한라산(漢拏山)이라고도 하는데, 구름과 은하수[雲漢]를 움켜잡아 끌어 당길 수 있기 때문이며, 두무악(頭無岳)이라고도 하는데, 봉우리마다 모두 평평하기 때문이며, 원산(圓山)이라고도 하는데 궁륭(穹窿)하게 둥글기 때문이다. 그 산마루에 큰 못이 있는데 사람들이 떠들면 구름과 안개가 끼어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으며, 5월에도 아직 눈이 있다. 《여지승람》

○ 조천관(朝天館)은 삼읍(三邑 제주ㆍ정의(旌義)ㆍ대정(大旌))에서 육지로 나가는 자는 모두 이곳에 배를 댄다. 《여지승람》

남사고(南師古)가 말하기를, “백두산맥(白頭山脈)이 동쪽의 대해(大海)로 들어가 일본이 되고, 남쪽의 대해로 들어가 탐라(耽羅)가 되었다.” 하였다. 또 세상에 전하기를, 그 땅이 바로 노인성(老人星) 분야(分野)인지라 오래 사는 사람이 많으며, 또 바로 방성(房星) 분야인지라 말[馬]이 잘 번식하며, 남방은 음(陰)이 통할하기 때문에 이 지방에 여자가 많아서 1명의 남편이 10명의 아내를 가진 자도 있다. 이곳에서는 호랑이ㆍ표범ㆍ곰ㆍ담비ㆍ승냥이ㆍ이리 등 사람을 해치는 동물과 여우ㆍ토끼ㆍ부엉이ㆍ까치 등이 없으며, 들사슴이 많은데 어족(魚族)이 변화한 것이다. 한라산 마루에 오르면 하얀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데, 곧 유구(琉球)의 지경이다. 서남쪽으로는 절강성(浙江省)과 복건성(福建省)이 가깝고, 북쪽으로는 강진(康津)ㆍ해남(海南)과 접하여 세상에서 수로가 9백 리라고 일컫지만 실은 4백여 리라 한다. 토산물로는 감ㆍ귤ㆍ유자와 여러 가지 향목(香木)과 약재(藥材)가 나오는데, 영릉향(零陵香)ㆍ안식향(安息香)ㆍ종유(鍾乳)ㆍ백랍(白蠟)ㆍ석결명(石決明)ㆍ빈주(璸珠)ㆍ앵무라(鸚鵡螺)ㆍ우황(牛黃)ㆍ총모(騣帽)ㆍ양대(梁臺) 등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