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5. 18:08ㆍ이성계의 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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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총서(總序)
총서-098 공양왕이 태조에게 교서를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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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왕 2년 경오년(1390) 1월에, 공양왕이 경연관(經筵官)을 두고 태조를 영경연사(領經筵事)로 삼았다. 또 팔도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게 하는 한편, 군영(軍營)을 설치하고 번(番)을 나누어 교대해 숙직하게 하고 군자(軍資)로 녹봉을 주었다.
3월에 태조가 병 때문에 사직하였다.
4월에 공양왕이 중사(中使)를 보내 문병하고 억지로 일어나게 하였다. 교서(敎書)를 아홉 명의 공신(功臣)에게 내려 그 공로를 칭찬하고, 내구마(內廏馬) 1필, 백금(白金) 50냥, 비단과 명주 각 5단(端), 금대(金帶) 1개를 내리고, 이어 내전(內殿)에서 위로연을 개최하였다. 태조에게 내린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아, 비상(非常)한 변고를 없애려면 반드시 세상을 구할 뛰어난 인재를 기다려야 하고, 만세(萬世)의 공을 세운 사람은 반드시 끝없는 보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옛날에 우리 태사(太師)는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비로소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태묘(太廟)에 함께 배향(配享)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의 500년이 되었다. 지난번에 이인임(李仁任)이 몰래 공민왕에게 영전(影殿)을 짓는 역사(役事)를 부추겨 시중(侍中) 자리를 차지하였는데, 그 원망이 임금에게 돌아가 마침내 갑인년(1374, 공민왕23)의 변고를 초래하고 대를 이을 자식도 없게 만들었다. 그러자 이인임은 여불위(呂不韋)가 진(秦)나라를 훔친 계책을 써서, 공민왕 때의 요사스러운 중 신돈(辛旽)의 소생인 우(禑)를 거짓으로 공민왕의 궁인(宮人)이 낳은 아이라 하고 왕으로 세우니, 공민왕의 모후(母后)가 안 된다고 하였고 재상 이수산(李壽山)은 종친을 세우자고 청하였으나 이인임이 따르지 않았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실망하였고, 사방에 누런 안개가 끼어 햇빛이 보이지 않았다. 우가 상사(喪事)를 주관하여 공민왕을 장사 지낼 때에는 무지개가 태양을 둘러쌌고, 종묘에서 겨울 제사를 지낼 때에는 올빼미가 태실(太室)에서 울고 번개가 치고 지진이 일어났으며, 그가 공민왕의 아버지인 의릉(毅陵 충숙왕(忠肅王))의 기일(忌日)에 재계할 때에는 큰바람이 불면서 비가 오고 천둥과 번개가 치며 우박이 내렸고, 그가 왕위를 이어받을 때에는 조묘(祧廟)와 침원(寢園)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바람에 뽑히고 태실의 취두(鷲頭)가 부러졌으며 묘문(廟門)이 넘어지고 어름(御廩)에 화재가 났으니, 이것은 조종(祖宗)의 혼령이 위엄을 보여 우의 계승을 끊으려고 한 것이다. 우의 어머니 반야(般若)를 죽여 비밀이 새지 않게 하려고 하였으나, 사평순위부(司平巡衛府)에 새로 세운 문이 저절로 무너졌으며, 마른 뼈를 가져다 우의 어머니라 하고 장사 지냈는데 널[柩]을 안치한 장막에서 하루 사이에 두 번이나 화재가 났으니, 이것은 하늘이 만세토록 우가 반야의 아들임을 보인 것이다.
우가 왕위에 오른 지 2년이 되었는데도 그 어머니가 누구인지 정해지지 않으니, 재상 김속명(金續命)이 말하기를 ‘세상에 자기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혹 있을 수 있지만 자기 어머니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나는 듣지 못하였다.’ 하여 하마터면 죽게 될 뻔했는데, 공민왕의 모후가 힘써 구원하여 죽지 않게 되었다. 김유(金庾)가 우는 왕씨(王氏)가 아니라는 것을 황제에게 말했다가 도리어 죽음을 당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우의 아내는 이인임의 질녀(姪女)인데, 창(昌)을 낳았다. 이리하여 왕씨가 다시 일어날 희망은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이인임이 국정(國政)을 멋대로 처리하여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친 것이 15년이나 되는데, 우 또한 사납고 막되어 요동(遼東)을 공격하기를 꾀하여 삼한의 백만 백성을 징발하여 모두 죽이려고 하였다. 경은 조민수(曺敏修)를 보좌하며 압록강까지 행군해 갔다가, 경이 여러 장수들에게 사직(社稷)의 존망이 매여 있는 일이라고 설득하여 군사를 돌이켰으니, 이것은 경이 뼈만 남게 된 우리 백성들에게 살을 붙여 준 셈이다. 그러니 사직이 망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경에게 힘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의 용맹은 삼군(三軍)에서도 으뜸가고 직위는 양부(兩府)에서 높았으며 공명(功名)이 세상을 덮을 정도로 뛰어났지만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다.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과 《대학연의(大學衍義)》 읽기를 좋아했고, 유후(留侯), 강후(絳侯), 무후(武侯), 양공(梁公)의 충성에 감동한 까닭에 군사를 돌이켰을 때 왕씨로 왕을 다시 세울 것을 의논하였다. 조민수도 처음에는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가, 돌아온 뒤에는 자신의 친척인 이인임, 이림(李琳)과 한패가 되어 경의 의논은 저지하고는 창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총재(冢宰)가 되었으니, 왕씨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큰 기회를 잃게 되었다. 경은 참고 견디면서 관직에 나아가 공의(公義)로 조민수를 깨우쳐 주면서 대간을 아주 신중하게 잘 선발하여 기강을 진작시켰다. 그러자 사헌부에서 조민수가 탐욕스러운 짓을 하여 법을 어지럽혔다고 탄핵하여 물러나게 하였다.
경은 밤에 터득한 일이 있으면 앉아서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고, 현인(賢人)을 구하기를 목마른 사람이 물을 구하는 것처럼 하였으며, 악한 이를 미워하기를 원수처럼 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조그만 이익이라도 되면 반드시 일으키고자 하였고, 조그만 해로움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제거하고자 하였다. 언로를 열어 백성들의 실정을 전달하게 하였고, 묻혀 있는 인재를 천거하여 공도(公道)를 널리 폈다. 그러자 뇌물로 벼슬자리를 구하려는 풍조와 관직을 팔고 옥사(獄事)를 거래하는 지난날의 습속이 하루아침에 변하여, 초야에는 버려진 현자가 없고 조정에는 요행히 자리를 차지한 자가 없게 되었다. 권한을 지닌 사자(使者)를 보내 지역의 형편을 살펴보고 출척(黜陟)을 행하게 하니, 번진(藩鎭)에서는 감히 도적을 기르지 못하게 되었고 수령들은 감히 백성들을 괴롭히지 못하였다. 소인배들의 사설(邪說)을 배척하고 여러 도(道)에 있는 사전(私田)을 개혁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 이 나라를 부유하고 오래 살 수 있는 나라로 만들었다. 규전(圭田)과 채전(采田)의 법에 따라 벼슬하는 사람들에게 경기 지역의 전지(田地)를 지급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관원들을 우대하고 시위(侍衛)하는 것을 엄하게 하도록 하였다. 관작을 주어도 사사로운 정에 따라 주지 않고, 처벌을 해도 개인적인 감정에 따르지 않았다. 경의 성심이 광명정대한 것은 푸른 하늘에 빛나는 해와 같아 어리석은 백성들도 모두 알고 있는 바이다. 이렇게 경이 경영한 일들은 모두 왕씨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기사년(1389) 겨울에 창이 보낸 청조사(請朝使) 윤승순(尹承順)이 예부(禮部)에서 황제의 조칙을 받들어 보낸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는데, 그 자문에 ‘고려의 왕위는 대를 이을 자손이 끊어져서 다른 성(姓)을 가진 자를 왕씨인 것처럼 하였으니 삼한을 대대로 지킬 좋은 계책은 아니다. 참으로 현명하고 지혜로운 배신(陪臣)이 관직에 있으면서 군신(君臣)의 분수를 바로잡는다면 비록 수십 대를 조회하러 오지 않더라도 무슨 걱정이 있겠으며, 해마다 조회하러 오더라도 무슨 싫어할 것이 있겠는가. 동자(童子 창왕(昌王))는 경사(京師 남경)에 올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성천자(聖天子)께서 공민왕이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못한 시기에 남보다 앞서 신하라 일컬어 천하 사람들에게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림으로써 명나라가 천하의 주인이 되는데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을 생각하신 것이다. 그래서 공민왕의 제사가 끊어진 것을 가엾게 여겨 왕씨의 신하들에게 왕씨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을 간절히 바란 것이다.
창의 외조부(外祖父)인 이림은 시중의 자리에 있으면서 황제의 조칙을 숨기고 발표하지 아니하였으니, 흉악한 꾀를 헤아릴 수 없었다. 신씨(辛氏)의 변고는 조만간 발생할 상황이라 왕씨들은 솥 안의 물고기처럼 되어 존망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경이 죽음을 무릅쓰고 몸소 대의(大義)를 지켜 우리 왕씨를 위해 만세를 이을 계책을 정하니, 심덕부(沈德符)ㆍ정몽주(鄭夢周)ㆍ지용기(池湧奇)ㆍ설장수(偰長壽)ㆍ성석린(成石璘)ㆍ조준(趙浚)ㆍ박위(朴葳)ㆍ정도전(鄭道傳) 이상 8명의 장수와 재상들이 경의 뜻을 따라 도왔다. 11월 15일에 천자의 조칙을 현릉 정비(定妃)의 궁 뜰에서 선포하고, 나를 종저(宗邸)에서 맞이하여 공민왕을 잇도록 하였는데,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 아침이 지나기도 전에 16년 동안 왕 노릇을 한 신씨를 제거하였다. 그의 인친(姻親)과 패거리들이 온 나라에 뿌리내리고 있었지만 모두 빙 둘러보고는 간담이 서늘하여 겉으로 순종하는 척하며 감히 꼼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얼굴빛을 바꾸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햇빛은 봄날처럼 화창하였다. 그리하여 위로는 31대를 계승해 온 차례를 잇게 되고, 아래로는 천만억 대로 이어질 무궁한 경사를 열어 놓았으니, 경이 왕씨를 다시 일으킨 공은 강후(絳侯)와 오왕(五王)에게 비길 바가 아니다.
경의 집안은 대대로 충성과 의리를 쌓아 왕실에 마음을 다했는데, 그 두터운 덕이 흘러 경에게서 발현되었다. 문무를 다 갖추었으니 왕을 보좌할 재주이고, 나라만 생각하고 집안일은 잊었으니 사직을 지킬 신하이다. 천지와 조종의 축복을 듬뿍 받고 태어났고, 삼한의 안위가 달려 있는 인물이다. 공민왕에게 신임을 받아 홍건적(紅巾賊)을 섬멸하여 양경(兩京 평양(平壤)과 개경(開京))을 수복하고, 요망스러운 중 신돈을 몰아내어 왕씨를 편안하게 하였으며, 납합출(納哈出)을 내쫓아 사막에까지 위엄을 떨쳤고, 왜구를 격퇴하여 서해(西海)를 보전하였으며, 인월역(引月驛)에서 왜적을 공격하여 왜인(倭人)들을 떨게 하였다. 경은 공민왕께서 신임하신 것을 생각하고 종묘의 제사가 끊기는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 기울어진 나라의 운수를 일으키겠다고 맹세하였으니, 지극한 정성은 천지를 꿰뚫고 지극한 충성은 조종의 영혼을 감동시켰다. 지극히 공평하고 바른 처사는 온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켰고, 지극히 어질고 은혜가 충만하여 만백성의 환심을 샀다. 하늘은 천도(天道)를 따르는 사람을 돕고 사람들은 큰 신의가 있는 사람을 돕는 까닭에, 왕씨를 다시 일으키기가 이와 같이 쉬웠던 것이다. 이리하여 경은 공민왕에게 신임받은 것을 신의를 지켜 갚게 되었다. 옛날에 주공이 국가에 공훈이 있어서 그를 동방의 제후에 봉한 것처럼, 나도 경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땅을 나누어 주고 대대로 작위를 이어 가게 봉해 주는 한편, 화상(畫像)을 그리고 공(功)을 새겨 두게 하며, 자손들에게는 영원히 죄를 용서하여 주도록 하겠다. 이에 나는 원자(元子)를 데리고 이 일을 종묘에 고하였다.
아! 경이 우리 백성들을 살리고 우리 종사(宗祀)를 계승하여 우리 삼한을 다시 일으켜 세운 공로를 이렇게 변변치 못한 포상으로 어찌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할 수 있겠는가. 경은 나라를 중흥시킨 원훈(元勳)이니, 명망은 태사 배현경(裵玄慶)과 같고 임무는 상(商)나라 아형(阿衡 이윤(伊尹))보다 무겁다. 법도를 세우고 기강을 펴서 만세의 기준이 되게 하고 우수한 인재를 널리 구하여 우리 조정을 무게가 있게 함으로써, 덕이 부족한 나를 보필하고 우리 사직을 보존하여 하늘처럼 끝이 없게 하고 만년이 지나도록 종묘에서 제사를 받게 된다면, 덕이 부족한 나도 더불어 빛날 것이다. 경의 자손도 경의 충성심과 어진 마음을 본받아 영원히 잊지 말고 나의 후대 임금들을 보필하여 나라와 더불어 기쁨을 함께 한다면 참으로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또 군사를 돌이킨 공을 기록하여 교지를 내려 포장(褒奬)하고, 전지 100결(結)을 내려 주었다.
【원전】 1 집 14 면
【분류】 인물(人物) / 역사(歷史) / 왕실(王室) / 군사(軍事) / 인사(人事) / 어문학-문학(文學)
[주-D001] 옛날에 …… 배향(配享)되어 :
태사는 배현경이고 태조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다. 배현경은 성종 13년(994) 태사로 추증되어 태조묘에 배향되었다.
[주-D002] 영전(影殿) :
임금이나 왕비의 초상을 모셔 두는 전각(殿閣)인데, 여기서는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영전을 말한다.
[주-D003] 갑인년의 변고 :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은 뒤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여 항상 이들과 가까이 지냈는데, 익비(益妃) 왕씨(王氏)가 자제위에 속해 있던 홍륜(洪倫)과 정을 통해 임신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공민왕이 관련자들을 처치하려 하자, 내시 최만생(崔萬生)이 홍륜 등과 함께 공민왕을 시해한 사건을 말한다. 《高麗史 叛逆列傳 洪倫》
[주-D004] 여불위(呂不韋)가 …… 계책 :
여불위는 전국 시대 조(趙)나라 출신의 대상(大商)이다. 그는 진(秦)나라 왕자 자초(子楚)가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 와 고생하고 있을 때 많은 돈을 투자하여 그의 환심을 사고, 아들이 없는 진나라의 태자 안국군(安國君)과 화양부인(華陽夫人)을 설득하여 자초를 양자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애첩을 자초에게 바쳐, 후에 자신의 아들이 진나라 왕이 되도록 하였다. 이 왕이 진 시황(秦始皇)이다. 《史記 呂不韋列傳》
[주-D005] 공민왕의 모후(母后) :
충숙왕의 비(妃)인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洪氏)를 말한다.
[주-D006] 김유(金庾)가 …… 당했으므로 :
김유가 이자용(李子庸) 등과 함께 배를 타고 명나라 수도 남경(南京)에 사신으로 갔는데, 황제가 “공민왕에게 아들이 없는 것을 알고 있는데, 지금 왕은 누구의 자식이냐?”라고 물었으나, 김유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 이 일이 문제가 되어 김유는 결국 죽게 되었다. 《高麗史 金庾列傳》
[주-D007] 양부(兩府) :
고려 시대 백관(百官)의 제반 업무를 관장하는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다섯 재신(宰臣)과 군기(軍機)를 관장하는 추밀원(樞密院)의 일곱 추신(樞臣)을 가리키는데, 일반적으로 문무(文武)를 총괄하는 부서의 2품 이상 중신(重臣)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추밀원은 고려 말에 밀직사(密直司)로 개칭되기도 하였다.
[주-D008] 유후(留侯) …… 충성 :
유후 장량(張良)과 강후 주발(周勃)은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세웠고, 무후 제갈량(諸葛亮)은 유비(劉備)를 도와 촉(蜀)나라를 세웠으며, 양공 적인걸(狄仁傑)은 당(唐)나라 중종(中宗)을 도와 중흥의 공을 이루었다.
[주-D009] 밤에 …… 기다렸고 :
위정자가 백성들을 위한 좋은 일을 조금이라도 빨리 실행하고 싶어 한다는 말이다. 《孟子 離婁下》
[주-D010] 번진(藩鎭)에서는 …… 되었고 :
번진에서 군사들을 잘 통솔하지 못해 군사들이 도적이 되는 것을 태조가 바로잡았다는 뜻이다. 《太祖實錄 1年 12月 16日》
[주-D011] 규전(圭田)과 채전(采田)의 법 :
규전은 주(周)나라 때, 경대부(卿大夫) 등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지급한 토지이고, 채전은 경대부에게 내려 준 봉지(封地)이다. 여기서는 공양왕 3년(1391)에 중앙에서 벼슬하는 관리들에게 경기 지역의 토지를 급료로 나누어 주는 과전법(科田法)을 시행한 것을 말한다. 《禮記 王制5》 《孟子 滕文公上》 《高麗史 食貨志1 祿科田》
[주-D012] 신씨(辛氏)의 …… 있었다 :
신돈의 손자인 창왕이 변란을 일으켜 왕씨들을 제거하려고 했다는 뜻이다.
[주-D013] 현릉 정비(定妃) :
공민왕의 제4비인 정비(定妃) 안씨(安氏)를 가리킨다.
[주-D014] 강후(絳侯)와 오왕(五王) :
강후는 주발을 말한다. 한 고조가 죽은 뒤에 여후(呂后)가 국정을 장악하여 여씨(呂氏)들을 왕으로 봉하는 등 한나라의 종통이 위태로워졌는데, 여후가 죽자 주발이 여씨 일파를 제거하고 대왕(代王)을 보위에 오르게 하여 사직의 위기를 구하였다. 《史記 呂太后本紀》 오왕(五王)은 장간지(張柬之), 환언범(桓彦範), 경휘(敬暉), 최현위(崔玄暐), 원서기(袁恕己)를 가리키는데, 이들은 측천무후(則天武后)를 퇴위시키고 중종(中宗)을 복위시켜 당(唐)의 국운을 회복시킨 공로로 군왕(郡王)에 봉해졌다. 《新唐書 五王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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