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9. 16:46ㆍ고대사
동사강목 제2하
을축년 신라 눌지왕 9년, 고구려 장수왕 13년, 백제 구이신왕 6년(북위 태무제 시광 2,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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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사신을 위(魏)에 보냈다.
이때에 척발씨(跖跋氏)가 중하(中夏)를 차지해서 여러 나라를 평정하여 천하가 둘로 나뉘니, 송을 남조(南朝)라 하고 위를 북조(北朝)라 하였다. 고구려가 두 나라를 섬기어서 사신을 보내 위에 조공하였다.
【안】 《북사》 고구려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 선조는 부여에서 나왔다. 그 나라는 동쪽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요하 건너 2천 리이고, 남쪽으로는 백제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말갈과 1천 리이다.
사람은 모두 토착하여 산골짜기를 의지해 살며 의복은 베와 비단과 가죽을 입었다. 토지가 척박(瘠薄)하여 누에와 농사가 자급 자족(自給自足)하기 어려워서 그 사람들이 음식을 절약한다.
그 왕은 궁실을 잘 꾸민다. 평양성에 도읍하니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부르는데, 성은 동쪽으로 6리가량 산을 따라 굴곡(屈曲)하고 남쪽은 패수(浿水)에 임하였다. 성 안에 곡식을 쌓고 무기를 대비하였다가 도적들이 오는 날에는 바야흐로 성에 들어가 굳게 지킨다. 왕은 그 곁에 따로 집을 지으나 항상 거처하지는 않는다. 그 밖에도 다시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이 있는데 이는 별도(別都)이고, 그 나라에서 합쳐 삼경(三京)이라 부른다. 그리고 또 요동 현도(玄莵) 등 수십 성이 있는데 모두 관사(官司)를 두어 통섭한다. 신라와 더불어 매양서로 치고 빼앗아서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관직에는 대대로(大對盧)ㆍ태대형(太大兄)ㆍ대형(大兄)ㆍ소형(小兄)ㆍ경후사(竟候奢)ㆍ오졸(烏拙)ㆍ태대사자(太大使者)ㆍ대사자(大使者)ㆍ소사자(小使者)ㆍ욕사(褥奢)ㆍ예속(翳屬)ㆍ선인(仙人) 등 무릇 12등급이 있어 안 팎의 일을 나누어 맡는다. 그 대대로는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 뺏어 스스로 되고 왕으로부터 임명받지 않는다. 그리고 또 내평(內評)과 오부(五部)의 욕살(褥薩)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절풍(折風)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과 같으며 선비들은 두 개의 새 깃을 더 꽂는다. 존귀한 이는 그 갓을 소골(蘇骨)이라 하여 자색 깁으로 만들고 금과 은으로 장식하였다. 소매가 큰 적삼과 통이 큰 바지를 입고 흰 가죽 띠와 누른 가죽 신을 신으며 부인은 치마 저고리에 선(襈)을 둘렀다.
서적은 오경(五經)ㆍ삼사(三史)ㆍ《삼국지(三國志)》ㆍ《진양 춘추(晉陽春秋)》가 있고 병기는 대략 중국의 것과 비슷하다. 봄 가을에 사냥할 때는 왕이 친히 임한다. 조세는 베 5필과 곡식 5석이고 유민(遊民)은 3년에 한 번 조세를 바치되 10인이 공동으로 세포(細布) 1필이다. 조(租)는 1호(戶)에 상(上)이 1석이고 다음은 7두(斗)이며 하(下)가 5두이다.
그 형법이 반역을 꾀한 자는 기둥에 묶어 놓고 불태워서 참형에 처하고 그 가산은 몰수하며, 도둑질하면 10배를 배상하는데 만일 가난해서 배상할 수 없는 자와 공채(公債)나 사채(私債)의 빚을 지고 못 갚는 자는, 그 아들 딸로 노비를 삼아 배상하도록 한다. 형법이 너무 엄하여 법을 범하는 자가 드물다.
음악에는 오현금(五絃琴)과 소금(小琴)과 피리[篳篥]와 옆으로 부는 퉁소와 북과 부는 갈대로써 곡조를 창화하는데, 해마다 연초에는 패수에 모여서 유희하면 왕이 요여(腰轝)를 타고 우의(羽儀)를 벌여 세우고 관람한다. 일이 끝나면 왕이 옷입은 채 물에 들어가서 좌우 2부(部)로 나누어 물과 돌을 서로 뿌리고 던지며 떠들고 치닫고 쫓기를 두세 번 하다가 그친다. 풍속이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몸가짐[容止]에 마음 써서 추창하는 것을 공경으로 여긴다. 절할 때는 한 다리를 뻗치고 서며, 뒷짐[反拱]을 많이 지고, 다닐 때는 반드시 손을 허리춤에 꽂는다.
성질이 간사하고 숨김이 많고, 언사가 야비해서 친하고 소원한 것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이 한 개천에서 목욕하고 한 방에서 잔다.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항상 10월에는 하늘을 제사한다. 그 공회(公會)의 의복은 모두 비단옷이며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웅크리고 앉기를 잘하며 음식에는 조두(俎豆)를 쓴다. 삼척마(三尺馬)가 생산되는데 본래 주몽(朱蒙)이 타던 말 종자로서 곧 과하마(果下馬)이다.
풍속이 음란해서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세속에는 놀아나는 여자가 많아 남편으로 일정한 사람이 없다. 밤이면 남녀가 모여 즐기며 귀천의 절도가 없다. 혼인할 적에는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곧 즉시 혼인을 하는데, 남자 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이고, 재물로 맞는[財聘] 예가 없으니, 혹시 재물을 받는 이가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조소하여 팔려온 여종으로 여긴다.
죽은 자는 빈소(殯所)를 집 안에 두고 3년을 지낸 뒤 좋은 날을 가리어 장사한다. 부모와 남편의 상(喪)에는 모두 3년 상을 입고 형제간에는 3개월이다. 초종상(初終喪)에는 곡읍(哭泣)을 하고 장사지낼 때는 노래와 춤으로 풍악을 잡혀 보낸다. 매장(埋葬)을 마치고는 죽은 자의 살았을 적의 복장과 노리개와 수레와 말을 가져다 묘 곁에 놓아 두면 장사에 모였던 자들이 서로 다투어 가져간다. 불법을 믿고 귀신을 공경하여 음사(淫祠)가 많다. 신묘(神廟)가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扶餘神)이라 하는 것으로 나무를 조각해 부인의 형상을 만들었고, 하나는 고등신(高登神)이라 하는 것으로 이는 시조 부여신의 아들이라 한다. 모두 관사를 두고 사람을 파견하여 수호하는데, 이는 하백(河伯)의 딸과 주몽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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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가 수의 수군장(水軍將) 내호아(來護兒)를 평양성 아래에서 격파시켰다.
내호아가 강회(江淮) 수군(水軍)의 배[舳艫]를 거느리고 수백 리에 뻗쳐 바다를 건너 먼저 진군하여 패수(浿水)에 들어가니 평양과의 거리는 60리였다. 고구려군과 만나 진격하여 크게 무찌르고 정예군 4만을 선발하여 곧바로 성(城) 아래에 이르렀다. 고구려인들이 나곽(羅郭) 속 빈 절[寺]에 복병해 놓고 나가서 싸우다가 지는 척하고 도망하매 호아(護兒)가 성(城)에 들어가서 군사를 풀어 놓고 약탈케 하니, 다시 대오가 없어졌다. 이에 고구려의 매복했던 군사가 일어나서 양쪽에서 공격하여 수병을 대패시키었다. 호아는 겨우 목숨만 건졌고 사졸들은 살아 돌아간 자가 수천에 불과하였다. 고구려 군사들이 배 닿는 곳까지 추격했으나 호아의 부수(副師) 주법상(周法尙)이 군사를 정비하여 대기하고 있으므로 고구려 군사들이 곧 물러나니, 호아는 군사를 이끌고 해포(海浦)에 돌아가서 다시 주둔하였다.
추 7월 고구려 대신 을지문덕이 수의 우문술 등 9군 30만과 살수에서 격전하여 대패시키니, 수주 광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수장(隋將) 우문술(宇文述)은 부여(扶餘) 길로 나오고, 우중문(于仲文)은 낙랑(樂浪) 길로 나오고, 형원항(荊元恒)은 요동(遼東)길로 나오고, 설세웅(薛世雄)은 옥저(沃沮) 길로 나오고, 신세웅(辛世雄)은 현도(玄菟) 길로 나오고, 장근(張瑾)은 양평(襄平) 길로 나오고, 조효재(趙孝才)는 갈석(碣石) 길로 나오고, 최홍승(崔弘昇)은 수성(遂成) 길로 나오고, 위문승(衛文昇)은 증지(增地)길로 나와서 모두 압록강(鴨綠江) 서쪽에 집결하였다. 우문술 등은 노하(瀘河)ㆍ회원(懷遠) 두 진(鎭)으로부터 군사를 발(發)하여 인마(人馬)에게 모두 1백 일분의 양식을 주고 또 무기와 의류ㆍ천막, 그 밖의 군수품을 나누어 주었으므로 사람마다 3석(石) 이상의 무게여서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명령을 내리되,
“군량[粟米]을 버리는 자는 참형(斬刑)에 처하리라.”
하니, 사졸들이 모두 천막 속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버렸으므로 겨우 중도에 가서 군량이 떨어지게 되었다. 고구려 대신 을지문덕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에는 ‘울지문덕(蔚支文德)’이라고 하였다 은 침착하고 지모(智謀)가 있는 데다 겸하여 글을 잘 하였다. 고구려 왕이 중문(仲文)의 진영에 보내어 짐짓 항복하는 척하고, 허실을 탐지하려 하던차 중문(仲文)이 먼저 수 양제의 밀지를 받았는데, ‘고구려 왕을 만나거나 문덕이 오면 반드시 사로잡아라’ 하였다. 중문이 이를 잡으려 할 때 수의 위무사(慰撫使) 유사룡(劉士龍)이 이를 굳이 제지하니 중문이 그 말을 듣고 문덕을 돌려보냈다. 이윽고 보낸 것을 뉘우쳐 사람을 시켜 속여 이르기를, ‘할 말이 있으니 다시 오라’ 하였으나, 문덕은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수(鴨綠水)를 건너 돌아왔다. 중문과 우문술 등은 문덕을 놓치고는 마음이 불안하였다. 우문술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가려 하고, 중문은 정예군을 시켜 문덕을 추격하려 하니, 우문술이 굳이 막았다. 중문은 노하여,
“장군이 10만 군을 거느리고 적은 적군을 격파치 못하고 무슨 면목으로 황제를 보겠는가? 군사(軍事)를 결정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의견에 좇아야 하는데 지금 사람마다 딴 마음을 가졌으니 어찌 적을 이기겠는가?”
하니 문술 등이 마지못하여 여러 장수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문덕을 추격하였다. 문덕은 문술의 군사가 굶주린 빛이 있음을 보았으므로 이를 피곤하게 하려고 싸울 때마다 곧 도망하니, 문술 등이 하루 동안에 일곱 번을 이기었다. 술 등은 이 빠른 승첩을 믿고 동으로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淸川江))까지 건너와 평양성에서 근 30리 지점에 산을 의지하여 진영을 쳤다. 문덕이 중문에게 시를 보내어 말하기를,
신통한 계책은 천문을 다 알았고 / 神策究天文
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했도다 / 妙算窮地理
전쟁에 이겨 공이 높았으니 / 勝戰功旣高
족함을 알거든 그만 그침이 어떠한고 / 知足願云止
하였다. 중문이 답서하여 효유하였다. 문덕이 또 사신을 보내어 거짓 항복하는 척하면서 문술에게 말하기를,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면, 왕을 모시고 형재(行在)에 나아가 조회하리라.”
하니, 문술이, 군사들이 피곤하여 다시 싸울 수 없고 또한 평양성이 험하여 졸지에 함락할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문덕의 속임수에 빠져 방진(方陣)을 만들어 물러갔다. 이때 문덕이 군사를 출동시켜 사면에서 습격하여, 싸우면서 쫓아가다가, 추 7월 살수에 이르러 수군이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이 수의 후군을 추격하니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고, 여러 군사들이 다 괴멸되어 수습할 수 없었다. 장사들은 도망쳐 1주야 만에 압록수에 이르니, 4백 50리 길을 간 셈이다. 장군 왕인공(王仁恭)이 후군이 되어 고구려군을 반격하여 물리쳤다. 고구려군이 백암산(白巖山)에서 설세웅(薛世雄)을 포위하니, 세웅이 분격하여 물리쳤다. 내호아(來護兒)는 문술 등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고, 오직 위문승(衛文昇) 1군만이 온전하였다. 처음 구군(九軍)이 요(遼)에 이르렀을 때에는 30만 5천이었는데 돌아갈 때 요동성에 이른 것은 2천 7백 인이었다. 물자와 기계는 거만(巨萬)을 헤아렸는데 송두리째 탕진되매, 수주가 크게 노하여 우문술 등을 구속하였다가 계묘일에 이끌고 돌아갔다. 때에 백제는 또한 국경에서 군사를 정돈하고, 겉으로는 수(隋)를 돕는 척했으나 실은 두 마음[兩端]을 가지고 있었다. 수인들은 이 싸움에서 다만 요수 서쪽의 고구려의 무려라(武厲邏)를 빼앗고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두었을 뿐이었다. 최씨는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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