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비(眞興王碑)가 하나는 낭선(朗善) 시대에 나타났고

2022. 9. 7. 19:58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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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전집 제3권 / 서독(書牘)

서른두 번째[三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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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비(眞興王碑)가 하나는 낭선(朗善) 시대에 나타났고, 또 하나는 유 문익공(兪文翼公 문익은 유척기(兪拓基)의 시호) 시대에 나타났는데, 끝내 그것을 알려고 물어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함흥 부사(咸興府使) 윤광호(尹光濩)가 대략 몇 본(本)을 탁본하였는데, 그 후에 관(官)에서 탁본한 것을 인하여 백성들이 마침내 그것을 파묻어 버림으로써 형체도 그림자도 없어진 지가 지금 40여 년이 되었습니다. 제(弟)는 이 비(碑)에 대해서 고심(苦心)한 것이 있어 매양 북쪽에 가는 사람을 인하여 널리 찾아 보도록 요구하였으나 끝내 한 사람도 그 말에 응해준 자가 없었으니, 저들이 어떻게 이것을 알겠습니까.

낭선의 시대에는 이 비가 두 조각[二段]이 다 있었는데, 유 문익공 시대에는 이 비가 이 한 조각만 남고 아래 한 조각은 다시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만일 다시 아래 한 조각을 얻는다면 더욱 신기하겠지만 아마 기필할 수가 없을 듯합니다.

대개 이 비는 한갓 우리나라 금석(金石)의 시조(始祖)가 될 뿐만이 아닙니다. 신라(新羅)의 봉강(封疆)에 대하여 국사(國史)를 가지고 상고해 보면 겨우 비렬홀(比列忽) ―즉 안변(安邊)이다.― 까지에만 미쳤으니, 이 비를 통해서 보지 않으면 어떻게 신라의 봉강이 멀리 황초령(黃草嶺)까지 미쳤던 것을 다시 알 수 있겠습니까. 금석이 국사보다 나은 점이 이와 같으니, 옛 사람들이 금석을 귀중하게 여긴 까닭이 어찌 하나의 고물(古物)이라는 것에만 그칠 뿐이겠습니까.

또 하나의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이 비가 중국으로 말하면 진(陳) 나라 광대(光大 진 문제(陳文帝)의 연호 567~568) 연간에 세워진 것인데, 육조(六朝) 시대의 금석들이 지금 약간 남아 있는바, 그것들이 이 비의 서체(書體)와 서로 흡사하니, 그때에 중국과 외국의 풍기(風氣)가 서로 멀지 않았음을 볼 수 있고, 그때에 신라 사람들이 중국의 서체를 마음으로 본뜨고 손으로 따르고 했던 것을 또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서체는 예서(隷書)와도 비슷하고 해서(楷書)와도 비슷한데, 이것이 바로 육조 시대의 서법은 오히려 옛 법규를 거슬러 따라서 파체(破體)로 쓰지 않는 것을 정묘(精妙)하게 여겼던 까닭이니, 이것이 또 증빙의 자료가 될 만합니다. 또 부지(夫知)ㆍ급간(及干) 등의 관명(官名)ㆍ인명(人名)에 이르러서도 국사 이외의 것을 자세히 상고할 수 있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제(弟)가 이 비에 대해서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 한 권을 찬술하였는데, 일자(一字)ㆍ일획(一畫)과 일지(一地)ㆍ일관(一官)을 모두 자세하게 확증한 것이 한 권 분량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삼가 이번에 우러러 바치고는 싶으나, 아직 초고(草稿)로 있고 미처 정리를 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정리를 한 다음에야 열람을 할 수 있으므로 지금은 보내 드릴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지금 이미 비를 얻고 나서 또 이것을 우거진 잡초 사이에 버려둔다면, 대감께서 돌아오신 뒤에는 반드시 또 매몰되고 말 것입니다. 진흥왕의 풍공 성렬(豐功盛烈)이 담긴 한 조각 빗돌이 세간에 남아 존재해 온 지가 이미 천 년이 지났고 보면, 반드시 연운(煙雲)의 변멸(變滅)과 함께 따라서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니, 후인들이 그를 높여 꾸미고 포장하는 도리에 있어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러니 지금 영하(營下)로 가져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기는 하나, 그 일을 크게 벌여서 영원히 잘 보존되도록 하는 조처가 있지 않는다면 또 이것이 어디로 굴러가게 될지 모를 일입니다. 또 이 비가 원래 있던 곳이 바로 봉강(封疆)을 척정(拓定)한 실적(實蹟)이고 보면,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또한 어떨까 싶기도 하니, 만일 그 비가 원래 있던 곳에 그대로 두고 영원히 보존할 계책을 마련한다면 참으로 더욱 좋겠습니다.

 

대지(大地)가 마구 타 들어가고 염관(炎官)이 이 세상에 다시 나옴으로써 울타리와 띠집이 모두 열(熱)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장(里長)이고 촌민(村民)이고 어느 한 집도 서늘한 데가 없으니, 또한 변상(變相)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해마다 이달에 한번 가뭄이 드는 것은 항상 연례(年例)가 되어 있기에 이미 하소정(夏小正)에서부터 대서특필(大書特筆)한 것으로 이는 4천 년 이래로 천기(天機)의 관습적인 현상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모두 지나간 일을 기억하지 못하여 가뭄을 만날 때마다 처음 있는 일처럼 여깁니다.

옛날에 명철한 지혜를 가진 이들은 못[塘]의 수문(水門)을 닫아 물을 저장하고 또 용미차(龍尾車)로 물을 퍼 올리는 일까지 거듭하여 힘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농정(農正)의 수한(水旱)에 관한 제작과 용도는 오로지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만을 바라고 있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천인(天人)이 일체(一體)가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기에 더욱 소홀하여 못에 수문 닫는 일을 일체 하지 않고, 심지어 수차(水車)의 등속에 대해서는 그 모양이 어떻게 생긴지조차 모르는 가운데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고 다만 서교(西郊)에 검은 구름이 일지 않는 것만을 탓하고 있으니, 이러고도 밥알이 입에 들어가는 것이 또한 요행일 뿐입니다.

눈앞의 온 들녘 사람들이 시름에 젖어 있으니, 실로 걱정스럽습니다. 그러나 작년의 예와 같이 천심(天心)이 자비로워서 비가 오지 않고도 풍년 드는 것이 또 하나의 예가 된다면, 촌(村)마다 큰 주발의 국수가 필경 눈에 차지는 못할지라도 마치 선가(禪家)에서 이른바 천공양(天供養)이란 것과 같이 절로 오게 될 줄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을 믿고 두려움이 없을 수야 있겠습니까.

 

옥적(玉笛)은 또 하나의 기이한 만남이요, 인연입니다. 듣건대, 이것이 김해(金海)에서 나온 것이라 하니, 이는 바로 금관국(金官國)의 고물(古物)로서 또 신라(新羅)의 것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에 ‘금관옥적(金官玉笛)’이란 시호를 붙이는 것이 더 좋겠으니, 갑면(匣面)에다 이 시호를 새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고악(古樂)은 이미 없어졌고, 또 신고(神瞽)가 없어 율(律)을 정하지도 못하므로 황종(黃鐘)의 정성(正聲)을 고정(考定)할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순사(舜祠) 옥관(玉琯)태시(泰始) 적률(笛律)은 모두 후인들이 율(律)을 살피고 성(聲)을 정해 놓은 것이니, 이 피리[笛]에 만일 유완(幽緩)한 가락이 있다면 지금 율의 단삽(短澁)한 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적(古笛)에는 십이율(十二律)의 적(笛)이 각기 있으니, 이는 반드시 지금의 적과 같이 않을 것입니다. 칠공통(七孔筩)만 뚫려 있는 것에 대해서 다시 성민(聖民) 등으로 하여금 그 중 어느 율에 해당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율과 성은 특히 서로 다르니, 율은 곧 황종(黃鐘)ㆍ대려(大呂) 등 십이율이고, 성은 곧 궁(宮)ㆍ상(商) 등 오성(五聲)입니다. 이 때문에 황종의 궁(宮)과 대려의 상(商)이 서로 돌아가는 것인데, 성민이 또한 이런 묘리를 깊이 알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시험삼아 한번 착안해 보시는 것이 매우 좋겠습니다.

 

《문헌비고(文獻備考)》를 속찬(續纂)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원서(原書)로 말하면 영조(英祖) 때에 신경준(申景濬)의 《지리고(地理考)》를 우러러 을람(乙覽)에 대비하도록 바친 것을 계기로 하여, 타고(他考)까지 집성(輯成)하라는 명이 내려짐으로써 마침내 《문헌비고》의 원본이 이루어진 것인데, 그때에는 매우 허술함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정조(正祖) 때에 이만운(李萬運)이 또 속찬(續纂)을 하기는 했으나 미처 완성하지 못했으므로, 그의 아들이 그 초고(草稿)를 인하여 지금의 속본(續本)을 집성한 것입니다. 그러나 원초고(原草稿)의 본래 면목이 아니고 또 공가(公家)의 문서(文書)를 많이 취득하지 못하였으므로, 비록 권질(卷帙)은 백 권이 넘으나 전혀 모양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것대로 따라서 속찬을 한다면 끝내 무슨 꼴이 되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총재(總裁)가 스스로 주장을 하고 있는데, 누가 이것을 나누어 편찬한단 말입니까. 비록 유자현(劉子玄)의 식견과 마귀여(馬貴與)ㆍ정어중(鄭漁仲)의 재량이 있다 하더라도 한 사람이 혼자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 고조우(顧祖禹)ㆍ황남뢰(黃南雷)ㆍ만사동(萬斯同) 같은 사람이 몇이나 있을는지는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또 만일 다시 구본(舊本)처럼 아무런 재량(裁量)도 없이 거칠고 잡스럽게 만들 것이라면 차라리 속찬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우리 집에 이 책이 있기 때문에 그 잘못된 곳을 퍽 잘 압니다. 지리고(地理考)의 경우는 의당 일일이 바로잡아서 다시 옛날의 잘못된 것을 답습해서는 안 될 것이거니와, 예고(禮考)ㆍ직관고(職官考) 등의 재정(裁定)할 것은 서너 가지로 논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더욱 빨리 고쳐야 할 것은 인가(人家)의 시조(始祖)가 처음 탄생할 때의 신화적(神化的)인 자취를 물이고(物異考) 속에 끼워넣은 것인데, 매양 이것을 열람할 적마다 두렵고 경탄스러움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어찌 이런 일들이 있겠습니까.

각사등록(各司謄錄)은 비록 보잘것은 없으나, 이것 말고는 다른 것이 없으므로 부득불 그 절요(切要)한 것은 수집해 넣어야 할 것입니다. 정조 때에 각사등록을 초집(抄輯)하여 일부서(一部書)로 만든 것이 대내(大內)에 있었으므로, 경인년(1830, 순조 30) 이전에 일찍이 약간 권을 보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책이 소각(燒却)되지 않고 아직도 잘 보관되어 있는지를 물어볼 데가 없습니다.

 

번박(番舶)들이 남북으로 출몰(出沒)하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 걱정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이들이 1년 중에 출항(出港)하는 선척(船隻)만도 만 척에 가까운 숫자가 천하를 두루 떠돌아다니는데, 중국에서는 모두 이들을 대수롭잖게 보아 버립니다.

최근 영이(英夷) 사건의 경우는 특히 별도의 사단(事端)이 있는 것을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누(累)가 미칠 것이 못 됩니다. 또 그 10여 척의 배가 과연 영이(英夷)입니까, 불란서(佛蘭西)입니까, 반아(班呀)입니까, 포도아(葡萄亞)입니까, 단응(單鷹)입니까, 쌍응(雙鷹)입니까? 어느 나라 배인지는 분간할 수 없으나, 결코 한 나라의 배는 아닐 것입니다. 설령 분간이 된다 하더라도, 정처 없이 언뜻 재빠르게 가버린 것을 또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사정을 물어 보지 못한 것을 걱정스럽고 답답하게 여기는 것은 혹 괴이할 것이 없을 듯도 합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외국의 수천 수백 척에 대해서도 모두 하나하나 사정을 물었습니까? 이 또한 걱정할 것이 못 됩니다. 또 이 배들이 이렇게 왔다 간 사실을 이제야 비로소 알아차린 것입니다.

지난번 영이가 남겨둔 지도(地圖)를 가지고 살펴보건대, 그 지도를 모출(摸出)한 것이 최근인지, 오래 전인지의 여하는 모르겠으나, 대개 최근에 만든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논할 것도 없이 우선 우리나라만 가지고 보더라도, 중국과 일본과의 국경(國境)이 이와 같이 매우 상세하여 남회인(南懷仁)의 곤여전도(坤輿全圖)에 비할 바가 아니요, 또 중국의 황여전도(皇輿全圖)와도 비교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만일 우리 국경의 동서 남북을 수삼 차례 돌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토록 세밀히 그려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우리 국경을 돌던 때가 그 어느 해, 어느 때인지를 모르는 실정이고 보면, 우리나라는 어찌하여 전혀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했단 말입니까. 일소(一笑)를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영이에게 이 한 지도가 있고 보면, 불랑(佛朗)ㆍ여송(呂宋)ㆍ미리(米利) 등처에서도 각기 스스로 추측하여 각각 하나의 지도를 만들었을 것이요, 반드시 이 한 영이의 지도를 가지고 서로 전하여 모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각기 스스로 추측할 때에 그 국경을 돈 것이 또 어찌 한두 차례에만 그칠 뿐이겠습니까. 이는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사실을 전연 모르고 있다가 이제야 우연히 한번 그들의 배가 왕래 출몰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어 눈을 번쩍 뜬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희(正喜)는 당초에 그 지도를 보고 크게 놀란 나머지 지금까지도 늘 망연자실하는 형편입니다. 지금 이 남북으로 언뜻 나타난 것을 저 지도에 비교한다면 도리어 하찮은 일 일 뿐입니다. 또 우리나라 사람의 짧은 안목으로는 우리나라의 북쪽 경계를 지구(地球)의 끝으로 여기어, 여기에서 더 이상은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약간 북동쪽으로 비스듬히 나가서 하이(蝦夷)의 외계(外界)로 나가면 이곳이 바로 미리견(米利堅)과 멀지 않은데, 미리견이 바로 요즘에 번박(番舶)들이 모여드는 곳이고 보면, 이 배들도 미리견을 왕래하는 배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그러니 그 배들이 우리나라와 일본 등 취미 없는 곳에 생각을 두고 내왕하지 않는다는 것은 또 매우 명확하여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이 만일 우리에게 관심이 있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한 가지 소식도 동정도 없겠습니까. 이것은 깊이 근심할 것이 못 됩니다. 또 오늘날은 아직 근심거리가 없으나 먼 장래를 염려하는 뜻으로 말하자면, 이는 바로 먼 장래 사람들의 일이지,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이 아닌 듯합니다.

나의 어리석고 옅은 견식으로는 별도로 깊이 근심되는 일이 있으니, 그것은 저 번박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공연히 소동을 벌여 심지어 농사를 폐하고 피해 도망을 가는 지경에 이른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위로는 방백(方伯)에서부터 아래로는 주수(州倅)ㆍ현서(縣胥)에 이르기까지 모두 함께 소동만 벌일 뿐, 누구 하나도 백성들을 존무하고 안집시킬 뜻이 없어 그들을 뿔뿔이 흩어지도록 내버려 두고서, 그들이 떠돌다 굶어 죽는 일이 바로 앞에 닥쳤는데도 그것은 돌볼 줄을 모르고 한갓 번박에만 탓을 돌리어 마치 ‘내 잘못이 아니라, 흉년이 든 때문이다.’는 말과 같이 하고 있으니, 나는 계손(季孫) 근심거리가 전유(顓臾) 있지 않고 소장(蕭墻) 안에 있을까가 염려됩니다.

지금 당장 급급히 백성들의 소동 없애기를 도모하는 계책이 바로 제일가는 계책인데, 묘당(廟堂)에는 여기에 생각이 미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백성들에게 소동이 없어진다면 비록 천만 척의 번박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말을 하자니 매우 통탄스러워서, 가생(賈生) 하나의 장태식(長太息)에 그칠 뿐이 아닙니다.

 

영이(英夷)가 중국의 걱정거리가 된 것은 실로 형언하기 어려운 근심거리입니다. 옛날 황명(皇明) 가정(嘉靖) 연간에 왜구(倭寇)들이 연해(沿海)로부터 침략하여 내지(內地)에까지 들어옴으로써 강소(江蘇)ㆍ절강(浙江) 사이에 소요가 크게 일어나자, 척수(戚帥) 등 제인(諸人)이 노숙한 장수와 중요한 군대로 몇 년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둔수(屯戍)하였습니다. 특히 척수가 저술한 《기효신서(紀效新書)》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지은 것이고, 당형천(唐荊川)ㆍ모원의(茅元儀) 등 여러 명사들 또한 오로지 왜구에 대비하기 위한 문자(文字)만을 저술하였는데, 지금까지 통행되고 있는 《무비지(武備志)》 등의 책은 바로 웅장한 담설이요 책략입니다.

그런데 이때를 당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있는 것조차도 몰랐다가, 임진왜란 이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척공(戚公)의 글을 얻어 보고서 화포(火砲)의 양식을 대략 알게 되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마는, 오늘날 중국이 곤경을 당하는 것이 지난 시절에 비교하면 그 천심과 경중이 또 어떻겠습니까? 전해 들은 옛 세상으로 본다면 지상(紙上)의 공언(空言)에 불과하므로, 비록 수수(濉水)ㆍ거록(巨鹿) 전쟁에 대해서도 족히 놀라 소요될 것이 없거니와, 현재 눈으로 보는 세상으로 말한다면 역관(曆官)이 직접 요동(遼東)과 심양(瀋陽) 사이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들을 보았기 때문에 놀라 소요됨이 없을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이끌려 동요될 우려가 없습니다.

건륭(乾隆) 중말기(中末期) 이후로는 해적(海賊)들이 거의 침입하지 않은 해가 없어 그것이 가경(嘉慶) 초기에까지 이르렀는데, 절강(浙江)ㆍ민중(閩中)의 적(賊)과 봉(鳳)ㆍ미(尾)ㆍ수(水)ㆍ오(澳) 등지의 적들이 혹은 안남(安南)과 연락하기도 하고, 혹은 대만(臺灣)과 연결하기도 하여 건륭제(乾隆帝)에 대한 와탑(臥榻) 밖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우리나라에서야 어찌 일찍이 그런 말을 듣기나 하였습니까. 요즘에 혹 중국의 문자로 인하여 비로소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얕은 소견은 이렇습니다. 지금 이 일은 그렇게 놀랄 것이 없겠으나, 이것을 인하여 중국 화란(禍亂)의 조짐을 서서히 자세하게 살피는 일이 실로 오늘날에 있는데, 사태가 갑자기 크게 터지는 그 한 가지 일이 영이(英夷)에 대한 걱정거리보다 더 심한 점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걱정거리가 전유(顓臾)에 있지 않고 소장(蕭墻) 안에 있는 것이 마치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니, 이것이 곧 속국(屬國)으로서 스스로 편할 수 없는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