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8. 11:37ㆍ고대사
고전번역서 > 성호사설 > 성호사설 제1권 > 천지문 > 최종정보
성호사설 제1권 / 천지문(天地門)
단기강역(檀箕疆域)
[DCI]ITKC_BT_1368A_0020_010_0470_2002_001_XML DCI복사 URL복사
순(舜)이 처음으로 12개의 주(州)를 설치하고 12개의 산을 봉하였으며, 또 12개의 목(牧)을 임명할 때에 유주(幽州)도 그 중의 하나였다. 《한서》 지리지(地理志)에 보면, “유주(幽州)에는 그 산이 의무려(醫巫閭)이며 그곳에서 해산물과 소금이 많이 생산된다.” 하였으니, 이곳이 지금의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이 아니고 어디이겠는가? 단군(檀君)은 요(堯)와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웠으니 12개의 주를 설치할 때는 벌써 건국한 지가 백 년이 넘었다. 그 영토의 경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기자(箕子)가 계속하여 나라를 세웠고 그의 후손인 조선후(朝鮮侯)의 시대에 와서 연(燕)과 힘을 겨루었는데, 연이 그 서쪽 지역을 공략하여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반한(滿潘汗)까지를 경계로 정함으로 인하여 조선이 비로소 약해졌으니, 연에서 동쪽으로는 본래 땅이 얼마 없었은즉 만반한은 바로 지금의 압록강이다. 만(滿)은 만주(滿州)요 반(潘)은 심(瀋)이 잘못된 것이다. 압록강 밖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의 거리가 천여 리에 불과하고 보면 연에게 빼앗긴 지역은 요양과 심양이 아니고는 다시 그에 해당한 지역이 없다. 그렇다면 단군 시대에 벌써 순(舜)의 통치권 내에 들어간 것이니, 우리나라가 미개 사회에서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인 지가 벌써 오래되었다. 순도 본시는 동방 민족이었으니, 저풍(諸馮)과 부하(負夏)는 모두 동방 9개 종족 중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기자(箕子)의 수도가 평양이었으나 연과 국경이 연접되었고, 고죽(孤竹)이란 나라의 유허도 그 가운데에 있었을 것이다. 요순 시대부터 중국 내지와 같이 다루어 왔고 단군ㆍ기자, 백이(伯夷)ㆍ숙제(叔齊)의 교화가 이루어졌으니 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이 여기만한 곳이 없었다.
지금 압록강 이외의 지역은 지리적인 조건이나 인간관계로 보아 다시 합할 수 없게 되어서 마침내 압록강을 국경선으로 만들게 되어 영토의 일부가 완전히 없어지고, 일부 지역만을 보존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문명의 전통인 옛 문화를 잃지 않고 있으니, 그런대로 천지간에 한 즐거움이라 할 것이다.
[주-D001] 단기강역(檀箕疆域) :
《類選》 卷1下 天地篇下 地理門. 《五洲》 卷34 檀箕爲國號辨證說. 卷34 東國疆域辨證說.
고전번역서 > 성호전집 > 성호전집 제26권 > 서 > 최종정보
성호전집 제26권 / 서(書)
안백순에게 답하는 편지 병자년(1756, 영조32) 〔答安百順 丙子〕
[DCI]ITKC_BT_0489A_0260_010_0010_2014_008_XML DCI복사 URL복사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에 대해 나도 어떻게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일찍이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선비산(鮮卑山)이라는 산이 본래 중국의 동북쪽 변경 바깥에 있습니다. 동호(東胡)의 한 종족이 그 아래 거주하는데, 부락(部落)도 번성하여 선비(鮮卑)라고 이름을 붙인 곳이 매우 많았습니다. 지금 동쪽 변경의 여러 산은 모두가 이 산의 줄기로서, 그중에 가장 동쪽이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인해 조선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구려(高句麗)의 유리왕(琉璃王)이 선비와 전투를 벌였으니,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조(聖朝)에 이르러 처음에 조선과 화령(和寧)으로 국호를 청하였습니다. 화령은 과연 어디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고려사(高麗史)》 〈식화지(食貨志)〉를 상고해 보니, 신우(辛禑) 9년(1383)에 태조(太祖)가 안변책(安邊策)을 올려 “동북(東北)의 일도(一道)는 땅이 좁고 척박한데, 화령은 도내(道內)에서 땅이 넓고 비옥하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공양왕(恭讓王) 10년에는 동계(東界)의 화주(和州)를 승격시켜 화령부(和寧府)로 삼았으니, 이곳은 바로 영북(嶺北)에서 왕업이 일어난 곳입니다. 공양왕 때에 태조가 공(功)으로 화령백(和寧伯)에 봉해졌습니다. 무릇 국호를 세울 때에 반드시 그 근본을 들어서 국호를 삼기에 그러한 것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명(明)나라 홍무(洪武, 1368~1398) 초에 천자(天子)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고 하면서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장주(長州), 정주(定州), 고주(高州), 화주(和州)는 본래 개원(開原)에 속하는 지역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곳은 바로 함흥(咸興) 이남의 몇 개 고을입니다. 상고해 보니, 영원현(寧遠縣)은 개원의 서남쪽에 있고, 다시 그 남쪽은 남강(南康)이고, 다시 그 남쪽은 합란부(哈蘭府)이고, 다시 그 남쪽은 쌍성(雙城)입니다. 쌍성은 바로 지금의 북로(北路)의 영흥(永興)입니다. 그 경계가 고려에 근접해 있었으니, 총관(總管) 조휘(趙暉)의 일에서 증험할 수 있습니다.당시에 다행히 박의중(朴宜中)이 잘 대처하는 바람에 중지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한 번 일어나야 했던 논의인데, 만약 그렇게 되었더라면 북쪽으로 한 방면은 다시는 우리나라의 소유가 되지 못했을 것이니, 역사를 저술하는 사람이 뜻을 기울여야 할 바입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고려조의 합단(哈丹)과 근세 병자년(1636, 인조14)에 침입한 청(淸)나라의 대병(大兵)은 모두 철령을 통해 침입한 것이니, 저들이 어찌 육진(六鎭)을 통해 돌아서 침입했겠습니까. 지금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의 물은 북쪽으로 압록강에 흘러드는데, 높거나 깊은 험지(險地)가 없으니, 필시 빠른 지름길이 있어서 곧바로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도무지 조사하여 검증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또한 이해해야 합니다.
열수(洌水)는 패수(浿水)와 같이 호칭되니, 간혹 이러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저탄강(豬灘江)의 벽란정(碧瀾亭)이 매우 명확한 증거입니다. 중국(中國)의 책에서 비록 혼동하여 칭했다 하더라도 본토(本土)에 있는 지명은 마땅히 구별해야 하니, 필시 두 강을 병칭(竝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대동강(大同江)을 패수라고 단정한다면, 당시 사람들이 저탄강을 가리켜 이름이 없다고 여겼겠습니까. 이것은 어떻게 헤아려 보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유민(流民)을 남읍(南邑)으로 이주시킨 사실이 다루왕(多婁王) 10년에 보이는데, 고구려에 쫓겨서입니다. 다시 두루 상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삼한(三韓) 이전에 삼남(三南)은 변방이었으므로 기자(箕子)의 나라와는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기준(箕準)에 이르러 마한(馬韓)의 왕을 축출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니, ‘한(韓)’이라는 명칭은 호강왕(虎康王) 이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한(韓)나라가 진(秦)나라와 가장 가까웠으므로 한나라의 백성들이 먼저 움직였으니, 이에 대해서는 《전국책(戰國策)》이 있어 근거할 수 있습니다. 진나라를 피해 오는 사람들은 필시 서하(西河)로부터 중국을 거쳐 심양(瀋陽)과 요령(遼寧)을 둘러서 영남(嶺南)에 들어오지는 못하였을 것이니, 그들이 바다를 곧바로 건너왔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한나라의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어찌 반드시 앞사람이 스스로 이름을 붙인 것을 뒷사람이 따라서 세 나라가 함께 칭하게 될 수가 있었겠습니까. 나의 생각으로는, 장량(張良)의 시대에는 삼한을 창해(滄海)라고 칭하였을 것입니다. 장량의 역량은 해외에서도 충분히 일을 주관하였으므로, 때때로 갑자기 튀어나와 철퇴로 진 시황(秦始皇)을 저격하기를 마치 자신의 손아귀에서 희롱하듯이 수행하여 어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아득하여 자세히 상고할 수 없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중국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파악할 안목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백성들도 고정된 사고(思考)의 근원적인 이유를 깨닫지 못하였으니, 생각해 보면 참으로 한바탕 웃음이 나올 만합니다.
이른바 기자(箕子)의 판도(版圖)에 대해서는 자세한 사실을 상고할 수 없습니다. 뒤에 서쪽의 영토 수천 리를 연(燕)나라에 잃었으니, 요령(遼寧)과 심양(瀋陽)이 바로 그 지역 안입니다. 삼국(三國)의 말기에 신라가 그 지역을 제어하지 못하고, 발해로 하여금 그 땅을 차지하여 동쪽으로 바다에까지 세력이 미치다가 뒤에 거란에 멸망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우리나라가 요(遼) 지역을 잃게 된 시말(始末)입니다. 고려의 태조가 요나라의 사신을 막고서 장차 옛 영토를 회복하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상고해 보니, 서희(徐煕)가 소손녕(蕭遜寧)에게 답하기를 “귀국의 상경(上京)은 본래 우리나라의 영토이다.”라고 하니, 소손녕이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요 땅 전체가 본래 순(舜)이 처음 설치한 12주(州) 가운데 들어 있었습니다. 상고해 보니, 유주(幽州)는 의무려(醫巫閭)라는 산이 있고 물고기와 소금이 산출되니, 요해(遼海)가 아니고 어디이겠습니까. 단군(檀君)과 기자의 나라가 압록강의 안팎을 차지하여 요순(堯舜)의 교화를 함께 입었고 기자에 이르러 팔조(八條)를 더하였으니, 전해지는 삼조(三條)는 바로 한 고조(漢高祖)의 약법삼장(約法三章)으로, 오륜(五倫)과 합하면 여덟 단락이 되는데, 그 의미는 마치 부절(符節)을 합쳐 놓은 듯이 들어맞는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생각건대, 한(漢)나라의 책략(策略)은 모두 장량이 정한 것인데, 혹시 창해(滄海)에 전해 오는 전통에서 얻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에 대해서는 감히 아직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단군은 요컨대 요순과 같은 시대였고, 순은 동이(東夷)의 사람이었으니, 모두 태평한 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성스럽고 신령한 분이 처음 나오면 반드시 그 소문이 가까이에 자자할 것입니다. 박달나무는 향나무입니다. 그러므로 후인들이 묘향산(妙香山)을 처음 내려온 곳으로 여겼던 것이고, 옛 역사책에는 “신인(神人)이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서 아들을 낳으니, 단군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최치원(崔致遠)의 글을 상고해 보니, 발해가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였다고 하였으니, 태백산은 요(遼) 땅에 있는 것입니다. 그 설은 모두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환웅(桓雄)이니 환인(桓因)이니 하는 등의 말은 허황되어, 버려도 됩니다. 그는 결국에 아사달산(阿斯達山)으로 들어갔는데, ‘아사’라는 말은 속어(俗語)로 아홉이라는 의미이고, ‘달’이라는 것은 속어로 달입니다. 구월산(九月山)이 그것에 해당된다고 한다면 거의 옳습니다. 지금 그 산 아래에 당장경(唐莊京)과 삼성사(三聖祠)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전하는 말에, 단군의 세대에 기자를 피하여 여기로 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자는 어질고 성명(聖明)한 인물인데, 어찌 남의 나라를 함부로 점유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필시 저들이 이미 쇠망한 뒤에 황폐해진 옛터를 닦아서 나라를 새로이 열었던 것입니다. 혹자가 단군이 아사달산으로 들어간 때가 바로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이라고 한 것이 이치에 가깝습니다. 단군의 후손도 신(神)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기자의 봉지(封地)는 남기(南箕)의 별자리에 해당합니다. 자(子)는 오등(五等)의 작위 가운데 하나이니, 그가 주(周)나라의 작명(爵命)을 받았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홍범(洪範)〉에 이른 ‘기자’라는 것은 바로 사관(史官)의 기록이니, 아마도 이전에 이미 이렇게 봉해진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기자가 아뢴 〈홍범〉은 바로 〈낙서(洛書)〉를 부연하여 만든 것입니다.〈낙서〉의 자리는 2와 8이 그 위치를 바꾸었습니다. 곤(坤)과 간(艮)은 마주 대하여 위로 은하(銀河)에 응합니다. 은하는 본래 회전하는 것인데, 지금 중국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다만 머리인 간에서부터 꼬리인 곤에 이르기까지일 뿐입니다. 간(艮)은 기(箕)와 미(尾)의 별자리에 해당합니다. 지금 압록강 이서(以西)의 물은 모두 간방(艮方)에서 곤방(坤方)으로 흘러 〈홍범〉의 글과 부합하여 그 일이 마치 귀신이 도운 것과 같으니, 매우 기이합니다. 그러므로 순이 유주를 처음 설치한 뒤로 백이(伯夷)가 가서 살았으며, 공자(孔子)도 바다로 떠나가고자 하였으니, 동쪽의 노(魯)나라에 뗏목을 띄운다면 지향하는 곳이 기자의 나라가 아니고 어디이겠습니까.
옛날 성인(聖人)이 주나라 말기에 태어나 두 기둥 사이에 앉아 제사를 받는 꿈을 꾸고 나서 “나는 은나라 사람이다. 지금 천하에 그 누가 나를 종주(宗主)로 받들겠느냐.”라고 하였으니, 근본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조선 사람들이 큰 관(冠)을 쓰고 흰옷을 입는 것을 통해 아직도 은나라의 질박한 유속(遺俗)을 지키는 것을 왕왕 증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하늘의 뜻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일찍이 《시경(詩經)》의 〈도인사(都人士)〉 시를 읽으면서 띠풀로 만든 갓과 말아 올린 머리털이 마치 동도(東都)의 선비와 여자를 보는 듯하였으니, 어찌 아득히 당시를 상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죽은 아들이 생시에 예조(禮曹)에 오래 근무하면서 사신을 접대하는 업무를 관장하였는데, 하루의 책임이라도 다하기를 생각하면서 《접왜역년고(接倭歷年攷)》라는 책을 짓고 자신의 견해를 많이 첨부하였습니다. 그 내용 중에 참으로 채용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본래 여러 동지(同志)에게 부치고자 하였으나, 편지를 전하는 인편에 부칠 만한 것이 아니어서 일단 그만두었습니다. 예부터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한 의론은 대체로 모두 엉성해서 볼만한 것이 없습니다. 역사를 저술할 때에는 천고(千古)의 면모(面貌)을 드러내고 손질하여 더욱 정중하게 표현하되, 진부한 옛 기록을 답습해서는 안 됩니다. 병을 앓은 뒤에 손이 가는 대로 어지러이 써서 말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만, 조용히 살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별지(別紙)
사군 이부(四郡二府)는 남북조(南北朝)와 비슷한 듯합니다. 마한의 통치는 한강의 북쪽에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동진(東晉) 시대에 원위(元魏)를 기록한 사례에 대해서는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사례가 있습니다.
신라는 스스로 수로왕(首露王)과 동성(同姓)이라고 하기도 하고, 스스로 금천씨(金天氏)의 후예라고 일컫기도 하였으니, 금란(金卵)과 금궤(金櫃)의 일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회(朝會)했으면 조회했다고 쓰고 갔으면 갔다고 써서, 사실에 근거해야 합니다. 이것은 중화와 오랑캐를 구별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고려가 인종(仁宗)이 즉위해서는 마음을 다해 요(遼)나라를 섬겼고, 원종(元宗)과 충렬왕(忠烈王) 이후로는 또한 마음을 다해 원(元)나라를 섬겼습니다. 상고하여 바로잡아야 합니다.
고구려의 을파소(乙巴素)는 천고(千古)에 빼어난 한 명의 인물이니, 마땅히 밖으로 드러내 기록해야 합니다. 혹자는 왕후(王后)로 세우는 일을 간언(諫言)하지 아니한 것을 가지고 의심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사직(辭職)을 한 뒤였고, 또 계승한 왕과 꼭 마음이 맞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遼) 땅은 고구려 때에는 그래도 통치권 내에 있었으나, 삼국의 말기에 신라가 미약해져서 말갈(靺鞨)에게 맡겨 두었더니 대씨(大氏)에게 통합되었습니다. 요나라가 흥기하여 그 땅을 빼앗으니, 고려 태조가 그 땅을 회복하려고 하여 요나라의 사신을 쫓아 버리고 국교를 단절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갑자기 별세하였습니다. 훗날 광군(光軍)을 설치한 것은 모두 이러한 뜻입니다. 소손녕(蕭遜寧)과의 문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종(仁宗) 때에 이르러서는 마음을 다해 요나라를 섬겼습니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바로 당시의 인물이니, 응당 거짓으로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혹자는 마한이 기자의 후예라는 것을 의심합니다. 고구려의 땅은 본래 기자의 나라이고, 삼국이 삼한을 계승하였으므로 대략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라는 처음에 낙동강(洛東江) 이동(以東)의 땅을 가지고 있었고, 그 서쪽은 바로 여섯 가야(伽倻)의 땅이었으며, 변한(弁韓)은 그 남쪽에 있었으니 필시 지리산(智異山) 이남의 여러 고을로서, 지금의 경상도와 전라도의 여러 고을에 걸쳐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처음에는 신라에 항복하였더라도 그 뒤에는 결국 백제에 편입되었으니, 아마 지금 전라도 동남쪽의 여러 고을이 모두 변한의 땅이 아니었겠습니까. 이것은 의심스러운 대로 기록하여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辰)’이 ‘진(秦)’이라는 것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진영(辰嬴)을 근거로 삼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진(秦)나라를 피해서 왔는데, 한(韓)나라의 사람들이 먼저 왔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곡영전(谷永傳)〉을 근거하면, 한종(韓終)과 서복(徐福)이 함께 왔었다는 사실을 또한 증명할 수 있습니다.모두 진나라가 통일한 이후에 온 사람들이었으므로 합하여 ‘진국(辰國)’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한종은 필시 한(韓)나라의 자손일 것입니다. 장량(張良)이 말한 창해군(滄海君)이라는 자가 이 사람이 아닌 줄 어찌 알겠습니까. 창해(滄海)라는 것은 동방(東方)을 통칭하는 말이지 일개 강릉부(江陵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운(孤雲)의 글에 “한 지방이 무사하고, 창해가 편안하다.”라고 한 것을 통해 또한 증명할 수 있습니다.
백제 땅에는 원래부터 백제국(伯濟國)이 있었으니, 십(十)이 변하여 백(百)이 되었다는 말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 변(弁) 자의 의미는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변한(弁韓)을 반드시 변진(弁辰)이라고 부르니, 변(弁) 역시 진(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와 백제가 지리산을 경계로 삼은 것은 후대(後代)의 영토를 말하는 것이니, 만약 초기의 영토를 논한다면 신라의 서쪽은 여섯 가야(伽倻)이고, 그 서남쪽은 변한입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지금 영토와 명칭이 바뀐 뒤의 상황에서 매번 외국에서 전해 들은 것을 가지고 억측하여 판단한다면, 애로가 있을 듯합니다. 그것에 대한 설은 장황하여 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라는 것은 본래의 글을 찾아볼 수가 없는 데다, 항상 중국의 역사를 가지고 근거를 삼고서 끼워 넣어 어지럽게 만들어 더욱 읽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시골 사람이 스스로는 믿지 않으면서 서울 사람은 진실하다고 믿는 것과도 같은 경우이니, 왕왕 한바탕 웃을 뿐입니다. 마땅히 변별하여 보아야 합니다. 낙랑(樂浪)과 임둔(臨屯)은 압록강의 남쪽에 있었고, 현도(玄菟)와 진번(眞蕃)은 북쪽에 있었습니다. 우거(右渠)는 주변 소읍(小邑)을 병합하였으니, 압록강 안팎에 걸쳐 땅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사군(四郡)이 모두 그 옛 이름을 따랐다는 것은 옳습니다. 사군이 변하여 이부(二府)가 되었으니, 임둔은 낙랑에 병합되었고 진번은 현도에 병합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평안도 내지(內地)가 위씨(衛氏)에게 점거되자, 낙랑이 지금의 강원도 땅으로 물러났으니, 낙랑이라는 이름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본래 낙랑은 평양(平壤)을 가리키고, 임둔은 관동(關東)을 가리킵니다. 이것에 대해 다시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遼)에 낙랑이 있는 것은 진국(辰國)에 진주(辰州)가 있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아마도 요령(遙領)과 같은 사례일 것입니다.
당나라 총장(總章) 2년(669)에 압록강 이북에 이미 항복한 성이 11개였으니, 국내성(國內城)이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몽(朱蒙)이 처음에 졸본(卒本)에 도읍하였는데, 교시(郊豕)가 도망한 사건을 계기로 국내성을 얻게 되었으니, 압록강 동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몽은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고, 부여(扶餘)는 바로 옛 도성입니다. 그가 난을 피해 도망할 때에 어찌 꼭 아버지의 나라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하였겠습니까.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주몽이 그 처부(妻父)를 계승하였다고 하였으나, 그 설은 믿을 수 없습니다. 지금 졸본을 성천(成川)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지금의 폐사군(廢四郡)과 압록강 연안(沿岸)의 안팎이 개마국(蓋馬國)이었을 것입니다. 임언(林彦)의 〈구성기(九城記)〉에 “서북쪽으로는 개마산(蓋馬山)을 끼고 있다.”라고 하였고, 수(隋)나라 군사의 한 무리가 개마(蓋馬) 방면으로 나와 압록강의 서쪽에서 모였다고 하였으며,《한서(漢書)》에는 개마현(蓋馬縣)에 마자수(馬訾水)가 있다고 하였으니, 압록강을 가리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발해의 왕이 졸빈(卒賓)과 부여국(扶餘國)을 통합하였으니, 이는 모두 요(遼) 땅에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모두 참조하여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평나(平那)는 진번(眞蕃)인 듯합니다.
역사에서 패수(浿水)와 대수(帶水)의 사이라고 한 것은 저탄(豬灘)과 한수(漢水)의 사이를 일컬은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일찍이 논한 것이 있는데, 검토하지 못한 것입니다. 후대에 그 백성들이 유망(流亡)하여 남쪽에 이르자, 남원(南原) 등의 지역에 거주하도록 하니, 또한 그곳을 대방(帶方)이라고 칭하였습니다.
맹자(孟子)가 “주나라 이래로 700여 년이 되었다.〔由周以來七百有餘歲〕”라고 하였는데, 실제는 809년입니다. 《집주(集註)》에는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사이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문왕으로부터 계산한다면 여기에 다시 약간의 연수(年數)를 더해야 합니다. 이것조차도 이러한데 중국에서 외국의 연대를 계산한 것을 어찌 일일이 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우리나라의 역사책을 따라야 합니다.
황룡국(黃龍國)은 악비(岳飛)가 일컬은 황룡부(黃龍府)가 이것입니다. 지금 요서(遼西)에 아직도 황룡성(黃龍城)이 있습니다.
국내성(國內城)이 분명히 압록강의 서쪽 바닷가 근처에 있었으니, 비류수(沸流水)는 필시 그 근처에 있었을 것입니다.
안시(安市)는 바로 지금의 봉황성(鳳凰城)입니다. 우리나라의 방언(方言)에 봉(鳳)을 아씨조(阿氏鳥)라고 하고, 용은 미루(彌樓), 호랑이는 좌울음(左鬱陰)이라고 하는데, 아조(我朝)에 이르러서도 그렇게 부릅니다. 안시는 바로 봉황성입니다.
패수(浿水)는 분명히 저탄(豬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평양(平壤)과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남쪽으로 굽어보고 있다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압록(鴨綠)이라는 것은 《삼국지(三國志)》에 추수(溴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중국의 역사책에 간혹 잘못 기록된 곳이 있으니, 글자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어찌 세 개의 강이 한 가지 이름일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 《성경통지(盛京通志)》에도 추(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듣자니,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의 물은 모두 북쪽으로 흘러 압록강과 합쳐져 서남쪽으로 폐사군(廢四郡)을 거쳐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는 구름을 끊을 정도의 큰 고개가 많으니, 지금의 설한령(薛罕嶺)과 후치(厚峙)와 같은 고개가 개마(蓋馬)의 지경에 있는 듯하며, 압록강 북쪽의 여러 산 역시 매우 험준한데, 모두 그 경내입니다.
발해는 부여로써 거란을 방비하였으니, 《통전(通典)》의 설이 옳습니다. 종족이 본래 같으므로 동쪽으로 옮겨서도 동부여라고 칭하였던 것입니다. 온조도 그 후예였으므로 남쪽으로 달아나서도 또한 그렇게 칭하였으니, 지금의 부여현이 그것입니다. 나중에 다시 그대로 성으로도 삼았으니, 부여륭(扶餘隆),부여풍(扶餘豐)과 같은 이름이 그것입니다.
옥저(沃沮)에는 북옥저(北沃沮), 동옥저(東沃沮), 남옥저(南沃沮)의 세 부류가 있습니다. 두만강 서쪽에서부터 철령(鐵嶺)까지 그 사이에 살았던 자들이 동옥저입니다. 역사에서 개마산(蓋馬山)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개마산이라는 것은 설한령과 철령 등의 여러 산인 것 같습니다. 그 영토는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는 짧은데, 천 리 정도입니다. 남옥저라는 것은 가장 남쪽에 있었으니, 지금의 영동(嶺東) 아홉 고을입니다. 북옥저라는 것은 삼수(三水)와 갑산(甲山) 등의 지역인 것 같습니다. 백두산의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나왔다가 다시 꺾인 뒤에 남쪽으로 뻗어 나가서 평안도와 함경도의 경계가 되는데, 이것으로써 북옥저와 동옥저와 남옥저의 세 부류를 나눕니다. 그리고 동옥저는 북쪽으로 읍루(邑婁)와 접했다고 하였으니, 읍루는 삼수와 갑산의 북쪽에 있는 것인 듯합니다.《일통지(一統志)》에 “개원성(開元城)은 삼만위(三萬衛)의 서문(西門) 밖에 있다. 《원지(元志)》에 이르기를 ‘개원성의 서남쪽이 영원현(寧遠縣)이고, 다시 그 서남쪽이 남경(南京)이고, 다시 그 남쪽이 합란부(哈蘭府)이고, 다시 그 남쪽이 쌍성(雙城)이다.’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쌍성은 지금의 영흥부(永興府)이고, 삼만위는 옛날의 읍루 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동옥저가 철령의 밖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을 만합니다.
《한서(漢書)》에 이계(尼溪)의 재상(宰相)과 조선(朝鮮)의 재상이 대칭(對稱)되어 있는데, 동국(東國)에 어찌 이러한 이름의 나라가 일찍이 있었겠습니까. 필시 예(濊)의 재상입니다. 본래 영동(嶺東)에 있는 나라였으나, 영토를 넓히는 시기에 이르러 큰 나라를 포괄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에 대해 일찍이 이해는 하였으나, 단지 우리나라의 역사만을 근거하였을 뿐입니다. 이제는 늙어서 태반을 잊어버려 그 대략만을 말씀드립니다. 지금 이 책을 읽어 보니, 폭넓게 인용하고 채집하였으면서도 모두 증거가 있습니다. 나의 안목은 이러한 수준에 미치지 못하므로 흠모하고 완미(玩味)하기를 마지않습니다. 다만 정신이 쇠락하여 위아래로 두루 참고하지 못하니, 어떻게 차이를 판별할 수 있겠습니까. 백순께서는 세심하게 살펴 취사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읽지 않고 황폐한 상태로 방치하였으니, 예로부터 뜻을 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책이 만약 완성된다면 천고(千古)에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먼 옛날은 말할 것도 없고, 고려 때 군현(郡縣)의 경계조차도 간혹 밝히기 어려우니, 개탄스럽습니다.
김주(金澍)의 일은 일찍이 윤근수(尹根壽)의 《월정집(月汀集)》에 전(傳)이 실려 있는 것을 보았는데, 김시양(金時讓)의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에서 그것이 실상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변별하였으니, 그 말이 또한 옳습니다. 당나라 천보(天寶, 742~756) 연간에 신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촉(蜀) 땅에서 황제를 조회하자 현종(玄宗)이 십운시(十韻詩)를 하사하여 칭찬하였는데, 역사를 저술하는 사람이 이 일을 거론하였습니다. 그리고 양(梁)나라 태청(太淸, 547~549) 연간에는 백제의 사신이 단문(端門) 밖에서 목 놓아 운 일이 있습니다. 두 사신의 이름이 모두 드러나지 못한 것을 애석해하였는데, 참으로 그러합니다. 신라 헌강왕(憲康王) 8년(882)은 당나라 희종(僖宗) 중화(中和) 2년에 해당합니다. 당시에 중국에 조회하러 간 사신 김직량(金直諒)이 황제가 촉 땅으로 행행(行幸)한 것을 알고서 고변(高騈)에게 호송(護送)을 부탁하여 서천(西川)까지 간 일이 있습니다. 이 일은 최고운의 〈태사 시중에게 올린 장문〔上太師侍中狀〕〉에 갖추어 실려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이것을 누락하여 특서(特書)하지 못하였을까요? 가소롭습니다.
권양촌(權陽村)은 단군 천년이 대대로 전하여 온 햇수라는 것을 정론(定論)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천년 뒤의 마지막 후손이 또한 산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듯합니다. 역사에서는 평양(平壤)에 도읍했다가 나중에 백악(白岳)으로 천도(遷都)하였다고 하는데, 지금 사람은 구월산(九月山)을 백악으로 여깁니다. 문화현(文化縣)에 당장평(唐莊坪)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상고할 바가 없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신이 태백산(太白山)에 내려왔다고 이미 말하였으니, 최고운의 글에 근거할 때 요(遼) 땅에 있다가 나중에 평양으로 천도한 것인 듯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묘향산(妙香山)을 처음 내려온 곳이라고 이미 생각하였으므로 구월산이 바로 백악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구월산이 어찌 일찍이 백악이라고 불린 적이 있었겠습니까.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김위제(金謂磾)가 도선(道詵)의 신지비기(神誌秘記)를 인용하여 서경(西京)을 백아강(白牙岡)이라고 하였는데, 서경이라는 것은 평양입니다. 백강(白岡)이 백악이 아니겠습니까. 혹은 단군은 백악으로부터 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고, 후손이 서로 계승하여 천년에 이른 것입니까? 이미 단(檀)이라고 그 나라를 불렀다면, 그 자손도 단군입니다. 이 역시 나의 억측일 뿐입니다. 대개 아득한 옛날의 일은 태반이 요 땅에서 있었던 일인데, 지금 풍속은 매번 압록강 동쪽의 일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제멋대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니,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다 오히려 더 잘못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주-D001] 나라가 …… 보인다 :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 “나라에 도가 없으면 군자는 완비된 예를 행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니, 나라가 사치하면 검소한 것을 보이고, 나라가 검소하면 예를 갖추어 행하는 것을 보인다.〔國無道 君子恥盈禮焉 國奢則示之以儉 國儉則示之以禮〕”라는 증자(曾子)의 말이 나온다.
[주-D002] 공양왕(恭讓王) …… 삼았으니 :
공양왕이 재위한 기간은 3년에 불과하였으며, 화주(和州)를 승격시켜 화령부(和寧府)로 삼은 것은 공민왕(恭愍王) 18년(1369)의 일이다. 따라서 ‘공양왕 10년’이라는 말은 잘못이다. 《高麗史 卷58 地理 東界和州》
[주-D003] 영북(嶺北)에서 …… 곳입니다 :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태어난 함경도 영흥(永興)을 가리킨다. 영흥의 옛 이름이 화령(和寧)이다.
[주-D004] 총관(總管) …… 있습니다 :
조휘(趙暉)는 고려 고종(高宗) 때의 인물로, 1258년(고종45)에 원(元)나라 군대가 동북 지방에 침입하자 반란을 일으켜 화주(和州) 이북의 땅을 가지고 원나라에 귀순하였다. 이에 원나라는 화주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그를 총관에 임명하였다. 《東史綱目 第11上》
[주-D005] 당시에 …… 있었습니다 :
박의중(朴宜中)은 여말 선초의 문신으로, 1388년(우왕14)에 명나라 태조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고 조서를 내리자, 사신으로 파견되어 철령이 본래 고려의 땅이었다는 것을 주장하여 명 태조의 계획을 철회시켰다. 《東史綱目 第16 廢王禑下》
[주-D006] 합단(哈丹) :
1290년(충렬왕16)에 원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내안(乃顔)의 잔당 두목이다. 1291년 관군에게 패하자 고려의 관동(關東) 지방으로 난입하여 화주(和州)와 등주(登州) 이서의 여러 고을 인민들을 살육하고 겁탈하고 노략질하였다. 이때 조정에서 만호(萬戶) 나유(羅裕) 등을 파견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철령관(鐵嶺關)을 방호(防護)하게 하였는데, 적이 가까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철령관을 포기하고 도주함으로써 적도가 마치 무인지경을 달리듯 국토를 유린하게 하였다. 《高麗史 卷30 世家》
[주-D007] 벽란정(碧瀾亭) :
벽란도(碧瀾渡) 즉 지금의 예성강(禮成江) 하류에 있던 정자이다. 여기서 40리를 가면 개성(開城)에 당도한다고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 開城府上》
[주-D008] 장량(張良)의 …… 없었습니다 :
장량이 한(韓)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동쪽으로 가서 창해군(滄海君)에게 역사(力士)를 얻어 박랑사(博浪沙)에서 진 시황을 철퇴로 저격하였던 일을 가리킨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주-D009] 서희(徐煕)가 …… 못하였습니다 :
고려 성종(成宗) 12년(993)에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이 봉산군(蓬山郡)을 침입하여 차지하자, 성종이 서희(942~998)를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소손녕이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너희 나라가 이 땅을 침식하고 있다.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음에도 바다를 건너 송(宋)나라를 섬기니, 우리가 이 때문에 와서 토죄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땅을 떼어 바치고 조빙(朝聘)을 한다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니, 서희가 “우리나라는 바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런 까닭으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만약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上國)의 동경(東京)도 모두 우리의 지경(地境)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식했다고 이르느냐. 더구나 압록강 안팎 또한 우리나라의 경내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에 점거하여 교활하고 변덕스럽게 길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여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되었으니, 조빙이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 버리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주어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한다면, 감히 조빙을 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신(臣)의 말을 귀국의 황제에게 알린다면 어찌 딱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느냐.”라고 대답하였다. 《高麗史 卷94 徐煕列傳》
[주-D010] 유주(幽州)는 …… 산출되니 :
《주례(周禮)》 〈하관사마(夏官司馬)〉직방씨조(職方氏條)에 “동북쪽을 유주라고 하는데, 그곳의 진산(鎭山)은 의무려(醫巫閭)이고, 대택(大澤)은 해양(貕養)이고, 하천은 하수(河水)와 제수(泲水)이고, 수침(水浸)은 치수(淄水)와 시수(時水)이고, 산물(産物)은 물고기와 소금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1] 팔조(八條) :
‘여덟 가지 가르침〔八條之敎〕’의 준말로, 기자(箕子)가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 제정한 법금(法禁)이다. 지금 전해지는 것은 세 가지로, 살인을 한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하여 갚아 주고, 상해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게 하며, 도둑질을 한 자는 적몰(籍沒)하여 피해자의 노비로 삼는다는 것이다.
[주-D012] 약법삼장(約法三章) :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진(秦)나라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한 뒤에 진나라의 가혹하고 번다한 법률을 폐지하고 세 가지 법만을 시행하겠다고 약속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약법삼장’이다. 그 내용은 살인자는 죽이고 상해자와 도적은 처벌한다는 것이다. 《史記 卷8 高祖本紀》
[주-D013] 오륜(五倫) :
윤리의 다섯 가지 규범인 오상(五常) 즉 군신유의(君臣有義),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을 가리킨다.
[주-D014] 최치원(崔致遠)의 …… 하였으니 :
최치원이 지은 〈태사 시중에게 올린 장문〔上太師侍中狀〕〉에 “고구려의 잔당이 규합하여 북쪽으로 태백산(太白山) 아래에 의지하면서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하였습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孤雲集 卷1 上太師侍中狀, 韓國文集叢刊 1輯》
[주-D015] 당장경(唐莊京) :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에 속해 있으며, 단군의 도읍지 중의 하나이다. 당장평(唐莊坪), 장장평(莊莊坪)이라고도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2 黃海道 文化》
[주-D016] 삼성사(三聖祠) :
황해도 구월산 아래에 있는, 환인(桓因)ㆍ환웅(桓雄)ㆍ단군의 삼신(三神)을 모신 사당이다.
[주-D017] 남기(南箕) :
남쪽에 있는 기성(箕星)으로 이십팔수(二十八宿)의 하나인데 키 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D018] 기자가 …… 것입니다 :
《서경집전(書經集傳)》 〈홍범(洪範)〉의 주석에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이기고 기자를 찾아가 천도(天道)를 묻자, 기자가 〈홍범〉을 아뢰었다.”라는 말이 나온다. 〈낙서〉는 우(禹)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에 낙수(洛水)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그려져 있었다는 45개의 점으로 된 그림이다. 〈홍범〉 즉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근원이 되었다.
[주-D019] 낙서의 …… 바꾸었습니다 :
음양(陰陽)의 수는 자(子)와 오(午)에서 시작한다. 양수(陽數)는 자(子)에서 시작하여 바로 세어 가기 때문에 일(一)이 감(坎)에, 이(二)가 간(艮)에, 삼(三)이 진(震)에, 사(四)가 손(巽)에 위치하고, 음수(陰數)는 오(午)에서 시작하여 역으로 세어 가기 때문에 구(九)가 이(離)에, 팔(八)이 곤(坤)에, 칠(七)이 태(兌)에, 육(六)이 건(乾)에 위치한다. 지금 〈낙서〉의 수는 이가 곤에, 팔이 간에 위치했기 때문에 위치가 바뀌었다고 한 것이다.
[주-D020] 공자(孔子)도 …… 하였으니 :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나의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나 나갈까 보다.〔道不行 乘桴浮于海〕”라고 탄식한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21] 성인(聖人)이 …… 하였으니 :
은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빈소(殯所)를 차렸는데, 공자가 어느 날 밤 두 기둥 사이에 앉아 제사를 받는 꿈을 꾸고 나서 “내가 어젯밤 두 기둥 사이에서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밝은 임금이 나오지 않으니, 세상에서 누가 나를 종주(宗主)로 받들겠는가. 그러니 나는 아마도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7일 동안 병들어 누웠다가 운명하였다. 《禮記 檀弓上》
[주-D022] 시경(詩經)의 …… 듯하였으니 :
〈도인사(都人士)〉는 주나라 사람들이 윗사람의 의복이 일정하지 못한 것을 풍자한 시이다. 그 내용 가운데 “저 왕도의 인사여, 띠풀로 만든 갓에 치포관이로다.〔彼都人士 臺笠緇撮〕”라는 구절과 “저 군자의 여자여, 말아 올린 머리털이 벌 꼬리와 같도다.〔彼君子女 卷髮如蠆〕”라는 구절이 있다. 동도(東都)는 주 평왕(周平王)이 동쪽으로 옮긴 도읍인 낙읍(洛邑)을 가리킨다.
[주-D023] 죽은 아들 :
성호의 아들 이맹휴(李孟休, 1713~1751)를 가리킨다. 자는 순수(醇叟), 호는 두산(斗山)이다. 1735년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1742년에 정시 문과(庭試文科)에서 장원을 차지하였으며, 예조 정랑, 만경 현령(萬頃縣令)을 지냈다. 1748년부터 병을 앓다가 1751년 5월 7일에 사망하였다. 예학(禮學)에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저술로 《춘관지(春官志)》, 《접왜역년고(接倭歷年攷)》, 《거관일록(居官日錄)》 등을 남겼는데, 현재 《춘관지》만 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順菴集 卷27 李萬頃醇叟遺事, 韓國文集叢刊 230輯》
[주-D024] 사군 이부(四郡二府) :
고조선이 망하자, 한 무제(漢武帝)가 그 땅에 낙랑(樂浪), 임둔(臨屯), 현도(玄菟), 진번(眞蕃) 사군을 설치하였고, 한 소제(漢昭帝)가 다시 임둔과 진번을 혁파하여 낙랑과 현도에 합병시켜 이부로 만들었는데, 주몽(朱蒙)이 일어나서 그 땅을 차지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東史綱目 附錄 衛氏疆域考, 三韓考, 四郡考》 《後漢書 卷85 東夷列傳》
[주-D025] 동진(東晉) :
316년에 서진(西晉) 왕실의 후예인 낭야왕(琅琊王) 사마예(司馬睿), 즉 원제(元帝)가 중국의 남방에 세운 나라이다. 북방의 16국과 공존하다가, 420년에 유유(劉裕)가 동진을 멸망시키고 유송(劉宋)을 세웠다.
[주-D026] 원위(元魏) :
남북조(南北朝) 시대 북위(北魏, 386~557)의 다른 이름이다. 효문제(孝文帝)가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뒤에 성(姓)을 탁발씨(拓跋氏)에서 원씨(元氏)로 바꾸었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주-D027] 금천씨(金天氏) :
상고 시대 전설상의 황제인 소호 금천씨(少昊金天氏)를 가리킨다. 황제(黃帝)의 아들로 이름은 현효(玄囂) 또는 지(摯)라고 하며, 어머니는 누조(嫘祖)이다. 태호 포희씨(太昊庖犧氏)의 법을 닦았으므로 소호(少昊)라 칭하는데, 소호(少皞)라고도 한다.
[주-D028] 금란(金卵)과 금궤(金櫃)의 일 :
금란의 일은 하늘에서 떨어진 황금색의 알에서 나왔다는 가락국(駕洛國)의 시조 김수로(金首露)의 탄생 설화를 가리키고, 금궤의 일은 계림(鷄林)에서 발견된 황금색 궤짝에서 나왔다는 신라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탄생 설화를 가리킨다.
[주-D029] 을파소(乙巴素) :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 13년(191)에 사부(四部)에 명하여 어진 인재로서 아래에 있는 사람을 추천하도록 하니, 모두 동부(東部)에 사는 안류(晏留)를 추천했는데, 안류는 다시 을파소를 추천하였다. 왕이 을파소를 정중하게 맞이하여 우태(于台)의 직책에 임명하였으나, 을파소는 그 직책으로는 자신의 역량을 펼치기 어렵다는 취지로 사양하며 물러가려고 하였다. 이에 왕이 을파소를 국상(國相)에 임명하니,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얼마 뒤에 안류는 을파소를 추천한 공로로 대사자(大使者)에 임명되었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주-D030] 혹자는 …… 의심합니다 :
고국천왕이 죽자 왕비 우씨(于氏)가 밤중에 몰래 고국천왕의 작은동생 연우(延優)의 집에 가서 연우가 왕위에 오르도록 서로 공모(共謀)하였다. 연우는 왕의 유명(遺命)이라 거짓말하여 왕위에 오르고 우씨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고국천왕의 큰동생인 발기(發岐)는 연우가 우씨와 모의하여 자기에게 돌아와야 할 왕위를 빼앗은 것에 분노하여 한(漢)나라의 공손도(公孫度)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연우가 파견한 다른 동생인 계수(罽須)에게 패해 결국 자살하였다. 연우가 바로 고구려 제10대 왕인 산상왕(山上王)이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혹자는 을파소 같은 어진 재상이 왜 연우가 우씨와 공모하여 형의 왕위를 빼앗은 뒤에 우씨를 왕비로 맞이한 일을 간언하여 막지 못하였는지 의심한 것이다.
[주-D031] 대씨(大氏) :
대조영(大祚榮)이 세운 발해(渤海)를 가리킨다.
[주-D032] 진영(辰嬴) :
진 양공(晉襄公)이 졸하자 후계자를 정하는 문제로 신하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가계(賈季)는 “공자 악(樂)을 세우는 것만 못하다. 진영이 두 임금에게 사랑받았으니, 그 아들을 임금으로 세우면 백성들이 반드시 안정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春秋左氏傳 文公6年》 진영은 진 목공(秦穆公)의 딸로서, 진(晉)나라 태자 어(圉)가 진(秦)나라에 인질로 있을 때 그에게 시집갔다. 태자 어는 중이(重耳) 즉 진 문공(晉文公)의 형인 진 혜공(晉惠公)의 아들로서 진(秦)에서 도망쳐 나와 진 회공(晉懷公)으로 즉위했다가 재위 5개월 만에 중이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가계가 말한 두 임금은 바로 진(晉)나라의 회공과 문공을 가리킨다. 《春秋左氏傳 喜公23, 24年》
[주-D033] 곡영전(谷永傳)을 …… 있습니다 :
곡영이 한종(韓終)과 서복(徐福)에 대해 언급한 사실은 《한서(漢書)》 〈교사지(郊祀志)〉에 나오는 말로, 〈곡영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전거(典據)에 착오가 있는 듯하다. 한 성제(漢成帝)가 귀신과 방술(方術)을 지나치게 신봉하자, 곡영이 신괴(神怪)한 일에 미혹되지 말 것을 간언하면서 “진 시황(秦始皇)이 서복, 한종 등을 시켜 많은 어린 남녀를 싣고 바다에 들어가 신선(神仙)을 구하게 하였는데, 그길로 도망하여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곡영은 자가 자운(子雲)이며, 서한(西漢) 장안(長安) 사람이다. 대사농(大司農)에 올랐으며, 직간(直諫)을 잘하였다.
[주-D034] 한 지방이 …… 편안하다 :
최치원이 지은 〈태사 시중에게 올린 장문〔上太師侍中狀〕〉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300여 년 동안 한 지방이 무사하고 창해(滄海)가 편안한 것은 바로 우리 무열대왕(武烈大王)의 공입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孤雲集 卷1 上太師侍中狀, 韓國文集叢刊 1輯》
[주-D035] 십(十)이 …… 듯합니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온조(溫祚)가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여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하였다.……나중에 그 땅에 올 때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6] 우거(右渠) :
위만(衛滿)의 손자로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다. 한 무제(漢武帝)에 의해 기원전 108년에 망하였다.
[주-D037] 요령(遙領) :
직접 임지(任地)에 가지 않고 멀리서 다른 지방의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주-D038] 교시(郊豕)가 …… 되었으니 :
교시는 교제(郊祭)에 희생으로 쓰는 돼지이다. 고구려 유리왕(琉璃王) 21년에 교시가 달아나자, 유리왕이 장생(掌牲) 설지(薛支)에게 명하여 뒤쫓게 하였다. 설지는 국내(國內)의 위나암(尉那巖)에 이르러서 돼지를 붙잡고는 돌아와 왕에게 국내가 자연이 험준하고 토양이 비옥하며 산물(産物)이 많아 도읍을 옮기기에 좋은 곳이라고 보고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다음 해 10월에 도읍을 졸본(卒本)에서 국내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주-D039]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 하였으나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주몽(朱蒙)이 북부여(北夫餘)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졸본부여의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그가 비범한 사람임을 알고는 그에게 둘째 딸을 시집보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졸본부여의 왕이 죽고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주-D040] 폐사군(廢四郡) :
조선 세종 때 최윤덕(崔潤德) 등을 보내 여진족(女眞族)을 토벌하고 압록강 상류에 여연(閭延), 자성(慈城), 무창(茂昌), 우예(虞芮)의 4군(郡)을 설치했는데, 유지가 어렵다는 이유로 1455년(단종3)에 우예, 무창, 여연의 3개 군이 폐지되고 1459년(세조5)에 자성군마저 폐지되어 이후 폐사군으로 불렸다.
[주-D041] 임언(林彦)의 구성기(九城記) :
임언은 고려 중기의 문신이다. 1107년(예종2) 윤관(尹瓘)이 여진을 정벌할 때에 도지병마영할사(都知兵馬鈴轄使)의 직책을 띠고 출정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그곳에 9성(城)을 설치하였는데, 그 일을 〈구성기〉라는 글을 지어 기록하였다. 이 글은 현재 일부 내용이 다른 기록을 통해 전할 뿐, 전문(全文)은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주-D042] 수(隋)나라 …… 하였으며 :
《조선사략(朝鮮史略)》 〈신라기(新羅紀)〉에 “대장군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于仲文) 등이 여러 장수와 더불어 군사를 아홉 방면으로 나누어 나가서 압록강의 서쪽에서 모이게 하였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3] 한서(漢書)에는 …… 하였으니 :
《한서》 〈지리지(地理志)〉 현도군조(玄菟郡條)에서 소속 현(縣)으로 서개마현(西蓋馬縣)을 들었는데, 그 원주(原註)에 “마자수(馬訾水)가 서북쪽으로 염난수(鹽難水)에 흘러들고 서남쪽으로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라는 기록이 있다.
[주-D044] 맹자(孟子)가 …… 하였는데 :
맹자가 제(齊)나라를 떠날 때에 제자 충우(充虞)가 맹자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묻자, 맹자가 “500년에 반드시 왕자(王者)가 나오니, 그 사이에 반드시 세상에 유명한 자가 있다. 주(周)나라 이래로 700여 년이 되었으니, 연수(年數)를 가지고 보면 지났고, 시기로 살펴보면 지금이 가능한 시기이다. 하늘이 아직 천하를 평치(平治)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니, 만일 천하를 평치하고자 한다면 지금 세상에 나 말고 누가 있겠는가. 내 어찌하여 기뻐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孟子 公孫丑下》
[주-D045] 집주(集註)에는 …… 하였습니다 :
“주나라 이래로 700여 년이 되었다.”라는 구절에 대해 주희(朱熹)는 《맹자집주(孟子集註)》에서 “주나라는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사이를 말한 것이다.”라고 주해하였다.
[주-D046] 악비(岳飛)가 …… 이것입니다 :
송나라 때 충신 악비(岳飛, 1103~1142)가 금(金)나라의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투항하자 부하들에게 “곧장 황룡부(黃龍府)로 쳐들어가서 그대들과 함께 실컷 취하도록 마시고 싶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宋史 卷365 岳飛列傳》
[주-D047] 성경통지(盛京通志) :
청나라 때 동병충(董秉忠) 등이 감수한 책으로 경성(京城), 단묘(壇廟), 산릉(山陵), 궁전(宮殿) 등 32권으로 되어 있는 것을 건륭(建隆) 44년 즉 1779년에 칙명을 받들어 보충 수찬(修撰)하였다.
[주-D048] 부여륭(扶餘隆) :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셋째 아들이다. 의자왕 4년(644)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백제가 망하면서 당나라로 압송되어 갔다. 665년에 당 고종(唐高宗)의 명으로 웅진 도독(熊津都督)이 되었다가 얼마 뒤 당나라로 돌아가 낙양(洛陽)에서 죽었다.
[주-D049] 부여풍(扶餘豐) :
백제 의자왕의 아들이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망하고 의자왕이 당나라로 끌려가자, 661년에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이 주류성(周留城)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키고는 당시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을 옹립하여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다. 부여풍은 그 뒤 복신을 살해하고 병권을 잡았으나 연합군에 의해 패하여 고구려로 도망하였다가, 고구려가 망할 때 당나라 군사에게 잡혀가 당나라의 오령(五嶺) 남쪽으로 귀양 갔다.
[주-D050] 일통지(一統志)에 …… 있습니다 :
《명일통지(明一統志)》 권25 요동도지휘사사조(遼東道指揮使司條)의 개원성(開元城)에 대한 주석에 나오는 기록이다. “개원성(開元城)은 삼만위(三萬衛)의 서문(西門) 밖에 있다.”라고 번역되는 부분은 대본에 ‘三萬衛在開元城西門外’라고 되어 있는데, 《명일통지》에는 ‘開元城在三萬衛西門外’라고 되어 있으므로 이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번역문에 ‘남경(南京)’이라고 된 부분도 대본에는 ‘南康’으로 되어 있는 것을 《명일통지》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한 것이다. 《원지(元志)》는 《원일통지(元一統志)》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나, 후대에 일실(逸失)되어 전하지 않아 상고할 수 없다.
[주-D051] 한서(漢書)에 …… 있는데 :
고조선 말에 한(漢)나라의 군대가 조선을 치자, 조선의 재상 노인(路人)ㆍ한도(韓陶)와 이계(尼溪)의 재상 참(參), 장군 왕겹(王唊)이 서로 투항할 것을 모의하였다는 기록이 《한서》 〈서남이양월조선전(西南夷兩粤朝鮮傳)〉에 나온다.
[주-D052] 큰 …… 있습니다 :
대본에는 ‘寧有包大之理’라고 되어 있는데, 문맥이 통하지 않아 초간본인 퇴로본(退老本)에 ‘容有包大之理’라고 되어 있는 것을 참고하여 번역하였다.
[주-D053] 이 책 :
《동사강목(東史綱目)》의 초고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안정복(安鼎福)의 연보에, 《동사강목》의 저술 시기에 대해 “병자년에 처음 초(草)를 잡기 시작하여 4년이 걸려 책이 완성되었다.”라고 밝힌 것으로 보아 이 편지가 쓰인 1756년에 안정복이 성호에게 초고를 보내 자문을 구하였던 것이다. 《順菴集 年譜, 韓國文集叢刊 230輯》
[주-D054] 김주(金澍)의 …… 변별하였으니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윤근수(尹根壽, 1537~1616)가 지은 〈농암선생전(籠巖先生傳)〉은 김주라는 인물에 대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주가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중국에 하절사(賀節使)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에서 조선이 건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인에게 편지를 쓰기를 “충신(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烈女)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 내가 강을 건너가더라도 몸을 둘 곳이 없다.”라고 하고, 또 조복(朝服)과 신을 보내며 “이것으로 신물(信物)을 삼고, 부인이 하세(下世)한 뒤에 이것을 합장(合葬)하여 우리 부부의 묘를 만들라. 그리고 내가 강가에 이르렀다가 도로 중국으로 돌아간 날로 나의 기일(忌日)을 삼으라. 장사를 지낸 뒤에는 지문(誌文)과 묘갈(墓碣)을 쓰지 말라.”라고 하고는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형초(荊楚) 지방에 살았다고 한다. 조선 중기의 문신 김시양(金時讓, 1581~1643)은 자신의 저서인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에서 이 일화에 대해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하며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月汀集 卷4 籠巖先生傳, 韓國文集叢刊 47輯》 《大東野乘 荷潭破寂錄》
[주-D055] 당나라 …… 칭찬하였는데 :
신라 경덕왕(景德王) 15년(756) 봄 2월에 경덕왕이 당 현종(唐玄宗)이 촉(蜀) 땅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냈다. 사신이 성도(成都)에 이르러서 공물(貢物)을 바쳤더니, 현종이 가상하게 여겨 직접 십운시(十韻詩)를 지어 경덕왕에게 보냈다. 십운시는 다음과 같다. “사방의 땅이 나누어져 있지만, 삼라만상이 그 속에 있네. 구슬과 피륙들은 온 천하에 깔려 있고, 산 넘고 물 건너 중국으로 찾아드네. 아득히 먼 동방을 생각하니, 세월이 가도 부지런히 조공을 오는구나. 아득히 땅이 다해 끝나는 곳에, 푸르게 이어진 바다의 모퉁일레. 명예와 의리의 나라라고 하니, 산과 물이야 무엇이 다르겠나. 우리 사신은 돌아가 중국의 풍교를 전하고, 그들이 이에 오면 옛 법을 배워 가네. 의관 문물이 예의를 받들 줄 알고, 충실하고 믿음 지켜 유학을 높였구나. 참으로 하늘이 이를 살피나니, 어질구나 그 덕이 어찌 외로우랴. 깃발 세우고 우리처럼 백성을 다스리니, 보내 준 후한 선물 정성이 넘치도다. 푸르고 푸른 뜻을 더욱 중히 하여, 바람 서리 치더라도 항구히 변치 마오.〔四維分景緯 萬象含中樞 玉帛遍天下 梯航歸上都 緬懷阻靑陸 歲月勤黃圖 漫漫窮地際 蒼蒼連海隅 興言名義國 豈謂山河殊 使去傳風敎 人來習典謨 衣冠知奉禮 忠信識尊儒 誠矣天其鑑 賢哉德不孤 擁旄同作牧 厚貺比生蒭 益重靑靑志 風霜恒不渝〕” 《三國史記 新羅本紀》
[주-D056] 양(梁)나라 …… 있습니다 :
백제 성왕 27년(549)에 성왕이 양나라 도성에 반란이 일어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그곳에 이르러 성과 대궐이 황폐하고 허물어진 것을 보고 대궐 단문(端門) 밖에서 목 놓아 울었는데, 행인들이 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주-D057] 최고운의 …… 있는데 :
〈태사 시중에게 올린 장문〔上太師侍中狀〕〉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화(中和) 2년에 입조사(入朝使) 김직량(金直諒)이 반신(叛臣)의 작란(作亂) 때문에 도로가 통하지 않자 마침내 초주(楚州)에 상륙하여 이리저리 헤매다가 양주(楊州)에 와서야 성가(聖駕)가 촉(蜀)으로 행차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고 태위(高太尉)가 도두(都頭) 장검(張儉)을 차출하여 그를 감호하여 서천(西川)에 이르게 한 일이 있습니다.” 《孤雲集 卷1 上太師侍中狀, 韓國文集叢刊 1輯》
[주-D058] 권양촌(權陽村)은 …… 삼았습니다 :
양촌 권근(權近)이 명나라에 조회하러 갔을 때 명 태조(明太祖)가 시를 짓게 하자 “대대로 전한 것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지나온 햇수는 천년을 넘었네.〔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라고 하였는데, 천년이라는 것은 단군의 후손 대대로 왕위를 전해 온 기간이지 단군의 재위 기간이나 수명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東國史略 卷1 檀君朝鮮》 《東史綱目 第1上》
[주-D059] 천년 …… 것 :
단군이 말년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는 역사의 기록을 두고 말한 것인데, 성호는 ‘단군’이 단군의 후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60] 당장평(唐莊坪) :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에 속해 있으며, 단군의 도읍지 중의 하나이다. 당장평(唐莊坪), 장장평(莊莊坪)이라고도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2 黃海道 文化》
[주-D061] 김위제(金謂磾)가 …… 하였는데 :
고려 숙종 원년(1096)에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의 벼슬에 있던 김위제라는 사람이 신라 말의 승려 도선(道詵)의 비술(秘術)을 배워 남경(南京)으로 천도(遷都)할 것을 청하는 글을 올렸다. 그 글에 “서경(西京)을 백아강(白牙岡)이라고 하여 저울 머리에 비유하였다.”라는 말이 나온다. 《高麗史 卷122 金謂磾列傳》
고전번역서 > 성호전집 > 성호전집 제29권 > 서 > 최종정보
성호전집 제29권 / 서(書)
정현로에게 답하는 편지 경진년(1760, 영조36)〔答鄭玄老 庚辰〕
[DCI]ITKC_BT_0489A_0290_010_0270_2017_009_XML DCI복사 URL복사
신년에 편지를 받고서 인편이 없어 답장을 보내지 못해 송구합니다. 또한 천식이 아직 그치지 않아 책을 보기가 매우 불편하다 하니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지난번에 꿀을 복용하는 방법을 알려준 적이 있는데, 이 방법은 이미 효과를 본 것이니 속히 시험해 보기 바랍니다.
지도를 제작하는 일은 세상에 유익함을 제공하는 것이므로 미봉하려 하지 말고 전일한 마음으로 잘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신순민(申舜民) 이외에도 안백순(安百順)과 같은 사람이 있어 함께 논의할 사람이 없지 않으니 서로서로 도와 가며 진행한다면 어찌 좋은 모습이 되지 않겠습니까. 예전에 미상(眉相)이〈간이당명(簡易堂銘)〉을 짓기에 앞서 몸소 서쪽 교외로 나간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까지도 옛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대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순민이 《강역지(疆域志)》를 지은 것은 반가운 일이니, 앞선 연구를 널리 수집하고 정밀하게 따져서 고금의 성과들을 두루 망라하되 광범위한 자료를 갖추는 일에 집착하지 말기 바랍니다. 백순(百順)이 자주 편지를 보내 질문하였으나 나는 정신이 이미 소진되었으니 어떻게 답변할 수 있겠습니까. 아끼는 마음이야 있어도 도와줄 길이 없습니다. 그대는 나이가 한창이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니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지금의 세태는 어울려 노는 물이 다르면 추구하는 바도 서로 맞지 않으니, 이렇게 하고서는 어떠한 큰일도 이루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토지 제도와 관련한 우리나라의 옛 사적으로는 평양(平壤)의 방전(方田)과 경주(慶州)의 원전(轅田)이 가장 중요합니다. 방전은 은(殷)나라에서 나왔고 원전은 진(秦)나라에서 나왔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모두 정전(井田)이라 부르고 있으니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한구암(韓久庵)이 주장한 정전설(井田說)은 마치 신을 신고 가려운 발을 긁듯이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근래에는 이(李) 아무개라는 사람이 옛터를 헐어 버리고 제멋대로 바꾸어 놓았으니 해괴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경주의 토지는 모두 직전(直田)으로,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의 이른바 “상군이 원전을 만들고 천맥을 열었다.〔商君制轅田 開阡陌〕”라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여기에서 원전이란 곧 직전에 해당합니다. 경주는 진한(辰韓)의 옛터로서 진한은 진(秦)나라 사람이 세운 나라이며, 이 진나라는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유풍이 남아 있는 나라입니다. 진나라의 학정을 피해 경주까지 내려와서 진나라 법에 따라 토지를 구획한 것이니, “정전을 폐지하고 천백을 열었다.〔廢井田 開阡陌〕”라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됨에 따라 토지의 경계가 정확하지 않게 되자 참의(參議) 이형상(李衡祥)이 이를 바로잡아 정리하려고 하였으나 감사(監司)에 의해 중지되었다 하니, 이는 더욱 우스운 일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솔한 일처리가 매번 이와 같습니다. 주자(朱子)는 〈채택전(蔡澤傳)〉의 “결렬천맥(决裂阡陌)”이라는 말을 인용하여 옛 제도를 허문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나, 이것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 〈왕망전(王莽傳)〉에 “여정(廬井)을 없애고 천맥을 두었다.〔滅廬井而置阡陌〕”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서 천맥은 진나라가 설치했던 토지 제도로서 “상군이 원전을 만들고 천맥을 열었다.〔商君制轅田 開阡陌〕”라는 말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고대에는 구혁(溝洫)으로 경계를 삼았으나 지금은 수전(水田)에서 농사를 지으므로 구혁이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진나라는 정국(鄭國)이 경수(涇水)를 끌어다 수로(水路)를 만든 이래로 관중(關中) 지방이 모두 논농사를 짓게 되었으므로 정전을 폐지하게 된 것입니다. 옛 정전제를 기반으로 새로운 토지 제도를 만들 때 그 지형의 형세에 따라 수로를 끌어들였으므로 원전과 천맥의 제도를 만든 것입니다.
주자는 《맹자》 주석에서 은(殷)나라 사람이 처음으로 정전을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세주(細註)에서 《서경》 〈우공(禹貢)〉에 나오는 견회(畎澮)와 《논어》에 나오는 구혁(溝洫)을 모두 정전의 제도로 풀이한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틀림없이 둘 중에 하나는 잘못일 것입니다. 10분의 1 세법으로 해석한 풀이를 보면 크게 모순되는 점이 있습니다. 여사(廬舍) 20묘를 제외하면 11분의 1이 되고 제외하지 않으면 9분의 1이 될 뿐으로, 10분의 1을 어디에서 찾아보겠습니까? 10분의 1보다 가벼운 것을 10분의 1과 혼용하여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자어류(朱子語類)》를 살펴보았더니, 거기에 “맹자가 그 제도를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만약 왕조가 바뀔 때마다 구혁을 모두 바꾼다면 백성들을 피로하게 하고 재정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 이는 왕망(王莽)이 추진했던 방식이니, 틀림없이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옳습니다. 그러나 맹자가 어찌 터무니없이 이치에도 맞지 않는 말을 하여 세상 사람들을 모두 속였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대와 순민은 식견이 탁월하니 함께 연구하여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 나에게 가르쳐 주기 바랍니다. 내 생각에는 주자가 어쩌면 만에 하나 잘못 본 것이 있는 듯합니다. 맹자가 “하후씨는 50묘에 공법(貢法)을 썼고, 은나라 사람은 70묘에 조법(助法)을 썼고, 주나라 사람은 100묘에 철법(徹法)을 썼으니, 그 실제는 모두 10분의 1이다.〔夏后氏五十而貢 殷人七十而助 周人百畝而徹 其實皆什一也〕”라고 하였는데, 50묘를 두 개 합한 것이 70묘가 되고 70묘를 두 개 합한 것이 100묘가 되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손가락만 꼽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라는 50묘를 1개의 구(區)로 만들었으므로 4개의 구가 1개의 전(田)이 됩니다. ‘전(田)’이란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1개의 정(井)에는 9개의 전(田)과 36개의 구(區)가 있습니다. 은나라 때는 두 개씩을 하나로 합쳤으므로 길이와 너비가 모두 100보가 됩니다. 공전(公田)은 삼대(三代)에 걸쳐 변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이 사방 90보를 경작하여 먹고 나라에서는 사방 90보의 땅에서 나오는 수확을 걷어 갔으니, 이를 두고 10분의 1이라 하고 철법(徹法)이라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철(徹)’ 자는 나라와 백성이 함께 통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사(廬舍)의 경우 별도의 지역에 마련된 것입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두 개의 집을 가지고 있을 리는 전혀 없습니다. 이에 대해 완벽한 증거를 별도로 가지고 있으나 일일이 다 거론하지는 않겠습니다.
옛날에 공자가 담자(郯子)에게 관직에 대해 묻고는 “천자(天子)의 관직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으면 사이(四夷)에게 가서 배운다.”라고 하였으니, 만약 평양(平壤)에 정전을 구획한 자취가 남아 있지 않다면 그러한 사실을 후대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기전(箕田)은 4개의 구(區)로 경계를 만들고, 1개 구는 모두 사방 70보로 하였습니다. 은나라는 하나라의 토지 제도를 이어받아 구혁을 고치지 못했다면 사방 50보의 2개 구(區)를 합친 것이 사방 70보와 정확하게 합치됩니다. 기자(箕子)가 처음 토지를 구획했을 때 하나라의 제도를 이어받지 않고 곧바로 사방 70보의 구를 만들려고 했으므로 중국과는 달리 사방 70보의 구가 만들어진 것은 당연하며, 그러한 까닭에 기전의 모습이 이와 같게 된 것입니다. 기전의 2개 구를 합하면 주나라 100묘의 철법과 정확하게 합치되므로 지금 정전제에 대하여 먼저 말하지 않고는 기전이 정전과 모습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제도라는 것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말이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역사서에서 상앙(商鞅)이 정전을 폐지했다고 하였으나 이는 단지 진(秦)나라의 정전을 폐지했다는 것으로, 함곡관(函谷關) 바깥으로는 상앙의 힘이 미치지 않았습니다. 맹자는 천하를 주류하였으니 무엇 때문에 옛 제도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이렇게 잘못 말했겠습니까. 내 생각에는 주나라가 이러한 법을 시행했다고는 하지만 한편으로 천하의 토지를 어떻게 다 구획할 수 있었겠으며, 수로(水路)의 깊이가 한 길〔仞〕이나 되기도 하였다는데 700년 사이에 그것이 어찌 다 없어졌겠습니까. 맹자는 상앙과 같은 시대를 살았으므로 제(齊)나라와 양(梁)나라에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는 것은 상앙 때문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은 수전(水田)이 세상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한전(旱田)은 반드시 높은 두둑으로 경계를 삼아야 하므로 수로를 파는 것과는 서로 반대가 됩니다. 따라서 성인이 다시 나온다 하더라도 여기에 힘쓰지 않았을 것이니, 상앙이 천맥을 연 것을 어찌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에 대해 말하자면 너무 길어지므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대체로 주자는 초년에 숫자를 따지는 일에 힘을 쏟지 않았으므로 《맹자》 수장(首章)에 나오는 ‘천승백승(千乘百乘)’에 대한 주석에서 오류를 범하였으며, 그 후 〈정전유설(井田類說)〉을 지을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파악하였으니, 《주자대전(朱子大全)》을 통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고금의 유가들이 《맹자》를 읽으면서 이러한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 괴이한 일입니다.
순민(舜民)은 학문에 정통한 사람이라 틀림없이 금방 구별해 낼 것입니다. 그림이 있으면 반드시 이에 대한 설명도 있어야 할 것이니, 그것을 밝혀서 변증할 때에는 반드시 후세에 도움을 주겠다는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거친 학문 풍토에서 어떻게 이를 고증해 낼 수 있을는지요?
근래에 나온 홍(洪) 아무개의 《역대총목(歷代總目)》에서는 팽오(彭吳)를 단군(檀君) 때 사람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팽오가 예맥(濊貊)으로 통하는 길을 연 것은 한 무제(漢武帝) 때의 사건으로 그 사실이 〈식화지(食貨志)〉에 나옵니다. 이러한 자료들을 먼저 분석해 보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초기의 강토를 거론할 때는 반드시 단군과 기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단군이 태백산(太白山)에 내려왔고 그 땅이 요동(遼東)에 있었으며 나중에는 묘향산(妙香山)으로 갔다고 하였는데 그 출처가 어디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도읍을 옮긴 곳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단군은 요(堯) 임금과 동시에 살았으며, 순(舜) 임금이 12개 주를 설치할 때 유주(幽州), 병주(幷州), 영주(營州) 등 3개 주가 이 지역에 들어 있습니다. 유주에는 의무려(醫巫閭)라는 산이 있고, 물고기와 소금이 산출(産出)되며, 순 임금은 동이(東夷) 사람이니 그 교화가 반드시 먼저 미쳤을 것입니다. 기자는 군장(君長)으로 나오기 전에 이미 기자라 불렸고 기(箕)는 석목(析木)의 땅에 해당하는데,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명 태조가 기어이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고 하였으나 다행히 박의중(朴宜中)의 노력으로 이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지(盛京志)》에 이르기를 “예전에는 고려(高麗)의 영토 속에 있었으나 지금은 개원(開原)으로 옮겼다.”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당시의 국경은 유소성(柳韶城)을 가리키는 듯하며 지금 평안도(平安道)의 절반이 그 속에 포함됩니다. 우매한 사람들은 이를 가지고 개원성(開原城)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잘못된 것입니다. 후대에도 틀림없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나올 것이니 시무(時務)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의당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당시에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국경이 대부분 압록강(鴨綠江) 서쪽에서 발해만(渤海灣) 사이에 위치했는데 이는 고구려가 통치하던 영역에 따른 것입니다.
[주-D001] 신순민(申舜民) :
신경준(申景濬, 1712~1781)으로,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순민(舜民), 호는 여암(旅菴)이다. 전라도 순창(淳昌) 출신으로 1754년(영조30)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 편지를 쓴 1755년에 홍문관 부정자(弘文館副正字)를 지냈다. 지리학에 정통하여 영조의 명으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편찬할 때 〈여지고(輿地考)〉를 담당하였으며, 이후 《팔도지도(八道地圖)》와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를 완성하였다. 저서에는 《여암집(旅庵集)》, 《소사문답(素砂問答)》, 《의표도(儀表圖)》, 《강계지(疆界志)》, 《산수경(山水經)》, 《도로고(道路考)》, 《산경표(山經表)》, 《증정일본운(證正日本韻)》, 《수차도설(水車圖說)》 등이 있다. 정상기ㆍ정항령 부자와 함께 고증학적 방법으로 한국의 지리학을 개척한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주-D002] 안백순(安百順) :
안정복(安鼎福)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순, 호는 순암(順菴)ㆍ상헌(橡軒)ㆍ한산병은(漢山病隱)ㆍ우이자(虞夷子),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광주(廣州) 덕곡(德谷)에 살았으며, 35세 때인 1746년(영조22)에 안산(安山)에 살던 성호를 찾아가 문인이 되었다. 목천 현감(木川縣監), 세자익위사 익찬(世子翊衛司翊贊)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문집으로 《순암집(順菴集)》이 있고, 별저(別著)로 《동사강목(東史綱目)》, 《하학지남(下學指南)》, 《열조통기(列朝通紀)》, 《임관정요(臨官政要)》 등을 남겼다. 스승 이익의 저술인 《도동록(道東錄)》을 《이자수어(李子粹語)》로 개칭해 편집하였으며, 《성호사설(星湖僿說)》의 목차와 내용 등을 첨삭, 정리한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을 편집하였다. 《順菴集 順菴先生行狀, 韓國文集叢刊 230輯》
[주-D003] 미상(眉相) :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2~1682)을 가리킨다.
[주-D004] 간이당명(簡易堂銘) :
간이당은 최립(崔岦, 1539~1612)이 평양에 거처하면서 지은 초당(草堂)의 이름이다.
[주-D005] 한구암(韓久庵)이 주장한 정전설(井田說) :
한백겸(韓百謙, 1552~1615)은 1607년(선조40)에 평양(平壤)에 남아 있는 토지 구획 형태를 보고 이것이 기자(箕子)가 고조선 때 시행한 정전제(井田制)의 흔적임을 밝히고 이를 〈기전도(箕田圖)〉로 그린 다음 다시 〈기전도설〉을 지어 설명하였는데, 그 내용이 《구암유고》에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이란 제목으로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성호는 〈서한구암기전도설(書韓久庵箕田圖說)〉을 지어 그의 설을 비판한 바 있다. 《星湖全集 卷56》
[주-D006] 이(李) 아무개 :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을 가리킨다.
[주-D007] 경주는 …… 나라 :
《성호사설》 권3 천지문 〈원전(轅田)〉에 의하면, 성호는 진(秦)나라 말엽에 진나라의 난리를 피하여 영남 지방에 온 자들이 경주에서 원전을 만들었다고 보았다.
[주-D008] 주자(朱子)는 …… 하였으나 :
어떤 사람이 ‘정전을 폐지하고 천맥을 열었다는 것[廢井田 開阡陌]’에 대해 질문하자, 주희(朱熹)가 “이전의 사람들이 모두 잘못 보았다. 내가 일찍이 상고해 보니, 맥(陌)이라는 것은 백(百)이고, 천(阡)이라는 것은 천(千)이다. 정전법에서는 1명의 가장(家長)이 100묘를 받으니, 이것이 수(遂)이다. 수 위에 경(徑)이 있는데, 이것이 남북으로 맥(陌)이 된다. 10명의 가장이 1000묘를 받으니, 이것이 구(溝)이다. 구 위에 진(畛)이 있는데, 이것이 동서로 천(阡)이 된다. 이렇게 쌓여 나가면 100명의 가장이 만 묘를 받으니, 혁(洫)이 된다. 혁 위에 도(涂)가 있는데, 도가 남북으로 다시 맥(陌)이 된다. 1000명의 가장이 10만 묘를 받으니, 이것이 회(澮)이다. 회 위에 도(道)가 있는데, 도가 동서로 다시 천이 된다. 상앙(商鞅)이 열었다는 것은, 바로 당시에 정전이 이미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이것을 쓸모없다고 생각하여 모두 없앤 것이다. 〈채택전(蔡澤傳)〉에 ‘상군(商君)이 천맥을 파괴했다.[決裂阡陌]’라고 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을 말한 것이지, 정전을 바꾸어 천맥을 삼았다는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 《朱子語類 卷134》
[주-D009] 왕망전(王莽傳)에 …… 있는데 :
《한서》 권99 〈왕망전〉에 중랑(中郞) 구박(區博)이 왕망에게 간언(諫言)한 기록이 있는데, 그 내용 중에 “정전(井田)이 비록 성왕(聖王)의 법이지만, 폐기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주(周)나라의 도가 쇠하여 백성들이 따르지 않자, 진(秦)나라가 민심을 따르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여정(廬井)을 없애고 천맥(阡陌)을 두어서 마침내 중국에서 왕이 되었습니다.”라는 말이 있다.
[주-D010] 진나라는 …… 것입니다 :
정국(鄭國)은 전국 시대 한(韓)나라 사람으로, 수리(水利)에 밝은 전문가였다. 한나라에서 진(秦)나라의 국력을 피폐하게 하고자 하여 정국을 진나라에 보내 진왕(秦王)을 꾀어 중산(中山)에서 서쪽으로 과구(瓠口)까지 물길을 파고, 아울러 북산(北山) 동쪽으로 낙수(洛水) 300여 리에 물을 대도록 하였다. 그 뒤 진나라에서는 그가 간첩이라는 사실을 알고 죽이려 하였으나, 물길을 만드는 것이 진나라에게 이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정국을 죽이지 않고 완성하게 하였다. 진나라는 이 물길로 인하여 척박한 땅이 비옥하게 바뀌어 1묘(畝)의 땅에서 1종(鍾)의 곡식을 수확할 수 있게 되었다. 《漢書 卷29 溝洫志》
[주-D011] 주자는 …… 하였습니다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하후씨는 50묘(畝)에 공법(貢法)을 썼고, 은나라 사람은 70묘에 조법(助法)을 썼고, 주나라 사람은 100묘에 철법(徹法)을 썼으니, 그 실제는 모두 10분의 1이다. 철은 통한다는 뜻이요, 조는 돕는다는 뜻이다.[夏后氏五十而貢 殷人七十而助 周人百畝而徹 其實皆什一也 徹者徹也 助者藉也]”라고 하였는데, 주희는 이에 대해 “하(夏)나라 때에는 한 가장(家長)이 토지 50묘를 받고, 가장마다 5묘의 수입을 계산하여 바치게 했었는데, 상(商)나라 사람이 처음으로 정전(井田)의 제도를 만들어, 630묘의 토지를 가지고 구획하여 아홉 구역으로 만들었으니, 한 구역은 70묘였다. 한가운데는 공전(公田)이 되고, 그 밖은 여덟 집에게 각기 한 구역을 주어, 단지 그 힘을 빌어서 공전을 도와 경작하게 하고, 다시는 그 사전(私田)에 대한 세를 내지 않게 하였다. 주나라 때에는 한 가장이 토지 100묘를 받아서 향수(鄕遂)에서는 공법(貢法)을 써서 10명의 가장마다 하나의 도랑이 있었고, 도비(都鄙)에서는 조법(助法)을 써서 여덟 집이 정(井)을 함께하여, 경작하게 되면 노동력을 통하여 일하고, 수확하게 되면 이랑 수를 계산하여 분배하였다. 그러므로 철(徹)이라고 이른 것이다. 그 실제는 모두 10분의 1이라는 것은 공법은 진실로 10분의 1을 일정한 수로 삼았고, 오직 조법은 9분의 1 세법이나, 상나라 제도는 상고할 수 없으며, 주나라 제도는 공전 100묘 중에 20묘를 여사(廬舍)로 만들었으니, 한 가장이 경작하는 공전은 실제로 계산하면 10묘이다. 사전 100묘를 통계하면 11분의 1을 취하는 것이 되니, 이는 또 10분의 1보다 가벼운 것이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주-D012] 천자(天子)의 …… 배운다 :
노(魯)나라 소공(昭公) 17년 가을에 소호씨(少昊氏)의 후손인 담자(郯子)가 노나라에 와서 소공에게 소호씨가 관명(官名)에 새의 이름을 사용한 내력을 알려주었다. 공자(孔子)가 이것을 듣고 담자를 찾아가 배운 뒤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자니, 천자의 관직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으면 사이에게 가서 배운다고 하는데, 그 말이 참으로 옳다.[吾聞之天子失官 學在四夷 猶信]” 하였다. 《春秋左氏傳 昭公17年》 ‘담자(郯子)’가 대본에는 ‘剡子’로 되어 있으나, 옛 문헌의 일반적인 표기와 퇴로본에 근거하여 ‘剡’을 ‘郯’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주-D013] 주자는 …… 파악하였으니 :
주자는 《맹자》의 집주(集註)에서 만승지국(萬乘之國)은 천자의 기내 사방 1,000리의 땅에서 병거 10,000승을 내고, 천승지가(千乘之家)는 사방 100리의 땅에서 병거 1,000승을 낸다고 하였다. 반면에 《주자대전》 권68에 나오는 〈정전유설(井田類說)〉에서는 만승지국은 사방 1,000리, 천승지국(千乘之國)은 사방 316리, 백승지가(百乘之家)는 사방 100리로 설명하여 《집주》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즉 《집주》의 설명대로라면 만승지국과 천승지가의 토지 면적은 10배가 아닌 100배가 된다. 이에 대한 〈정전유설〉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토지의 사방 1리가 정이고 10정이 통(通)이 되고, 10통이 성(成)이 되며, 성은 사방 10리이다. 10성은 중(衆)이 되고, 10중은 동(同)이 되며, 동은 사방 100리이다. 10동은 봉(封)이 되고, 10봉은 기(畿)가 되며, 기는 사방 1,000리이다.……백승지가는 사방 100리로 총 10,000정이 되는데, 이 가운데 산천(山川)과 성읍(城邑)과 원유(園囿)와 도로에 들어가는 3,600정을 제외한 6,400정에 대해 조세를 부과하여 군마 400필과 병거 100승을 유지할 수 있으며 경대부 채지(采地)가 이에 해당한다. 천승지국은 사방 316리로 총 100,000정이 되는데, 이 가운데 64,000정에 대해 조세를 부과하여 군마 4,000필과 병거 1,000승을 유지할 수 있으며 큰 제후국에 해당한다. 만승지국은 천자의 기내(畿內)가 1,000리를 말하며 총 1,000,000정이 되며 이 가운데 640,000정에 대한 조세로 군마 40,000필과 병거 10,000승을 유지할 수 있다.
[주-D014] 홍(洪) 아무개의 …… 있는데 :
《역대총목(歷代總目)》은 조선 후기의 학자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이 지은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이다. 홍만종은 본관이 풍산(豐山), 자는 우해(宇海), 호는 현묵자(玄黙子)ㆍ몽헌(夢軒)으로, 정두경(鄭斗卿)의 문인이다. 저술로 《순오지(旬五志)》, 《소화시평(小華詩評)》, 《시화총림(詩話叢林)》 등이 있다. 《동국역대총목》은 우리나라 역대의 사적의 요점을 정리하여 기술한 책으로, 단군조선에서 시작하여 삼국, 고려, 조선의 순서로 정리하였다. 기자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단군을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으로 부각하였다. 그 책의 단군조선조(檀君朝鮮條)에 보면, “팽오(彭吳)에게 명하여 국내의 산천(山川)을 다스려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5] 팽오가 …… 나옵니다 :
《한서(漢書)》 권24 〈식화지(食貨志)〉에 의하면, 한 무제(漢武帝)가 즉위하고서 몇 년 뒤에 팽오가 예맥(穢貊)과 조선(朝鮮)으로 통하는 길을 열었다고 하였다.
[주-D016] 유주에는 …… 산출(産出)되며 :
《주례(周禮)》 〈하관사마(夏官司馬) 직방씨(職方氏)〉에 “동북쪽을 유주라고 하는데, 그곳의 진산(鎭山)은 의무려(醫無閭)이고, 대택(大澤)은 해양(貕養)이고, 하천은 하수(河水)와 제수(泲水)이고, 수침(水浸)은 치수(淄水)와 시수(時水)이고, 산물(産物)은 물고기와 소금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7] 석목(析木) :
별자리 분야(分野)인 십이성차(十二星次)의 하나이다. 십이진(十二辰)에서는 동쪽인 인(寅)에 해당하고 이십팔수(二十八宿)에서는 미수(尾宿)와 기수(箕宿)에 해당하는데, 우리나라와 중국의 연(燕)나라, 즉 유주(幽州)가 이 위치에 해당한다.
[주-D018] 박의중(朴宜中) :
1337~1403. 자는 자허(子虛), 호는 정재(貞齋), 초명은 실(實)이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388년(우왕14) 명(明)나라 태조(太祖)가 철령위(鐵嶺衛)를 세워 그 북쪽ㆍ동쪽ㆍ서쪽을 요동(遼東)에 귀속하겠다고 조서를 내리자 변무주청사(辨誣奏請使)로 파견되어 이 일을 교섭하고 돌아왔는데, 그해에 바로 황제가 철령위의 혁파(革罷)를 허락하였다. 같은 해 창왕이 즉위한 뒤 추성보조공신(推誠補祚功臣)에 책록되고 문의군(文義君)에 훈봉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본관을 밀양에서 문의로 분적하여 시조가 되었다. 성리학(性理學)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문장이 우아하였다. 1392년(태조1) 《고려사(高麗史)》 수찬에 참여하고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가 되었다가 예문관제학 겸 대사성에 이르렀다. 《정재일고(貞齋逸稿)》 3권(卷)이 전한다.
[주-D019] 성경지(盛京志) :
《성경통지(盛京通志)》의 약칭이다. 청나라 때에 편찬된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지리지(地理志)로서, 경성(京城)ㆍ원유(苑囿)ㆍ단묘(壇廟)ㆍ산릉(山陵)ㆍ궁전(宮殿)ㆍ풍속(風俗)ㆍ인물(人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원래 총 32권이었던 것이 건륭황제(乾隆皇帝)의 칙명에 의해 총 130권으로 재편되었다.
[주-D020] 개원(開原) :
요동(遼東)의 개원부(開原府)이다.
[주-D021] 유소성(柳韶城) :
천리장성(千里長城)을 가리킨다. 고려 덕종(德宗) 2년(1033)에 거란과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여 유소(柳韶)가 왕명으로 천리장성을 쌓았으므로 이를 유소성이라 부른 것이다. 이 천리장성은 서쪽의 압록강 어귀인 흥화진(興化鎭)으로부터 맹주(孟州 맹산(孟山)), 삭주(朔州) 등의 성을 거쳐 정변(靜邊), 화주(和州) 등의 성에 이르고, 다시 도련포(都連浦)까지 이어지는 천여 리 되는 긴 성으로 높이와 폭이 각각 25자나 되는 석축이었다. 1044년(정종10)경 완공되었는데, 유소는 그 공으로 추충척경공신(推忠拓境功臣)에 봉해졌다.
고전번역서 > 성호전집 > 성호전집 제29권 > 서 > 최종정보
성호전집 제29권 / 서(書)
정현로에게 답하는 편지 기묘년(1759, 영조35)〔答鄭玄老 己卯〕
[DCI]ITKC_BT_0489A_0290_010_0260_2017_009_XML DCI복사 URL복사
이제 겨우 동지(冬至)인데 기러기가 벌써 북쪽으로 날아가 버렸으니 비록 이상 기후이기는 하지만 추운 백성에게는 오히려 다행스런 일입니다. 지난번 편지를 받고서 위안이 되기는 합니다만, 천식이 아직도 여전하다고 하는데 그 증상은 실로 삼복더위로 인해 생긴 것입니다. 어찌 이를 근거로 치료를 하지 않습니까? 나는 흡사 닭 둥지 속의 아이처럼 죽지도 않은 채 몇 순(旬)만 지나면 여든 살이 되니, 마치 높은 곳에 올라가 떨어질 날만 기다리는 신세처럼 되었습니다.
《수경(水經)》을 짓는 일은 크나큰 사업이니, 이 늙은이가 어찌 완성되기를 기다려 그 결과를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예전부터 전해 오는 묵은 자료나 주워 모아 편찬한다면 전혀 도움이 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예전의 자료들이 대체로 정확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니, 어찌 다른 자료들을 널리 구해 그 오류를 밝혀내어 바로잡지 않습니까? 저 역도원(酈道元)이 어찌 몇 개월 만에 쉽게 만들었겠습니까. 선친이 살아 계실 때 주고받았던 서찰들을 가만히 떠올려 보면, 그 가운데 어느 것 하나 하천의 시원과 물줄기를 정확하게 조사하여 끝까지 파헤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지금 와서 생각해도 경탄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때의 벗들이 모두 죽고 지금은 나 홀로 세상에 남았으니, 그대에게 바라는 것 또한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번 그대가 일을 대충대충 처리하려는 마음이 많은 것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선친의 편지 속에서 그대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였으니 내가 어찌 감히 그 부탁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지루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지 않고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심한 말을 한 것이니, 그대는 틀림없이 이런 나를 탓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지은 잡설(雜說) 가운데 우리나라의 사적(事績)에 관해 언급한 글들이 많으니 어떻게 갑자기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에 《구암집(久庵集)》을 부쳐 주었는데 그 내용을 보니 마치 신을 신고 가려운 발을 긁듯이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체로 정전법(井田法)의 제도는 하(夏)나라 때 시작되어 주(周)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토지를 아홉 개의 구역으로 나누었으며 각각의 구역들은 모두 하나의 전(田)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이 전들이 모두 다 네 개의 구역으로 다시 나누어져 마치 ‘전(田)’ 자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기자(箕子)는 은(殷)나라 사람이라 굳이 하나라의 제도를 따를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전을 네 개의 구역으로 나눈 것은 정전법의 유제(遺制)가 아닙니다. 지금 경주(慶州) 고을 안에 직전(直田)을 두고 있는데, 이는 진(秦)나라의 원전(轅田)에 해당하며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경주는 진나라 사람이 세운 나라로서, 역사서에서 이른바 “정전을 폐지하고 천맥을 열었다.〔破井田開阡陌〕”라고 한 것은 천맥을 허물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역시 〈왕망전(王莽傳)〉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전법의 경우 그 천맥이 구불구불하지 않고 직선으로 그어져 있었다는 것을 여기에서 증빙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 대강을 서술한 것이니, 선친과 마주 앉아 하나하나 따져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삼한(三韓 진한(辰韓))이 처음 세워진 것이 장량(張良)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더욱이나 한꺼번에 다 설명해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일찍이 시를 한 수 지은 적이 있는데,
의양 땅의 교목에서 가지가 뻗어 나와 / 宜陽喬木長生枝
우리 동한을 다스리게 되었으니 / 辦局東韓計不違
창해인의 철퇴가 빗나갔다 하지 마소 / 莫言滄海人虛擲
놀란 혼이 결국에는 돌아가지 못했는걸 / 椎下魂驚竟不歸
하였으니, 이것으로나마 그대에게 웃음거리를 제공하는 바입니다.
개마국(蓋馬國)은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었으니 철령(鐵嶺)의 근방에 있었습니다. 정평(定平) 서북쪽 검산령(劒山嶺) 아래에 개마동(蓋馬洞)이 있는데 아마도 그 옛터가 아닌가 합니다. 명 태조(明太祖)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고 했던 곳은 분명 우리나라 영토 안에 있었지 요동(遼東) 땅 개원(開原)에 둔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도 틀림없이 이에 대해 밝혀 놓은 자료가 있을 것입니다. 벗들 가운데 혹 요동 땅에 설치한 것이 맞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으나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밖에 청천강(淸川江)을 산수(滻水), 대동강(大同江)을 열수(洌水), 저탄(豬灘)을 패수(浿水), 한수(漢水)를 대수(帶水)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명확하게 변증해 놓지 않았습니까? 마자수(馬訾水)는 현재의 압록강(鴨綠江)에 해당하니, 어찌 패수가 세 갈래의 물로 나뉠 리가 있겠습니까. 《한서(漢書)》에 나오는 “위만이 패수를 건넜다.〔衛滿渡浿〕”라고 할 때의 ‘패(浿)’ 자는 ‘격(湨)’ 자의 오자입니다. 이는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의 벗 안백순(安百順)이 ‘격(湨)’ 자의 오자로 본 것 또한 살펴본 데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반옹(磻翁)의 성토설(星土說)에 대해서는 내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반옹의 학문은 태호(太湖)에서 근원하였고 태호는 봉침(縫針)을 표준으로 삼았는데, 이 봉침은 북극을 정위(正位)로 삼습니다. 옛날에는 북극이 형소(衡簫) 안에 있었으나 지금 역법에서는 북극 주위로 3도의 차이가 있으니, 이것은 또 어떻게 정해지는 것입니까? 정침(正針)은 바늘이 실제로는 정남(正南)이 아닌 병향(丙向)과 오향(午向)의 사이를 가리키며, 서쪽으로 4만여 리를 가야 바늘이 정남인 오향을 가리키고 이를 넘어서면 오향과 정향(丁向)의 사이를 가리킨다 하니, 이것은 또 무슨 이치입니까?
정유년(1597, 선조30)에 있었던 도산(島山)의 전투에 대해서는 양호(楊鎬)의 군중(軍中)에서 그 시말을 기록해 놓은 것을 일찍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기록의 이름은 잊어버렸으나 그 내용은 자세히 기억납니다. 왜군이 금조평(金鳥坪)에서 울산(蔚山)의 서생포(西生浦)로 퇴각하자, 양호가 대군을 이끌고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많은 군사들이 성 아래에서 전사하였습니다. 왜군이 또다시 바다를 건너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났는데 그 손실이 매우 많았습니다. 도산은 바로 그곳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지난 편지에서 과거(科擧)의 규정에 대해 질문하였는데 마침 정신이 혼몽하여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했습니다. 국가의 경과(慶科)는 대체로 즉위 원년에 설행하는 증광시(增廣試)에서 연유되었습니다. 새로운 왕이 즉위하는 것은 한없는 근심거리이면서 동시에 한없이 좋은 일이기도 하기 때문에 원년에 과거를 설행하면서 ‘경(慶)’ 자를 붙이는 것은 예(禮)에 맞지 않습니다. 국초(國初)에는 한결같이 명나라의 제도를 따라 3년에 한 차례씩 과거를 실시하였는데, 차이가 있다면 저들이 진(辰)ㆍ술(戌)ㆍ축(丑)ㆍ미(未)의 해에 실시한 데 반해 우리나라는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의 해에 실시한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경과는 태종(太宗) 때에 와서야 처음으로 즉위 원년에 설행하였고 그 이름을 증광시라 하였습니다. 나중에 명나라 천자의 즉위 원년에 맞추어 설행하면서 갈수록 확대되었습니다. 그 후에 다시 ‘경(慶)’ 자를 붙이면서 경사스런 일이 있을 때마다 모두 설행하였으니, 경사와 과거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시경(詩經)》에 “옛 제도를 따르라.〔率由舊章〕” 하였으니, 옛 법도를 회복할 수 없다면 옛날의 제도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별시(別試)와 정시(庭試) 따위는 달마다 실시되고 있는데 이것이 무슨 법도란 말입니까. 과거를 설행하는 것은 인재를 선발하기 위한 것이고 인재를 선발하는 것은 현인을 구하기 위한 것인데, 과거 시험과 현인을 구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만약 국초에 정한 제도를 따를 수 없다면 단지 명나라의 제도만이라도 따르면 될 것입니다. 이번에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를 상고해 보았는데, 그 내용이 치밀하여 볼만한 것이 있으니, 이를 따르면 오늘날처럼 반일(半日) 만에 급제자를 발표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문장 실력으로 인재를 선발하는 것도 오히려 과거의 참모습을 잃은 것이라 할 수 있거늘 지금처럼 부(賦)와 표(表)만 가지고서 즉석에서 결정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까.
명나라의 제도를 따를 수 없다면 단지 고려의 제도만이라도 따르는 것이 괜찮을 것입니다. 고려의 제도는 비록 해마다 과거를 설행하였지만 동진사(同進士) 외에는 을과(乙科)와 병과(丙科)를 합쳐 10여 명에 불과하고 주시관(主試官)과 부시관(副試官)이 두 사람이어서 문생(門生)과 좌주(座主)의 예가 매우 엄격한 것이 오늘날에 비할 바가 결코 아닙니다. 말기에 별도로 국자시(國子試)를 두기는 하였으나 처음부터 급제자 수가 많지 않았고 끝에 가서야 100여 명이 되었습니다.
3년마다 200명의 진사를 선발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게 많습니다. 이 제도를 고치지 않는다면야 그만이겠지만, 바꾸어도 좋다면 먼저 경사(慶事)와 과거를 두 가지로 분리한 다음 백관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그 가운데 좋은 것을 채택하여 시행하여야 불합리한 점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실로 국가의 치란(治亂)과 관계된 일이라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조정에 벼슬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지속적으로 상의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일경(一經)에만 정통하면 된다고 하면서 사서(四書) 공부를 포기한다면 앞으로 유학이 인멸될 것이며, 단지 송독(誦讀)에만 힘쓰고 묵의(墨義)를 시행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사의(詞義)가 점차로 막히게 될 것이며, 항간의 아이들이 구두(句讀)나 익혀서 이것으로 벼슬길에 오르고 세상일은 전혀 모른 채 제멋대로 사치와 교만에 빠지게 한다면 재덕(才德)은 저절로 소진되고 풍속은 크게 타락할 것이니, 어찌 작은 근심거리이겠습니까.
서요(西遼)의 덕종(德宗)은 현량과(賢良科) 출신으로서 일개 부대를 이끌고 서역(西域)으로 도망하여 20년간 1만 리의 영토를 개척하였으니, 서역 사람들이 그를 성인(聖人)으로 받들었습니다. 100리의 땅을 기반으로 하여 천하를 다스린 것으로도 왕천하(王天下)라 할 수 있거늘 하물며 척촌(尺寸)의 땅도 없이 이 정도의 큰 영토를 다스리게 된 경우야 두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내심 괴이하기는 합니다만 이는 아마도 현량과를 시행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또 그는 한결같이 《주례(周禮)》를 따랐다고 들었습니다. 무릇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현인을 등용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데, 이러한 경우 삼물(三物)을 갖춘 사람을 올려보내지 않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비록 그 근거를 상고할 수는 없지만 추측할 수는 있으니, 어찌 왕천하의 역량을 갖춘 인물이 아니겠습니까. 매번 《요사(遼史)》를 읽을 때마다 현량과에 대한 일이 나오면 수없이 감탄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등잔불 아래서 말이 길어졌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주-D001] 닭 둥지 속의 아이 :
오래 사는 사람을 뜻한다. 송나라 태평흥국(太平興國) 연간에 승지(承旨) 이수충(李守忠)이 남방으로 사신을 가다가 경주(瓊州)에서 81세의 양하거(楊遐擧)란 노인을 길에서 만나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의 집에 가서 보니, 그의 아버지인 양숙련(楊叔連)은 122세였고, 그의 할아버지인 양송경(楊宋卿)은 195세였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닭 둥지에서 어린 아이가 머리를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양송경이 그를 가리키며 “우리 집안의 선대 조상님입니다. 말씀도 하지 않고 먹지도 않으며 나이가 몇 살인지도 모릅니다.”라고 하였다. 《說郛 卷39 洞微志》
[주-D002] 수경(水經) :
중국 하천(河川)의 수로(水路)를 서술한 중국의 대표적인 지리지(地理志)로 총 40권이며 저자는 미상이다. 일설에는 한(漢)의 상흠(桑欽)이 지었다고도 하고 진(晉)의 곽박(郭璞)이 지었다고도 한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책은 북위(北魏) 때의 역도원(酈道元, 466~527)이 주석한 《수경주(水經註)》이다. 《四庫提要 史部 地理類》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수경》은 중국에서 편찬된 위의 구체적인 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정항령(鄭恒齡)이 우리나라의 하천을 대상으로 편찬을 진행하고 있던 지리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대 정약용(丁若鏞)이 《대동수경(大東水經)》을 편찬하면서 정항령의 《동국대지도》만 언급하고 이 책을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편찬을 완료하지는 못한 듯하다. 《與猶堂全書 第6集 大東水經》
[주-D003] 구암집(久庵集) :
한백겸(韓百謙, 1552~1615)의 문집인 《구암유고(久庵遺稿)》를 가리킨다. 한백겸은 1607년(선조40)에 평양(平壤)에 남아 있는 토지 구획 형태를 보고 이것이 기자(箕子)가 고조선 때 시행한 정전제(井田制)의 흔적임을 밝히고 이를 〈기전도(箕田圖)〉로 그린 다음 다시 〈기전도설〉을 지어 설명하였는데, 그 내용이 《구암유고》에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이란 제목으로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성호는 〈서한구암기전도설(書韓久庵箕田圖說)〉을 지어 그의 설을 비판한 바 있다. 《星湖全集 卷56》
[주-D004] 한서(漢書) …… 있습니다 :
《한서》 권28 〈지리지(地理志)〉에 “상군(商君)이 원전(轅田)을 만들고, 천맥을 열었다.”라고 하였다.
[주-D005] 경주는 …… 나라 :
《성호사설》 권3 천지문 〈원전(轅田)〉에 의하면, 성호는 진(秦)나라 말엽에 진나라의 난리를 피하여 영남 지방에 온 자들이 경주에서 원전을 만들었다고 보았다.
[주-D006] 왕망전(王莽傳)을 …… 있습니다 :
《한서》 권99 〈왕망전〉에 중랑(中郞) 구박(區博)이 왕망에게 간언(諫言)한 기록이 있는데, 그 내용 중에 “정전(井田)이 비록 성왕(聖王)의 법이지만, 폐기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주(周)나라의 도가 쇠하여 백성들이 따르지 않자, 진(秦)나라가 민심을 따르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여정(廬井)을 없애고 천맥(阡陌)을 두어서 마침내 중국에서 왕이 되었습니다.”라는 말이 있다.
[주-D007] 내가 …… 있는데 :
《성호사설》 권26 〈장량영웅(張良英雄)〉에 나온다.
[주-D008] 의양(宜陽) 땅의 교목 :
의양은 전국 시대 한(韓)나라 성(城)이며 교목(喬木)은 세신(世臣)을 상징한다. 장량(張良)의 조부와 부친이 대대로 한나라의 재상을 지냈으므로 그리 부른 것이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주-D009] 창해인의 철퇴 :
장량이 한(韓)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동쪽으로 가서 창해군(滄海君)에게 역사(力士)를 얻어 박랑사(博浪沙)에서 진 시황을 철퇴로 저격하였던 일을 가리킨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주-D010] 철령위(鐵嶺衛) :
1387년(우왕13) 12월 명나라는 우리나라 철령(鐵嶺) 이북이 원(元)나라의 영토였다는 이유로 그곳에 철령위를 설치하여 요동(遼東)의 관할 아래에 두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고려는 명나라에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청화사(請和使)로 파견하여, 철령 이북으로부터 두만강 건너 공험진(公嶮鎭)까지의 땅은 본래 고려의 속령(屬領)이었음을 설명하고 철령위 설치를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주-D011] 안백순(安百順) :
안정복(安鼎福)으로, 백순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순암(順菴)ㆍ상헌(橡軒)ㆍ한산병은(漢山病隱)ㆍ우이자(虞夷子), 시호는 문숙(文肅)으로, 광주(廣州) 덕곡(德谷)에 살았으며, 35세 때인 1746년(영조22)에 안산(安山)에 살던 성호를 찾아가 문인이 되었다. 목천 현감(木川縣監), 세자익위사 익찬(世子翊衛司翊贊)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문집으로 《순암집(順菴集)》이 있고, 별저(別著)로 《동사강목(東史綱目)》, 《하학지남(下學指南)》, 《열조통기(列朝通紀)》, 《임관정요(臨官政要)》 등을 남겼다. 스승 이익의 저술인 《도동록(道東錄)》을 《이자수어(李子粹語)》로 개칭해 편집하였으며, 《성호사설(星湖僿說)》의 목차와 내용 등을 첨삭, 정리한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을 편집하였다. 《順菴集 順菴先生行狀, 韓國文集叢刊 230輯》
[주-D012] 그 밖에 …… 것입니다 :
이 내용과 관련하여 《성호사설》 권2 〈패산(浿滻)〉에 자세한 언급이 있다.
[주-D013] 반옹(磻翁) :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을 가리킨다.
[주-D014] 성토설(星土說) :
하늘의 별자리와 중국의 각 지역을 상응시키는 설을 이른다. 《사기(史記)》 권27 〈천관서(天官書)〉에는 “각(角)ㆍ항(亢)ㆍ저(氐)의 분야(分野)는 곤주(袞州)이고, 방(房)ㆍ심(心)의 분야는 예주(豫州)이고, 미(尾)ㆍ기(箕)의 분야는 유주(幽州)이고, 두(斗)의 분야는 강(江)과 호(湖)이고, 우(牛)ㆍ여(女)의 분야는 양주(楊州)이고, 허(虛)ㆍ위(危)의 분야는 청주(靑州)이고, 실(室)에서 벽(壁)까지의 분야는 병주(幷州)이고, 규(奎)ㆍ루(婁)ㆍ위(胃)의 분야는 서주(徐州)이고, 묘(昴)ㆍ필(畢)의 분야는 기주(冀州)이고, 자휴(觜觿)ㆍ삼(參)의 분야는 익주(益州)이고, 정(井)ㆍ귀(鬼)의 분야는 옹주(雍州)이고, 유(柳)ㆍ성(星)ㆍ장(張)의 분야는 삼하(三河)이고, 익(翼)ㆍ진(軫)의 분야는 형주(荊州)이다.”라고 하였고,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에는 “각(角)ㆍ항(亢)의 분야는 정(鄭)나라이고, 저(氐)ㆍ방(房)ㆍ심(心)의 분야는 송(宋)나라이고, 미(尾)ㆍ기(箕)의 분야는 연(燕)나라이고, 두(斗)ㆍ견우(牽牛)의 분야는 월(越)나라이고, 수녀(須女)의 분야는 오(吳)나라이고, 허(虛)ㆍ위(危)의 분야는 제(齊)나라이고, 영실(營室)ㆍ동벽(東壁)의 분야는 위(衛)나라이고, 규(奎)ㆍ루(婁)의 분야는 노(魯)나라이고, 위(胃)ㆍ묘(昴)ㆍ필(畢)의 분야는 위(魏)나라이고, 자수(觜嶲)ㆍ삼(參)의 분야는 조(趙)나라이고, 동정(東井)ㆍ여귀(輿鬼)의 분야는 진(秦)나라이고, 유(柳)ㆍ칠성(七星)ㆍ장(張)의 분야는 주(周)나라이고, 익(翼)ㆍ진(軫)의 분야는 초(楚)나라이다.”라고 하였다.
[주-D015] 태호(太湖) :
성호의 종숙부 이원진(李元鎭, 1594~1665)의 호이다. 유형원의 스승이자 외숙이기도 하다. 《星湖全集 卷67 從祖叔父太湖公行錄, 卷68 磻溪柳先生傳》
[주-D016] 봉침(縫針) :
늘 북쪽만 가리키는 나침(羅針)이다.
[주-D017] 형소(衡簫) :
횡소(橫簫), 즉 선기옥형(璇璣玉衡)의 옥형을 이른다.
[주-D018] 정침(正針) :
늘 남쪽을 가리키는 지남침(指南針)이다.
[주-D019] 도산(島山)의 전투 :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30) 12월 22일부터 1598년 1월 4일까지 도원수 권율(權慄)과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의 조명(朝明) 연합군이 울산에 있는 도산성에서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왜군과 싸운 전투이다.
[주-D020] 증광시(增廣試) :
조선조에서 경사가 있을 경우에 보이던 임시 과거이다. 1401년(태종1)에 처음으로 실시되었는데, 본래 임금의 등극을 축하하는 의미로 즉위년 또는 이듬해에 실시하던 것이었으나 선조 때부터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마다 시행되었다. 식년시(式年試)와 같이 그 절차는 생진과(生進科) 초시(初試), 생진과(生進科) 복시(覆試), 문과(文科) 초시(初試), 문과(文科) 복시(覆試), 전시(殿試)의 5단계로 나누어지며 시험 과목도 같았다. 때로는 대증광(大增廣)이라 하여 문과 합격자에 7명을 더하여 선발하는 일도 있었다. 《增補文獻備考 選擧》
[주-D021] 새로운 …… 일 :
《서경》 〈소고(召誥)〉에 “왕이 천명을 받는 것이 한없이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론 한없는 근심거리이다.[惟王受命 無疆惟休 亦無疆惟恤]”라고 하였다.
[주-D022] 옛 제도를 따르라〔率由舊章〕 :
《시경》 〈대아(大雅) 가락(假樂)〉에 “잘못되지 않고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옛 제도를 따르기 때문이다.[不愆不忘 率由舊章]”라고 하였다.
[주-D023] 서요(西遼)의 덕종(德宗) :
1094~1143. 이름은 야율대석(耶律大石)으로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8대손이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으며 1115년에 진사에 급제하여 한림승지를 지냈으며 대석임아(大石林牙)라 불렸다. 요나라가 멸망하자 서쪽으로 도망가서 서역(西域)의 수십 나라를 정복하여 서요를 건국하였다. 《星湖僿說 卷21 遼裔德宗》
[주-D024] 삼물(三物) :
주(周)나라 때 향학(鄕學)에서 인재를 육성하던 육덕(六德), 육행(六行), 육예(六藝)의 세 가지 교과 과정을 말한다. 《주례(周禮)》 〈지관사도 상(地官司徒上) 대사도(大司徒)〉에 “향학의 세 가지 일로 백성을 교화하고 인재는 빈객으로 예우하여 국학에 올려보낸다.[以鄕三物 敎萬民 而賓興之]” 하였다. 육덕은 지(知)ㆍ인(仁)ㆍ성(聖)ㆍ의(義)ㆍ충(忠)ㆍ화(和)이고, 육행은 효(孝)ㆍ우(友)ㆍ목(睦)ㆍ인(姻)ㆍ임(任)ㆍ휼(恤)이며, 육예는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이다.
'고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항주는 남송(南宋)이 도읍을 세운 임안부(臨安府)이고, 소주는 송나라의 평강부(平江府)이다. (0) | 2022.09.08 |
---|---|
황성교(皇城郊) 와 양양국 (0) | 2022.09.08 |
신라 애장왕(哀莊王)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간행하여 해인사(海印寺)에 보관 (0) | 2022.09.08 |
기자조선의 강토 요동(遼東)의 전 지역과 요서(遼西)의 의주(義州) 및 광녕(廣寧) 이동(以東) (0) | 2022.09.08 |
高句麗는 이 長城內 西南二千里의 城域을 領有하고 잇섯던 것 (0) | 2022.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