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8. 11:42ㆍ고대사
月汀先生別集卷之四 / 漫錄
〈9〉
광녕성(廣寧城) 북쪽 5리쯤에 기자정(箕子井)이 있다. 예전에 이 근처에 기자묘(箕子廟)가 있었는데, 그 안에 방건(方巾)을 쓴 기자의 소상이 있었다. 가정(嘉靖) 연간에 달자(㺚子)에 의해 불타서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광녕성은 기자의 봉토 안에 있으니, 기자가 이곳에 머물렀기에 우물과 사당이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13〉
중국 사람들이 천하의 명승지를 말할 때는 반드시 소주(蘇州)와 항주(杭州) 두 지역을 이야기한다. 속언에 늘상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라고 하니 누구나 다 이렇게 말한다. 항주는 남송(南宋)이 도읍을 세운 임안부(臨安府)이고, 소주는 송나라의 평강부(平江府)이다.
〈14〉
중국 사람들이 말하기를,
“송나라가 남쪽으로 옮겨가던 중 황제가 임안(臨安)에 머물렀다가 그대로 그곳을 도읍으로 정했는데, 옛 도읍의 신료들이 황제의 수레를 호종하여 임안에 와서 살았기 때문에 성에 살고 있는 모든 백성이 모두 개봉(開封 북송의 수도) 사람들이었고 언어는 모두 변량(汴梁 개봉)의 말씨였다. 자손이 이어져서 지금에 이르렀으니, 항주성 안은 모두 중원 말을 쓰고, 성 밖은 모두 남방 말씨에 시골 사투리를 쓴다.”
하였다.
〈15〉
호응원(胡應元)이 말하기를,
“중국 각 현의 진사 출신은 복건(福建) 보전현(莆田縣)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은 절강(浙江) 여요현(餘姚縣)인데, 이 외에는 모두 두 현만 못하다.”
하였다.
〈32〉
계유년(1573, 선조6)에 내가 종계 주청부사로 상사 판서 이후백(李後白), 서장관 칠원(漆原) 윤탁연(尹卓然)과 함께 북경에 갈 때의 일이다. 가다가 요동에 도착했을 때 마침 조련 병부 시랑(操鍊兵部侍郞)이 순시차 요성(遼城)에 도착하였는데, 성안의 대소 관원들이 모두 하루이틀 거리 밖까지 마중을 나갔다. 들으니 조련 병부 시랑은 좌시랑 왕도곤(汪道昆)이었다. 그 뒤에 왕 시랑이 지은 《부묵(副墨)》과 《황명십대가(皇明十大家)》에 있는 왕남명(汪南明 왕도곤)의 문장, 그리고 엄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의 《사부고(四部稿)》에서 왕백옥(汪佰玉 왕도곤)을 대단히 칭찬한 것을 보고, 비로소 왕 시랑이 바로 요즘 문장의 대가임을 알았다. 운 좋게 동시대에 태어나 마침 북경으로 가는 길에 요성(遼城)을 순시하러 온 시랑을 만났으니, 만일 그가 천하의 문장가임을 알았다면 길가에 나가서 얼굴을 바라보았을텐데, 미처 몰랐으니 지금까지 이것이 항상 한스럽다.
그는 조련 병부 시랑을 지낸 후에 날마다 한 말의 금을 소비하였다는 이유로 참소를 당해 파직되어 다시 기용되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봉주(鳳洲) 왕세정이 공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일전에 하인을 보내서 안부를 여쭈었는데 그때에 병부 시랑께서 여전히 현도(玄菟)의 패수(浿水)가에 계셔서 훌륭한 가르침을 받들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하였으니, 조련 병부 시랑으로 순시하러 나갔을 때를 말한다.
〈37〉
중국은 외국의 왕을 왕자(王子)라고 부른다. 우리나라가 왜구의 난리로 임금께서 파천(播遷)하였을 때 여러 번 중국의 차관(差官)을 접대하면서 자주 이 말을 들었다. 그리고 기억하기로 《송감(宋鑑)》 〈인종기(仁宗記)〉에,
“요(遼)나라 사신이 고려가 직공(職貢)을 소홀히 해서 지금 군대를 보내려고 한다고 말하자, 인종이 말하기를, ‘이것은 단지 왕자(王子)의 죄이니 백성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지금 왕자에게 군대를 출동시키더라도 반드시 주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백성만 도륙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여 결국 군대의 출동을 막았다.”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왕자는 바로 고려의 국왕을 가리키는 것이니, 왕자의 칭호는 송나라 때 이미 있었던 것이다.
〈38〉
우리나라 종계(宗系)에 대한 무고를 변론했을 때, 주문(奏文) 중에는 ‘국조(國祖)의 휘는 자춘(子春)이며, 자는 자춘(子春)이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명나라 예부의 관리 가운데 이것을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사신이 돌아오자 참판 김계휘(金繼輝)가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이것은 의심할 것이 못 된다. 옛사람들 중에 자가 이름과 같은 사람이 많았다. 예를 들면 곽자의(郭子儀)의 자는 자의(子儀)이고, 양연기(楊燕奇)의 자는 연기(燕奇)였다.”
하면서, 잠깐 이야기하는 사이에 이름과 자가 같은 사람 모두 7명을 하나하나 거론하는데 책을 살펴보지도 않았으니, 박식하다고 이를 만하다.
〈40〉
《금헌휘언(今獻彙言)》에는 동지 후에 남은 날이 있으면 남은 날수로 이듬해의 윤달을 정하는데, 가령 하루가 남으면 내년 정월에 윤달을 두고 이틀이 남으면 2월에 윤달을 두고 13일이 남으면 이듬해에 윤달이 없다고 하였다.
융경(隆慶) 6년 임신년(1572, 선조5)은 전해가 바로 신미년으로 그 해 동지 이후로 4일이 남았는데 일관(日官)이 2월을 윤달로 삼았다. 어학관(魚學官)이 《금언휘언》을 본적이 있어서 윤달을 잘못 정했다고 완강하게 주장해 영감사(領監事)가 다시 헤아려 보라고 명령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일관은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여 틀리지 않았다고 힘껏 주장했다. 뒤에 대통력(大統曆)을 살펴보니 그해에 윤달이 과연 2월에 있어서 일관은 잘못에 대한 책임을 면하게 되었다. 일관 남응년(南應年)은 “책력을 만드는 법식에 ‘동지 이후 남는 날로써 윤달을 삼는다.’라고 하지만 이 법식은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한달 안에 중기(中氣)가 없는 달로 윤달을 삼으면 책력의 수에 잘 들어맞는다.”라고 말했다. 이것 또한 몰라서는 안 된다.
〈44〉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진 뒤 몇 대에 걸쳐 나라를 전하다가 기준(箕準)에 이르러 위만(衛滿)의 난리를 피해 평양에서 금마군(金馬郡)으로 달아났는데, 바로 지금의 익산(益山)이다. 이것이 마한(馬韓)으로, 다시 몇 대를 전하다가 망하였다. 지금 평안도의 선우씨(鮮于氏)는 기자의 후예라고 일컬어진다. 《씨족대전(氏族大全)》에,
“기자는 조선에 봉해지고 작은 아들은 우(于)에 봉해졌는데 그 후손이 선우씨가 되었다.”
하였다. 그렇다면 선우씨는 기자의 작은 아들의 후손이지 기준의 후손은 아니다. 기준이 마한을 세우고 그 후손은 한씨(韓氏)가 되었으며, 우리나라의 청주 한씨(淸州韓氏) 등의 한씨는 모두 기준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위략(魏略)》에 나오는데, 후예라고는 하지만 정확히 그러한지는 모르겠다.
세종(世宗) 때 기자의 후예를 찾아 대대로 벼슬을 주고 제사를 받들게 하여 고려 숭의전(崇義殿)처럼 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진짜 후손을 찾을 수 없어 논의가 중지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익산군(益山郡) 성씨 조(姓氏條)에 한씨 성이 있는데 이를 말한다. - 이하 원문 빠짐 -
〈45〉
평양에 기자의 지팡이라고 전하는 등나무 지팡이 한 쌍이 있었다. 하나는 가운데가 부러져서 누런 주석으로 부러진 곳을 묶었다. 평소에는 칠갑(漆匣)에 넣어 두었다가 감사가 관아에 나갈 적에 기병 2인이 들고서 앞에서 인도하였다. 감사가 자리를 잡고 정무를 보거나 손님을 만날 때에는 섬돌 위 좌우에 세우고 붉은 칠을 한 나무틀로 받쳐두었다. 임진왜란 때 잃어버렸다고 한다.
〈85〉
가정 계묘년(1543, 중종38) 전시 때 윤장원(尹長源 윤결(尹潔))이 시험장에 들어가 노과회(盧寡悔 노수신(盧守愼))의 글을 보고는 함께 시험장에 들어간 사람에게 말하기를,
“뛰어난 문장가는 따라잡을 수가 없다. 표문은 노수신의 장기가 아닌데도 이렇게 잘 지었으니, 급제자가 발표되면 과회가 분명 장원할 것이고, 언구(彦久 윤춘년(尹春年))는 방안(榜眼), 나는 탐화(探花)를 차지할 것이다.”
하였다. 급제자가 발표되자 과연 노수신이 장원을 하였으나 차식(車軾)이 제2인, 윤춘년(尹春年)이 제3인이고 윤장원은 을과(乙科) 1인이었다. 윤장원이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거시기〔渠軾〕’가 있는지 몰랐다가 결국 제4인이 되었네.”
우리나라는 ‘차(車)’ 자를 ‘거(渠)’ 자와 같이 읽기도 하는데, ‘거시기’는 누구인지 모를 때 부르는 말이다. 헛갈리는 말로 농담한 것이다.
月汀先生集卷之五 / 序
연경에 가는 이 첨추 수준 를 전송하는 서문〔送李僉樞 壽俊 如京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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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징(李台徵) 군이 동지사(冬至使)로 연경에 가게 되었는데, 떠날 때가 되자 나에게 글 한 편을 써달라고 하였다. ……….
임진왜란이 일어난 초기에 나는 원병을 요청하라는 명령을 받고 의주(義州)에서 봉황성(鳳凰城)으로 달려갔다. 가다가 개주성(開州城)이라는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산 아래의 길가에 가마 두 채가 내려져 있었다. 물어보니 유 원외(劉員外 유황상(劉黃裳))와 원 주사(袁主事 원황(袁黃))가 가마에서 내려 말을 타고서 산 위에 있는 개소문(蓋蘇文)의 무덤을 보러 간 것이었다. 내가 봉황성에 도착했을 때와 요동에 갔을 때 개소문의 무덤에 대해 물었는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조사(詔使) 설번(薛藩)이 우리나라에 오는 길에 개주성에서 개소문의 무덤을 찾아가 보았는데 무덤 앞에 비석이 있었다고 하니, 그의 무덤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 듯하다.
요동 북성 바깥에 태자하(太子河)가 있다. 상류 30리쯤 되는 곳의 강가에 석성(石城)이 있다고 한다. 이세적(李世勣)이 고구려를 정벌하였을 적에 이 성을 포위하였는데, 성 안에 양식이 떨어지고 구원병이 오지 않자 태자가 성 위에서 강으로 뛰어내려 죽었다고 전한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하자 태자가 불응하여 도성을 멀리 떠나 요동 땅의 외딴 성으로 가서 그곳을 지킨 것인지, 아니면 막리지(莫離支)의 아들이 이 성을 지키면서 태자라고 거짓으로 자칭한 것인지, 상고할 만한 문헌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요동성 안의 북창(北倉)에 화표주(華表柱)가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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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관(懷遠館) 문에서 남쪽으로 천산(千山)을 바라보면 산봉우리가 수려하며, 성 동쪽에는 탁타동(橐駝洞)이 있는데, 모두 유람할 만한 곳이라 한다. 천산은 회원관에서 60리 떨어져 있다. 천산에는 향연사(香煙寺)가 있고 향연사 앞의 바위 위에 부처의 자취가 있다고 한다. 성 안의 향현사(鄕賢祠)에 관녕(管寧)과 왕열(王烈)의 위패가 있어 먼 옛날을 떠올리게끔 한다. 학당(學堂)의 전면에는 대성전(大成殿)이라는 세 글자가 크게 적혀 있고, 또 작은 글자로 씌어진 ‘주(朱) 아무개가 쓰다’라는 주석이 있는데, 장주(漳州)에서 임모(臨摸)해 온 것이라 한다. 성 위에는 간화루(看花樓)와 망경루(望京樓)가 있고, 북성 바깥에는 태자하가 있는데 모두 볼만하다.
자재주(自在州)가 북성 안에 있어 귀화한 사람들이 사는데, 동쪽에는 고려 사람, 서쪽에는 달자(㺚子)가 산다고 한다. 성 밖 팔리참(八里站)의 뒷산이 바로 수산령(首山嶺)이고, 수산령 동북쪽에는 바위 봉우리가 높이 솟아 내려다보고 있는데, 수산령은 당 문황(唐文皇 당 태종(唐太宗))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한다. 성의 서북쪽 모퉁이에는 백탑(白塔)이 있는데, 광녕(廣寧)의 쌍탑과 더불어 모두 문황이 요동을 정벌할 적에 울지경덕(尉遲敬德)에게 세우도록 명한 것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이세적이 통정(通定)에서 요수(遼水)를 건너 현토(玄菟)에 도착했다.”라는 글이 있다. 요수는 다름 아닌 삼차하(三叉河)이니, 이세적이 요수를 건너 현토에 도착한 것이다. 현토는 아마도 해주위(海州衛)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듯하나 지금은 정확히 어느 곳이라고 지적할 수 없다.
개모성(蓋牟城)은 지금의 개주위(蓋州衛)로서 요동성 서남쪽에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자치통감》의 주석에 “요동성 동북쪽에 있다.”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안시성(安市城)은 《요지(遼志)》에 “개주 땅의 산 위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의 말로는 태자성(太子城)과 안시성은 모두 바위를 쌓아 만든 성으로, 벽돌로 지은 중국의 성과는 다르다고 한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 말이 거짓은 아닌 듯하다.
의무려산은 옛적에 이른바 유주(幽州)의 진산(鎭山)이다. 유주는 지금의 광녕(廣寧)이다. 성 밖으로 나가서 조금 북쪽으로 가면 예전에 기자묘(箕子廟)가 있었다. 후관(冔冠)을 쓴 기자의 입상(立像)이 있었다 하는데, 가정(嘉靖) 연간에 오랑캐와의 전쟁으로 불에 타서 기자의 입상과 기자묘 모두 남아 있지 않으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기자정(箕子井) 뿐이다. 기자가 조선에 봉해질 적에 요서(遼西)까지 소유하였다면 광녕이 판도(版圖)에 포함되었을 것이니, 기자의 행도(行都)가 이곳에 있었기에 사당과 우물이 있는 듯하다.
또 그 북쪽에는 북진묘(北鎭廟)가 있는데, 그곳에 올라 보면 의무려산 골짜기가 모두 눈앞에 보인다. 옆에는 여선암(呂仙巖)이 있는데, 바위에 글자를 새겼다. 그 신선의 자취가 도달한 황학루(黃鶴樓)와 악양루(岳陽樓)는 모두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아마도 아침에 북해(北海)로 갈 적에 날아서 이곳을 지난 듯하다.
십삼산(十三山) 위에는 망해사(望海寺)가 있다. 내가 갔을 적에 소릉하(小凌河)에 수자리를 살러 온 관중(關中) 사람을 만났는데, 경수(涇水)와 위수(渭水)의 크기를 물었더니 위수는 대릉하와 같고 경수는 소릉하와 같다고 대답하였다. 그의 말이 과연 믿을 만한지 모르겠다. 행산(杏山)에 도착하기 전에 길가에서 북쪽으로 푸른 것이 바라다보이면 의주(義州)와 금주(錦州)의 경계에 도착한 것이다. - 이 글의 절반은 없어졌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이 말하기를, “이 서문은 비록 절반이 없어졌으나 반드시 권말에 남겨 널리 고증에 대비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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