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고황제께서는 한 치의 땅이나 한 명의 백성이라는 기반도 없이 마침내 화란을 평정하고 천하를 소유하셨으니

2023. 3. 5. 17:54이성계의 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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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3 계미(1403) 6 18(갑자양력 1403-07-07

03-06-18[02] 황제가 천하를 통치하는 방침을 밝히는 칙유를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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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내린 칙유(勅諭)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제는 천하의 문무 관원, 군인, 백성 들에게 칙유하노라. 짐(朕)이 생각건대 하늘이 한 시대의 군주를 내어 반드시 한 시대의 정치를 이루는 것이니, 예로부터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정치의 성쇠(盛衰)와 득실이 있는 것은 또한 인군이 사람을 잘 쓰고 잘못 쓴 결과에 기인하는 것이다. 또한 당(唐)나라와 송(宋)나라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당 태종(唐太宗)은 난리를 다스려 바르게 돌리는 재능을 가지고,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덕을 품고서 능히 정관(貞觀)의 정치를 이룩하였다.  1말은 3()이고 바깥문을 닫지 않았으며 사방이 엄숙하고 평안하며 오랑캐가 와서 복종했으니, 근고(近古)에 비교할 사람이 드물었다. 그 까닭을 찾아보니 태종은 천하의 어진 사람을 능히 등용했기 때문이다. 왕규(王珪) 위징(魏徵) 꺼리고 원망하던 대상에서 용서하였고 이정(李靖) 울지경덕(尉遲敬德) 원수와 적인데도 들어 썼으며,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다른 시대에서 등용하였다.  태조(宋太祖) 병정으로 몸을 일으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사방을 위무하여 안정시키고 열국(列國)을 없애 평정하여, 세상과 함께 휴식하고 융성한 태평에 이르러 300여 년의 커다란 터전을 열고 교화와 문물의 풍속을 일으켰다. 그 까닭을 찾아보니 태조도 천하의 어진 사람을 능히 등용하였다. 범질(范質) 왕부(王溥) 모두 선대(先代) 신하이고, 석수신(石守信) 왕심기(王審琦) 모두 전조(前朝) 경험이 많은 장수였는데, 태조가 들어서 등용한 것이다. 이로 본다면 당 태종과 송 태조는 자기의 진심을 미루어 사람을 등용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다하여 섬겨 마침내 모두가 한 시대의 명군(明君)과 현신(賢臣)이 된 것이니, 믿을 만한 역사서에 실려 있어,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짐은 고황제(高皇帝 홍무제(洪武帝)) 적자(嫡子)로서 () 땅에서 나라의 울타리 역할을 받들어 행하였다. 고황제께서 땅이 오랑캐와 국경이 맞닿았다고 변경의 일을 여러 부탁하셨다. 뒤에 의문태자(懿文太子)께서 돌아가시자 고황제께서는 짐이 대사를 맡길 만하다 여기고 동궁의 자리에 두어 영원토록 기본을 공고히 하시려고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황제께서 승하하시자 주윤문(朱允炆) 유조(遺詔) 사칭해 황위를 계승하여 여러 왕과 골육을 해쳤는데, 분란(紛亂)을 품은 뜻이 이미 심하고 짐을 의심하는 마음이 실로 깊었다. 즉위하고 얼마 되지 않아 제일 먼저 간신을 보내서 포위하고 핍박하기를 마치 속의 고기와 그물 속의 토끼와 같이 하니 결코 수가 없었다. 짐은 실로 어쩔 수 없어 군병을 일으켜 스스로를 구한 것이지 애초에 어찌 천하에 마음을 두었겠는가. 마침내 한 구석 지방의 무리를 가지고 천하의 군병에 대적하여 3, 4년간에 큰 싸움이 수십 번이고 작은 싸움은 셀 수도 없었는데, 제압하고 승첩을 거두어 끝내 화란을 평정하였으니 이 어찌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천지와 종묘사직의 신령, 부황과 모후의 도움에 힘입어 천명(天命)이 모이고 인심이 돌아왔기 때문에 여기에 이른 것이다.

짐은 즉위한 초기부터 감히 조금도 사심(私心)을 쓰지 않았다. 천하라는 것은 부황의 천하이고 군민(軍民)과 관원은 모두 부황의 적자(赤子)이니, 부황의 성헌(成憲)을 고치고 바꾸며 부황의 천하를 흐리고 어지럽히는 간악한 자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모두 주륙하였다. 그러나 그 나머지 문무 관원은 예전 그대로 써서 의심하지 않으며, 승진시키고 상을 주며 내쫓고 벌을 주는 것은 하나같이 지극히 당연한 이치를 따랐을 뿐이다. 당 태종이나 송 태조도 오히려 다른 시대의 신하를 등용했는데, 더구나 짐은 부황의 신하이니 원한이 있었던 다른 사람과는 본래 비교할 것이 아니다. 근래 더러 지각없는 소인이 있어 아직도 의심을 품고서, 진심을 미루어 위임하는 짐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한가할 때는 제멋대로 다른 의론을 만들고 일을 처리할 때에는 마음을 다하려 하지 않으니 이는 그저 천명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군은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리기 때문에 천자(天子)라 하고 천명을 받들어 행하기 때문에 천사(天使)라고 하는 것이다. 만일 천명이 있지 않다면 힘을 가진 자는 누구나 다 얻어서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근대를 따져 보더라도 원(元)나라가 천하를 소유하였으니, 넓은 영토와 번성한 백성, 풍부한 국가 재정, 성대한 군사력을 누가 이길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천명이 이미 떠나고 군웅(群雄)이 함께 일어나게 되자, 우리 태조 고황제께서는 한 치의 땅이나 한 명의 백성이라는 기반도 없이 마침내 화란을 평정하고 천하를 소유하셨으니, 이 역시 다른 시대에서 인재를 등용하고 원수에 대해 감정을 풀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왕업을 창건해 대통(大統)을 전하고, 예(禮)를 제정하고 악(樂)을 만들어 몸소 태평을 이루기를 40여 년이었다. 이것으로 본다면 역시 사람을 등용한 소치(所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 부황께서 공로를 쌓고 인(仁)을 거듭하여 성덕(聖德)이 하늘을 감동시키니 천명의 융성한 돌보심이 한없이 넉넉히 베풀어졌다. 그래서 복이 짐의 몸에 미쳐 대통을 이었으니, 짐이 어찌 감히 천명과 부황의 덕을 어겨서 다스리겠는가. 생각하니, 짐은 과거에 적의 칼날과 직접 부딪쳤을 때 붙잡은 장사(將士)를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도 죽이지 않았는데 하물며 지금 천자가 되어 사사로이 남에게 원한과 미움을 가하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을 쓸 때 피차를 구분하지 않고 일체로 보아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자라면 비록 원수일지라도 반드시 상을 주고 마음에 다른 계책을 품은 자라면 아무리 친하더라도 반드시 처벌할 것이다. 또 천명을 받들어 정벌한 장사들을 가지고 따지더라도, 짐을 따라 전쟁에 출정하여 직접 화살과 돌에 맞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짐과 부황의 은혜를 갚았지만, 범법자가 있으면 짐이 또한 용서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법도는 본래가 부황의 법도이기 때문이니 짐이 어찌 감히 사사로이 하겠는가. 지금 천하가 한집이고 사해(四海)가 하나로 합쳐서, 군민이 서로 기뻐하며 함께 태평을 누리고 있다. 감히 태조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다른 의론을 함부로 일으켜 스스로 피차를 구분하거나, 마음에 의심과 시기를 품고 뜻에 불만이 있어 비방하고 원망하여 직사(職事)를 편히 여기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천재(天災)와 인화(人禍)가 있을 것이니, 일이 발각되어 관청에 알려지면 그 집안을 멸족할 것이다.

짐은 성헌을 우러러 준수하고 여론을 굽어살펴, 지극히 공정한 마음을 확충하고 인후(仁厚)한 덕화(德化)를 넓혀, 나라 안에 아름답게 은혜를 베풀고 백성을 사랑하고 길러 전대(前代)의 규모와 융성함을 겨루는 지치(至治)를 이루려고 한다. 그대들 천하의 문무 관원, 군인, 백성 들은 짐의 가르침을 준수하여 각각 마음을 다하고, 망녕되게 의심을 품어 허물과 죄를 부르지 말라. 그러면 모두가 무궁하게 부귀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칙유하는 것이니 지극한 심정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원전】 1 집 269 면

【분류】 외교-명(明)

《태종실록》 15년 6월 14일 기사에, 가뭄을 걱정하며 구언한 내용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