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원(元)나라 때 제주(濟州)총관부(摠管府)를 설치

2022. 9. 7. 20:35고대사

運江墟 本文

在廣西𨿅容縣東南。濱臨柳江。隔江與象縣馬平二縣接界。

柳州 本文

唐置昆州。亦曰南昆州。又改爲柳州。尋曰龍城郡。又改爲柳州。治馬平。卽今廣西馬平縣治。宋曰柳州龍城郡。南宋治柳城。在今廣西柳城縣西南。明復移治馬平。元曰柳州路。明爲柳州府。清因之。民國廢。唐柳宗元嘗爲柳州刺史。世稱宗元曰柳柳州

運江

상주는 지세가 아주 복잡하여 도립하는 군산과 구릉지구로 산간사이로 소면적의 충적평원이 생겨나 강의 島嶼가 많고 물가에 촌락이 형성되었다.

수운이 주요한 교통통로로 12조의 강이 서로 엮여 흘러가는데 분지중앙의 柳江에 모인후 서강으로 흘러간다.

이후 주강으로 합해져 광동성에서 바다로 드는데 양광수운의 추뉴로 運江古鎭에 이르면 평정을 유지한다.

고구상포가 들어선 석판로변에는 지난 휘황한 시절을 말해주고 역사상 운강은 상주의 중요한 수륙전운지로 성당시기부터 민국시기에는 1300년간 운강은 배로 가득한 성황을 누렸다.

692년 무주 장수원년 조정은 영남지구의 행정관리강화로 무칙천은 계류운하를 확장하게 하고 계림과 류주로 통하게 만든다.

폭이 15미터에 달하는 계류운하는 계림의 회선진 사자암에서 청강을 거쳐 류강으로 연결하고 리강과 류강의 양대수계를 결합한 것이다.

계림과 류주의 수운항정은 150키로를 단축하여 상주는 운하서단으로 위로는 호남 귀주에 남으로는 양광지구로 연결된다.

이후 운강항운은 천년간 번성하고 청건륭 22년 1575년 조정은 흠정으로 광주를 유일한 대외통상구로 지정하자 월동의 상인들이 서강 류강을 거슬러 광서의 특산을 구매하려 몰려든다.

원목 약재 농산품등으로 대량의 화물은 상주나루에서 중간참으로 광주로 향하고 1930-50년대에 湘桂鐵道가 낙성되자 계류운하의 경제적가치는 사라져 운강고진은 침적하고 만다.

이곳은 3일장인 대집이 열려 고상부의 최후의 여운을 남겨 신세기후 현성으로 이주를 시작하고 한가한 곳으로 변한다.

이제 관광지로 다시 부각되는데 고대건축의 창상연륜과 운하를 따라 강중의 고진운치를 즐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42 42권 서한집Ⅰ > 부록 > 趙素昻日記

제목 趙素昻日記

趙素昻日記

 1887년 丁亥

 1894년 甲午

 1912년 壬子 中華民國 元年이다.

 1913년 癸丑 袁世凱가 大總統이 되었다.

 1914년 甲寅 國民黨을 개조하여 革命黨으로 만들었다.

 1917년 丁巳 大同團結을 선언하였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성립되었다.

  806년 元和(唐 憲宗의 연호) 元年이다.

  713년 渤海가 나라를 세운 해이다. 唐나라 玄宗 때이다.

  666년 淵蓋蘇文이 죽었다. 乾封 元年이다.

  611년 陏나라와 高句麗가 전쟁을 시작하였다.

  880년 廣明 元年에 黃巢가 서울(長安)을 함락시켰다.

 양력 10월 28일 檀君 탄신일이다.

 양력 10월 29일 國文(한글) 반포일이다.

 132명 黨員 3명

  50명 非主派

  32명

 132명

  82명

  50명

 義理에 分한 勇氣.

 活潑.

 永久히 성실하자.

 民族을 위해 犧牲하자.

 自他에 공평하자.

 公益에 勤勞 團結하자.

 創造에 活潑하자.

 亡國羞恥猶未雪 망국의 수치, 아직 다 씻어내지 못했는데

 無人顧後復誰依 사람 없어 뒤돌아보니 다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蜀山落日筇環墓 蜀山의 석양에 지팡이 짚고 무덤을 도는데

 綦水悽風淚濕衣 綦水의 처량한 바람, 흘리는 눈물에 옷 젖네

 饒苓匝子範周(의미불명).

 忠-族

 孝-親

 信-人

 勇-戰

 慈-動物, 衆生

 1. ▲ ▲ ▲ ▲ ▲ ▲ ▲ ▲ ▲ ▲ ▲ ▲ ▲ ▲ ▲ 15

 2. ▲ ▲ ▲ ▲ ▲ ▲ ▲ ▲ ▲ ▲ ▲ ▲ ▲ ▲ ▲ 15 45 simple

 3. ▲ ▲ ▲ ▲ ▲ ▲ ▲ ▲ ▲ ▲ ▲ ▲ ▲ ▲ ▲ 15

 1. 2, 3, 4, 5 3, 4, 5, 6 2, 3, 4, 5 4, 5, 6

 2. 3, 4, 5, 6 3, 4, 5, 6 2, 3, 4, 5 4, 5, 6 65

 3. 3 5, 6, 7, 8, 9 4, 5 3, 4

 丁丑年(1937)

 2월 9일 高 동지가 입원하였다.

 2월 13일 金 동지가 입원하였다.

 2월 15일 상오 5시 50분 김 동지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후 3시에 입관하고 6시에 무덤을 만들었다.

 2월 12일 金昌煥 동지가 세상을 떠났다.

 2월 1일 오후 세 동지가 들어왔다.

 丁丑年(1937)

 11월 21일 杭州의 일행이 길을 떠나서 28일에 南昌에 도착하였다.

 11월 23일 밤에 南京에서 부두(埠)에 도착하여 머물렀다.

 11월 24일 상오 민간 선박에 올랐고, 하오에 下關에 도착하였다.

 11월 25일 頭關에 도착하였다.

 11월 26일 頭關에 머물렀다.

 11월 27일 頭關에서 和州로 갔다. 하루를 머물렀다.

 11월 28일 上午 7시에 자동차로 和州를 출발하여 하오 5시에 蕪湖에 도착하였다.

 11월 29일 자동차로 蕪湖를 출발하여 오후에 瀂港에 도착하였다.

 11월 30일 瀂港에 머물렀다.

 12월 1일 瀂港에 머물렀다.

 12월 2일 새벽 5시에 瀂港을 출발하여 하오 7시에 和悅州에 도착하였다. 셋째(趙鏞周)가 불행히도 죽었다.

 12월 3일 10시에 자동차로 和悅州를 출발하여 하오 5시에 貴池에 도착하였다.

 12월 4일 7시에 자동차로 貴池를 출발하여 하오 6시에 安慶에 도착하였다.

 12월 5일 하오 10시에 安慶에서 招商局 소속 증기선 江順號를 탔다.

 12월 6일 밤 9시에 漢口에 도착하였다.

 12월 7일 漢口에 머물렀다.

 12월 8일 漢口에 머물렀다.

 12월 9일 漢口에서 새벽녘에 鴻輝라는 작은 증기선에 올랐다.

 12월 11일 상오 12시에 長沙에 도착하였다.

 음력 동짓달 23일 두 분(부모님)이 장사에 도착하셨다.

 戊寅年(1938)

  1월 24일 청년회에 초대되었다.

  4월 8일(음력) 불행한 일註 86_0이 있었다.

  7월 16일 전보를 쳐서 안부를 전하였다.

 10월 일 『救亡日報』에 오고 감이 기록되었다.

 10월 일 救亡報 및 文化抗敵後援會에 나아가 참석하였다.

 10월 17일 廣市에서 출발하여 증기선에 탑승하였다.

 10월 18일 하오 5시 高要에 도착하였다.

 10월(음력 8월 27일) 七星岩에 도착해 풍경을 구경하였다.

 10월 22일 高要에서 민간 선박을 타고 출발하였다.

 10월 28일 桂平에 도착하였다.

 11월 16일 桂平을 출발하였다.

 11월 30일 柳州에 도착하였다. 北大路 67호에 방을 정하였다.

 12월

 藤峽東西山最秀 藤峽의 동서쪽의 산들은 가장 빼어나고

 石龍上下水偏淸 石龍의 상하류의 물은 매우 맑구나

 스스로 읊었다.

 桂平에는 西山이 있는데, 伏龍이라고도 하고 思靈山이라고도 한다. 북쪽에는 五指山이 있고, 西江은 항로가 불편하고 돌도 많고 급류이다. 날씨는 따뜻하기가 여름과 같다. 병력도 많고 기술자도 많았다.

 11월 16일 오후 4시 桂平을 출발하여 6시경 展灘에 이르러 좌초되어 유숙하였다.

 11월 17일 아침에 船夫가 큰소리 지르며 배를 밀었으나 배는 움직이지 않았다. 기암괴석들 중에 넓적한 돌이 있었는데 큰 것은 천 명이 앉을 만하였다. 10시에 비로소 기선을 타고 출발하여 11시에 白灘에 도착하였다.

 聞隨黔江百八灘 黔江을 따라 108개의 여울이 있다고 들었는데

 我今纔度兩三關 나는 지금 겨우 두 세 개의 關만을 건넜네.

 難關到處多奇趣 도처에 지나기 어려운 곳에 기이한 정취가 많아서

 萬疊靑山一目看 겹겹이 포개진 靑山을 한 눈에 볼 수 있네.

 白灘은 그 모양이 구불구불하였다.

 11월 18일 6시에 勒馬津에 이르렀는데 小金剛이 볼만하였다. 느지막하게 石龍으로 향하여 도착하였다.

 11월 19일 石龍에 머물렀다.

 11월 20일 하오 4시 20분에 石龍을 출발하였다.

 11월 21일 상오 7시 얕은 여울에 좌초되었다. 하오 5시에 또 출발하였지만 역시 저녁에 얕은 여울에 좌초되었다. 네 사람이 걸어서 柳州에 도착하였다.

 11월 22일 음력 10월 1일 運江에 도착하였다. 그 지방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강 언덕의 나지막한 산은 바로 薛仁貴가 만든 淵蓋蘇文의 墓라고 한다.

 11월 23일 6시 계자(鷄口㓼)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11월 24일 開天節이다. 담배를 끊었다.

 11월 25일 큰 비가 왔다.

 11월 26일

 11월 27일 10여 명이 柳州로 나아갔다.

 11월 28일 큰 물고기를 샀다.

 11월 29일 洛垢에서 折□로 출발하였다.

 11월 30일 柳州에 도착하였다. 6시에 (방을) 北大路 67호에 정하였다.

 12월 1일 90元.

 12월 2일 7元으로 쌀 50斤을 샀다. 땔나무 100근은 1元 9角이었다.

 12월 3일

 12월 4일 雅儒村을 방문하였다.

 12월 5일 (柳州市의) 河南에 대공습이 있었다.

 12월 6일 강에 이르렀다.

 12월 7일 대피하였다.

 12월 8일 대피하였다.

 12월 9일 대피하였다.

 12월 10일 담배를 桂幣(광서성 화폐) 1원에 샀다.대피하였다. 大洋 10元을 방세로 줬다.

 12월 11일 일요일이다. 대피하였다. 쌀 백 근을 桂幣 15元에 샀다.

 12월 17일 도서관에서 柳州郡誌를 읽었다. 날이 따뜻하였다.

 12월 18일 鵲山을 방문해서 사방을 바라보았는데 매우 아름다웠다(尹公).

 12월 19일 땔나무 60근을 桂幣 1원 3각에 샀다.

 12월 20일 時元과 仁濟註 143_0가 와서 머물렀다.

 12월 23일 땔나무를 샀다. 2원 4각.

 

권 제6 신라본기 제6 > 문무왕(文武王) > 8년 9월 21일 고구려왕이 항복하다(0668년 09월 21일(음))

고구려왕이 항복하다 ( 668 0921() )

〔8년(668)〕 9월 21일에 대군(大軍)[당나라 군대]과 합하여 평양(平壤)을 포위하였다. 고구려왕이 먼저 천남산(泉男産)註 001 등을 보내어 영공(英公)에게 나아가 항복을 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왕 보장(寳臧)註 002과 왕자 복남(福男)註 003·덕남(德男)註 004 및 대신 등 20여 만 명을 데리고 당나라로 돌아갔다.註 005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助州)註 006는 영공을 따라 돌아갔으며, 인태(仁泰)·의복(義福)·수세(藪世)·천광(天光)·흥원(興元)도 따라 갔다. 애초에 대군이 고구려를 평정하자 왕은 한성(漢城)을 나서 평양을 향하였는데, 힐차양(肹次壤)註 008에 다다라서 당나라의 여러 장수들이 이미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한성(漢城)에 이르렀다.

註 008

힐차양(肹次壤): 정확한 위치를 비정하기 어렵다.

 

고구려 유민 관련 금석문 > 묘지명 > 천남산 묘지명 > 해제

자료명 천남산 묘지명 (泉男産 墓誌銘)
소재지/출토지 북경대학(北京大學) 새극륵고고여예술박물관(賽克勒考古與藝術博物館)
하남성(河南省) 낙양시(洛陽市) 맹진현(孟津縣)
연대 702년(武周 長安 2년)
크기 지석: 가로·세로 각각 75㎝×75㎝, 개석: 가로·세로 각각 76㎝×76㎝
서체 및 재질 楷書
미상
주제분류 당|묘지명
찬자 / 서자 / 각자 미상 / 미상 / 미상
집필자 안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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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 국역문

「천남산묘지」는 1923년 4월에 하남성(河南省) 낙양시(洛陽市) 동북쪽 20리 지점의 맹진현(孟津縣) 평락진(平樂鎭) 유파촌(劉坡村)에서 출토되었다. 표자총(豹子冢)이라고 불리는 무덤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출토 과정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지석과 개석이 함께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현재는 북경대학(北京大學) 새극륵고고여예술박물관(賽克勒考古與藝術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지석은 가로·세로 각각 75㎝×75㎝이며, 개석은 가로·세로 각각 76㎝×76㎝의 크기이다. 지석은 총 28행에 745자가 새겨져 있으며, 지문의 지은이와 글쓴이, 새긴 사람은 모두 기재되지 않았다. 지석의 글자체는 해서체이며, 비면 상태가 좋아서 대부분의 글자들을 판독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
「천남산묘지」에 대해서는 1920년에 나이토 토라지로(內藤虎次郎)가 소개한 적 있으며(內藤虎次郎), 나진옥(羅振玉) 역시 「당대해동번벌지존(唐代海東藩閥誌存)」에서 지석의 판독문을 수록한 바 있다(羅振玉, 11529~11530쪽). 이후 국내에서도 묘지의 판독과 역주뿐만 아니라, 이를 통한 연개소문 일가의 계보 복원, 그리고 당으로의 투항 과정과 당에서의 활동 등에 대한 여러 연구들이 진행되기도 했다.
천남산의 부친은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를 역임한 연개소문(淵蓋蘇文)이다. 연개소문의 장남이었던 남생(男生)이 부친의 뒤를 이어 막지리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의 일을 두 동생인 남건(男建)과 남산에게 일임한 뒤 지방의 여러 성들을 순방하러 떠났다. 이때 두 동생이 권력을 장악하고는 남생의 귀환을 가로막음으로써 그가 당으로 항복하게 되는 중요한 빌미를 제공했다. 고구려 멸망 후 남건은 당나라에 끌려가서 금주(黔州)에 유배되었으나, 남산은 용서받아 당의 조정에서 관직생활을 할 수 있었다.
다만 천남산은 형인 남생이나 고질(高質)‧고자(高慈) 부자 등 다른 고위급 고구려인들처럼 외부의 군사 원정 혹은 고구려 고지(故地)의 통치 등과 관련해 공적을 쌓았다는 내용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천남산은 63세인 대족(大足) 원년(701) 3월 27일에 사저에서 사망했으며, 아들인 천광부(泉光富)의 이름이 지문의 말미에 기록되어 있다. 이 묘지는 천남산이 당에 들어간 뒤의 활동에 대해 기록한 거의 유일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통해 천남산이 당에 들어간 뒤에 생활한 모습과 역임한 관직들을 살필 수 있다. 그 외에도 연개소문 일가의 가계(家系) 기록과 함께, 고구려에서 유력한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서 역임했던 관직들과 그 승진 과정 등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들을 제공한다.

 

고구려 유민 관련 금석문 > 묘지명 > 천남생 묘지명 > 해제

자료명 천남생 묘지명 (泉男生 墓誌銘)
소재지/출토지 하남성(河南省) 정주시(鄭州市) 하남박물원(河南博物院)
하남성(河南城) 낙양시(洛陽市) 맹진현(孟津縣) 송장진(送庄鎭) 동산두촌(東山頭村)
연대 의봉(儀鳳) 4년(679)
크기 가로 91㎝ × 세로 91㎝
서체 및 재질 개석: 전서(篆書), 지석: 해서(楷書)
청석
주제분류 당|묘지명
찬자 / 서자 / 각자 왕덕진(王德眞) / 구양통(歐陽通) / 미상
집필자 안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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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하남성(河南城) 낙양시(洛陽市)의 저명한 금석학자이자 탁본 수장가였던 곽옥당(郭玉堂)의 증언에 의하면, 「천남생묘지」는 1922년 1월에 낙양시 맹진현(孟津縣) 송장진(送庄鎭) 동산두촌(東山頭村)의 남쪽에 있는 3기의 무덤들 중 가운데에 있는 무덤에서 출토되었다(郭培育·郭培智, 154~155쪽). 출토 이후 하남성 정부가 있던 개봉(開封)으로 옮겨졌으며, 하남금석록편찬처(河南金石錄編纂處)에서 잠시 보관하였다가 얼마 후에 하남도서관(河南圖書館)으로 옮겨졌다. 그 뒤 어느 시기에 개봉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가, 최종적으로 1998년에 정저우의 하남박물원(河南博物院)으로 옮겨져서 현재까지 보관되고 있다(김영관, 10쪽).
묘지명은 개석과 지석이 모두 남아있으며 상태가 양호하다. 묘지명의 크기는 실물에 대한 정확한 실측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나, 개석이 가로와 세로가 각각 91cm, 두께는 12cm이며, 지석의 경우 가로와 세로가 각각 91cm, 두께는 23cm로 판단된다(김영관, 15쪽).
개석은 녹정형(盝頂形)이며, 윗면에는 가로와 세로 3행씩 2중계선을 만들고 그 안에 음각으로 3행에 걸쳐 ‘大唐故特進泉君墓誌’의 총9자를 새겨 넣었다. 글자체는 전서(篆書)이다. 또한 지석에는 가로와 세로로 계선을 그어 46행을 만들었다. 지문의 글자체는 해서이며, 제명(題銘)에 이어 찬자(撰者)와 서자(書者), 가계(家系) 기록, 묘주의 활동과 업적, 사망과 장례, 명문의 순서로 기술되어 있다. 전체 글자 수는 2,093자에 달한다.
묘지명의 찬자는 중서시랑(中書侍郞) 겸 검교상왕부사마(檢校相王府司馬)인 왕덕진(王德眞)이며, 서자는 당대의 저명한 서예가인 구양순(歐陽詢)의 아들 구양통(歐陽通)이다. 천남생은 그는 고구려 말기의 최고 집정자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맏아들로서 연개소문의 사후 그 지위를 대신하였지만, 수도를 비운 사이에 두 동생인 남건(男建)과 남산(男産)에 의해 권력을 빼앗기게 되었고, 666년 6월에 아들인 헌성과 함께 당나라로 투항해 들어갔다. 이후 그는 당의 고구려 원정에서 향도(嚮導) 노릇을 했으며, 677년에는 안동도호부로 파견되어 州縣의 개편, 유민 안무, 농경지 획정 등의 임무를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의봉(儀鳳) 4년(679) 정월 29일에 안동도호부의 관사에서 죽었고, 같은 해 12월 26일에 낙양(洛陽) 북쪽 망산에 묻혔다고 전한다.
천남생에 대해서는 『자치통감(資治通鑑)』, 『삼국사기(三國史記)』 등 여러 사서에 기록이 남아있으며, 특히 『신당서(新唐書)』에 그의 열전이 남아있다. 다만 천남생묘지는 그동안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없었던 그의 가문 계통에 대한 자세한 기록과 더불어 당으로의 투항과정, 당에서의 활동과 죽음 등에 대한 여러 새로운 정보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고구려 유민 관련 금석문 > 묘지명 > 천비 묘지명 > 해제

자료명 천비 묘지명 (泉毖 墓誌銘)
소재지/출토지 낙양박물관(洛陽博物館)
하남성(河南省) 낙양시(洛陽市) 맹진현(孟津縣) 동산두촌(東山頭村) 일대
연대 733년(唐 開元 21년)
크기 가로·세로 각각 60㎝×60㎝
서체 및 재질 楷書
미상
주제분류 당|묘지명
찬자 / 서자 / 각자 천은(泉隱) / 미상 / 미상
집필자 안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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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시(洛陽市) 맹진현(孟津縣) 동산두천(東山頭村)의 남쪽에 3기의 토총이 나란히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서쪽의 무덤이 천비(泉毖)의 묘로 추정된다. 천비의 묘지는 1926년 5월에 출토되었으며 1937년에 나진옥(羅振玉)이 그 탁본을 구하여 「당대해동번벌지존(唐代海東藩閥誌存)」에 판독문을 싣기도 했다. 천비의 고조는 고구려 연개소문(淵蓋蘇文)이며, 증조는 천남생(泉男生), 조부는 천헌성(泉獻誠)이고, 부친은 천은(泉隱)이다. 천비의 묘지명은 한동안 발견되지 않았으나, 2000년대 중반 이후 중국에서 관련 연구가 진행되었고,註 001 국내 연구서에서도 묘지명의 탁본 제시와 판독․역주가 정밀하게 제시되면서註 002 연구의 진전이 이어졌다. 천비 묘지의 탁본은 일부 박락(剝落)된 곳이 있으나 1~2글자를 제외하고는 판독하는데 문제가 없다. 현재 묘지석은 낙양박물관(洛陽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묘지석의 크기는 탁본을 통해 추정해보면 가로․세로 각각 60㎝×60㎝ 정도이다.
천비에 대한 별도의 문헌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묘지명에 의거하면 그는 자(字)가 맹견(孟堅)이며, 본관은 경조(京兆) 만년인(萬年人)이다. 蔭補을 통해 겨우 2세에 치천현개국남(淄川縣開國男)으로 봉해졌으며, 이후 효기위(驍騎尉)를 제수받고 태묘제랑(太廟齊郞)에 보임되었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 시의 국왕이었던 보장왕(古藏)의 외손인 왕위(王暐)의 사위가 되기도 했다. 729년(開元 17) 9월 4일에 경조부(京兆府) 흥안리(興寧里)의 사저에서 불과 2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 후 4년째인 733년(開元 21) 10월 16일에 하남부(河南府) 낙양현(洛陽縣)의 망산 선조 묘역에 옮겨져 묻혔다고 한다.
천비의 묘지명은 그의 묘가 최종 이장되었을 때 제작된 것으로 부친인 천은이 찬술하였다고 전한다. 천은은 천헌성의 묘지명에 현은(玄隱)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천비의 묘지명에는 은(隱)으로만 기재되었다. 그가 아들의 묘지를 작성하게 된 이유는 천비가 2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일 것이다. 천비의 묘지명은 고구려 말기 최고의 권력자였던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하여 후손 4대까지의 계보와 그들의 활동을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 유민의 일족인 이들이 당 조정에서 주로 어떤 직무를 담당해왔고, 어떤 집안과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고자 했는지 등에 대한 정보들을 살필 수 있다

 

고구려 유민 관련 금석문 > 묘지명 > 천헌성 묘지명 > 국역문

자료명 천헌성 묘지명 (泉獻誠 墓誌銘)
소재지/출토지 미상
중국 하남성(河南城) 낙양시(洛陽市) 북쪽 망산(邙山)
연대 대족(大足) 원년(701)
크기 대략 가로 94㎝ × 세로 96㎝
서체 및 재질 미상
미상
주제분류 당|묘지명
찬자 / 서자 / 각자 양유충(梁惟忠) / 미상 / 미상
역주자 안정준
판독문
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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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大周)의 고(故)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우우림위상하(右羽林衛上下), 상주국(上柱國), 변국공(卞國公)으로 우우림위대장군(右羽林衛大將軍)에 추증된 천군(泉君)의 묘지명과 서(序).
조의대부(朝議大夫), 행문창선부원외랑(行文昌膳部員外郞) 호군(護軍)인 양유충(梁惟忠)이 찬술하였다.
군의 이름은 헌성(獻誠)이고 자도 헌성(獻誠)이며, 그 선조는 고구려국(高句驪國) 사람이다. 대저 큰 물결이 갈래를 이룸은 강의 후손이요, 등불을 비춘 후 이전보다 빛나게 됨은註 001 해의 자손이니,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울창하듯 자손이 번창하여 대대로 번국의 재상이 되었다. 증조는 대조(大祚)이며 본국에서 막리지(莫離之)에 임명되어 군사의 일을 관장했으니, 기세는 삼한(三韓)을 누르고, 명성은 오부(五部)에서 뛰어났다. 조부는 개금(蓋金)으로註 002 본국에서 태대대로(太大對盧)를 역임하며 군사의 일을 장악했으니, 아버지가 잇고, 아들이 계승하여 권력을 잡고 영예(榮譽)를 빛냈다. 부친 남생(男生)은 본국에서 태대막리지(太大莫離之)에 임명되었는데 무리를 이끌고 당에 귀순했으니, 당에서 특진(特進)에註 003 임명하고, 사지절요동대도독(使持節遼東大都督)註 004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註 005 검교우우림군(檢校右羽林軍)註 006 장내공봉(仗內供奉)註 007 상주국(上柱國)註 008 변국공(卞國公)을註 009 겸하게 하였으며, 병주(幷州)註 010·익주(益州)註 011 두 주의 대도독(大都督)을 추증하여 시호를 양(襄)이라 하였다. 지혜와 식견이 명석하고 과단성이 있었으며, 기틀과 성정이 밝고 뛰어났다. 마침 유약한 군왕이註 012 나라에 있었는데, 무도(無道)한 이들이 담장을 엿보았다. 남건(男建)과 남산(男產)이 함께 나쁜 일을 꾸며 서로 도우니, 남건은 첩치(捷菑)의註 013 화를 쌓았고, 남산은 공숙(共叔)의註 014 계략을 품었다. 양공(襄公)은 이 분란의 근원을註 015 보고서 오래 기다리지 않았으니, 나라가 흥하면 군자는 관직에 있지만, 나라가 망하면 어진 자는 떠나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위태로운 나라를 피해 머무르지 않았고, 당의 수도로 통하여 뵙기를 청하였으니, 이는 곤야(昆邪)가 무리를 이끌고 한에 항복한 즉 열후(列侯)에 봉해졌고,註 016 유여(由余)가 나라를 떠나 진(秦)에 귀순한 즉 빈객의 예로 우대받은 것과 같았다.註 017 공은 곧 양공의 적통 아들이다. 소맥(小貊)의 고향에서 태어나 일찍이 크게 성공할 쓰임을 가졌으며, 타고난 영예와 가문의 높음으로는 한 나라에서 가히 견줄 자가 없었으니,註 018 9살에 본번에서 선인의註 019 직위에 임명되었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잘 응대하니, 요우(遼右)에서註 020 그를 칭송하였다. 풍모와 몸가짐에註 021 아름다웠고, 말 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으며, 큰 도량과 출중한 재능은 그 깊은 근원을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처음에 양공이 외부로 부속한 고을들을 순시하러 나섰는데,註 022 공이 또한 따라갔다. 남산 등이 흉악한 짓을 저질렀을 때, 공의 나이는 겨우 16세였다. 창졸간에 재앙이 일어나자 의논하는 자들은 망설여 결행하지 않거나, 혹은 나가서 싸울 것을 권했으나, 계책에 따를 것이 없었다. 공은 손가락을 굽혀가며註 023 적을 헤아리고, 가벼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기고, 이에 양공에게 국내(國內)의 옛 도성에 의탁하여 유력자와 백성들을 안정시킬 것을 권하였다. 양공에게 말하기를, “지금 사신을 보내 중국에 입조하여 진심과 정성으로 갖추어 아뢰면, 나라에서 대인이 왔다는 것을 듣고 필시 흔쾌히 열어서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군사를 청하면 합쳐서 토벌한다면 이는 아주 안전하게 승리를 결정할 수 있는 계책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양공이 그러하다 여겨 무리의 장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헌성의 말이 심히 택할만하다.”라고 하였고, 그날 바로 수령인 염유(冉有) 등을 보내 〈당에〉 입조하게 하였다. 당 고종(高宗)은 손수 작성한 칙서로 위로하여 깨우치고, 곧 양공을 동도주인(東道主人)으로 삼고 아울러 대총관에 임명하였다. 공은 거취의 계책을 도모하고, 시비의 책략을 살핌에 잠시 동안을 넘지 않았고, 문득 안위를 헤아렸다. 그러므로 능히 서쪽에서 중국의 군사를 이끌어왔고, 동쪽에서 요동의 요사스러운 기운을 쓸어버렸으니, 양공이 집안을 지키고 나라를 보전한 것은 실로 공의 힘이었다. 이윽고 양공의 명을 받아서 경사(京師)에 나아가 은혜에 감사하니, 천자께서 특수한 예로 대우하여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에 임명하고, 자주색 관복과 금대(金帶)와 아울러 어마(御馬) 2필을 내려주었다. 함주(銜珠)와 패옥(佩玉)을 받은 것은 허저(許褚)의 영예와 동등하며,註 024 인수(印綬)와 반금(班金)을 받음은 또한 호한(呼韓)이 받은 것과註 025 같았다. 얼마 후 위위정경(衛尉正卿)으로 승진하니 가문은 쌓여진 공적에 기반했고, 벼슬은 강과 바다와 같았다. 의봉(儀鳳)註 026 4년(679)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註 027 슬퍼하고 몸을 상하게 함이 예를 넘어섰으며, 궁궐의 사신이 조문하였고, 도로에는 방문객이 서로 이어졌다. 조모는 공이 미음도 끊고 피눈물을 흘리므로 두려운 생각을 점차 더하여 매번 힘써 강권하였으나 듣지 않은 즉, 그를 위해 먹는 것을 중단했다. 공이 이로 말미암아 조금씩 먹고 마시는 것을 더하여서 조모를註 028 달랬다. 아끼고 기르는 것의 깊음은 이건(李虔)의註 029 조모만이 아니요, 효성과 감사함의 지극함이 어찌 정증(程曾)의註 030 효손(孝孫)에만 그치겠는가. 조로(調露)註 031 원년(679) 〈황제께서〉 9월에 탈상(脫喪)하라고 명하시니, 정양군토반대사(定襄軍討叛大使)에註 032 임명되었는데, 〈상중(喪中)이나〉 전쟁에 나가는 것을註 033 피할 수 없었으며, 공이 능히 사양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후〉 돌아오게 하여 공적을 기록하고 상주국을 수여하였다. 개요(開耀)註 034 2년(682)에 변국공과 식읍3천호의 봉작을 승계했으며, 제후의註 035 공훈을 높였고, 상으로 받은 땅의 과업(課業)을 전하였다. 영순(永淳)註 036 원년(682)에 조모의 상을 당하자 적통이었기 때문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광택(光宅)註 037 원년(684) 10월에 운휘장군(雲麾將軍),註 038 수우위대장군원외치동정원(守右衛大將軍員外置同正員)에註 039 제수되었고, 훈봉(勳封)은 예전과 같이 하였다. 또 같은 달 29일의 칙령을 받들어 우우림위상하(右羽林衛上下)에 임명되었으니, 심장과 척추 같은註 040 대신이었고, 발톱과 어금니처럼註 041 깊이 의지할만한 무인이었으니, 넓고 깊은 것은 덕과 은혜요, 빈틈없이 얽힌 것은 은혜와 권면함이었다. 수공(垂拱)註 042 2년(686) 3월에 칙을 받들어 신무군대총관(神武軍大摠管)에註 043 임명되어 제색병(諸色兵)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도적의 경계에 들어갔다. 공은 풍각(風角)을註 044 정묘하게 익혔고, 조정(鳥情)의註 045 점술에 깊이 통달했으니, 산천의 높고 낮은 형세와 들판의 고허(孤虛)의 기세에서 암암리에 검결(鈐決)에註 046 부합하지 않음이 없었고, 마음속의 생각에 융합되어 꿰뚫지 않음이 없었다. 만천(滿川)에 이르러 포위하자 적의 무리가 크게 달아났으니, 싸움에 능하면 진을 펼치지 않는다는 것이註 047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일 것이다. 수공(垂拱) 4년(688) 9월 칙을 받들어 용수도대총관(龍水道大摠管)에 임명되어 예주(豫州)의 반란을 토벌하게 하고, 채색비단 100단과 어마(御馬) 1필을 사여했다. 곧이어 적이 평정되었으므로 마침내 그만두었다. 천수(天授)註 048 원년(690) 9월에 좌위대장군원외치동정원(左衛大將軍員外置同正員)을註 049 제수하고 나머지는 예전과 같게 하였다. 천수 2년(691) 2월에 칙을 받들어 검교천추자내사(檢校天樞子來使)에註 050 임명되었으며 아울러 현무북문(玄武北門)에서 압운대의동등(押運大儀銅等)을 겸하였다. 일을 아직 마치기 전에 마침 역적(逆賊)인 내준신(來俊臣)이註 051 형벌과 옥사를 쥐고 농단하여 위세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이에 공의 처소에 은밀하게 와서 금백(金帛)과 보물을 요구하였으나, 공은 뇌물 주는 것을 싫어하여 교빙을 막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다른 죄로 무고를 당하여 비명에 죽고 말았으니, 이때 나이가 42세였다. 오호라, 손수(孫秀)가 석숭(石崇)의 재물을 탐하였고,註 052 부씨(符氏)가 왕가의 근심을 끼쳤구나. 곧이어 황제의 총명함이 밝게 비추고, 황제의 은택이註 053 아름답게 빛나니, 깊은 원한을 씻어내 죄가 없게 하였고, 조서를註 054 내려 포상하고 칭송하였다. 한의 황제가 조착(晁錯)을 죽인 것을 한스러워하여 크게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진의 황제가 마돈(馬敦)을 추증하며 삼가 영예와 총애를 더한 것과 같았다. 구시(久視)註 055 원년(700) 8월에 제를 내려 이르기를, “고 좌위대장군 우우림위상하 상주국 변국공인 천헌성은 멀리 번국의 땅에서 명망이 높았고, 관직의 반열에서註 056 총애를 입었다. 감정과 의지가 깊고 지극하였고, 도량과 품은 바가 온후하였으니, 발탁하여 가까이에註 057 거하게 하여, 황궁의 수비를 위임했다. 죄가 없는 사람을 무고하는 일이 갑자기 발생하여, 억울하게 형벌을 받고 진실을 궁구하지 못했는데, 세월이 훌쩍 지난 뒤에 비로소 상황과 행적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지난 일을 생각하니 진실로 깊이 슬프고 안타깝다. 포상하고 숭상하는 데는 미치지 못하겠으나 마땅히 영예를 더해야 할 것이다. 무덤이註 058 아직 온전하지 않으니, 마땅히 다시 점을 치고, 삼가 번잡한 예를 더하여 혼령을 위로하라. 우우림위대장군(右羽林衛大將軍)을註 059 추증하고 물품 100단과 장례일에 쓰일 비단 장막, 그리고 인력들을 하사하여라. 그 아들인 무기위(武騎尉)註 060 유성현개국남(柳城縣開國男)註 061 현은(玄隱)은 유격장군(游擊將軍)註 062 행좌옥검위우사계원외치동정원(行左玉鈐衛右司階員外置同正員)으로註 063 삼고, 훈봉(勳封)은 아울러 예전과 같게 하라.“라고 하였다. 포상이 대대로 이어진 것은 휴맹(眭孟)의 아들이 낭중(郞中)이 된 것과 같았고, 죽은 뒤에도 명예를 이어간 것은 수무(隨武)의 혼이 부활한 것과註 064 같았다. 아들은 현은(玄隱)·현일(玄逸)·현정(玄靜)이 있었는데, 부모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에 맨발로 서리를 밟듯 아파하였으니,註 065 가슴을 무너뜨리고 정신을 훼손할 정도였다. 세월이 흘러 구릉과 골짜기가 무너지고 바뀔 것을 두려워하여, 옛 묘역을 넓히고 새 봉분을 만들었다. 퉁소 소리가 슬프게 들리니, 예로부터 오늘이 어제로 바뀌지 않을 뿐이다. 논길 위에 휘날리는 깃발은 공중에서 아름답고, 성문 밖의 조문객은 어찌 저리 떠들썩한가. 대족(大足)註 066 원년(701) 세차 신축(辛丑) 2월 초하루가 갑신(甲辰)일인 달의 17일 경신에 망산의 조상 묘역에 장사지내니 예에 맞는 것이었다. 비옥한 교외의 들판이 금을 뿌린듯한 두둑에 가까이 이어졌고, 푸르고 울창한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돌을 쌓은 봉분에서 유래하는구나. 그 사(詞)에 이르기를.
바닷가의註 067 동쪽에 옛날에 주몽이 있었도다. 강을 건너 나라를 세우니 대대로 이어온 가업이 높고도 높구나. 높이고 숭상하여 가업을 이은 것은 해 뜨는 동방의註 068 자손들이로다. 자손들이 누구인가, 진실로 천씨로다. 위에서 전하고 아래에서 이어받아, 신령함을 잉태하니 복을 낳았구나. 돌아가신 아버지에게註 069 권하여 위태로운 나라에 발을 딛지 않았도다. 이에 번신으로 천자에게 와서 조회하였구나. 저쪽 오랑캐의 습속을註 070 버리고 이곳 중국에서 노닐었도다. 혁혁하게 빛남은 조정의 전장(典章)이요, 뚜렷하고 분명함은 황제의 은덕이로다.註 071 가르침을 마시고 교화에 목욕했으며, 어짊에 의지하고 모범을 받들었구나. 피리를 늘어놓고 쇠북을 치며 놀고, 수레를 타고 다니고 잘 차려진 식사를 하며 생활하였도다.註 072 공은 선조의 훌륭한 덕을 본받는 것에註 073 힘쓰고 굳건히 하였다. 지식은 기미와 징조를 통할하였고, 이치는 캄캄한 앞날의 일을 조처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급작스러운 순간에도 깃발 아래에서 계책을 모의했다. 오랑캐를 타이르니 재앙이 물러가고 중국으로 돌아오니 공적이 떨쳤도다. 하해와 같은 지위는 발톱과 어금니같은 용맹함에 기인했구나. 나가고 들어옴에 광휘(光輝)가 빛났고, 빈번하게 내려짐은 총애와 하사함이었도다. 의젓하고 당당(堂堂)함은 풍채요, 화목하고 즐거움은 예와 의로다. 충과 효가 가문에 전해져 산과 강을 포상으로 받았구나. 높은 곳에서 거하면 충성하고, 밝은 데서 쓰일 때는 마음을 졸였도다. 은택이 베풀어짐이註 074 점점 커지니 진실로 필연이로다. 진실로 몸은 죽었다고 할지라도 능히 어짊으로 보전하였구나. 황제께서 후하게 추증하시니,註 075 큰 도에註 076 실로 위로받았도다. 낙양의 천맥(阡陌)이여,註 077 망산의 봉분이여. 답답한 심정으로 길이 이별하니, 마음속의 비애와 상실감을註 078 어찌 달랠까. 대대로 이어질 슬픔은 먼지처럼 소멸하고, 해마다 보이는 것은 아름드리나무일 것이로다. 이러한 까닭에 후하게 장례를 치른 연유를 생각하니 죽은 이를 보내는 일의 중요함을 알겠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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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선생 사적

동국통감〔東國通鑑〕

“삼가 아룁니다. 동해(東海) 밖에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마한(馬韓) 변한(弁韓) 진한(辰韓)이었는데,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요 진한은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를 침범하고 북쪽으로 유주(幽州)와 연주(燕州) 및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지역을 동요시키는 등 중국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황(隋皇 양제(隋煬帝)) 실각한 것도 요동(遼東) 정벌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정관(貞觀) 연간에 우리 태종황제가 직접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천토(天討)를 삼가 행하였는데, 고구려가 위엄을 두려워하여 강화를 청하자 문황(文皇 태종) 항복을 받고 대가(大駕) 돌렸습니다. 우리 무열대왕(武烈大王)이 견마(犬馬)의 성의를 가지고 한 지방의 환란을 평정하는 데에 조력하겠다고 청하면서 당나라에 들어가 조알(朝謁)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부터였습니다. 그 뒤에 고구려와 백제가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악행을 일삼자 무열이 입조(入朝)하여 향도(鄕導)가 되겠다고 청했습니다. 그리하여 고종황제(高宗皇帝) 현경(顯慶) 5년(660)에 소정방(蘇定方)에게 조칙을 내려 10도(道)의 강병(强兵)과 누선(樓船) 1만 척을 이끌고 가서 백제를 대파하게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그 지역에 부여도독부(扶餘都督府)를 설치하여 유민(遺民)을 안무(按撫)하고 중국 관원을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는데, 취미(臭味)가 같지 않은 까닭에 누차 이반의 보고가 올라오자, 마침내 그 사람들을 하남(河南)으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 고전번역서 > 약천집 > 약천집 제10권 > 소차 > 최종정보

그리고 요동의 경우에 있어서는 애당초 기자(箕子)가 봉지를 받은 국경으로 개원현(開原縣)은 바로 옛날의 부여국(夫餘國)으로 고구려 시조인 고주몽(高朱蒙)이 발상한 지역이며, 지금의 개평현(蓋平縣)은 바로 진한(辰韓)의 옛 국경으로 또한 우리 삼한(三韓)의 하나였습니다. 일찍이 고구려 전성기에는 모든 요동의 일대와 여진족들이 사는 곳이 대부분 모두 고구려의 국경 안에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이 때문에 해동의 강대국이 되었는데, 말엽에 이르러 군주와 신하가 도리를 잃어 땅은 수(隋) 나라와 당(唐) 나라에 빼앗겨 줄어들고 백성들은 양자강(揚子江)과 회수(淮水) 지방으로 옮겨가서 결국에는 국가가 전복되었으니, 불타고 남은 흔적을 다시는 찾을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수천 년 동안 아직도 우리나라의 옛 국경을 수복하지 못하였습니다. 국가가 부흥하고 멸망하며 번성하고 쇠퇴하던 시기와 병탄(倂呑)하고 분열(分裂)되었던 자취가 모두 이 한 폭의 지도에 기재되어 있으니, 또한 국가를 소유한 자가 서글피 탄식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척연히 두려움을 생각하게 하는 도구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고전번역서 > 홍재전서 > 홍재전서 제24권 > 제문 > 최종정보

홍재전서 제24권 / 제문(祭文) 6

고려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 충절공(忠節公) 유검필(庾黔弼), 무공공(武恭公) 복지겸(卜智謙), 무열공(武烈公) 배현경(裵玄慶)의 철상을 모신 평산부(平山府) 태백산성(太白山城)의 사당에 편액을 내릴 때 치제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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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히 고려가 시작할 때를 생각하니 / 緬惟麗肇
당시에 세 호걸이 있었네 / 厥有三傑
성대한 원훈을 / 翼翼元勳
누가 장절공과 비길 것인가 / 孰與壯節
공산의 들판에서 / 公山之野
동수에 피가 범람했으니 / 桐藪漂血
초한(楚漢)의 격전지인 경색 형양에서 / 京索滎陽
기신(紀信)이 불타 죽은 충렬이었네 / 紀焚之烈
도통(都統) 유검필은 / 曰庾都統
골암진(鶻巖鎭)에서 무용을 떨쳤고 / 虎奮于鶻
호남을 경영함에 / 經之湖南
모발이 다 빠지도록 힘썼으며 / 種種者髮
탕정에 꿈이 있어 / 湯井有夢
침범한 도적을 잡아 베었네 / 逋寇是剟
아, 무공공 복지겸은 / 猗卜武公
맹약의 으뜸으로서 / 盟維第一
기미를 밝게 알아 / 爰炳其幾
환선길(桓宣吉)의 역모를 고하여 / 蠢玆宣吉
삼중대광을 받으니 / 三重大匡
또한 그 질직이 높은 것이었네 / 亦峻乃秩
태사 배현경은 / 若裵太師
유의에서 노력하여 / 帷扆密勿
높은 태봉(泰封)의 성에서 / 頟頟泰城
한밤중에 병기를 들고 일어나니 / 中夜以抉
일기의 장수로서 / 一騎之帥
문득 모월을 잡았네 / 居然旄鉞
엄숙하고 맑은 유상은 / 肅淸遺像
쇠를 부어 만든 것인데 / 有範其鐵
고을의 남녀 백성들이 / 邑人士女
세시로 제사를 드리니 / 歲時香飶
거록을 생각하면 / 鉅鹿之思
염파(廉頗) 이목(李牧)과 같은 반열일세 / 頗牧同列
빛나는 편액을 내려서 기리고 / 賁以華扁
살진 희생으로 제사를 드리네 / 侑以肥腯
피리와 북이 사당의 뜰에 있으니 / 簫鼓在庭
성륜이 서로 끌어당기네 / 星輪交掣
우리 민사에 복을 내려 / 福我民社
벼 이삭이 밤처럼 크게 할지니 / 禾稼如栗
길이 보답하는 제사가 / 其永報祀
억만년의 세월 동안 이어지리라 / 維億日月

혜군(槥郡) 동사강목 제5상 병오 신라 혜공왕(惠恭王) 2년부터, 을미 신라 경순왕(敬順王) 9년까지 170년간

계축년 진성 여주 7년(당 소종 경복 2, 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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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에 조공가던 사신 김처회(金處誨)가 바다에 익사하였다.

병부 시랑 김처회를 보내 당에 가서 선왕의 정절(旌節)을 헌납하게 하였는데, 바다에 익사하였으므로 다시 혜성군(橻城郡) 혜(橻)는 아마 혜(槥)인 듯하며 지금의 면천(沔川)이다 태수 김준(金峻)을 고주사(告奏使)로 삼았다.

이때 최치원이 부성군(富城郡) 지금의 서산(瑞山) 태수로 있었는데, 불러서 하정사(賀正使)로 삼았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흉년이 들고 도적이 잇달아 일어나 길이 막혀 가지 못하였다. 그 후 최치원이 다시 사신이 되어 당에 갔으나 당의 주현에서 공급(供給)이 계속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당의 재상 태사시중(太師侍中)에게 서장을 올렸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동해 밖에 세 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은 마한ㆍ변한ㆍ진한으로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요, 진한은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하였을 때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吳)와 월(越)을 침략하고 북으로는 유주(幽州)ㆍ연주(燕州)와 제(齊)ㆍ노(魯)를 난요(亂撓)하여 중국의 큰 해독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수황(隋皇 수(隋) 양제(煬帝))이 나라를 잃게 된 것도 요동(遼東)을 정벌한 때문입니다.

정관(貞觀 당 태종의 연호) 연간에 태종(太宗)이 친히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천벌(天罰)을 행하고서야 고구려가 위엄을 두려워하여 화친을 청하고, 문황(文皇 당 태종)이 항복을 받고서 군사를 돌렸습니다. 이때에 우리 무열왕이 정성으로써 일방(一方)의 난을 평정하는 데 도우려고 하여 당에 건너가 조알(朝謁)했는데, 신라의 조알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고구려와 백제가 종전대로 악한 짓을 하므로 무열왕이 일곱 번 조알하여 향도(嚮導)되기를 청하니, 고종(高宗) 현경(顯慶) 5년(660)에 소정방(蘇定方)에게 신칙하여 10도(道)의 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크게 깨뜨렸으며, 그 땅에 부여도독부(扶餘都督府)를 설치하고, 백제의 유민(遺民)을 불러 모아서 한관(漢官)으로써 다스리게 하였으나, 그 풍습이 같지 않기 때문에 여러 번 이반(離叛)하므로 드디어 그 인민을 하남(河南)으로 옮겨 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총장(摠章 당 고종의 연호) 원년(668)에는 영공(英公) 서적(徐勣 이적(李勣)의 본성이 서씨(徐氏)이다)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깨뜨리고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를 설치하고 의봉(儀鳳 당 고종의 연호) 3년(678)에 이르러 그 인민을 하남 농우(隴右)로 옮겨 살게 하였습니다.

고구려의 남은 유민들은 북으로 태백산(太白山) 아래 의거하여 나라 이름을 발해(渤海)라 하고, 개원(開元 당 현종의 연호) 20년(732)에는 당나라에 원한을 품고 군사를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엄습하여 자사 위준(韋俊)을 죽였습니다. 이에 명황제(明皇帝 당 현종)가 크게 노하여 내사(內史) 고품(高品)ㆍ하행성(何行成)과 대복경(大僕卿) 김사란(金思蘭)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바다를 건너가 그들을 토벌하게 하고, 우리 나라 임금 김모(金某 성덕왕(聖德王))를 계림대도독(鷄林大都督)으로 삼아 발해를 치게 하였으나 이때는 겨울이라 눈이 깊이 쌓여 번국(藩國)과 한인(漢人)이 모두 추위에 고생하므로 칙명을 내려 회군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지금에 이르는 3백여 년 동안 일방이 무사하고 창해(滄海)가 편안하여졌으니, 이는 곧 우리 무열왕의 공입니다.

이제 모(某)는 유문(儒門)의 말학(末學)이요 해외의 범재(凡材)로서 외람되게 표장(表章)을 받들고 낙토(樂土)에 내조하였으니, 예의상 마땅히 마음속에 있는 바를 다 터놓고 말하여야 할 것입니다. 삼가 보옵건대 원화(元和 당 헌종의 연호) 12년(817)에 본국의 왕자 김장렴(金張廉)이 풍랑을 만나 명주(明州)에 이르렀고, 중화(中和 당 희종의 연호) 2년(882)에 입조사(入朝使) 김직량(金直諒)이 초주(楚州)에서 하륙하였는데, 모두 주현의 호송을 받아 서울 장안(長安)에 들어온 전례가 분명히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특별히 수륙(水陸)의 여권(旅券)을 주시어 가는 곳마다 주선(舟船)과 음식, 그 여마(驢馬)와 초료(草料)를 공급하게 하고 아울러 군사와 장수를 차견하여 감송(監送)해서 가전(駕前)에 이르게 하여 주시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최치원의 문집에서 보충

임하필기 제13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연해(沿海)의 정관(亭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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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혜군(櫘郡) 가리저(加里渚)의 동쪽에 수군창(水軍倉)을 두었는데 혜군은 지금의 면천(沔川)이다. 그 뒤 신라가 백제를 평정한 뒤에 다시 혜산(櫘山)의 동쪽에 창고를 두고 그 이름을 숙관(稤館)이라 하였는데 당(唐)나라의 사개(使价)와 상고(商賈)들이 모두 이 관(館)에 들었으며 신라인들이 당나라에 조공할 때도 이곳을 통해서 하였다. 풍천(豐川) 초도(椒島)의 광석산(廣石山) 밑에 당관(唐館)의 옛터가 남아 있는데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중국의 사신들이 바다를 건너서 왕래하던 곳이라고 한다.

고려 때에는 송(宋)나라의 서울이 변경(汴京)에 있었기 때문에 사행(使行)들이 등주(登州)로 가서 뭍으로 올랐다. 그래서 황제가 등주에 조칙을 내려서 관을 두고 이들을 접대하도록 하였다. 보령현(保寧縣) 서쪽에 있는 고밀도(高密島)의 관은 중국의 사행(使行)들이 왕래하던 정관(亭館)이며, 송나라 흠종(欽宗)이 등극하였을 때 김부식(金富軾)이 하사(賀使)가 되어서 배를 탔던 곳에 모두 정관들이 있었는데 등주의 여러 곳들이 바로 이것이다. 해미(海美)의 안흥정(安興亭)과 홍주(洪州)의 잉분도(芿盆島), 인천 자연도(紫燕島)의 조천대(朝天臺), 송도(松都)의 벽란정(碧瀾亭) 등이 모두 옛날에 중국으로 사신을 떠나던 장소들이며, 대식(大食), 섬라(暹羅) 등 여러 나라들이 이곳을 통해서 방물(方物)을 바쳤다.

원(元)나라 때는 제주(濟州)에 총관부(摠管府)를 설치하고 장사성(張士誠), 방국진(方國珍) 등이 해마다 고려에 사신을 보내왔는데 이들이 모두 제주를 경유하였다. 유구(琉球)의 사신이 순천(順天)에 와서 정박함에 우리나라에서도 그에 대한 답례를 하였는데, 이때는 제주의 오른쪽 바다를 지나서 통행하였다.

택당선생집 제3권 / 시(詩)

전운(前韻)을 써서 종제(宗弟)인 중목(仲木) 침(梣) 에게 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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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택과 홍양 구석 각자 처박힌 몸 / 滄澤洪陽各一隅
백발에 건몰하면 비부 될까 부끄럽네 / 白頭乾沒愧非夫
장생의 구중단은 쓸데없는 소리요 / 莊生謾說溝中斷
어부는 택반고를 괜히 슬퍼하였도다 / 漁父空憐澤畔枯
지금 세상 호사자(好事者)가 어찌 다시 있으리요 / 好事至今寧復有
그대 덕에 새로운 시 한 편 지어 보네그려 / 新詩賴汝未能無
겨울 바람에 날마다 일어나는 고향 생각 / 冬飈日日吹歸思
한수 따라 서남쪽 면천(沔川) 못으로 내려가네 / 漢水西南下沔湖

[-D001] 백발에 …… 부끄럽네 :

만년(晚年)에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며 절조를 지키겠다는 뜻이다. 건몰(乾沒)은 영리(榮利)에 탐욕을 부리는 것을 말하고, 비부(非夫)는 대장부가 못되는 것을 말한다.

[-D002] 장생의 …… 슬퍼하였도다 :

조정에서 쫓겨나 시골에 묻혀 사는 것을 슬퍼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구중단(溝中斷)은 제기(祭器)를 깎으면서 생긴 나무 부스러기가 도랑 속에 버려진다는 말로 《장자(莊子)》 천지(天地)에 나오는 비유이고, 택반고(澤畔枯)는 초(楚) 나라 굴원(屈原)을 가리키는 말로 그의 ‘어부사(漁父辭)’에 “굴원이 조정에서 쫓겨나 택반(澤畔)에서 행음(行吟)할 적에 그 모습이 마른 나무등걸처럼 되었는데[形容枯槁], 이때 어부가 그를 알아보고는 탄식하였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D003] 호사자(好事者) :

술병을 들고 찾아와서 글을 묻는 사람들을 말한다. 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좋아하는 술도 못 먹을 정도로 집이 가난하였는데, 인적이 드문 그 집에 이따금씩 호사자가 술과 안주를 들고 찾아와 글을 배웠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87 下 揚雄傳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