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금(鄭錦)은 해도(海島)에 있는데, 호서(湖西) 지방과 아주 가까웠다

2022. 10. 28. 16:45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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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1년 을묘(1675) 6월 3일(경신)

01-06-03[03] 대마도 태수 평의진이 보내 중국에서 오삼계ㆍ정금이 반란한 사실을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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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태수(對馬島太守) 평의진(平義眞)의 서신이 왔다. 그 편지의 겉봉[皮封]에 큰 글씨로 두 줄을 쓰기를 ‘화융(華戎)의 병사(兵事)와 인양(隣壤)의 안부(安否)를 물으려고 예부 대인(禮部大人)에게 올립니다.’ 하였다. 그 편지의 대략(大略)에 말하기를,

“명(明)나라 옛 신하 오삼계(吳三桂)가 선제(先帝)의 어린 아들을 도와서 외로운 황자(皇子)를 세워 명나라를 회복할 계책을 오랫동안 품고서 차자(箚子)를 여러 곳에 나누어 보내 훌륭한 장수를 모집하고 절의(節義)를 짚고 정의의 군사를 일으켜서 바야흐로 창업(創業)과 수성(守成)의 공(功)을 세우고자 하여 지금 이미 남경(南京)과 북경(北京)의 두 서울을 도모했다 합니다. 〈대마도는〉 하늘과 땅을 달리하고 있어서 전투(戰鬪)의 어지러운 정상(情狀)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귀국(貴國)은 국토가 말갈(靺鞨)과 가깝고 길이 중원(中原)과 통하고 있으므로, 전란의 여파(餘波)가 〈귀국의〉 변방에는 미치지 아니하였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그가 동래(東萊)와 부산(釜山)에 보낸 서신도 대략 같았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어진익(魚震翼)이 이를 임금에게 아뢰어 왔으므로, 비변사(備邊司)에 내렸다. 오삼계(吳三桂)는 명조(明朝)에 대장(大將)이 되어 산해관(山海關)을 지키고 있을 때 이자성(李自成)이 북경(北京)을 함락하였다. 이에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고 청(淸)나라 군사를 끌어들여서 이자성(李自成)을 쳐서 달아나게 하니, 중원(中原)이 드디어 청(淸)나라 사람의 소유(所有)가 되었다. 이에 청(淸)나라에서 오삼계를 봉(封)하여 평서왕(平西王)으로 삼았다. 오삼계는 마음속에 〈명나라를〉 회복할 뜻을 품고 남모르게 천하(天下)의 날래고 건장한 자를 기르면서 형초(荊楚)의 기재(奇材)들을 불러 들였다. 이에 청나라 사람이 의심하여 오삼계를 운남왕(雲南王)으로 옮겨 봉하였다. 오삼계는 드디어 군사를 일으키고 격서(檄書)를 천하(天下)에 전하였으며, 숭정 황제(崇禎皇帝)의 셋째 아들을 세워 황제를 삼아서 갑인년 1월 1일에 운남(雲南)에서 즉위(卽位)하였으며 연호(年號)를 ‘광덕(廣德)’이라 하였다. 이에 오삼계를 흥명토로 대장군 정남왕(興明討虜大將軍靖南王)으로, 경정충(耿精忠)을 정남왕(定南王)으로 삼으니, 공유덕(孔有德)의 사위[女婿] 손연령(孫延齡) 등이 이에 호응하여 의(義)를 부르짖었고, 정금(鄭錦)도 또한 군사를 연합하여 함께 진군(進軍)하였다. 또 황극 달자(皇極㺚子)와도 서로 통하였다. 이에 장군(將軍) 마이두(馬爾頭) 등으로 하여금 여러 번 청나라 군사를 격파하여 호남(湖南)과 섬서(陝西)의 땅을 다 탈취하였다. 오삼계는 획책()한 옛 장수로서 지혜와 용맹이 있었다. 이에 명(明)나라가 멸망한 지 30여 년 만에 주씨(朱氏)를 받들어 다시 일어났으니, 이는 대개 하(夏)나라 신하 미(靡)와 서로 비슷하고, 궁인(宮人)ㆍ태감(太監)과 더불어 〈황족의〉 한 핏덩이를 숨겨 보전한 것은 〈진(晉)나라의〉 정영(程嬰)과도 서로 비슷하며, 궁려(穹廬)에 무릎을 꿇었다가 마침내는 큰 욕(辱)을 참으면서 쌓은 뜻을 분발(奮發)한 것은 〈한(漢)나라의〉 이능(李陵)도 일찍이 하려다가 못했던 것이었다. 처음에 오삼계가 운남왕(雲南王)으로 봉함을 받아 부임할 적에 고(故) 상신(相臣) 정태화(鄭太和)가 마침 연(燕)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의 융성한 위의(威儀)가 마치 한 천자(天子)와 같음을 보았다. 그렇지만 오삼계의 얼굴에는 근심하는 빛이 있었다. 정태화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오삼계는 마침내는 오랑캐의 신하[虜臣]가 될 자는 아니다.’ 하였다. 정금(鄭錦)에 대하여는 혹은 정지룡(鄭之龍)의 손자라 말하고 혹은 우리 나라 사람이라고 말한다. 정금(鄭錦)은 해도(海島)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우리 나라의 호서(湖西) 지방과 아주 가까웠다. 계축년 사이에 사기(砂器)를 파는 자가 배를 부평(富平)에 정박(淀舶)하여 놓고는 다만 갈모[笠帽] 등의 물건만 사 가지고 갔었다. 고(故) 상신(相臣) 이완(李浣)이 수군[舟師]을 거느리고 서해(西海)로 나갔을 때에 우연히 절강(浙江)의 그림을 그린 그릇을 보았다. 그 그릇을 보고 놀래면서 말하기를, ‘이는 절강(浙江)에서 만든 것이다. 어찌하여 여기에 왔는가?’ 하고 체포하려 하였으나 체포하지 못하였다. 그 뒤에 사신(使臣)이 돌아와 말하기를, ‘정금(鄭錦)이 오랑캐[胡]와 더불어 싸울 적에 온 군사가 갈모로써 우리 나라 사람의 복색(服色)을 본받아 차렸기 때문에 청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의심하더라.’ 하였다. 그 때야 비로소 사기(砂器)와 바꾸어 간 이유를 알았다. 갑인년 10월에 해서(海西) 지방으로부터 와언(訛言)이 있기를 ‘경외(京外)가 크게 시끄러웠다.’ 하였고, 혹은 말하기를 ‘이는 괜히 놀란 것이 아니라 정금이 이끄는 수군[舟師]이 해상에서 등주(登州)와 내주(萊州)로 향하였다고 바닷가의 사람들이 서로 전파하여 이 말이 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 영남(嶺南)의 인동(仁同) 약목촌(若木村)에서는 산벼랑이 떨어져 빠졌는데, 그 가운데 돌에 새긴 것이 있어 말하기를 ‘홍무(洪武) 후 310년에 산동(山東)의 마장군(馬將軍)이 군사를 이끈 패(牌)’라고 하였다. 이는 오삼계나 정금의 장수 가운데 마가(馬哥)의 성(姓)을 가진 자가 있는 것이라 하였고, 이 때문에 그들이 나올까봐 더욱 두려워하였다. 이에 윤휴(尹鑴)는 ‘일본을 매개로 하여 정금과 통해야 한다.’ 하고 묘당(廟堂)에서는 ‘왜(倭)의 서신으로 청나라에 통고해야 한다.’고 서로 다투어 결정하지 못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지난날 우리 나라의 운수가 망극(罔極)함을 당하였을 적에 우리의 꾀가 성실하지 못한 데서 나왔기 때문에 중조(中朝)의 3백 년의 은의(恩義)를 저버리고 온 천하(天下) 천만세(千萬世)의 치욕을 안고서 마침내는 저들을 돕는데 이르렀으니, 이는 마치 개나 양을 호랑이 앞에 내 준 격이라, 당세(當世)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우리 효종(孝宗)께서 영무(英武)하신 자질로 큰 뜻을 분발하셨고, 한편으로 준예(俊乂)의 인재를 모아서 밀물(密勿)의 경영(經營)을 하면서 ()나라의 쓸개를 바야흐로 달아 놓았었는데, 헌원(軒轅) 활을 문득 버렸으니 중도(中途)의 뼈아픔은 하늘과 땅처럼 한이 없었다. 때마침 천도(天道)는 적현(赤縣)의 화(禍)를 뉘우치고 인심(人心)은 주씨(朱氏)를 아직 잊지 않고 있는지라, 오삼계(吳三桂)가 운남(雲南)에서 한 번 부르짖으매 뭇 영웅들이 해내(海內)에서 함께 응하였다. 이러한 기미(幾微)를 타서 우리가 만일 군사를 이끌고 요동(遼東)을 건너가서 곧바로 〈적의〉 소혈(巢穴)을 무찔러서 왕사(王師)는 그 남쪽을 공격하고 우리의 군사는 그 서쪽을 공격하였더라면, 가히 뱀을 베고 돼지를 죽이듯이 피비린내나고 더러운 것들을 깨끗이 씻어버려서 거의 인조(仁祖)께서 남기신 부끄러움을 씻고 신종(神宗)의 지극했던 은덕을 갚아서 천하(天下)의 모든 나라들로 하여금 삼한(三韓)의 충절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음을 알게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스럽게도 그 희보(喜報)가 겨우 이르자마자 선왕(先王)께서 문득 뭇 신하들을 버리시고 주상(主上)께서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시니, 늙은 간신(奸臣)들이 나라의 일을 맡고 뭇 사특한 자들이 몰려나와서 유현(儒賢)을 마구 씹고 사류(士類)들을 물리쳐 내었으니, 어느 겨를에 생각이 국가 대계(大計)에 미치겠는가? 아! 만일 효종의 초년(初年)에 이러한 기회를 만났더라면, 반드시 충렬(忠烈)에 기대고 신위(神威)를 분발하여 금과(金戈)와 흰 깃발로 의기(義氣)를 중원(中原)에 고취(鼓吹)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선왕(先王)께서 훙(薨)하지만 않으셨더라도 또한 치밀하게 계책을 세워 때를 보아 움직였을 것이고 이처럼 앉아서 보기만 하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다. 어찌 하늘이 우리로 하여금 끝내 치욕(耻辱)을 안은 채 씻지 못하게 하는가? 아! 이 아픔 어이 견디랴?

【원전】 38 집 287 면

【분류】 외교-왜(倭) / 역사-사학(史學)

[주-D001] 말갈(靺鞨) :

만주 지방을 말함.

[주-D002] 숭정 황제(崇禎皇帝) :

숭정(崇禎)은 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

[주-D003] 갑인년 :

1674 현종 15년.

[주-D004] 획책(嚄唶) :

잔소리가 많은 모양.

[주-D005] 주씨(朱氏) :

명나라 왕실의 성씨가 주씨임.

[주-D006] 궁려(穹廬) :

청(淸)을 흉노(匈奴)에 비유함.

[주-D007] 해도(海島) :

대만(臺灣)임.

[주-D008] 계축년 :

1673 현종 14년.

[주-D009] 갑인년 :

1674 숙종 즉위년.

[주-D010] 홍무(洪武) :

명나라 태조의 연호.

[주-D011] 밀물(密勿) :

임금을 가까이 모시고 기밀의 정사에 참여하여 처리하는 것.

[주-D012] 월(越)나라의 쓸개 :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몸을 괴롭게 하고 노심 초사(勞心焦思)하여 늘 쓸개를 맛보았다는 고사(故事).

[주-D013] 헌원(軒轅)의 …… 버렸으니 :

헌원(軒轅)은 황제(黃帝)의 이름. 황제(黃帝)가 용(龍)을 타고 승천(昇天)할 때에 따라 타지 못한 소신(小臣)들이 용의 수염에 매달렸다가 수염이 뽑혀 떨어지고 황제의 활이 떨어지니, 백성이 그 활을 안고 울부짖었다는 고사(故事). 여기서는 효종의 승하를 뜻함.

[주-D014] 적현(赤縣) :

중국.

[주-D015] 주씨(朱氏) :

명나라를 가리킴.

[주-D016] 해내(海內) :

나라 안.

[주-D017] 왕사(王師) :

명나라 군사를 가리킴.

[주-D018] 삼한(三韓) :

우리 나라.