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수고(浿水考)

2022. 9. 9. 16:21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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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부록 하권

패수고(浿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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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지리지의 낙랑군(樂浪郡)ㆍ패수현(浿水縣) 아래에 반고는 자주하기를,

“물이 서쪽으로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는데, 후세의 사전(史傳)이 증거가 없으므로 언자(言者)들의 주장이 한결같지 않다. 혹은 평산(平山)의 저탄(猪灘)이라 주장하고, 혹은 평양(平壤)의 대동강(大同江)이라 주장하고, 또는 의주(義州)의 압록강(鴨綠江)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국중에는 삼패설(三浿說)이 있게 되었으니, 어느 설을 따라야 할지 모르겠다. 두루 상고해서 갖추 논하겠다.

저탄이라 주장한 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 것이다.

백제기에,

“온조(溫祚) 13년 강역(疆域)을 정할 때 북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熊川)에 이르렀다.”

하고, 《고려사》에,

“평주(平州) 저천(猪淺)을 패강(浿江)이라고도 한다.”

하고, 《여지승람》 평주 저탄(猪灘) 조에도,

“평양(平壤) 패강(浿江)은 고구려 도성 곁에 있는데, 어떻게 백제의 경계가 될 수 있었겠는가? 이른바 패하(浿河)는 아마 저탄인 듯하다.”

하였으니, 이것이 저탄을 패수라고 칭한 하나의 증거이다.

《고려사》에,

“김관의(金寬毅)가 ‘당 숙종(唐肅宗)이 천보(天寶) 12년에 바다를 건너 패강 서쪽 포(浦)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포는 곧 전포(錢浦)요, 전포는 지금의 개성부(開城府) 서쪽 벽란도(碧瀾渡)에 있고 벽란도는 곧 저탄의 하류이니, 이를 패강이라 칭하는 것이 마땅하다. 숙종이 동쪽에 왔다는 설은 비록 황탄(荒誕)하여 믿을 만한 것이 못되지만, 어찌 지명까지 아울러 그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저탄을 패수라고 칭한 두 가지 증거이다.

고구려기에,

“평원왕(平原王) 13년에 패하(浿河)의 언덕에서 사냥하고 50일 만에 돌아왔다.”

하였다. 이때 고구려가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그것이 대동강이 아님은 분명하다. 또 백제기에,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은 패수 가에서 많이 있었다.”

하였으니, 아마 〈패수가〉 양국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또

“성왕(聖王) 원년에 고구려 군사가 패수에 이르매, 왕이 장수를 보내 출전하여 그를 물리쳤다.”

하였으니, 이것이 저탄을 패수라고 칭한 세 가지 증거이다.

이 세 가지 증거 외에도 《수경(水經)》에,

“패수는 낙랑(樂浪)의 누방현(鏤方縣)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臨浿縣)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하였다. 역도원(酈道元)의 주가 아래에 보인다.

상고하건대, 임패현이란 이름은 어느 때 정해졌는지는 모르나 《여지승람》을 보면, 우봉현(牛峯縣) 흥의역(興義驛)의 옛이름이 임패(臨浿)이니, 《수경》에서 칭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 또한 저탄을 패수라고 칭한 방증(旁證)이 될 만하다.

대동강이라 주장한 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 것이다.

역도원의 《수경주(水經注)》에,

“위만(衛滿)이 패수로부터 조선에 이르렀다 하니, 만일 패수가 동으로 흐른다면 패수를 건넜을 리가 없다. 내가 번사(番使)에게 물었더니, 성(城) 상고하건대 평양성(平壤城)을 가리킨다. 이 패수는 북쪽에 있다 한다. 그 강이 서쪽으로 흘러 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을 경과한다. 그러므로 《지리지》에 ‘패수가 서쪽으로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수경》이 착오다.”

하였으니, 이 주는 《수경》에 “패수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는 말을 착오라 하였으니, 이 주가 옳다. 이것은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한 하나의 증거이다.

《당서》에,

“평양성은 한(漢)의 낙랑군인데, 산세를 따라 굽게 성곽을 쌓고 남쪽으로 패수에 다다랐다.”

하고, 또,

“등주(登州)에서 동북쪽으로 바닷길을 따라가 남쪽으로 해연(海壖)을 끼고 패강(浿江) 어구와 초도(椒島)를 지나면 신라(新羅) 서북쪽의 〈장구진(長口鎭)〉에 이른다.”

하였다. 초도는 지금 풍천부(豊川府) 북쪽 40리 바다 가운데 있으니, 이것이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한 두 가지 증거이다.

신라가 당(唐)과 함께 고구려를 평정하고 남쪽 경계를 정하였는데 현종(玄宗)개원(開元) 23년, 성덕왕(聖德王) 34년에 당이 패강 이남의 땅을 주었으므로 이에 신라의 땅은 비로소 북쪽으로 지금 중화(中和)ㆍ상원(祥原)의 땅을 한계로 하였고, 진훤(甄萱)이 고려 태조에게 준 글에,

평양의 누대에 활을 걸고 / 掛弓平壤樓
패강의 물을 말에게 먹인다 / 飮馬浿江水

한 글귀가 있으니, 이것이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한 세 가지 증거이다.

이상 두 설은 각기 증거한 바가 있고 증거도 어긋나지 않으나 두 패수는 다 평양 이남에 있다. 그런데 평양은 조선의 도읍지이고, 《한서》에서는,

“조선과는 패수로 경계를 하였다.”

하였고, 또,

“위만이 동쪽으로 도망하여 새(塞)를 빠져나가 패수를 건넜다.”

하고, 또,

“한(漢)의 사신 섭하(涉何)가 조선으로부터 돌아와 경계에 이르러 패수에 다다랐다.”

하고, 또,

“순체(荀彘)가 요동(遼東)으로부터 군사를 내어 조선 패수 서쪽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하고, 또,

“조선 태자(太子)가 입조(入朝)하려다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돌아갔다. 체(彘)가 패수 가의 군사를 깨뜨리고 전진하여 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한 것은, 모두 패수를 건넌 뒤에야 조선의 왕도(王都)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때문에 《여지승람》과 오운(吳澐)의 《동사찬요(東史纂要)》에서는 ‘위만이 패수를 건넜다.’는 설을 의심하고 압록강을 패수라고 하였는데, 후인들도 또한 그 설을 많이 따른다. 그러나 그 설도 착오이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서개마현(西蓋馬縣)에 마자수(馬眥水)가 있으니, 바로 지금의 압록강이다. 패수와 마자수가 만일 한 강이라면 어찌 나누어 말하였겠는가?

상국(相國) 남구만(南九萬)의 《약천집(藥泉集)》에도,

“《한서》 지리지 요동 번한현(番汗縣)에 패수(沛水)가 있으니, 패(沛)와 패(浿)는 글자는 비록 다르나 음이 같으니, 아마 한 강인 듯하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패(沛)와 패(浿)를 비록 혼용한다 하더라도 《사기》와 《한서》두 책에서 누차 패(浿)라 칭하고 끝내 패(沛)라고 말하지 않았으니, 어찌 모두 착오로 그랬겠는가? 이것은 믿을 수가 없다.

《성경지》에는 《요사(遼史)》를 인용하여,

“요양현(遼陽縣)은 한(漢)의 패수현(浿水縣) 북쪽에 있다. 패수는 어니하(淤泥河)라고도 하고 점우락(蔪芋濼)이라고도 한다.”

하였는데, 《일통지》에서도 그것을 따라,

“지금은 어니하라고 칭하는데 해성현(海城縣) 서남쪽 60리에 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한서》 지리지에,

“요동군(遼東郡)의 서안평현(西安平縣)은 마자수가 바다로 들어가는 바로 그곳에 있다.”

하였으니, 압록강 이북은 모두 요동에 속하였는데, 낙랑의 여러 현(縣)이 어떻게 그 사이에 끼어들었겠는가? 대저 《요사》 지리지에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많다. 《요사》 지리지에,

“숭주(崇州)는 본래 한(漢)의 장잠현(長岑縣)인데, 지금 요영(遼陽) 동북쪽 1백 50리에 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장잠(長岑)은 뒤에 대방(帶方)에 속하였으니, 그 땅이 평양이남에 있었는데, 어찌 요양의 동북쪽에 있다고 했을까? 또,

“자몽현(紫蒙縣)은 본래 한의 누방현(鏤方縣)인데, 지금의 개원(開原) 지경 안에 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개원은 압록강 북쪽 1천 리쯤에 있고, 요동과 현도 두 군이 그 중간에 가로 놓여 있는데, 낙랑이 어떻게 그 땅을 가졌겠는가? 이것은 비록 중국의 책이지만, 전연 믿을 것이 못된다.

그렇지 않으면, 낙랑이 뒤에 요동 땅에 교설(僑說)되고 그때 또한 옛날

고을 이름을 설치하였는데, 후인들이 그릇 한(漢)이 설치한 것으로 알았던가?

어떤 이가,

“참으로 자네 말과 같다면, 여러 설들은 취할 만한 것이 못되는데, 혹시 따로 그 땅이 있다는 말인가?”

하기에 나는,

“여러 설이 남김없이 밝혔으니 다시 어떻게 별도의 의논을 제기하겠는가? 어리석은 나의 견해로는 여러 설 중에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한 설이 가장 명백하고, 저탄을 패수라고 칭한 것은 우리 나라 사람이 따로 칭한 것이며, 그 나머지는 모두 옳은지 모르겠다.”

하자,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한 설은 과연 어찌해서인가?”

하기에 나는,

“《사기》와 《한서》의 문세(文勢)를 가지고 말하겠다. 그 말에 ‘조선(朝鮮)이 관리(官吏)를 두고 장새(障塞)를 쌓았는데, 진(秦)이 요동(遼東)의 변경에 소속시켰다.’ 하고, 또 ‘노관(盧綰)이 연(燕)이 쌓은 요동 장새가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 하여 다시 요동의 옛 변방 요새를 고쳐 쌓고, 패수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 하고, 또 ‘위만(衛滿)이 옛 진(秦)의 공지(空地)인 상하장(上下障)을 구해 살았다.’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가 일반 문세이다.

그 ‘변경’이라느니 ‘연이 쌓은 장새는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느니 ‘옛 진의 공지를 구해 살았다느니’ 한 것은 모두 지금의 해서(海西) 지방인 것 같고, 그 중간을 비어둔 것은 지금 서북 두 나라의 경계와 같았던 것이다.

지금의 평양(平壤)은 기자(箕子)의 도읍지인데, 지금의 한양(漢陽)에도 평양이란 이름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기에 ‘김헌창(金憲昌)의 아들이 자립하여 평양에 도읍하였다.’ 하고, 《삼국사기》지리지에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고구려 남쪽 평양을 취하여 도읍하였다.’ 하였는데, 모두 지금의 한양을 가리킨 것이다. 한양을 또 평양이라고 칭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각건대, 전국(戰國)의 말기에 기씨(箕氏)가 나라를 잃고 동쪽으로 지금의 한양에 옮기고서 옛이름을 그대로 칭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위만이 도읍한 평양도 지금의 한양인 것이다. 만일 이와 같다면 패수가 지금의 대동강임이 틀림없다. 또 상고하건대, 《한서》 지리지는 모두가 당시 전벌(戰伐) 및 강역을 경계지을 때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그 글이 모두 진실하고 답험(踏驗)한 말이요, 멀리서 잘못 전해 들은 것이 아니다.

열수(列水)는 지금의 한강(漢江)인데, 열구현(列口縣)은 열수가 바다에 들어가는 바로 그 어귀라 하니, 지금의 강화(江華) 지방이다. 강화를 옛날 혈구(穴口)라 칭하였으니, 아마 열구(列口)의 잘못인 듯하다. 열수고(列水考)에 보인다.

전후 제유(諸儒) 중에 패수를 논한 것은 하나뿐이 아닌데, 누구나가 지금의 평안(平安) 한 도를 우리의 강역으로 보고 또는 지금의 평양을 위씨(衛氏)의 도읍지로 삼고서는, 별도로 패수를 찾으니, 이는 그 실지를 얻지 못하고 더욱 후인들의 의심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D001] 교설(僑設) : 

교치(僑置)와 같다. 딴 이름을 빌어 세우는 일. 이를테면 딴 지방 이름을 그대로 옮겨 세우는 것이다

◉ 대요수(大遼水)수원(水原)이 말갈국의 서남쪽 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안시(安市)에 이르는데, 지금의 요하(遼河)이다.
◉ 소요수(小遼水)요산(遼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홀러 대요수와 합치는데, 지금의 혼하(渾河)이다.
◉ 대량수(大梁水) 나라의 서쪽에 있다. 새외(塞外)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소요수ㆍ태자하(太子河)로 흘러든다.
◉ 마자수(馬訾水) 일명 압록수(鴨綠水)라고도 하며, 수원이 동북 말갈의 백산(白山)에서 나오는데, 빛깔이 오리의 머리 빛깔과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한다. 요동과의 상거가 5백 리이며, 국내성(國內城) 남쪽을 경과하고 또 서쪽으로 염난수(鹽難水)와 합한 다음 서남쪽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구려에서는 이 강이 가장 커서 너비가 3백 보(步)나 된다. 그 나라는 이것을 믿어 천참(天塹)으로 삼았는데, 평양성 4백 50리, 요수 동남쪽 4백 80리에 있다.
○ 염난수는 지금 동가강(佟家江)이라 부른다. 우리 나라에서는 파저강(婆猪江)이라 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