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9. 16:48ㆍ고대사
역옹패설 전집 / 전집 1
역옹패설 전집 1(櫟翁稗說前集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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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조(懿祖 태조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와 세조(世祖 태조의 아버지 융건(隆建))의 휘(諱) 아랫자가 태조(太祖)의 휘인 건(建)과 모두 같다. 김 관의(金寬毅)는,
“개국 이전에는 순박한 풍속을 숭상하여 혹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 《왕대종록(王代宗錄)》에 그렇게 쓴 것이다. 그러나 의조는 육예(六藝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에 능통하였는데, 그 중에도 특히 글쓰기와 활쏘기는 당대에 으뜸이었고, 세조는 어려서부터 기국(器局)이 있어 삼한(三韓)을 점령할 뜻을 둔 사람이었다. 그들이 어찌 그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이름을 범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자신의 이름이나 아들의 이름에 그 글자를 빌려다 썼겠는가? 더구나 태조는 왕업을 창건하고 그 대통을 이룩한 분으로서 언제나 선왕(先王)을 본받았는데, 어찌 잘못임을 시인하면서 억지로 예에 벗어난 이름을 태연히 썼겠는가?
이를테면 신라(新羅) 시대에는 그 임금을 마립간(麻立干) 마립(麻立)은 말뚝[橛]의 방언이다. 신라 초기에 임금과 신하가 서로 회합할 때에는 말뚝을 세워 그곳을 임금의 위치로 정하였다. 따라서 그 임금을 마립간이라고 불렀으니, 곧 말뚝 세운 곳에 위치하는 자란 말이다. 간(干)은 신라의 풍속에서 서로 높이는 말이다. 이라 부르고, 그 신하를 아간(阿干)ㆍ대아간(大阿干)이라 부르고, 심지어 하향 백성들까지도 으레 간(干)을 이름에 붙여서 호칭하였으니 이는 대개 서로 존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아간은 아찬(阿餐)ㆍ알찬(閼粲)이라 변칭하기도 하였으니, 이는 간(干)ㆍ찬(餐)ㆍ찬(粲)의 세 자의 발음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의조ㆍ세조의 휘 아랫자 역시 간ㆍ찬ㆍ찬의 음과 서로 비슷한 글자라 이른바 서로 존칭하는 말로 그 이름에 붙인 것인데, 부르는 과정에서 변전(變轉)된 것이지 이름은 아니다. 태조가 마침 이 글자로 이름을 삼으니, 호사자(好事者)들이 이를 억지로 끌어다 붙여서,
“3대가 한 이름을 쓰면 삼한(三韓)의 임금이 된다.”
는 말을 꾸며냈다. 그러나 이는 대개 믿을 것이 못 된다.
김 관의는 또,
“도선(道詵)이 송악산(松嶽山) 남쪽에 있는 세조의 집을 보고, ‘제(穄)를 심을 밭에 삼[麻]을 심었다.’ 하였다. 제(穄)는 왕(王)의 방언과 서로 비슷하였기 때문에 태조가 곧 왕씨(王氏)로 성을 삼았다 …… .”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있는데 아들이 그 성을 고치다니, 천하에 어찌 그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그런 일을 우리 태조가 하였다고 할 수 있으랴? 또 태조는 세조를 이어 궁예(弓裔)에게 벼슬하였는데, 궁예가 의심이 많은 줄 알면서 태조가 까닭없이 왕(王)으로 성을 고쳤다면, 이 어찌 화를 취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상고하건대 《왕대종족기(王代宗族記)》에,
“국조(國祖)의 성은 왕씨(王氏)이다.”
하였다. 그렇다면 태조에 이르러 비로소 성을 왕이라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제(穄)를 심었다는 설’이 또한 거짓이 아니겠는가?
또 말하기를,
“성골장군(聖骨將軍) 호경(虎景)이 아간(阿干) 강충(康忠)을 낳고, 강충이 거사(居士) 보육(寶育)을 낳았으니, 그가 곧 국조 원덕대왕(國祖元德大王)이 된다. 보육이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이 당(唐)의 귀성(貴姓)에게 시집가서 의조를 낳고 의조가 세조를 낳고 세조가 태조를 낳았다.”
하였다. 이 말과 같다면, 당의 귀성이란 자가 의조의 아버지가 되고, 보육은 의조의 아버지의 장인이 되는데, 국조라고 칭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또 말하기를,
“태조가 3대의 조고(祖考) 및 후비(后妃)를 추존하여 아버지는 세조 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 어머니는 위숙왕후(威肅王后), 할아버지는 의조 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 할머니는 원창왕후(元昌王后), 증조모(曾祖母)는 정명왕후(貞明王后), 증조모의 아버지 보육(寶育)은 국조 원덕대왕이라 하였다.”
하였다. 증조(曾祖)를 생략하고 증조모의 아버지를 쓰면서 3대라고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상고하건대 《왕대종족기》에,
“국조는 태조의 증조이고, 정명은 국조의 비(妃)이다.”
하였으며, 《성원록(聖源錄)》에는,
“보육성인(寶育聖人)이라는 이는 원덕대왕의 외조(外祖)이다.”
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국조 원덕대왕은 곧 당(唐)의 귀성(貴姓)이라는 이의 아들로서 의조의 아버지가 되고, 정명왕후는 곧 보육의 외손녀로서 의조의 어머니가 된다. 보육을 국조 원덕대왕으로 삼은 것은 잘못이다.
또 말하기를,
“의조가 당(唐) 나라 사람인 아비가 남긴 궁시(弓矢)를 가지고 바다를 건너 멀리 근친(覲親)하였다.”
하니, 그렇다면 그 뜻은 깊고 간절하려니와,
“용왕(龍王)이 하고 싶은 일을 물었을 때 동쪽으로 돌아가기를 요구하였다.”
한 말은 의조가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성원록》에,
“흔강대왕(昕康大王)의 처 용녀(龍女)는 평주(平州) 사람 각간(角干) 두은점(豆恩坫)의 딸이다.”
하였으니, 김관의의 기록과는 다르다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선조(先祖)인 원덕대왕(元德大王) 보육(寶育)이 일찍이 출가(出家)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수도(修道)하고 돌아와서 황해도 우봉현(牛峯縣) 성거산(聖居山) 마하갑(摩訶岬)에 거처하면서 마침내 거사(居士)가 되었는데, 당시 잠저(潛邸)에 있던 당 숙종(唐肅宗)이 천하(天下)를 두루 유람하다가 마침 보육의 집에 들러 기숙(寄宿)하면서 보육의 딸 진의(辰義)와 합방하여 임신이 되었던바, 여기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작제건(作帝建)이다. 그가 장성하여서는 자기 아버지를 만나겠다고 상선(商船)을 타고 바다를 건너던 도중에 서해 용왕(西海龍王)의 딸에게 장가를 들고, 그 용녀(龍女)와 함께 고향에 돌아와서 아들 용건(龍建)을 낳았고, 용건이 마침내 태조 왕건을 낳게 되었다는 설화(說話)에서 온 말이다
국조(國祖)는 국조 원덕대왕(國祖元德大王) 보육(寶育)을 말한다. 보육의 딸 진의(辰義)는 당 숙종(唐肅宗)에게서 작제건(作帝建)을 낳고 작제건은 융(隆)을 낳고, 융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낳았다. 이 세계(世系)에 대해서는 의논이 분분한데, 자세한 내용이 《송경지(松京誌)》 권7 〈고적(古蹟)〉에 보인다
[주-D002] 성골장군(聖骨將軍) 호경대왕(虎景大王) :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5대조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이름은 호경(虎景)으로, 자칭 성골장군이라고 일컬으면서 백두산 등 각처를 유력(遊歷)하다가 개성(開城) 부소산(扶蘇山)에 정착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강충(康忠)이 원덕대왕(元德大王)에 추존(追尊)된 보육(寶育)을 낳았다고 한다. 《高麗史 高麗世系, 卷107 閔漬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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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 제27권 / 경사문(經史門)
왕건세계(王建世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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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를 고찰하건대, “왕태조(王太祖)의 아버지인 세조(世祖)의 이름은 융(隆)이고, 조부는 의조(懿祖)이며 증조는 원덕대왕(元德大王)이니 실로 시조가 되고 비(妃)는 정화왕후(貞和王后)이다.”고 하였으니, 모두 태조가 추존한 것이다.
〈송도지〉(松都志)에 의하면, “성골장군(聖骨將軍 호경(虎景)의 자호(自號)) 호경(虎景)이 아간(阿干) 강충(康忠)을 낳고, 강충이 거사(居士) 보육(寶育)을 낳으니 이가 국조(國祖)인 원덕대왕이며, 대왕이 딸 진의(辰義)를 낳아 당(唐)나라 귀성(貴姓)에게 시집가서 아들 작제건(作帝建)을 낳으니 이가 의조이고, 의조가 용건(龍建)을 낳으니 이가 세조이다.”고 했는데, 이른바 귀성이란 당선종(唐宣宗)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보육(寶育)의 딸이 정화공주(貞和公主)라는 말이 〈목은집〉(牧隱集)에 나타나 있는데, 원덕(元德)의 비(妃)가 바로 정화후(貞和后)이니, 이는 혹시 틀림이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귀성이란 원덕을 가리킨 것으로서, 〈송도지〉가 틀렸음이 의심없다.
그리고 작제건이 의조가 되고 용건이 세조가 되었는데, 융(隆)이라 한 것은 용(龍)자와 발음이 서로 비슷한 관계로 그릇된 것이다. 삼대(三代)가 모두 건(建)으로써 이름하였으니, 왕건(王建)은 ‘왕’자가 성이 아니고 ‘왕’자 하나만이 이름임을 알 수 있다.
태조가 출생하기 전에 도선(道詵)이 세조에게, “명년에는 반드시 성자(聖子)를 낳을 것이니, 마땅히 이름을 왕건이라 하라.”하고는 이어 봉서[實封]를 만들고 그 피봉에, “삼가 이 글을 받들어 백배(百拜)하며 앞으로 삼한을 통합할 임금 대원군자 족하에게 올린다.”[謹奉書百拜獻于未來統合三韓之主 大原君子足下]라고 썼으니, 왕건 두 글자가 이름임이 더욱 분명하며, 제후(諸侯)는 사대(四代)까지 제사하는 것인데 삼대에 그친 것은, 원덕 이상은 알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즉 정화(貞和)의 아버지 보육 이상의 삼대는 이성(異姓)인 조상이므로 대수(代數)에 넣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장군이나 아간(阿干)은 미천한 신분이 아닌데, 딸이 객상(客商) 따위에게 시집갔으므로, 그 이가(李哥) 성을 무릅쓰지 아니한 것은 혹 수치스러워서 나타나게 말하지 않으려고 한 까닭이었는지?
그러나 귀성이라고 하였으니, 마땅히 종실(宗室)의 후예일 것이지만 당 선종이라고 한 것은 우리 동방 사람들이 외람되게 끌어댄 것이다. 선종은 그 자취를 감춰서 겨우 생명을 보존하였는데, 어찌 감히 우리 동방과 더불어 통상하였겠는가?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에, “당 숙종(唐肅宗)이 객선(客船)을 따라 개주(開州)의 전포(錢浦)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충선왕(忠宣王)이 원(元)나라에 있을 적에 어떤 학사(學士)가 왕에게, “일찌기 듣건대, 왕의 선조가 당 숙종에게서 나왔다고 하니, 숙종이 언제 동방에 나가 놀았으며 아들까지 두게 되었었는가?”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지 못하자, 민치(閔漬)가 옆에 있다가, “우리나라 역사를 잘못 쓴 것이다. 숙종이 아니라 바로 선종이다.”고 하였다. 그제야 학사가, “선종은 오랫동안 밖에서 고생하였으니 혹 그랬을 듯도 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국사에 전해 오는 바로는 실로 숙종인데, 그 대수(代數)가 멀기 때문에, 민치(閔漬)가 억견(臆見)을 내세워 대답한 것이며, 이제현(李齊賢)의, 금계수류(金鷄垂柳)라는 유(類)도 도무지 근거가 없는 것으로서, 원덕왕은 외국 사람임이 사실이다.
기위 귀성을 따르지 않은지라, 차라리 신승(神僧 도선(道詵)을 이름)이 명명한 것에 의하여 성(姓)으로 삼았으므로 성을 왕(王), 이름을 건(建)이라고 한 것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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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집 제2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174수
숭의전2수 〔崇義殿 二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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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왕에게 올린 향화 지금에도 남았거니 / 舊君香火至今存
솔과 잣은 창창한데 전각 문은 닫혀 있네 / 松栢蒼蒼閉殿門
푸른 바다 하늘 닿고 회수의 길 끊겼거니 / 滄海接天淮水絶
어느 곳에 용손 남아 있으려나 모르겠네 / 不知何處有龍孫
닭을 잡고 오리 치던 그때의 일 유유한데 / 操鷄摶鴨事悠哉
푸른 나무 가을 산에 지는 해가 애처롭네 / 靑木秋山落日哀
천 년 전의 옛 거울은 지금 어디 있으려나 / 故鏡千年何處在
괜히 밝은 달만 남아 높은 누대 비추누나 / 空餘明月照高臺
[주-D001] 숭의전(崇義殿) :
고려 태조(太祖) 이하 여덟 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의 임진강 가에 있다.
[주-D002] 푸른 …… 모르겠네 :
정확한 뜻은 미상이나, 대개 고려 왕실의 후손이 다 죽어 없어졌다는 뜻인 듯하다. 왕건(王建)의 선조가 당나라의 선종(宣宗)과 연결된다는 설화가 있는데, 선종이 황제가 되기 전에 중국의 강남 일대를 떠돌아다녔다는 전설이 있어 이 시에 나오는 회수(淮水)와 연결될 듯도 한데, 정확한 내용은 확인할 수가 없다. 용손(龍孫)은 왕실의 후손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作帝建)이 아버지를 찾기 위하여 중국으로 가던 중 서해 바다에서 용왕의 부탁을 받고 요괴를 쏘아 죽인 다음 용왕의 딸과 결혼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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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선생문집 제33권 / 잡저류 ○ 애책(哀冊)
왕후(王后)를 슬퍼하는 책문(冊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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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9년 병진 가을 윤9월 삭(朔) 임오 21일 임인에 순정왕후(順靖王后)의 재궁(梓宮 군(君)ㆍ후(后)의 관)을 권찬(權𣪁) 임시로 매장한 자리)에서 빈소로 옮겼다가, 5일이 지난 병오에 서울의 서릉(西陵)으로 장사를 모시니, 이는 예법을 따른 것이다.
발인제를 이미 마치고 비단 장막을 막 옮기려 하매 용이(龍轜 용틀임 모양의 상여)는 떠나기를 주저하고 적불(翟茀 꿩의 깃으로 꾸민 수레 뚜껑)은 멈칫거린다. 쓸쓸한 바람이 불어 명정은 나부끼고, 차가운 안개 부슬거려 붉은 깃발은 세차게 펄럭이니, 효자 사왕(嗣王 왕위를 계승한 임금)은 영원한 사모의 정을 하늘에 울부짖고 서릿발을 밟으며 슬픔을 더한다. 이미 사라지신 근엄한 모습을 가슴아파하고 일찍이 떠나신 자훈(慈訓)을 생각하와, 얼굴에 슬픔이 드러나고 말씀마다 그 정이 나타나므로, 이에 종신(從臣)들에 명하여 효성스러운 생각을 펴게 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저 당(唐) 나라 황제의 후손이 우리 대동(大東)을 개척하시니 5백 년 동안에 덕업(德業)과 인풍(仁風)이 흡족하였습니다. 왕화(王化)는 본래 중궁(中宮 왕후를 말함)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니 저 넓은 면주(沔州) 땅에는 정기가 서려 있고, 그곳에 아름다운 대족(大族)이 계셨으니 그 가문을 한씨(韓氏)라 일렀습니다. 적선하기 여러 대에 경사가 무궁하여 훌륭한 따님을 낳으시니 도(道)가 유융씨(有娀氏)와 같으셨습니다. 꽃다운 행실은 정숙하고 신중하셨으며, 원만한 도량은 넓고도 깊었습니다. 지존(至尊)을 풍금(楓禁 임금이 거처하는 궁)에서 짝하시고 의범(儀範)은 초방(椒房 후비의 궁전)에서 깊숙이 닦으셨습니다. 발자국을 밟아 잉태하시어 산월이 되매 무지개의 서기(瑞氣)가 나타나 하늘의 태양 같은 자품을 낳으셨습니다. 좋은 징조가 과연 미더웠더니 어이하여 이토록 슬픔에 얽히게 되었습니까. 요모문(堯母門 한 소제(漢昭帝)가 태어난 구익궁(鉤弋宮)의 문 이름)이 적막하고 태사막(太姒幕 태사는 주 무왕(周武王)의 어머니)이 처량합니다. 아, 슬프도다.
생각건대, 경효왕(敬孝王 공민왕을 말한다)께서는 훌륭한 정치를 하셨음에도 태자의 탄생 소식은 오래도록 어두웠고 후궁에서조차 빛이 막히어, 근심이 용안(龍顔)에 맺히고 염려가 종사(宗祀)에까지 미쳤습니다. 그러다가 하늘이 만들어 주신 합(合)이라 새 왕후를 맞이하사, 아드님을 낳으시어 왕위에 나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공덕은 성대하고 빛나셨지만, 살아계시지 않아 봉양할 수 없으므로 신종(愼終 초상과 장사를 예절대로 함)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였고 좋은 시호로 명분을 높이며 예절은 옛법대로 따랐으니, 추숭(追崇)은 이미 극진히 하였사오나 사모의 정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왕후의 아름다운 옷자락이 이렇게 진열되어 있는데도 패옥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아, 슬프도다. 신선이 오르시는가. 구름은 두둥실 떠가고 구슬픈 상여소리는 새벽을 울립니다. 무거운 슬픔이 용안에 나타나고 신하들의 감회도 깊습니다.
구름은 침침하니 하늘이 시름함인가, 길은 아득한데 땅덩이도 가없습니다. 풍수(風樹)가 고요할 수 없음을 슬퍼함이여, 어이하여 무덤 속은 새벽이 없단말가. 아, 슬프도다. 만물이 조락하니 싸늘한 가을인가, 난초가 향기를 잃고 찬 이슬에 시들었도다. 초목을 바라보고 슬퍼하는 마음이여. 천지가 다하도록 그리움만 솟구칩니다. 깃발처럼 나부끼는 내 마음이여. 눈물이 빗물처럼 흐릅니다. 도성문을 나와서는 머뭇거림이여. 산 언덕을 바라보며 탄식하옵니다. 광야에 부는 바람은 그 소리 처량한데, 안개 속에 뜨는 태양빛도 비참한 듯합니다. 생각은 가없고 한(恨)은 많기도 합니다. 아, 슬프도다. 좋은 무덤자리는 하늘이 마련하여 주셨으니 땅에서도 편안하게 할 것입니다. 산은 감싸 둘러 있고 물은 쏟아져 흘러서 맑고도 시원합니다. 이곳 안온한 유택(幽宅)에서 영혼은 즐거우시고 편안하시리니, 우리 후왕에게 복을 주시어 만수무강하시옵고 자손 백대에 복록과 경사가 무궁할 것입니다. 나를 믿지 못하겠다 하시면 감히 이 글월로 맹세하옵니다. 아, 슬프도다.
[주-D001] 순정왕후(順靖王后) :
공민왕(恭愍王)의 궁인(宮人) 한씨(韓氏)인데, 공민왕 말년에 우(禑)의 어머니라 하여 한씨의 아버지 준(俊), 조부 평(平), 증조 통(通) 3대를 면양부원대군(沔陽府院大君)으로, 외조 한량(韓良)을 면성부원대군으로 봉하였다. 우왕(禑王)이 왕위에 오르자 순정왕후로 추존하고 묘를 서릉(西陵)으로 옮겼다. 이 책문은 바로 그때에 쓴 것이다. 《高麗史 列傳 卷46 辛禑1》
[주-D002] 서릿발을……더한다 :
돌아가신 부모를 계절(季節)의 변화에 따라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봄에 비가 내리면 군자가 부모를 생각하여 근심하는 마음이 있고, 가을에 서리가 내리면 군자가 부모를 생각하여 슬퍼하는 마음이 있다.” 하였다.
[주-D003] 당(唐) 나라……개척하시니 :
고려 건국 후에 의조(懿祖)로 추봉된 왕건(王建)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이 당 나라 황족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고려사(高麗史》 세계(世系)에 의하면, 고려 태조의 증조인 보육(寶育) 즉 원덕대왕(元德大王)의 딸 진의(辰義)가 당 나라 귀성(貴姓)을 만나 작제건을 낳았다 한다.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4 - 사적류 1 / 사적총설(史籍總說)
이십삼대사(二十三代史)와 동국정사(東國正史)에 대한 변증설
상고하건대 《고려사》는 곧 우리나라에서 나온 최초의 정사인데, 상촌(象村) 상국(相國) 신흠(申欽) 은 그 소루(疏漏)한 것을 논박하였고, 성호(星湖) 이익(李瀷) 는 공평하지 못하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사필(史筆)을 쥔 신하로서는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직 세계(世系)를 기술함에 있어 매우 황당하고 틀린 점이 많은데,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그 병통을 바로 지적하였다.
서거정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김관의(金寬毅)와 민지(閔漬)가 고려 세계(世系)에 대해 ‘용의 자손이다.’ 혹은 ‘당 나라 귀성(貴姓)이다.’한말은 허탄(虛誕)하여 근거가 없다. 고려 현종(顯宗)때에 황주량(黃周亮)이 태조(太祖)이하 칠대실록(七代實錄)을 찬하면서 여기에 대한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는데, 김관의나 민지수가 수백년 뒤에 태어나서 황주량이 모르던 일을 알 수 있겠는가. 더욱 의심스러운 것은 만일 이 설과 같다면 고려의 시조는 증조(曾祖)를 버려 선조로 삼지 않으면서 도리어 증조모의 아버지를 선조로 하고 또 아버지는 고(考)가 되고 딸은 비(妣)가 되니 그 설이 잘못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뒷날 《고려사》를 찬한 사람들이 어찌하여 이것을 외기(外紀)에 붙여 넣은 것인가.” 하였다.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에는 김관의의《왕대종록(王代宗錄)》과 동일하며, 정지상(鄭知常)의 《음보록(陰報錄)》에는 고려의 조상은 왕몽(王蒙)의 제3자라 …… 혹시지후(或時之後) 왕몽은 태화산(太華山)의 신인(神人)인 왕수긍(王受兢)의 13세손이라고 하였으니 더욱 믿을 수가 없다. 나의 우견(愚見)으로는 그들이 혹 낙랑(樂浪)이나 현도(玄菟)에 있던 왕씨(王氏)의 후예로서 조상을 잃어버린 자들인 듯하다. 현도ㆍ낙랑 2군의 인물을 상고해보면 왕씨(王氏)가 많이 있으니, 대개 그 군의 드러난 종족으로 왕굉(王閎)ㆍ왕간(王簡)은 한(漢)ㆍ진(晉) 시대에 충의(忠義)가 드러난 이들이었다.
《중당사기(中堂事記)》에는 “원(元) 나라 승상(丞相) 사천택(史天澤) 등이도당(都堂)에서 고려 세자 식(植)에게 연회를 베풀면서 국왕의 세계를 물으니, 답하기를 ‘당 순종(唐順宗)의 제 13자가 난을 피하여 도망가 여기에 자리를 잡았는데, 왕가(王家)의 후손이라 하여 왕씨로 성을 바꾸었다.’ 했다.” 하였으니,《고려사》에서 말한 것과 대략 비슷하다. 이는 대개 중국을 끌어대어 가문을 중하게 하고 오랜 것처럼 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 말은 청(淸) 나라 왕사진(王士禛)의 《거이록(居易錄)》에 나오니, 《고려사》를 읽는 사람은 여기에 대해 깊이 고증해야 한다.
청 나라 죽타(竹垞) 주이준(朱彝尊)은 “그 체재가 조리가 있어 문란하지 않으니 왕씨 일대의 문헌으로 족히 징험할 만한 책이다.” 라고 칭찬하였다. 주이준이 《고려사》뒤에 쓰기를 “그 나라 사람 정인지(鄭麟趾) 등 32인이 편찬하여 명 나라 경태(景泰) 2년(1451) 8월에 표(表)를 올려 바치고 아울러 간행하였다. 그 체재를 보면 조리가 있어 문란하지 않으니 왕씨 일대의 문헌으로 족히 징험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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